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심화

2.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본문,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말인데요,  셋이 서로 무슨 상관이지요? 그러니까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는 이유와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것이 서로 무슨 상관인가요? 제가 너무 초보적이고 유치한 질문을 하는 같아 부끄럽습니다만...

 

AC.3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문장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 광명체’이고 신앙이 ‘ 작은 광명체’라는 것을 설명한 뒤, ‘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다’, ‘세대의 종말이다’, ‘사랑이 거의 없고 따라서 신앙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셋은 서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여기서 말하는 ‘ 아르카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막연히 ‘말씀 안에 있는 모든 비밀’이라고 생각하면 문장의 연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고 있는 아르카나는 창1의 두 광명체가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입니다. 사랑은 ‘ 광명체’이고 신앙은 ‘ 작은 광명체’이며, 사랑이 낮을 다스리고 신앙이 밤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앞의 AC.30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참으로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려져 있다는 아르카나는 무엇보다 ‘사랑이 신앙보다 먼저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영적 질서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나머지 두 표현과의 관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를 ‘세대의 종말’이라고 부르면서 그 상태를 곧바로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랑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바로 이 문장 자체가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왜 사랑이 없으면 신앙도 거의 없을까요? AC.30-32의 흐름에서는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교리를 알고 성경을 읽고 신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살아 있는 신앙과 같지 않습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의 생명도 함께 사라집니다.

 

바로 여기에서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실제 삶에서 서로 분리된 시대에는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 자체가 낯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생각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인정하느냐만으로 신앙을 설명하기 쉬워집니다. 그러면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더 작은 광명체라는 창1의 질서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AC.32의 논리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교회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집니다. 사랑이 거의 없어지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참된 신앙도 거의 없어집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실제 결합이 사라지면,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다’라는 영적 질서도 더 이상 알려지거나 인정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그 질서가 하나의 ‘가려진 아르카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24:29을 인용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 달을 신앙, 별들을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해가 먼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까지 떨어지는 모습은 AC.32의 논리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사랑이 소멸되면 신앙도 생명을 잃고, 마침내 신앙에 관한 지식들까지 본래의 영적 기능을 잃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아르카나가 가려졌다’는 것을 단순히 ‘사람들의 사랑이 부족해서 성경을 읽어도 속뜻을 직관적으로 알아낼 없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말씀의 상응과 내적 의미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2가 여기서 직접 말하는 초점은 그런 개인적 해석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글의 초점은 사랑과 신앙의 참된 질서 자체가 당시 교회의 상태 속에서 가려져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라는 질서가 실제 교회의 신앙과 삶에서 사라지면, 그 질서를 가르치는 말씀의 속뜻 역시 알려지지 않은 아르카나로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그것을 밝혀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문장의 배경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대의 종말’과 ‘아르카나가 가려짐’ 사이에 어떤 신비한 법칙을 따로 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사랑과 신앙의 상태’입니다. 교회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거의 소멸된 상태이고, 그 상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근원이자 생명이라는 질서 역시 더 이상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가 아르카나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스베덴보리가 창1의 해와 달을 단순히 ‘사랑과 신앙’이라고만 설명하지 않고 굳이 ‘ 광명체’와 ‘ 작은 광명체’의 질서까지 강조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독립적인 종교 요소가 아닙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의 시대에 가려져 있었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AC.32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읽으면 가장 분명합니다. ‘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는가? 지금은 교회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종말인가?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므로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도 거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라는 질서 자체도 알려지지 않고 가려져 있다.

 

이렇게 세 문장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같은 원리가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랑에 있으며,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회복되어야 참된 신앙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위 AC.32 본문,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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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

AC.32.심화 1.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 위 AC.32 본문,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말인데요, 이 글, 곧 ‘Arcana Coelestia’ 작성 시기가 1749-1756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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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심화

