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27(D1)-주일예배(2501, 눅12,35-40),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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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6qJdAJUEes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12:35-40)

 

 

영적 생명이 없는 자연적 생명은 자체로 잠든 것이지만,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깨어있는 것이다.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사람이 각자의 빛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것에 따른 삶을 살 때 얻을 수 있다. Natural life, considered in itself, or without spiritual life, is nothing else but sleep; but natural life, in which there is spiritual life, is watchfulness; and this cannot be acquired otherwise than by truths, which are in their own light and in their own day, when man is in the life according to them. (AR.158)

 

 

마태복음 26장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험을 앞두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결국 완벽하게 이기실 것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깨어있자 하셨을까요? 십자가의 고통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십자가를 지기까지 유대인들로부터 받을 폭행과 모욕이 두려워서였을까요? 물론 그러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육신을 입으신 인간이기도 하셨으니까요. 주님도 보통의 인간들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 마지막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신 주님이 당신 안의 여호와를 향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고민이 육신의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의 시험은 주님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개개인의 시험에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싸우시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죽게 되었다고 하신 것은 주님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시험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이 올 때 인간은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수단으로 스스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를 위해 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싸워보려고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시험이 오더라도 담대히 맞서 싸울 수 있고 그때 주님이 그 싸움에 관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시험 가운데서 넘어질 때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가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신 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연민과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당부하신 주님께서 본문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허리는 무슨 뜻일까요? 고대의 사람들은 부부의 사랑이 허리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허리의 영적 의미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등불은 진리 또는 믿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라는 것은 주님을 믿고 또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믿고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라야 악을 밀어내고 선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하시는 것은 깨어있으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36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여기서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혼인집은 세상 혼인집이 아니라 영적인 혼인집인 천국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선과 진리 또는 믿음과 사랑의 결혼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것은 주님이 천국을 통해 각 사람에게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와 선의 유입(influx)을 뜻합니다. 주님은 선과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항상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정작 우리는 그 문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흘러들어오고 지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3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깨어있는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그래야 마음을 열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187:3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있어 주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진리에 속한 지혜와 지성의 빛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에 관한 한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 그러므로 전자는 깨어있는 것이고 후자는 잠자는 것이다.

 

주님은 깨어있는 사람에게 오시며, 그때 허리에 띠를 두르고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먹여주십니다. 말씀에서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는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3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말씀에서 숫자 3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이경에나 삼경에 오시는 것은, 주님은 개인의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시하시면서 깨어있을 때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종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 여기 이경, 삼경하는 ‘경’(更)은 일몰부터 일출을 저녁 7시부터 두 시간씩 다섯으로 나눠 부르는 것으로, 각각 초경, 이경, 삼경... 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경은 저녁 7시부터 밤 9시, 이경은 밤 9시부터 밤 11시, 삼경은 밤 11부터 새벽 1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해 항상 깨어있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졸기도 하고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하지요. 신앙인들이 잠잘 때 주님은 수시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깨어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는 동안 세 번 내려오셔서 제자들이 깨어있는지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깊이 잠든 것을 보시고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며 안타까워하셨지요.

 

주님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시는데 오래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신앙인들에게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지옥의 영들에 의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선한 것, 진실한 것들이 파괴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도둑이 들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도둑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우리는 잠만 잡니다. 그래서 본문 39절과 4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지옥의 도둑들이 언제 닥칠지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말씀에는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계속 문을 두드리시는데 사람들은 아무 준비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진과 겸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문을 열어도 여는 것이 아닙니다. 순진과 겸손의 정도가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될 때 주님과 인간 사이 접점이 생기고 교류가 일어납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렇고 오늘 말씀에서도 그렇고 제자들에게 늘 깨어있으라 하셨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고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한 편으로는 죄를 고백하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읽기보다 세상 소식과 재미에 빠져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먼저 보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순진과 겸손을 비롯, 모든 종류의 선의와 근면, 순결한 부부 사랑이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잠들어 있을 때는 자기를 높이는 마음과 미움과 나태와 온갖 종류의 정욕이 지옥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반성을 하는데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세상사에만 관심을 두고 자아의 욕심대로만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영적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처음 사랑과 이웃에 대한 순수한 정을 잃게 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도둑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우리의 그런 문제들에 대해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 겉 사람이 이런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눈이 피곤하다 하셨습니다. 눈은 영적인 지성, 또는 분별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피곤하다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는 옳은 일을 한다 하는데 그것이 남에게는 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깨어있음으로 해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아는 만큼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적 지성이 밝아지고,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3)

 

아멘

 

 

 

원본

2020-07-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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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20(D1)-주일예배(2500, 눅12,22-34),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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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6ExJ3jyOPZc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눅12:22-34)

 

 

주님의 섭리(Providence) 가운데 있는 만큼 그는 평안하며, 또한 신앙의 선에서 오는 평안 가운데 있는 만큼 그는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the Divine Providence)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아셔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the Divine Providence of the Lord)는 일반적으로나 특별히, 아니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있으며, 그러면서도 영원한 것에 관한 것임을 알고 믿습니다. (AC.8478:4) Be it known also that insofar as anyone is in the stream of Providence, so far he is in a state of peace; also that insofar as anyone is in a state of peace from the good of faith, so far he is in the Divine Providence. These alone know and believe that the Divine Providence of the Lord is in everything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is in the most minute things of all, and that the Divine Providence regards what is eternal.

