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5,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 사람의 '오운'(own)의 정체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215

사람의 오운(own)은 악과 거짓뿐이라는 걸 저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영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말, 즉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영들 자신으로 말미암는 말은 항상 악과 거짓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요, 그들의 말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 말임을 제가 알게 될 때마다, 저는 듣는 즉시 그 말은 거짓임을,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한 말은 맞는 말임을 자기들은 정말 철저히 확신하고 있으니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중에도 저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같은 패턴인데요,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 생명에 관한 것들, 즉 신앙과 관련된 것들에 관하여 이성질(to reason)을 시작했을 때마다, 저는 그들이 의심, 심지어 부인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한 걸 이성질한다는 건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건 다 자아, 즉 그들의 오운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결과적으로는 짙은 어둠, 곧 거짓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데요,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 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하나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것에 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 위 '이성질'이라는 표현은 '갑질' 같은 표현을 흉내, 주님 주신 귀한 이성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대신 함부로 다루는 걸 빗대기 위해 제가 만든 표현입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말씀하시기를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5:21)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Isa. 5:21)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사47:10-11)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Isa. 47:10–1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렘51:17)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Jer. 51:17)

 

만든 신상(A graven image)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우상(a molten image)은 악, 곧 사람의 오운 속 악입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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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D1)-주일예배(2531, 눅17,1-6),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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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속뜻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1-6)

 

 

말씀에서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을 뜻한다. (계시록해설 1182:3, 이순철 역) To cause one of the little ones that believe in Jesus to stumble,” signifies to pervert those who acknowledge the Lord; (AE.1182:3)

 

 

마태복음 24장 41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여자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고, 맷돌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여자들이 맷돌질을 하는 것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교리를 배우고 교리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데려가는 사람은 주님에 의해 구원을 받는 사람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할까요? 주님이 주신 참된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인간이 만든 거짓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또 참된 교리 안에 있더라도 인애(仁愛, charity)의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인애가 없는 믿음, 그러니까 자아 사랑의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노아 홍수 직전에도 그랬습니다. 방주에 오른 사람들은 살고, 방주 밖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 간 사람들은 홍수에 휩쓸려 사라졌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열심히 맷돌질을 했음에도 버림을 받는, 본문에 나오는 여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말세, 즉 교회의 마지막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진리를 가르쳐야 할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 교인들에게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거짓들 속에서 실족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믿고, 주님 뜻에 따라 생활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신앙인들이 주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하고, 실망을 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행동할 때 그렇습니다. 그럴 경우, 의도가 나쁘지만 않다면 주님께서도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족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잘못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자를 뜻합니다. 예를 들면, 고의적으로 말씀을 왜곡,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자입니다. 말세에 교회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거짓인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만든 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씀을 왜곡하는 이유는 주님보다 자신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다 하셨습니다. 거짓 교리로 교인들을 타락시키는 사람들이 당할 화는 어떤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믿음이 사라지며, 대신 진리에 대한 반감과 혐오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질과 명예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고통받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의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거룩해 보였지만, 영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진리이신 주님을 그토록 미워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23:27)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고의로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이 당할 화입니다. 2절에서는 말씀을 왜곡하여 많은 사람을 실족시키는 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거짓 교리를 만들어 그것으로 신앙인들을 타락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십니다. 목(neck)은 사람의 머리와 몸통을 연결하는 부위로 영적으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있는 합리적(이성적) 사람(rational man), 곧 마음을 뜻합니다. 이 합리적 사람을 통해서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겉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에게는 이 합리적 사람은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연자 맷돌을 목에 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맷돌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주님이 주시는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거짓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연자 맷돌을 목에 매는 것은 거짓 교리로 인해 합리적 사람이 닫혀 말씀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배울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신 것은 진리를 악용, 다른 사람을 타락시킬 바에는 차라리 진리를 모르는 편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고 악용하는 것보다 진리를 모르는 상태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죄가 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하면 말세에 말씀을 가지고 이웃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이웃이 우리에게 죄를 지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3절과 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람마다 신앙이 다 다릅니다. 또 신앙은 같아도 각자 생각과 애정이 다르고, 거듭남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사람의 생각 없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할까요? 본문에는 먼저 경고하고, 상대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경고하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타이르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은 그때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용서하는 것은 사랑으로 잘못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잘못을 덮어준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상대에 대해 원한이나 미움, 복수심 같은 악한 감정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용서하되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십니다. 일곱은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은 끝까지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루’는 무슨 뜻일까요? 하루(a day)는 빛이 있을 때를 뜻하고, 그러므로 잘못을 한 상대가 진리 안에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진리를 가지고 타이르거나 용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하더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상대가 진리 안에 있어서 진리를 통해 잘못을 회개할 때는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가 진리를 믿지 않거나 거짓 진리 안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은 회개를 하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는 용서나 화해가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람들과는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용서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이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사람과 결합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용서도, 구원도, 삶의 형통과 복도, 데려감과 버려둠도 다 시스템입니다.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안 봐주고 하는 이 세상 무슨 재량권 같은 게 아닌, 어느 나라, 무슨 민족, 어떤 인종과 종교, 무슨 교단과 교파에 상관 없이 주님의 영원하신 하나의 원칙은 ‘시스템’입니다. 그 정하신 시스템에 따라 공정하게 지상에서 행복, 또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두 번째 원칙은 ‘만큼’의 원칙입니다. 주님을 사랑한 만큼, 또는 미워한 만큼, 사람의 내면이 열린 만큼, 또는 닫힌 만큼 그에 합당한 행복, 또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그에 합당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이웃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며, 이웃이 잘못할 때 진리와 선으로 끝까지 용서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믿음, 즉 인애를 바탕으로 한 믿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하십니다. 말씀에서 뽕나무는 믿음을 뜻하는데, 인간의 믿음, 즉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한 믿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뽕나무가 바다에 심어지는 것은 자아 사랑에 속한 믿음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말합니다. 바다는 지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고, 앙심을 품거나 하는 이유는 인애의 믿음이 없고, 자아의 믿음만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에 속한 믿음을 가지고는 이웃을 사랑하거나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에 속한 믿음을 던져 버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인애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인애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는 교회의 마지막 때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세는 노아 시대에 큰 홍수가 났을 때이고,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유대교회가 무너졌을 때이며, 계시록에 예언된 마지막 교회가 나타나는 지금 이 시대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는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 혼돈의 시대입니다. 교회 안에는 거짓 진리들이 만연하고, 교회 밖에는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전염병이 창궐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이러한 환난들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신앙인들이 말세에 실족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말세에는 말씀을 왜곡, 거짓 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물질이나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합니다. 말세에 신앙인들은 그런 유혹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안팎의 이웃들로부터 오는 시험도 많습니다. 교회 안의 이웃, 즉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시험은 사랑과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서로 화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는 화합할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때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하자 주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말세에 신앙인들이 시험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인애의 믿음은 없고, 자아에 속한 믿음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인애의 믿음을 구해야 하고, 그것으로 자아에 속한 믿음을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눅22:22)

 

아멘

 

원본

2021-08-0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2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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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14,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 '벗은'(naked)의 속뜻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214

그들은 자신들의 오운(own)에게 남겨진 상태이기에, ‘벗은(naked)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오운에게, 즉 자기 자신들에게 남겨진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즉 신앙 관련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으며, 그 결과 진리와 선에 대해서 ‘벗은’ 상태이며, 그래서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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