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4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광명체들(luminaries) 언급하실 , 그것들을 하나로 간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라고 라틴어 단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주님의 허락으로 다음과 같은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는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속에 있어, 하늘의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납니다. 이들 가운데는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주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 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천적 생명 안에 있지만, 자기는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 햇빛과 같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아,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도 정확히 이와 같은데, 이런 것들은 보통 말씀에서 세상과 위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와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겨울(winter)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3:18, 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flight)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day of affliction) 저세상에서의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해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한층 더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이것이 AC.34 전체의 중심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단순히 서로 잘 협력해야 하는 두 가지 종교적 요소가 아니라, 본래 하나를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14의 표현 자체에서 이 질서를 봅니다. 처음 광명체들이 언급될 때 복수의 광명체들을 가리키면서도 라틴어에서는 있으라에 단수형 sit가 사용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것을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앞의 AC.30-33에서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설명했는데, 이제 AC.34에서는 그 둘이 본래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더욱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의 천국적 생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적 지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늘 뜰의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AC.34에서 매우 중요한 대조입니다. 문제는 신앙에 관한 지식의 유무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은 주님을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마7:21 이하를 인용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삶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인용을 통해 AC.34가 말하는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님도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대조하는 것은 사랑의 사랑 없이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과 신앙의 결합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교리를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실제 삶과 결합되어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 차이를 자연의 매우 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굳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이 비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두 경우 모두 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에도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과 생각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빛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낳는 사랑과 결합되어 있지 않으므로 겨울의 햇빛처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키고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AC.34의 핵심을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중요하다고 요약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사랑과 신앙은 본래 하나이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참된 생명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자연의 모습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말씀에서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겨울과 봄, 빛과 열, 성장과 죽음 같은 모습들이 말씀 안에서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말씀하시면서도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막13:18도망함(flight)마지막 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동시에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 ‘환난의 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AC.34의 앞부분에서 설명한 사랑 없는 신앙을 매우 엄중한 모습으로 다시 보여 줍니다.

 

이 대목에서는 도망함을 현대 기독교 종말론에서 말하는 휴거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이 지상에서 사라지는가 하는 종말 시간표에 있지 않고, 사람이 마지막 때 또는 죽음을 맞을 때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상태가 겨울’, 곧 사랑 없는 삶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사후 상태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얼마나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불렀는가 하는 것만으로 천국의 생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AC.34가 제시하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는 천국적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이나 교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34 자체가 천적 천사들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룰 때 신앙에 관한 지식도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4는 앞의 AC.30-33을 더욱 선명하게 완성해 갑니다. AC.30에서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고, AC.32에서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AC.33에서는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성질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에서는 그 모든 내용을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없으며 하나를 이룬다는 말로 집약합니다.

 

결국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봄의 빛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고백이 있으면서 사랑의 삶과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을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을 때, 사랑과 신앙은 본래의 질서대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AC.34에서 두 광명체를 통해 밝혀지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어떤 상태일까?

 

AC.34, 심화 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AC.34.심화 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위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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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망함(flight) 마지막 때와  사람이 죽을  뜻하는가?

 

AC.34, 심화 3, ‘일’(flight)

AC.34.심화 3. ‘일’(flight)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13:18)에 나오는 ‘일’(flight)을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라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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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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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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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3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사랑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있을 수도, 그리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이라는 것도 있을 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합니다. 만일 사랑(loves), 같은 말이지만 욕망(desires)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적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에도 어떤 생명과 기쁨의 모습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참된 사랑과는 전적으로 반대됩니다. 참된 사랑이란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이웃을 미워하게 되고, 결과 주님을 미워하게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뿐이므로, 참된 생명도 하나뿐입니다. 하나의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heavens) 천사들이 누리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해설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매우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원리로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사랑도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33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따뜻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욕망(desires)을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도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신이 실제로 생생하게 보았다고 덧붙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생각과 삶을 움직이는 더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 무엇을 사랑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AC.33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을 보여 줍니다. 어떤 것을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사랑에 따라 기쁨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의 성질을 알려면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나옵니다. 사랑이 생명을 움직인다고 해서 모든 사랑이 같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의 것을 얻는 데서 강한 욕망과 활력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큰 기쁨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것도 분명히 하나의 살아 있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참된 사랑과 분명히 구별합니다. 참된 사랑은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미워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한다고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을 단순히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만으로 좁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이웃과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삶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사랑처럼 보이고 기쁨과 생명까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참된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는 첫 문장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며, 사랑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을 하나의 근원으로 연결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고,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사랑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경험되지만,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30-32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생명과 기쁨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3이 광명체 본문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사랑과 생명과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광명체라고 한 사랑이 왜 그렇게 중심적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지 신앙 옆에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 사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이고, 따라서 참된 생명도 하나이며, 그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이 흘러나옵니다.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생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을 얻거나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데서 생기는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은 우리에게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무엇이 나를 살아 있게 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도 강렬한 활력과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활력이 있다는 사실이나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생명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분별의 기준은 사랑의 성질과 그 근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참된 사랑,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을 때 거기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도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AC.3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는 말로 밝히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AC.33, 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왜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AC.33.심화1. 사랑을 제거하면 왜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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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명체 본문에서 갑자기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말하는가?

