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

번째 상태(state)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void,” “emptiness,andthick darkness.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사람의 거듭남에서 이어지는 여섯 상태라고 밝혔습니다. 이제 AC.7부터 그 상태들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 번째 상태는 빛이나 신앙이나 선한 행위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혼돈공허흑암으로 묘사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번째 상태를 앞서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를 모두 포함시킵니다. 따라서 여기서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이미 진행되어 어느 정도 영적 성과가 나타난 단계를 뜻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에 앞서 있는 사람의 상태 전체를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1의 첫 장면과 잘 맞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자연적 창조의 첫 장면이 아직 질서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듯, 그 속뜻에서 사람의 거듭남 역시 처음부터 완성된 영적 질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AC.7은 아직 혼돈’, ‘공허’, ‘흑암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지 않습니다. 그것은 뒤에서 창1:2를 본격적으로 설명할 때 더욱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세 표현을 지나치게 세분하여 각각 어떤 특정한 영적 요소와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 이전의 첫 상태를 이 세 말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AC.7의 중심은 사실 이 어두운 상태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문장의 방향은 곧바로 번째 움직임으로 향합니다. 아직 사람에게 빛이 나타났다고 하지도 않았고,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지도 않았으며, 신앙이나 사랑이 생겼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무엇인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창1:2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가 바로 그 첫 번째 움직임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것이 AC.7에서 가장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듭남의 첫 움직임을 사람의 결심이나 지식이나 노력에서 찾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아직 수면’, 물들의 얼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앞당겨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AC.7 자체의 초점은 물의 상응을 자세히 밝히는 데 있지 않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묘사되는 상태 위에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7은 거듭남의 출발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이 먼저 자기 안에 영적 빛을 만들어 낸 뒤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첫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번째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것이 주님의 자비입니다. 거듭남은 그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이 한 문장만으로 거듭남에서 인간의 자유와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결론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AC.7은 아직 그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후 거듭남의 상태가 진행되면서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시험을 겪고, 회개하며,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 앞서 AC.7이 먼저 밝혀 두는 것은 그 시작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은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가 함께 언급된 것과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AC.7은 유아기부터 거듭남 직전까지를 첫 번째 상태 안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유아기의 내적 구조나 유아에게 주어지는 선과 진리, 또는 리메인스의 형성과 보존에 관한 세부 교리를 모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내용은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할 때 충분히 다룰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을 읽으면서 우선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의 거듭남이 혼돈, 공허, 흑암으로 묘사되는 선행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 위에서 일어나는 번째 움직임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AC.7의 균형이 살아납니다. 사람의 처음 상태만 보면 어둡지만, 그 어둠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이미 그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자비만 강조하면서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시작하는지를 잊어버리면 거듭남이 왜 창조로 묘사되는지도 충분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준비가 됩니다. AC.7에서는 아직 빛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번째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 움직임으로부터 거듭남의 다음 상태들이 차례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AC.7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거듭남의 근원을 아주 짧은 말로 밝혀 줍니다. ‘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입니다.1의 새 창조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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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창1 개요, '전체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날’(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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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days), 여섯 시기(periods)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AC.6은 짧은 한 문장이지만, 이어지는 AC.7-13을 읽는 방향을 정해 주는 중요한 개요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을 사람의 거듭남에서 이어지는 여섯 상태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빛과 어둠, 궁창과 물, 땅과 식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마침내 사람의 창조를 읽을 때에는 그 자연적 대상들이 속뜻에서 사람의 거듭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주목할 말은 연속적 상태들(successive state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주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첫째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둘째에서 셋째로 이어지며 마침내 여섯째 상태에 이르는 하나의 연속된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앞으로 AC.7-13에서 각각의 상태를 살펴보면 앞의 상태에서 없던 것이 다음 상태에서 나타나고, 사람의 내적 생명이 점차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days)이라고 한 뒤 곧바로 시기(periods)라고 덧붙인 것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을 자연계의 24시간으로만 읽어서는 그가 설명하려는 속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1의 날들은 속뜻에서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거쳐 가는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이 점은 뒤의 AC.23에서 이 상태를 의미한다는 설명과 함께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만 이것을 그러므로 1 자연계의 창조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 설명하려는 것은 창1에 담긴 속뜻입니다. 문자에는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문자 안의 속뜻에서는 사람의 거듭남,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이 때문에 창조거듭남은 이 장의 속뜻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스스로를 조금 더 개선하는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여섯 상태를 보면 처음의 사람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서 출발하고, 그 가운데 빛이 나타나며,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하는 것들이 구별되고,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상태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질서가 속뜻에서는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열립니다.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전반적으로(in general)입니다. AC.6은 여섯 상태의 세부 내용을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AC.7-13에서 각 상태를 하나씩 개괄하기에 앞서, 이 여섯 날 전체가 무엇을 다루는지를 먼저 알려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만 가지고 각 상태의 기간이나 개인별 진행 방식까지 자세히 추론하기보다, 우선 여섯 날은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창1의 반복되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도 단순한 시간 표시와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뒤에서 저녁과 아침을 사람의 상태 변화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창1의 순서를 따라간다는 것은 자연계의 창조 순서를 따라가는 것인 동시에, 속뜻에서는 한 사람이 이전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옮겨 가는 거듭남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섯 상태를 인간이 스스로 밟아 올라가는 자기계발의 여섯 단계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 전체에서 생명과 빛과 선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다가 점차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아 가는 것도 중요한 흐름이 됩니다. 따라서 창1의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사람이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6 자체는 아직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에서의 참여 방식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그 문제를 자세히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근원과 능력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과, 1의 여섯 날이 그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6은 창1의 속뜻을 읽기 위한 첫 번째 안내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첫째 날에는 자연계에서 무엇이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사람의 거듭남에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하게 됩니다. 그리고 AC.7부터 그 여섯 상태가 하나씩 펼쳐집니다.