 

 

출애굽기 16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생활 사십 년 동안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신 만나에 관한 장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25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30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이더라

 

아멘, 여기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오늘 본문에 비추어 한 가지 질문을 한다면 바로 이것인데요, 주님은 왜 만나를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신 걸까요? 만나를 미리 거둬 쌓아두는 것은 주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주님의 섭리에 대한,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려주신 주님의 가르침 중 하나인데요, 바로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세 번째 주제인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는 범사에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신다(In All That It Does the Lord’s Divine Providence Looks to What Is Infinite and Eternal)입니다. 즉 우리의 일상 범사 모든 일이 사실은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 가운데 있으며, 비록 우리는 모르고 무심코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의 무한하고 영원한 결과를 주님은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섭리의 법칙을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시고 말입니다. 이 사실, 이 명제를 깊이 붙들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 하나까지도 함부로 아무렇게나 선택하거나 하지 않고, 대신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참된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러한 주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으로부터 끊어지지 않고 만나가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니 필요 이상으로 만나를 거둬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오직 주님만이 선이고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믿을 때,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선과 진리들이 자아에서 나오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에 의해 더럽혀지는데요, 그것이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용할 만큼만 만나를 거두라 하시고요, 기도할 때에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주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내용입니다. 22절입니다.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여기서 목숨과 몸은 사람의 진정한 생명인 영적인 생명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염려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염려한다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욕심을 낸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에게 주어진 몫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은 주어진 몫에 만족하지 않고, 늘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진리를 깨우치면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된 점을 고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러기보다는 자신의 머리에 쌓아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진리는 머리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 활용, 영적 생명인 의지와 사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가 실천된 게 선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생명이 될 때, 기억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을 통해 진리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삶으로 옮기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진리의 깨달음이 없다고 조바심을 내거나, 많은 지식을 쌓아두려 하는 것은 좋지 않은데요, 주님은 각자의 믿음에 따라 필요한 만큼만 진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신 것은 바로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24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말씀에서 까마귀는 보통 거짓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앞에서 말한,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거짓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믿는 마음만이 존재하며, 능력이 있는 마음입니다. 즉 전자는 허상이지만, 후자는 실체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믿는 것이 현실적으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짓이며, 진리 앞에서 발붙일 수 없습니다. 모든 거짓은 어둠과 같아서 진실이 없는 곳에 잠시 나타났다가 진실의 빛이 비치면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그럼에도 거짓이 스스로 존재하며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님이 그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까마귀를 기르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거짓은 주님이 허락하실 때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왜 거짓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실까요?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서입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시험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때 시험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거짓을 허용하시는 것은 너희 인간을 위해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까마귀를 기르시는 것은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까마귀에 대해 말씀하시더니 이번에는 백합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7절과 28절의 말씀입니다.

 

27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말씀에서 백합화는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밝혀 주시는 내적 진리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진실합니다. 솔로몬의 옷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하다 하나 내적 진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내적 진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진실하며 깊이가 있습니다. 말씀에는 왜 그렇게 고귀한 진리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에 비유했을까요? 여기서 백합화는 앞에서 말한 만나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신앙의 진리이며 선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일용할 만큼만 만나를 거두고 다음 날까지 남겨두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지금 이 백합화에도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백합화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이라 한 것은 일용할 만큼만 거둔 진리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내일까지 쌓아두기만 하는 진리는 들풀과 같이 생명 없는 지식에 불과해지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백합화에 대해 오늘은 존재하지만 내일은 아궁이에 던져진다 하신 것입니다. 아궁이에 던져진다는 것은 내일까지 쌓아두는 진리는 생명 없는 지식에 불과하므로 지옥에 던져진다는 뜻입니다. 세상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쌓아두기만 하려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로 31절입니다.

 

29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은 영적인 것이든 세상 것이든 각자의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염려를 한다면 주님의 섭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입을 것이 마땅치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그런 고통은 잠시뿐이고, 주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앞이 안 보이고 마치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았을 때도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주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선순위의 문제, 주객이 전도되는 문제인데요, 세상 사는 동안에는 의식주를 위한 것이나 그 밖에 재물이나 적당한 지위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적은 어디까지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어야 하며, 그러한 물질들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구할 때 주님께서는 영적인 것과 더불어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함께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것에 늘 감사하면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매일 먹을 만큼만 거두라 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만나를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내일 일을 걱정하였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서둘러 여러 날 먹을 만나를 한꺼번에 쌓아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부패해 버렸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늘 내일 일을 걱정합니다.

 

※ 다다음 주인 9월 3일, 9월 첫 주는 저희 한결같은교회 창립 10주년 되는 날입니다. 참고로 오늘 예배는 이 거실에서 2,500번째 드리는 예배입니다. 10년 전인 2013년 9월 1일 주일, 집 이 거실에서 저와 아내, 그리고 큰애 우석이, 이렇게 세 사람이 모여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작은애 준석이는 군입대를 하여 함께할 수 없었지요. 이 자리에선 잠시 경제적인 부분, 생활 면에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회의 동기가 그러면 안 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 몇 해 동안은 생활이 문제이기도 하여 전도를 비롯, 어떻게 하면 경제적으로 최소한의 자립, 곧 십일조 하는 가정이 열 가정만 있어도... 하는 고민이 많았고, 그래서 이런저런 무슨 전도세미나다 부흥세미나다 하는 데를 많이 쫓아다녔고, 또 목회와 더불어 잠시 부업도 하는 등 좀 기웃거리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그 모든 시도 가운데 주님은 그런 곁눈질을 기뻐하지 아니하셨고, 오히려 점점 더 영의 일과 영성, 그리고 천국 사모함의 마음을 주셔서 갈수록 영적 체험과 수도원, 그리고 현재는 스베덴보리에 전념케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전념한다는 것은 주님이 그를 통해 알리신 일련의 계시를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모든 지난 10년 세월 동안 그러나 주님은 참 많은, 소위 까마귀들을 통해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 저희로 굶지 않게, 오히려 배부르게 하셨고, 있어도 없어도, 부하고 빈해도 그저 덤덤, 천사들처럼 모든 걸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가장 기뻐하는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참고로,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 동안 아침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거두러 나갔던 것처럼 지난 세월 한결같이 저희의 만나를 위해 수고한 저희 사모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 모든 일들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 8478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음식이나 의복을 걱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 미리 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몫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것이고, 천국의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이 세상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땅끝에서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 당신의 교회를 섬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현실에 대해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늘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만족하며,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진하게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12:33)

 

아멘

 

 

 

원본

2020-07-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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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이것이 말씀의 속뜻, 즉 겉 글자의 뜻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말씀의 생명 그 자체(its veriest life)입니다. 그런데 이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에 담긴, 주님이 숨겨놓으신 의미)는 너무나 엄청나 이 정도의 볼륨들 가지고는 그 속에 담긴 것을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서는 아주 조금만 제시하는데요,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도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게 거듭남이며, 거듭남이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인데요, 그들은 글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심지어 어떤 단어 하면 탁 떠오르는 의미조차 전혀 모릅니다. 나라, 도시, 강과 인물 등, 말씀 내 역사, 예언 쪽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이런 것들 역시 더더욱 모릅니다. 그들은 오직 그 단어들과 이름들의 의미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낙원의 아담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를 지각합니다. 물론,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가 가졌던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을 지각하는 것이지요. 노아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과 함께 살아남아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합니다. 아브라함 하면 천사들은 결코 아브라함 개인이 아닌, 그가 표상한 어떤 구원 신앙(a saving faith)을 지각하는 등 말이지요. 천사들은 이렇게 단어들과 이름들하고는 완전 별개인 영적, 천적인 것들을 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AC.65

