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 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에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독자에게 가장 놀라운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자신이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있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도 그들과 말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는 영계의 존재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영들과 천사들과의 실제적인 교통이 지속적으로 허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수년 동안끊임없이, 중단됨 없이라는 표현입니다. AC 1권이 출판된 것은 1749년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그의 생애 말년에 과거를 회고하면서 쓴 것이 아니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세상에 내놓는 바로 그 시점에 이미 수년 동안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어 왔다고 밝힌 것입니다. 이후 그의 신학 저술 전체에 방대한 영계 경험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AC.5는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기록의 매우 이른 시기에 놓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꿈이나 한두 차례의 환시를 경험했다는 주장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을 보았다고만 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자신도 그들과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자신의 영계 경험을 순간적인 종교적 황홀경이나 특별한 꿈 몇 차례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에서 일상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영적 세계의 존재들과 의식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상태가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그렇다면 이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글의 역할은 아닙니다. 반대로 현대인의 경험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환각이나 상상이라고 판정하는 것 역시 AC.5를 읽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리는 셈이 됩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영적 세계를 상상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으로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교통했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가 이후 제시하는 방대한 기록과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서 판단할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에는 AC 출판 이전부터 중요한 내적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1740년대 전반 그는 오랫동안 해 온 자연과학과 철학적 탐구에서 점차 인간의 내면과 영적인 문제로 관심을 옮겨 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의 개인 기록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이 흔히 일기라고 불리는 기록입니다. 그 안에는 꿈과 내적 갈등, 자기 성찰과 종교적 경험 등이 나타납니다. 이런 자료들은 훗날 그의 신학 저술이 갑자기 아무런 배경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상당한 내적 전환의 시기가 있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이 준비 기간의 꿈과 AC.5에서 말하는 지속적인 영계 교통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꿈을 꾸고 강렬한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과,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들과 천사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AC.5의 주장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전환에는 여러 단계와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되, 후대에 전해진 유명한 일화 하나를 모든 것의 정확한 시작점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소명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1745년의 경험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그의 생애를 전하는 여러 자료에서는 1745년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루며,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영적 의미를 밝히는 사명과 관련된 경험이 있었다는 전승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장소와 구체적인 장면, 무엇을 보았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를 하나의 확정된 역사적 장면처럼 재구성할 때에는 자료의 성격을 구별해야 합니다. AC.5 자체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것은 훨씬 단순합니다. 이 책을 출판할 당시 스베덴보리는 이미 수년 동안주님의 신적 자비로 영들과 천사들과 지속적으로 교통하는 일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경험을 어떤 목적으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5는 자신의 특별함을 소개하기 위한 자서전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1-4에서 그는 말씀 안에 속뜻이 있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을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AC.5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없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에 관한 증언은 그가 앞으로 말할 영적인 것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독자에게 밝히는 문맥 속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라는 표현은 중단됨 없이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일을 자기 지성의 성취나 특별한 영적 능력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것은 허락된일이었습니다. AC.5의 문법 자체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자신이 영계를 열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경험의 중심에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스베덴보리보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허락하신 주님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을까요? AC.5 자체에서 스베덴보리가 곧이어 열거하는 내용을 보면 그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영들, 죽음 이후 인간의 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특히 온 천국에서 인정되는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영계와의 교통은 단순히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과 천국과 지옥의 질서,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했다고 해서 그의 신학 전체를 천사들에게 배운 내용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에서 그는 이것을 알 수 있는 근원을 주님으로부터라고 명시합니다. 이후 그의 저술에서도 주님과 말씀의 권위는 영이나 천사의 말보다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영들과 이야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진리의 최종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특별한 영계의 경험이 허락된 것 역시 주님께서 말씀과 영적인 질서를 밝히시는 더 큰 목적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기록을 앞으로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그가 어떤 영을 만나 그 영이 무엇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영의 말이 곧 신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상태에 있으며,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으며,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이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AC.5에서 곧바로 여러 종류의 영들을 언급하는 것도 이러한 영계의 다양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중단됨 없이라는 말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영적 이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신앙인이 영들을 보고 천사들과 대화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주님을 믿으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영계의 시각적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영적 현상을 신앙의 목표로 삼으면 현상 자체에 마음을 빼앗길 위험도 있습니다. AC의 중심은 영을 보는 능력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고 그분의 질서 안에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를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이 놀랍기 때문에 그것만 좇아 읽으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거대한 사후세계 체험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계 경험이 낯설다는 이유로 그것을 모두 제거하고 성경 해설만 취하려 하면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소명과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경험이 그의 말씀 해설과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5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이한 현상의 지속 기간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영계의 일들을 추측하거나 상상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보고 듣고 대화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허락되었으며 그 가운데 가르침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우선 그 증언을 그가 말한 그대로 정확히 이해한 뒤, 이후 수천 개의 AC 글을 따라가며 그 증언이 실제로 어떤 내용으로 펼쳐지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심화에서 만나게 될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았다고 하는 영계는 모든 영이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단순한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사후에 어떤 상태를 거치며, ‘’, ‘천사’, ‘악한 등의 표현은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해하기 시작하면 AC.5의 짧은 문장이 앞으로 펼쳐질 방대한 영계 기록의 문을 열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금씩 보이게 됩니다. (AC.5 심화 1)

