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8년 3월, 당시 평양을 방어하는 부대 소속 정치부 조직부 중좌(우리로 치면 중령급)로 있었던 심주일 씨의 놀라운 탈북 이야기입니다. 오늘 현재 2부까지 올라왔습니다.
친구 통해 건네받은 성경, 이 성경을 읽다가 북조선 주체사상이라는 게 이 성경에서 뽑아낸 것임을 간파, 이후 북을 떠나라시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치밀한 준비 끝에 신분증과 단검 하나 소지한 채 월경(越境), 여러 위기의 순간마다 참으로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이어 대련에서 호주 국적 목사님을 만나 제주 극동방송 및 국정원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아무 정말 그 무엇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여전히 직접 나타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 또 찬양합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 황해도 해주 상산 사시던 저희 선친(邊培根, 1907생, 1988졸)께서는 일정 때 서울 오장동으로 올라오신 후, 6.25 사변으로 이후 끝끝내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셨는데요, 이분의 말투나 분위기에서 생전 아버님 모습이 많이 오버랩되어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43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눅8:40-48)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건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어떨 땐 매우 치욕적이지만, 주님(the Divine)앞에서는 완전히 다른데요,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건 그 자체로 온전한 예배(total prostration)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이 생각하기를, 힘과 능력, 지혜에 있어 오직 주님만이 전부이시며, 사람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모든 선은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으며, 사람으로는 전혀, 오히려 악만 말미암는다 할 때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이런 사실을 시인, 인정할 때, 그는 마치 그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 같으며, 그래서 그 결과 그의 얼굴에 이런 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가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될 때, 그는 또한 자신의 본성(the proprium [what is his own])으로부터도 지워지게 되는데, 이 본성이라는 것은 본질상 완전히 악하기만 한 것입니다. (AE.77)
이 내용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77번 글 인용이며, 이 글은 계시록 1장 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중,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And I fell at his feet)에 관한 속뜻 주석입니다.
오늘 메시지의 하이라이트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의 하나 되심, 곧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부터 무한한 능력이 나오는 것처럼, 말씀의 겉 글자로 표현된 자연적 진리 안에 속뜻인 내적 진리가 담길 때, 그때에도 역시 무한한 능력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인데요, 그것을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이렇게 묘사, 표현한 것입니다. ‘옷 가’는 말씀의 자연적 진리, ‘손을 대는 것’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감,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는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무한한 능력이 나와 이 여인을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아래 블로그를 참고하시고요, 오늘은 위 제목처럼, 주님이 많은 여인을 고치셨지만 유일하게 오늘 본문에서만 ‘딸’이라 호칭하신 이유를 살짝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예배 메시지에서 이것이 메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본문에 나오는 ‘옷 가’는 히브리어로 ‘찌찌트’(ציצית)라 하는 것으로, 다음 민수기 말씀에 나오는 ‘옷단 귀에 만드는 술’을 말합니다.
38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민15:38-40)
류모세 이스라엘 선교사의 ‘열린다 성경’ 시리즈를 보면, 이 ‘찌찌트’는 그 사람의 정체성, 모든 것, 인격 전체를 나타내며, 그래서 본인의 허락 없이 함부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건 마치 지나가는 노인의 백발 수염을 잡아 흔드는 것과 같기 때문인데요, 만일 그랬다가는, 특히 유대 정결법에 저촉되는 사람이 만졌다가는 현장에서 돌에 맞을 수도 있는 것이며, 이 여인이 몹시 두려워한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정말 여인은 목숨을 걸고 주님의 ‘찌찌트’에 손을 댄 것인데요...
이런 사정을 아시고 주님은 복음서 전체에서 유일하게 이 현장, 이 여인에게만큼은 ‘딸’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주십니다. 아무리 유대 사회 영향력 있는 랍비라 하더라도 자기 피붙이가 자신의 ‘찌찌트’ 만지는 건 괜찮기 때문인데요, 주님의 이 기가 막힌 순간적 배려에 아마도 둘러섰던 모든 무리가 다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해했을 것이며, 이 여인은 그래서 온몸을 떨며 주님의 사랑과 애정, 다정하신 따뜻한 배려에 깊은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