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23절,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AC.43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어마어마하게 결실하며 번성하는데요(fructifies and multiplies), 몸 안에 사는 이생뿐 아니라 사후 저생(the other life)에서는 정말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말씀에서 ‘생육하다’(生育, to be fruitful)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관한, 그리고 ‘번성하다’(繁盛, to multiply)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서술입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에는 ‘씨’(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말미암아 놀랍게 번성합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 들의 풀과 나무, 강과 바다의 물고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 가령 해바라기는 그 넓은 둥그런 꽃 한 판에 얼마나 많은 씨가 있으며, 열매, 가령, 옥수수 한 자루엔 얼마나 많은 알갱이가, 벼나 보리, 수수 같은 곡식들 한 줄기 줄기엔 또 얼마나 많은 낱알이 맺히는지... 나무 한 그루도 보면, 가령 은행, 호도, 대추, 밤, 감, 사과 등등... 얼마나 많은 열매, 과일이 열리는지... 물고기는 또 어떤가요? 명란젓 만드는 명태 한 마리가 낳는 알은, 대구는, 오징어는? 등등... 또한 얼마나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둥절할 정도로 아주 심하게 번성합니다 ^^

 

※ 인간과 달리 동, 식물의 경우, 주님의 이 정하신 복, 명령하신 축복이 예외 없이 그대로 시행되는 이유는, 동, 식물의 경우는 본능만 있을 뿐 스스로 무엇이 없어 주님이 정하신 질서를 거역하거나 뒤집거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정하신 쓰임새 그대로 존재하며,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 판단하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최선인 줄을 알면서도 버젓이 악을 행하고, 창조주의 질서를 뒤집어 훼방을 놓고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변수가 많으며, 오히려 주님의 복 받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 화와 불행은 그 스스로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오늘 본문 동, 식물의 이런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과 능력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흘러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를 통해 주님이 알리신 이 아르카나가 250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미미하게 세상에서 천대를 받고, 변죽만 울리고 있습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 초창기에도, 아브라함 이후 유대교회 초창기에도, 주님 성육신 이후 기독교회 초창기에도 늘 시작은 아주 미미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은 저마다 오랜 세월 대하처럼 흐르는 시대별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이 주님의 새 교회도 그럴 것입니다. 각 시대 초기 교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복’(福, blessing)은 풍성한 결실과 번성을 의미하는데요, 이런 생육과 번성이 모두 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 복은 사람 안에 천국이 있는 상태이며, 피조물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문제이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 지난번 다룬 것처럼 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즉, 첫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르며,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세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릅니다. 그런 식으로 나머지도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 사람의 거듭남 풀코스 가운데서 사람은 비록 주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살피시며 동행하시지만, 그렇다고 늘 하하 호호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사람의 연약함 때문인데요,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다가도 또 어느새 자아를 바라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한데요, 심지어 천국의 천사들조차 이런 상태변화를 겪는다 하니 우리는 자신의 이런 연약함의 오르락내리락을 결코 이상하게, 또는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분명한 건, 천사들의 증언처럼, 오히려 이런 굴곡을 통해 더욱 예리해져 가며, 더욱 주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에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이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반복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 성장, 성숙해져 가며, 그래서 어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만큼, 그리고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내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만큼 그만큼 우리는 더 성장, 성숙해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우리가 우리를 포기할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됩니다. 힘을 다해 공부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사고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 지식에 힘쓰고, 그걸 선용(善用, 쓰임새, use), 천적 지혜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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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13(D1)-주일예배(2499, 눅12,13-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pdf
0.40MB

https://youtu.be/E02g6WgaH1k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13-21)

 

 

쓰임(uses)이란 자신과 자신의 소유(one’s own)를 위한 음식과 의복, 주거 같은 생활의 필요들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의 나라, 공동체, 동료 시민들의 선 또한 뜻합니다. 사업도 사업 자체가 궁극적 목적일 뿐, 돈은 그저 중간, 부차적일 때, 그리고 사기(fraud)와 악행(bad practices)을 죄로 알고 피하며 싫어할 때는 선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돈이 궁극의 목적이요, 사업은 그저 중간, 부차적일 때는 다릅니다. 이럴 경우, 그런 사업은 탐욕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DP.220:11) By uses not only the necessities of life are meant, such as food, raiment, and habitation for oneself and one’s own, but also the good of one’s country, community, and fellow citizens. Business is such a good when it is the end-love and money is a mediate, subservient love, as it is only when the businessman shuns and is averse to fraud and bad practices as sin. It is otherwise when money is the end-love and business the mediate, subservient love. For this is avarice, which is a root of evils (on this see Luke 12:15 and the parable on it, verses 16–21). (DP.220:11)

 

 

