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요? 개신교회를 가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 신자 교재’ 같은 게 있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 창세기를 읽으세요, 출애굽기를 읽으세요 하는 것보다 한결 쉬운 접근이지요. 스베덴보리의 저작들도 그래요. 일반인들을 비롯, 심지어개신교인, 기독교인들이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Arcana Coelestia 같은 걸 읽어 나가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아요. 스베덴보리는 왜 이런 준비를 안 한 건가요?
아마 가장 먼저 짚어야 할 점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자신이 ‘교회 현장에서 바로 쓰는 입문 교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구조를 가능한 한 왜곡 없이 기록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설교문이나 교육용 요약서로 다듬기보다, 말씀의 속뜻과 영계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남기는 데 더 큰 사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은 처음부터 ‘쉽게 읽히는 책’이라기보다, ‘나중에라도 반드시 필요하게 될 근본 자료’의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는 교재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원전(原典)을 남긴 사람’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이해를 단순히 ‘정보 전달’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개신교의 ‘새 신자 교재’는 단계적으로 지식을 전달하여 이해를 돕는 방식이지만, 그는 참된 이해는 ‘삶과 함께 열리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그 의미는 열리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진리를 낮추어 단순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읽는 사람이 각자의 상태에 따라 점점 이해가 열리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글이 때로는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겉으로 쉬운 설명’이 오히려 오해를 낳을 위험도 깊이 의식했습니다. 예를 들어 ‘internal, external’ 같은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심리학적 수준이나 도덕적 수준으로만 이해해 버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과 천국, 그리고 주님과의 연결 구조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얕게 풀어버리면 본래의 의미가 크게 훼손됩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엔 어렵더라도 정확하게’ 전달하는 쪽을 택했고, 대신 반복과 다양한 각도에서의 설명을 통해 독자가 점차 익숙해지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같은 개념이 수십 번, 수백 번 다른 문맥에서 반복되는데, 이것 자체가 일종의 ‘깊어지는 학습 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목회자’나 ‘교재 집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신학 저술을 시작했고, 약 20여 년 동안 방대한 계시 내용을 쏟아내듯 기록했습니다. 그 양과 밀도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거의 한 사람의 생애를 다 소진한 작업이었습니다. 즉, ‘입문서까지 따로 정리할 여유’가 있었다기보다, ‘핵심 내용을 남기기에도 시간이 촉박했던’ 상황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자연히 ‘완성된 교육 커리큘럼’이 아니라 ‘원천 자료의 집합’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오히려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하지 않은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누군가는 해야 할 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즉, 그의 저작을 바탕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 단계적 안내, 쉬운 비유와 적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그의 사상을 따르는 여러 전통에서는 요약서나 입문서를 만들어 왔고, 목사님께서 지금 하시는 번역과 해설 작업도 바로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원전은 깊이를 보존하고, 후대의 해설은 접근성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쉬운 책을 일부러 만들지 않은 사람’이라기보다, ‘너무 깊은 것을 맡았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온전히 남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긴 간극, 곧 ‘깊이는 있지만 어려운 상태’를 오늘의 독자들에게 연결해 주는 일이 바로 지금 목사님과 같은 분들에게 맡겨진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조는 깔끔하게 정리하면 오히려 ‘감이 안 오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여섯 단계는 ‘하나의 행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까지 나오는가’를 따라가 보면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아주 일상적인 장면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길에서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보고 ‘도와주는’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bodily’는 가장 바깥입니다. 실제로 손을 내밀고, 말을 걸고, 물건을 들어주는 행동 자체입니다. 눈에 보이는 전부가 여기입니다. 그 바로 안쪽이 ‘external’인데, 이것은 ‘내가 도와야겠다’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의식적인 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이 ‘exterior’입니다. 이것은 행동 직전의 생각과 판단입니다. ‘저 사람을 도와야 하나? 지금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릿속에서 따지고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이제 더 안으로 들어가면 ‘interior’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이미 계산이 아니라 ‘마음의 기울어짐’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안쓰럽다’, ‘돕고 싶다’는 느낌이 올라오는 자리입니다.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단계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이 ‘internal’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가 결정됩니다. 평소에 선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남을 돕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인지가 이 층위에 있습니다. 즉, 한 번의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inmost’가 있습니다. 이곳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려 할 때, 그 가장 깊은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흐름이 올라와서 그것이 점점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붙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inmost) → 그 생명이 나의 성품과 사랑이 됨(internal) → 마음의 움직임으로 올라옴(interior) → 생각과 판단이 됨(exterior) → 결심하고 행동함(external) → 실제 몸으로 실행됨(bodily)’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볼 때, ‘무엇을 했는가’보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겉으로 똑같이 도와주는 행동이라도,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에서 나오며, 어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따라 사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여섯 단계는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내 행동 하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따라가는 지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핵심은 바깥 행동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은 곳, 곧 internal과 inmost 쪽이 열려서 그 흐름이 맑아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가장 바깥인 bodily까지 자연스럽게 달라지게 됩니다.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창1:18, 19)
