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속뜻,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이 비로소 속 사람, 겉 사람의 존재와, 주님의 것이 속 사람을 통해서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의 기억 안에는 주님으로 말미암은 지식이 쌓여 분류되며, 이 밀려들어오는 지식은 자연적이든, 영적, 천적이든 그의 기억-지식 가운데 머무르다가 주님에 의해 나중에 꺼내어져 쓰임을 받게 됩니다. ‘한 곳으로 모이는 천하의 물’인 ‘바다’가 바로 이 지식이며, ‘뭍’은 ‘땅’, 곧 겉 사람 자신을 말합니다.

 

AC.27

두 가지,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으로 흘러들어온 다음 이번엔 속 사람으로부터, 즉 속 사람을 통해서 겉 사람으로 흐른다는 사실, 비록 겉보기에는 그리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면, 저들 진리와 선, 곧 거듭나고 있는 사람 안에 있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이 그의 기억 안에 쌓이며, 그 지식들(knowledges [scientifica])사이로 분류됩니다. 겉 사람의 기억 속으로 밀어 넣어지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게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아니면 천적이든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이라는 것으로 그곳에 머물며, 그 후 주님에 의해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 지식이 ‘한 곳으로 모인 물’(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부르기를 ‘바다’(seas)라고 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 자체는 ‘뭍’(the dry [land])이라 하며, 지금은 이어지는 10절에서처럼 ‘땅’(earth)이라고 합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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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속뜻,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의 것, 곧 선과 진리가 들어 있어 ‘궁창’이라, ‘하늘’이라 합니다. 저녁은 불신앙, 아침은 신앙, 저녁은 사람의 것, 아침은 주님의 것, 저녁은 주님의 떠나심, 아침은 주님의 오심입니다. ‘날’은 때 혹은 상태를 말하며, 사람의 거듭남 과정 중 이 속 사람, 겉 사람 구별 단계를 두 번째 상태라 합니다.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및 ‘날’(day)의 의미는 위 5절에 있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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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2)(DLW.27, 2023/6/9)

 

 

하나님에 관한 두 번째 주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AC.27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신(神, the Divine, 하나님, 주님)은 나눌 수 없다(the Divine is not divisible)는 걸 모르겠습니까? 또 무한자(無限者)도, 창조되지 않은 자도, 전능자도, 혹은 신이라는 것도 다 복수로 존재하는 건 불가능하다(a plurality of infinites, of uncreates, of omnipotents, and of gods, is impossible)는 것도 말이지요. 어떤 제정신이 아닌 사람(one destitute of reason)이 선언하기를, ‘다 가능하다. 복수의 무한자도, 창조되지 않은 자도, 전능자도, 그리고 신이라는 것들도 다 복수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신 나간 주장을 하면서, 그리고 계속해서 ‘만일 그들이 하나의 동일 본질(one identical essence)을 가진다면, 그러면 이것이 그들을 하나의 무한자, 창조되지 않은 자, 전능자, 그리고 하나님이 되게 할 수 있다’ 주장한다면, (사실 이 주장은 좀 뒤죽박죽,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인데요) 이 하나의 동일 본질이 사실은 하나의 아이덴티티가 아니었던 거 아닐까요? 하나의 아이덴티티(identity, 正體, 신원)라는 건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여러 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존재가 다른 것에서 나왔다고 해야 한다면, 다른 것에서 나온 존재는 그 자체로 이미 신이, 하나님(God)이 아닙니다. 이런 여러 주장, 논란, 입장에도 불구, 불변의 진리는 ‘하나님은 그 자체로 만물이 말미암는, 만물의 근원 되시는 분이시다’(the God from whom all things are)라는 사실입니다. (DLW.27) Who that has sound reason can help seeing that the Divine is not divisible? Also that a plurality of infinites, of uncreates, of omnipotents, and of gods, is impossible? Suppose one destitute of reason were to declare that a plurality of infinites, of uncreates, of omnipotents, and of gods is possible, if only they have one identical essence, and this would make of them one infinite, uncreate, omnipotent, and God, would not the one identical essence be one identity? And one identity is not possible to several. If it should be said that one is from the other, the one who is from the other is not God in himself; nevertheless, God in himself is the God from whom all things are (see above, n. 16). (DLW.27)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일곱 번째 주제, ‘만물이 말미암는 한 분의 신-인이 계신다(There is one God-man, from whom all things com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27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오늘 위 메인 본문은 사실 매우 신학적, 철학적 논거여서 대부분, 읽어도 선뜻 눈에 들어오지들 않으실 겁니다. 저 자신, 사실 저는 이런 걸 매우 안 좋아합니다. 제가 신대원 시절,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 조직신학이었거든요. 날마다 무슨 ‘(性), 성, 성’, ‘(論), 론, 론’, ‘(的), 적, 적’ 하는 게 저는 정말 와닿질 않았고, 매우 매우 불편했는데요, 칼빈에 대해서 처음엔 호의적이었던 입장도 그의 대표적인 저작, ‘기독교 강요’(1536)를 읽고는 그냥 질려버렸지요. 당시 시대적 특성을 따라 스콜라식 저술 형태로 충만한 이 책을 읽고는 저는 그만 질식하는 줄 알았고... 나중에 영계에서 그를 여러 번 만나 대화했던 스베덴보리의 기록을 접하고는 완전... 네, 뭐, 하여튼 저는 이쪽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도 무슨 교리적 전반적 이해는 또 꼭 필요해서 날마다 꾸욱 꾹 마치 무슨 달팽이 기어가듯 그렇게 번역, 풀고 있습니다. 그냥 휙 읽는 것과, 이렇게 풀이식 번역으로 정리, 정돈하는 건 또 완전 차원이 다른 작업이군요!

