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껏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연약한 사과나무가 잘 자라도록 이슬비를 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다음에는 햇볕을, 또 적당한 바람을, 나무가 커진 뒤에는 충분한 소낙비를 구합니다. 가을이 되어 열매가 맺힐 무렵에는 서리가 알곡을 여물게 한다고 생각하여 적당한 서리까지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수도사는 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자기가 판단하여 그때그때 하나님께 요청했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서리를 맞은 사과나무가 얼어 죽어 버립니다. 수도사는 실망합니다. 자신은 사과나무가 잘되기를 바라며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하나님께 구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이 수도사가 이웃 수도원에 갔더니 그곳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놀란 수도사가 어떻게 이렇게 잘 길렀느냐고 묻자 다른 수도사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 제일 잘 아십니다.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당한 것을, 가장 적당한 양만큼 주셔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시오.’ 그는 이슬비와 햇볕과 바람과 소낙비와 서리의 시기와 양을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사과나무를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려는 핵심도 분명합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짧은 이야기는 놀랍도록 깊은 ‘신적 섭리’의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잘못은 기도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아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은 이슬비가 필요하고, 다음에는 햇볕이 필요하며, 이제는 바람이 필요하고, 이만큼 자랐으니 소낙비가 필요하고, 가을에는 서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순서대로 하나님께 그것을 요청합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인데,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계획은 이미 사람이 세워 놓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실행해 주시는 분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서도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이미 가장 좋은 결과를 정해 놓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일이 이렇게 풀려야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변해야 하며, 이 문은 열리고, 저 문제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기도가 점점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받아 내는 것’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게 되는 것’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가 아름답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과나무를 심었고 돌보았으며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다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 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 나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체념이 아닙니다. 창조주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그림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지금 보고 있는 한순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적 삶에서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평안과 성공과 문제 해결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보십니다. 우리는 ‘이 일이 잘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일이 잘되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에 유익한지를 보십니다. 우리는 오늘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영원을 보십니다. 바로 이 시야의 차이가 첫 번째 수도사와 두 번째 수도사의 차이 속에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우리가 구한 ‘햇볕’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가 내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겨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맑은 날만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도, 기다림도, 좌절도, 때로는 우리의 계획이 무너지는 경험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쓰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 자체가 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과 고통을 만들어 우리를 교육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주님께서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향하도록 끊임없이 굽혀 이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사과나무는 인간의 거듭남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상징이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도 필요하고 바람도 필요하며 계절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성장 역시 한 가지 경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위로받을 때도 있고, 시험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으며, 말씀의 진리가 밝게 이해될 때도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만 떼어 놓고 ‘이것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묻지만, 주님께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시험을 거듭남의 중요한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안에 깊이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평온할 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잘될 때에는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길이 막히며,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내 안의 proprium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의 응답보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험이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보여 주기도 합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사과나무가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나무를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 자체는 선합니다. 그러나 그 선한 목적 속에도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proprium은 노골적인 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일과 선한 일 속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위해 이것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계획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과까지 결정한 다음 주님께 그 계획을 승인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악한 욕망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안다’는 자기 지혜까지 조금씩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수도사의 태도를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섭리를 믿는 삶은 수동적인 삶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농부라면 계절을 살펴야 하고,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야 하며, 맡은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과나무를 심었다면 물도 주고 가지도 돌봐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서 ‘결과까지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섭리를 믿는다’는 말의 가장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의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실하게 판단하되 내가 알 수 없는 것까지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되 ‘반드시 이것이어야 합니다’라고 주님의 손을 묶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내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도 즉시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장면을 보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전체 이야기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 이어 요한복음 1516절, 곧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앞선 다섯 번째 ‘연못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지난 영상의 중심이 ‘주님 안에 거하라’였다면 이번 영상은 ‘그 안에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목적은 단순히 살아남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열매’는 특히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삶으로 나타나는 선, 곧 선한 행위와 쓰임에 상응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에서 진리를 많이 아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되고, 이웃을 향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따라서 ‘열매를 많이 맺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교회가 커지고, 사역의 결과가 많아진다는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 정직해지고, 더 온유해지고, 자기 욕심을 덜 따르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과나무 이야기의 마지막 열매는 단순히 ‘사과’가 아닙니다. 주님께 맡긴 삶에서 맺히는 선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맺게 하시는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나무를 심고 돌보지만,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인간이 해야 할 고백은 ‘내가 이렇게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 일을 이루셨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와도 다시 연결됩니다. 기도의 가장 깊은 목적은 세상의 조건을 내 뜻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나 자신이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슬비를 주십시오. 햇볕을 주십시오. 바람을 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서 기도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제게 무엇이 필요한지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충실히 행하게 하시며, 제가 알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기도를 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걱정, 근심,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 알아서 해주십시오’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들으면 참 편안합니다. ‘알아서 해주십시오’는 무책임의 말이 아니라 신뢰의 말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들고 염려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몫과 주님의 몫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선을 행하고, 전체의 결과는 주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어쩌면 우리의 많은 근심은 미래에 대한 지식까지 가지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저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 하며 아직 오지 않은 날의 짐까지 오늘 짊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 전체를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필요한 만큼의 빛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오늘의 한 걸음을 걷게 하십니다. 내일이 오면 내일 필요한 빛을 다시 주십니다. 이것이 섭리 아래 사는 사람의 평안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수도사의 차이는 ‘기도한 사람과 기도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아닙니다. 둘 다 기도했습니다. 차이는 ‘내가 알고 있으니 그대로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주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니 저는 제 몫을 행하며 주님께 맡깁니다’라는 기도 사이에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결과를 자기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기도이고, 후자는 결과를 주님의 지혜에 맡기는 기도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기도 역시 전자에서 후자로 조금씩 옮겨갈 것입니다.

