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 심화

1.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는 내적인 차원인데, 거기서 나온 선이라면 당연히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핵심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사람이 인정한다는 것이 아직 완전히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AC.9의 사람은 이전 상태보다 분명히 진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외적인 규칙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했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내가 선을 생각했고, 내가 선을 선택했고, 내가 선을 행했다고 여깁니다. 선이 안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는 말을 그 선행이 전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아무 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 행위의 외적인 유익성보다 영적인 생명의 귀속입니다. 선의 생명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동안에는 그 선을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변화만 생각하면 AC.9의 사람은 이미 상당한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선을 행하는가?뿐 아니라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를 묻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한 일을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했다, 내가 옳다, 나는 사람보다 낫다고 자기 공로를 붙들 때에도 proprium은 매우 미묘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사람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에서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노력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라고 기다리는 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 갑니다.

 

이 때문에 AC.9의 세 번째 상태는 지나가야 할 잘못된 상태라기보다 필요한 성장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을 때 자기가 걷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도 처음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자유감과 자기 활동감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시면서, 점차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은 이미 완성된 거듭남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영향이 겉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사람의 의식과 귀속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 있을 수 있습니다. AC.8에서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면, AC.9에서는 그 구별이 실제 선행 가운데서도 더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내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돕고 말씀을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누구에게 공로를 돌리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을 때 섭섭해하거나, 자신의 선행 때문에 자신을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진다면 선한 일을 하는 를 붙들고 있는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했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9는 그러한 발견 자체가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점차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선을 행하되 점점 더 자기 공로를 내려놓게 됩니다.

 

따라서 AC.9생명이 없다는 표현은 선행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그 선행이 어디에서 참된 생명을 받아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진전입니다. 그러나 그 선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려면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결국 거듭남은 내가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마음과 삶으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AC.9 심화 1)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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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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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심화

1.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져야 하는가?

 

AC.8에는 오늘날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라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왜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있어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는 것일까요? 실제로 주위를 보면 큰 고난을 겪지 않고도 비교적 겸손하고 신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AC.8은 모든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큰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 불행,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거듭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문도 이 상태가 그러한 일들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하지, 절대로 존재할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핵심은 고난의 필연성 자체가 아니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는 에 있습니다.

 

평소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며 자기 힘으로 삶을 이끌어 간다고 느낍니다. 건강, 경제적 안정, 사회적 인정, 자신의 계획과 판단, 익숙한 인간관계와 생활환경 등이 잘 유지될 때에는 이러한 자기 확신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건강이나 경제적 안정이나 사회적 관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 삶의 궁극적인 토대로 여기고, 자기 판단과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 때입니다.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은 때때로 바로 이러한 자기 확신을 흔듭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나거나, 의지하던 것이 흔들리거나, 자기 판단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면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이전처럼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AC.8에서 그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은 그것들이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것들의 지배력이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때 이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것이 나타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AC.8은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평소 자기 생각과 욕망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 너무 크게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의 소리가 잠잠해지면 유아기부터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신앙의 지식과 선한 것들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이 리메인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이미 주님께서 저장해 두셨으며, 고난은 경우에 따라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또한 시험이나 불행이 자동으로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어려움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지고 원망과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변화의 원인을 고난 자체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시며, 시험과 불행과 슬픔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큰 고난 없이도 비교적 평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로 이 때문에 AC.8거의 없다라는 표현을 그대로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거듭남의 과정은 동일한 외적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큰 불행이 없어도 사람 안에서는 자기 뜻과 주님의 뜻 사이의 갈등, 양심의 책망, 자기 사랑을 내려놓는 내적 싸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조용한 방식으로 자기 확신이 낮아지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적 형편만 보고 그의 내적 거듭남의 과정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AC.8을 읽으면서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일부러 불행을 주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이미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시험과 불행과 슬픔까지도 주님께서는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통하여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속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가 사용될 수 있도록 섭리하실 수 있다는 쪽에 초점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난의 크기 자체는 거듭남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지나면서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사람에게 고유한 것과 주님께 속한 것을 조금 더 분명하게 구별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시련이 그 계기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조용한 내적 갈등과 깨달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고난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AC.8에서 시험, 불행, 슬픔을 강조하는 이유는 고난 자체를 영적으로 높이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들이 너무 강하게 활동하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이미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들이 드러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지배력이 잠잠해질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조금씩 배우고,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속한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8이 말하는 두 번째 상태에서 고난이 갖는 의미입니다. (AC.8 심화 1)

 

 

 

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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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읽으면 영계에 여러 종류의 영적 존재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다 보면 이 짧은 표현이 상당히 넓은 세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계는 모든 존재가 똑같은 모습과 상태로 살아가는 하나의 균일한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사랑과 신앙, 생각과 삶이 서로 다르듯 사후에도 그 차이가 드러나며, 그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상태와 공동체가 나타납니다.