제가 말씀(the Word)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천국 뜰 첫 번째 입구로 옮겨져 거기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그들은 말하길, 자기들은 그 안에 있는 무슨 단어나 글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대신 그 가장 가까운 속뜻이 뭔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런 일련의 순서로 자기들을 깊이 감동, 감명케 한다고, 그것은 영광이라고 가슴 벅차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AC.66

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한, 세속적인 것들을 언급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 천적인 것들을 생각하면서 하는 그런 것이었지요. 그들은 이만하면 그 영적, 천적인 의미를 충분히 띠겠다 싶은 것들(representatives)을 가지고 언급했을 뿐 아니라, 또한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스토리 텔링 같은 일종의 그럴듯한 역사 시리즈로도 만들었는데요, 이런 식의 표현 방식으로 그들은 정말 최고 수준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예언이 바로 이런 스타일입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 위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은 사실 많이 빗나간 번역입니다. 병행 본문(영어)을 보니 너무나 다르지요? 태고교회, 고대교회 같은 이런 배경, 즉 아르카나를 전혀 모르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런 표상(表象, representatives)을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Dark sayings of old)이라고 했습니다. 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창조, 에덴동산 등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오는 이들 자세한 내용들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얻었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두 번째 스타일은 역사적 기술이며, 아브람의 때부터 이어진 모세의 책들에서,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 시대, 사무엘, 열왕기의 책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 사실들이 글자의 뜻 그대로입니다. 즉 실제 역사 그대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이든, 특별하게든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것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음이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순서대로 보시게 됩니다. 세 번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인데, 이것은 태고교회 시절 아주 높은 존경을 받았던 스타일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스타일은 그러나 계속 연결되어 태고 스타일 같은 역사적 형태로 남지를 못하고 그만 끊어져, 이제는 속뜻, 곧 그 안에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있어 아름답게 연결된 순서로 이어지며,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다양한 상태들, 천국 그 자체,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가장 내적 의미와도 관련되는, 이런 속뜻을 제외하고는 이제는 거의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과 상용어 스타일 간 중간 스타일입니다. 주님은 이 스타일에서 속뜻으로는 왕으로서의 다윗의 인격을 통해 다루어지십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 이렇게 해서 창세기 1장을 마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진행됩니다. 즉 본문 주석 앞뒤로 어떤 아르카나가 곁들여져 말씀을 읽는 우리의 이해를 깊게, 아주 넓고 깊게 열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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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AC.60

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고만 하시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고 하시는 이유는, 지금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마치 서로 결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AC.61

신앙의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 사랑, 이웃 사랑(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사람의 이해에, 후자는 사람의 의지에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 조금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머리 신앙은 영적이요, 가슴 신앙은 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열의 문제라기보다는 태생적 특성에 가깝지만, 하여튼 주님은 천적 천사들은 가까이, 영적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 다음으로 가까이하십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특성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가급적 너무 교리, 교리 하지 마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AC.62

사람의 거듭남과 관련하여 그 시기와 상태를 일반적, 그리고 구체적으로 여섯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 합니다. 전혀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서서히 그는 먼저 뭔가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섯째 날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 여섯째 날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됩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즉 영적인 사람은 형상, 곧 주님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며, 천적인 사람은 그 영적인 사람 안에 담기는 주님이십니다.

 

 

AC.63

그를 위해 악과 거짓을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시는 한편, 주님은 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서 확실하게 하십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 다음은 이 ‘주님이 나를 위해 대신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심’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책, ‘천국과 지옥’ 577번 글(김은경 역)입니다.

 

천사에게 지혜와 지성이 있는 것처럼 지옥 영들에게는 그만큼의 악의와 교활함이 있다. 사람의 영은 몸을 벗어나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적 영이 그의 선 안에 있다면, 지옥적 영은 그의 악 안에 있다. 앞에서 자주 설명했듯이 모든 영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인 것은 영이 그 자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적 영은 그의 선에서, 지옥적 영은 그의 악에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악 자체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 악에 포함된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In the same degree in which angels have wisdom and intelligence infernal spirits have malice and cunning; for the case is the same, since the spirit of man when released from the body is in his good or in his evil—if an angelic spirit in his good, and if an infernal spirit in his evil. Every spirit is his own good or his own evil because he is his own love, as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Therefore as an angelic spirit thinks, wills, speaks, and acts, from his good, an infernal spirit does this from his evil; and to think, will, speak, and act from evil itself, is to think, will, speak, and act from all things included in the evil.

 

[2] 사람이 몸을 입고 살 동안은 그렇지 않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받는 법의 제재와 이득, 명성, 평판을 얻을 희망 또는 그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의 제재로 그 영의 악이 억눌려 있었고, 따라서 그 악의 참모습이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는 사람의 영에 있는 악은 그가 세상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꾸미는 외적인 정직함, 올바름,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 등으로 포장되고 가려져 있다. 이런 가면 뒤에서 그 악은 너무도 단단히 밀폐되고 숨겨져 있어 그 자신도 자기 영이 그렇게 엄청난 악의와 교활함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즉 사후에 영이 되면 드러날 자기의 본성이 악마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So long as man lived in the body it was different, since the evil of the spirit was then under the restraints that every man feels from the law, from hope of gain, from honor, from reputation, and from the fear of losing these; and therefore the evil of his spirit could not then burst forth and show what it was in itself. Moreover, the evil of the spirit of man then lay wrapped up and veiled in outward probity, honesty, justice, and affection for truth and good, which such a man professes and counterfeits for the sake of the world; and under these semblances the evil has lain so concealed and obscured that he himself scarcely knew that his spirit contained so much malice and craftiness, that is, that in himself he was such a devil as he becomes after death, when his spirit comes into itself and into its own nature.

