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1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가 사랑과 신앙이며, 또한 ,,(sun, moon, and stars)이라 한다는 사실은 선지자들의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the “great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 “sun, moon, and 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7, 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들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은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3:9,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요엘에서도입니다. 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2] 다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곧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시편도 이렇게 말합니다. 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148:3, 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3] 이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뜻합니다.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나타내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습니다. 그 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을 대표, 즉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이 등불에 관한 기록입니다. 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27:20, 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뜻임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적절한 곳에서 밝힐 것입니다. 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큰 광명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성경 전체의 증언을 통해 확정합니다. 해와 달과 별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나타내는 대표적 상징입니다. 이 점이 분명해지지 않으면, 선지서에 나오는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이나 밝아짐을 문자적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오해를 막기 위해 여러 선지서의 예를 연속적으로 제시합니다.

 

에스겔에서 바로와 애굽이 다루어질 때,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진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바로와 애굽이 감각적인 사고와 단순한 지식 중심의 사고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이 감각과 지식만을 의지할 때, 사랑과 신앙은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이때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진다는 말은, 외적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상태의 붕괴를 가리킵니다.

 

이사야와 요엘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묘사도 같은 맥락입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빛을 거둔다는 표현은, 심판의 날에 자연 질서가 무너진다는 예언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사라진 상태를 묘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은 언제나 외적 파괴가 아니라, 내적 상태가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반면 이사야 60장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집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자들에게 빛이 임하고, 해와 달이 다시는 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새 교회가 세워지고,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해와 달은 더 이상 자연의 광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사랑과 신앙의 지속성을 나타냅니다. ‘영원한 빛’이라는 표현은, 이 빛이 더 이상 인간의 상태 변화에 따라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편의 인용들은 이 상응이 이미 고대부터 예배와 찬양의 언어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해와 달과 별이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말은, 인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된 모든 진리의 인식이 주님을 향해 질서 있게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연 숭배가 아니라, 내적 상태의 고백입니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가 설명됩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꺼지지 않게 타오르던 등불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인간 안에서 끊임없이 유지되어야 함을 상징했습니다. 저녁은 어둠의 상태, 아침은 빛의 상태이므로, 등불이 밤새 타오른다는 것은 인간이 어둠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주님의 사랑과 신앙이 보존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규례가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주님을 대표하는 상응 행위였다고 강조합니다. 등불은 인간이 스스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켜 주시고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사랑과 신앙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인간의 역할은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질서 안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AC.31은 이렇게 넷째 날의 의미를 확장하여, 사랑과 신앙의 소멸과 회복, 교회의 몰락과 새로움, 그리고 개인 거듭남의 핵심 구조를 하나의 상징 체계 안에서 보여 줍니다. 해와 달과 별은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것들입니다. 이 인식이 생길 때, 성경의 예언들은 두려운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태를 비추는 빛이 됩니다.  

 

 

심화

 

1.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위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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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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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 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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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2:7-8

 

 

AC.31, 심화 4, ‘겔32:7-8’

AC.31.심화 4. ‘겔32:7-8’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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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3:9-10

 

 

AC.31, 심화 5, ‘사13:9-10’

AC.31.심화 5. ‘사13:9-10’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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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1-2, 10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이 구절이 AC.31에 인용된 이유 역시 앞의 에스겔 32장과 이사야 13장의 경우와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자연계의 천체가 아니라 영적 실재들, 곧 사랑과 신앙과 신앙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입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엘 2장은 그 증거로 매우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이 장은 교회의 황폐와 주님의 오심을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날’을 ‘어둡고 캄캄한 날’,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고 묘사합니다. 만일 이것이 문자 그대로의 자연 현상이라면, 왜 그것이 영적 경고와 회개를 촉구하는 문맥 속에서 나오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 안에서 진리와 선이 사라진 상태를 묘사하는 상응 언어로 봅니다.

