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7

광명체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합니다. 속에는 지금 당장 펼쳐 보일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문자적 의미만 보면 그런 깊은 뜻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이것만 말씀드리는 걸로 충분한데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일반적으로도, 개별적으로도 교대(alternations)라는 있으며, 이것이 날과 해의 변화(changes) 비유된다는 점입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에서 정오로, 다시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진행합니다. 해의 변화도 이와 같아서, 봄에서 여름으로, 다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진행합니다. 여기서 열과 빛의 변화가 생기고, 또한 땅의 산물들도 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 역시 이러한 변화에 비유됩니다.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없고, 나아가 퍼셉션,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교대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 [statuta]) 하는데, 예레미야에 보면 나옵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 법도가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5, 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 22절에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8:22)

 

해설

AC.37은 창1:14징조와 계절과 날과 를 설명하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몇 단어 안에 지금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고 한 가지 원리만 먼저 알려 줍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alternations)가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에서 날과 해가 변하는 모습에 비유된다는 것입니다.

 

교대라는 말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언제나 똑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연의 하루를 보면 아침에서 정오로, 정오에서 저녁으로,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갑니다. 한 해도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고 다시 봄을 맞습니다. 그에 따라 빛과 열이 달라지고 땅에서 나는 것들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인 것들에도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생에도 좋은 날과 나쁜 날이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대와 함께 다양함(varieties)을 말하면서,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나아가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될 수 없으며,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영적 생명 자체에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서 변화가 없으면 생명이 없다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7은 그 원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하루가 한 시각에 멈추고 계절도 하나뿐이라면 자연의 생명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빛과 열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땅의 산물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자연의 질서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삶에서도 신앙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고 사랑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는 것이 모두 정상이며 좋은 것이라는 뜻일까요? 여기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모든 영적 침체와 후퇴, 모든 악과 거짓의 상태를 필요한 겨울이라고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악이나 신앙의 후퇴를 보고 지금은 겨울이니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것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바를 넘어섭니다.

 

반대로 영적 상태가 늘 똑같지 않다고 해서 곧 거듭남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AC.37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도움입니다. 사람은 한 번 진리를 깨달았다고 언제나 똑같은 정도로 밝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주님 사랑을 경험했다고 언제나 같은 정서 상태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AC.37은 영적 생명을 정지된 한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이 있는 생명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교대를 선과 악의 단순한 반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침은 무조건 선, 밤은 무조건 악이라는 식으로 이 글을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자연의 날과 계절은 영적 상태의 변화를 보여 주는 비교이며, 각각의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선과 진리가 분별되거나 구별될 없고,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 단순히 지루함을 막아 주는 장치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경험하고 분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7은 여기서 그 과정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둠을 경험해야만 빛을 있다’, ‘악을 겪어야 선을 배운다는 식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악 자체가 선을 가르치는 필수 교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러한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ordinances)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렘31:35-36과 렘33:25을 인용합니다. 해가 낮을 비추고 달과 별이 밤을 비추는 규례, 주야의 언약과 천지의 규례가 말씀에 등장합니다. 자연계의 일정한 변화가 무질서한 우연이 아니라 정해진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도 규례라는 말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한 걸음 이상 앞서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구절들이 AC.37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어떤 영적 겨울이 와도 반드시 봄이 온다는 약속이라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37이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라고 부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를 창8:22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예고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지금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런 대목도 중요합니다. 어떤 표현의 의미를 한 글에서 완전히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다시 돌아와 더 깊이 펼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7에서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영적 생명은 언제나 똑같은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아침··저녁·밤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생명에 속하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퍼셉션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제와 오늘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지나치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냉각과 후퇴를 영적 계절의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AC.37은 우리에게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고정 상태가 아니라는 중요한 원리를 먼저 가르치고, 그 교대의 더 깊은 아르카나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고 남겨 둡니다.

 

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days), (years)

 

AC.37, 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

AC.37.심화1. ‘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 위 AC.37 본문에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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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 하는가?

 

AC.37, 심화 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AC.37.심화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위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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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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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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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love to the Lord) 이웃을 사랑하는 (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계명이 없느니라 (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22:37-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Matt. 22:3741) Thelaw and the prophets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해설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라고 말합니다.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계명을 지키는 것인가?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 자체가 신앙의 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 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 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 분리된 교리적 신앙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당신의 사랑과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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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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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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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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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AC.35는 인간에게 있는 두 가지 기본 역량, 의지이해를 다룹니다. 얼핏 보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두 역량의 관계를 통해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사랑과 신앙의 문제를 인간 마음의 구조 안으로 가져옵니다.

 

먼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반대로 생각합니다. ‘욕망대로 행동하지 말고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순간적인 욕망이나 충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와 연결된 마음의 근본적인 역량입니다. ‘이해역시 단순한 지능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알고 생각하는 역량입니다.

 

그러므로 AC.35의 핵심은 생각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그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또한 생각하고 의도할 때 의지와 이해는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안에서 원하는 것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일치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악을 원하면서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생각과 욕구가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가 지금 다루는 문맥은 앞선 AC.34사랑과 신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을 이해로는 인정하면서 실제 의지는 그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원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예로 드는 사람이 바로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로는 하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신앙을 말하고, 교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원하는 것과 살아가는 방향은 그것과 반대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하늘을 향한다고 해서 사람 전체가 하늘을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가, 그리고 그 의지가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함께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AC.35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는 자신을 하늘로 높이려 하지만 의지는 지옥을 향하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사람 전체가 곧장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지가 행위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으로 그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그 원하는 바가 행위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5 자체도 이해가 하늘로 높아지려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자기 삶과 다른 더 높은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의지와 분리된 채 머리에만 머물 때입니다. ‘나는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나는 이것을 원하고 행한다사이에 깊은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AC.35의 마지막 말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이런 분열을 설명하고 끝내지 않고 만일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덧붙입니다. 인간에게 이해와 의지의 모순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상태를 유지하거나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35은 여기서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람을 붙드시고 의지와 이해를 회복시키시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해를 이용하여 의지를 이렇게 교정하신다는 식으로 작동 방식을 미리 확정하기보다, 우선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만 내버려져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 아래 붙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5는 단순한 인간 심리 분석을 넘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 묻지 않고 나는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가?까지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고, 이해로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실제 의지가 전혀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분열입니다.

 

그러므로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라는 도덕적 충고보다 깊습니다. 사람이 이해로 받아들인 신앙과 실제로 원하는 삶이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그 둘이 갈라져 있는 우리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붙드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AC.35의 마지막에 자비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화

1.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심화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위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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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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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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