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창3:24)

 

 

309. ‘두루 도는 불 칼’이 비정상적인 탐욕들과 설득들을 동반한 자아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페이지들을 가득 채울 수도 있을 만큼 많은 인용구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에스겔에 나오는 몇 구절만 인용하고자 합니다. 이 ‘비정상적인 탐욕들과 설득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신비들을 추구하게 하지만, 사실은 육체적, 세속적인 것들에게 끌려 휩쓸려 버리고 말게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That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love with its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they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ut are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might be confirmed by so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would fill pages; but we will cite only these from Ezekiel: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Prophesy and say, Thus saith Jehovah, Say a sword, a sword, it is sharpened, and also burnished to make a sore slaughter; it is sharpened that it may be as lightning. Let the sword be doubled the third time, the sword of his slain; the sword of a great slaughter,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that their heart may melt, and their offenses be multiplied, I have set the terror of the sword in all their gates. Alas! it is made as lightning. (겔21:9-10, 14-15)

 

여기 ‘’은 사람의 황량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람이 선과 진리는 전혀 못 보고, 대신 ‘많이 엎드러지게 하다’로 표현한 거짓들과 잘못된 일들만 볼 뿐임을 상징합니다. A “sword” here signifies the desolation of man such that he sees nothing that is good and true, but mere falsities and things contrary, denoted by “multiplying offenses.

 

또 나훔에도 나오는데요, 거기 신앙의 신비들을 추구하는 자들을 가리켜,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라 하고 있습니다. It is also said in Nahum, of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 (나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3:3)

 

 

310. 이 구절 각각의 표현들에는 가장 깊은 의미들을 가진 아케이나가 너무나 많아 그걸 다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아케이나에 들어있는 것들은 홍수로 사라진 지금 이 사람들의 천성에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홍수 후 살았던 사람들의 천성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Each particular expression in this verse involves so many arcana of deepest import (applicable to the genius of this people who perished by the flood, a genius tot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ose who lived subsequent to the flood), that it is impossible to set them forth.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간략히 보겠습니다. 그들의 첫 부모 세대는 태고 교회를 형성한 세대로서, 천인(天人)들이었고, 그 결과, 그들 안에 심긴 천적(天的)인 씨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천적 기원을 가진 씨를 자기들 안에 가졌습니다. We will briefly observe that their first parents, who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celestial men, and consequently had celestial seeds implanted in them; whence their descendants had seed in them from a celestial origin.

 

천적 기원을 가진 씨는 사랑이 온 마음을 다스리며, 하나로 만드는 그런 것입니다. Seed from a celestial origin is such that love rules the whole mind and makes it a one.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의지와 이해력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방금 ‘하나로 만든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이 두 가지가 하나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For the human mind consists of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사랑 혹은 선은 의지에, 신앙 혹은 진리는 이해력에 각각 속합니다. 태고 교회 사람들은 사랑 혹은 선을 가지고 무엇이 신앙 혹은 진리에 속하는지를 지각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Love or good belongs to the will, faith or truth to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or good those most ancient people perceived what belongs to faith or truth, so that their mind was a one.

 

이런 인류의 후손이기 때문에, 동일한 천적 기원을 가진 씨가 필연적으로 남게 됩니다. 진리와 선이 각각 자기 쪽, 곧 진리는 진리 쪽에서, 선은 선 쪽에서 조금씩이라도 떨어져 나가는 것은 가장 끔찍한 경우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온 마음이 너무나 왜곡되어 저 세상에서 도저히 회복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With the posterity of such a race, seed of the same celestial origin necessarily remains, so that any falling away from truth and good on their part is most perilous, since their whole mind becomes so perverted as to render a restoration in the other life scarcely possible.

 

한편, 천적인 씨 대신 영적인 씨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홍수 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오늘날 사람들도 해당합니다. It is otherwise with those who do not possess celestial but only spiritual seed, as did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as also d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이들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선한 의지도 없지요. 그러나 신앙, 혹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은 여전히 있습니다. 이 능력으로, 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즉,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에 기반, 주님으로 말미암은 양심의 암시라는 방식, 즉, 이런 양심을 주님이 은근히 사람들 속으로 주입하시는 방식이지만 말입니다. There is no love in these, consequently no will of good, but still there is a capability of faith, or understanding of truth, by means of which they can be brought to some degree of charity, although by a different way, namely, by the insinuation of conscience from the Lord grounded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the derivative good.

 

그들의 상태는 그래서 홍수 전 사람들의 상태와 아주 다릅니다. 그 상태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 다루겠습니다. Their state is therefore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the antediluvians, concerning which stat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현 세대에게는 정말 낯선 아케이나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아무도 천인이 무엇인지, 심지어 영인 조차 아는 사람이 없고, 그 결과, 사람의 마음과 생명의 퀄러티에 대해서조차 아는 바가 없고, 최종 결과인 사후 상태에 대해서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These are arcana with which the present generation are utterly unacquainted, for at the present day none know what the celestial man is nor even what the spiritual man is, and still less what is the quality of the human mind and life thence resulting, and the consequent state after death.

 

2021-05-11(D3)-창세기(창3,24, AC.309-310), '여섯 번째, 일곱 번째 후손 이야기 (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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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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