 

AC.31의 관점에서 보면,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둔다’는 말은 교회의 영적 생명이 소멸된 상태를 뜻합니다. 해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해가 검어진다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 상태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지만, 사랑이라는 본질적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달이 캄캄해진다는 것은 신앙이 빛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는 것이므로,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도 함께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해와 달은 언제나 함께 어두워집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별들이 빛을 거둔다는 것은 진리의 지식들이 더 이상 사람을 인도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의 문자와 교리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 안의 생명과 빛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거나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본문 초반에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다’는 표현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심판의 군대가 밀려오는 모습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어둠과 동시에 새로운 빛의 시작도 암시합니다. 그래서 요엘서는 단순한 멸망의 예언이 아니라, 황폐 이후의 회복을 준비하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결국 AC.31에서 욜2:1-2, 10이 인용된 이유는, 사랑이 사라질 때 해가 어두워지고, 신앙이 죽을 때 달이 빛을 잃으며, 진리의 지식들이 무력해질 때 별들이 빛을 거두는 것으로 말씀에서 일관되게 표현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의 해, 달, 별이 사랑, 신앙, 진리의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것들이 사라지는 황폐의 상태를 묘사한 선지서의 언어를 통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7. ‘사60:1-3, 20’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사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이 구절이 AC.31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인용된 에스겔 32장, 이사야 13장, 요엘 2장이 해·달·별이 어두워지는 '부정적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이사야 60장은 그 반대로 해·달·빛이 충만한 '회복된 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각각 사랑, 신앙, 그리고 신앙의 지식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어떤 상응이 참되다는 것은 그것이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사용될 때 비로소 확증됩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구절들을 인용한 뒤, 이제는 해와 달이 영원히 빛나는 구절을 인용하여 같은 상응을 긍정적인 측면에서도 증명합니다.

 

이사야 60장의 첫머리는 매우 분명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빛은 자연광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의 빛입니다. 이어 '어둠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운다'고 하는데, 이것은 교회와 인류가 거짓과 무지 가운데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신다'고 합니다. 즉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영적 상태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특히 AC.31의 핵심과 직접 연결되는 부분은 20절입니다.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임이라.'

 

만일 해와 달이 문자 그대로의 천체라면, 이 말씀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자연계의 태양과 달은 언제나 뜨고 지며, 차고 기우는 것이 창조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해와 달은 영적인 것을 의미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따르면, 해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해가 다시는 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주님 사랑이 더 이상 소멸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달은 신앙입니다. 따라서 '달이 물러가지 아니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계속 유지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본문 자체가 설명합니다.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즉 해와 달의 빛 자체가 아니라, 그 빛의 근원이신 주님이 영원한 빛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0-31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고,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으며, 모든 진리의 빛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황폐한 교회가 아니라 회복된 교회를 묘사합니다. 사랑이 살아 있고, 신앙이 살아 있으며, 진리의 빛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앞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는다'는 구절들이 사랑과 신앙의 소멸을 의미했다면, 여기서 '해가 지지 않고 달이 물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결국 AC.31에서 이사야 60:1-3, 20이 인용된 이유는, 해가 사랑을, 달이 신앙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회복과 영광의 상태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앞의 선지서들이 해와 달의 소멸을 통해 교회의 황폐를 묘사했다면, 이사야 60장은 해와 달의 영원한 빛을 통해 주님의 새 교회와 거듭난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31에서 가장 아름다운 '긍정적 증거' 가운데 하나로 사용됩니다.

 

 

8. ‘시136:5-9’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이 구절이 AC.31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장 넷째 날의 해와 달과 별이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 그리고 신앙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시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한 구절만으로 상응을 주장하지 않고, 동일한 상응이 성경 전체에 걸쳐 반복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특히 이 시편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먼저 '하늘을 지으셨다', '땅을 물 위에 펴셨다'고 말한 다음, 곧이어 '큰 빛들', '해', '달과 별들'을 언급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창조 이야기는 우주의 물질적 기원을 설명하는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 과정을 설명하는 기록이므로, 이 시편 역시 같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본문에서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셨다'는 말은 사랑이 사람의 밝은 상태, 곧 선의 상태를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해는 언제나 사랑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는 말은 신앙과 신앙의 지식들이 상대적으로 어두운 상태에서도 사람을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해라면 신앙은 달이고, 진리의 지식들은 별들입니다. 그래서 해와 달과 별은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질서 안에 놓여 있습니다.

 

또한 이 시편은 해와 달과 별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한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자연계의 태양과 달이 인간의 내면을 다스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은 실제로 사람의 삶을 다스리고, 신앙은 사람의 생각과 이해를 다스하며, 진리의 지식들은 방향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주관한다'는 표현 자체가 이미 영적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편 전체는 창조를 찬양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의 각 단계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가 반복됩니다. 이는 창조가 단순히 물질세계를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 안에 질서를 세우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시편을 창세기 1장의 영적 의미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합니다.

 

결국 AC.31에서 시편 136:5-9가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의 해·달·별이 사랑·신앙·진리의 지식을 의미한다는 상응이 시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이 광명체들은 인간의 영적 삶을 다스리는 원리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창조의 광명체들은 하늘의 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 안에 세워지는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말하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인용인 것입니다.

