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창1:26)
AC.49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곧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과 ‘인자’(the son of man)는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이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power and great glory)은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이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가 인용한 구절들(렘4:23, 25 / 사45:11-12 / 겔1:26 / 단7:13-14 / 마24:30)을 ‘사람’과 ‘인자’의 의미, 그리고 문자 의미와 속뜻의 관계라는 큰 축 위에 올려놓고 보면, 이 글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단어 하나로 인간론, 기독론, 말씀론을 한꺼번에 관통하는 매우 높은 밀도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가 ‘주님 외에는 아무도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진술은,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 사실의 정확한 진술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서 ‘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실은 주님에게서 유입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라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고, 그래서 그것들만을 ‘사람의 것’이라 불렀습니다. 즉 ‘사람’이란 내 안에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살아 있고 움직이는 상태이며, 그 근원이신 주님이야말로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관점이 서면, 예언서와 복음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왜 그렇게 자주, 그리고 결정적인 지점마다 등장하는지 비로소 맥이 잡힙니다.
렘4:23, 25에서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나라의 황폐, 질서 붕괴, 심판의 참상을 묘사하는 예언적 언어입니다. 그러나 AC.49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단순한 인구의 멸절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 ‘사람됨’이 사라졌음을 말합니다. 사람됨은 사랑과 지혜, 곧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유입되어 마음(의지와 이해력)의 질서로 자리 잡은 상태인데, 그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의 빛이 꺼지면, 즉 이러한 사람됨이 사라지면 겉으로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말하고 일하는 것 같아도 속뜻으로는 ‘사람이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새들이 날아갔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새들은 이성적, 지적인 것, 곧 이해력의 활동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지혜와 총명이 없다는 말이며, 새가 날아갔다는 말은 이해력이 진리의 빛에서 이탈하여 더 이상 위를 향해 날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예레미야의 탄식은 단지 사회적 비극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의 ‘공허와 흑암’ 상태, 혹은 교회의 황폐 상태를 묘사하는 본문이 됩니다.
사45:11-12에서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선언은 문자 의미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입니다. 그러나 AC의 큰 흐름에서는 ‘창조하다, 만들다, 빚다’ 같은 표현이 예언서에서 자주 ‘거듭남’과 연결된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곧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말은 생물학적 인간의 탄생이 아니라, ‘참된 사람됨’의 형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단수로 말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의 원형은 하나’라는 진술로 끌어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람됨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만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그래서 최고 의미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속뜻으로 ‘사람’은 거듭남을 통해 주님의 형상을 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사야의 언어는 창조의 언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독법에서는 그 창조가 곧 새 창조, 즉 거듭남으로 번역됩니다.
겔1:26의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는, 왜 주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증거로 사용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환상 언어이며, 인간이 신적 현실을 직접 담아낼 수 없기에 ‘사람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의 표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9의 논지는 거꾸로 갑니다. 주님이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과 사람됨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형상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적 실재의 형상과 연결된 결과이며, 그 형상이 ‘보좌’와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가 힘이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질서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사람 같은 형상’이 가장 높은 자리인 보좌 위에 놓이는 것은, ‘사람됨’이 곧 신적 통치의 본질과 닿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단7:13-14의 ‘인자 같은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장 자주 사용하신 자기 호칭과 직결됩니다. AC.49는 여기서 ‘인자’가 사실상 ‘사람’과 같은 말이라는 점을 전면에 세웁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인자’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그 통치가 영원하다고 말할 때, 속뜻은 ‘한 인간 지도자가 영원한 제국을 세운다’가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으로서, 곧 사랑과 지혜의 결합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선언입니다. 또 ‘구름을 타고 온다’는 표현은 후에 마24:30과 연결되며, ‘구름’이 말씀의 문자 의미를 뜻한다는 해석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 안에서 ‘사람’, 곧 인자로 인식되십니다. 그래서 인자 환상은 종말론적 장면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주님이 어떻게 드러나시는가에 대한 근본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마24:30의 ‘인자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는 구절도, AC.49에서는 단순한 미래 사건의 예언으로 좁혀지지 않습니다. ‘구름’은 문자, ‘능력과 큰 영광’은 속뜻이라는 해석이 들어오면, 이 말씀은 곧 ‘문자 의미가 매개가 되어 속뜻이 열릴 때, 주님이 인자로 오신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단지 시간 속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속뜻이 열리기 전에는 사람들은 문자 속에 가려진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이 ‘사람’이심도 흐릿하게만 압니다. 그러나 속뜻이 열리면, 그 속뜻이 가리키는 바가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거기서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즉 속뜻의 능력은 정보량이나 지적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연결되는 데서 나옵니다.