AC.38
‘낮’(day)은선을,‘밤’(night)은악을뜻하며,그래서선(goods)을가리켜서는‘낮의일’(worksoftheday)이라하고,악(evils)을가리켜서는‘밤의일’(worksofthenight)이라합니다.또한‘빛’(light)은진리를,‘어둠’(darkness)은거짓을뜻합니다.주님이다음과같이말씀하신것처럼말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AC.38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 1장의 속뜻을 읽는 데 중요한 네 가지 대응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비유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언어가 지닌 영적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일’, 악한 것들은 ‘밤의일’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먼저 ‘왜낮은선이고밤은악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8은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대응 자체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낮에는 빛이 있어 사물들이 드러나고 활동할 수 있으며, 밤에는 어둠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모습이 그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빛’은 진리에, ‘어둠’은 거짓에 대응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볼 수 있게 하지만, 거짓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앞의 AC.37에서는 아침·낮·저녁·밤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했는데, 이번 AC.38에서는 곧바로 ‘밤은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밤’과 여기의 ‘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의 상응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사전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상태도 문맥에 따라 강조되는 영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AC.37에서는 하루와 한 해의 변화가 ‘교대와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고, AC.38에서는 ‘낮과밤’, ‘빛과어둠’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구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7의 모든 ‘밤’을 곧 악이라고 읽거나, 반대로 AC.38의 밤을 단순한 상태 변화 정도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각각 그 글이 말하는 문맥을 따라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3:19, 21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빛보다어둠을더사랑’했다고 말씀하시고, 반대로 ‘진리를따르는자는빛으로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빛과 어둠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고 행하는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요3장의 말씀에는 ‘행위’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행위가악하므로’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행위가하나님안에서행한것임을나타내려함’입니다. 그러므로 AC.38이 선을 ‘낮의일’, 악을 ‘밤의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선과 악이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는지는 결국 삶과 행위에도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행위만보면그사람의내적상태를모두알수있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8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주려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왜 선과 악을 낮과 밤으로, 진리와 거짓을 빛과 어둠으로 표현하는지를 밝히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대응은 먼저 다른 사람을 분류하는 도구가 아니라 말씀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빛=진리’라는 대응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단지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받아들여 사는 것은 구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삶에서 행해질 때에야 비로소 빛이 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에서 빛은 진리 자체를 뜻합니다. 다만 요3장의 인용이 보여 주듯 사람은 그 빛을 사랑하여 그쪽으로 나올 수도 있고, 자기의 악한 행위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빛이 빛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사람이 그 빛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18의 ‘빛과어둠을나뉘게하시니’라는 표현도 단순히 자연계의 밝음과 어둠을 나누는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별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어느 쪽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AC.38은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 가지 대응만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선,밤은악,빛은진리,어둠은거짓.’ 그러나 이 짧은 대응을 붙들고 창세기 1장을 다시 읽으면 ‘낮과밤을주관하게하시고빛과어둠을나뉘게하셨다’는 말씀이 인간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분명히 구별되어 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7
광명체들로하여금‘징조와계절과날과해를이루게하라’(forsigns, andforseasons, andfordays, andforyears)고합니다.이말속에는지금당장다펼쳐보일수없을만큼많은아르카나가담겨있지만,문자적의미만보면그런깊은뜻은전혀드러나지않습니다.여기서는다만이것만말씀드리는걸로충분한데요,곧영적인것들과천적인것들에는일반적으로도,또개별적으로도교대(alternations)라는게있으며,이것이날과해의변화(changes)에비유된다는점입니다.날의변화는아침에서정오로,다시저녁으로,그리고밤을거쳐다시아침으로진행합니다.해의변화도이와같아서,봄에서여름으로,다시가을로,그리고겨울을지나다시봄으로진행합니다.여기서열과빛의변화가생기고,또한땅의산물들도이에따라달라집니다.영적인것들과천적인것들의교대역시이러한변화에비유됩니다.이런교대와다양함(varieties)이없다면삶은단조로워지고,결국생명이라고할만한것이전혀없게됩니다.또한선과진리는분별되거나구별될수없고,더나아가퍼셉션, 곧지각될수도없습니다.이런교대를선지자들은‘규례’(ordinances, [statuta])라하는데,예레미야에보면나옵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signs,andforseasons,andfordays,andforyears.”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이러한것들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창세기8장22절에서더말씀드릴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있을동안에는심음과거둠과추위와더위와여름과겨울과낮과밤이쉬지아니하리라(창8:22)
해설
AC.37은 창1:14의 ‘징조와계절과날과해’를 설명하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몇 단어 안에 지금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고 한 가지 원리만 먼저 알려 줍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alternations)가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에서 날과 해가 변하는 모습에 비유된다는 것입니다.