 

[3] 사후에는 그런 악의가 스스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악하다. 악은 하나에서 수천 가지 종류가 파생하는데 그 중에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나는 내게 허락된 수많은 경험으로 그 악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관찰할 수 있었다. 주께서 내게 영으로는 영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몸으로는 자연계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은 너무도 엄청나서 그 천분의 일을 기록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증언한다. 그 악이 너무도 커서, 만일 사람이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결코 지옥에서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온 천사들과 지옥에서 온 영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292, 293) 그러나 사람이 신성을 인정하고 신앙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께서는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지옥 영들에게 돌아서며, 그렇게 되면 그의 영은 자기와 동질의 악의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Such malice then manifests itself as exceeds all belief. There are thousands of evils that then burst forth from evil itself, among which are such as cannot be described in the words of any language. What they are has been granted me to know and also to perceive by much experience, since it has been granted me by the Lord to be in the spiritual world in respect to my spirit and at the same time in the natural world in respect to my body. This I can testify, that their malice is so great that it is hardly possible to describe even a thousandth part of it; and so great that if man were not protected by the Lord he could never be rescued from hell; for with every man there are spirits from hell as well as angels from heaven (see above, n. 292, 293); and yet the Lord cannot protect man unless he acknowledges the Divine and lives a life of faith and charity; for otherwise man turns himself away from the Lord and turns himself to infernal spirits, and thus his spirit becomes imbued with a malice like theirs.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그가 달라붙는 악에서, 그리고 지옥의 영들과 교류함으로써 스스로 끌어들인다고 할 수 있는 악에서 떼어내신다. 사람이 신성을 부인하면 양심의 내적 제재를 받지 못하는데, 사람이 양심의 내적 제재로 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외적 제재로 떼어내신다. 외적 제재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법에 대한 두려움과 이득, 명성, 평판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즐거움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악에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영적 선으로 인도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영적 선을 대하면 그 즉시 남을 꾀고 속이려고 선함과 정직함과 올바름을 가장함으로써 그 선을 술책과 교활함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교활함은 그의 영에 들어있는 악과 결탁하여 그 특성을 주입함으로써 악에 형태를 부여한다. Nevertheless, man is continually withdrawn by the Lord from the evils that he attaches and as it were attracts to himself by his affiliation with infernal spirits. If he is not withdrawn by the internal bonds of conscience, which he fails to receive if he denies a Divine, he is nevertheless withdrawn by external bonds, which are, as said above, fears in respect to the law and its penalties, and fears of the loss of gain and the deprivation of honor and reputation. In fact, such a man may be withdrawn from evils by means of the delights of his love and through fear of the loss or deprivation of those delights; but he cannot be led thereby into spiritual goods. For as soon as such a man is led into these he begins to give his thought to pretenses and devices by simulating or counterfeiting what is good, honest, and just, for the purpose of persuading and thus deceiving. Such cunning adjoins itself to the evil of his spirit and gives form to it, causing his evil to be of the same nature as itself.

 

전투의 때는 주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는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신 작품(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 합니다.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8)

 

사랑이 그의 모든 행위의 원리가 될 때까지, 이때 전투가 그치는데요,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이 일이 아주 순조롭게 되어 드디어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이 일어날 때가 바로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하시는 때입니다. 이때 주님은 그를 주님의 모양대로(as his likeness)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 거듭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릇, 천적인 사람은 내용입니다. 그릇보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듯 주님의 목표, 즉 거듭남의 최종목표는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적인 사람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요, 안식일입니다.

 

※ 천적인 사람은 가슴 신앙이며, 매사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의 동기가 주님 사랑인 상태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도하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 프란체스코 앞에 ‘(聖)자를 붙여 부르는 것은 단순히 관례를 따른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聖), 즉 ‘거룩하신 분(The Holy)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시며, 그래서 이 칭호는 오직 주님에게만 사용해야 하는 칭호입니다.

 

※ 은성출판사(http://eunsungpub.co.kr/)의 엄두섭 저, ‘성 프란치스코’를 꼭 읽어 보시기 바라며, 읽으신 분들도 거듭거듭 계속 읽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책을 읽는 우리를 깊은 신앙, 무거운 영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은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천국, 혹은 천적인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곳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본성 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악을 상대하실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 안에 와 있는 지옥의 영들을 상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는 주님과 악한 영들 간 싸움입니다.

 

※ 우리가 거듭남의 최종단계에서 이제는 의지로도 주님을 사랑하여 매사에 주님 편에 서면 악한 영들은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만 우리를 포기하고 떠납니다.

 

※ 우리 안에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게 되어 드디어 싸움이 끝나고 쉼이 찾아오는데, 이 쉼은 주님의 쉼입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이 싸워오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주님이 쉬시는 걸 표상한 것이며,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을 가리켜 ‘내 안식일’이라 하신 것입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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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AC.58

동일인, 곧 영적인 사람의 자연적 음식을 여기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의 자연적 속성을 ‘땅의 모든 짐승’(the wild animal of the earth)과 ‘하늘의 모든 새’(the fowl of the heavens)를 가지고 상징하고 있는데요, 그런 그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면, 그의 자연적, 영적 양식 둘 다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The natural meat of the same man is here described. His natural is signified by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by the “fowl of the heavens,” to which there are given for food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Both his natural and his spiritual food are thus described in David: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시104:14) Jehovah causeth the grass to grow for the beast, and herb for the service of man, that he may bring forth bread out of the earth, (Ps. 104:14)

 

여기서 ‘가축’(beast)이라는 말이 같은 시편 앞 구절들인 11, 12절에서 언급한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둘 다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where the term “beast” is used to express both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he fowl of the heavens which are mentioned in verses 11 and 12 of the same psalm.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시104:11-12)  

 

 

AC.59

여기 자연적인 사람의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reason why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only are here described as food for the natural man is this.

 

※ 자연적인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자연적인 속성, 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when man is being made spiritual, he is continually engaged in combat, on which account the church of the Lord is called “militant”; for before regeneration cupidities have the dominion, because the whole man is composed of mere cupidities and the falsities thence derived.

