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8

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강이 갈라져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 셋째는 이성이고, 넷째는 기억지식(scientia)인데,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오며,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10-14)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땅을 둘렀으며 12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0-14)

 

해설

AC.78은 창2:10-14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강과 네 갈래 강의 속뜻을 개요로 보여 줍니다. AC.77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동산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8에서는 그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지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강에서 네 강이 갈라져 나오는 모습으로 천적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질서를 이루는지가 묘사됩니다.

 

먼저 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한다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바로 앞 AC.77에서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그 동산을 적시며 흘러나오는 강은 지혜입니다. 여기서도 강이라는 자연물의 성질을 보고 우리가 임의로 물이 흐르므로 지혜도 흐른다는 식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78은 직접 = 지혜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우선 그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강은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2:10에서는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AC.78은 이 네 강을 차례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로 설명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속 사람에게 속하고, 셋째와 넷째는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따라서 네 강은 단순히 고대 세계의 네 지리적 수계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 안에 있는 내적·외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첫째 강은 선과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아직 창2:11의 비손이라는 이름과 그 주변의 금, 베델리엄, 호마노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개요이므로 첫째 강이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큰 대응 관계만 제시합니다. 이 선과 진리가 속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강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cognitio)입니다. 여기서 원문의 cognitio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Pottsknowledge라고 옮겼지만 스베덴보리는 뒤의 넷째 강에 사용하는 scientia와 다른 라틴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한국어에서도 둘을 모두 지식이라고 해 버리면 스베덴보리가 개요에서 세운 구별이 흐려집니다.

 

이번 번역에서는 그래서 cognitio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 다시 말해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을 아는 것과 관련됩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cognitio의 전체적인 전문용어 체계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AC에서 이 단어가 반복해서 사용되는 문맥을 보면서 그 의미 범위를 더 정확하게 잡아야 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둘째 강의 cognitio와 넷째 강의 scientia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와 둘째를 묶어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즉 선과 진리,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이 속 사람과 관련됩니다. 여기서도 사람이라는 말을 단순히 인간의 깊은 심리나 무의식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은 인간의 영적 구조와 거듭남을 이해하는 중요한 틀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열릴 수 있는 인간의 내적인 부분이며, 겉 사람은 자연계와 감각적인 삶을 향하여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속 사람은 선하고 겉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78의 네 강 자체가 그런 오해를 막아 줍니다. 셋째와 넷째 강, 곧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 역시 하나의 지혜에서 나옵니다. 문제는 겉 사람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조화를 이루고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자연적 삶에서 섬길 때, 이성과 기억지식도 온전한 쓰임을 갖습니다.

 

셋째 강은 이성입니다. 이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성을 속 사람에 속한 선과 진리보다 열등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성은 인간이 자연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분별하며 이해하는 데 중요한 능력입니다. 다만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이성이 스스로 최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과 질서 있게 연결됩니다.

 

넷째 강은 기억지식(scientia)입니다. ‘scientia역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 매우 주의해야 하는 용어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과학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감각과 경험, 학습 등을 통하여 기억 안에 받아들인 지식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기억지식이라고 옮기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연적·외적 차원의 앎이라는 성격을 비교적 잘 살릴 수 있습니다.

 

AC.75에서 이미 천적 인간의 scientificum et rationale’, 곧 지식과 이성이 언급되었습니다. AC.78에서는 이제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그 위치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AC.75에서 우리가 지식과 이성을 너무 빨리 천적 인간의 내적인 인식 구조라고 규정하지 않았던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AC.78에 이르러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들을 겉 사람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네 강 모두가 어디에서 나오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첫째의 선과 진리, 둘째의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 셋째의 이성, 넷째의 기억지식이 서로 완전히 독립된 네 능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지혜에서 나와 속 사람과 겉 사람에 각각 질서 있게 자리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단계 더 근원으로 올라갑니다. ‘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AC.78 전체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마지막 문장입니다. 네 강의 근원은 지혜이고, 그 지혜의 근원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지혜는 인간 자신의 뛰어난 지능이나 많은 지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이 질서 있게 흘러나옵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억지식을 많이 쌓아서 이성이 생기고, 이성을 충분히 발전시키면 선과 진리에 이르며, 결국 사랑과 신앙에 도달한다는 식의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구조가 아닙니다. AC.78이 제시하는 천적 질서는 반대 방향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로부터 속 사람의 선과 진리와 그것들에 관한 앎이 나오며, 또한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도 질서를 얻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 지식과 이성을 무가치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번호에서 이성과 기억지식도 에덴의 하나의 강에서 갈라져 나온 네 강 가운데 포함됩니다. 그것들이 올바른 근원과 질서 안에 있을 때에는 천적 인간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여기고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때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창2와 창3에서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고자 하고, 자기의 감각과 기억지식과 이성을 최종적인 판단자로 삼으려 할 때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78은 아직 그 타락을 다루는 번호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타락 이전의 올바른 천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근원에 있고, 거기서 지혜가 나오며,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나옵니다.