 

※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난 여러 사람 중 캘빈에 관한 기록입니다.

 

캘빈이 처음 영계에 들어왔을 때는 그가 태어났던 세상에 그대로 사는 줄로 생각했었다. 그는 처음 그에게 다가온 천사들로부터 그가 죽어서 영들의 세계에 와 있다고 들었지만, 그는 말하기를 나는 동일한 몸을 가지고 있고, 손도 동일하고, 또 감각도 전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즉 그가 지상에서는 실체적인 몸이 물질적인 몸을 입고 있었으나 이제 그 물질적인 몸은 벗고, 대신 실체적인 몸이 남아 있어서 이 실체적인 몸에 의해 사람의 생명이 이어진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을 그는 처음에는 이해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에는 예전 이념으로 되돌아가서 그는 아직도 그 자신이 태어났던 세상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까닭은 그는 관능적 사람이었으므로 신체적 감각의 대상에 의해서 배운 것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성언(聖言)에 의해서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총명에 의해서 그의 믿음의 모든 독단적 교리들을 취했던 이유이다. 그는 사람들의 합의를 얻기 위해서만 성언에서부터 인용을 했던 것이다.

 

이 초기 후에 그는 천사들을 떠나서 옛날 예정론을 믿은 자들을 찾아서 배회했다. 그는 그런 사람들이 어느 멀리 떨어진 지하 동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으나 그 지하 동굴에는 뒷길을 통해서 들어가는 문 이외에는 다른 입구가 없어 그들과 조우할 수 없었다. 그 동굴로 들어가지 못한 캘빈은 이번에는 그 동굴에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서 나와 아직도 자유로운 방황을 허용받고 있던 고트샬크의 제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영적인 언어로 피리스라고 칭해지는 곳에서 때때로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캘빈은 그들과 함께 거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 뒤 그들의 모임 장소에 인도되어졌다. 그가 그들 중에 왔을 때 그는 환희에 차서 그들의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트샬크의 종들이 동굴 안의 그들의 형제들에게 다시 보내지자 그 후 캘빈은 자신의 그런 삶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는 단순한 마음의 종교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어떤 사회에로 피난처를 구해 갔다. 그러나 그들이 예정론에 대해서 아는 바 없고, 또 도무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사회 변두리로 나가서 종교적인 주제에 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섭리된 것은 그가 예정론에 관한 오류를 시정할 수 있게 하기 위함과 아울러 도르트 종교회의 이후 그 혐오스러운 이단 사설에 스스로를 고착시켜 온 높은 지위의 사람들의 수가 차게 하기 위함에서였다. 이런 자들이 서서히 그 지하 동굴 안에 모여들었다.

