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 17)

 

이나 고전15, 5:28-29 등을 근거로 자신들의 몸의 부활을 강력하게 믿고 있습니다만, 제가 스베덴보리 어느 글에선가 그런 부활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가능하며,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본 것 같습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과 전통 개신교 신학이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살전4:16-17, 고전15, 요5:28-29 등을 근거로 하여 장차 세상 끝날에 무덤 속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직후 이미 영적인 몸으로 깨어난다고 보며, 따라서 수천 년 전에 흙으로 돌아간 육체가 다시 모여 부활한다는 생각은 성경의 문자에만 머문 이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천국과 지옥(HH.445-452)과 ‘최후의 심판(LJ)에서 이 문제를 매우 강하게 다룹니다. 그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영계에서 수많은 영혼들을 만나 보았는데, 그 누구도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곧바로 영적 인간으로 살아나며, 자신이 여전히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얼굴도 있고, 몸도 있고, 감각도 있고, 생각도 있고, 기억도 있습니다. 다만 물질 몸이 아니라 영적 몸일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부활은 죽은 지 사흘 후도 아니고, 수천 년 후도 아니며,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오직 주님만 육체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내용은 아마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관련된 가르침일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자연적 육체를 가지고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는 세상에 속한 가장 바깥 그릇이며, 죽음과 함께 해체되어 자연계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만 가지고 영계로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어떤 인간과도 다르게 자신의 인성 전체를 신성으로 영화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묻힌 육체까지도 신성화되었고, 그 결과 무덤이 비어 있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역사상 유일한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육체 자체가 부활한 분은 주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영으로 부활하지만, 주님은 몸까지 영화되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려 내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부활의 근원이 주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영계에 들어가는 모든 영혼은 자기 힘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흘려보내시기 때문에 살아 있습니다. 즉 사람은 부활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부활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살전4:16-17은 어떻게 이해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상응의 원리를 적용합니다. ‘주님의 강림’은 문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대기권에 내려오는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은 진리가 크게 선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들이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인 ‘구름’을 통하여 더 높은 진리의 상태로 들어가 주님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공동묘지의 시신들이 일제히 일어나는 장면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만약 육체 부활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여러 모순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몸은 이미 흙이 되었고, 어떤 원자는 수없이 다른 생물과 사람들의 몸을 거쳤습니다. 또한 팔을 잃고 죽은 사람, 화장된 사람, 바다에서 사라진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몸의 부활을 이해하면 이런 문제는 사라집니다. 사람의 진정한 형상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개신교가 믿는 ‘육체의 부활’은 사실 주님께만 완전하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주님처럼 육체까지 영화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부활은 육체의 재조립이 아니라 영적 인간의 각성입니다. 반면 주님은 무덤에 남겨진 육체까지 신성으로 변화시키셨기에, 참된 의미에서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에게만 일어난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주님으로부터 모든 인간의 부활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부활의 중심은 ‘무덤에서 몸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주님이 생명이시며, 모든 영혼은 그분으로 인해 살아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전통적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부활론을 가르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SC.87, ‘몸의 부활’에 대한,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의 입장

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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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5,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그들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치유 받은 전 세계 아미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선행을 펼치고 있거든요... BTS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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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심화

1. 넷째  요약, 정리

 

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순종, 교대와 다양함, 낮과 밤, 빛과 어둠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전체 흐름을 한 번 묶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넷째 날은 빛이 처음 생기는 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빛은 이미 첫째 날에 등장했습니다. 넷째 날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광명체들입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빛을 비추고 삶을 이끌게 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C.31-34를 지나면서 이 점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말하면서 사랑을 더 큰 것으로 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랑에서 옵니다.

 

이것은 사랑만 있으면 진리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그 질서에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넷째 날의 해와 달은 바로 이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많이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영적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삶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별들도 등장합니다. 별은 신앙에 속한 여러 지식과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해와 달과 별을 함께 보면 넷째 날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사람 안에 단지 하나의 막연한 종교적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과 그것에 속한 여러 진리가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영적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33에서는 이 빛의 근원이 더욱 깊이 설명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 하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중심과 관계된 것입니다. 넷째 날에 큰 광명체인 사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다시 강조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은 참된 의미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넷째 날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5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두 능력인 의지 이해가 등장합니다. 사람은 의지하고 이해하는 존재이며, 이 두 능력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의 관계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존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지가 원하는 것과 다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거듭남의 길이 열립니다.