 

 

 

AC.5 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 심화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읽으면 영계에 여러 종류의 영적 존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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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린 영계의 증언’

AC.5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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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자연계의 어떤 것이 단지 우연히 영적인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기능과 쓰임을 통하여 영적인 것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정하는 상징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장미를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하여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매우 의미 있는 상징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응은 개인의 연상이나 취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질서에서 나옵니다.

 

사람 자신도 상응을 이해하는 중요한 예가 됩니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정서를 드러내고, 말은 생각을 표현하며, 행동은 의지를 밖으로 나타냅니다. 미소가 기쁨을 나타내고 눈물이 슬픔을 나타내는 것처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물론 이러한 예만으로 스베덴보리의 상응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낼 있다는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도 이러한 관계와 깊이 연결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빛, , , , 나무, , , 길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은 단순히 사전식으로 하나의 숨은 뜻을 부여받은 암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의 성질과 기능, 그리고 말씀 전체에서의 쓰임과 문맥을 따라 영적인 것과의 관계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공부한다는 것은 빛은 무조건 이것, 물은 무조건 저것이라는 식으로 상응표를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각각의 표현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표상상응은 서로 밀접하지만 완전히 같은 말로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 의식이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낼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그러한 표상과 의미가 가능하게 하는 질서 있는 관계를 가리키는 데 더 적합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것이 영적인 것을 표상하고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언어유희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을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자의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비가 왔으니 주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보내셨다거나, 우연히 어떤 동물을 보았으니 그것이 내 미래를 예고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다릅니다. 상응은 점술이나 징조 해석의 도구가 아닙니다. 특히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 전체의 연결과 영적 질서 안에서 어떻게 그 상응을 밝히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응의 관계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연결에서 끝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서 속뜻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의 숨은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외적인 표현을 통하여 그 안의 영적인 질서를 보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1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킨다고 한 것과 연결됩니다.

 

AC.4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안에 품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앞으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를 하나씩 해설하면서 우리는 상응이 실제 말씀 해석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4에서는 상응의 모든 체계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과 안의 영적인 사이에는 임의적이지 않은 질서 있는 관계가 있다는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4 심화 2)

 

 

 

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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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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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을 경험합니다. 국기가 한 나라를 나타내고, 왕관이 왕권을 나타내며, 결혼반지가 부부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표상은 사람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상징보다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나 장소, 사물이나 행위가 표상한다고 할 때에는 그 외적인 것이 말씀 안에서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는 문자적으로는 실제로 행해진 종교의식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제사들이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라는 외적인 의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상적 기능을 합니다.

 

이 점에서 표상과 단순한 비유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어떤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을 끌어와 비교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은 단지 설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이 실제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상하도록 말씀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집트와 가나안, 성막과 성전, 제사와 절기 같은 것들이 문자적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 표상적 의미를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자적 이야기나 역사적 차원을 곧바로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상한다는 말의 핵심은 외적인 것 안에 그것이 나타내는 더 내적인 것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그 문자가 나타내고 있는 영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에서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과 그 안의 나무와 강, 뱀과 열매 같은 것들도 이후 AC의 해설을 따라가면 각각 태고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의로 이것은 이것을 상징한다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질서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상응과 속뜻의 연결을 따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AC.4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안에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문장이 앞으로 AC에서 표상이라는 말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단지 자연계의 대상들로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에 관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상이 자의적인 상징 놀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표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해당 문맥에서 하나씩 확인해 가야 합니다. (AC.4 심화 1)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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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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