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적이 있습니다.(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말인데요, 사례에 대한 생생한 얘기를 들을 있을까요? 생각이 즉시 멈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나에게 생생하게 보여진 바와 같습니다.여기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표현입니다. 사랑이 없어지면 왜 생각까지 멈추는 것일까요?

 

먼저 한 가지는 정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3에서 이것이 자신에게 생생하게 보여졌다고 말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것이 어떤 장면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에게서 사랑을 제거했더니 그 영이 갑자기 생각을 멈추었다는 식의 상세한 사례도 여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장면을 상상하여 구체적인 영계의 실험처럼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랑과 생각의 관계를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생각이 멈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말을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를 움직이는 생명의 근본적인 애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은 사랑과 완전히 독립하여 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합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고 싶기 때문에 방법을 궁리하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생각하며, 어떤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계속 이어집니다. 생각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생각을 움직이고 방향을 주는 더 깊은 곳에는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는 애정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이것의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깊은 관심이 생기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 일에 관한 생각이 계속 떠오릅니다. 반대로 아무런 관심도 목적도 없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오래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AC.33의 말을 완전히 증명하는 사례는 아니지만, 사랑과 관심과 목적이 사고의 방향과 지속성에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AC.33의 말은 단순히 관심 있는 것은 많이 생각한다는 심리적 관찰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 생명의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이 생명의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생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그 사랑에 속한 욕망을 모두 제거한다고 가정하면 생각도 즉시 멈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욕망(desires)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욕망이라고 하면 흔히 악하거나 육체적인 욕구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AC.33에서는 더 넓은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욕망은 사랑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향하여 움직이고 원하는 모든 애정적 경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선한 사랑에도 그 사랑에 속한 바람과 목적이 있고, 악한 사랑에도 그 사랑에 속한 욕망과 목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람에게 실제로 도움이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어떤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쓰임을 더 잘 수행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반대로 자기의 명예를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인정받고 높아질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각각의 생각 뒤에는 그 생각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의 핵심은 생각은 아무 가치가 없고 사랑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이해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어떤 사랑을 섬기느냐입니다. 참된 사랑에서 나오는 생각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나오는 생각은 겉으로는 똑같이 지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생명의 성질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AC.33의 앞뒤 문맥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성질이 생각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는 방향으로 형성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생각 역시 그것들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보고 곧바로 이것이 나의 진짜 사랑이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생각과 충동이 오갈 수 있고,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의 싸움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하며,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가입니다. 그런 지속적인 방향에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의 성질이 점차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말을 뇌의 작동이 물리적으로 정지한다거나 사람이 아무런 의식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의 초점은 자연적 생리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생각이 그 자체로 인간 생명의 최초 원인이 아니며, 그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랑을 제거한 사람을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원하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없고, 따라서 생각을 움직이는 생명의 동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에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을 살피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나는 무엇을 많이 생각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배후의 사랑과 목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33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말은 생각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생각은 고립되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연결되어 있으며,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각이 향하는 방향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AC.33이 마지막에 밝히듯 사람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AC.33, 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AC.33.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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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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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 본문,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말인데요, 제가 알기로 태고교회도 그 후대로 갈수록 황폐해져서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표현을 태고교회 전체를 향해 쓰면 안 되지 않나요? 그리고 바로 천적 천사들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 태고교회의 후손들일지라도 모두 천적 천사가 되었을 리는 없을 텐데, 이렇게 일반화해도 되는 건지요?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으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도 결국 쇠퇴하고 황폐해져 종말을 맞았는데 어떻게 태고교회 전체를 두고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바로 이어 천적 천사들을 언급한다고 해서 태고교회 사람들 모두가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먼저 첫 번째 질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한 교회를 그 교회의 고유한 영적 성격에 따라 말하는 경우와, 그 교회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퇴해 가는 과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AC 전체에서 천적 교회로 설명됩니다. 그 교회의 고유한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에 있고, 신앙이 그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태고교회의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언제나 동일한 사랑의 상태에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 역시 쇠퇴했고, 마침내 그 본래의 천적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AC.32의 표현은 그 교회를 특징짓는 고유한 영적 질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천적 교회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여기서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진리가 필요 없었다거나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흔히 생각하듯 서로 독립된 두 요소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신앙에 속한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에서 분리된 별도의 신앙을 그들은 참된 신앙으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의 전체 논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사랑은 광명체이고, 신앙은 작은 광명체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사랑과 신앙이 분리된 상태와 대조되는 예로 태고교회를 제시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이어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장을 자세히 보면 태고교회 사람들이 모두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태고교회에 관한 진술에 이어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즉 두 집단의 모든 개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나타나는 같은 천적 질서를 나란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라고 불리는 것과 천국에 천적 천사들이 있다는 것은 서로 관련되지만, 그렇다고 태고교회의 모든 구성원의 사후 운명이 자동으로 천적 천국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교회의 영적 성격을 말하는 것과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특히 태고교회가 후대로 가면서 쇠퇴하고 황폐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고, 모든 천국의 행복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그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얻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2의 관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사후 분류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심은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입니다. 태고교회라는 지상의 천적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서도, 천적 천사들의 천국적 상태에서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을 태고교회의 쇠퇴와 모순되는 절대적인 역사 진술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를 그 고유한 천적 성격에 따라 말하고 있으며, 그 성격을 오늘날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나란히 놓아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어떤 교회를 말할 때 그 교회가 나타내는 고유한 영적 성격과,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개인의 실제 상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였다고 해서 그 역사의 모든 사람이 천적 인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며,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태고교회가 후에 쇠퇴했다는 이유로 그 교회의 본래 천적 성격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AC.32에서 태고교회천적 천사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까닭은 둘을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양쪽에서 같은 천적 질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바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모든 사랑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가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함께 언급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AC.32, 창1:14-17, 해는 사랑이고 달은 신앙이다 :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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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AC.32.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위 AC.32 본문,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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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심화

