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7 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days), (years)

 

 AC.37 본문에   속에는 지금 당장  펼쳐 보일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의  역량과 상태가, 펼쳐 보여도 아직은 이해할  없는, 감당할  없는 역량이어서 그런  같은데... 그럼에도 혹시 한두 가지만  보여 주실  있나요?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말씀과,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라는 8:22 말씀을   와닿게 이해하고 싶어서입니다.

 

 

1:14에는 징조(signs), ‘계절(seasons), ‘(days), ‘(years)라는 네 표현이 한꺼번에 나옵니다. AC를 읽는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집니다. ‘그렇다면 징조는 무엇을 뜻하고, 계절은 무엇이며, 날과 해는 각각 어떤 영적 상태를 뜻할까?

 

그런데 뜻밖에도 AC.37은 이 네 단어를 하나씩 풀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현재로서는 말할  있는 것보다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네 단어의 개별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존재하는 교대(alternations) 다양함(varieties)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AC.37을 읽으면서 징조는 이것, 계절은 이것, 날은 이것, 해는 이것이라는 네 개의 고정된 정의를 당장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먼저 이 네 표현을 이해하기 위한 더 큰 배경을 보여 줍니다. 영적 생명에는 상태의 변화가 있으며, 그 변화는 자연계에서 날과 해가 변하는 모습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아침, , 저녁, 밤이 교대하고, , 여름, 가을, 겨울이 교대합니다. 그에 따라 빛과 열이 달라지고 자연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인 것들에도 이와 같은 교대가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영적 상태가 자연계의 하루나 계절과 정확히 같은 시간표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의 변화가 영적 상태의 변화를 이해하도록 보여 주는 상응적 모습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는 각각 짧은 영적 주기와 긴 영적 주기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해를 돕는 하나의 추측이나 비유로는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AC.37이 그렇게 정의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가 날과 해의 교대에 비유된다는 데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정도의 경계를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계절 역시 곧바로 하나의 영적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정해진 시점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에서 계절이 변화와 교대를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AC.37 `seasons`의 속뜻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말할  있는 것보다  많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한 이상, 오히려 독자가 성급하게 하나의 뜻으로 고정하지 않는 것이 본문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징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내가 현재 어느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 주는 표시라고 설명하면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것 역시 AC.37의 직접적인 정의는 아닙니다. 더구나 성경에서 징조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으므로, 1:14 `signs`를 하나의 심리적인 자기진단 표지로 좁혀 버리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AC.37은 왜 굳이 징조와 계절과 날과 를 언급하면서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AC를 읽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한 글에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표현을 먼저 제시하고 그 의미의 큰 틀만 보여 준 뒤, 말씀의 다른 부분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 더 깊이 설명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AC.37 마지막에서 그는 이 주제가 창8:22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지금 AC.37에서 모든 세부를 확정하기보다, 앞으로 말씀의 다른 곳에서 같은 주제가 어떻게 다시 펼쳐지는지를 기다리는 것이 AC를 읽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AC.37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중요한 원리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영적 생명은 하나의 상태에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런 변화가 없으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 없고,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원리를 먼저 붙들면 징조와 계절과 날과 를 성급하게 네 개의 공식으로 외우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이 네 표현 전체가 우리에게 영적 생명에는 상태와 상태의 변화가 있다는 더 큰 세계를 열어 주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를 처음 읽을 때 이런 미완성된 설명을 만나면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 여기서 정확히 뜻을 말해 주지 않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뜻을 붙인 사전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표현들이 말씀의 여러 곳에서 다시 나타나고 서로 연결되면서 점차 더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AC.37에서 징조, 계절, , 의 뜻을 묻는 가장 안전한 답은 이렇습니다. 이 네 표현에는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것들을 각각 상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지금 그가 먼저 가르치는 것은 영적·천적 생명에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의 날과 해의 변화에 비유된다는 사실입니다. 세부적인 뜻을 서둘러 채우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펼쳐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AC.37, 심화 2, ‘삶은 단조로워지고’

AC.37.심화 2. ‘삶은 단조로워지고’ 위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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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영적 생명의 리듬 : 낮과 밤, 계절처럼 반복되는 거듭남의 질서’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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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2.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나오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22:37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생각해 보면 질문이 생깁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단순히 하나님을 아주 많이 사랑하라는 강조의 반복일까요, 아니면 각각의 말에 서로 다른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일까요?