 

마침내 현대 예정론자들 사이에서 캘빈은 어디 있는가? 하는 아우성 소리가 일어났다. 그들은 캘빈이 사회 변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캘빈은 스스로 예정론에 감염된 어떤 장관 앞에 인도되었고, 그 장관은 그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 주님에 의한 새 천계가 형성될 때까지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의 보호자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쫓겨났을 때, 캘빈은 자신에 대한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한 집으로 가서 한동안 거기 머물렀다. 그러던 중 그가 여기저기를 배회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까지 와서 나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에 주님의 말씀,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에 의거하여 주님만을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는(이 역시 지적 시인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들로 구성되고 있는 새 천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주님과 아버지를 한 분으로 믿고 또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심을 믿으며, 주님을 보고 안 사람은 아버지를 보고 또 알며, 이와 같이 교회와 천계에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처음에는 통상적인 침묵을 유지했으나 약 반 시간 후에 갑자기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사람이요. 요셉과 혼인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으로 예배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대답하기를 우리 속량주와 구주되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십니다. 이 말에 그는 응대하기를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성은 주님에게 속해 있지 않고, 성부에게만 속합니다. 내가 반문하기를 그렇다면 인성의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캘빈이 말하기를 천계의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이것은 성부 앞에서 가진 겸비와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한 고난에서 증명됩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 그의 기억에 저장되었던 미망들로 그리스도 예배를 논박하기 시작했다. 그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예배는 우상숭배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리스도 예배를 모독하려 했으므로 나와 함께 있던 천사들이 그의 입술을 닫아버렸다.

 

그를 회심시키고자 하는 내 열정 때문에 나는 주 우리 구주께서 단지 하나님과 사람이실 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이시고, 사람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을 바울의 말, 즉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로 증거하였고, 나아가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 선언되고 있는 바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이들은 한 인격 안에 있기를 사람 안에 영혼과 몸처럼 계신다는 것으로 증명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대꾸했다. 그 모든 성언의 인용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요. 성언의 인용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돌아가는 풍차와 같아서 이단들도 모두 성언의 인용으로 지탱되고 있소. 예정론만이 모든 다른 교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정론은 회중들의 장막과 같고 득의와 구원을 산출하는 믿음이 그 성소요 안치소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사람은 영적인 것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없고, 구원은 자유로운 은사요. 예정론에 대한 반론은 내 귀에는 배에서 올라오는 트림 소리 같고, 설사를 일으킨 것 같이 들리오. 예정론 이외의 교리로 가르쳐지는 교회의 회중들은 양과 이리들의 혼합과 같아서 이리들이 율법으로 제재되어서 양들을 공격할 수 없게 해야 마땅하오. 나는 양들을 예정된 자들이라 믿고 있소. 그리고 그런 교회의 설교를 아무리 웅변적으로 해도 딸꾹질 이상으로 여기지 않소. 그러나 내게 내 자신의 믿음을 서술하게 해주시오. 즉 하나님 한 분이 계시며, 그분은 전능하시다.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선택되고 예정된 자가 아니고는 누구에게도 구원은 없다. 그 모든 다른 자들은 자기들의 운명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격분해서 말했다. 가버려라. 이 악한 영아! 너는 주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다. 네 믿음은 어떤 자는 천계로 예정되고, 어떤 자는 지옥으로 예정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이 폭군이며, 자기가 좋아하는 자들만을 자기 도성에 들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고문하는 집에 넘겨준다고 믿고 있구나. 부끄러움을 알아라. 그리고 나서 캘빈의 일치신조에서 다음과 같은 발췌를 읽어주어 이것이 그의 정확한 교리를 서술한 것인지를 확인하였다. 일치신조에,

 

만일 심중의 신뢰와 믿음이 주님의 신성에 의지해서뿐 아니라 주님의 인간 성정에 의거해서 그리스도에게 두어진다면, 또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이 두 가지 모두에게 향해진다면 그것은 저주받아야 할 우상숭배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지 않으시고, 오로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대다수의 사람을 영벌에 처하도록 창조하셨으며, 그들이 회심하여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큰 죄를 범하고 각종의 범행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선택된 자들과 이미 중생한 자들은 믿음과 성령을 상실하지 않으나 선택되지 않은 자들은 필연적으로 정죄되어 첫 번 세례를 받고, 날마다 성찬에 참여하며 그들의 능력껏 거룩하고 비난받을 일이 없게 산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라이프찌히판, 1756년, 837. 838쪽)