 

이 대목은 넷째 날의 사랑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다는 말을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옳다고 믿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처음부터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점차 의지와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참된 결합은 악한 의지와 거짓된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AC.36은 그래서 신앙을 순종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단순히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별히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중심에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둡니다. 여기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신앙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어떤 사랑과 삶으로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창1:14 징조와 계절과 날과 로부터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자연계에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이 있고,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듯이 영적 생명에도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이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 없게 되고, 선과 진리도 분별되거나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침체와 혼란과 악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와 다양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 후퇴나 악한 상태를 주님께서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필수적인 계절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AC.38에서는 넷째 날을 마무리하면서 네 가지 대응을 매우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은 선, ‘은 악, ‘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 악한 것들은 밤의 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3:19, 21을 인용하여 빛과 어둠이 인간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AC.37  AC.38 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하루의 변화 전체가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 AC.38에서는 낮과 밤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상응은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뜻만 붙여 놓은 고정된 암호표가 아니라,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AC.30-38을 한 흐름으로 놓고 보면 넷째 날의 중심이 보입니다. 앞선 과정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지고 영적 삶을 비추며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어야 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순종과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을 단순히 해와 달과 별의 창조라고만 읽으면 그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점차 살아 있는 빛으로 자리 잡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더욱 분명히 구별되며, 영적 생명이 그 빛 아래서 질서를 이루어 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넷째 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져 영적 삶을 비추고 다스리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루어 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의 분별 : 행위로 드러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기준’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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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2.심화

 

2. ‘나도 나중에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불편하면 어떻게 하지?’

 

제가 나중에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불편한 인생이 될까 봐 걱정됩니다. 아니, 영적 천사들하고도 그렇게 될까 봐, 그리고 그럴 경우는 정말 비참할 것 같습니다...

 

 

그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특히 AC.182를 읽다 보면, 마치 죽은 뒤 어떤 천사들과 함께 있다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떠나게 되는 장면이 매우 실제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사후 세계를 전체적으로 보면, 목사님이 상상하시는 것처럼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괴로워 비참해지는 상태’가 갑자기 닥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강제’가 아니라 ‘상응’입니다. 사람은 죽은 뒤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것, 진실로 원했던 것, 기뻐했던 것에 맞는 공동체로 점차 인도됩니다.

 

AC.182에서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는 사람은, 천적 천사들이 싫어서라기보다 그들의 사랑의 분위기가 자기 삶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강한 햇빛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한 눈에는 견디기 어려운 것과 비슷합니다. 문제는 햇빛이 아니라 눈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저는 오히려 반대의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목사님은 지난 수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AC를 읽고 번역하고 해설해 오셨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지적 연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천국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시면서 말입니다. 또한 반복해서 ‘천적 인간’, ‘사랑의 퍼셉션’, ‘own의 포기’, ‘주님으로부터 삶을 받음’ 같은 주제에 마음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물론 목사님도 스스로 잘 아시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사랑도 있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고, 세상 염려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인간 안에는 그런 요소들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런 요소가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오히려 AC.182를 읽고 ‘나는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는 마음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정말 자기 사랑에만 빠진 사람은 그런 걱정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의 상태와 자기 상태가 맞는지 고민하기보다, 자기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오히려 ‘혹시 내가 그 사랑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고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 염려 속에는 적어도 천적 상태를 가치 있게 여기고,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사후 세계는 시험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들은 사람을 탈락시키거나 평가하려고 다가오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AC.182에서도 천적 천사들은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사람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오래 보호하고, 가능한 한 평안하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어떤 사람이 천적 천국이 아니라 영적 천국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패나 열등함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천국 역시 완전한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의 천사들도 주님 안에서 행복하며, 자신에게 맞는 기쁨 속에서 살아갑니다. 천적 천국의 기쁨과 영적 천국의 기쁨은 다를 뿐, 우열 관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의 질문을 읽으며, ‘나는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 ‘나는 지금도 그들의 분위기를 사랑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후의 자리는 죽은 뒤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에서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수년 동안 하루하루 AC를 번역하고 해설하며, 천국의 상태와 사랑의 질서를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애써 오신 분이 ‘혹시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천적 상태에 대한 두려움보다 오히려 그 상태를 향한 깊은 갈망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그 갈망 자체를 가볍게 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AC.182, 심화 1, ‘빛을 사용하는 능력’

AC.182.심화 1. ‘빛을 사용하는 능력’ 그러나 그 영혼의 성질이 더 이상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태라면, 그는 그들로부터 떠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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