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5
그의 지식과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은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5, 6절)
해설
AC.75는 창2:1-17 개요의 세 번째 항목입니다. AC.73에서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뒤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창2에서 다루어진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5에서는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과 이성’이 말씀에서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이 사랑과 퍼셉션에 의해 인도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앞으로 살펴보게 되듯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은 영적 인간의 경우와 같지 않습니다.
원문은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라고 합니다. 여기서 ‘scientificum’은 영어 번역에서 ‘knowledge’로 옮겨졌지만, 현대 한국어에서 ‘지식’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학문적 지식에만 한정해서 이해하면 좁아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이 말은 인간이 감각과 경험, 교육 등을 통하여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받아들인 여러 앎과 관련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성이 사고하고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rationale’는 이성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현재 해설처럼 ‘scientificum은 경험과 학습으로 쌓인 지식이고 rationale는 그 지식이 질서 잡혀 이해로 올라간 상태’라고 너무 간단하게 두 층으로 고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AC에서 지식, 이성,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정교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AC.75에서는 우선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창2:5-6의 자연적 이미지들이 그것들을 묘사한다는 사실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지식과 이성을 묘사하는 것이 ‘초목과 채소’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나무는 높이 자라지만 초목과 채소는 땅 가까이 자라므로 지식과 이성이 중심이 아니라 섬기는 자리에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갑니다. AC.75는 식물의 높낮이를 근거로 그런 해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상응을 설명할 때에는 자연물의 외형에서 우리가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상응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원칙은 우리의 AC 작업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초목은 낮으니까 겸손’, ‘나무는 높으니까 높은 지혜’, ‘안개는 부드러우니까 은밀한 은혜’와 같이 자연적 이미지에서 곧바로 영적 의미를 추론하면 아름다운 묵상은 만들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상응은 단순한 시적 연상이나 비유가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와 관련되므로, 가능한 한 해당 AC의 직접적인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안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안개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계시나 교훈이 아니라 내적으로 스며드는 생명의 영향’을 뜻한다고 설명하고, 다시 비와 안개를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주입되는 방식’과 ‘안에서 밖으로 부드럽게 흘러가는 방식’으로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AC.75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안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창2:6을 직접 해설하는 곳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개요의 역할은 앞으로 펼쳐질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독자가 본문 전체의 구조를 먼저 볼 수 있도록 큰 대응 관계를 알려 주는 데 있습니다. AC.75에서는 ‘지식과 이성’이 ‘초목과 채소’라는 자연적 이미지로 묘사된다는 큰 틀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현재 해설이 강조한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라는 점까지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AC.75 자체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의 ‘scientificum et rationale’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의 특징이 사랑과 퍼셉션이라고 해서 그가 이성을 사용하지 않거나 자연적 지식을 가지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적 인간은 지식과 이성을 가장 바른 자리에 둔 사람이다’, ‘지식은 사랑을 섬기고 이성은 선을 밝힌다’, ‘그의 지식은 날카롭기보다 온화하고 그의 이성은 논쟁적이기보다 투명하다’는 기존 표현은 이번에는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천적 인간 이해와 어느 정도 연결할 수 있지만, 뒤의 ‘온화하다’, ‘투명하다’는 표현은 우리의 문학적 묘사입니다. 최종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과 우리의 묵상을 분명히 구별하는 편이 좋습니다.
AC.73부터의 흐름을 다시 보면 AC.75의 위치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AC.73은 창2 전체의 주체가 어떤 인간인지를 먼저 밝혔습니다. 그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 사람입니다. AC.74는 그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일곱째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5는 이제 그 사람 안의 특정한 능력, 곧 지식과 이성을 가리킵니다. 개요가 점차 천적 인간의 상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5를 ‘천적 인간의 인식 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가능하지만, 그 구조 전체가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뒤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되고,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지식과 이성, 생명, 지성이 각각 구별되어 차례로 등장한다는 점을 주의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지식과 이성’과 뒤에 나올 ‘지성’을 너무 빨리 하나의 ‘인식 능력’으로 묶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개요에서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면 일단 그 구별을 존중해야 합니다. 각각이 천적 인간 안에서 무엇을 뜻하고 서로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면서 확인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창2:5-6의 문자적 본문도 이 관점에서 다시 보입니다.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는 문장은 자연적 창조의 장면만을 읽을 때에는 식물이 생겨나기 전 땅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C.75는 속뜻에서 이 표현들이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관계된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묘사가 인간 내면의 상태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AC.75 단계에서는 ‘왜 아직 초목과 채소가 없다고 하는가?’, ‘왜 비가 아직 내리지 않았는가?’, ‘왜 땅을 갈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 ‘왜 안개가 땅에서 올라오는가?’를 모두 답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그런 질문들이 뒤의 상세 해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개요와 상세 해설의 역할을 구별하면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도 줄일 수 있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는 선이 먼저’라는 원리를 사용했습니다. 이 큰 구별 자체는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 계속 필요합니다. 그러나 AC.75에서 ‘그래서 천적 인간은 지식을 쌓거나 이성을 단련한다는 감각이 거의 없다’고까지 나아가는 것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이 외적인 교육이나 지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창2의 천적 인간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퍼셉션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앞으로 관련 AC가 직접 설명할 때 충분히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은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의 질서와 역할은 그의 천적 상태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또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더 이상 지식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주님 안에 있다’는 기존 표현도 수정하겠습니다. ‘이미 주님 안에 있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고, AC.75의 표현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기본 질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상태를 ‘이제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분별할 필요도 없는 상태’처럼 그리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AC.75가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단순화를 막아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의 천적 생명의 질서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중요한 독법을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천적 인간을 ‘이성을 초월했으므로 이성이 필요 없는 사람’으로 낭만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중심이라고 해서 진리와 지식이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인간의 여러 능력은 주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서 각각의 쓰임을 갖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우리의 지식과 이성은 나무처럼 자신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초목과 채소처럼 삶을 섬기는가?’라고 묻는 것은 이번 최종본에서는 빼겠습니다. 질문 자체는 좋은 묵상이지만 ‘나무=자기과시, 초목과 채소=겸손한 섬김’이라는 상응을 먼저 만들어 낸 뒤 그 위에 적용을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AC 해설에서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상응을 정확히 세우고, 그 위에서 적용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AC.75의 역할은 훨씬 간결하고 분명합니다. 창2의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말씀은 그것들을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라는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 형상으로 묘사되는지는 뒤에서 더 자세히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 가지 정도면 충분합니다. 첫째, AC.73부터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다시 거듭남의 문맥입니다. 둘째, 창2의 주체는 천적 인간입니다. 셋째, 그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창2:5-6의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이 큰 구조를 먼저 붙들고 뒤의 상세 해설로 들어가면 각각의 상응을 억지로 앞당겨 해석하지 않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차례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73에서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AC.74에서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 그리고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은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개요는 한 문장씩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 AC.76에서는 한층 더 근본적인 문제, 곧 그 천적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생명의 숨’을 통해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AC.75는 천적 인간을 지식이나 이성이 없는 신비적인 존재로 그리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것들이 말씀 안에서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되는지를 알려 주는 개요입니다. 지금은 그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초목과 채소와 땅과 안개의 세부적인 의미는 해당 절의 상세 해설이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읽기입니다.
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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