 

이 발췌를 읽고 나자 그는 그것이 그의 교리를 대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낱말들 자체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주님의 사자들은 모두 그를 떠났고, 그는 급히 가증스러운 예정론으로 자신들을 다진 자들의 동굴로 향하였다. 나는 후에 이들 중 몇과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하여 노동을 강요당하고, 또 서로가 미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서로 상해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그들의 생활의 환희였다.

 

※ 주) 스베덴보리가 전하여주는 루터와 캘빈에 대한 영계에서의 이러한 모습들은 아직 그들의 주도적인 애정의 빛깔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로 그때까지 그들의 내면은 세상적인 요소들의 잔재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사람들은 죽은 후 대개 이런 영적 상태를 거치며, 점차 겉 사람에 형성된 외적인 요소들을 지우고, 그들의 주도적인 애정으로 돌아가서 마침내 그들의 주도적인 내적 상태과 일치하는 외부의 주변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천국과 지옥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 스베덴보리가 만난 그들의 상태는 아직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기 전의 상태인 것이다.

 

 

2. 오늘 저 메인 본문은 어려운 표현들, 일상 중엔 잘 안 쓰는 용어들 때문에 좀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절대 여럿으로 존재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걸 저렇게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고 있지요... 스베덴보리는 일종의 논문 형식으로 저술 중이기 때문인데요, 스베덴보리가 그의 모든 저술을 라틴어로 기록한 그 첫 번째 이유는, 스베덴보리는 그 첫 번째 독자층을 당대의 학자들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그 두 번째 이유는, 라틴어는 이미 사어(死語)라 더 이상 시대 변화에 따른 언어적 변화가 없어 그 원어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것도 있습니다.

 

 

3. ‘하나님에 관한 생각, 즉 신관(神觀)’을 올바로 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모든 것의 기초라는 생각을 붙들고 함께 이 씨름을 해나가시기를 권합니다. 반드시 천국 입성을 향한 굳건한 반석이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3-06-09(D6)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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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속뜻, 속 사람, 겉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주님은 먼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신 후, 속 사람 안에 주님의 것, 곧 선과 진리를 두십니다. 겉 사람 안에는 사람의 것이 있습니다. 거듭남이 시작되면서 사람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조차 사실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그러는 줄 압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시며, 주님의 섭리로 사람의 이 모든 오류와 탐욕을 주님 쪽으로 구부리십니다. 강제로 바로잡으시거나 끄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AC.24

하나님의 영, 즉 주님의 자비로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이 낮(day, 날)안에 생긴 다음, 처음으로 빛이 비취는데요, 이 빛은 곧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선 그 자체, 진리 그 자체이신 분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 후, 주님은 속 사람(the internal man)과 겉 사람(the external)간 일종의 어떤 구분, 구별을 두시는데, 이는 결과적으로는 속 사람에게 있는 지식(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있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주2)간 구별이 됩니다. ‘궁창’(expanse)은 속 사람을 말하며,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은 속 사람에게 있는 지식을,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은 겉 사람에게 있는 기억-지식을 각각 말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이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 하물며 속 사람이라는 것의 본성(nature)및 퀄러티(quality)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릅니다. 그는 속 사람, 겉 사람이라는 것은 서로 구별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 하기도 합니다. 그 자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그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들까지도 그동안 가라앉게 했기 때문이며, 심지어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것들까지도 무슨 혼란스럽고 흐릿한 덩어리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먼저 이르시기를,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이어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신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처럼,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먼저 말씀하신 게 아니고 말입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7-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 1:7–8)

 

