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6(D1)-주일예배(2493, 눅11,24-28), '물 없는 곳, 청소되고 수리되었다, 악한 귀신 일곱, 당신을 밴 태, 당신을 먹인 젖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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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Cjvo55u5Ok

 

 

‘물 없는 곳’,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악한 귀신 일곱’, ‘당신을 밴 태, 당신을 먹인 젖’의 속뜻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11:24-28)

 

 

영적 자유(Spiritual freedom)라는 것은 영생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옵니다. 악을 죄로 여겨 그걸 의도하지 않으며,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야만 이 사랑과 그 기쁨을 맛보며 경험하게 됩니다. (DP.73:6) Spiritual freedom is from love of eternal life. Into this love and its enjoyment only he comes who regards evils as sins and therefore does not will them, and who also looks to the Lord. (DP.73:6)

 

 

사람들은 보통 자기한테서 일어나는 일상 모든 일을 자기가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전적으로 자기와 함께 있는 영들의 영향 아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2887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한테는 악한 영들(evil spirits)과 천사들이 늘 함께 와있습니다.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하고, 그리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하고 커뮤니케이션합니다. 만일 사람한테서 이들 악한 영들과 천사들을 떼어내면(to be taken away), 사람은 순식간에 그 의도하는 능력과 생각하는 능력(willing and thinking)을, 그 결과 생명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게(be devoid of)됩니다. (AC.2887) With man there are evil spirits constantly, and also angels; by the spirits he communicates with the hells, and by the angels with the heavens. If these spirits and angels were to be taken away from him, he would in a moment be devoid of willing and thinking, thus of life. (AC.2887)

 