다음은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0-28)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어렵고도 험난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요한 형제는 ‘할 수 있나이다’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은 왕이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주님에게 부탁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분하게 여긴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들이 천국의 영화를 모두 독점하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께 아들들을 부탁한 것이나, 다른 제자들이 그것을 분하게 여긴 것이나 모두 그들 마음속에 탐심(貪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탐심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마음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웃의 것을 빼앗아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난 제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 가운데 불기 시작한 이 탐심을 잠재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탐심 또는 탐욕과 관련된 말씀인데요, 본문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말씀에서 형제는 이웃을 뜻합니다. 그리고 유산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인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무리 중 하나가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믿음을 시샘하는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사랑이 많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특별히 깊다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자기도 모르게 시샘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앞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요한의 형제를 시샘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문에서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는 것은, ‘주님, 저 사람에게는 사랑도 주시고, 진리도 많이 주시면서 왜 저에게는 주시지 않습니까?’ 하는 일종의 시샘이며 불평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4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영적 의미로 재판장은 저주하거나, 또는 구원하는 자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옥에 보내거나 천국에 보내는 자’가 재판장인 것입니다. 그러면 나누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는 자가 나누는 자입니다. 사람을 편애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주님은 재판장도 아니시고, 나누는 자도 아니십니다. 주님은 어느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시며, 어느 누구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되물으셨습니다. 누군가를 시샘하는 것은 결국 주님이 공평하지 않으시다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나 자연적인 면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능력이 모두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신 분인 까닭은,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사후에 각자의 쓰임새에 따라 천국에서 봉사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역량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을 더 가까이, 더 많이 누리는 것이고, 주님을 덜 사랑한 사람은 그 역시 그가 주님을 사랑한 그만큼만 주님과의 거리며 누림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더 큰 일을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나 천국에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가진 잔의 크기 만큼만 허락하시되 넘치도록 허락하십니다. 누구나 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도록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신 분입니다. 탐심은 내가 남보다 더 큰 일을 하고, 더 존경받아야만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거리의 청소부보다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단지 그들이 하는 역할만, 그리고 역량, 즉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만 다를 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학력이나 배경, 지위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가 자기 역량 가지고 감당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각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최선의 것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형의 유산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주님께서는 사람의 진정한 생명인 선하고 진실함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소유가 넉넉하다, 많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보통은 세상의 유한한 삶을 좀 더 편하게 사는 데나 필요한 것이지 영원한 삶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이웃을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천국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며, 많이 사랑할수록 그는 그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탐심은 사람을 살리는 약이 아니고 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을 향해서는 장님이 되게 하고, 대신 이 세상에만 집중, 집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에 대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16절로 19절입니다.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말씀에서 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겉으로만 부자이지 속으로는, 내적으로는 부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말씀에 관한 지식일 뿐 진정한 진리, 즉 말씀을 실천할 때 만나게 되는, 그 안에 선이신 주님이 계시는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진리가 없는 이유는 속 사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빛이 흘러 들어와 말씀 깊은 곳에 감추어진 진리를 볼 수가 있는데, 속사람이 닫혀 있으니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자는 말씀에 대해 많이 안다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서 영원히 먹고 마시며 살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인간한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는 천국에서 영원히는 고사, 살 수조차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주님은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 하시고,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인간의 욕심으로 이룬 것은 그것이 지식이든, 물질이든, 명예든, 사람을 영원히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마다 삶의 목표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이고, 우리 같은 신앙인들은 사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복되게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포기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나 나중에 천국에 가서나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하고, 큰일 하기를 원합니다. 오죽하면 주님의 제자들도 서로를 비교하며 시샘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그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인척 가운데 한 분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 큰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한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그곳에서도 성공, 큰 부를 이뤘다고 합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바에는 제일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 1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주님의 나라에도 1등이 있고 2등이 있을까요? 영적인 일이든 세상 일이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슨 일에나 최고가 되려고 하는 것은 자칫 탐심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일 자체를 위해 해야지 최고가 되려는 마음, 일을 이용해 마음속 숨은 목표를 이루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 정치인이 되려고 해야지, 자신의 부와 명예 따위를 이루기 위해 정치를 하려고 하면 안 되듯 말이지요. 탐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탐심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처럼 탐심을 그대로 두면 거듭남을 방해하는 거대한 악이 됩니다.

 

성(聖) 문서에 보면, 탐심이 아주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재물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도 않으며 교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나 의복, 음식 같은 것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돈을 소유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합니다. 탐심 안에는 그렇게 교활함과 천박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을 그대로 두면 속 사람이 닫히고 나중에는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탐심을 그대로 두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웃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끝절입니다.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신 것입니다. 사소한 일을 하더라도 정성껏 하고 그 일로 인해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일을 큰일로 여기십니다.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섬기는 자의 본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7-28)

 

아멘

 

원본

2020-06-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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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C.42

‘물고기들’(Fishes)은, 앞서도 말했듯,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faith from the Lord)으로 움직이는 상태가 된, 그래서 살아있는 상태가 된 기억-지식들을 말합니다.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으면 ‘살아있는(alive), ‘움직이는(animate) 상태이지만, 자신으로 말미암으면 ‘죽은(dead), ‘못 움직이는(inanimate) 상태입니다. 지식이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 지식의 거듭남입니다. 지식의 거듭남이란, 비록 여전히 세상, 세속 지식이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주님을 향해, 주님을 위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 특히 세상 지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모든 상태가 결정됩니다.