이 모든 인용 구절이 합쳐져 AC.49가 세우는 결론은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합니다. 주님은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안에서 퍼셉션하고, 그것에 따라 살 때에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에서 ‘사람이 없다’는 말은 단지 인구의 부재가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부재이며, ‘사람을 창조한다’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탄생이 아니라 거듭남에 의한 새 창조입니다. 또 주님이 ‘사람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인간의 형상이 신적 인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인자’의 구름-영광 언어는 말씀의 문자와 속뜻이 어떻게 연결되어 주님의 임재를 드러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49는 창세기 1장의 ‘사람 창조’를 읽는 열쇠이자, 예수님이 왜 자신을 ‘인자’라 부르셨는지, 그리고 왜 말씀의 속뜻이 ‘능력과 영광’이라 불리는지에 대한 핵심 답변을 한 덩어리 안에 담고 있는 글입니다.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 AC.49 본문 중,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에 나오는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가 무척 궁금합니다. 이 간단해 보이는 기술(記述) 안에 무엇이 들어있길래 ‘드릴 말씀이 많지만’이라 하였으며, 그런데 왜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한 것일까요?
이 한 문장은 정말 짧지만,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의 깊은 층을 살짝 열어 보이는 ‘힌트’ 같은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드릴 말씀이 많지만’은 태고교회의 사람들과 주님 사이의 직접적 교통, 곧 퍼셉션과 가시적 현현에 대한 매우 깊은 실제 내용들이 있기 때문이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것은 그것을 지금의 독자 상태로는 오해하거나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먼저 ‘드릴 말씀이 많지만’에 담긴 내용을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들에서 조금씩 흘려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지금 우리처럼 말씀을 ‘배워서’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perception)으로 아는 사람들’이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외부에서 배우지 않고, ‘내면에서 바로 느끼고 분별하는 상태’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AC.49가 암시하는 것은 단순한 내적 지각을 넘어서, ‘주님이 실제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들과 교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영계에서 실제로 경험한 사실’입니다. 즉,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의 교통이 지금보다 훨씬 직접적이어서, 어떤 경우에는 ‘영적 눈으로 주님의 현현을 인식하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표현의 배경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실제로 스베덴보리가 다른 저작들에서, 천사들과의 대화, 영계에서의 주님의 현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드릴 말씀이 많다’는 것은,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관계가 지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했을까요?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독자의 상태 문제’입니다. AC를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적 인간’의 단계, 즉 양심과 진리를 통해 인도받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는 그보다 훨씬 위의 ‘천적 인간’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충분한 준비 없이 설명하면,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상태로 착각하거나, 혹은 신비주의적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도 직접 주님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큰 혼란을 가져옵니다.