 

※ 그러므로 교회 안에 별별 사람이 다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아주 정상이며, 교인 하나하나, 성도 하나하나를 이런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모두 안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 거듭남이란 악과 거짓의 사람이 선과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태생적으로 지옥에 적합한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 사람은 의지와 이해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그리고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은 두 종류의 천국과 지옥에서 파송된 두 종류의 천사들과 악한 영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최소 두 명의 천사와 두 명의 악한 영들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이해로 매 순간 일평생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하여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이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During regeneration these cupidities and falsities cannot be instantaneously abolished, for this would be to destroy the whole man, such being the only life which he has acquired; and therefore evil spirits are suffered to continue with him for a long time, that they may excite his cupidities, and that these may thus be loosened, in innumerable ways, eve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an be inclined by the Lord to good, and the man be thus reformed.

 

※ 그래서 인생 막장,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거기서 회심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지요. 악한 영들이 아무리 끈질겨도 그들이 우리 주님의 한결같으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무슨 의로운 습관을 결심했다가도 반나절이 못되어 또 넘어지더라도, 그리고 똑같은 결심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더라도,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이제는 더 이상 못 믿겠다 하더라도 이런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을 믿고 다시 일어서며, 다시 결심, 다시 정진하는 태도, 자세가 필요합니다.

 

※ 주님은 우리와 달리 우리 안의 악을 한방에 어떻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조차 우리의 생명이심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놀라우심은 그 악조차 우리를 돌이키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 이 이야기는 저를 비롯,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방황하는 자녀를 둔 모든 부모가, 그러나 그 자녀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끝까지 갈 수 있는, 즉 이 아이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것, 즉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 오직 이런 것들만 선하고 진실한데요, 그것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주아주 극도로 증오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에 비교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달리 주님은 그에게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교되는 양식도 주시는데요, 이는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이며, 주님은 이 양식을 간격을 두고 사람에게 주십니다. In the time of combat, the evil spirits, who bear the utmost hatred against all that is good and true, that is, against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which things alone are good and true, because they have eternal life in them—leave the man nothing else for food but what is compared to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nevertheless the Lord gives him also a food which is compared to the herb bearing seed, and to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states of tranquillity and peace, with their joys and delights; and this food the Lord gives the man at intervals.

 

※ 여기서 우리는 악한 영들의 정체와 그들이 주는 달콤한 것의 그 숨은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결국은 보잘 것 없는 ‘채소와 푸른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곧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있어 우리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는, 그래서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 들게 하시는 분임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 즉 악한 영들이 주는 것은 짝퉁, 모조품, 가짜인 반면, 오직 주님이 주시는 것만이 진품, 정품, 진짜라는 것입니다.  

 

[2] 주님이 사람을 매 순간, 아니 정말 눈 깜빡할 순간이라도 막아주지 않으셨으면, 인간은 즉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영들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 및 신앙과 관련된 것들을 향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지독한 증오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지난 수년간, (저는 분명히 몸 안에 있었음에도) 저세상의 영들, 특히 아주 못된 영들과 본의 아니게 어울려 왔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저는 수천의 영들에 둘러싸이기도 했고, 그들은 저를 향해 독을 뱉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은 저를 향해 우글거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제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제가 주님의 보호 아래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해 경험으로, 저는 정말 영들의 세계와 그 본성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현재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영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왜 반드시 견뎌야만 하는지 하는, 영적 전투에 대하여 정말 철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주제,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도 전혀 의심 없이 믿기에는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도저히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이셨는데요, 그것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루겠습니다. Unless the Lord defended man every moment, yea, even the smallest part of every moment, he would instantly perish, in consequence of the indescribably intense and mortal hatred which prevails in the world of spirits against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e certainty of this fact I can affirm, having been now for some years (notwithstanding my remaining in the body) associated with spirits in the other life, even with the worst of them, and I have sometimes been surrounded by thousands, to whom it was permitted to spit forth their venom, and infest me by all possible methods, yet without their being able to hurt a single hair of my head, so secure was I under the Lord’s protection. From so many years’ experience I have been thoroughly instructed concerning the world of spirits and its nature, as well as concerning the combat which those being regenerated must needs endure, in order to attain the happiness of eternal life. But as no one can be so well instructed in such subjects by a general description as to believe them with an undoubting faith, the particulars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related in the following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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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AC.56

천적인 사람(天的, The celestial man)은 천적인 것들(celestial things)로만 기뻐합니다. 그것들이 그의 생명에 맞기 때문인데, 이르기를 천적인 양식(celestial food)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사람(靈的, The spiritual man)은 영적인 것들(spiritual things)로 기뻐합니다. 그 이유 역시 그것들이 그의 생명과 맞기 때문이며, 이번엔 영적인 양식(spiritual food)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사람(自然的, The natural man)은 자연적인 것들(natural things)로 기뻐합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맞기 때문인데, 이르기를 양식(food)이라고 하며, 주로 기억-지식들로 구성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 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 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

 

※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은 그 출처가 세상인 지식을 말하며, 학습을 통해서 습득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영적인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양식을 표상들(表象, representatives), 즉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열매 맺는 나무’는 보통은 ‘씨 가진 나무’(the tree yielding seed)라고도 하지요. 그의 자연적 양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 bearing seed,” and by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 yielding seed.” 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AC.57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는 쓰임새(use)와 관련된 모든 진리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는 신앙의 선인데, 여기서 ‘열매’(fruit)는 주께서 천적인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씨 가진 나무’(seed producing fruit)는 영적인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래서 ‘씨 가진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하시는 것입니다. 천적 양식을 나무의 열매라 하는 것은 다음 장을 보면 분명한데요, 다음 장에서는 천적인 사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스겔에서 하신 주님 말씀들만 인용합니다. The “herb bearing seed” is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 the “tree in which is fruit” is the good of faith; “fruit” is what the Lord gives to the celestial man, but “seed producing fruit” is what he gives to the spiritual man; and therefore it is said,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That celestial food is called fruit from a tree,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In confirmation of this we will here cite only these words of the Lord from Ezekiel: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겔47:12)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th up every tree of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2)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는 ‘성소’(the sanctuary)이신 주님의 생명과 자비를 의미합니다. ‘열매’(Fruit)는 그들의 양식이 될 지혜(wisdom)이며, ‘잎사귀’(the leaf)은 ‘약재료’(medicine)라는 이름으로 쓰임 받게 될 지성(intelligence)입니다. 한편, 영적 양식을 ‘풀’(herb)이라고 하는 건 시편을 보면 나옵니다. 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 signify the life and mercy of the Lord, who is the “sanctuary.” “Fruit” is wisdom, which shall be food for them; the “leaf” is intelligence, which shall be for their use, and this use is called “medicine.” But that spiritual food is called “herb,” appears from David: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1-2)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thou makest me to lie down in pastures of herb. (Ps. 23:1–2)

 

 

※ 다음은 ‘쓰임새(use)와 관련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402번 글입니다.