 

 

9. ‘출27:20-21’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27:20, 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 구절이 AC.31에 인용된 이유는, 앞에서 해와 달과 별이 사랑과 신앙과 진리의 지식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선지서와 시편을 통해 보여 준 뒤, 이제는 대표적인 예배 규례인 성막의 등잔대까지도 같은 상응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의 문자적 의미만 보면, 이 말씀은 성막 안의 등불을 밤새 꺼지지 않게 관리하라는 제사 규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막 자체가 천국과 인간의 내면을 표상하는 것이며, 그 안의 모든 기구와 의식도 영적인 것들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여기의 등불과 기름 역시 단순한 조명 장치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에 관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은 사랑의 선을 상징합니다. 말씀에서 감람나무와 감람유는 일관되게 사랑, 특히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기름으로 타오르는 등불은 신앙의 빛, 곧 진리의 빛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기름이 사랑이라면 불빛은 신앙입니다. 이는 AC.30-31에서 설명하는 해와 달의 관계와 정확히 같습니다.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으며, 사랑이 없으면 신앙도 빛날 수 없습니다.

 

또한 등불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계속 켜 두어야 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AC.22에서 스베덴보리는 저녁은 신앙이 약해진 상태를, 아침은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빛이 오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성막의 등불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 어둠과 시험의 상태를 지나가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신앙의 빛을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성막 안 등잔대의 빛은 자연광이 아니라 성소 안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서는 참된 빛을 가질 수 없고,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의 빛으로만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창세기 1장의 광명체들이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원리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모세 율법의 예배 규례 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빛을 비추는 것처럼, 성막의 등불도 사랑의 기름으로 신앙의 빛을 비추어야 했습니다. 결국 출애굽기 27:20-21은 사랑이 신앙을 밝히고, 주님께서 그 빛을 끊임없이 유지하신다는 영적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AC.31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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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창1:14-17,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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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14-17)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에서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이 두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니고 말입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속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속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넷째 날,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등장하는 장면을 신앙의 성숙 단계와 직접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전제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은 어떤 교리 체계나 인간의 심리적 태도가 아니라, 그 생명과 본질이 오직 주님 자신이라는 점을 여기서 분명히 선언합니다. 주님과 분리된 신앙은 형태는 있을 수 있어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 3장의 인용은 단순한 성경 증거가 아니라, 전체 논증의 중심축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전혀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주님과 분리된 악과 거짓은 스스로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구분합니다. 첫 단계는 기억에 속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형태를 띤 신앙으로, 사람이 배워서 알고 있는 수준의 신앙입니다. 이 단계에서 신앙은 아직 삶을 움직이지 못하며, 생명도 없습니다. 다음 단계는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 사람이 그 내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동의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 역시 아직은 지성의 차원에 머무르며, 마음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비로소 신앙은 마음에 속한 것이 됩니다. 이는 사랑의 신앙이며,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신앙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구원의 신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단계에서 신앙이 선과 결합하여 생명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앞선 두 단계가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준비 단계이기 때문이지 무가치해서가 아닙니다. 준비 없이는 결합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는 창세기 본문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3절부터 13절까지는 빛, 궁창, 땅과 물, 풀과 나무 등 아직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 단계로, 생명 없는 것들로 묘사됩니다. 반면 20절 이후에는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랑에 의해 신앙이 생명을 얻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광명체들은 바로 이 전환 지점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이 각각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주된 것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종속적인 위치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리될 수 없고 반드시 하나를 이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광명체들’이라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 표현을 사용합니다. 라틴어 표현에서는 이게 명료하며, 각각 [sit luminaria, 단수] [sint luminaria, 복수]로 구분됩니다. 이는 사랑과 신앙이 두 개의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 안에서 두 기능으로 작동함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를 열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겉 사람의 육체 세계에서 열과 빛이 각각 생명과 인식을 담당하듯이, 속 사람에서는 사랑이 열과 같고, 신앙이 빛과 같습니다. 열 없는 빛은 차갑고 생명을 주지 못하며, 빛 없는 열은 방향을 잃습니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만 생명이 유지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로 밝히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나 훈련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자비입니다. 인간은 다만 수용체로서, 빛과 열이 들어와 작용하도록 자리를 내어줄 뿐입니다. 이 인식이 바로 넷째 날의 핵심이며, 이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생명 충만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됩니다.  