 

이것을 바로 앞 AC.77과 함께 읽으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AC.77에서는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78에서는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신앙은 에덴동산 안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서로 무관한 원리가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 전체가 그것들로부터 나옵니다.

 

다만 여기서도 사랑과 신앙을 완전히 동등한 두 출발점이라고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사랑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신앙이 그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과 AC 전체를 통해 더 정교하게 드러납니다. AC.78의 표현은 우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문장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강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조로 읽는 것은 에덴동산의 지리적 묘사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열어 줍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라는 네 강을 고대 지도에서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말씀은 이 강들을 통해 천적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어떻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까지 질서 있게 펼쳐지는지를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각각의 강 이름과 지역을 이번 개요에서 미리 상세히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첫째 강이 왜 선과 진리인지, 둘째 강이 왜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인지, 셋째와 넷째가 왜 이성과 기억지식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근거는 창2:10-14의 상세 해설에서 다루어질 것입니다. AC.78에서는 네 강 전체의 구조를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구조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속 사람에게 속하고, 셋째와 넷째는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그러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두 개의 서로 끊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모두 하나의 지혜에서 나오며, 그 지혜는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 안에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하나의 근원 아래 질서를 이룹니다.

 

이 점에서 AC.78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개요 번호입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겉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과 기억지식을 버리고 순수하게 내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로 연결되어,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많이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영적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디에서 출발하며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자기 지성과 기억지식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되면 질서가 거꾸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 아래 놓일 때 이성과 기억지식은 인간의 자연적 삶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을 담당합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서 공부보다 사랑이 중요하다’, ‘이성보다 신앙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단순한 양자택일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78이 보여 주는 것은 어느 하나를 버리는 구조가 아니라 모두가 올바른 근원과 질서 안에 놓이는 구조입니다.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속 사람뿐 아니라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질서 있게 합니다.

 

AC.73부터의 개요를 함께 놓으면 이제 천적 인간의 모습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일곱째 날이며, 그의 지식과 이성이 묘사되고,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며, 그의 지성은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동산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있고,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사랑과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지혜이며, 그 지혜로부터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 모든 흐름의 가장 깊은 근원에 있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입니다. 이것이 AC.78의 마지막 문장이면서 동시에 전체 번호를 묶는 핵심입니다. 천적 인간의 선과 진리, 그것들에 관한 앎, 이성과 기억지식은 서로 흩어진 능력들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하나의 지혜 안에서 질서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AC.78에서 에덴의 강과 네 강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 지리의 수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이 보여 주는 영적 질서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의 선과 진리와 그에 관한 앎이 나오며,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도 나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 전체가 하나의 지혜 아래 질서를 이루는 것, 이것이 에덴의 강과 네 갈래 강을 통해 묘사되는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입니다. (AC.78)

 

 

 

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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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두 나무 - 천적 인간의 지성과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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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신앙을 의미합니다. (8-9)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8, 9)

 

