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6:26; 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6:26의 제사장 축복과 시4:6의 기도에는 공통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 안에 한 걸음 더 깊은 속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얼굴을 드심’이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뜻할까요? 그 열쇠는 먼저 말씀에서 ‘얼굴’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상징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마음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면 얼굴이 달라지고, 기뻐하면 밝아지며, 슬퍼하면 어두워지고, 분노하면 또 다른 모습이 됩니다. 특히 태고시대의 사람들은 내면과 얼굴이 완전히 일치하여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과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얼굴’은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존재의 내적인 상태를 표상하기에 매우 적합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얼굴’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면,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내적인 것, 곧 신적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간단하게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가장 내적인 것은 인간처럼 여러 감정이 서로 교대하는 상태가 아니라 변함없는 신적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이 인간을 향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을 향하여 흘러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민6:26의 의미가 깊어집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인간에게 사랑을 주시고, 그 사랑이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AC.358은 ‘주님께서  얼굴을 사람에게 드시는 것은 자비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353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AC.352에서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AC.353에서는 ‘기름’이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하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8에서는 그 사랑이 인간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자비가 나오고, 그 자비를 인간이 받아들일 때 인간 안에 체어리티가 생기는 것입니다.

 

4:6은 여기에 ‘’이라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을 더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님의 얼굴은 단지 우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비춥니다.’ 이것은 AC.358 첫머리의 설명과 놀랍도록 잘 맞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난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서도 내적 애정이 얼굴을 통해 빛난다면,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이 비춘다는 것은 주님의 내적인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 저를 좋게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와 우리가  사랑을 받아들이고 체어리티 가운데 살게 하소서’라는 깊은 기도가 됩니다. 주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칠 때 우리도 그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그의 선을 원하며,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여기에서 ‘평강’까지 연결하면 민6:26의 구조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얼굴을 드심과 평강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사랑이 체어리티가 되어 인간의 내적 질서를 바로잡을 때 평강이 뒤따릅니다. 이 평강은 단순히 외부에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얼굴을 든다’는 표현을 자연적인 의미와 혼동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개를 들다’, ‘얼굴을 들다’라고 하면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358의 속뜻은 오히려 자기 높임과 반대입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때입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은 영적으로 얼굴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의 내면을 밝히고 그 사랑이 외적인 삶에 나타날 때 비로소 얼굴이 들립니다.

 

이제 이와 반대 방향의 표현인 렘3:12을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개역개정은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는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입니다. 직역하면 ‘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라’입니다. 바로 AC.358에서 설명하는 ‘얼굴이 들림’과 ‘얼굴이 떨어짐’의 대조가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 이유입니다.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과 ‘긍휼’, 곧 자비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얼굴을 드시는 것은 자비에서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며,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그 반대의 외관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의 얼굴은 실제로 들렸다가 떨어지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때에는 자비로운 얼굴로 인간을 바라보다가 인간이 잘못하면 노한 얼굴로 바꾸시는 것일까요? AC.358의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실제로 변하는 쪽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57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원리입니다.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되지만, 실제 분노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사랑에서 분노로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주님의 질서에 반발할 때, 그 결과가 마치 주님의 진노처럼 경험됩니다.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중단되어 얼굴이 실제로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함으로써 주님의 변함없는 자비를 다르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가 바로 그 예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얼굴을 떨어뜨리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AC.357에서 설명했듯이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자기주장을 강화하고,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에 분노하면서 가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 내적 변화가 ‘얼굴이 떨어짐’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렇게 민6:26과 창4의 가인을 나란히 놓으면 매우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주님은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시며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체어리티를 거부하고 자기 사랑으로 돌아설 때 인간 자신의 얼굴이 떨어집니다. 주님의 얼굴은 사랑과 자비로 인간을 향하지만, 인간의 얼굴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들리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시4:6의 기도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주님에게 ‘마음을 바꾸어 우리를 다시 사랑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미 끊임없이 인간을 향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얼굴, 곧 우리의 내적인 것이 주님을 향하도록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여 그 자비가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유입’과 ‘수용’의 질서도 들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사랑과 선은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비추시는 것은 신적 사랑과 자비의 유입을 나타내고, 인간의 얼굴이 들리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여 체어리티 가운데 들어가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사랑과 악을 선택하면 주님의 빛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얼굴이 들리는 삶은 결국 체어리티의 삶입니다. AC.351에서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8에서는 그 자비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주님의 얼굴이 인간에게 향합니다. 주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흘러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의 얼굴과 말과 행동과 쓰임을 통하여 이웃에게 나타납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시작된 자비가 인간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전달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얼굴’의 상응은 매우 아름다운 순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드시면 그 자비에서 인간에게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의 내적인 것이 변화하고, 그 체어리티가 다시 그의 얼굴과 삶을 통하여 빛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의 내적 상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속에 있는 사랑이 겉으로 그대로 빛났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떠나면 얼굴이 떨어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질서가 변한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경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에 반발하면서 내면이 변했고, 그 변화가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얼굴의 들림과 떨어짐은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거부하는가를 보여 주는 상응입니다.

 

따라서 민6:26의 축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축복입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단순히 일이 잘되고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비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임하고, 그 자비가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며, 그 체어리티로 인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 평강을 누리기를 바라는 축복입니다.

 

4:6의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역시 같은 깊이를 가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도록 그분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를 향하여 계시는 주님의 얼굴, 곧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내적인 것이 돌이켜져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우리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렘3:12은 바로 그 사실을 반대 방향에서 확인해 줍니다. ‘나의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긍휼이 있는 자임이라.’ 그 이유는 주님 자신이 ‘긍휼이 있는 ’, 곧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는 있어도 주님 안의 자비가 그 반대의 것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세 구절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아름다운 질서가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그분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 얼굴을 인간에게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며, 그 얼굴이 ‘비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선이 인간의 내면에 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얼굴이 ‘떨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는 주님의 자비를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시고,  자비가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며,  체어리티가 우리의 얼굴과 말과 행동과 모든 쓰임을 통하여 이웃에게 다시 빛나게 하소서.’ 이것이 AC.358이 ‘주님의 얼굴’이라는 말씀 속에서 열어 보여 주는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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