둘째는 ‘섭리적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은 각 시대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지금 시대는 태고교회처럼 직접적 현현과 퍼셉션으로 인도받는 시대가 아니라, ‘말씀과 진리를 통해, 그리고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인도받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너무 앞선 상태를 상세히 드러내는 것은, 현재 주어진 길, 곧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옮기는 길을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이 주제는 매우 깊고 실제적인 내용이 있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 것이 적절하다.’ 즉, 숨기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말씀을 통해 배우고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입니다.’ 이 정도로 설명하시면, 성도들이 괜히 신비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면서도, 이 구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것은, 태고교회의 직접적 주님 교통에 관한 깊은 실제들이 있으나, 그것을 지금 단계에서 자세히 밝히는 것은 오해와 혼란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섭리적으로 유보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AC 전체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 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들이 나중에 다른 글들에서 조금씩 풀려나오는 것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2. ‘렘4:23, 25’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 구절은 겉으로 보면 단순히 폐허와 심판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AC.49의 문맥에서는 ‘거듭남 이전, 혹은 교회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 곧 ‘내면의 빛이 꺼진 상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렘4:23, 25의 ‘혼돈, 공허, 빛 없음, 사람 없음, 새가 날아감’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 그리고 그 작용들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단계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먼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입니다. 여기서 ‘땅’(earth)은 앞서 계속 보신 것처럼 ‘사람, 혹은 그의 삶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는 창세기 1장의 첫 상태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 선과 진리가 전혀 자리 잡지 못한 상태’로 봅니다. 즉, 단순히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정돈되지 않은 상태’, 혹은 다시 무너져 그 상태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그다음 ‘하늘에 빛이 없다’입니다. ‘하늘’(heavens)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 ‘빛’(light)은 ‘진리의 인식과 이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람 안의 내적 영역에서 더 이상 진리가 비추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분별할 빛이 완전히 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문제보다, ‘내적 빛이 꺼지는 것이 더 근본적인 붕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이 없으며’가 나옵니다. 여기서 ‘사람’(man, homo)은 단순한 인간 존재가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진리와 선이 결합된 상태, 곧 ‘참된 인간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물리적으로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더 이상 ‘사람다운 상태’, 곧 진리와 선의 결합이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겉으로는 사람처럼 살아도, 영적으로는 ‘사람이 아닌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입니다. ‘새’(birds)는 앞서 계속 보셨듯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 곧 생각과 이해의 작용’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새들이 ‘날아갔다’는 것은, 단순히 약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즉, 더 이상 진리를 생각하거나 분별하는 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진리를 생각하려는 힘 자체가 떠난 상태’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삶의 자리(땅)가 무너지고 → 내적 빛이 꺼지고 → 참된 인간 상태가 사라지고 → 생각과 분별의 기능까지 떠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황폐’, 곧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vastation’(황폐)의 상태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진리를 알고, 양심도 있고, 선을 행하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사로잡히면서, 진리를 무시하고, 양심을 거스르고, 결국에는 무엇이 옳은지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는, ‘옳고 그름 자체가 의미 없게 느껴지고’, 마음도 굳어지고, 생각도 흐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말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왜 이런 구절이 AC.49에 등장하느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무서운 상태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이 태고교회와 같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됩니다. 인간이 이처럼 내적으로 어두워진 상태에서는, 설령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도 그것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방식, 곧 말씀과 진리를 통한 인도라는 방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위험한 상태는 고통받는 때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더 이상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상태입니다.’
‘렘4:23, 25는 사람 안에서 진리의 빛과 선의 상태,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기능까지 모두 사라진 ‘영적 황폐’의 상태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3. ‘사45:11-12’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이 구절은 AC.49의 문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앞서 보신 렘4의 ‘황폐 상태’와 대비되면서, ‘주님이 어떻게 사람 안에 다시 질서를 세우시는가, 곧 ‘창조와 재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45:11-12는 사람 안의 속 사람(하늘)과 겉 사람(땅), 그리고 그 위의 ‘사람’(참된 인간 상태)까지 모두 주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선언하는 말씀이며, 따라서 거듭남은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라는 것을 밝히는 구절’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계속 보신 것처럼 ‘진리 안에 있는 사람, 혹은 교회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지으신 이’(former)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처음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 안에 질서를 세우고 형상을 갖추게 하는 분’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단순한 창조자가 아니라, ‘지금도 사람을 계속 ‘형성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제 핵심 선언이 나옵니다.