 

쓰임새 안에 천국의 모든 기쁨이 모이며, 거기에 다 있습니다. 쓰임새는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의 선인데 천사들이 바로 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천사는 그의 쓰임새 만큼, 그리고 쓰임새에 대한 애정 만큼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In uses all the delights of heaven are brought together and are present, because uses are the goods of love and charity in which angels are; therefore everyone has delights that are in accord with his uses, and in the degree of his affection for 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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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AC.55

태고인들(太古人, the most ancient people)은 이해와 의지, 또는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을 결혼이라고 했는데요, 그래서 이 결혼의 결과, 태어나는 모든 선을 ‘생육’(fruitfulness), 모든 진리를 ‘번성’(multiplications)이라고 하였습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 실제로 천국 역시 남녀의 결혼이 있지만 천국에서는 지상처럼 무슨 ‘아이를 낳는’ 그런 결혼이 아닌, 선과 진리가 생겨나는 전혀 다른 결혼입니다.

 

그래서 선지서들에서도 그렇게 부르는데요, 예를 들면, 에스겔입니다.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겔36:11-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후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먼저 진리에 속한, ‘수가 많고’(multiplication)가 언급되고, 그 다음에 선에 속한, ‘번성하게’(fruitfulness)가 언급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닌, 앞으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 의지와, 또는 신앙이 사랑과 연합할 때, 주님은 이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사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때 열리는 열매들이 진리에 속하였으면 ‘아들들’(sons)이라 하고, 선에 속하였으면 ‘딸들’(daughters)이라 합니다. 이런 표현은 말씀에 아주 자주 나옵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 그래서 저는 제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며느리와 손녀, 더 나아가 형제와 처가, 사돈 및 친구, 친지 등을 주님의 선과 진리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니 점점 핏줄에 대한 무슨 집착(?) 같은 것을 내려놓게 되면서, 이들을 주께 맡기기가 한결 쉬워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12:50)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이 점점 더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3] 진리와 선이 많아졌을 때, 땅은 ‘충만한’(replenished) 상태, 가득 채워진 상태가 됩니다. 주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실 때, 즉 사람을 돌보실 때는 선과 진리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A 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기 전에 갖고 있던 선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씨보다 작은 것’(the least of all seeds)입니다. 그 이유는, 그때는 그가 자기 스스로 그 선을 행하는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사람의 것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가 거듭남의 어떤 상태 가운데 있게 되면서 그의 안에 뭔가 선한 게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작습니다. 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결국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으로써 점점 자라 ‘풀’(herb)이 되더니, 마침내 결합이 완성되면서 ‘나무’(a tree)가 되어, ‘공중의 새들’(the birds of the heavens)이 ‘그 가지에 깃들게’(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됩니다. ‘공중의 새들’은 진리들이나 지적인 것들을, ‘그 가지에 깃들게’는 기억-지식들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영적일 때뿐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는 동안은 그는 일종의 전투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이르시기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하신 것입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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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절,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C.53

여기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자기 형상’(his image)은 신앙을,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은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전자인 신앙은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하는 반면, 후자인 사랑은 의지(the will)에 속하는데요,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뒤따라 나오는 거지만, 천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앞서 나가는 것입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의미하는 것, 그 속뜻(the internal sense)을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를 잃어버리면서, 이 비의(秘義, arcanum, 단수, 복수는 arcana) 역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그들 행복과 기쁨의 최고의 원천이었으며, 결혼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지각하고자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만 있으면 모두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 가령, 햇볕, 곧 해의 빛과 열의 융합을 결혼으로, 자녀들 및 모든 동식물의 자식 및 열매들을 결혼의 결과로, 사람을 영과 육의 결혼으로, 삼위일체를 결혼으로 등등, 가능한 모든 것을 다 ‘결혼’으로 보고 설명할 수 있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내적(內的, internal)이었기 때문에, 오직 내적인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육안으로는 그저 볼 뿐, 그러나 이게 뭘 표현하는 걸까 그 영적, 천적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 이는 참 부러운 특성입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말이지요. 지금 사람들은 너무나 외적(external)이요, 겉, 감각의 사람들이어서 영적, 천적인 주의 말씀들도 오로지 감각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가령, 신령한 사람은 방언도 유창하고 세련되게 해야 하며, 안수기도를 하면 바로 눈앞에서 병이 척척 낫고, 각종 장애도 바로 나아야 하며, 예언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 받기를 참 좋아하며, ‘’의 참 의미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무지하며, 내적(internal)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예 이해조차 못 하면서도 자기는 믿는 사람이요,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자기는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므로 죽으면 천당 간다고 믿는 그런 현실입니다.

 

외적인 것들은 그들에겐 그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내적인 것들로 돌리게 하는, 그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내적인 것들에서 천적인 것들로, 그렇게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자기들 결혼의 행복의 근원일 것이라고 지각한 천국의 결혼에까지 연결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하였고, 이 둘이 하나로 움직일 때, 그걸 결혼이라 하였습니다.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 즉, 태고교회는 어떤 사람의 말과 행실이 일치할 때, 그는 이해와 의지가 결혼한 상태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관습이 된 말들이 나왔는데요, 선에 관한 교회의 애정으로부터 교회 그 자체를 가리켜 ‘딸’(daughter), ‘처녀’(virgin), 이 경우, ‘시온의 처녀’(the 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the virgin of Jerusalem) 등으로 묘사했지요, 그리고 또한 ‘아내’(wife)라 하였습니다. 이들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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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절,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AC.49

