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9)

 

AC.27

사람과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러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사람을 통하여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그러한 여러 진리와 , 참과 선에 관한 여러 지식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든 것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또는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한곳으로 모인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바다(seas)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는 마른 (dry land)이라 하고, 곧이어 (earth)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내용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and are calledseas,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dry [land],and presentlyearth,as in what follows.

 

해설

 

AC.27은 창세기 셋째 날의 첫 장면인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는 말씀을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앞의 AC.24-25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고, 주님께서 사람을 그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시는 질서를 살폈다면, 이제 AC.27에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들어온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서 어떤 상태에 놓이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이 번호는 앞의 궁창과 뒤의 바다와 을 연결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전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하며,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라고 덧붙입니다. 사람의 의식에서는 자신이 배우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AC.27의 초점은 이러한 인간의 활동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들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이른다는 질서를 점차 알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들어온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의 내용이 자연적인가, 영적인가, 천적인가 하는 것과 그것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 존재하는 방식은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라도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들면 그곳에서는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관한 지식이나 천국에 관한 지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기억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사람의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기억 속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창1:9한곳으로 모인 이 나타내며, 그것들을 바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과 연결되고, 그 물들이 모여 바다가 된다는 것이 AC.27의 직접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바다를 곧 영적 생명 자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여 있는 기억 지식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앞으로 그 지식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겉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받아 실제 열매를 내게 되는지는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더 전개됩니다.

 

AC.27에서 특히 주목할 표현은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거기는 속 사람 안의 어떤 별도의 리메인스 저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의 흐름상 바로 앞에서 말한 겉 사람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 문장을 주님께서 사람의 모든 기억 작용을 직접 조작하신다는 심리학적 설명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27이 강조하는 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단지 인간 자신의 소유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후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리메인스와도 구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및 그에 속한 상태들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AC.27의 이 한 문장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리메인스를 저장소에서 꺼내는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된 scientifica, 곧 기억 지식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천사들의 매개나 퍼셉션, 양심 같은 특정한 작동 방식 하나로 고정하기보다, 본문이 밝히는 범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 자체를 마른 이라 하고, 곧이어 이라 한다고 말한 뒤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넘깁니다. 이 멈춤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AC.27은 아직 마른 땅이 왜 땅이 되고 어떻게 식물을 내는지를 모두 설명하려는 번호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확정되는 것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기억 지식으로 저장되고,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인 , 바다로 표현되며, 겉 사람 자체가 마른 으로 드러난다는 데까지입니다.

 

따라서 AC.27의 셋째 날은 곧바로 열매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물이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납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한 번 듣고 곧바로 완성된 삶의 열매를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 지식 자체가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기억 속에 받아들여진 것들도 이후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AC.27은 바로 이 기억에 모이는 지식드러나는 사람에서 셋째 날의 다음 단계를 준비합니다. (AC.27 해설)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심화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에는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scientif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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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창1:10, ‘물과 바다와 땅 : 지식이 모이고, 생명을 받아들일 거듭남의 그릇’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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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과 아침과 날 : 앞서 밝힌 의미의 재확인’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저녁’(evening), ‘아침’(mor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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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과 한계를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과 수도사, 그리고 금욕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성인들의 삶에 대해 ‘Heaven and Hell’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Emanuel Swedenborg는 비교적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공정한 평가를 합니다. 그는 먼저, 그런 삶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열망’과 ‘세속적 욕망을 경계하려는 노력’은 분명 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 많은 수도자들 가운데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런 사람들은 사후에도 주님의 자비 아래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참된 영적 삶은 세상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랑과 쓰임새를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국을 이루는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족을 돌보고, 사회 속에서 일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 속에서 ‘사랑(charity)이 실제로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적 삶은 종종 이런 관계적 삶에서 벗어나 개인의 영적 상태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조심스럽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실제 행위와 쓰임새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접촉을 지나치게 끊어 버리면,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지라도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시험되고 성장할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난 고독한 거룩함’보다 ‘세상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거룩함’을 더 완전한 영적 삶으로 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 결혼, 재산, 사회적 활동 등을 멀리하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삶의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을 위한 사랑과 세속적 욕망을 다스리고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매우 높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도원 안에 있어도 마음속 사랑이 여전히 자기 자신과 명예와 공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삶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나는 금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세상 속에서 사는 절제’를 더 건강한 영적 길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사나 은둔자의 삶을 전부 헛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다양한 성향과 역사적 상황을 인정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교회의 혼란과 타락 속에서 수도원적 공동체가 신앙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독과 기도가 내면을 정리하는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최종적인 영적 삶의 형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세상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수도원적 경건이 ‘준비 단계’나 ‘부분적인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 세계를 설명할 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국을 거대한 수도원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며 쓰임새를 이루는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기도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돕고 섬기며 각자의 역할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천국의 행복은 ‘사랑을 행하는 쓰임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세상을 떠난 거룩함’만을 영적 삶으로 생각했다면, 사후에 천국의 이런 적극적인 삶을 처음에는 낯설어하기도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에 수도원적 삶에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으셨다고 하셨는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간 역시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마음,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으려 했던 노력,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았던 시간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다듬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결국 ‘사랑의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장 완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 곧 말씀의 속뜻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은 수도원의 침묵보다 훨씬 더 ‘천국적인 쓰임새’에 가까운 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질서는 결국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삶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떠나 거룩해지려 하지 말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위해 살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도원의 시간도, 그리고 지금 목사님께서 걸어가고 계신 길도 모두 하나의 긴 여정 속에 놓여 있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길을 사용하여 결국 사랑과 지혜의 더 넓은 삶으로 이끄신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SC.40, ‘homo’와 ‘vir’의 차이