 

‘큰 바다짐승들’(whales, 고래, 또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수중 생물들)은 그들, 즉 지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세부 원리들이 이들과 종속 관계에 놓이거나(in subordination to) 말미암는(from) 그런 것들입니다. 이 우주에서는 존재(exist) 및 존속(subsist)을 할 수 있으려면 다 자기의 근원이 되는 그런 더 일반적인 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래들’(Whales), ‘큰 바다짐승들’(great fishes)이 선지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이유는, 이들이 거기서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뜻하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 29장 3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를 가리켜 ‘큰 악어’(great whale)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큰 악어’는 인간의 지혜, 지성, 즉 일반적으로 지식[scientia]을 말하는 것이지요.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겔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그리고 다른 데서도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겔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 안으로 들어가고자 무척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들인 겁니다, 이사야에서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것은 진리의 일반적 원리들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 진리의 일반적인 원리는, 모든 세부, 또는 하부 진리는 일반적, 혹은 상부 진리에서 오며, 이들 일반적, 혹은 상부 진리는 단 하나의 근원,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이는 큰 물고기가 요나에게 한 것처럼,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고 한 신앙의 지식들을 그가 삼켰다는 것입니다. ‘큰 뱀’(a whale)은 신앙 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단지 기억-지식들로만 소유하고, 또 그런 식으로만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 지식 중에서도 신앙에 관한 지식은 아주 값비싼 지식이며, 그중에서도 일반적 지식, 가령,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와 같은 말씀 지식은 가히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너무나도 귀한 생명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 그저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알고 가볍게 여기며, 도무지 무슨 가슴 신앙으로 감동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자기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신앙인이다 하는 이런 사람들을 위 예레미야 본문에서는 ‘큰 뱀’이라 한 것입니다.

 

※ 세상 지식을 학습, 습득하면서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또 그 지식을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사용하여 천국 지성에 이르는 중에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늘 시인하고,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고 싶으시면 그냥 간단히 허락만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왜 주님은 이렇게 속 사람, 겉 사람, 내면, 외면, 기억-지식, 합리와 이성, 지성 등 복잡하게 조직하시며, 다 일일이 경험하게, 순서대로 모든 단계를 다 밟게 하실까요? 그것은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설령 주님의 허락이 있다 해도 사람은 천국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방열복을 안 입고 용광로 작업을 하는 것과 같아서, 천국에 들어갔는데도 지옥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은 사전에 이렇게 아주 단단히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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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속뜻,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신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한 그는 죽은 상태이지만, ‘아닙니다.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습니다’ 고백하면서 그는 살아있는 상태가 됩니다. 전자는 식물, 후자는 동물로 표현되었습니다. 수중 생물(the creeping thing)로 표현된 겉 사람의 기억-지식, 새(fowl)로 표현된 속 사람의 합리와 지성 모두 ‘두 큰 광명체’, 곧 사랑과 신앙의 빛을 받아 생물이 됩니다. ‘생물’(the living soul)은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배치된 후, 그 빛을 겉 사람이 받으면서 일단 사람은 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말하는 줄로 여겼는데요, 사람이 이렇게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한, 사람은 소위 살아왔다고 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인데요, 그런 사람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든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선 그 자체인 그런 선을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며, 주님만이 선의 근원이십니다.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반사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주님의 선을 덧입을 수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선한 것을 의도하는 것조차 절대 불가능하며,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선한 것을 절대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를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 그만큼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정말 철저히 분리된 존재입니다.

 

또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처럼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 즉 그로 하여금 생명을 향해 거듭나게 하실 , 주님은 먼저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시는데요, 그 이유는 그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그때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도록, 그리고 나중에는 지각하도록 그를 인도할 무슨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 탤런트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 이름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듭남 스케줄 전체를 우리에게 맞추십니다. 우리더러 주님의 스케줄에 맞추라 하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주님은 과연 진정한 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에게 있는 진리와 선은 (the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  못 움직이는 것으로 비유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생해져서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이어서 땅 위를 나는 새들(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끝으로 짐승들(beasts), 곧 이 모든 움직이는 것들, 그래서 생물(living souls)이라 하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생물’(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새들’(birds)은 보통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후자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수중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이나 ‘물고기들’(fishes)이 기억-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계속해서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새로운 성전, 즉 일반적으로 새로운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사람, 즉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모두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 인간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 주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19) 가 생각납니다 ^^

 

[3] ‘새’(birds)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사야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에서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 새로운 교회, 혹은 거듭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 ‘들짐승’(wild beast)은 정말 들짐승을, ‘새’(bird)도 그냥 새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겠다’(to make a new covenant)하시기 때문입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AC.41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제법 메인으로 보일지라도 천사들이 볼 때는 무슨 딱딱한 뼈나 까만 덩어리로 보이지요.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만일 볼 수 있도록 재현될 때는 휴먼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human and living) 나타납니다. 정말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된 사실은, 천사 같은 영(an angelic spirit)의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그리고 모든 지극히 사소한 생각까지도 살아 있는 상태(alive)라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조각들 안에도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애정을 포함하면서 말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 사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그 모든 언행에서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며, 빛처럼 뿜어져 나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목격하며,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들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들어있기 때문인데요,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생물’(the living soul)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일종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기는 것’(creeps)이라 한 것입니다. 이들 진리는 사람에게는 아직 너무나 깊은 비밀들임에도 살짝 말씀드리는 것은 본문에 ‘생물’(the living soul), ‘스스로 움직이는 것’(the thing moving itself)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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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절,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속뜻, 주님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큰 광명체를 두시고, 선과 악, 빛과 어둠을 환히 비추게 하셨습니다. 다시 저녁 상태, 아침 상태가 되면서 더욱 우상향, 네 번째 단계를 지나고 있습니다.