‘교대’라는 말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언제나 똑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연의 하루를 보면 아침에서 정오로, 정오에서 저녁으로,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갑니다. 한 해도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고 다시 봄을 맞습니다. 그에 따라 빛과 열이 달라지고 땅에서 나는 것들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인 것들에도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생에도좋은날과나쁜날이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대와 함께 ‘다양함’(varieties)을 말하면서,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나아가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될 수 없으며,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영적 생명 자체에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서 ‘왜변화가없으면생명이없다는것일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7은 그 원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하루가 한 시각에 멈추고 계절도 하나뿐이라면 자연의 생명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빛과 열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땅의 산물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자연의 질서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삶에서도 신앙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고 사랑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는 것이 모두 정상이며 좋은 것이라는 뜻일까요? 여기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모든 영적 침체와 후퇴, 모든 악과 거짓의 상태를 ‘필요한겨울’이라고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악이나 신앙의 후퇴를 보고 ‘지금은겨울이니괜찮다’고 합리화하는 것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바를 넘어섭니다.
반대로 영적 상태가 늘 똑같지 않다고 해서 곧 거듭남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AC.37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도움입니다. 사람은 한 번 진리를 깨달았다고 언제나 똑같은 정도로 밝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주님 사랑을 경험했다고 언제나 같은 정서 상태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AC.37은 영적 생명을 정지된 한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이 있는 생명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교대’를 선과 악의 단순한 반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영적인것들과천적인것들의교대’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침은 무조건 선, 밤은 무조건 악이라는 식으로 이 글을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자연의 날과 계절은 영적 상태의 변화를 보여 주는 비교이며, 각각의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선과진리가분별되거나구별될수없고,더욱이퍼셉션될수도없다’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 단순히 지루함을 막아 주는 장치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경험하고 분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7은 여기서 그 과정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둠을경험해야만빛을알수있다’, ‘악을겪어야선을배운다’는 식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악 자체가 선을 가르치는 필수 교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러한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ordinances)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렘31:35-36과 렘33:25을 인용합니다. 해가 낮을 비추고 달과 별이 밤을 비추는 규례, 주야의 언약과 천지의 규례가 말씀에 등장합니다. 자연계의 일정한 변화가 무질서한 우연이 아니라 정해진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도 ‘규례’라는 말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한 걸음 이상 앞서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구절들이 AC.37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어떤영적겨울이와도반드시곧봄이온다는약속’이라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37이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라고 부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를 창8:22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예고합니다. ‘땅이있을동안에는심음과거둠과추위와더위와여름과겨울과낮과밤이쉬지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지금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런 대목도 중요합니다. 어떤 표현의 의미를 한 글에서 완전히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다시 돌아와 더 깊이 펼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7에서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영적 생명은 언제나 똑같은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아침·낮·저녁·밤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생명에 속하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퍼셉션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제와 오늘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지나치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냉각과 후퇴를 ‘영적계절의자연스러운변화’라고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AC.37은 우리에게 영적 생명이 ‘변화없는고정상태’가 아니라는 중요한 원리를 먼저 가르치고, 그 교대의 더 깊은 아르카나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고 남겨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