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23(D1)-주일예배(2496, 눅11,43-54), '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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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1jkIAFXH7U

 

 

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눅11:43-54)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속으로는 악한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선한 말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대해 속으로는 정신 나간 생각들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번듯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겉만 하얗고 속은 무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AE.659:10) Those who think evil about God and the neighbor but speak well, and those who think insanely about truths of faith and goods of love but speak sanely, such inwardly are sepulchers whited without, (AE.659:10)

 

※ 위 내용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1장 9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계11:9)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지난 2020년 4월 19일 주일설교인 이 설교 원본에는 앞서 15일에 있었던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관한 내용이 좀 길게 나와서 이를 생략, 본문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지금이야 이 선거가 99% 부정선거였음을 우파 보수 및 건전한 중도에서는 알게 되었고, 이걸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그 때를 기다리며, 그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때만 해도 저쪽 사람들이 설마 그런 엄청난 장난을 칠 줄은 일반 국민들은 정말 그 어느 누구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정황이 느껴지는 내용입니다. 저 역시 그때 그 결과가 너무나 이상했거든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두 얼굴 등 당시 분위기로 보아 총선 때 저들의 폭망이 너무나 예견되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리새인들을 매섭게 꾸짖으십니다.

 

※ 복음서에는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 등의 명칭들이 나오는데요, 이들은 모두 종교적으로는 다 바리새인이며, 다만 그 사회적 역할에서 좀 다를 뿐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했던 사람들에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시며 용서하셨던 주님, 그러나 그런 주님이 유독 이 바리새인들에게만은 매우 엄격하셨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은 모두 위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 깊은 위선을 미워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교활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은데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 오히려 이웃에게 경각심이라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속으로는 독이 든 이빨을 감춘 독사이면서도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슬며시 이웃에게 다가가 그들의 분별력을 어지럽히고 때로는 양심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사들의 눈에는 이들 위선자들은 마치 독이 있는 뱀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이며, 주님의 빛 가운데 있어서 그 내면, 곧 그 속 정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영계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상태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지상에서 이런 위선자들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내면에 영적인 빛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빛과 육의 눈으로는 그들의 영적 정체를 볼 수 없으며, 그래서 세상에서는 많은 경우, 이들 위선과 거짓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속임과 사기를 당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주님 눈에 비친 이런 위선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여기서 ‘회당’과 ‘시장’은 모두 교회를 뜻합니다. 특별히 시장도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시장에서 물품들이 유통되는 것처럼 교회에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이 유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높은 자리’는 뭘까요? 높은 자리는 주님, 또는 주님이 계신 천국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위선자들은 교회의 직분을 이용해 스스로 주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고, 이웃을 섬기기보다 대접받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악하기만 한 자들은 보통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세상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만 그러나 위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넘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결국 천국의 신성한 것에다 세상의 것을 섞어버리는데요, 그것은 주님 앞에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서로 섞는 것을 말씀에서는 영적 간음에 비유합니다.

 

※ 이런 ‘영적 섞음’이 특히 그 속 사람에게 아주 치명적인 이유는 다른 건 주님이 어떻게 해보실 수 있지만, 이 각 사람의 영의 변질은 주님조차 어찌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주님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마5:37)만 하는 삶을 살든지, 비록 좀 삐뚤어지고, 못되게 굴더라도 최소한 잔머리 굴려 겉 다르고 속 다른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 게 정말 중요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평토장(平土葬)한 무덤은 봉분이 없이 평평하게 만든 무덤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무덤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 다음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유월절 한 달 전인 아달월 15일부터 성전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준비에 들어간다. 성전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오는 모든 길들을 보수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도로 보수’와는 다른 개념이다. 성서 시대의 가난한 자들은 땅을 대충 파서 시체를 묻었는데,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유대 산지는 흙을 조금만 파도 석회암 바위가 나오기 때문에 깊이 앞 수가 없었다. 이들의 무덤은 아무런 표시가 없는 ‘평토장한 무덤’(unmarked grave)이었고, 깊이 파서 묻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 뼈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순례자들의 몸이 무심코 무덤이나 시체에 닿았다가는 레위기적으로 일주일 동안 부정하게 되고, 그런 상태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성전 파견단은 순례자들이 다니는 길에서 이러한 평토장한 무덤을 찾아 회칠로 표시하는 일을 했다. 순례자들은 이 표시를 보고, 길을 우회해서 갔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시체 접촉으로 인한 부정을 피할 수 있었다.

 

말씀에서 무덤은 본래 거듭남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지옥을 의미합니다.