[3]이런 이유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이 그 다음 관찰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즉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선과 진리라는 것, 오직 주님께만 속한 선과 진리라는 것이 이 속 사람이라는 것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겉 사람은 거듭나고 있을 때, 선을 행해도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해도 자기가 하는 줄로 아는 그런 본성 가운데 여전히 있지만, 사실은 주님에게 속한 이 선과 진리에 의해 인도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궁창 아래의 물이라는 일종의 구별이 먼저 언급되고, 나중에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천국에 관한 일종의 아르카눔(arcanum, 秘義, 감추어진 비밀, 신비, 복수는 아르카나 arcana)인데요, 인간은 자기 본성에 속한 것들에 의해, 그리고 감각에 속한 거짓과 뿐만 아니라 온갖 탐욕에 의해 살아가지만,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진리와 선 쪽으로 인도되며 구부려진다는 사실, 그래서 거듭남과 관련된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일반적으로든 아니든,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데, 그런 식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 궁창, 즉 속 사람을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이지요.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AC.25

‘땅을 펼치며 하늘을 펴는’(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서에서 흔히 말하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이사야입니다.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그리고 다시, 주의 오심(the advent of the Lord)을 드러내어 말하는 데를 보면,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멈추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구부리십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내용이 같은 구절들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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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속뜻,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저녁’ 상태가 되었다가 다시 ‘아침’ 상태가 되었다가 합니다. 저녁은 불신앙, 아침은 신앙, 저녁은 사람의 본성, 아침은 주님, 저녁은 주님의 떠나심, 아침은 주님의 오심입니다.

 

AC.22

‘저녁’(evening)이 의미하는 바와 ‘아침’(morning)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 알 수 있는데요,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preceding state)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 상태, 즉 거짓의 상태, 불신앙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뒤따르는 상태(subsequent state)입니다. 한 종류 빛이나 진리, 그리고 신앙 지식이 되는 상태이지요. ‘저녁’은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man’s own)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는 반면, ‘아침’은 아래 시편 말씀처럼, 무엇이든지 다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저녁’은 불신앙(no faith)의 때요, ‘아침’은 신앙의 때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심은 ‘아침’, 주님의 떠나심, 그때는 불신앙의 때이므로, ‘저녁’이라 합니다. 다니엘입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단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같은 식으로, 말씀에서 ‘아침’은 모든 주님의 오심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새 창조에 관한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AC.23

말씀에서 ‘날’(day)을 가지고 때(time)를 가리키곤 하는 것만큼 더 흔한 것은 없는데요, 이사야입니다.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날’을 가지고 때를 가리키곤 하기 때문에, 이는 또 그때 상태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곤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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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1)(DLW.23, 2023/6/8)

 

 

오늘부터는 하나님에 관한 두 번째 주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첫 번째 시간입니다.

 

AC.23

인간 지혜의 모든 것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신관(神觀)으로 연합하는데요, 그 모습은 마치 이것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이와 달리는 생각하지도, 그리고 할 수도 없는데요, 이것은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한테서나 다 볼 수 있는 본성이지요. 만일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에게 우주의 창조주가 두 분이라고 말하면, 당신은 그가 품는 반감을 느끼시게 될 텐데요, 이건 아마도 그의 귀에 들리는 말만으로부터, 그리고 인간 이성의 모든 것이 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신관으로 연합, 이 신관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째는, 이성적, 합리적으로(rationally)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볼 때,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반적인 본성상, 인간의 이성은 바로 이 능력에 의존하는데요, 이 본성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걸 직접, 그러니까 마치 스스로 보는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능력에 의해 사람은 천국의 빛 안에 있거나 그가 가진 대부분의 생각들을 거기서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진리는 천국 빛으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진리인데요, 그렇지 않은 때는 그 능력으로 인간 이해의 낮은 부분들(the lower parts of his understanding)이 왜곡되었을 때입니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는 그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그 낮은 부분들에 가해진 왜곡으로 인해 그걸 반대로 돌리고, 결국 그로 인해 그의 이성은 불건전해지지요. (DLW.23) All things of human wisdom unite, and as it were center in this, that there is one God, the creator of the universe; consequently a man who has reason, from the general nature of his understanding, does not and cannot think otherwise. Say to any man of sound reason that there are two creators of the universe, and you will be sensible of his repugnance, and this, perhaps, from the mere sound of the phrase in his ear; from which it appears that all things of human reason unite and center in this, that God is one. There are two reasons for this. First, the very capacity to think rationally, viewed in itself, is not man’s, but is God’s in man; upon this capacity human reason in its general nature depends, and this general nature of reason causes man to see as from himself that God is one. Secondly, by means of that capacity man either is in the light of heaven, or he derives the generals of his thought therefrom; and it is a universal of the light of heaven that God is one. It is otherwise when man by that capacity has perverted the lower parts of his understanding; such a man indeed is endowed with that capacity, but by the twist given to these lower parts, he turns it contrariwise, and thereby his reason becomes unsound. (DLW.23)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일곱 번째 주제, ‘만물이 말미암는 한 분의 신-인이 계신다(There is one God-man, from whom all things com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23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하는 능력’으로 좀 풀어 번역한 이 ‘이해(understanding)는 ‘의지(will)와 함께 사람을 구성하는 두 키워드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이 둘이 있어서입니다. 이 둘은 주님의 신성과 상응하는데요, 즉 주님의 신성 중 선은 사람의 의지와, 그리고 진리는 사람의 이해, 즉 이해하는 능력과 상응합니다. 참고로, 주님은 사람의 의지 속으로는 직접 들어가시지만, 사람의 이해, 생각 속으로는 의지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시는데요(HH.26), 저는 이걸 ‘가슴 신앙’, ‘머리 신앙’이라고 종종 번역합니다. 대략적으로는, ‘사랑(love, charity), ‘(good), ‘의지(will), ‘애정(affection), ‘’, ‘’, ‘’, ‘천적(celestial, heavenly) 등이 한 흐름이고요, ‘신앙(faith), ‘진리(truth),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이성(reason, rational), ‘’, ‘포도주’, ‘’, ‘영적(spiritual) 등이 또 다른 흐름입니다.