2.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본문,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말인데요,  셋이 서로 무슨 상관이지요? 그러니까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는 이유와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것이 서로 무슨 상관인가요? 제가 너무 초보적이고 유치한 질문을 하는 같아 부끄럽습니다만...

 

AC.3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문장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 광명체’이고 신앙이 ‘ 작은 광명체’라는 것을 설명한 뒤, ‘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다’, ‘세대의 종말이다’, ‘사랑이 거의 없고 따라서 신앙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셋은 서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여기서 말하는 ‘ 아르카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막연히 ‘말씀 안에 있는 모든 비밀’이라고 생각하면 문장의 연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고 있는 아르카나는 창1의 두 광명체가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입니다. 사랑은 ‘ 광명체’이고 신앙은 ‘ 작은 광명체’이며, 사랑이 낮을 다스리고 신앙이 밤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앞의 AC.30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참으로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려져 있다는 아르카나는 무엇보다 ‘사랑이 신앙보다 먼저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영적 질서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나머지 두 표현과의 관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를 ‘세대의 종말’이라고 부르면서 그 상태를 곧바로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랑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바로 이 문장 자체가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왜 사랑이 없으면 신앙도 거의 없을까요? AC.30-32의 흐름에서는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교리를 알고 성경을 읽고 신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살아 있는 신앙과 같지 않습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의 생명도 함께 사라집니다.

 

바로 여기에서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실제 삶에서 서로 분리된 시대에는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 자체가 낯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생각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인정하느냐만으로 신앙을 설명하기 쉬워집니다. 그러면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더 작은 광명체라는 창1의 질서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AC.32의 논리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교회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집니다. 사랑이 거의 없어지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참된 신앙도 거의 없어집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실제 결합이 사라지면,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다’라는 영적 질서도 더 이상 알려지거나 인정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그 질서가 하나의 ‘가려진 아르카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24:29을 인용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 달을 신앙, 별들을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해가 먼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까지 떨어지는 모습은 AC.32의 논리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사랑이 소멸되면 신앙도 생명을 잃고, 마침내 신앙에 관한 지식들까지 본래의 영적 기능을 잃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아르카나가 가려졌다’는 것을 단순히 ‘사람들의 사랑이 부족해서 성경을 읽어도 속뜻을 직관적으로 알아낼 없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말씀의 상응과 내적 의미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2가 여기서 직접 말하는 초점은 그런 개인적 해석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글의 초점은 사랑과 신앙의 참된 질서 자체가 당시 교회의 상태 속에서 가려져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라는 질서가 실제 교회의 신앙과 삶에서 사라지면, 그 질서를 가르치는 말씀의 속뜻 역시 알려지지 않은 아르카나로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그것을 밝혀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문장의 배경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대의 종말’과 ‘아르카나가 가려짐’ 사이에 어떤 신비한 법칙을 따로 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사랑과 신앙의 상태’입니다. 교회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거의 소멸된 상태이고, 그 상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근원이자 생명이라는 질서 역시 더 이상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가 아르카나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스베덴보리가 창1의 해와 달을 단순히 ‘사랑과 신앙’이라고만 설명하지 않고 굳이 ‘ 광명체’와 ‘ 작은 광명체’의 질서까지 강조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독립적인 종교 요소가 아닙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의 시대에 가려져 있었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AC.32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읽으면 가장 분명합니다. ‘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는가? 지금은 교회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종말인가?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므로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도 거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라는 질서 자체도 알려지지 않고 가려져 있다.

 

이렇게 세 문장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같은 원리가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랑에 있으며,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회복되어야 참된 신앙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위 AC.32 본문,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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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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