 

 

AC.38

‘낮’(day)은 선을, ‘밤’(night)은 악을 의미하며, 그래서 선을 낮의 일, 악을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빛’(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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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06(D1)-주일예배(2498, 눅12,8-12),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pdf
0.37MB

https://youtu.be/s-FaLBfUOmw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눅12:8-12)

 

 

우리나라에서 시민운동은 대략 1980년대에 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졌고, 당시 운동권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시민단체를 만들거나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업적인 시민운동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민운동과 생계 활동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고요, 그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진 후, 결국 정계에 진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최근 윤석열 정부가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는 우리나라 시민운동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다 돈과 관련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쩐지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민운동의 태생적 역할은 정부나 지자체에 대한 비판입니다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두 가지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을 겨누는 진리 안에 반드시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무자비한 칼과 같아서 세상을 분열시키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영적 시민운동가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8절, 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요, 오늘날에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마태복음 24장에서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절) 하셨는데, 여기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겉 사람만 가지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요, 그것이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794번 글 3번 항은,

 

사람은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 마음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영적 마음은 속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고, 자연적 마음은 겉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다. 속 사람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이고, 속 사람과 무관하게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AE.794:3)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일이든지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진실하며,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옳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놓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이 아닌, 겉 사람으로부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에 대한 시인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시인하실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진실합니다. 그러나 부인하신다면 그 일은 언제나 거짓이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주님을 ‘인자’(人子, Son of Man, 사람의 아들)라고 부를 때, 인자는 주님의 본질인 선과 진리 중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하고, 구체적으로는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의 아들’은 선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천국의 천사들이나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말씀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의미를 얼마든지 잘못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못 해석하더라도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성령’은 천국 천사들의 진리인 말씀의 속뜻, 곧 내적 의미(inner meaning)를 뜻합니다. 성령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것으로,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 또는 받으라 하신 것은 ‘감추어졌던 내적 진리를 이제 드러내 보여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임의로 왜곡함으로써 내적 진리까지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모든 구절 안에는 선과 진리 간 결혼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선 또는 진리를 임의로 없애거나 분리하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혼이라는 말씀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되는 것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와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 778번 글 4번 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선과 진정한 진리는 말씀의 영적 의미 안에 들어있다. 그것들이 말씀의 자연적 의미 안에 있을 때는 모두 옷을 입고 있고, 몇 군데만 옷을 입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우리는 외견상의 선이요 진리라고 부른다. (AE.778.4)

 

이 말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의 일부만 볼 수 있고, 전체는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안에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가 대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속에 진정한 선과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은 어느 곳일까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 19절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라든가,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문자적인 뜻만으로도 그것이 믿음과 삶의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이 곧 진리이며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문자적인 뜻만으로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인간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은 문자적인 의미를 통해서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해석할 때,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은 잘못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회 안에서도 말씀의 문자적인 진리와 내적 진리가 서로 충돌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문자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적 진리 또는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내적 진리를 이단의 진리라고 비난합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로 굳게 믿는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사정을 아시고, 1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회당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 당시 회당은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에 관한 상이한 해석들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당이나 권세 있는 자에게 끌려가는 것은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간의 지식으로 무장한 거짓 교리의 신봉자들과 교리적 논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때 그 순간 할 말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가끔 내적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문자적인 진리를 앞세워 공격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들의 현란한 지식과 화술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두려움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천국의 비밀’ 8478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현재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걱정을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일 일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우울해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만족한다. 부를 얻거나 명예를 얻는다고 다른 사람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가난해도 슬퍼하지 않으며, 비천한 상황이 와도 낙담하거나 기죽지 않는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영원한 행복의 상태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다른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마땅한 말이 떠오르면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면 됩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주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그날 먹을 것만, 즉 일용할 양식만 거두고, 내일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속뜻으로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입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판을 치는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속 사람의 소리,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겨누는 진리의 칼로 자신의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겉 사람으로부터 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합니다. 주님은 또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말씀을 안다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그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넘어서 내적 진리까지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진리를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 2706번 글을 보면, ‘천사들은 내적 진리에 반하는 욕망의 습관을 끊지 못하는 것도 성령을 거역하는 죄로 이해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새 교회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더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적 진리에 대해 비교적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깊이, 그리고 많이 아는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일을 걱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고, 모든 일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매 순간 자기에게 닥치는 일들이 영원한 행복을 위한 주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다고 우쭐대거나 나쁜 일이 있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일을 담담하게 견딘다면 결국 평화와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 모두 속 사람으로부터 주님을 시인하고 성령을 거역하지 않으며,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3-34)