 

이번 ‘사과나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해야 할 선을 충실히 행하면서, 내가 볼 수 없는 내일과 영원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수도사의 기도와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를 나란히 놓으면 아주 짧은 차이가 보입니다. ‘주님, 제가 보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에서 ‘주님, 주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로 바뀌는 것입니다. 말은 몇 글자밖에 달라지지 않지만 그 사이에는 proprium에서 섭리로, 자기 지혜에서 주님의 지혜로 옮겨가는 긴 거듭남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 나무를 만드신 분이 가장 잘 아신다면, 하물며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보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얼마나 더 잘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기도는 결국 주님께 무엇을 알려드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아시는 그 선한 뜻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여는 일이 되어 갑니다.

 

 

 

SY.72, 강문호 수도사, ‘수도와 연못 - 주님 안에 거하기’ (20191217)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처럼 오래된 수도사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가 충주봉쇄수도원에서 직접 겪은 아주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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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3.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 (40: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AC.34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40:11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목자’와 ‘양 떼’가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참된 목자의 원형이 바로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43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40:11에서는 주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에 안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목자직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나오며, 사람인 목자는 주님의 목자직을 섬기는 쓰임을 맡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목자가 하는 일이 네 가지 동사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모으시며’, 품에 ‘안으시고’, 연약한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목자의 역할이 단순히 무엇이 옳은지를 말해 주는 ‘가르침’에 머물지 않습니다.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합니다. 이것은 AC.343에서 말하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것’이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를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먼저 ‘양 떼를 먹이신다’는 것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양은 목자가 제공하는 먹이를 먹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적 생명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참된 목자는 자기 생각이나 자기 지혜로 사람을 먹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이 그것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AC.343의 문맥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목자를 단순히 ‘진리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국 양을 먹이는 목적은 그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삶에서 선이 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에서 살펴본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의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을 신앙에 속한 지식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신앙이 삶이 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되도록 인도합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입니다. AC.343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40:11에서는 바로 그 주님께서 어린 양들을 ‘모으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343의 마지막 원리를 눈앞에 보이는 한 장면처럼 보여 줍니다.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는 흩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으고,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결합합니다.

 