해설

AC.77은 창2:1-17 개요 가운데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이 초목과 채소로 묘사되었고,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이 바로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입니다. 그리고 그 동산 안의 여러 나무는 천적 인간의 퍼셉션을,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먼저 에덴동산이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에덴동산을 최초의 두 사람이 살았던 아름다운 낙원으로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2의 속뜻에서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합니다. AC.77에서는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그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덴은 단순한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지성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그렇다고 에덴’, ‘동산’, ‘동쪽각각의 상응을 지금 모두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AC.77은 개요이기 때문입니다. 왜 에덴이 지성과 관계되는지, 왜 그 동산이 동쪽에 있다고 하는지, 동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의 창2:8 상세 해설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큰 대응 관계, 천적 인간의 지성=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이어서 동산 안의 나무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보기에 좋은 나무들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하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창2의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단지 외부에서 배운 규칙이나 논증을 통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퍼셉션을 통해 그것을 지각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단순히 천적 인간이 알고 있는 여러 지식의 목록이 아니라 그의 지성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묘사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좋은 먹기에 좋은 을 구별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후자는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러나 본다 = 진리’, ‘먹는다 = 이라는 상응의 세부적인 근거를 AC.77에서 우리가 임의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상세 해설에서 스베덴보리가 그 의미를 어떻게 풀어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이 두 종류의 나무가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을 각각 나타낸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특히 여기서 퍼셉션을 일반적인 직감이나 느낌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왠지 이것이 맞는 같다고 느끼는 심리적 직관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퍼셉션은 태고교회와 천적 인간의 매우 독특한 내적 상태와 관련된 개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며,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나 주관적 확신과는 구별됩니다.

 

이 점은 앞으로 에덴 이야기를 읽는 데 중요합니다.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고 할 때, 그 지성은 단순히 논리적 추론 능력이 뛰어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동산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과 퍼셉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특별한 두 나무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사랑은 생명나무로, 신앙은 지식의 나무로 의미된다고 합니다. 이 대응은 창2와 창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먼저 생명나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인간적 감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문맥은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천적 인간에게 중심이 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천적 인간의 참된 생명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로 앞 AC.76에서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다는 점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다른 하나인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 특히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은 우리가 고정해 온 용어대로 faith입니다. 따라서 이 나무를 단순히 지식’, ‘학문’, ‘이성또는 인간의 지적 능력자체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77은 분명히 그것이 신앙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생명나무는 좋은 나무이고 지식의 나무는 나쁜 나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창4에서도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첫째가 되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2에서도 이 질서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이 중심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점에서 AC.77의 두 나무는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면, 핵심 문제는 단순히 어떤 나무의 열매를 먹었는가?라는 외적인 사건에만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인간 안에서 어떤 질서에 놓여 있는가라는 훨씬 깊은 문제가 말씀의 속뜻에 들어 있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창2:16-17과 창3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펼쳐지므로 AC.77에서 미리 모든 결론을 끌어오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히 tree of knowledge [scientiae]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Pottsknowledge라고 번역하면서 라틴어 scientiae를 함께 표시합니다. 이 단어를 현대적인 의미의 과학이나 학문적 지식으로 읽으면 본문의 뜻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어 체계에서 scientia와 관련된 표현은 기억에 받아들인 앎이나 지식과 연결되며, 여기서는 그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지식의 나무라는 명칭만 보고 지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AC.75AC.77을 비교하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합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지식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지식과 이성과 신앙이 사랑이라는 중심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진리와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의 선이 중심이며,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와 신앙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는 AC.77의 짧은 설명은 천적 인간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나무를 서로 적대적인 두 원리로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은 본래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고, 인간이 신앙에 속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알고 판단하려 할 때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뒤의 에덴 이야기와 창3에서 점차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이라는 표현과 생명나무의 사랑을 연결하여 동쪽은 주님이므로 에덴동산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이다라고 지금 곧바로 완성된 상응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방향이 뒤의 상세 해설과 연결될 수 있더라도, AC.77은 아직 각 요소의 세부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번 개요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대응 관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AC.77은 앞의 개요들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73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창2의 주제라고 했습니다.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고 했고,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을,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77에서는 그의 지성과 그 지성 안의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그리고 사랑과 신앙을 보여 줍니다. 개요가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기억할 것은 에덴동산 =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에덴은 단순히 잃어버린 옛 낙원의 지리적 장소를 찾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주님에 의해 거듭난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 동산 안에 있는 아름다운 나무들은 그의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그 중심에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중요한 것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모든 것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AC.76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주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생명의 숨으로 묘사되었다면, AC.77의 에덴동산 역시 그 생명을 받은 인간 안에 형성된 지성의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기 지혜로 에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서 그의 내면이 에덴동산으로 묘사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7의 핵심은 여러 상응을 따로 외우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있고, 그의 지성은 에덴동산으로 묘사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있고, 사랑과 신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앞으로 창2와 창3에서 인간의 내적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고 또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기초가 됩니다.