 

아멘

원본

2020-05-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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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속뜻,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 곧 ‘두 큰 광명체’를 두시고, 이것으로 거듭나고 있는 사람의 신앙의 진보를 도우십니다. 신앙의 진보는 지식, 지성, 사랑 혹은 지식, 머리, 가슴 순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참 신앙의 근원이시며, 대상이십니다. 참 신앙은 주님에 관한 교리를 알고, 시인하며, 따르는 것이며, 말씀에 나오는 해, 달, 그리고 별들과 같은 광명체들은 모두 사랑과 신앙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이며, 늘 함께 가야 합니다. 이 사랑과 신앙은 ‘낮과 밤’, ‘징조’, ‘계절’ 그리고 ‘날과 해’로 표현된 교대, 반복이라는 주님의 질서를 이룹니다.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는 먼저 신앙의 본질과, 그리고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그 진행 과정을 알기 전까지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은 한 분 주님뿐이신데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선언하신 것처럼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신앙의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맨 처음, 그들에게는 생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데요, 먼저는 기억 신앙(faith of the memory)입니다. 일종의 지식일 뿐인 신앙(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이지요. 다음은 머리 신앙(faith in the understanding)으로, 일종의 지적 신앙(an intellectual faith)입니다. 끝으로 가슴 신앙(faith in the heart)입니다. 사랑 신앙(the faith of love), 구원 신앙(saving faith)이라고도 하지요. 앞 첫 두 종류의 신앙을 3절로 13절에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것으로, 사랑으로 활기찬 신앙을 20절로 25절에서는 움직이는(animate)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여기서 먼저 다루는 것이며, 이르시기를 ‘광명체들’(luminaries)이라 하시고, 이때 사랑을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단수로 언급됩니다.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luminaries)be동사의 라틴어 표현을 보면 sit입니다. 복수 표현인 sint가 아니지요.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 즉, 움직이지 못하는(inanimate) 식물 신앙에서 움직이는(animate) 동물 신앙으로 넘어가기 위한 다리 역할을 이 ‘광명체들’에 대한 기술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보시겠지만, 말씀에서 ‘동물’은 애정(愛情, affection)을 의미합니다.

 

[3] 속 사람의 사랑과 신앙은 육체를 가진 겉 사람에게 있어 열과 빛과 같은데요, 이런 이유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되며, 이것이 광명체들을 일컬어 ‘하늘의 궁창에 있다’(set in the expanse of heaven), 즉 속 사람 안에 있다 하는 이유입니다. 큰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의지(will)에, 작은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에 말입니다. 그러나 햇빛은 그 빛의 수용체가 있어야만 볼 수 있듯 이들은 의지와 이해 안에서만 나타납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그리고 이해를 진리, 즉 신앙으로 영향을 끼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AC.31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하며, ‘해, 달, 별들’(sun, moon, and stars)이라고도 한다는 사실은 에스겔 같은 선지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great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 “sun, moon, and 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7-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에 나오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말씀에서 그저 감각이요, 지식일 뿐인 원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감각과 지식일 뿐인 것들을 통해 사랑과 신앙이 끝나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사13:9-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다시, 요엘에서 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욜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2] 다시 이사야에서, 주님의 오심(the advent of the Lord)과 이방인들,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새로운 교회이지요,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받아 거듭나고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밝아짐에 관해 말하면서 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사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그래서 시편에서 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148:3-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3] 이들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합니다.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끊임없이 등불이 타오르게 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 곧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상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회의 모든 규례가 주님에 관한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었기 때문인데요, 이 등불(luminary, 광명체)에 대하여 기록된 바로는 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27:20-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런 것들이 사랑과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 곧 주께서 거기에 불을 붙이셔서 먼저 속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렇게 속 사람을 통해서 이번에는 겉 사람을 비추시는 이런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대해서 앞으로 해당 말씀에서 보시게 됩니다. 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 짐작하셨겠지만,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어떤 것을 가지고, 정확히는 지상의 사물을 가지고 주님과 주님께 속한 것을 가리키는, 나타내는 것입니다.

 

 