품에 안으신다’는 표현은 그 결합의 성질을 더욱 깊게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외적인 명령과 강제로 몰아붙이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십니다. 여기에는 보호와 사랑, 그리고 각자의 연약함을 헤아리시는 주님의 인도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영적 인도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태를 살피면서 선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모든 양을 똑같은 속도로 몰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양의 상태에 맞추어 인도합니다. 어린 양에게 필요한 돌봄과 새끼를 돌보는 어미에게 필요한 인도가 서로 다르듯,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수용 능력에 맞추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목자직에는 진리뿐 아니라 지혜로운 배려와 체어리티가 함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40:11은 목회에 대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목자는 양을 자기에게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모으는 사람이며, 자기 교리적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이 주님의 선으로 살아가도록 먹이는 사람입니다. 또한 연약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품고, 각자의 상태에 맞추어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권위도 궁극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의 목자직을 섬기는가’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가인과 아벨의 문맥에서 읽으면 더욱 의미가 깊어집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이며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사40:11에서는 주님 자신이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아벨의 ‘양 치는 자’라는 모습은 단순히 체어리티를 행하는 인간의 모습을 넘어, 그 체어리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길은 ‘분리’의 길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사40:11의 목자는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모으고’, ‘품고’, ‘인도합니다’. 이것은 AC.343 마지막의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하지만, 체어리티의 부재는 흩고 분리한다’는 말과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가인은 흩어지는 방향을 보여 주고, 목자이신 주님은 모으는 방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AC.343의 여러 인용 구절 가운데 사40:11을 별도로 살펴볼 가치가 가장 큰 구절로 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목자 = 인도하는 자, 양 떼 = 인도받는 자’라는 상응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누가 참된 목자인가’,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 ‘그 인도는 어떤 성질을 가지는가’, 그리고 ‘체어리티가 왜 모음과 결합을 이루는가’까지 한 장면 안에서 보여 줍니다.

 

결국 사40:11 AC.343에서 인용한 이유는 ‘양 치는 자’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의 선을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참된 목자직의 원형은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먹이시고, 흩어진 것을 모으시며, 연약한 것을 품으시고, 각자의 상태에 맞추어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양 치는 자’란 결국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받아 이웃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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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서 아주 익숙하게 사용하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shepherd)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flock)라고 합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며,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양 떼에 속하지 않습니다. ‘목자양 떼가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의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는 거의 없지만, 다음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i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must be obvious to everyone, for this is a familiar figure in the Word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s. He who leads and teaches is called a “shepherd,” and those who are led and taught are called the “flock.” He who does not lead to the good of charity and teach it, is not a true shepherd; and he who is not led to good, and does not learn what is good, is not of the flock. It is scarcely necessary to confirm this signification of “shepherd” and “flock” by quotations from the Word; but the following passages may be ci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30:23) The Lord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owest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다시 이사야에서, where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denotes charity. Again: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다윗의 시편에서, In David: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80:1) Give ear, O Shepherd of Israel, thou that leadest Joseph like a flock; thou that sittest on the cherubim, shine forth. (Ps. 80:1)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6:2, 3) I have likened the daughter of Zion to a comely and delicate woman; the shepherds and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her, they shall pitch tents near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 (Jer. 6:2, 3)

 

에스겔에서, In Ezekiel: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36:37, 38) Thus saith the Lord Jehovih, I will multiply them as a flock of man, as a hallowed flock, as the flock of Jerusalem in her appointed times; so shall the waste cities be filled with the flock of man. (Ezek. 36:37–38)

 

이사야에서, In Isaiah: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60:7) All the flocks of Arabia shall be gathered together unto thee, the rams of Nebaioth shall minister unto thee. (Isa. 60:7)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양 떼를 모으는(gather the flock)사람들이며,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양 떼를 흩는(scatter the flock) 사람들입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y who lead the flock to the good of charity are they who “gather the flock”; but they who do not lead them to the good of charity “scatter the flock”; for all gathering together and union are of charity, and all dispersion and disunion are from want of charity.

 

 

해설

 

AC.343은 앞의 AC.341-342에서 아벨을 ‘양 치는 자’라고 한 이유를 말씀 전체의 ‘목자와 양 떼’라는 표상을 통해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1에서는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AC.342에서는 체어리티를 상징하는 레위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43은 왜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와 연결되는지를 구약과 신약 전체에 익숙한 목자의 표상을 통해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아주 간단한 정의를 제시합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목자의 역할은 주로 ‘가르치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중요한 조건을 붙입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다.’ 이것이 AC.343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즉 목자의 본질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가르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사람들을 열심히 지도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목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과 인도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도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목자의 가르침은 진리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그 진리가 향해야 할 곳은 체어리티의 선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에서 살펴본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와 놀랍도록 잘 연결됩니다.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상징했습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을 르우벤에만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참인지를 알고 인정하게 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도록 인도하며, 마침내 그 선을 사랑하여 행하는 체어리티에 이르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AC.342가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면, AC.343은 목자가 사람을 어디로 인도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목회와 가르침을 바라보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생깁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가르쳤는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게 되고,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자랑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갈라서게 된다면 그 가르침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배우면서 사람 안에 겸손과 선의와 용서와 섬김이 자라나고, 무엇이 참으로 이웃에게 선한지를 분별하여 행하려 한다면 그 진리는 자신의 목적지인 체어리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AC.343이 ‘사랑만 있으면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목자는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선인지를 알아야 선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이 질서를 뒤집어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운 데 있었음을 생각하면, AC.343의 목자에 관한 설명은 창4의 중심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떼의 편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양 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양 떼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회에 등록되어 있거나 목자의 설교를 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따라 선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목자와 양 떼 모두를 판단하는 기준이 ‘체어리티의 선’에 놓여 있습니다.

