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 (2023/6/26)

 

 

오늘은 ‘콤펜디움’ 5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입니다.

 

https://bygrace.kr/1571

 

C.1.5.1,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 (2023/6/26) ‘콤펜디움(COMPENDIUM, 叢書)’ 1장 ‘하나님에 관하여’, 오늘은 5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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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딱딱하고 어려운, 그리고 장문의 지루한, 교리적인 걸 나누어드리게 되어 죄송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힘드시면 정말 정말 심심할 때 읽어보시고요, 하지만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천국 빛 가운데 있는 천사들은 이런 것의 수천수만 배 더 어려운 것도 그냥 밝히 이해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므로, 읽으실 때는 꼭 주님의 빛을 힘써 구하시며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은 기뻐하시며, 우리를 천사들의 지혜와 지성 가운데로 올려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2023-06-26(D2)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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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 묻은 먼지’ (2023/6/25)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눅10:10-16)

 

https://bygrace.kr/1570

 

주일예배(2023/6/25, 눅10:10-16), '발에 묻은 먼지'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https://youtu.be/8GdWZbakf3Q 2. 축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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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발에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하십니다. 발에 묻은 먼지는 악한 사람과 상대할 때, 그로부터 우리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악을 뜻합니다. 발은 겉 사람을 뜻하고, 먼지는 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 진실과 선의를 가지고 대하는데,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불쾌감, 또는 실망감을 느끼는데요, 이를테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발에 묻는 먼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선하고 순수한 사람들은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상대에게 계속 선으로 대합니다...

 

73주기 6.25를 기억하며...

 

 

2023-06-25(D1)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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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칠십 인을 보내시며 하신 말씀의 속뜻’ (2023/6/22)

 

 

1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이르시되...

 

아래는 오늘 매일예배 본문 pdf 및 유튜브 녹음 링크입니다.

 

https://bygrace.kr/1569

 

매일예배(2023/6/22, 눅10:1-9), '주님이 칠십 인을 보내시며 하신 말씀의 속뜻'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https://youtu.be/Pk6184X2d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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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라

 

인간의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항상 주님의 지혜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는 부드럽고 유연합니다. 주님의 지혜는 따뜻하고 온건합니다. 주님의 지혜에 의지할 때, 무슨 일이든 실패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즉 진리를 머리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지와 삶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교제하라 하십니다. 진리는 머리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2023-06-22(D5)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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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2)’ (2023/6/21)

 

 

콤펜디움 1장 ‘하나님에 관하여’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https://bygrace.kr/1568

 

C.1.4.2,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2)’ (2023/6/21)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2)’ (2023/6/21) 콤펜디움 1장 ‘하나님에 관하여’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오늘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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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진리가 신적 질서를 따라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충만하다고 합니다. 천사들은 그런 신적 질서의 나라에서 사는데요, 지금 우리가 이 교리 공부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삶을 미리 살고자 연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질서를 미리 이 지상에서 충분히 익히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도 조금씩 천국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이것으로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를 마치고, 다음은 5강, ‘신적 본질 그 자체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를 다루겠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3-06-21(D4)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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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1)’ (DLW.7, 2023/6/16)

 

 