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 여기서 ‘땅’(earth)은 ‘겉 사람, 외적인 삶의 자리’이고, 그 위에 ‘사람’(man)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겉 사람이라는 기반 위에, 비로소 ‘참된 인간 상태, 즉 진리와 선이 결합된 상태’가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보신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과정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다음 ‘내가 하늘을 펴고, 그 모든 군대를 명령하였다’입니다. ‘하늘’(heavens)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 그리고 ‘하늘의 군대’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진리와 선, 혹은 생각과 애정의 질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우주 창조가 아니라, ‘사람 안의 내적 구조 전체, 즉 생각, 이해, 애정, 질서를 주님이 배열하고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의 겉 사람(삶의 자리)을 마련하시고, 그 위에 참된 인간 상태를 창조하시며, 동시에 속 사람(내면의 하늘)을 펼쳐 그 안의 모든 질서를 다스리신다.’ 즉, 위와 아래, 안과 밖, 시작과 완성까지 ‘전부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앞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묻고,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이것은 일종의 책망입니다. 즉,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곧 ‘거듭남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사람을 새롭게 하는 일은 너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사람은 협력하고 응답할 수는 있지만, ‘창조와 형성의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애쓰고, 결단합니다. 이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깨닫게 됩니다. ‘이 변화는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바로 그 깨달음이 이 구절이 말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변화되기 위해 애쓰지만, 실제로 우리를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45:11-12는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질서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선언하며, 거듭남이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임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4. ‘겔1: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이 구절은 AC.49의 그 문장, 곧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를 성경적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겉으로는 환상 장면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이것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이 인간적 형상 안에서 나타나는 방식’을 보여 주는 핵심 증거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겔1:26의 ‘보좌 위 사람의 모양’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사람의 형상’(Divine Human)으로 계시며, 인간은 그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거듭남은 그 형상으로 다시 회복되는 과정임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구조를 보겠습니다. ‘궁창 위에 보좌’가 있습니다. 여기서 ‘궁창’(expanse)은 앞에서 보셨듯이 ‘구별과 질서가 이루어진 영역’, 즉 진리의 질서가 펼쳐진 상태를 뜻합니다. 그 위에 ‘보좌’(throne)가 있다는 것은, 그 질서 위에서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보좌는 언제나 통치와 주권의 상징입니다.
그다음 ‘남보석 같은 모양’이 나옵니다. ‘남보석’(sapphire)은 말씀에서 ‘맑고 투명한 진리의 빛’, 특히 하늘적 차원의 빛을 상징합니다. 즉, 이 통치는 어둡거나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의 빛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치’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다스림은 사랑과 함께하는 ‘밝은 이해와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핵심입니다. ‘그 보좌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추상적 힘이나 형체 없는 존재로 나타나지 않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인간적 형상(Divine Human)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근거를 가진 표현’이 됩니다.
이 점이 AC.49와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은, 어떤 임시적인 환상이 아니라, ‘주님의 본질적 나타나심의 방식’입니다. 즉, 주님은 본래 그렇게 나타나실 수 있는 분이며, 태고교회는 그만큼 ‘내적으로 열려 있어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이걸 거듭남과 연결하면 더 깊어집니다. 사람은 거듭남을 통해 점점 ‘주님의 형상에 가까워지는 존재’입니다. 즉, 단순히 도덕적으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 사랑과 진리가 주님의 질서와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하나님이 이렇게 보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궁극적으로 무엇으로 회복되는가’를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중심으로 살다가, 점점 주님의 진리와 선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생각은 더 밝아지고, 그의 마음은 더 부드러워지고, 그의 삶은 더 질서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사람다워집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가장 완전한 질서와 생명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닮아 가야 할 ‘참된 인간의 모습’으로 계신 분입니다.’
‘겔1:26의 ‘보좌 위 사람의 모양’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인간적 형상으로 계시며, 인간은 그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거듭남은 그 형상으로 회복되는 과정임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하나 짚어 가시는 이 인용 구절들이, 결국 한 방향, 곧 ‘주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으로 모이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또렷해지실 것입니다.
5. ‘단7:13-14’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이 구절은 AC.49의 맥락에서 매우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신 겔1:26의 ‘사람의 모양’이 하나의 암시였다면, 이 단7:13-14는 그것을 더 분명하게, 그리고 ‘역사와 구원의 중심으로 확정해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단7:13-14의 ‘인자 같은 이’는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셔서 모든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주님’이 되셨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AC.49에서 말하는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는 진리를 한층 더 분명히 합니다.
먼저 ‘인자 같은 이’(one like the son of man)를 보겠습니다. ‘인자’는 단순히 인간을 뜻하는 표현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특별히 ‘진리를 나타내시는 주님, 곧 말씀으로 오신 주님’을 가리킵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이 여기서 ‘인자’라는 이름으로 더 구체화됩니다.