 

 

심화

 

1.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

AC.30.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위 AC.30 분문 [3],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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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3:36AC.30에 인용된 이유는, 넷째 날의 두 광명체 가운데 특별히 ‘’로 상징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참된 신앙은 결코 사랑과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단순히 ‘믿는 것’, ‘교리를 인정하는 것’, ‘올바른 생각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것은 신앙의 외형일 뿐이며,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사랑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요3:36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 구절은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후반부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believeth not’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의 의미는 단순히 ‘믿지 않는다’가 아니라 ‘순종하지 않는다’, ‘복종하지 않는다’에 더 가깝습니다. 즉 주님은 여기서 단순한 지적 믿음과 실제 삶의 순종을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순종’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앙이 단순한 생각이나 교리적 동의라면, 왜 주님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영생에서 제외하셨겠습니까? 이는 참된 신앙이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야 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AC.30에서 이 구절은 ‘신앙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달이 해의 빛을 잃은 것과 같고, 삶의 순종 없는 신앙은 생명이 없는 신앙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는 신앙은 사랑과 결합된 신앙이며, 이것이 넷째 날의 달이 해로부터 빛을 받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결국 AC.30에서 요3:36은 단순히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증거 구절이 아니라, ‘참된 신앙은 사랑과 순종을 포함하며, 그런 신앙만이 생명을 가진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넷째 날의 해와 달, 곧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하는 AC.30의 핵심 주제입니다.

 

 

 

AC.30, 심화 2, ‘요3:36’

AC.30.심화 2. ‘요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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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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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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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저작, 예컨대 ‘Arcana Coelestia’나 ‘Heaven and Hell’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의 단어 선택이 단순한 문체상의 차이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를 표현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homo’를 쓰고, 어떤 곳에서는 ‘vir’를 쓰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법상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homo’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인간’, ‘사람’, ‘인류’를 뜻하는 말입니다. 남자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자도 포함하는 ‘human being’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라틴어에서 ‘homo’는 인간 종 전체를 가리키거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말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homo’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할 때 쓰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단어를 매우 자주 사용하며,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homo’를 씁니다. 예컨대 인간이 ‘의지와 이해’를 가진 존재라는 점, 또는 인간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말할 때 ‘homo’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일반’,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vir’는 훨씬 좁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말은 원래 ‘성인 남자’, ‘남성’, 또는 ‘용기 있는 남자’를 의미합니다. 고전 라틴어에서 ‘vir’는 단순히 남성이라는 뜻뿐 아니라 ‘용기’, ‘덕성’, ‘남자다움’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vir’에서 ‘virtus’(덕, 용기)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성경 라틴어에서도 ‘vir’는 보통 ‘남자’, ‘남편’, 또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vir’는 종종 ‘여자와 대비되는 남자’ 또는 ‘특정한 인격적 주체’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이 차이가 더욱 의미를 갖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homo’는 인간 전체, 곧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homo’는 남녀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존재’를 가리키며, 더 깊은 의미에서는 ‘교회에 속한 인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반면 ‘vir’는 보통 ‘이해 또는 진리의 측면’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종 남자를 ‘이해 또는 진리’, 여자를 ‘의지 또는 선’과 상응한다고 설명하는데, 이 맥락에서 ‘vir’는 진리를 담당하는 측면, 즉 이해의 기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창1:26의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에서 사용되는 ‘사람’은 라틴어로 ‘homo’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남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창2에서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어 등장할 때는 ‘vir’와 ‘mulier’가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성별 구분이 아니라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vir’는 종종 ‘진리의 사람’, ‘이해의 사람’을 의미하는 쪽으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진정한 인간’을 설명할 때입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선을 사랑할 때 비로소 ‘homo’가 된다고 합니다. 즉 ‘homo’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으로 인간다운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to become a man’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성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homo’는 ‘인간 일반’, ‘인류’, ‘남녀를 포함한 사람’, 더 깊게는 ‘주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반면 ‘vir’는 ‘남성’, ‘남편’, 또는 상징적으로 ‘진리와 이해의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글이나 라틴어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에서 ‘homo’가 나오고 어떤 구절에서 ‘vir’가 나오는지를 보면, 그 구절이 ‘인간 전체’를 말하는지, 아니면 ‘특정한 남성적 또는 진리의 측면’을 말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단어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의미를 담고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SC.41,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

스베덴보리는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쉽지 않겠지만,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네 단어는 겉으로 보면, 단순히 ‘안/밖’의 구분 같지만, 에마누엘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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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9, ‘수도원, 수도사, 성인과 스베덴보리’

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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