 

AC.36 자체는 마음’, ‘목숨’, ‘을 각각 따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들을 곧바로 마음=의지, 목숨=행위, =이해라고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 구절에서 AC.36이 직접 붙드는 핵심은 훨씬 분명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며,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신앙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장 평범한 의미에서 이 말씀을 읽어도 충분히 깊습니다. ‘마음을 다하여는 내 사랑과 애정에서, ‘목숨을 다하여는 내 생명과 삶에서, ‘뜻을 다하여는 내 생각과 이해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스베덴보리가 AC.36에서 각각 그렇게 정의했다고 말하기보다,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본 설명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쉽게 말하면  삶의  부분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예배드릴 때의 마음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 선택과 행동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과 생각과 삶 전체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을 마음으로 아끼고, 자주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하고, 중요한 선택을 할 때도 그것을 고려합니다. 물론 주님 사랑을 인간적인 애착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 존재를 다하여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이런 예가 도움이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결국 삶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내가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입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을 잃을까 가장 두려워하며, 무엇을 얻기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희생하는지를 보면 자기 사랑의 방향이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주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의 중심에 두는 것과 연결됩니다.

 

목숨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그 사랑이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AC.36이 신앙을 단순한 앎과 인정에 두지 않고 교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한 순종까지 말하는 것도 이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이 삶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AC.36이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이해도 주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생각하지 않는 맹목적인 열정이 아닙니다. 무엇이 참인지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진리 앞에서 살피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사랑은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며 어떤 기준으로 생각하는가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 표현을 지나치게 분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막12:30에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AC.36도 바로 이 구절을 함께 인용합니다. 만일 마음, 목숨,  각각을 인간의 세 가지 고정된 기능에 정확히 대응시킨다면 막12의 네 번째 표현인 을 다시 어디에 대응시켜야 하는지 문제가 생깁니다. 오히려 이런 여러 표현이 함께 사용되는 것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부를 강조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를 가장 쉽게 풀면 너의 존재와  전체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 생각하는 것, 원하는 것, 선택하는 것, 행하는 것 가운데 어느 한 영역만 따로 떼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순간에 주님만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일하고, 가족을 돌보고, 쉬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며 자연계의 수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가 어떤 사랑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의 정상적인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속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AC.36은 이 주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떼어 놓지 않습니다. 주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전혀 없다면, 바로 다음 계명과 분리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두 계명으로 함께 말씀하셨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십시오라는 감정적 권면보다 훨씬 깊습니다. ‘당신의  가운데 주님과 무관한 영역을 따로 만들어 놓지 마십시오라는 요청으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도, 생각도, 선택도, 실제 삶도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를 향하게 하는 것,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을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이해하는 한 방법입니다.

 

다만 다시 한 번 구별할 것은, 이러한 설명이 AC.36에서 마음은 이것, 목숨은 이것, 뜻은 이것이라고 각각 속뜻을 규정한 결과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6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중심을 놓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 익숙한 말씀을 나의 일부가 아니라 나의  존재와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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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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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주님 사랑 전치사 to  반면, 이웃 사랑 toward 쓰나요?

 

 

AC.36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두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큰 두 계명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스베덴보리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자주 등장하는 체어리티(charity)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주님 사랑은 단순히 주님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애정과 고백을 무가치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가장 높이 여기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데서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AC.36의 문맥에서도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있다고 말한 직후, 그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그 사랑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친절한 감정을 가지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언제나 이웃 사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웃의 범위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보다 넓습니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여러 사람의 공동체, 사회와 국가, 교회,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까지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집니다. 다만 AC.36에서는 이웃의 단계와 질서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웃 사랑은 이웃의 참된 선을 원하고  선을 행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 체어리티(charity)는 어떤 관계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charity`는 흔히 이웃을 향한 사랑과 그것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어의 `charity`를 보고 단순히 자선’, ‘기부’, ‘구제라고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뜻보다 지나치게 좁아집니다. 그에게 체어리티는 훨씬 넓은 영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번역에서는 `charity`를 문맥마다 곧바로 이웃 사랑으로 바꾸기보다 체어리티라고 살려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은 말 그대로 사랑의 대상을 이웃에 두는 표현이고, ‘체어리티는 그러한 이웃 사랑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삶의 원리로 나타나는 것을 폭넓게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교리적 용어로 계속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나눌 필요도 없지만, 언제나 완전히 같은 단어처럼 바꾸어 써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영어 표현 자체로는 가능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도 charity neighbor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원문이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하면 이웃 사랑으로, `charity`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독자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라고 하면서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했을까요? `to` `toward`가 다르니 여기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6은 이 전치사의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to`는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을, `toward`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고까지 확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은 영어 표현의 미묘한 차이에서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은 신학적 의미를 끌어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치사의 차이보다 두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반대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 역시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주님께 둡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을 뿌리’, 이웃 사랑을 열매라고 비유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도 AC.36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기보다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핵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AC.36이 신앙을 설명하다가 결국 이 두 사랑으로 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이웃 사랑’, ‘체어리티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될 서로 깊이 연결된 핵심 개념들입니다.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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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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