 

※ 천사들은 사람이 지상에서 죽어 장사 되면 반드시 영계에서 깨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계속 산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에 나오는 ‘무덤’이나 ‘장사하다, 땅에 묻다’ 등의 표현들이 나오면 그걸 거듭남, 새롭게 일어남, 생명 등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평토장한 무덤 같다는 것은 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에는 지옥이 들어앉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마23:27)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율법교사가 불쾌함을 토로합니다.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이것은 위선자가 진리의 소리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주님과 이웃을 대할 때, 주님께서는 양심을 통해 그를 타이르십니다. 어떻게 타이르실까요? 교회의 직분은 이웃을 섬기는 자리이지 섬김받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평토장한 무덤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타이르십니다. 그때 위선자들은 그것이 진리의 소리인 줄 알면서도 몹시 불편해합니다. 이 율법교사가 지금 그런 상태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것은 그가 주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으로 알 수 있는데요, 영적 의미로 ‘선생’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만약 주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었다면 위선자들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로 인해 그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죽일 듯이 미워했습니다. 주님은 율법교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46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신앙인들에게 부여된 짐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짐입니다. 만약 교회의 성직자들이 교인들을 주님께로 온전히 이끈다면 성도들의 짐은 아주 가볍고 쉬운 짐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짐을 대신 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진리를 왜곡해 가르치고, 그렇게 해서 교인들을 주님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과 함께 가 아니라 교인들 혼자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짐을 교인들에게 지워놓고 정작 자신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 안주합니다. 그것이 지기 어려운 짐을 교인들에게 지우고 자기는 한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 성직자들의 모습입니다.

 

교회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을까요? 그것에 대해 50절과 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창세 이후로’는 주님께서 인류에게 최초로 교회를 세워주신 이후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서 비롯한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선지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흘린 피’는 뭘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또 아벨(창4:10-11)과 사가랴(대하24:20-22)가 피 흘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사랑, 또는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말살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은 말씀 속에 들어있는 체어리티, 또는 사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해진 이러한 폭력들은 유대교회에서는 모세의 율법보다 장로의 전통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믿음과 사랑이 분리된 믿음만의 교리, 즉 ‘오직 믿음’의 교리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더럽힌 죄를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이 감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지식의 열쇠는 말씀의 능력이며, 그러므로 천국을 여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는 위선자들이 말씀을 왜곡해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교인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을 걱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읽다 보면 주님께서 특히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나무라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 하시고, 독사의 자식이라 비난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선지자를 죽인 자, 말씀의 열쇠를 가지고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막는 자라 하십니다. 참으로 신랄하고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교회 안의 위선자들을 특히 꺼리신 이유는, 그들이 교인들의 이성을 마비시킬 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체어리티의 신앙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 위선은 매우 무서운 죄입니다.

 

주님을 죽이고 선지자를 죽인 사람들은 모두 교회 안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것만 봐도 위선자들이 얼마나 진리를 혐오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진리로 인해 그동안 쌓아놓은 세상 것들, 이를테면 명성이나 평판과 재물 같은 것들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애써 외면하려 하고, 때로는 주님을 책잡았던 바리새인들처럼 책을 잡아 진리를 말살하려고 합니다.

 

진리를 향하는 길은 참으로 좁고 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가장 밝은 빛 안에서 자신의 위선과 악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매일같이 선의와 진실을 키울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되기를 힘쓰기, 선과 진리 실천함에 있어 잔머리 굴리는 대신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까, 그것이 곧 주님 말씀이니까 실천, 실행에 옮기기, 주님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의 삶에 힘쓰기 등 솔직담백, 순진무구, 좀 부족하고 모자라서 실수는 하되 악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계2:9)

 

아멘

 

원본

2020-04-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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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20(D5)-매일예배(2495, 눅11,37-42),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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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95W5lrf6xM

 

 

잔과 대접의 겉’, ‘안에 있는 것’,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의 속뜻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눅11:37-42)

 

 

사람에게는 내적, 영적인 것(an internal spiritual)과 외적, 자연적인 것(an external natural)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내적인 것은 천국과, 외적인 것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사람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걸 통해(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하는 그 어떤 일이든 그는 천국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through heaven from the Lord)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걸로만(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자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AE.794:3) And as man has an internal spiritual and an external natural, and the internal is conjoined with heaven and the external with the world, it follows that whatever man does 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he does from heaven, that is, through heaven from the Lord; but anything that a man does 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this he does from self. (AE.794:3)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계13:5)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릇의 겉보다는 속을 깨끗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분문 37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어느 바리새인이 주님께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자 주님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말씀에서 ‘바리새인’은 위선자를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고, 내적으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율법이나 규례들은 철저히 지켰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영적 의미, 곧 그 정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바리새인’ 하면 겉으로만 거룩해 보일 뿐 내적으로는 악하고, 심지어 교활하기까지 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개중에는 주님에게 관심을 보이는 바리새인들도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주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말씀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마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걸 의미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바리새인이 주님과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는 것은 위선자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배우려고만 할 뿐 그대로 사는 데는 그다지 뜻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데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위선자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진리를 배우기 원하면 밀어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바리새인이지만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가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주님께서는 식사하기 전 손을 씻는 유대의 전통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38절에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라고 말합니다. 이 ‘손을 씻는 것’과 관련하여 출애굽기 30장 17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21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30:17-21)

