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자들이 아주 흔히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사야에 보면,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한 주님의 강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이는 오류들을 깨뜨리거나 욕정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구절들은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AC.25는 앞선 AC.24에서 제시한 거듭남의 중요한 원리를 선지서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AC.24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주님께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시며, 사람이 아직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것들, 심지어 감각의 오류와 욕정까지도 사용하여 그를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이끄시고 굽히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25는 선지자들이 사용하는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표현 역시 바로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사44:24가 인용됩니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없이 땅을 펼쳤고.문자적으로 읽으면 천지 창조를 말하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사람의 거듭남을 말할 때에도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AC.24에서 속 사람을 하늘’, 겉 사람을 과 연결했으므로, 여기서도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난다면 주님께서 그 안의 잘못된 것들을 모두 없애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AC.25는 놀랍게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는 사42:3을 인용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그리고 이 말씀을 오류들을 깨뜨리거나 욕정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오류욕정이라는 말 때문에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오류와 욕정 자체가 좋은 것이므로 그대로 보존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현재 상태를 단번에 파괴하여 다른 존재로 바꾸시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AC.24가 이미 설명했듯이, 거듭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의 현재 상태를 통하여 그를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잘못된 것을 통하여 올바른 것으로 인도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좋은 일을 했다는 만족감을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AC.25가 직접 제시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불완전한 동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선을 행하도록 이끄시면서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상태 자체를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그 상태에 영원히 머물게 하지 않고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하여 굽히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굽히신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현재 상태를 무시하고 강제로 선한 사람을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들을 통하여 점차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AC.24에서 천국의 아르카나라고까지 한 내용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이미 완전해진 뒤에 주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이 아니라, 아직 오류와 욕정과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 남아 있는 바로 그 사람을 붙드시고 선과 진리를 향하여 이끄시는 과정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사42:5가 이어지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소산을 내시며라고 다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AC.25가 사42:3과 사42:5를 이어 인용하는 것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주님의 방식과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치는거듭남의 일이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께서는 현재의 인간을 단순히 부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이끄시고 굽히시면서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일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44:24에서는 여호와께서 홀로하늘을 펴고 땅을 펼치신다고 하고, 42:5에서도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펼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실제로 진리를 배우고, 악과 싸우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과 진리의 근원과 사람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AC.24-25의 흐름은 오히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에게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여기다가 점차 그것들이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 가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AC.25에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창조의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거듭남의 질서 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일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인간의 현재 모습을 무시한 강제적 파괴가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붙드시고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하여 이끄시고 굽히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사42장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AC.25에 인용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오류와 욕정을 선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때문에 우리를 버리거나 단번에 부수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불완전한 상태에서부터 우리를 이끄셔서, 마침내 사람에게 속한 것보다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가 삶을 이끌도록 하십니다. AC.25가 보여 주는 거듭남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인도입니다.

 

심화

1.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42:3)

 

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의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거듭남 이해가 매우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꺼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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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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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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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1:6, 7)

 

AC.24

하나님의 영, 곧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첫 빛,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는 선과 진리는 없는 그런 빛을 주신 후,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곧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2)을 구별하십니다. 속 사람을 궁창(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이라 하며,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이라 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의 그 앎입니다. 반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스베덴보리 자신의 정확한 정의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27번, 896번, 1486번, 2718번, 5212번을 보시고, 또 편집자의 서문 주해도 참고하세요. 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 as when we say “I do not merely think so, I know 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 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 896, 1486, 2718, 5212. 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 [Reviser]

 