1. 세대의 종말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본문,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말인데요,  ,  Arcana Coelestia 작성 시기가 1749-1756임을 생각하면, 지금은 2026년이니 대략 270년이 흘렀어요. 세대의 종말 이렇게 길게 몇백 년씩 계속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랑이 ‘ 광명체’이고 신앙이 ‘ 작은 광명체’라는 아르카나가 특별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감추어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rcana Coelestia’가 18세기 중엽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때가 ‘세대의 종말’이었다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떻게 세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세상의 종말’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AC.32에서 이 표현은 바로 이어지는 설명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는 ‘이때에는 사랑이 없고, 따라서 신앙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뒤 마24:29의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해는 사랑, 달은 신앙,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세대의 종말’은 지구가 사라지거나 인류 역사가 끝나는 물리적 종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영적 종말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AC.32를 읽을 때 ‘스베덴보리가 18세기에 세계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예측이 빗나갔다’고 이해하면 그의 말뜻을 놓치게 됩니다. 그가 말하는 종말은 자연계의 시간표에 따른 지구의 파괴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그래도 종말이라면 언젠가는 끝나야 하지 않는가? 18세기의 종말을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되는 상태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여기서는 오히려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2가 기록되던 당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그 교회의 종말 상태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기 저작에서는 그 뒤에 일어난 사건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최후의 심판은 자연계에서 지구가 불타 없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그는 그 최후의 심판이 1757년에 영계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의 저작 전체의 시간 흐름을 따르면, AC.32의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말은 수백 년 동안 끝없이 계속되는 종말을 뜻한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AC가 기록되던 시기는 그가 말하는 종말의 국면에 있었고, 이후 최후의 심판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고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종말’의 의미도 조금 더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한 교회의 종말은 달력상의 어느 날 교회 조직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외적인 형태와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당도 있고, 성경도 읽고, 교리도 가르치며,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계속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내적인 생명,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참된 신앙이 소멸되면 그 교회는 내적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습니다.

 

AC.32가 바로 이 점을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신앙도 없고, 그 상태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으로 말씀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대의 종말’은 먼저 이러한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상에 여전히 기독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종말’과 모순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교회론에서 어떤 교회의 영적 종말과 그 교회에 속한 외적인 조직들의 역사적 존속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기존 교회 안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개인에게 사랑과 신앙이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보편적인 상태에 대한 판단과 개개인의 영적 상태에 대한 판단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회의 종말’이라는 말을 듣고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인과 모든 교회를 일괄적으로 영적으로 죽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시대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지상에서 특정 교단에 속한 모든 개인의 내면을 한꺼번에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어떤 이름의 교회에 속했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새 교회의 시작 역시 기존 교회 조직들이 어느 날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조직 하나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새 교회의 핵심은 새로운 교리적 빛과 주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영계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심판과 지상에서 새로운 교회의 진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확산되는 과정 역시 구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2의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표현 때문에 ‘ 종말이 270 동안 계속되고 있는가?’라고 물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문장의 ‘지금’은 우선 AC.32가 기록되던 당시의 ‘지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기독교회의 내적 상태를 종말로 보았고, 이후 자신의 저작에서 1757년 영계에서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AC.32의 한 문장만을 떼어 18세기의 ‘종말’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연장하기보다, 그의 저작 전체에서 이어지는 계시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AC.32의 본래 주제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세대의 종말’을 여기서 언급했을까요? 종말론 자체를 자세히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사랑과 신앙의 참된 관계가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는 사랑이고 달은 신앙이다’라는 단순해 보이는 상응 안에 당시에는 감추어진 하나의 아르카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AC.32에서 ‘세대의 종말’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언제 지구가 끝나는가?’가 아니라 ‘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어떤 상태에 이르렀는가?’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 자신의 저작 흐름을 따르면, AC가 기록되던 종말의 시대에서 1757년의 최후의 심판을 거쳐 새 교회가 시작되는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18세기의 ‘세대의 종말’을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하나의 긴 종말 기간으로 늘여 설명하기보다, 당시의 영적 상태와 그 이후에 이어진 사건들을 구별하여 읽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AC.32, 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AC.32.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위 AC.32 본문,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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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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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있었을까?

 

 AC.31 [3]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키고자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이 규례의 상응, 상징, 그 내적 의미는 몰랐다고 어디서 읽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요?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 표상을 행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의미를 몰라야 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 표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표상 교회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 타는 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 반드시 이런 상태이고,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반드시 이런 교회사적 보존을 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타는 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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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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