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창1:14-17)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에서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이 두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니고 말입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속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AC.30의 중심은 창조 넷째 날에 나타나는 ‘큰 광명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해와 달의 상응부터 설명하지 않고 먼저 ‘신앙의 본질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 답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신앙이 생명을 가지는 것은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거나 그것을 지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신앙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3:36을 인용하여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새로 창조되는 사람, 곧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으로 알고 있는 신앙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기억 속에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것이 사람의 내적 생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신앙이 옵니다. 사람은 이제 배운 진리가 왜 참인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것에 지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마음에 속한 신앙’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 또는 ‘구원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얻거나 더 정교한 이해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으로써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창1:3-13의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고,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은 창1:20-25의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셋째 날까지 나타난 빛과 궁창과 땅과 식물은 반드시 필요한 준비이지만, 아직 사랑으로 생명을 얻은 신앙 자체는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앞의 AC.29와도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까지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선하고 참된 것이 사람의 삶에서 어느 정도 열매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스베덴보리는 그 단계가 아직 ‘생명 없는 것들’에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넷째 날에 이르러 결정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사랑과 신앙이 ‘광명체들’로 나타나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점점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의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단순히 자연계의 해와 달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는 사랑을,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 있고 거기에 나중에 사랑이 덧붙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둘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라틴어 표현까지 주목합니다. 본문에서 광명체들을 말하면서도 동사가 복수형 ‘sint’가 아니라 단수형 ‘sit’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 그 신앙에는 본래 있어야 할 생명이 없으며, 사랑 역시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속 사람 안의 사랑과 신앙을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열과 빛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놓였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속 사람 안에 놓였음을 뜻합니다. 큰 광명체인 사랑은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인 신앙은 이해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의지와 이해는 단순한 인간의 심리 기능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두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구별이 하나 나옵니다.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있으므로 얼핏 보면 그것들이 사람 자신의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이해하며, 내가 믿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날 뿐’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태양의 빛이 어떤 대상을 비추면 그 대상 자체가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의 근원은 그 대상에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근원은 오직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은 셋째 날과 넷째 날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셋째 날의 사람도 이미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넷째 날에는 사람이 점차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다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과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0에서 말하는 넷째 날은 단순히 신앙이 ‘더 강해지는’ 단계가 아닙니다. 신앙의 성질 자체가 달라지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기억에만 있던 신앙, 이해에 머물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마음의 신앙이 되고, 비로소 ‘구원의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표현됩니다.
결국 넷째 날의 핵심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도 아니고 ‘내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잘 믿고 있는가’도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앞선 날들 동안 준비되어 온 사람의 내면에 비로소 광명체들이 놓이고, 그 빛 아래에서 다음 단계의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날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심화
1.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나지만 그 근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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