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AC.35 마지막의 만일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말은 짧지만 참으로 큰 위로를 줍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는 지옥을 향할 수 있으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사람 전체가 지옥으로 곤두박질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적인 문장의 끝에 주님의 자비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마지막 말이 인간의 악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라고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자비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AC.35의 문맥에서 자비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람이 자기 악한 의지에 따라 끝까지 떨어지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엄중한 진단과 주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조금 노력하면 자기 힘으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깊이 자기 사랑과 악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가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사람이 여전히 돌이킬 수 있고,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선을 향하여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붙들어 주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여기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5은 그 작동 방식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 어떤 일이 뜻밖에 막히는 것, 고통이나 시험을 겪는 것 등을 하나하나 가리켜 이것이 바로 그때 주님께서 붙드신 것이다라고 AC.35만을 근거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와 거듭남에 관한 다른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 주님의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인간이 자기 악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붙드신다고 해서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악과 싸울 수도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과 진리를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길을 열어 주시는 자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자비를 공의라면 벌해야 하지만 자비가 그것을 눈감아 주는 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신적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거나 거짓을 진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그가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원을 향해 이끄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비는 인간의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건져 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AC.35의 이 한마디는 거듭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다 보면 나는 아직도 이렇지?’, ‘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삶이 이렇게 다르지?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5처럼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 의지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씀을 읽으면 자기 안의 모순이 더욱 크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문장의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끝내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자비로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의지가 이미 완전해졌다는 데 있지 않고,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어차피 주님께서 붙드시니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알수록 우리는 그 자비에 응답하여 악에서 돌아서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자비는 거듭남을 대신해 주는 면허가 아니라 거듭남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은 AC.35을 읽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AC.35은 그 자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든 방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악한 의지의 무게만을 따라 끝없이 떨어지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짧은 한마디 때문에,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그렇게 엄중하게 말한 AC.35도 결국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AC.35, 창1:14-17, ‘의지와 이해 : 하나의 생명이냐, 둘로 갈라진 마음이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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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심화

2. 도망함(flight) 마지막 때와 사람이 죽을 뜻하는가?

 

 AC.34 본문 인용 구절,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3:18) 나오는 (flight)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는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각각 겨울과 봄의 햇빛에 비유한 뒤, 13:18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그리고 곧바로 여기서 도망함(flight)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은 저세상에서의 비참한 상태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뜻밖입니다. ‘도망함이라는 말이 어떻게 마지막 를 뜻하고, 더 나아가 사람이 죽을 를 뜻할 수 있을까요? 혹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 어디론가 날아가는 flight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먼저 이 가능성부터 제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영어 flight비행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13의 문맥에서 flight는 위험을 피해 도망함, 피신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해하면서 영어 단어의 다른 뜻인 비행을 끌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것을 현대 종말론에서 흔히 말하는 휴거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flight를 휴거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직접 제시하는 속뜻은 마지막 사람이 죽을 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화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가 실제로 제시한 이 두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도망함마지막 를 뜻할까요? 13의 문자적 문맥에서 도망함은 한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결정적인 끝을 향해 가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 적용합니다. AC.32에서도 세대의 종말을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어느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도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한 교회의 상태가 마지막에 이르는 영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사람이 죽을 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의 마지막과 한 개인의 자연계 삶의 마지막 사이에 대응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그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있고, 개인에게는 자연계에서의 삶을 마치는 때가 있습니다. AC.34는 막13의 말씀을 이 두 차원에 함께 적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을 를 단순히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이동 순간으로 이해하면 AC.34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어 설명하는 것은 이동의 방식이 아니라 그때의 상태입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을 AC.34의 속뜻에 따라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죽을 영혼이 어떻게 이동하는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마칠 사람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입니다. 그때가 겨울’, 곧 사랑이 없는 삶의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4 전체의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 글의 처음부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지고 있는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그는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을 겨울철 햇빛에 비유합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어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고 모든 것이 굳어 있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빛과 함께 열이 있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바로 이 겨울과 봄의 대조를 설명한 다음에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따라서 겨울의 의미는 앞의 설명과 분리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람이 죽을 를 언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연계에서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삶을 향하여 거듭날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계의 삶을 마칠 때 그 사람의 지배적인 생명이 사랑 없는 겨울과 같은 상태라면, 그것은 단순히 추운 계절에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계의 삶을 마쳤다는 뜻이 됩니다.