주님은 태고 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한 사람(a man)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멤버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깊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나눌 때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이 ‘사람들’(me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중,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고 지각된(perceived) 것들에 한해서만 사용했습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 처음에 주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시는 걸 본 태고 교회 사람들은 이후 자신들을 향해 감히 ‘사람’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말한 이런 것들은 ‘사람에게 속한 것’(of man)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오직 주님에게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그래서 선지서들에 나오는 ‘사람’(man),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을, 속뜻(the internal sense)으로는 지혜와 지성을, 즉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가장 높은 뜻으로는 한 사람(the one man)이신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들에게 사람으로(as a man)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은 두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인자’(人子, the son of man), 즉 같은 말인데, 사람(the man)이라 하였습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또한 주님은 자주 자신을 가리켜 ‘인자’(the son of man), 즉, 사람이라 하시고, 다니엘에서처럼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구름을 타고’(The clouds of heaven)는 말씀(the Word)의 겉 글자의 뜻(the literal sense)인 반면, ‘능력과 큰 영광으로’(power and great glory)는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인데요, 말씀의 모든 것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능력과 영광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지요.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AC.50

태고교회는 ‘주님의 형상’(the image of the Lord)이라는 표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다는 것과 모든 사람한테는 영과 천사들이 최소한 둘씩 와 있다는 사실들을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 “image of the Lord” more than can be expressed. 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

 

※ 이렇게 둘씩 와 있는 이유는, 사람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즉 사람의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이 있고, 사람의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천사들하고는 천국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

 

※ 여기서 말하는 영들은 지옥에서 파견된 영들, 곧 악한 영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지옥에서 파견되어 천국도, 지옥도 아닌,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라는 곳(상태)에 있게 되는데, 이마저도 이들에겐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태여서 굉장히 기뻐하며, 다시는 자기들이 원래 있던 지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영들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사후 일단 머무르게 되는 곳(상태)입니다. 다음 말씀은 이런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떠오른 본문입니다.

 

30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눅8:30-31)

 

영들을 통한 영들의 세계와의 커뮤니케이션 없이는, 그리고 천사들을 통한 천국과, 그리고 천국을 통한 주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없이는 사람은 전혀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전적으로 이러한 결합에 달려 있으며, 그래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떠나가 버리면 사람은 즉시 소멸될 것입니다. 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 우리가 잠시라도 생존할 수 있으려면 이런 악한 영들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참으로 우리는 태생적으로 악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이 우리의 태생적 생명이니 말입니다...

 

[2] 아직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시작한 사람과는 사뭇 다른 다스림을 받습니다.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한테는 그와 함께하는 악한 영들이 매사 천사들보다 더 우위를 점하는 반면, 천사들은 그가 가장 저급한 악 안으로 거꾸러져 들어가는 대신 어떤 선 쪽으로 구부러지도록 그를 그저 겨우 가이드만 어떻게 해볼 수 있을 뿐이며, 그마저도 사실, 그 사람의 탐욕을 가지고 선으로, 거짓된 감각을 가지고 진리로 구부리는 정도입니다. 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 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 예를 들면, 자살하려고 최종 결심, 이제 막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난다든지, 또는, 탐욕의 끝에 가서 갑자기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추하게 느껴진다든지, 그리고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던 중 어느 순간, 그런 감각의 충족이 가져다주는 모든 쾌락이 헛것이요,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뭐 이런 경우들을 예로 들 수 있겠으며, 누가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의 재산 중 제 몫을 먼저 달라 하여 그걸 가지고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하다가 굶어 죽게 되자 정신을 차리게 된 둘째 아들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기하고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지만, 천국하고는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그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이 경우, 천사들은 그들의 다스림을 외면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 천사가 뭘 하고 싶어도 사람이 마음을 먹어야만 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힌 나머지, 오직 악하고 거짓된 것만 마음먹기 때문에, 도무지 천사들이 무엇을 할 여지가, 그 결과, 도저히 천국하고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애정이 악한 것을 좋아하여 악한 영들과 호흡이 맞는 한, 천사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설령 내가 뭘 잘못해도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착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그가 거듭남 가운데 있게 되면, 그는 모든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천사들의 다스림(rule)과 격려를 받지만,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며끔찍하게 여기게 됩니다. 겉으로는 천사들이 다스리는(lead)것 같지만, 그들은 단지 사역자들일 뿐입니다.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는(governs)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먼저 복수(the plural number)로 이르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하는 것이며, 그러나 여전히 주님 홀로 다스리시며 다 하시기 때문에, 다음 구절에서는 단수(the singular number)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하시는 것입니다. 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 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이 또한 주님이 이사야에서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천사들은 더더욱 스스로 이렇게들 고백합니다. ‘저희에게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오직 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입니다.’ 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는, 본문에 나오는 ‘우리’라는 표현을 저는 그동안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삼위 하나님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세 하나님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인간 창조에 관한 의논을 하시는 줄 알았지요. ^^

 

 

AC.51

‘형상’(the image)관련해서는, 형상은 모양이 아니고, 모양처럼 생긴 것(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이며,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하신 것입니다. 영적(靈的, spiritual)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은 모양, 즉 닮음, 유사함(similitude)입니다. As regards the “image,” 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The spiritual man is an “image,” and the celestial man a “likeness,” or similitude.

 

※ 형상, 이미지를 그릇으로 보면, 모양, 닮음은 그 그릇에 담긴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 겉모습만 보면 얼핏 주님의 이미지이지만, 실제 그의 행실, 성품, 인성 등 그 속에 담긴 내용을 가지고 주님을 닮았다, 안 닮았다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은 영적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영적 인간은, 일종의 ‘형상’(an image)인데요, 주님은 그를 가리켜 ‘빛의 아들’(a 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 The spiritual man, who is an “image,” is called by the Lord a “son of light,” as in John: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12:35-36)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 (John 12:35–36)

 

그를 일컬어 ‘친구’(a friend)라고도 하시지요. He is called also a “friend”: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4-15) 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 (John 15:14–15)

 

그러나 천적 인간은, 이 사람이 ‘모양’(a likeness)인데요, 주님은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a son of God)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But the celestial man, who is a “likeness,” is called a “son of God,” in John: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주4)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1:12-13)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John 1:12–13)

 

 

AC.52

사람이 영적인 한, 그의 전반적인 경향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말씀에,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하신 것입니다. 반면, 그가 천적인 사람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때는 그의 전반적인 경향은 반대로 속 사람에게서 겉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래서 여기 먼저 ‘들짐승’(beasts)이, 그리고 차례대로 ‘새’(fowl), ‘바다의 물고기’(the fish of the sea)가 언급되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출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의지(the will)에 속한 사랑, 즉 무엇을 의도할 때,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 인간하고는 다른 점이, 영적 인간은 먼저 ‘물고기’(fishes)와 ‘새’(fowl)가 나오고, 나중에 ‘들짐승’(beasts)이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이 물고기와 새는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하며, 이 이해는 곧 신앙에 속합니다. Here therefore “beasts” are first mentioned, and then “fowl,” and afterwards the “fish of the sea,” 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 “fishes” and “fowl” 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 “beasts.