 

AC.77은 따라서 에덴동산 이야기를 읽는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을,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을 나타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붙들고 있으면 이후 에덴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의 정원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 퍼셉션과 인간의 지혜에 관한 깊은 말씀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AC.77)

 

 

 

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갈래 -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갈라져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cognitio)입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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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생명 -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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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the breath of lives)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7)

 

해설

AC.76 2:1-17 개요의 흐름을 한층 깊은 곳으로 이끕니다. AC.73에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2에서 다루어진다고 했고, AC.7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땅의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6에서는 그 천적 인간의 생명자체가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은 창2:7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을 불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의 생명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는 바로 앞에서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AC.76은 일반적인 생물학적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2:7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생령이 되는 장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의 속뜻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묘사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을 단순히 최초 인간의 육체에 호흡이 시작된 사건으로만 읽어서는 AC.76이 가리키는 속뜻에 이르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관심을 두는 것은 인간의 몸이 어떻게 생물학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천적 인간의 참된 생명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그 생명이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생명의 주체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불어넣으심이라는 말씀 자체가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원리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하며, 천적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사랑과 지혜와 생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내적으로 인정하는 인간입니다.

 

다만 AC.76의 한 문장만으로 이 불어넣으심의 모든 상응을 미리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명의 이라고 하는지, 그리고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는 창2:7의 상세 해설에서 스베덴보리가 구체적으로 밝힐 것입니다. 지금은 개요이므로 천적 인간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는 큰 대응 관계를 정확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은 바로 앞 AC.75와 비교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말했습니다. 지식과 이성은 인간의 중요한 능력이지만 그것 자체가 인간의 생명은 아닙니다. 이제 AC.76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에게 지식이 있고 이성이 있으며 지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스스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생명을 받아야 비로소 살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적 인간을 단순히 매우 지혜로운 사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핵심은 지식의 양이나 추론 능력의 탁월함에 있지 않습니다. AC.75가 그의 지식과 이성을 말한 뒤 곧바로 AC.76이 그의 생명을 말한다는 순서도 의미 있게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교한 이성을 갖추고 있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순서를 근거로 지식과 이성은 낮고 생명은 높다는 식의 위계적 상응을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 낼 필요도 없습니다. 개요에서 스베덴보리가 서로 다른 요소들을 차례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따라가면 충분합니다. AC.75에서는 지식과 이성, AC.76에서는 생명, 이어지는 AC.77에서는 지성을 말합니다. 각각의 의미와 관계는 뒤의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생명의 이라는 표현을 오늘날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셨다는 식으로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성경의 ’, ‘호흡’, ‘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있지만, AC.76 자체는 아직 그 교리적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생명의 =성령이라고 단순 등식으로 확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해당 절을 상세히 해설할 때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기다리는 것이 정확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Potts 영어가 the breath of lives라고 복수형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2:7의 히브리어 역시 문자적으로는 생명들의 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보고 곧바로 여러 종류의 생명이나 몇 단계의 생명을 뜻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AC.76은 그 복수형 자체의 속뜻을 아직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종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익숙한 표현과 한국어의 자연스러움을 고려하여 생명의 으로 두고, 상세 해설에서 필요할 때 원문의 복수형을 다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6은 또한 창1의 거듭남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1의 여섯 날 동안 사람에게 빛이 생기고, 선과 진리가 구별되고, 신앙에 속한 것들이 생겨나며,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고,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과정이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거듭남의 근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입니다. 2:7에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은 천적 인간 역시 자기 힘으로 천적 생명을 획득한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임을 다시 보여 줍니다.

 

이것은 proprium의 문제와도 앞으로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자기에게 있는 생명과 선과 지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려는 방향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질서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입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AC.76 자체가 아직 proprium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그 문제를 길게 전개하기보다 앞으로 창2의 본문이 그것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 따라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따라서 AC.76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지식과 이성이 있지만 그의 참된 생명은 그것들 자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말씀은 그 사실을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이라는 형상으로 묘사합니다.

 

AC.73부터 지금까지의 개요를 함께 놓으면 흐름이 더욱 또렷해집니다. AC.73에서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전환을 말했습니다. AC.7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이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개요가 한 문장씩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열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생명의 숨이 정확히 어떤 물질인가?가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답은 인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존재이며, 천적 인간은 이 질서를 가장 내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2:7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은 바로 그 천적 생명을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AC.76)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두 나무 - 천적 인간의 지성과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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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은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5-6절)

AC.75그의 지식과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은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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