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 무엇인가? :  한국어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가

 

AC.9 체어리티(charity)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너무 좁고, ‘사랑이라고 하면 love와의 구별이 흐려지며, ‘선행이라고 하면 행위만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 상당히 가까워지지만,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charity라는 말에 담아 사용하는 모든 의미를 언제나 충분히 전달하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번역과 해설에서는 charity를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라고 음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낯선 말 하나를 굳이 더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개념을 가능한 한 같은 용어로 추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현대 영어에서 charity라고 하면 흔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이나 기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charity는 그보다 훨씬 넓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위도 체어리티에 속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체어리티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말 이웃 사랑 charity의 중요한 의미를 상당히 잘 전달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  주님을 향한 사랑 charity toward the neighbor,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함께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이해할 때 이웃이라는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를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갖는 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사람 안의 애정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의 선을 바라고, 이웃에게 선한 것을 행하며, 자신의 맡은 일을 정직하고 올바르게 수행하는 실제 삶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곧바로 선행이라고 번역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선행은 이미 밖으로 나타난 행위를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에는 행위뿐 아니라 그 행위를 낳는 사랑과 의지, 그리고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방향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행위는 체어리티가 삶 가운데 나타나는 중요한 형태이지만 체어리티 전체와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바로 AC.9의 표현도 이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charity 자체라고 하지 않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실제로 그런 선들을 행하지만, 아직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 선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겉으로 체어리티처럼 보이는 행위를 한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 안에 체어리티가 완전하게 살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AC.9의 사람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지만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히 외적으로 관찰되는 착한 행동의 목록만으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마음속의 좋은 의도만으로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 이웃의 선을 전혀 구하지 않는다면 체어리티의 삶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체어리티는 내적인 사랑과 의지, 그리고 그것이 삶에서 나타나는 선한 행위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진리도 중요합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무엇이 실제로 선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역시 맹목적인 호의나 감정적인 친절로만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악한 행동까지 돕는다면 그것을 참된 체어리티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당장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에는 사랑뿐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를 분별하는 진리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자선은 너무 좁고, ‘선행은 행위 쪽으로 치우치며, ‘사랑은 너무 넓고, ‘이웃 사랑은 상당히 가깝지만 문맥에 따라 여전히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에서는 charity 체어리티라고 두고 그 의미를 문맥에 따라 해설하는 방식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하면 love charity의 구별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love라고 할 때마다 그것을 체어리티라고 번역할 필요가 없고, charity라고 할 때마다 단순히 사랑이라고 번역하여 두 개념의 표현상 차이를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AC를 계속 읽다 보면 신앙과 체어리티’,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체어리티의 생명 같은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하나의 일관된 용어를 유지하는 것이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를 한 문장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완전한 정의라고 하기보다는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따라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려는 사랑과 삶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주님에게서 오는 이라는 말을 넣는 이유도 AC.9과 관계가 있습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살아 있는 선을 이해하려면 결국 선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유로 AC.9의 선한 행위들을 무가치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먼저 선을 배우고 행하면서, 그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차 알아 갑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도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 믿는 것과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것은 거듭남 가운데 서로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창4의 가인과 아벨에 이르면 훨씬 더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 AC.9에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교리를 한꺼번에 다 설명하려 하기보다 두 가지를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첫째, 체어리티는 현대적인 의미의 자선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둘째, 체어리티는 단순한 감정이나 외적 선행 어느 한쪽으로 축소할 수 없으며,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사랑의 방향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 번역에서 체어리티라는 조금 낯선 말을 만나더라도  그냥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charity라는 말로 가리키는 개념을 계속 추적하기 위한 번역어라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문맥에 따라 이웃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체어리티의  등의 설명을 덧붙일 수 있지만, 기본 용어는 체어리티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체어리티는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만도 아니고 남을 좋아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진리에 따라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 처음 나타나는 세 번째 상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구별을 기억하면 앞으로 AC에서 체어리티가 등장할 때 그 의미를 훨씬 정확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9, 창1 개요, '회개의 시작, 그러나 아직 생기 없는 선 : 자라나는 풀과 씨의 단계'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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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내용인,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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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회개의 상태인가?

 

AC.9에서 세 번째 상태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선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선의 근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왜 벌써 회개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AC.9 회개 내가 행하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깨달은 상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아직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바로 그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 선들을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 회개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사람이 이제 자기 선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고 말하면 순서가 조금 뒤바뀝니다. 그 깨달음이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AC.9의 설명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회개일까요? 이 질문에는 AC.9이 바로 이어서 말하는 사람의 실제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며,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합니다. 즉 이전 상태와 달리 이제 실제 삶에서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순히  죄를 짓고 몹시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생각하면 AC.9의 표현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에는 삶의 방향을 악에서 선으로 돌리는 실제적인 변화가 포함됩니다. 사람이 이전과 같은 삶에 그대로 머물면서 마음속으로 미안하다고 느끼는 것만이 회개의 전부는 아닙니다.