AC.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고 하시다가, 그다음엔 사랑은 ‘큰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은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라 하시고, 계속해서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주관하라’(rule by day),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주관하라’(rule by night) 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감추어진 아르카나(arcana, 단수 arcanum, 秘義, 감추어진 하늘의 신비)인데, 특히 종말의 때인 이때 이들에 대한 설명이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허락되었습니다. 이들 아르카나가 종말인 이때 특히 더 봉인된 이유는, 지금이 시대의 끝(the consummation of the age), 곧 사랑이라는 게 아주 희귀하고, 그 결과 신앙이라는 것 또한 아주 희귀한 때이기 때문인데, 주님 친히 복음서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해’(sun)는 사랑을 의미하는데 어두워지며, ‘달’(moon)은 신앙을 의미하는데 빛을 내지 않습니다. ‘별들’(stars)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인데 하늘에서 떨어지며, 이들이 곧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입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사랑 그 자체 말고는 무슨 다른 신앙을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天的, The celestial angels) 또한 사랑의 신앙 말고는 신앙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천국 전체가 일종의 사랑의 천국인데요, 천국에서는 사랑의 생명 말고 무슨 다른 생명이라는 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국의 모든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며, 이는 단 한 번도 그 설명이 허락된 적도, 심지어 인류 그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그래서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선언하고, 지각하기도 하는데요, 그것은 모든 사랑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생명은, 이 생명은 오직 사랑에만 속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모든 행복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며, 자기들한테서는 그 어떤 사랑이나 생명, 행복도 말미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은 또한 기록된 대로, 주님의 변모, 변형(變形, transfiguration) 관련, 큰 광명체, 즉 ‘해’(sun)로 설명되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내면 가장 깊은 것들이 얼굴로,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것들은 옷으로 상징되는데요, 그래서 주님의 신성(神性, the Lord’s Divine)이 ‘해’(sun), 즉 사랑으로, 주님의 인성(人性, his human)은 ‘빛’(light), 즉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상징된 것입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AC.33

약간의 사랑이라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고서는 기쁨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 이 사실을 아주 잘 아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능력이지요.사랑, 생명, 기쁨이란 이런 것, 곧 이렇게 서로 본질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한테서 사랑을, 같은 말이지만 무언가 그가 간절히 원하는 걸 제거한다면, 그 순간 그는 그 즉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게 되며, 놀랍게도 무슨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맙니다. 생명에 대해 지금까지 제가 영계, 특히 천국에서 목격했던 장면들처럼 말입니다. 자기 사랑(the loves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the world)안에도 생명이나 기쁨하고 뭔가 닮은 게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둘은 참된 사랑하고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사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그에 비례해서 이웃을, 그리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 사랑과, 그리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이웃 사랑은 바로 이 참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까닭에,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요,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고,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단 하나만 있을 수 있으며, 참된 생명 역시 그런데요, 이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더할 나위 없는 참된 행복이 흘러나오지요. 천국에 있는 천사들에게 속한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AC.34

사랑과 신앙은 분리가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이 둘은 하나를 이루며, 같은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명체들’(luminaries)이 처음 언급될 때, 그들은 하나로 간주 되었으며, 그래서 이르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의 정말 놀라운 세부적인 내용들을 이런 배경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은 천적 사랑(the celestial love)에 힘입어,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사랑 안에 있는데요, 신앙 관련 모든 지식에 있어 이 사랑으로 말미암으며, 설명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그런 어떤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신앙의 교리들에 관한 지식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러나 사랑은 없는 그런 영들의 경우, 그들은 천국 마당의 첫 번째 문턱조차 접근은 고사하고, 도로 달아날 수밖에 없는, 그런 어떤 냉기 어린 삶이나 희미한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그분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으면서도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을 믿어왔다고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1-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그래서 분명한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한 신앙 안에 있으며, 그렇게 해서 또한 천국의 생명() 가운데 있지만, 말로는 자기들은 신앙 안에 있다 하면서 그러나 실제 사랑의 생명() 가운데 있지는 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볕(열) 없는 빛과도 같습니다. 겨울철에도 물론 햇빛은 있지만, 그 빛 안에 열이 없어 결국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고 만물이 죽은 듯 무기력해지는 그런 계절처럼 말입니다. 반면, 사랑을 동반한 신앙은 봄철 햇빛과도 같아서, 열매 맺게 하는 햇볕 아래 만물이 자라고 번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영적, 천적인 것과 관련하여 정확히 일치하는데요, 그래서 말씀에서는 보통 지상에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영적, 천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시대의 끝, 종말을 예언하실 때, 신앙이 없거나 사랑 없는 신앙을 또한 ‘겨울’(winter)로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13:18-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합니다. ‘겨울’(Winter)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AC.4060번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닙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쓰신 것입니다.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능력이 있는데, 바로 의지(意志, will), 곧 의도하는 능력과 이해(理解, understanding), 곧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해가 의지의 통치를 받을 때, 이 둘은 한마음이 되며, 그것은 곧 하나의 생명(삶)을 이룹니다. 그때 사람은 마음먹고 행하는(wills and does) 것을 또한 생각하고 의도하기(thinks and intends)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불일치할 때, (말로는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앙과 모순되게 사는 경우처럼) 이때는 한마음이 둘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천국을 향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지옥을 향하고자 합니다.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행위자(doer)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완전히 지옥으로 곤두박질쳐지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일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AC.36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해 온 사람들은 사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을 생각할 때, 어떤 사람들은 그건 단지 생각일 뿐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건 주님을 직접 향하는(directed toward the Lord)거라고 합니다. 소수만이 그것은 신앙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라고 하지요.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 ‘주님을 직접 향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왕 앞에 나아가듯 주님을 직접 알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거의 모든 신앙인이 대부분 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천국에서는 근본적으로 좀 다를 것 같습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의도하고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HH.15)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지식과 인정(認定, acknowledgment) 및 뿐만 아니라, 특히 그 교리들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복종입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그리고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주된 포인트는 바로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안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신앙 안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마가복음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아주 명료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이 둘 중 첫째를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셨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마22:37-41)고 하셨습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41)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 관련 범 우주적 교리와 말씀 전체를 말합니다.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AC.37