하나님에 관하여’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the Divine), 즉 하나님(God)은 비록 편재(遍在,omnipresent)하셔서 지상 모든 사람과 천국 모든 천사, 그리고 천국 아래 모든 영과 함께하시지만, 그러나 공간(空間space)안에 계시는 건 아니라는 이 놀라운 사실은 단순한 자연적 사고(思考a merely natural idea)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영적 사고(a spiritual idea)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 사고로는 할 수 없는 이유는, 자연적 사고는 공간과 관련되기 때문인데, 이 공간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다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크고 작은 것들은 다 공간을 차지하는데, 모든 길이, 넓이, 높이를 갖는 것들은 공간을 차지합니다. 즉 모든 측정, 모양 및 형태를 가진 것들은 다 공간이라는 것을 차지하지요. 이것이 바로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사고로는 하나님의 편재를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 하는 걸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일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admit into i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이때는 비록 그가 자연적 사고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걸 이해할 수 있는데요, 이런 이유로, 무엇이든 영적인 걸 먼저 말하고, 그걸 가지고 이어서 나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 사고는 공간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는 게 없고(Spiritual idea derives nothing from space), 대신 모든 걸 상태(狀態state)로부터 나오게 합니다. 상태라는 것은 사랑, 생명, 지혜, 애정(affections) 및 거기서 나오는 기쁨 등, 일반적으로 선과 진리의 속성입니다. 즉 이런 것들을 다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정말 영적인 것들에 대한 사고(An idea of these things which is truly spiritual)는 공간하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이 사고는 공간적 사고(the ideas of space)보다 높아서 마치 하늘이 땅을 내려다보듯 그걸 내려다보는데요, 이 영적 사고는 이렇게 공간적 사고보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과 영들 역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리고 공간이라는 게 없으면 그 대상(objects)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천사들과 영들이 있는 영계에 지상의 공간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실제 공간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보이는 외관(appearances)일 뿐입니다. 이는 지상의 경우처럼 고정되거나 일정하게 정해진 게 아니기 때문인데, 영계의 공간은 길어지거나 짧아질 수 있고, 바뀌거나 다양하게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공간이라는 걸 이곳 자연계에서처럼 측량이라는 걸 해서 정할 수가 없는데요, 이런 건 그 어떤 자연적 사고로도(by any natural idea)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영적으로만(only by a spiritual idea)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영적으로 공간 간 거리(The spiritual idea of distances of space)는 선 간 거리(distances of good)나 진리 간 거리(distances of truth)와 같은데, 이는 선과 진리의 상태에 따른 친밀한 정도와 닮은 정도(affinities and likenesses)입니다. (DLW.7) That the Divine, that is, God, is not in space, although omnipresent and with every man in the world, and with every angel in heaven, and with every spirit under heaven, cannot be comprehended by a merely natural idea, but it can by a spiritual idea. It cannot be comprehended by a natural idea, because in the natural idea there is space; since it is formed out of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and in each and all of these, as seen by the eye, there is space. In the world, everything great and small is of space; everything long, broad, and high is of space; in short, every measure, figure, and form is of space. This is why it has been said that it cannot be comprehended by a merely natural idea that the Divine is not in space, when it is said that the Divine is everywhere. Still, by natural thought, a man may comprehend this, if only he admit into i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For this reason something shall first be said about spiritual idea, and thought therefrom. Spiritual idea derives nothing from space, but it derives its all from state. State is predicated of love, of life, of wisdom, of affections, of joys therefrom; in general, of good and of truth. An idea of these things which is truly spiritual has nothing in common with space; it is higher and looks down upon the ideas of space which are under it as heaven looks down upon the earth. But since angels and spirits see with eyes, just as men in the world do, and since objects cannot be seen except in space, therefore in the spiritual world where angels and spirits are, there appear to be spaces like the spaces on earth; yet they are not spaces, but appearances, since they are not fixed and constant, as spaces are on earth; for they can be lengthened or shortened; they can be changed or varied. Thus because they cannot be determined in that world by measure, they cannot be comprehended there by any natural idea, but only by a spiritual idea. The spiritual idea of distances of space is the same as of distances of good or distances of truth, which are affinities and likenesses according to states of goodness and truth. (DLW.7)

 