 

AC.9에서 바로 그 변화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기 시작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실제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영적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실제적인 선의 방향으로 삶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보면 회개 아직 생기 없는 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회개의 상태에 들어가 실제로 선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삶의 방향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아직 온전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거듭남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인 상태의 변화라는 AC.6의 설명과도 잘 맞습니다. 첫째 상태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첫째에서 둘째로, 둘째에서 셋째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상태인 회개 역시 완성된 영적 인간의 상태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AC.9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람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회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 완전히 알게 된 다음에야 선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배우고, 돌이키고, 말하고, 행하면서 거듭남의 다음 상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그래도 아직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회개하기  아닌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AC.9은 바로 그런 불완전한 상태를 세 번째 상태로 제시합니다. 사람은 실제 선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생기 없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 단계의 회개와 선한 행위가 모두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사람이 그 선들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직 참된 생명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극단으로 가기 쉽습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니  선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일을 하고 있으니 이미 영적으로 충분히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AC.9은 어느 쪽도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 선이 나타났지만 아직 생기가 없는, 거듭남 도중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회개는 무엇에 대한 회개일까요? AC.9 한 단락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목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공로를 죄로 깨닫고 회개하는 이라고 특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회개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새로운 방향, 곧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하기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AC.9 회개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극적인 회심 장면을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눈물이나 강렬한 죄책감이 있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에 실제 변화가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감정을 포함할 수 있지만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여기서 일반적인 회개론 전체를 AC.9 한 문장 안에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회개를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하는지는 별도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AC.9에서 우리의 우선 과제는 이 세 번째 상태가 왜 회개의 상태라고 불리는지를 이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두 번째 상태까지는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고 리메인스가 드러나는 준비가 이루어졌다면, 세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그 내적인 변화가 말과 행위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합니다. 회개가 실제 삶의 방향 전환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며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킵니다. 그래서 그 선은 아직 생기 없는 것으로 불립니다. 앞으로의 거듭남에서는 이 선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가 더 분명해져야 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9 회개의 상태는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연속성을 잘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회개했다고 해서 사람이 단번에 자기중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선의 근원을 완전히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돌이킴이 시작되고 실제 선이 나타나면서도 여전히 자기에게 속한 것이 섞여 있는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9에서 회개란 완성된 회개라기보다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돌이킴의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선에는 참된 생명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회개할 정도로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회개를 주로  잘못을 저지른  크게 뉘우치는 사건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AC.9에서 중요한 것은 죄의 크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사람이 이전 상태에서 벗어나 선을 향하여 실제로 말하고 행하기 시작하는 것, 그러나 아직 그 선의 참된 근원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이 미완성의 전환이 여기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AC.9.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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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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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심화

1.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에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나옵니다. ‘오늘날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왜 하필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어야 할까요? 그리고 실제로 주변을 보면 큰 고난을 겪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AC.8이 말하지 않는 것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을 겪어야 거듭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많이 거듭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원문 자체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없이는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예외의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중심을 사람에게 얼마나 고난이 필요한가?에 두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그 고난 가운데 무엇이 일어난다고 말하는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시험과 불행과 슬픔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하고, 세상 역시 사람이 자신의 삶과 쓰임을 수행하는 자리입니다. AC.8의 관심은 몸이나 세상을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평소에는 이 구별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몸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며 세상의 여러 관계와 일 가운데 살아갑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계획하는 것, 의지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삶의 전면에 놓입니다. 그런데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은 사람이 의지하고 있던 자연적 조건들이 언제나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합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병들 수 있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 자체가 사람을 영적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전까지 강하게 활동하던 몸과 세상에 속한 관심들이 그러한 상황에서는 이전과 똑같은 힘으로 작용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문맥입니다. 실제로 몸과 세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겉 사람이 파괴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죽은 것처럼 된다는 표현은 그것들의 활동이 잠잠해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AC.8에서 이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목적은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데 있습니다.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의 구별이 나타나고, 그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꺼내시기 위해 사람에게 고난을 보내신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AC.8은 각각의 불행이 왜 발생했는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면 주님께서 그의 사람을 꺾으려고 병을 주셨다고 해석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리메인스를 드러내기 위해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 글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AC.8이 설명하는 것은 고난의 개별적인 원인이 아니라, 거듭남의 이 상태에서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그 결과 이전에는 잘 구별되지 않던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는 상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후반부, ‘그런 고난 없이도 거듭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도 자연스럽게 답할 수 있습니다. AC.8 자체가 이미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거의 없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외의 이유를 굳이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 사람은 어린 시절 리메인스가 특별히 많아서 그렇다’, ‘이미 양심이 형성되어 있어서 그렇다’, 또는 겉으로는 몰라도 반드시 숨은 고난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AC.8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상태가 시험과 불행과 슬픔 없이도 가능한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지 않은 예외의 이유를 우리가 채워 넣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의 고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체계를 만들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에 주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우리가 외부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같은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영적 결과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AC.8 역시 시험, 불행, 슬픔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고난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고난 그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일부러 고난을 찾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불행을 겪지 않았으니 아직 제대로 거듭나지 못한 것인가?라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 영적으로 많이 성장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근거도 없습니다. AC.8이 우리에게 주는 기준은 고난의 양이 아닙니다.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두 번째 상태의 본질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고 참되다고 여기는 것이 정말 나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간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는지, 이것이 거듭남의 방향과 관련됩니다.

 

이렇게 보면 시험과 불행과 슬픔의 의미도 조금 달라집니다. 그것들은 주님께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반드시 보내셔야 하는 거듭남의 필수 과정이 아닙니다. AC.8오늘날이 두 번째 상태가 그러한 것들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관찰하면서, 그 이유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그 가운데 잠잠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고난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이것을 보내셨을까?라고 모든 원인을 해석하려 하기보다, 그 상황 가운데 내가 절대적인 것으로 붙들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주님께 속한 것과 자신에게 속한 것을 나는 구별하고 있는가?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편이 AC.8의 취지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 불행을 겪는 것을 보고 사람은 사람이 너무 강해서 주님께서 꺾고 계시는 것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AC.8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 자신의 내적 질서를 이해하도록 주어진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중요한 이유는 고통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AC.8의 표현대로라면, 그것들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구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의 중심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구별되어야 한다입니다. 고난은 그 구별과 관련하여 자주 나타나는 하나의 상황이며, 거듭남의 생명과 능력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에게서 옵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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