광명체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이루게 하라 하십니다.이들 말씀에는 지금 단계에서 밝힐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들어 있습니다. 글자 상으로는 이런 종류의 아르카나가 전혀 보이지 않아도 말이지요.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 사이에는 교대, 반복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일반적이든 아니든 말이지요. 날과 해의 변화와도 비교할 수 있겠네요, 네, 이런 사실을 관찰하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 정오, 그렇게 저녁, 밤을 거쳐 다시 아침이지요. 해의 변화도 비슷합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렇게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으로 이어집니다. 열과 빛의 교대가 그래서 가능한 것이고, 땅에서 나는 소산물들도 그렇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 간의 교대를 이들을 가지고 비교할 수 있는데요, 이런 교대와 다양성이 없으면 삶은 천편일률적이 되며, 그 결과, 전혀 삶이라고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선과 진리도 전혀 알아차리지도, 구분, 심지어 지각조차도 할 수 없게 되지요. 이런 교대를 선지서에서는 ‘법도’(ordinances, [statuta])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5-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그러나 이런 것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장 22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8:22)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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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前生), 환생(幻生) 및 윤회(輪廻)에 관하여’(2023/8/5)

 

지난날 이 주제, 이슈에 관하여 관심(?)을 갖던 중, 스베덴보리를 접하고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듯하여 있던 차, 마침 새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http://www.newchurch.or.kr/board_vOYt45)에 과거 누가 이런 질문을 올린 게 보여 어제오늘 생각을 좀 정리해봤습니다.

 

자유 게시판 - 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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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newchurch.or.kr

 

제가 이 이슈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이것이 기독교의 관점과 정면 대치함에도 불구, 최면에 빠진 내담자가 실제로 이런 말들을 자기 입으로 술술 말하기 때문이지요.

 

다음은 그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이며,

 

 

부산에 사는 이**이라합니다.

요즘 힘든 일도 많고 마음도 심란하고 부산에 새 교회도 없고 ^^

 

제가 스베덴보리 신학자님 책을 몇 권 읽고 e-Library에 매일 성문서 읽기도 다 읽어가는데...

천국, 지옥은 나오는데 환생, 전생은 언급이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의 믿음이 약해서인지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근데 전생, 환생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사랑합니다.

 

 

다음은 여기 달린 답변입니다.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은 전생과 환생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꿈, 데자뷰, 과거에 대한 어떤 막연한 느낌 때문에 마치 전생 또는 환생이 있다고 종종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 이런 느낌은 우리가 중간영계의 영인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특성, 그리고 특히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어떤 특정한 영향에 따라서 예외적으로 뚜렷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각자에게 한 번씩 주어지는 고유한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땅에서의 일생은 저세상을 위한 준비기간이자 시험대이며, 영적으로 봤을 때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해 나가는 과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매 순간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 답변 중, ‘우리가 중간영계의 영인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특성, 그리고 특히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어떤 특정한 영향에 따라서 예외적으로 뚜렷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는, 바로 이 부분인데요, 앞서 제가 무슨 실마리를 찾은듯하다 한 게 바로 이 부분이어서 이걸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292.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있는 중간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따로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럴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들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295.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그 애정, 즉 사랑에 있어서 그 사람과 동질인 영들이다. 선한 영들은 주께서 사람에게 보내시지만, 악한 영들은 그 사람 자신이 불러들인다. 그러나 사람의 애정이 변함에 따라 다른 영들이 함께 있게 된다. 따라서 사람의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각기 그 함께 있는 영들이 바뀐다. 유아기에는 순진성 안에 있는, 따라서 순진성의 천국인 가장 내적 천국, 즉 삼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 함께 있다. 소년기에는 알고 싶어 하는 애정 안에 있는, 따라서 가장 외적인 일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 함께 있다. 청년기와 장년기에는 진리와 선에의 애정, 즉 지성 안에 있는 영들이 함께 한다. 이들은 중간 천국, 즉 이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다. 그러나 노년에는 지혜와 순진성 안에 있는 영들, 따라서 가장 내적 천국인 삼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 함께 있다. 주께서는 고쳐지고 거듭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 연합을 유지하신다. 고쳐지고 거듭날 수 없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을 가능한 한 악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이들에게도 선한 영들이 함께 있지만, 이 사람들은 자기와 동질인, 지옥과 교통하는 악한 영들과 직접 결합한다. 만일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거나 물질, 복수, 간음 등이면, 각각 똑같은 것을 사랑하는 영들이 와서 그들의 악한 애정 속에 머문다. 그 사람들은 선한 영들에 의해 악으로부터 저지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악한 영들의 선동을 받고, 악한 영들은 그 사람들에게 악한 애정이 우세한 한 그들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악한 사람은 지옥에, 선한 사람은 천국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298.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천국에 결합된 영들이나 지옥에 결합된 영들 모두 결코 자기들의 기억과 생각을 사람에게 유입시키지 않는다. 만일 영들이 자기들의 기억과 생각을 가지고 사람에게 유입해 오면 사람은 영들의 것을 모두 자기 것으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을 통해 사람에게 흘러드는 것이 있는데, 천국으로부터는 선과 진리를 사랑함에 따르는 애정이, 지옥으로부터는 악과 거짓을 사랑함에 따르는 애정이 유입된다...