이제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는 표현입니다. 말씀에서 ‘구름’(clouds)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 곧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외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이 어떤 추상적 방식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그리고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다음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간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겉으로 보면 두 인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두 하나님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신성 자체(아버지)와, 그 신성이 인성 안에서 나타난 것(아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즉, 분리된 둘이 아니라, ‘내적과 외적, 보이지 않는 신성과 보이는 형상 사이의 결합 과정’입니다.
이제 핵심 결과가 나옵니다.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모든 민족이 그를 섬긴다.’ 여기서 ‘권세’는 ‘다스림의 힘’, ‘영광’은 ‘신적 진리의 빛’, ‘나라’는 ‘그 진리와 선이 작용하는 영역, 곧 교회와 천국’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단순히 나타나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확립되십니다.’
특히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언어가 그를 섬긴다’는 표현은, 이것이 특정 민족이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과 모든 상태를 포함하는 보편적 통치’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권세, 멸망하지 않는 나라’는,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주님의 통치’임을 강조합니다.
이제 AC.49와 연결해 보겠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사람들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7의 말씀은, 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이 단순한 현현이 아니라, ‘모든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주님,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아는 그분’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성육신과 주님의 통치에 대한 예언적 선언’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고, 말씀하시고, 따라갈 수 있도록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따를 수 있도록 사람으로 오신 주님이시며, 그분이 지금도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단7:13-14의 ‘인자 같은 이’는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영원한 주님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6. ‘마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이 구절은 단7의 ‘인자’가 누구이며 어떻게 오시는지를 더 분명히 풀어 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눈에 보이는 재림 사건’으로만 이해하는데, AC.49의 흐름에서는 이것이 ‘말씀과 진리를 통해 주님이 나타나시는 방식’을 가리키는 핵심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마24:30의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물리적 하늘에서의 등장이라기보다, 말씀의 문자(구름)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신적 진리(영광)가 드러나며, 주님이 인식되는 사건, 곧 영적 의미에서의 ‘오심’을 뜻합니다.’
먼저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인다’입니다. 여기서 ‘징조’(sign)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무언가가 드러났음을 알리는 표지’, 특히 ‘주님의 임재가 인식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하늘’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속 사람, 혹은 교회의 내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이 징조는 바깥 하늘에서 번쩍이는 어떤 현상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인식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다음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한다’고 합니다. ‘땅’은 ‘겉 사람, 외적 삶의 영역’, ‘족속’(tribes)은 그 안에 있는 ‘여러 종류의 선과 진리, 혹은 그 상태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통곡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자기 상태가 드러날 때 오는 고통과 깨달음’입니다. 즉, 주님의 빛이 비출 때, 지금까지 의지하던 것이 진리가 아니었음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내적 충격과 슬픔’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이제 핵심 표현입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온다.’ 여기서 ‘구름’(clouds)은 앞에서도 보셨듯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 즉 우리가 읽고 접하는 성경의 외적 형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영광’(glory)은 그 안에 담긴 ‘내적 의미, 신적 진리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의 문자 안에서 오시지만, 그 안에 숨겨진 영광, 곧 내적 의미가 드러날 때, 비로소 참되게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능력’(power)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힘이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즉, 이 ‘오심’은 단순히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과 삶을 실제로 뒤흔들고 새롭게 하는 작용’입니다.
이제 AC.49와 연결하면 전체가 또렷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서는 그렇게 나타나시지 않고,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릴 때’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구름’(문자)과 ‘영광’(내적 의미)이 함께 나옵니다. 즉, ‘보이는 방식은 다르지만, 동일한 주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글자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안의 뜻이 열리면서, ‘아, 이 말씀이 나를 향한 말씀이었구나’, ‘이게 주님의 뜻이구나’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성경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라는 표현을 빌린 말씀의 겉 글자를 통해 주님을 새롭게 깨닫는 순간에도 이루어집니다.’
‘마24:30의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신적 진리가 드러나며, 사람들이 주님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영적 오심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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