 

AC.33, 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AC.33.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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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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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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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 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을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을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 합니다. 또한 사랑을 가리켜서는 낮을 다스린다(rule by day) 하고, 신앙을 가리켜는 밤을 다스린다(rule by night) 합니다. 이런 내용이 바로 아르카나(arcana)인데, 특히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이제 제가 설명해도 좋다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있었습니다.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친히 예고하신 바와 같습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sun) 사랑, 어두워지는 사랑을, ‘(moon) 신앙, 특히 빛을 내지 못하는 신앙을, ‘별들(stars) 신앙 관련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러니까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의미합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heavens)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모든 천국 행복이 여기서 나오는데, 그레이트(great)함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으로도 결코 상상할 없습니다.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랑과, 결과 모든 생명, 사랑에서만 나오는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perceive). 그들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은,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광명체, (sun)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얼굴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얼굴은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the Lord’s Divine) (sun), 사랑으로, 그의 인성(his human)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light)으로 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 넷째 날의 ‘ 광명체’가 왜 처음에는 함께 ‘ 광명체들’이라 불리다가, 이어서는 하나는 ‘ 광명체’, 다른 하나는 ‘ 작은 광명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속뜻에서 사랑과 신앙은 모두 사람을 밝히는 광명체이지만, 둘의 관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이 ‘ 광명체’이고 신앙이 ‘ 작은 광명체’입니다. 또한 사랑은 ‘낮을 다스리고’, 신앙은 ‘밤을 다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 비교가 아닙니다. AC.30에서 이미 밝혔듯이 생명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때문에 둘 다 광명체이지만 사랑은 더 큰 광명체로,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르카나’라고 부르면서, 특히 당시의 ‘마지막 시대’에는 이 사실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세대의 종말’에 이르러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순서입니다. 그는 ‘신앙이 없어져서 사랑도 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AC.32가 말하려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에서, ‘’는 사랑을, ‘’은 신앙을,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랑이 어두워지고, 신앙이 빛을 잃으며, 신앙에 관한 지식들까지 그 본래의 자리를 잃는 교회의 영적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만 따로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교리와 신앙고백과 성경 지식이 남아 있을 수 있어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되면 그것은 본래의 생명을 잃어 갑니다. 그래서 해가 어두워질 때 달도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예로 듭니다.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고 하며,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의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가 없었다거나 신앙에 속한 것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으며, 모든 천국의 행복도 여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이나 즐거운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천적 상태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과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이것은 AC.29-30에서 계속 이어져 온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주님의 변화산 사건과 연결합니다. 마17:2에서 주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신성은 ‘’, 곧 사랑으로 표현되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는 ‘’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지혜와 빛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AC.32에서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응표 하나를 배우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상응 안에는 거듭남과 천국의 근본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도 빛을 잃고, 신앙에 관한 지식들 역시 본래의 영적 기능을 잃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천적 천사들이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에게서 조금도 얻지 않는다고 지각하듯, 사람의 참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역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사람 안에서 회복되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임을 점점 더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에서 ‘ 광명체’와 ‘ 작은 광명체’가 보여 주는 아르카나입니다. 사랑은 해처럼 중심에 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질서가 사라진 시대에 바로 그 질서를 다시 밝혀 주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글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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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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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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