 

첫째 상태는 거듭남 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시작합니다. 둘째 상태에서는 주님에게 속한 것과 사람 자신의 것 사이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셋째 상태에서는 회개 가운데 선한 일을 행하기 시작하지만 아직 그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넷째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불붙고, 다섯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굳게 하며, 여섯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이 전체 흐름이 바로 AC.6이 말하는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입니다.

 

그러므로 창1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여섯 개의 서로 떨어진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이 진행되는 여섯 연속적 상태입니다. AC.6은 아직 그 상태들을 설명하지 않고 문을 열어 줄 뿐입니다. 이제 AC.7부터 그 첫째 상태가 무엇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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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이 모든 말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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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럭스’(influx, 流入)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인플럭스란,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인간 안으로 들어오는 흐름을 뜻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기본 생각입니다.

 

이 흐름의 방향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으로, 그리고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흐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은 먼저 이 속 사람에 닿습니다. 그다음, 이 생명이 겉 사람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우리의 생각과 의지, 곧 우리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생각과 의지가 육체의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이 구조를 하나의 그림처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태양에서 빛과 열이 내려와 식물에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이 줄기와 잎을 통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태양이 없으면 식물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은 먼저 식물의 내부 생명에 작용하고, 그다음 잎과 꽃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이 영적 태양이시며, 그 빛을 먼저 받는 자리가 바로 인간의 속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각과 의지가 사실은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작용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 점을 설명할 때, ‘주님만이 생명 그 자체이시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플럭스는 강제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항상 인간 안으로 흐르고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흐름을 받아들여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중심적인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속 사람이 열려 있으면 주님의 생명이 겉 사람으로 잘 흐릅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각과 행동도 점점 더 선과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닫혀 있으면 그 흐름이 겉 사람으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 경우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생각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바로 이 구조 속에서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겉 사람이 단순히 도덕적으로 조금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속 사람이 열리고, 그 속 사람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겉 사람으로 내려오는 과정입니다. 그 결과 겉 사람의 생각과 습관이 점점 변화됩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남을 ‘속 사람이 새로워지고, 겉 사람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인간 삶의 많은 현상이 설명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리를 듣고 마음 깊이 감동을 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같은 말을 들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속 사람의 상태에서 찾습니다. 속 사람이 열려 있으면 진리가 들어와 마음을 밝히지만, 속 사람이 닫혀 있으면 같은 진리도 단순한 지식으로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속 사람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흐름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어 보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는 매우 명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그 생명은 속 사람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흐릅니다. 마지막으로 겉 사람을 통해 행동과 삶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자유는 이 흐름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지점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여러 표현들이 훨씬 또렷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속 사람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그 사랑에 따라 형성된다’는 말은 그 생명이 겉 사람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질문해 오신 내용들을 하나로 연결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님의 생명은 속 사람을 통해 인간 안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죽음은 이 구조 가운데 육체라는 바깥 도구가 벗겨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설명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구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SC.39, ‘수도원, 수도사, 성인과 스베덴보리’

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 담았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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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7,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

위 SC.29 설명 중 ‘인간은 죽은 후 얼마나 빨리 영이 되는가?’에서 ‘육체의 기능이 멈추면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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