[2]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에는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며, 그 결과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그다음에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나오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고는 아직은 아니고 말입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7, 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Gen. 1:7–8).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이런 실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이러한 자기 본성, 곧 이런 자신의 것들을 통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들의 구별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궁창 위의 물들이 언급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아르카나인데, 사람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된 것과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또는 (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되며, 이런 이유로 이제 궁창, 곧 속 사람을 가리켜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곧 ‘궁창’의 창조가 인간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풀어 주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주님의 자비가 리메인스(remains)를 품고, 빛이 처음 인식되기 시작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내적 구조의 분화’,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되고 선한 지식을 ‘’으로 이끌어 내시고, 주님 자신이 선 자체이시며, 진리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으로 말미암는, 그런 첫 빛을 주신 뒤에야, 비로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다시 말해, ‘구별은 빛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섞여 있고, 구별은 혼란을 낳을 뿐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가리켜 ‘궁창(expanse)이라고 합니다. 궁창을 가리켜 위와 아래를 나누는 중간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늘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속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깊은 층이라는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머무는 하늘의 영역임을 뜻합니다.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이라 하고,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이 구분은 지식의 내용 차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들이 속하는 차원과 쓰임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이 구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혹시 알아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고, 그 결과 속 사람의 것들까지도 동일한 차원으로 끌어내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면, 명확한 구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혼탁한 하나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면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도 매우 섬세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라고만 하십니다. 곧바로 위와 아래의 물을 명확히 나누라고는 하지 않으시고요.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인식할 뿐, 그 안의 질서와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의 구별이 명확히 언급되는데, 이런 문장 순서 자체가 인간 거듭남의 실제 진행 순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중요한 인식을 하나 얻게 됩니다. 속 사람이 존재하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 생각의 산물로 여깁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섭리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해서도, 사람을 실제로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착각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궁창 아래의 물, 곧 겉 사람의 지식과 활동이 언급되고, 그다음에야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됩니다. 이는 인간의 경험 순서에 맞춘 주님의 배려, 신적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천국의 아르카나를 밝힙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들, 곧 감각의 착각과 욕정에 의해서조차,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한테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오류와 약함마저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것이 자기중심적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 얼마나 점진적이고 주님의 인내로 가득한지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방향성의 선언입니다.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땅에서 하늘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이 과정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며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은 ‘하늘’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간 안에 하늘이 세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내적 영역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하늘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자비로 세우신 것입니다. AC.24는 이처럼 거듭남의 구조적 중심을 밝혀 주며,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이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재조직에 대한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C.24.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종류의 지식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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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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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창1:5, '날'(day)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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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living soul) 짐승(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living souland thebeast.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image.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가축을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지면의 맺는 모든 채소와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해설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며,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이 생기를 지닌 것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AC.12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섯 번째 상태를 단순히 사랑의 단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이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먼저 신앙이 사랑을 만들어 내고, 사랑이 뒤따라 행동한다는 식의 고정된 공식으로까지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2에서 분명한 것은 이제 신앙과 사랑이 서로 떨어져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앞의 상태들과 비교하면 여섯 번째 상태의 특징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AC.9의 세 번째 상태에서는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가 나타났지만 아직 생기가 없었습니다.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었고, AC.11에서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고 생기 있는 것들을 산출했습니다. 이제 AC.12에서는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의 여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물들과 연결됩니다. 다만 AC.12는 개요이므로 여기서 짐승각각의 세부적인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의미는 뒤에서 창1의 여섯째 날을 본격적으로 해설하면서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다섯째 상태에서 이미 생기를 지닌 것들이 등장했고, 여섯째 상태에서도 사람에게서 살아 있는 것들이 산출된다는 흐름입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식물에 이어 물고기와 새가 나타나고, 다시 땅의 생물과 사람이 등장하는 순서가 거듭남의 상태들과 연결되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AC.12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은 이제 영적 인간이 되며, 그를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6-27하나님의 형상과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형상의 모든 교리적 의미를 한꺼번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2가 지금 직접 제시하는 것은 사람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함으로써 영적 인간이 되고, 그 영적 인간을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형상이라고 하는지, ‘모양과는 어떻게 다른지는 뒤의 관련 본문에서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형상을 단순히 외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는 분명합니다. 1하나님의 형상은 여기서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형상이란 정확히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구조다라고 하나의 정의로 고정하기보다, AC.12가 제시하는 관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이 영적 인간에게 두 종류의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영적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 생명입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그의 음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음식이라는 표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람의 몸이 음식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영적 생명도 그것을 기쁘게 하고 유지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AC.12에서 그것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입니다.

 

다만 이것을 이제 진리 공부와 선행이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이 되었다고 너무 심리적으로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문은 영적 생명이 그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영적 생명을 기쁘게 하고 유지하는 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자연적 생명도 존재합니다.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영적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몸과 감각에 속한 자연적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것 역시 계속 존재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생명으로부터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AC.12가 직접 말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영적 인간이 되고 형상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내적 갈등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로,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기 때문에 그로부터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기서도 모든 자연적 즐거움 자체를 악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는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악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의 핵심은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이 각각 무엇으로 기뻐하고 유지되는지를 설명하고,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난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싸움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AC.12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후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합니다.

 

이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이 이미 영적 인간이 되어 형상이라 불리지만,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설명을 끝내지 않습니다.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 사이의 싸움이 계속되고, 사랑이 지배권을 얻은 후에는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합니다.

 

다만 여기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너무 앞서 상세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천적 인간은 아무런 갈등 없이 본능적으로 선을 행한다’, ‘신앙은 이제 완전히 사랑에 흡수된다와 같은 구체적인 설명은 이 한 문장만으로 모두 확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AC.12가 지금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은 후 그가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지배권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AC.12는 사랑이 단순히 신앙과 나란히 존재한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계속되어 마침내 사랑이 지배권을 얻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의 영적 인간과 그 후의 천적 인간 사이에는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구별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번째 상태를 곧바로 거듭남의 완전한 종착점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영적 인간이 되고 형상이라 불리지만, 아직 싸움이 있으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AC.12 자체가 그 뒤에 천적 인간의 상태를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1의 여섯째 날 다음에 일곱째 날이 있다는 사실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지금 여기서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2에서는 여섯 번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 상태 뒤에도 사랑이 지배권을 얻기까지 싸움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12를 통해 우리는 거듭남을 단순히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보게 됩니다. 이미 선한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는 단계가 있었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불붙는 단계가 있었으며, 생기 있는 것들이 나타나는 단계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하는 영적 인간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영적 인간에게도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이 함께 있으며 그로부터 싸움이 일어납니다. 거듭남의 깊이는 단순한 외적 행동의 변화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AC.12의 여섯 번째 상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함으로써 형상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문장은 아닙니다.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으로부터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싸움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후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됩니다. AC.12는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상태까지 이렇게 짧게 열어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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