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 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AC.49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감당할  없기 때문’,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 ‘섭리적으로 감추어 두셨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 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그것을 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 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직후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람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 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적 눈으로 보았다’, ‘내적 시야가 열렸다와 같은 세부를 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 얼굴과 얼굴 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주제에는  말할 것이 많이 있지만, 지금  자리에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겠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 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고, 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이라고 했습니다. 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  글이 말하는 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 그 경계를 존중하면서 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 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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