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2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천적 인간이라는 말은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천적이라고 하면 흔히 서로 잡아먹는 관계의 천적(天敵)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번역에서 사용하는 천적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어 celestial을 옮긴 말로, ‘하늘의’, ‘천국적인’, 더 정확하게는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천적 차원에 속한 성질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celestial spiritual을 매우 자주 구별합니다. 우리말로는 각각 천적 영적이라고 옮깁니다. 둘 다 자연적·세속적인 것과 대비되는 넓은 의미에서는 영적인 것에 속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전문적인 용법에서는 서로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은 특히 사랑과 선, 의지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되고, ‘영적은 신앙과 진리, 이해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됩니다.

 

AC.52는 이 차이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 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이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을 설명하는 시8에서는 짐승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물고기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어느 쪽에는 사랑이 있고 어느 쪽에는 사랑이 없다가 아니라 무엇이 먼저인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을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나 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거듭난 인간이며 AC.48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마찬가지로 천적 인간을 생각이나 진리가 필요 없는 사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52에서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도 새와 물고기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이해와 진리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에 속한 것들이 그 뒤에 놓이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 차이는 앞의 AC.51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 곧 닮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 친구라고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호칭들을 곧바로 높고 낮은 신분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두 상태의 성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AC.52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한다는 것과 대비됩니다.

 

이 대목을 쉽게 설명하려고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천적 인간은 좋아서 선을 행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정확한 정의로 굳히면 곤란합니다. 영적 인간 역시 사랑으로 행동하며, 천적 인간 역시 진리와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 의무  자발성보다 더 깊은 내적 질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이후 설명까지 넓혀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선과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형성되는 양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는 천적 인간과 퍼셉션이 특별히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천적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직감으로 안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한 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또한 양심이 퍼셉션보다 가치가 낮은 가짜 영적 기능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서로 다른 인간 상태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적이라는 말 자체도 여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어의 천적(天敵)이 아니라 celestial을 번역한 전문 용어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 자체에도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의 구별이 있으며,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적은 단순히 아주 영적인’, ‘영적보다  단계 높은이라는 정도 표현이 아니라 독특한 성질을 가진 범주입니다.

 

이 때문에 영적 인간이 계속 성장하면 모두 천적 인간이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조심해서 답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설명에서는 영적 인간 다음에 천적 인간이 등장하므로 하나의 더 깊어지는 흐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술에서는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 영적 천사와 천적 천사가 지속적으로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영적 단계 졸업  천적 단계로 승급한다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두 상태를 완전히 관계없는 두 종류의 인간으로 떼어 놓는 것도 현재 창세기 해설의 흐름을 놓칠 수 있습니다. 1의 거듭남에서 창2의 더 내적인 상태로 이어지는 진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둘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관계의 모든 세부를 하나의 간단한 단계표로 만들지 않는다는 태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느 상태든 생명의 근원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AC.49-50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선과 진리와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영적 인간이 이해와 신앙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지성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며, 천적 인간이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사랑에서 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두 경우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서로 다른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영적 천적을 만나면 단순히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라고 번역해 읽기보다 먼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습니다. 대체로 영적은 진리·신앙·이해와, ‘천적은 선·사랑·의지와 특별히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계적인 일대일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되고 각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AC.52에서 가장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이지만,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질서를 이루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적이라는 낯선 용어는 바로 그 차이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말입니다. 앞으로 태고교회, 퍼셉션, 창세기 2,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을 읽어 갈수록 이 구별은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AC.52, 창1:26, ‘다스림의 방향 전환 : 이해에서 사랑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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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2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그의 다스림이 사람에서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그러나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의 다스림은 사람에서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분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아래 두셨으니 7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짐승(beasts) 언급되고, 그다음에 (fowl), 그리고 뒤에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언급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점에서 그는 영적 인간과 다릅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에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fishes) (fowl)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beasts) 언급됩니다. Here thereforebeastsare first mentioned, and thenfowl,and afterwards thefish of the sea,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fishesandfowl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beasts.