 

AC.34은 그 뒤의 환난의 저세상에서의 비참한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자연계의 재난이나 종말 시간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 없는 삶이 사후에 어떤 상태와 연결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인용 전체는 AC.34가 계속 말해 온 사랑 없는 신앙에는 참된 생명이 없다는 원리를 매우 엄중한 방식으로 강조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죽을 라는 표현 때문에 임종 순간의 감정이나 마지막 몇 분의 상태에 지나치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34가 말하는 겨울은 사랑이 없는 입니다. 즉 문제는 죽는 바로 그 순간 사람이 평안했는가 두려워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아 살아왔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거나, 의식을 잃은 채 죽었거나, 임종 때 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겪었다고 해서 그것을 겨울에 도망한 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겨울은 육체적 임종 상황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이라는 영적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13:18AC.34의 설명에 따라 읽으면서 좋은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을 임종의 외적 모습에 적용하면 불필요한 두려움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평안하게 임종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봄인 것도 아니고, 고통스럽게 임종했다고 해서 영적으로 겨울인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보는 것은 자연적 죽음의 외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이루어 온 사랑의 성질입니다.

 

이렇게 보면 도망함이 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하는지도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막13의 종말에 관한 말씀을 교회의 마지막에만 한정하지 않고 개인의 자연계 삶의 마지막에도 적용합니다. 그리고 그때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 사랑 없는 겨울의 상태인가, 아니면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생명 가운데 있는가입니다.

 

따라서 AC.34에서 flight비행이나 휴거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서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이동 자체를 flight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는 열쇠는 마지막 ’, ‘ 사람이 죽을 ’, 그리고 겨울은 사랑이 없는 이라는 세 표현입니다.

 

결국 이 인용의 중심은 어떻게 세상 끝에서 탈출할 것인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마칠 나는 어떤 사랑의 상태에 있는가?입니다. AC.34 전체가 말하듯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사랑 없는 신앙은 겨울의 햇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 삶의 중요성을 마지막 순간의 관점에서 다시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다 : 겨울의 빛과 봄의 빛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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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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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심화

1.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어떤 상태일까?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말인데요,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떤 묘사가 가능할까요? 저렇게만 말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요...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천적 사랑 가운데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읽으면 오히려 궁금증이 커집니다. ‘말로 표현할 없다니, 도대체 어떤 상태라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AC.34에서 실제로 말한 범위를 정확히 붙드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 상태를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적 천사들이 어떤 느낌을 느끼는지, 생각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보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워 천적 천사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AC.34 자체가 알려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천적 사랑 가운데있습니다. 둘째, 그 사랑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셋째, 그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있습니다. 넷째, 그 결과 그들에게는 놀라운 생명과 지성의 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함께 보면 어느 정도 그 상태의 윤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생명입니다. 바로 앞의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생명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과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이 놀라운 생명가운데 있다는 말은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에 따른 생명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지성의 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머리가 매우 좋다거나 지식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4가 강조하는 것은 천적 천사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성의 빛은 사랑 없는 지적 능력이나 교리 지식의 축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뒤에 나오는 반대 사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가운데 있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에게는 생명과 지성의 이 있고,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에게는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대조가 AC.34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천적 천사들의 지성의 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은 지성의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차가운 지식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결합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상태를 단순히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의 AC.32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이 사랑에 속한 신앙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을 이해할 때에도 같은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빗대어 조금이라도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아주 제한적인 비유는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하니까억지로 하는 경우와, 진심으로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여 기쁘게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이라도 후자의 경우에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앎과 그것을 하고 싶다는 애정이 더 가까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천적 천사들의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연적 수준에서 희미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 정도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모든 진리를 한순간에 직관적으로 아는 상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가 여기서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지성의 을 어떤 특별한 황홀감이나 감정 상태로 묘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왜 그 상태를 거의 말로 표현할 없다고 했는지도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경험했다고 말하는 천적 사랑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자연계에 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랑과 지식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리에 어긋날 수 있고,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살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신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실제 사랑의 삶과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에서 천적 천사들의 상태는 바로 그 반대편에 놓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결합되어 있고, 거기에서 생명과 지성의 빛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분리된 상태를 가지고 그 결합의 상태를 온전히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도 거의 말로 표현할 없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할 없다는 문장을 신비한 황홀경에 대한 묘사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AC.34의 문맥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신앙의 결합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지식은 겨울 햇빛처럼 생명을 내지 못하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킵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은 바로 이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천국에서 얼마나 충만한 생명을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상태를 완전히 묘사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무엇이 그 상태의 핵심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지식이 살아 있는 상태’,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아 생명과 지성의 빛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은 결국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AC.34가 천적 천사들의 놀라운 상태를 보여 주는 목적은 단순히 천국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바로 다음에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차갑고 어두운 상태를 대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삶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은 우리에게 아직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AC.34가 밝혀 주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생명과 빛의 근원은 천사들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질서가 그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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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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