 

참고로, ‘하나 됨’, ‘한 몸’이라는 것은, ‘의지’는 ‘이해’의 의견을 사랑으로 받들고, ‘이해’는 ‘의지’가 원하는 것을 사랑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2. ‘인간 이해의 낮은 부분들(the lower parts of his understanding)

 

창세기 6장 16절 말씀,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에 보면, ‘상 중 하 삼층으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아래, 이 구절 전체의 속뜻을 보면서 위 표현을 짐작해 봅니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는 지적 부분(the intellectual part)을, ‘그 문은 옆으로 내고’는 청각(hearing)을,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는 지식(knowledge, scientifica), 이성(reason, rationalia), 그리고 이해(understanding, intellectualia)에 관한 것을 각각 의미합니다. (AC.651)

 

창6:9-22은 거듭나기 전 ‘노아’라는 교회의 상태에 관한 내용인데요, 특별히 16절은 그 교회가 가진 이해에 관련된 내용으로서, 갑작스런 이런 내용에 좀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해에는 세 가지 전혀 다른 부분들이 있다는 정도로만 우선은 알려드리며, 그러므로 ‘인간 이해의 낮은 부분들’인 ‘지식’, 특히 세상의 학습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주님의 계시보다 우선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왜곡’의 시작이요, 근원임을 직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질서, 순서는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출발, 사람의 겉 사람에 도착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반대의 길을 추구한 케이스들이 모두 ‘가인의 삶’, ‘각 교회 시대의 종말’ 및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3. 다음은 이런 내용들에 대하여 천사들은 모든 걸 이해하는 반면, 우리는 왜 이토록 어둡고 어려운가 하는 말씀을 좀 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마칠까 하는데요, 아래는 천국 천사들이 왜 그토록 지혜로운가 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0장, ‘천국 천사들의 지혜(The Wisdom of the Angels of Heaven) 267번 글입니다.

 