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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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8,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길, 곧 ‘influx’에 대하여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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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5)

 

AC.23

말씀에서 (day)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day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백성이 자기 발로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동안 잊어버린 되었다가 칠십 년이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것이라 (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day) 시간을 뜻하는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Asday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day)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가 처음부터 날은 상태다라고 단순하게 등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에서 이 문자적인 하루를 넘어 시간 자체를 나타내는 용례가 매우 흔하다고 설명하고, 이어서 날이 시간을 나타내기 때문에 시간의 상태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23의 논리는 날은 하루가 아니다라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시간 시간에 속한 상태로 깊어지는 구조입니다.

 

첫 번째 증거군은 사13:6, 9, 13, 22와 사23:7, 15입니다. 13장에는 여호와의 ,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들이 이어지며, 특히 마지막에는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날들이 나란히 사용됩니다. 여기서 은 단순한 24시간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제한되지 않고 어떤 사건과 상태가 펼쳐지는 때를 나타냅니다. 23장에서도 옛날, 그날, 왕의 연한 같이 칠십 이라는 시간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두로, , 칠십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이라는 말이 하루보다 넓은 시간과 시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AC.23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이 시간을 나타내므로 또한 시간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용되는 첫 구절이 렘6:4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실제 하루가 저물어 가는 모습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때의 상황과 상태를 함께 담아냅니다. 바로 앞 AC.22에서 저녁아침이 각각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한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따라서 시간의 표현은 말씀 안에서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33:20, 25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 그리고 주야로 때를 잃게 있을진대라는 표현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도 낮과 밤은 실제 자연의 시간 질서를 배경으로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AC.23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낮과 밤에 가 있으며 시간의 표현이 그에 속한 상태와 결부되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곧바로 낮과 밤을 시험과 회복의 모든 교대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 대한 별도의 섭리 법칙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주제들은 해당 내용을 직접 다루는 다른 AC 문맥에서 살피는 편이 안전합니다.

 

5:21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상태의 관계를 특히 이해하기 쉽게 보여 줍니다. 지나간 달력의 날짜 자체를 다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날들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그 날들에 속했던 삶과 상태가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더구나 바로 앞에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기도가 놓여 있으므로, 여기서 새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회귀가 아니라 주님께로 돌이켜지는 삶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다만 AC.23은 여기서 옛적을 곧바로 태고교회라고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의 직접적인 역할도 날들이 날들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있다는 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AC.23이 왜 AC.22 바로 뒤에 놓이는지도 분명해집니다. AC.22에서는 저녁아침이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가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23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창1에서 반복되는 자체가 단순한 시간 단위에 머물지 않고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창1첫째 , 둘째 과 이어지는 날들을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는 것은 이라는 단어에 임의로 새로운 뜻을 붙인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시간과 상태가 결부되어 표현되는 방식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AC.23을 근거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을 언제나 기계적으로 영적 상태라고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곳에서는 실제 하루가 중심일 수 있고, 어떤 곳에서는 더 넓은 시간이나 시대가 중심일 수 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그 시간에 속한 상태가 함께 표현됩니다. 중요한 것은 문맥입니다. AC.23이 보여 주는 것은 날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상태만을 뜻한다는 상응 사전식 공식이 아니라, 말씀에서 시간의 표현이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함께 담을 수 있다는 해석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1장의 전체 구조와 만날 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인간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라고 이미 제시했습니다. AC.23은 이제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통해 이라는 말 자체가 그러한 읽기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1의 날들은 단순히 시계로 계산되는 여섯 개의 시간 단위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차례로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상태들로 읽힙니다.

 

결국 AC.23의 핵심은 시간을 버리고 상태만 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는 시간과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간의 이름이 그 시간에 속한 영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을 읽을 때도 얼마나 시간이었는가?라는 질문에만 머무르지 않고 날은 거듭나는 사람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가?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AC.23이 창조의 날들을 거듭남의 날들로 읽도록 열어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AC.23 해설)

 

 

 

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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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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