 

해설

AC.52는 바로 앞 AC.51에서 제시한 영적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이다라는 구별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번에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다스림이 어느 방향으로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해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반대로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무조건 겉에서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C.52는 오히려 두 방향을 구별합니다.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하고,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은 어느 하나가 무조건 옳고 다른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영적 인간에 대해서는 창1:26의 순서가 그 증거가 됩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언급되고 짐승이 뒤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순서를 중요하게 봅니다. 물고기와 새는 이해에 속하며, 따라서 신앙과 관계되고, 짐승은 의지에 속한 것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순서는 영적 인간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앞의 AC.40AC.44 이후의 설명을 기억하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물고기와 새는 기억 지식 및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되었고, 짐승들은 의지와 애정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었습니다. 이제 AC.52에서는 그 각각의 상응을 다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왜 그것들이 그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지를 봅니다. 즉 말씀의 피조물 목록 자체가 영적 인간의 내적 질서를 표현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순서가 반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시8:6-8을 인용합니다. 거기서는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 그다음에 공중의 ’, 마지막에 바다의 물고기가 나옵니다. 1:26에서는 물고기와 새가 짐승보다 먼저였는데, 8에서는 짐승이 먼저이고 새와 물고기가 뒤따릅니다. AC.52가 이 시편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들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새와 물고기가 나옵니다. 반면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짐승이 뒤에 나옵니다. 이처럼 두 성경 구절의 배열 차이를 통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 차이를 읽어 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말을 천적 인간은 진리를 생각하거나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2가 말하는 것은 이해가 없어지거나 진리가 필요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 출발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도 새와 물고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새와 물고기가 옵니다. 따라서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지 이해에 속한 것들이 제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을 사랑 없이 머리로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이 이미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한쪽은 이성만 있고 다른 쪽은 사랑만 있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AC.52의 구별은 훨씬 섬세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 점은 기존 해설에서처럼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하고, 천적 인간은 좋아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예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 인간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도 사랑으로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천적 인간이라고 해서 모든 선택에서 아무런 분별도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2가 직접 말하는 것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다스림의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다스림은 무엇을 뜻할까요? 1:26에는 사람이 물고기와 새와 짐승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되어 있습니다. AC.52는 이것을 자연계 동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 문제로만 읽지 않고, 지금까지 물고기··짐승이 나타내 온 인간 안의 것들과 연결하여 읽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다스림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이 어떤 질서 아래 놓이는가 하는 문제와 관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스림=강압이 아니라 질서라고 한 문장으로 정의한 뒤, 8 아래를 감각·습관·기억·행동까지 모두 통제되는 상태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2의 상응이나 아래 둔다의 세부 속뜻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목하는 것은 짐승 물고기라는 순서입니다. 따라서 인용 구절은 그 목적에 맞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앞의 AC.47과 흥미로운 연결도 생깁니다. AC.4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창1:2425에서 생물들이 언급되는 순서가 달라진 것을 그냥 문체상의 변화로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는 그 순서 변화가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2에서도 다시 단어의 배열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단어 하나하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맥 속 배열과 순서에도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의 모든 단어 순서는 각각 반드시 별도의 상응을 가진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AC.52에서 창1:26과 시8:6-8의 서로 다른 배열을 의도적으로 비교하고, 그것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AC.51과 함께 읽으면 이 차이는 더 중요해집니다. 앞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52는 그 차이의 한 측면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하고, 천적 인간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모든 개인은 먼저 영적 인간이 되었다가 반드시 천적 인간으로 바뀐다는 일직선 단계표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 AC.51에서도 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분명히 구별하며, 이후 AC에서도 이 구별은 계속 중요하게 유지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서술에는 더 내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지만, 그것과 모든 사람의 영적 유형을 하나의 승급 과정으로 보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AC.52가 천적 인간에 대해 특별히 덧붙이는 표현은 사랑으로 선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출발점은 의지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하고, 그에 따라 말씀의 배열에서도 애정과 의지에 관계되는 짐승들이 먼저 나옵니다. 뒤이어 이해에 관계되는 새와 물고기가 놓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핵심을 단순히 이해에서 사랑으로 발전한다고만 정리하는 것보다, 두 질서의 방향을 함께 기억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며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며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1:26과 시8:6-8의 피조물 순서가 바로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AC.52는 그래서 아주 짧지만 중요한 글입니다. ‘물고기, , 짐승이라는 익숙한 상응을 다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서를 바꾸어 놓았을 때 인간의 내적 질서까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가 앞의 형상모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구별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52,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52.심화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천적 인간’이라는 말은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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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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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창1:26, ‘형상’(image), ‘모양’(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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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심화