이런 사실은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인류에게 새롭게 오픈하신 영적 실상입니다. 이런 실상을 알고 인류가 더 이상 속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인데요, 즉 자기 안에서 악과 거짓 관련, 지옥의 기운이 시작될 때, 얼른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내 안의 악한 영들이 하는 거야!’라고 하며, 거기서 한발 물러나 그런 기운에 발 담그지 않고, 대신 반대로 천사들을 통해 선과 진리 관련, 천국의 인도를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사후에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가는 것일까요? 아무 힘이 없는데도 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의 자유를 통해 항상 자기와 함께 있는 천사들의 손을 잡았던 사람은, 그래서 그 내면이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 사람은 사후에 천사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천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대신 항상 악령의 손을 잡았던 사람은, 그래서 그 내면이 지옥에 어울리게 된 사람은 악한 영들에게 끌려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의 영들은 기를 쓰고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특히 오늘날은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에 푹 빠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속삭입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 수 없으며, 그러니 계명대로 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고 교묘하게 설득합니다. 그때 세상에 대한 집념이 강한 사람들은 그들의 논리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체어리티(charity, 仁愛)의 신앙, 곧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신앙을 ‘행위 신앙’,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이라 하며 거부합니다. 바로 그들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말 못하게 하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도 주님에 의해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시험을 통해 겸손하여져서 이제는 이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 각종 사고나 사람들에게 버림받음 같은 시험들을 허용하십니다. 시험을 거치면서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은 실제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곧 평소 입만 살았지 실제상황에서는 악과 거짓을 이길 힘이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 세상 것들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뜬구름 같은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높았던 마음이 낮아질 때, 이제 그는 주님의 인도를 받아 체어리티의 신앙 가운데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때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주님에 의해 쫓겨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은 체어리티의 신앙이 자신의 신앙이라 분명하게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그동안 그가 이런 고백을 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지옥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의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유혹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자신의 지성을 믿는 사람, 또는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부심이 잘 없어지질 않습니다. 그럴 경우, 지옥의 영들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진리가 아니라 자꾸 자신의 진리와 선, 곧 자기가 옳다 여기는 것으로 싸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세상 즐거움에 깊이 빠졌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예전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면 마음 한쪽은 주님의 계명을 따르려 하는데, 다른 한쪽은 자꾸 세상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다 보면 싸움에서 질 때가 많고, 거듭남은 계속 뒷걸음질 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상태에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못할 때,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2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더러운 귀신은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숨어 체어리티의 신앙을 반대하던 영입니다. 주님이 그를 쫓아내시자 귀신은 쉴 곳을 찾아 ‘물 없는 곳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물 없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물 없는 곳은 진리는 없고, 거짓과 악만 있는 곳입니다. 물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귀신들, 즉 지옥의 악령들은 바로 그런 곳에 삽니다. 그래서 물 없는 곳을 찾아다녔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이 귀신은 처음 나온 집, 곧 그 사람한테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5절에서는 이 귀신이 전에 살았던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소되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청결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물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인들에게 진리는 없고, 악과 거짓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이 그런 상태에 있는 이유는, 비록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 주님보다는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정욕을 좇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 마음속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는 없고, 여전히 자아에서 비롯된 진리와 정욕만 있습니다. 그런 상태가 바로 집이 청소되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이제 다른 귀신들과 함께 거기에 들어가 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것을 2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귀신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산다’ 했습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완전한 상태란 어떤 것입니까? 지옥의 영들이 그 사람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파괴해 버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의 내면을 귀신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죄를 짓고, 회개하고 다시 죄짓기를 반복할 때, 점점 더 악한 귀신이 들어와 선과 진리를 남기지 않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신앙인들은 영적으로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드리다 보니 마치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네요...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진리를 전파하실 때,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얼핏 들으면 이 말은 주님을 낳은 마리아를 찬양하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처럼 하늘과 땅으로부터 찬송의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이 피조세계에서 찬송의 유일한 대상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은 비록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시기는 했지만, 사시는 동안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人性, human), 곧 유전악의 속성을 가진 인성을 모두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신성한 인간(Divine Human), 신적 인성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마리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무리 중의 여인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체어리티의 삶이 있는 신앙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은 체어리티의 교리를 통해 각 사람에게 태어나시며,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잉태하는 태’는 체어리티의 교리를 뜻하고, ‘주님을 먹이는 젖’은 사랑, 또는 체어리티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여인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화답하시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체어리티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체어리티의 교리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새 교회, 새 예루살렘 교회가 가진 체어리티의 신앙 가운데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체어리티의 교리를 잘 이해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은 실행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체어리티의 교리 안에 있으면서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못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해 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주님께서 지옥의 영들을 쫓아내시면 그걸 우리가 다시 불러들이는 그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나갔던 영들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조금씩 파괴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진리와 선들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스스로 강한 자라고 생각하는 버릇, 자신을 믿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천사들의 손을 잡고,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73번 글을 보면, ‘영적 자유라는 것은 영생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옵니다. 악을 죄로 여겨 그걸 의도하지 않으며,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야만 이 사랑과 그 기쁨을 맛보며 경험하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자유의지를 키우지 못하면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더라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다니엘 4장 16절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때를 지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일곱 귀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우리 안에 선과 진리가 완전히 파괴되고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매 순간 나쁜 영들을 거절해야, 즉 내게 와있는 악한 영들이 하는 악하고 거짓된 생각들과 나를 분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악하고 어두운 생각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라면서 말이지요. 그 대신, 천사들의 손을 잡고, 즉 주님이 천사들을 통해 주시는 천국의 밝고 환한 생각들을 받아들여 체어리티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2-3)

 

아멘

 

원본

2020-02-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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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3(D5)-매일예배(2492, 눅11,14-23), '말 못하게 하다, 강한 자, 더 강한 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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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jMWf5bNsT4

 

 

 

말 못하게 하다, 강한 자, 더 강한 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의 속뜻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11:14-23)

 

 