 

주님께서 제사장들에게 회막에 들어갈 때에 수족을 씻도록 명령하신 까닭은, 손과 발을 씻는 것은 그들에게 있는 악을 씻어내는 것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 식전에 손 씻는 것을 전통으로 만들어 마치 율법처럼 지켰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위생 때문에라도 손을 씻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손을 씻는 것은 주님에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올 때 먼저 자신의 악 씻어내기를, 즉 ‘아, 내 안에 악이 있으니 이대로는 주님을 뵈옵지 못하겠다...’ 하며, 먼저 회개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말씀에는 주님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손 씻는 문제로 갈등하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교리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의 외관이나 세련된 예배 의식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크고 화려한 교회에 다니는 것을 항상 긍지로 여깁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손을 씻지 않는다고 주님을 이상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9절 말씀입니다.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을 음식을 담는 잔과 대접에 비유하시면서 ‘겉은 깨끗이 하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하십니다.

 

여기서 ‘’과 ‘대접’이 무엇일까요? 잔과 대접은 사람의 겉 사람을 뜻합니다. 겉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신 것은,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진리를 받는 그릇이 겉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릇의 겉만 깨끗하고 속에는 악이 가득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 사람으로부터 하지 않고, 겉 사람으로부터만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럴 경우, 겉으로는 선하고 진실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목적이나 의도는 항상 이기적이며 악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모두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어느 공직자의 수려한 외모와 세련된 언변 뒤에 숨겨진 불순하고 파렴치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릇의 겉만 깨끗하고 속은 불결한 위선자들입니다.

 

※ 2019년, 20년 상간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41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을 구제할 때 겉 사람으로만 하면 안 되고, 속 사람과 함께, 즉 속 사람으로부터 받은 걸 가지고 겉 사람을 통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라야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794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내적, 영적인 것(an internal spiritual)과 외적, 자연적인 것(an external natural)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내적인 것은 천국과, 외적인 것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사람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걸 통해(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하는 그 어떤 일이든 그는 천국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through heaven from the Lord)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걸로만(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자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AE.794)

 

여기서 내적,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속 사람을, 외적, 자연적이라는 것은 겉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매일같이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자아의 생각을 따르면 안 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주님의 생각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정말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끝으로 주님은 위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주님 당시 유대의 성직자들은 박하와 운향과 같은 값비싼 향품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렸고, 그런 식으로 자신의 경건함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의 십일조가 속 사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무엇보다도 속 사람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적인 예배와 외적인 예배를 함께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새 교회분들 중에는 내적인 것만 중시하여 간혹 외적인 걸 소홀히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배와 성찬에 참여하는 것, 각자의 능력에 맞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 이웃을 구제하는 것 등이 모두 외적인 예배입니다. 내적 예배는 외적인 예배를 통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예배를 드릴 때는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드리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진리와 선 그 자체를 위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외적이며, 동시에 내적인 예배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610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과 결합하고 상응을 통해 가장 마지막 최종적인 것과 결합합니다. 그때 첫 번째 진리는 마지막 진리 안에서 힘을 얻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 진리가 마지막 진리 안에 있고, 마지막 진리를 통해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AC.8610) For interior things are conjoined with exterior and finally with the last or ultimate by means of correspondences; then the truth which is first has strength in that which is last, because it is in this and acts by means of it. (AC.8610)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17:12)

 

※ 여기서 ‘모세’는 주님을 표상합니다.

 

여기서 내적인 것, 곧 내적 진리 또는 첫 번째 진리는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한 진리(the truth Divine)를 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반면에 외적인 진리, 또는 마지막 진리는 글자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심오한 진리라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진정한 진리이며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인간을 거듭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모든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완전하고 힘이 있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위선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위선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 사람으로부터 하지 않고, 겉 사람으로부터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 말씀에 의하면, ‘화 있을진저’, 곧 모든 재앙과 액화가 따를 것이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모든 행동에는 언제나 이기적 욕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지옥을 향한 문, 곧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만 말하고 행동하는 위선자들은 환난 중에 화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어려울수록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마시고,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지혜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또한 시험으로 고통받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사5:16)

 

아멘

 