1. 형상 모양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의 첫 문장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영적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  닮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형상과 모양이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형상은 조금 닮은 것이고 모양은 완전히 닮은 것이라는 뜻인가?

 

먼저 AC.51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은 형상 모양이 같지 않다고 분명히 구별합니다.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하고, 창세기 1장은 영적 인간을,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두 말이 단순히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형상은 70퍼센트 닮은 상태이고 모양은 100퍼센트 닮은 상태처럼 정도의 차이로만 이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한 성숙도의 숫자 차이보다 더 깊습니다. AC가 앞으로 진행되면서 그는 두 인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 신앙과 사랑의 관계, 양심과 퍼셉션 등의 차이를 점차 설명합니다.

 

AC.51에서 가장 먼저 주어진 단서는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이라는 표현입니다. 즉 형상에는 분명 원형을 따르고 닮는 관계가 있지만, 그것이 곧 모양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에 대응시킵니다.

 

이것을 앞의 AC.48과 연결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상태에 이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형상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단순히 진리를 머리로만 아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은 아직 미완성이고 모양만 완성이다라고 단순화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적 인간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참된 거듭남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라는 말 자체를 결함이나 실패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아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닮음 동일함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리 높은 천적 상태에 있어도 생명의 근원이 되지 않습니다. AC.39 이후 반복해서 본 것처럼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모양 역시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AC.51보다 뒤의 설명들이 더 많은 빛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구별하며,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고, 천적 인간은 사랑과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설명할 때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영적 인간은 머리로 살고 천적 인간은 가슴으로 산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도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고 천적 인간에게만 사랑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이는 사랑의 유무보다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결합되는가에 더 깊이 관계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인간이 계속 거듭나면 결국 천적 인간이 되는가? 현재 AC.51만으로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영적 인간과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을 구별하지만, 모든 개인의 거듭남을 영적 단계 졸업  천적 단계 진입이라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이후 저술에서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가 서로 구별되어 지속적으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영적 천적을 단순한 초급과 고급의 관계로만 생각하면 그의 전체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한편 창세기 1장과 2장의 연속된 설명 안에서는 분명 더 내적인 상태가 이어지는 흐름도 있습니다. 이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하므로 AC.51 한 문장만으로 모든 영적 인간은 결국 천적 인간이 된다거나 그 반대를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AC.51은 영적 인간을 빛의 아들 친구’,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까요? 이 호칭들은 두 상태의 차이를 보여 주는 성경적 증거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곧바로 친구보다 자녀가  단계 높은 신분이라는 인간관계의 서열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1의 직접적인 목적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 서로 다른 호칭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에는 영적 인간과 진리의 빛 사이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에 관해 인용된 요1:13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성질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지만, AC.51은 이 한 글에서 그 차이를 모두 체계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설명을 기다리면서 이 구별을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형상 모양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둘 다 주님을 닮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지만 동일한 상태는 아닙니다. ‘형상은 영적 인간에게, ‘모양은 천적 인간에게 해당하며,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전자와 구별되는 더 내적인 성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단순히 미완성  완성’, ‘낮은 단계  높은 단계’, ‘친구  아들이라는 하나의 서열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서 이 차이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그리고 이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살펴보면 AC.51의 짧은 구별이 왜 중요한지 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며,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이다. 형상은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른다. 둘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의 상태이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의 내적 성질을 분명히 구별한다. 이것이 AC.51이 앞으로의 긴 설명을 위해 놓아 두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AC.51, 창1:26, ‘형상’과 ‘모양’ :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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