‘육정’(肉情, the will of the flesh)과 ‘사람의 뜻’(the will of man)(요1:13)은 떼어놓는 것(what disjoin)인 반면,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결합하는 것(what conjoin)이며, 그래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sons of God)이라, 그분의 ‘자손’(seed)이라 하셨는데, 그것은 이들에게 천국을 주시겠다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AC.1608:2) For the will of the flesh and the will of man are what disjoin; but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are what conjoin; therefore they in whom are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are they who are born of God. And because they are born of God, they are called “sons of God,” and are his “seed,” to whom is given the heavenly kingdom. (AC.1608:2)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4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13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4, 13)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바울 시대에도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그들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그것을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이며,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대해 잘못 가르치기는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류 교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계셨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비록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른바 대속과 믿음만의 신앙을 만들어 내어 이 역시 비록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실제로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어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가 아닌,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속(代贖)이란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밝히신 바에 따르면, 구원받는 것,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무슨 표를 받거나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입국 요건만 충족되면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 입국 요건이란 다름 아닌, 당사자의 속 사람, 곧 영의 상태가 천국 상태이면 되는 것입니다. 영계는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의 사후 영의 상태가 천국에 맞으면 천국으로, 지옥에 맞으면 지옥으로 배정되는, 그런 시스템인 것이지요. 중요한 건, 각 사람의 영, 곧 속 사람의 상태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과 결정의 영역이지 이걸 누가 대신, 곧 주님이라도 대신 해주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 주님이 해주실 수 있는 범위는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는 배경, 즉 선악 간 본인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自由)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이 세상 삶이 지옥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면 그걸 주님이 오셔서 바로잡아 주셨고, ‘자, 그동안은 태생적으로 어려웠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네 결정과 선택에 달렸으니 잘 해보렴. 내가 네 평생 네 곁에서 끝까지 도와주마...’ 하시는 것이지요. 이 정도가 ‘대속’과 ‘구속’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은 방금 말씀드린 ‘자유’와 ‘구속’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구속이란 인류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영적 자유를 되찾는 일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 인간의 영적 상태는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유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를 부정하고 주님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직접 세상에 오셔서 부활하심으로 해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지옥에 눌려있던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자유의 회복이며, 인간의 구속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통해 스스로 하는 것처럼, 즉 자신의 의지로 자아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스스로 하듯, 즉 자기 의지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이 하시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선한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복음서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주님이 가르치시지 않은 진리, 즉 ‘대속’의 복음과 ‘오직 믿음’의 교리를 전하고, 또 그렇게 믿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의 내면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인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신앙을 가로막는 지옥의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영들은 사람들의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통해 우리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마음대로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에 대한 입장과 주관, 집착과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그런 상태에 있는 신앙인들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주님이 말을 못 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합니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이 참된 신앙임을 인정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그동안 그의 안에 있는 지옥의 영들이 진리를 방해했기 때문인데, 만약 그가 주님 앞에 진심으로 겸손해진다면,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주님은 그에게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시고, 아들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나는 진리시라는 것과,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아니라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에게서 풀려나 비로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한다는 것’은 주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체어리티를 동반한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주님에 대해, 그리고 체어리티의 신앙에 대해 고백할 때, 잘못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체어리티의 신앙을 이단 신앙이라고 비난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라는 근거가 무엇이냐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15절과 16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5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주님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냈을 때, 주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알세불이란 ‘높은 거처의 주인’이란 뜻으로 자세한 건 인터넷에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누군가 체어리티의 신앙을 고백할 때, 그것은 지옥의 바알세불로부터 오는 신앙, 즉 이단 신앙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을 시험하여 하늘의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체어리티의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라는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마태복음 12장에서

 

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마12:39-40)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는 것은,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더 믿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보여 주시더라도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 주시지 않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은 주님이 모진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표상하는데요,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지고 지옥의 시험을 견디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때 그런 우리의 신앙이 하늘로부터 오는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라는 것이 저절로 증명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18절에서 또 말씀하십니다.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체어리티의 신앙은 바알세불의 신앙이 아니라 지옥의 바알세불과 맞서 싸우는 신앙임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바알세불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신앙을 공격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알세불의 신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21절과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이 말씀에서는 인간의 자아를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강한 자’는 바로 인간의 자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무장’은 자아에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강한 자가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진리와 선을 가지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믿는 것입니다. 가끔 자신의 판단력과 의지만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다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은 겉으로만 선하게 보일 뿐 본질에 있어서는 악하고 거짓된 것이며, 그렇기에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강한 자’는 지옥의 영들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 지옥의 영들이 와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이나 진리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도움 없이 인간 혼자서는 어떻게 해도 지옥의 영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지옥의 영들에 의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마저 모두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믿던 무장과 재물을 모두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3절에서 주님께서는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즉 ‘나와 함께해야 한다’ 하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반대하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가 된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헤치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주님만 믿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혼자 하려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주님과 함께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견실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주님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 하려고 하는 걸까요?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나를 버리는 길이며, 나를 희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지름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게 하시더라도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자꾸 멀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길이야말로 의로운 길이고, 구원의 길, 진정한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주님은 또 당신과 함께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모으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과 화합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셋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흩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파당을 지어 사람들을 흩어지게 합니다. 한 분 주님을 세 하나님으로 나눕니다.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해야 하고, 모든 것을 모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흔들림 없이 체어리티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주님의 그러하신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35:6)