 

※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그 성향과 속성 등 근본적인 것이 정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의지에서 출발, 이해로 나아간다면, 영적 인간은 반대로 이해에서 출발, 의지로 나아갑니다. 천적 인간은 가슴이 먼저 움직인다면, 영적 인간은 머리가 먼저 움직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의 사람인 반면, 영적 인간은 진리의 사람입니다. 참 다릅니다. 그래서 천국도 두 나라, 천적 나라, 영적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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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5절,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C.44

사람은 땅처럼 자기 안에 먼저 신앙 관련 지식이 심기지 않고서는 어떤 선도 생산, 즉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그걸 가지고 뭘 믿어야 할지, 뭘 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understanding)의,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will)의 일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행하지는 않는 것은 마치 우리는 믿음대로 살지는 않지만 믿고는 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들음과 행함을 분리, 결국 일종의 나뉜 마음을 갖게 되며,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주님이 ‘어리석다’(foolish)하신 사람들처럼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는 앞서 보여드린 대로 이해에 속한 것들을, 여기 ‘땅은 생물을 내되’(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가축과 기는 것’(the beast and creeping thing),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말합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nd also by 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also by the “wild animal of that earth.

 

 

AC.45

태고 시대(太古, the most ancient times)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관련된 것들을 이런 식으로 의미했는데요, 이런 이유로,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에서도 늘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걸 표현하고 있습니다. 짐승은 두 종류가 있는데, 사람들을 해치는 짐승은 악하다 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 짐승은 선하다 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악들은 악한 짐승들, 가령, 곰, 늑대, 개 등으로 표현하는 반면,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같은 본성을 가진 짐승들, 가령, 어린 암소, 양, 어린 양 등으로 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짐승들’(beasts)은 선하고 온순한 것들이며, 그래서 애정들(affections)을 의미하는데요, 이 본문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더 낮은 것들, 즉 몸(body)과 더 연결된 것들은 ‘땅의 짐승들’(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 하는데, 이는 탐욕들과 쾌락들을 말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 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 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 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 animals of that 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AC.46

‘짐승들’(beasts)이 사람의 애정들, 곧 악을 수반하는 악한 애정들과 선을 수반하는 선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수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먼저 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36:9, 11 거듭남을 다루면서)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요엘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시편 In David also: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 거듭남을 다루면서 In Jeremiah, treating of regeneration: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7-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2] ‘땅의 짐승들’(Wild animals)도 유사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Wild animals” have a similar signification, as in Hosea: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 In Job: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욥5:22-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 In Ezekiel: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겔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 In Isaiah: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에스겔 In Ezekiel: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겔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것은 앗수르(the Assyrian)에 관한 말씀인데요,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의미하며, 영적 인간은 에덴동산으로 비유됩니다. This is said of the Assyrian, by whom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and who is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시편입니다. In David: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시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여기서도 같은 것들이 언급되는데요, 바로 ‘용들’(whales), ‘과수’(the fruit tree), ‘짐승’(wild animal), ‘모든 가축’(the beasts),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입니다. 이것들이 사람 안에 있는 살아있는 원리들(living principles)을 가리킨 게 아니라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도록 호명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 tree,” “wild animal,” the “beast,” “creeping 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서들은 ‘가축’(beasts)과 ‘땅의 짐승들’(wild animals of the earth), 그리고 ‘가축’(beasts)과 ‘들의 짐승들’(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분하는데요, 그러면서 사람에게 있는 선들을 ‘가축’(beasts)이라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과 계시록을 보면, 천국에서 주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을 ‘생물들’(animals)이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earth,” and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field.” 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주3)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3) (Rev. 7:11)

 

※ Critical Notes

 

3. 여기 이 단어는 ‘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 아닌,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처럼 ‘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 ‘준’(ζοόν, z¯oon)과, 라틴과 영어의 ‘애니멀’은 서로 정확히 대응하며, ‘생물’(a living creature)이라는 의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원전(the original) 해당 구절들에서 사용된 단어는 준이며, 만일 ‘비스트’ 사용을 의도했다면 썼을 법한 테르(θήρ, th¯er)나 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 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 living 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또한 복음을 듣게 될 사람들을 가리켜 ‘만민’(creatures)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창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AC.47

이들 말씀에 거듭남에 관한 비의(秘義, arcana)가 들어 있다는 것은 또한 앞 구절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앞 구절인 24절에서는, 땅은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순으로 내라 하시는 반면, 다음 구절인 25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지요, 즉 하나님이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만드시고, 마찬가지로 ‘가축’(the beast)도 만드셨다고 말이지요. 바로 이 순서에 비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먼저, 그리고 나중에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 될 때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자기 힘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사람의 거듭남은 이렇게 먼저 사람의 겉(the external)에서부터 시작, 차근차근 속(the internal)으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또 다른 순서가 등장하는 것이며, 겉의 일들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AC.48

그래서 이때 이 사람을 가리켜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가운데 있다 하는데요, 이때 이 사람은 말을 할 때, 신앙과 관련된, 이해에 속한 어떤 원리로(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 진리 안에, 선 안에 있음을 스스로 확신합니다. 이때 이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 ‘움직이는’(animate) 것이며, 이를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the fishes of the sea), ‘하늘의 새’(the fowl of the heavens)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진리를 말하며선을 행할 때, 그는 여섯 번째 상태 가운데 있으며, 이때 그로 말미암는 것들을 가리켜 ‘생물’(the living soul), ‘가축’(the beast)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가 신앙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기를 시작할 때, 그는 영적 인간이 되며,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데, 이것이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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