천사들이 그런 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내면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다른 모든 완벽성과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갈수록 증가하므로, 내면이 열리는 정도만큼 지혜가 늘어나는 것이다. 모든 천사에게는 생명의 세 단계가 있고, 이것은 세 천국에 상응한다. 내면의 첫 단계가 열린 이들은 일층천, 즉 가장 외적인 천국에 있다. 내면의 둘째 단계가 열린 이들은 이층천인 중간 천국에, 내면의 셋째 단계가 열린 이들은 삼층천인 가장 내적 천국에 있다. 천국 천사들의 지혜는 이들 단계에 적합한 것이다. 따라서 가장 내적 천국 천사들의 지혜는 중간 천국 천사들의 지혜를 측량할 수 없이 초월하고, 중간 천국 천사들의 지혜는 가장 외적 천국 천사들의 지혜를 그렇게 초월한다.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은, 더 높은 단계에 속한 것은 세부적이고, 낮은 단계에 속한 것은 일반적이며, 일반적인 것은 세부적인 것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을 수천수만 배 능가한다. 그러므로 더 높은 천국 천사들의 지혜도 낮은 천국 천사들의 지혜에 비하면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다. 같은 이치로, 낮은 천국 천사들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에 비하면 그런 차이가 난다. 사람은 육체적인 상태에 있고, 또한 육체의 감각에 속해 있으며, 육체의 감각은 낮은 단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감각적인 사람들, 즉 감각의 대상이 되는 것에 그들 사고의 범위를 국한한 사람들의 지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혜가 하나도 없고, 단지 지식만 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을 넘어 그들의 사고를 고양시킨 사람들은, 특히 그 내면이 천국 빛을 받는 단계로까지 열린 사람들은 이와 다르다. (HH.267)

 

 

내용이 다소 어렵고 난해하더라도 위 3번 글을 읽어 보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힘을 내셔서, 주님께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천국 빛을 구하시고, 해바라기와 같이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곧 천사들의 내면을 비추는 빛이 우리에게도 비춰 이 영광의 말씀들, 내용들이 이해되기 시작할 줄 믿습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3-06-08(D5)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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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절,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속뜻, 주님은 빛이시고, 선이십니다. 사람 안에 두 가지,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빛, 곧 낮이고, 사람에게 속한 것은 어둠, 곧 밤입니다.

 

AC.21

빛을 ‘선’(good)이라고 합니다. 빛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모든 것, 곧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걸 말하는데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악은 선처럼 보이고, 거짓은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들 악과 거짓은 어둠,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그래서 여전히 사람 안에 있는 걸로만 구성되는 어둠입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그게 뭐든지 다 ‘낮’(day)과 비교됩니다. 빛에 속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사람의 것(man’s own)은 뭐든지 다 ‘밤’(night)과 비교됩니다. 어둠에 속하기 때문인데요, 이런 비교는 말씀에서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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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속뜻, 거듭남의 초기, 사람은 빛 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선과 진리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진리에 대해 이것들은 뭔가 더 높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거의 외적(外的, altogether external, 겉)이기만 한사람들은 선과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요, 그들은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모든 것이 선이며, 그런 사랑들에게 호의적인 게 진리라는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은 악이며, 그런 진리는 거짓임을 그들은 못 깨닫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면서 그는 자기의 선은 선이 아니며, 또 그가 빛 되신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수록 주님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함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 주님은 선 그 자체, 즉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즉 빛이시라는 사실과,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선도 아니요,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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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신관(神觀, a just idea of God)의 중요성(3)(DLW.13, 2023/6/7)

 

 

오늘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신관(神觀, a just idea of God)의 중요성’ 세 번째, 마지막 시간입니다. 다음 다룰 주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神觀, a correct idea of God)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이 하나님 신관이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의 가장 심오한 생각(the inmost of thought)을 구성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종교에 관한 모든 것과 예배에 관한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종교와 예배에 관한 모든 것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참된 신관(a proper idea of God)없이는 천국과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런 사실로, 영계에서는 모든 국가가 하나님은 사람이시라는 생각, 신관(its idea of God as a man)에 따라 그 자리가 배정됩니다. 이 안에 주님에 대한 신관(the idea of the Lord)이 있기 때문인데요, 천국에는 주님에 대한 그밖에 다른 신관은 없습니다. 인간의 사후 삶의 상태는 생전 그가 확신하게 된 신관에 따라 정해진다는 사실은 정반대, 즉 하나님을 부인하고, 기독교계에서 주님의 신성을 부인함이 곧 지옥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면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DLW.13) How important it is to have a correct idea of God can be known from the truth that the idea of God constitutes the inmost of thought with all who have religion, for all things of religion and all things of worship look to God. And since God, universally and in particular, is in all things of religion and of worship, without a proper idea of God no communication with the heavens is possible. From this it is that in the spiritual world every nation has its place allotted in accordance with its idea of God as a man; for in this idea, and in no other, is the idea of the Lord. That man’s state of life after death is according to the idea of God in which he has become confirmed, is manifest from the opposite of this, namely, that the denial of God, and, in the Christian world, the denial of the divinity of the Lord, constitutes hell. (DLW.13)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네 번째 주제,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에 나오는, 전체 글 번호로는 13번 글 내용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이시라는 생각, 신관(its idea of God as a man)에 따라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49번 글(창1:26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서 주님께서 저들과 얼굴과 얼굴로 대화하실 때, 주님은 저들 앞에 ‘사람’(Man)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드릴 말씀이 참 많지만, 아직은 좀 이른 것 같고요... 이 때문에, 저들은 주님 자신과 주님께 속한 것 외에는 누구에게도 ‘사람’(m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저들 자신한테도 감히 ‘사람’이라 하지 않았으며, 오직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것들, 즉 사랑의 모든 선과 믿음의 모든 진리, 그러니까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인식한 것들과 관련해서만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들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났다’한 것입니다. (AC.49)