원본

2020-03-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0(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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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8(D3)-매일예배(2494, 눅11,29-36),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의 속뜻.pdf
0.38MB

https://youtu.be/RVBFeMhcl_o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의 속뜻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3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눅11:29-36)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는 사실, 예를 들어, 마음이 쓰임새의 삶을 사랑하여(in the love of uses)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몸은 자기의 모든 지체들, 곧 손, 발, 입 등을 가지고(by means of its members) 결국 그걸 해내고자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게 과연 그런 것은,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은 무슨 중심 원리로서(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their principles) 머릿속에 있고,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들은 몸 안에 있는데요, 이것은 마치 의지는 행위 안에 있고, 사고는 말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행위를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TCR.403:2) Who does not also comprehend that all the works that a man does with his body are done according to the state of his mind in the head; and if the mind is in the love of uses, the body by means of its members accomplishes them? And this is so, because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their principles are in the head, and in their derivatives in the body, as the will is in deeds, and the thought in speech, (TCR.403:2)

 

 

※ 아래 에피소드는 원본에 나오는 서울 새 교회 에피소드이지만 저 역시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 그대로 옮깁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어떤 큰 교회에 다니는 부부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새 교회와 기성교회가 다른 점이 무엇이냐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렸지요. 첫째는, 하나님을 믿기만 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믿고 행해야 한다 했고, 둘째는,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겉뜻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기록되었지만 속뜻으로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데 다만 우리 눈에 보이게 육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 즉 기록된 겉 글자의 뜻 안에는 영적 의미, 즉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 의미, 즉 겉뜻과 속뜻을 함께 알아야 한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부인 되시는 분이 제 말을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그분은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서 신학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은 각자의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논쟁을 할 일은 아니라 말씀드리며, 대화를 마친 적이 있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주님과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유대교회의 교리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장로의 전통이라는 생활 규범을 만들어 그것을 율법보다 더 소중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사람의 법이지 하나님의 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15장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절) 하시며, 그들을 꾸짖으셨지요. 어느 시대에나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라면서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에게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면서 표적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람의 전통을 지키면서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 말씀입니다.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주님은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셨습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진리에 뜻이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악한 세대’라 하시고,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하셨을까요?

 

요나는 타락한 도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절하고 도망치다가 결국 니느웨 성으로 돌아가 그곳 사람들을 구한 선지자입니다. 요나가 그렇게 니느웨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래의 배 속에 가두어 사흘 밤과 낮을 지내게 하십니다. 요나가 고래 배 속에서 머무는 사흘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 주님이 당하신 지독한 시험을 표상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혹독한 시험을 견디신 이유는 인류에게 세상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복을 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은 하늘의 복을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하시고, 또 30절에서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세상 영광을 위한 기적이 아니고, 하늘의 영광을 위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31절과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솔로몬으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찾아온 시바의 여왕이나 요나의 예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이방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왕이나 요나는 모두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밖의 이방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까요? 계시록 해설 351번 글 2번 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내려오며, 중심이 되는 빛으로부터 주위의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까지 이른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처 내려오는 진리의 빛은 처음에는 교회로 내려오고, 다음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그 외연(外延)을 이루는 수많은 종교의 교리 안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와 연결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열왕기상 11장에서는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3절)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단순히 솔로몬 왕이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은 이방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 종교의 교리 안에 있는 진리를 통해 주님과 결합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솔로몬 왕은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도 이렇게 진리를 사랑하는데 정작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대적하고 모독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를 정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희미한 진리의 빛 안에 있는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데, 가장 밝은 빛 안에 있으면서도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진리를 대적하고, 진리의 표적만을 요구했을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하지 않고, 오직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403번 글 2번 항에는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는 사실, 예를 들어, 마음이 쓰임새의 삶을 사랑하여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몸은 자기의 모든 지체들, 곧 손, 발, 입 등을 가지고 결국 그걸 해내고자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게 과연 그런 것은,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은 무슨 중심 원리로서 머릿속에 있고,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들은 몸 안에 있는데요, 이것은 마치 의지는 행위 안에 있고, 사고는 말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행위를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상태에 따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과 애정이 영향을 받으며, 그것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34절에서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은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뜻하고, 눈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온전하다면 말이나 행실도 바르고 온전할 것이며, 반대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잘못되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실도 잘못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진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했던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 곧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변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갔던 귀신이 자기보다 더 나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처럼 이전보다 영적으로 더 나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당시나 요즈음이나 진리 안에 있다 자부하면서도 정작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영의 눈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이 닫힌 사람은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며, 참된 진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진실을 왜곡하면서도 잘못인 줄을 모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속이면서도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주변과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영의 눈이 어두워 주변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자랑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을 진리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진리를 자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십니다. 그 진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가 있는 교회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에 의해 진리가 ‘등경 위에 올려놓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선과 진리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 항상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며, 그래야 언제나 바르고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미7:8)

 

아멘

 

원본

2020-02-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8(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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