 

아멘

 

 

원본

2020-01-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3(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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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1(D3)-매일예배(2491, 눅11,5-13), '구하는 자에게 성령, 곧 거룩한 진리와 생명을 주시는 주님'.pdf
0.33MB

https://youtu.be/0kUthMEABng

 

 

구하는 자에게 성령, 곧 거룩한 진리와 생명을 주시는 주님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5-13)

 

 

성령을 주시는 것은 신성한 진리로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 그 생명은 총명과 지혜의 생명이다. (AC.9818:24, 출28:3 주석 중) In Luke: If ye, being evil, know how to give good thing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shall the Father who is in heaven give the Holy Spirit to them that ask him? (Luke 11:13); “to give the Holy Spirit” denotes to enlighten with Divine truth, and to endow with the life thence derived, which is the life of intelligence and wisdom. (AC.9818:24)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방법은 보통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성으로 진리를 추론(推論), 경험의 지식을 통해 진실을 검증하는 방법이고요, 다른 하나는 추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지각(知覺)하는 방법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책을 통해 진리를 배울 때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영감을 받아 깨달음을 얻을 때의 방법입니다. 그때는 마치 전등에 불이 켜지듯 불시에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것을 논어에서는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는 기쁨, 즉 ‘멀리 있는 친구가 불현듯이 찾아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역시 친구가 찾아오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5, 6절입니다.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우리가 여행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일정을 짜고 그에 따라 예산을 세우고 필요한 물품들을 배정합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의 여정에서도 선과 진리 같은 영적 자산들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잘 배분해 사용합니다. 그런데 거듭남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가끔 선과 진리의 균형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은 많은데 진리가 부족하거나, 진리는 많은데 선이 부족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행하는 친구가 찾아와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를 나타냅니다. 즉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상태입니다. 자신에게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고 느껴질 때는 언제입니까? 이웃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보일 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진정한 회개가 어려울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 안에 선이나 사랑이 없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저에게 선이 없으니 선을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선을 구하는데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떡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 선이 없는 때를, 그리고 ‘’은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선이 없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 선을 구할 때 주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7, 8절입니다.

 

7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진리만 있고 선이 없을 때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내면의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올 수 없고, 그러므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문이 닫혀있는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떡을 받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고 했습니다. ‘침실’은 속 사람을 나타내고, ‘아이들’은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으로부터 선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그가...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의 친구는 진리 안에 있는 사람, 즉 진리를 이해하고 믿는 우리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선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를 믿기는 하는데 주님으로부터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부터 믿기 때문입니다. 자아로부터 주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를 믿으면서도 주님의 나라에는 뜻이 없고, 세상의 권세와 부귀에만 뜻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친구에게는 주지 아니할지라도 간청하는 사람에게 요구대로 선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9, 10절에서는,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주님께 ‘구하는 자, 찾는 자, 문을 두드리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조건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저에게 사랑이 없으니 사랑을 주십시오’하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으로 선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에 대해 ‘계시록 해설’ 815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어떤 것을 구한다면 그의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 아니다. (AE.815)

 

주님은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것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만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입니다. 그것을 구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고, 주님 앞에 간청하는 자, 문을 두드리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계시록 해설’ 815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으로부터 오는 믿음을 산을 바다에 던지는 능력에 비유하셨다. 왜냐하면 산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뜻하고, 바다는 지옥을 뜻하기 때문이다. (AE.815)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라야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생명이 우리에게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11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천국의 비밀’ 9818번 글에서는 ‘성령을 주시는 것은 신성한 진리로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 그 생명은 총명과 지혜의 생명이다. (AC.9818:24)’라며, 눅11:13 말씀을 풀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주님께 구하는 모든 기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성령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어둠을 흩어버리는 깨달음의 빛이며 지혜의 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악과 거짓을 몰아내는 신성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으로 인하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거룩한 것을 원하게 하시고 구하게 하시며 그것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성령의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 축원합니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21:21-22)

 

아멘

 

원본

2020-01-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1(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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