 

이어지는 성경 구절들은 이 원리를 여러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사30:23에서는 주님께서 비를 주시고, ‘땅의 소산의 양식’을 풍성하게 하시며, 가축을 넓은 목장에서 먹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목자가 양에게 먹이를 준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단순히 지식을 많이 제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 선을 공급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40:11은 이 모습을 더욱 따뜻하게 보여 줍니다. 주 여호와께서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모든 참된 목자직의 원형이 주님 자신에게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목자라고 하는 것도 본래 자기에게 양 떼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주님을 대신하여 섬기는 쓰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목자는 양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주님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80:1에서는 아예 주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부르며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목자직의 중심에는 결국 주님의 인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인도하시며, 목자는 그 인도에 쓰임을 받습니다. 이것을 잊는 순간 목자는 양 떼를 주님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여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AC.343의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설명을 하나의 매우 중요한 원리로 모읍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 여기서 ‘모인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참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외적으로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예배에 참석하며, 같은 조직에 속해 있어도 서로를 향한 선의가 없다면 내적으로는 하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생각과 판단에 차이가 있어도 서로의 선을 바라고, 주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면 더 깊은 차원에서는 결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다시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면 결국 ‘분리’가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작은 분리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진행되면서 가인은 자기 형제 아벨을 견디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그를 죽입니다. AC.343의 마지막 원리를 창4 전체에 적용하면, 가인의 역사는 ‘체어리티가 사라질수록 분리와 흩어짐이 깊어지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교회의 일치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가장 깊은 힘은 모든 사람이 모든 교리적 세부 사항에서 똑같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진리는 중요하고, 교리적 오류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실제로 결합시키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선을 품고, 그가 주님 안에서 잘되기를 바라며, 진리를 자기 우월성을 증명하는 무기가 아니라 이웃의 선을 위한 빛으로 사용하는 데서 참된 결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AC.343의 마지막 문장은 목회자에게도, 성도에게도 상당히 엄중한 자기 점검의 기준이 됩니다. 내가 전하고 붙들고 있는 진리가 사람들을 주님과 이웃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편을 나누고, 적을 만들며, 사람을 밀어내게 하는가? 내가 진리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것은 아닌가? 반대로 체어리티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흐리면서 참된 선으로 인도하는 일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AC.343은 진리와 체어리티 어느 하나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사람을 인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양 치는 자’ 아벨의 의미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아벨은 단순히 ‘착한 쪽’, 가인은 ‘나쁜 쪽’이라는 대비가 아닙니다. 아벨은 신앙이 본래 향해야 할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내며, ‘양 치는 자’라는 그의 모습은 그 선을 돌보고, 먹이며, 삶으로 행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단지 체어리티라는 한 덕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사람을 선으로 인도해야 하는 자신의 목적을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AC.343의 핵심은 ‘참된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입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가르치되 진리 자체에 사람을 붙잡아 두지 않고, 그 진리가 삶이 되고, 선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참된 양 떼 역시 단순히 듣고 아는 데 머물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며, 그 선으로 인도받기를 원합니다.

 

그 결과가 ‘모임과 결합’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과 사람을 결합하고 사람과 사람을 결합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아무리 신앙을 크게 외쳐도 결국 분리와 흩어짐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AC.343은 목자와 양 떼에 관한 해설이면서 동시에 창4의 가인과 아벨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할 때는 모이고 결합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는 흩어지고 갈라집니다.’ 이것이 ‘양 치는 자’ 아벨을 통해 말씀이 보여 주는 참된 목자의 모습입니다.  

 

 

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40:11)

 

 

AC.343, 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 (사40:11)

AC.343.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 (사40: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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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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