 

그리고 28장, ‘천사와 사람과의 대화(The Speech of Angels with Man)에도 관련 글이 있어 인용합니다.

 

256. 천사나 영은 그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의 기억만을 사용해야 한다. 천사와 영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있다. 만일 어떤 영이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에게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자기 것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영의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전에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어떤 것을 회상하는 것과 같다. 허락하심에 따라 나는 이것을 경험해 보아 알게 되었다. 이런 현상 때문에 고대인들 중에는 자기들은 수천 년을 지나 자기들의 전생과 전생에 행한 모든 것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돌아왔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때때로 전에 듣도 보도 않은 것이 기억처럼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영들이 영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들의 생각 안으로 유입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다소 내용이 좀 길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각 사람에게는 중간영계에서 두 종류의 영들이 와 있다. 이는 스스로 떨어져나간 인류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과 계속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자비이다.

 

둘째, 이 영들은 선한 영들의 경우, 각 사람의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악한 영들은 그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 각각 그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사람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악이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이 와 있지 않으면 그는 존재할 수 없다.

 

셋째,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 안에 와 있는 줄 모른다.

 

넷째, 이 영들은 에이전시(agency, 代行) 영들이다. 즉 선한 영들은 천국 어느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고, 악한 영들은 지옥 어는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렇게 해서 사람은 천국과, 그리고 지옥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다섯째, 사람의 애정 상태에 따라 와서 머무는 영들이 달라진다.

 

등...

 

 

이상을 종합했을 때, 저는 다음과 같이 나름의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최면에 빠진 상태에서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은 사실은 그에게 와있는 영들 자신의 기억과 생각이다. 이런 유입을 주님이 금하셨음에도 가끔 일어나는 것은 악한 영들은 기본적으로 주님의 명령을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불법에는 반드시 벌이 따른다. 여러 겹의 전생, 환생 등은 이런 것이 복잡하게 전개되는 그런 어떤 것이다. 사람의 지상 생활은 ‘일생’(一生)이다. 윤회 같은 것은 없다.

 

둘째, 전생, 환생, 윤회 같은 것을 알아보려 하는 것은 주님이 금하신 것이다. 이는 주님의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인데, 따라서 누구에게 최면을 걸거나 스스로 그런 데를 찾아가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한다.

 

셋째, 절대 영들과 대화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영들은 사람의 육안을 통해 자연계를 볼 수 있으므로 우리가 보는 모든 컨텐츠들에 조심, 유의해야 한다. 음란, 폭력, 잔인, 공포 등의 컨텐츠들을 접하면, 그로 인해 우리 안의 영들이 깨어나 우리를 망가뜨리려 하기 때문이다.

 

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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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공유 중단’(2023/7/31)

 

그동안 꾸준히 해오던 SNS 사역, 특히 카톡 공유를 당분간 좀 중단할까 합니다.

 

저의 주된 소명은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서, 특히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번역인데, 이것이 차일피일 그 우선순위에서 계속 미루어져 뚜렷한 무슨 진척이 없기 때문입니다. SNS 사역을 통한 그때그때의 격려 또한 남은 생애, 번역이라는 이 마라톤 경주를 완주하는 데 있어 나름 필요하지만... 이래 가지고서야 남은 기간, 무슨 결과물을 낼 수 있을까 하는 심정입니다.

 

제 번역 결과물들은 가급적 그때그때, 그리고 제 소소한 일상도 틈틈이 올리겠사오니, 혹시 제 근황이 궁금하신 분들은 가끔 아래 제 블로그를 찾아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제 블로그를 구독하시는 방법도 있군요.

 

그동안 다소, 아니 충분히 난해한 이야기임에도 불구, 꾸준히 읽어주신 모든 분께 주께서 갚아주시기를 기도드리며...

 

변일국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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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1(D2)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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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 (눅11:43-54, 202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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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3/7/23, 눅11:43-54), '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https://youtu.be/a1jkIAFXH7U 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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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모두 ‘위선’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그 결과, 주변은 물론, 자신의 영에게조차 근본적인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위선은, 첫째, 겉과 속이 다릅니다. 둘째, 주님의 것에 인간의 것, 세상 것을 섞습니다. 다른 건 주님이 좀 어떻게 해보실 수 있지만, 이 사람 영의 섞음과 변질은 주님조차 어찌하실 수 없습니다. 비록 좀 삐뚤어지고, 못되게 굴더라도 최소한 이 겉 다르고 속 다른 지경까지는 가지 않아야 합니다.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마5:37), 솔직담백, 순진무구해야 합니다. 좀 부족하고 모자라서 실수는 하더라도 악인, 위선자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2023-07-23(D1)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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