 

먼저 (spirit)이라는 말 자체를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라고 할 때 언제나 한 종류의 존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이 말은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넓게 가리킬 수도 있고, 천사와 구별하여 아직 영들의 세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아직 천사가 되지 못한 중간 단계의 존재라고 고정해서 읽으면 문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은 죽어서 처음 영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그 물질적인 몸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 후 사람은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영적 몸을 가지고 계속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이 영이 된다는 말은 일상적인 설명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엄밀하게는 물질적인 몸을 벗은 인간이 영적 세계에서 영으로서의 자기 생명을 계속 살아간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처음 들어가는 곳과 관련하여 스베덴보리가 중요하게 설명하는 것이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입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상태이자 중간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똑같은 기간 동안 머물면서 일정한 과정을 밟는 일종의 대기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마다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사후에 겉과 속이 일치하게 되는 과정도 서로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사람이 지상생활 중 외적인 이유로 감추거나 조절했던 것들이 벗겨지면서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른 실제 상태가 점차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에는 매우 다양한 영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향하여 준비되는 사람도 있고 지옥을 향하여 가는 사람도 있으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외적인 것을 벗어 실제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영계의 생물학적 종을 분류하듯 몇 가지 종류로 나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과 애정, 신앙과 사고, 삶의 목적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영들의 상태도 다양하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 영들악한 영들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히 두 종류의 종족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을 영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선과 진리를 기뻐하는 애정이 삶의 중심을 이룬 사람과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며 악과 거짓을 기뻐하는 사람은 사후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영계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차이가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천사에 대해서도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사는 인간과 전혀 다른 종류로 처음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한때 자연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이 죽으면 영이 되고, 일정한 과정을 마치면 영이라는 종에서 천사라는 종으로 변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천사는 천국에 들어가 천국의 사랑과 질서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 영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옥의 악령이나 마귀도 처음부터 별도의 종족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를 이해할 때 인간, , 천사를 서로 완전히 다른 세 종류의 존재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생명은 자연계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을 통하여 연속됩니다.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은 인간으로 살아가고, 죽음 이후에는 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와 결합하게 됩니다. 인간의 인격과 삶이 죽음으로 끊어지고 전혀 다른 존재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영계에는 그렇게 많은 공동체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핵심은 사랑입니다. 천국에서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선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은 무한히 다양하게 받아들여지며, 각 사람은 자신에게 고유한 애정과 쓰임을 가집니다. 비슷한 사랑과 쓰임을 가진 천사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함께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다양성은 천국의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악한 영들의 경우에도 다양성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며,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과 욕망 역시 다양합니다. 따라서 지옥 역시 하나의 똑같은 악으로 이루어진 균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서로 비슷한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성질에 따라 결합합니다. 결국 영계에서 누구와 함께 있게 되는가는 외부에서 임의로 배치되는 문제라기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깊이 관계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장소만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실제로 장소와 환경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지만, 그 외적인 환경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서로 맞는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맞지 않는 사람들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 세계에서의 거리가까움역시 자연계의 물리적 거리와 똑같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태의 유사성과 차이가 외적으로도 나타납니다.

 

AC를 읽다 보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영들에 관한 표현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어떤 영들은 다른 영들을 가르치거나 돕고, 어떤 영들은 인간의 특정한 기억이나 애정과 관련되어 나타나며, 어떤 영들은 악한 욕망과 거짓을 자극하려 합니다. 또 여러 행성의 영들에 관한 기록이나 인간 몸의 기관들과 상응하는 영적 공동체들에 관한 기록처럼 오늘의 독자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내용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AC.5여러 종류의 영들은 이후 펼쳐질 방대한 영계 기록을 미리 예고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영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유입되는 것과 악과 거짓에 속한 것이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영이 머릿속에 생각을 넣으므로 나는 생각에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여러 유입 가운데서 자신에게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 느끼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를 자유와 이성 안에서 선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중요한 책임을 전제합니다. 선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릴 수 없고, 악한 충동이 일어났다고 악한 영이 시켰다며 책임을 넘길 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것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며,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런 실제적인 선택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금 어떤 종류의 영이 나에게 붙어 있는가를 알아내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특별한 영계 교통이 허락되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영들과 직접 대화하거나 그들을 식별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영적 현상을 추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배우고, 자신의 악을 살피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그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5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들의 다양성은 인간의 내적 삶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지상에서 형성되는 사랑과 삶이 죽음 이후에도 얼마나 중요하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어떤 외적인 이름을 가졌는가보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계의 존재들을 몇 개의 고정된 종류로 분류하여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에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사랑과 애정과 사고의 상태가 있고, 영적 세계에서는 그러한 내적인 차이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며, 서로 비슷한 상태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스베덴보리가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영계에는 여러 종족이 있다는 뜻으로 읽기보다 사후에도 인간의 고유한 삶과 사랑의 성질이 계속되며, 차이에 따라 영적 세계에는 헤아릴 없이 다양한 상태와 공동체와 질서가 존재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AC 전체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묻게 될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 나는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AC.5 심화 2)

 

 

 

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린 영계의 증언’

AC.5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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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 심화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에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독자에게 가장 놀라운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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