 

천국 전체가 ‘하나님은 사람이시다’라는 이 생각으로 충만하며, 그래서 천국은 사람 형태로 되어 있고, 천국 각 공동체도 사람 형태요, 천국을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 역시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역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

9장,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10장,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

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

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

 

등을 읽어 보시기 바라며, 아래 링크는 스베덴보리의 저서들 중 릴리즈된 저서들을 모아놓은 제 블로그 글이니 필요하신 분들은 가셔서 다운 받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영문 pdf 문서들입니다.

 

https://bygrace.kr/377

 

스베덴보리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bygrace.kr

 

 

2. ‘그 자리가 배정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기술입니다.

 

또 밝혀둘 것은, 어느 공동체가 한 단위로 보일 때 반드시 사람의 모습이지만, 결코 한 공동체도 똑같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에서 밝힌 대로, 그들의 선이 각기 다르고, 그에 따라 형태가 결정되기 때문에, 한 가족도 얼굴이 다 다르듯 공동체들도 다 다르다. 가장 내적이고 높은 천국의 공동체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공동체들은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람 모습이다. (HH.70)

 

천국을 이루는 주님의 신성에 대한 친밀감(affinity)에 따라 세 천국이 구분되며, 각 천국 내 수많은 공동체들 역시, 그리고 한 공동체 내 수많은 구성원들의 위치, 자리 역시 주님의 신성에 대한 애정, 친밀감에 따라 정해지는데요, 이는 마치 가운데 환히 빛나는 전구 주위가 가장 밝고 전구와 거리가 멀수록 흐릿한 것과 같습니다.

 

 

3.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타국 이민을 생각하거나 일정 기간 체류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 나라 입국을 위한 여러 준비 및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처럼, 천국 역시 동일하며, 그래서 주님은 특별히 250여 년 전 스베덴보리를 찾으셔서 천국 입국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오픈하셨습니다.

 

아래 링크는 스베덴보리가 누구인지 하는 간략한 프로필입니다.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에 대한 보다 좀 깊숙한 전기가 필요하신 분은 위 스베덴보리 저작들(writings) 중 맨 아래 ‘COMPENDIUM(叢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ygrace.kr/376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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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천국을 여시며, 그 입국의 비밀을 아낌없이 계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2023-06-07(D4)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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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속뜻,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상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전혀 없어 혼돈과 공허, 흑암과 깊음의 상태이지만 주님은 자비하셔서 그의 안에 주님의 것, 곧 리메인스(remains)를 두시며, 마치 보석처럼 귀히 보관하십니다.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earth void and empty), 또 ‘땅’(ground)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직 그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씨 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며,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 천적(天的, heavenly) 생명(삶)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렘4:22-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의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즉 무슨 ‘깊음’(deep)과도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군데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사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거듭남의 선행 상태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듭남에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이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라든지, 혹은 마치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 ‘품으시다’(bro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주님이 사람 안에 숨겨 보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해오신 것들을 가리킵니다. 말씀 전반에 걸쳐 이것을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 하는데, 이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겉의 일들(external things)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을 여기서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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