이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는데요, 먼저 사람의 사고가 그저 자연적이기만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그러나 공간 안에 계시는 건 아니라는 걸 도저히 이해 못 한다는 것과, 둘째, 그러나 천사들과 영들은 반대로 아주 명료하게 이해한다는 것, 셋째, 그 결과, 사람 역시 그가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 즉 영적 사고를 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생각하는 주체가 육(body)이 아니라 영(spirit)이기 때문이며, 영적 사고라는 것이 자연적이지가 않고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DLW.8) From this it may be seen that man is unable, by a merely natural idea, to comprehend that the Divine is everywhere, and yet not in space; but that angels and spirits comprehend this clearly; consequently that a man also may, provided he admits into his though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and this for the reason that it is not his body that thinks, but his spirit, thus not his natural, but his spiritual. (DLW.8)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걸 이해 못하는데요, 그 이유는 자연에 대한 그들의 사랑, 즉 그들의 사고를 자연에서 영적 빛으로 높이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로지 공간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공간 안에서만 하는 건 자연의 확장(the expanse of nature)에 대해서 하는 것과 같은 건데요, 예를 들면, 하나님의 편재에 대해 말하면, ‘아, 하나님은 우주만큼 크신 분인가 보다’로 이해하는, 그런 식이지요.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는 게 아니라는 이 사실이 먼저 전제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즉 이런 사실에 대한 지식과 나름의 퍼셉션(perception, 지각) 없이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 곧 사랑과 지혜에 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그래서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 편재하심, 전지하심, 전능하심, 무한하심과 영원하심(divine providence, omnipresence, omniscience, omnipotence, infinity and eternity) 등 연이어 다루게 될 주제들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DLW.9) But many fail to comprehend this because of their love of the natural, which makes them unwilling to raise the thoughts of their understanding above the natural into spiritual light; and those who are unwilling to do this can think only from space, even concerning God; and to think according to space concerning God is to think concerning the expanse of nature. This has to be premised, because without a knowledge and some perception that the Divine is not in space, nothing can be understood about the Divine life, which is love and wisdom, of which subjects this volume treats; and hence little, if anything, about divine providence, omnipresence, omniscience, omnipotence, infinity and eternity, which will be treated of in succession. (DLW.9)

 

2023-06-16(D6)-C.1.4.1,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God is not in Space)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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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세 번째 주제,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7, 8, 9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비록 천사들과 영들이 있는 영계에 지상의 공간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실제 공간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보이는 외관(appearances)일 뿐입니다

 

다음은 오늘 메인 글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먼저 좀 읽어야 하는 그런 글들인데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19장, ‘천국 안의 표상과 외관(Representatives and Appearances in Heaven), 그리고 22장, ‘천국의 공간(Space in Heaven)에서 부분 발췌했습니다만 꼭 각 장 전체를 다 읽어보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먼저 ‘외관(appearances)입니다.

 

천사들의 내면에 상응하는 모든 것은 그들의 내면을 그대로 그려내기 때문에 ‘표상(表象, representatives)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그것이 천사들 내면의 각 상태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외관(外觀, appearances)이라고 불린다. 그렇게 불리긴 해도 사실 천사들 눈에 보이는 것과 그들의 여타 감각에 지각되는 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지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생하며, 오히려 더 뚜렷하고 명료하며 사실적이다. (HH.175)

 

천국 안에 사물이 생기는 방식은 지상에 물질이 생기는 방식과 다르다. 천국의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오며, 천사들의 내면에 상응하여 형성된다. 천사들에게는 외면과 내면이 있다. 그들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과 신앙에, 따라서 의지와 사고력에 관계되어 있다. 의지와 사고력은 사랑과 신앙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외면은 내면에 상응한다. 외면적인 것이 내면에 상응한다는 것은 위 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와 13장, ‘천국은 지상의 모든 것과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the Earth)에서 설명했다. 이러한 사실은 천국의 열과 빛에 대한 기록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즉 천사들은 그들의 사랑의 속성에 상응하는 열을, 그들 지혜의 속성에 상응하는 빛을 지니는 것이다. (cf. 15장, ‘천국의 빛과 열(Light and Heat in Heaven)) 천사들의 감각에 느껴지는 다른 모든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HH.173)

 

다음은 ‘공간(空間, space)입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이 세상과 똑같이 장소와 공간 안에 위치한듯 보인다. 그러나 천사들은 장소나 공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HH.191)

 

영계에서의 장소변화는 모두 내면 상태의 변화(changes of state of the interiors)에 따라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장소변화는 바로 상태변화이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나는 주님에 의해 천국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곳을 여행한 것은 나의 영혼이었으며, 내 몸은 지상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천사들의 모든 이동도 이와 같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거리가 없으며, 거리가 없으므로 공간도 없다. 다만 공간 대신 상태와 그 변화가 있다. (HH.192)

 

장소변화가 이런 것이기 때문에, 가까운 것은 내면 상태가 비슷한 것이고, 먼 것은 내면 상태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가까이 있는 이들은 비슷한 상태에 있는 이들이고, 떨어져 있는 이들은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이들이다. 천국에서의 공간이란 오직 내면 상태에 상응하는 것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the external conditions corresponding to the internal states)이다. 세 천국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 그 각 천국 내의 공동체들 사이와 그 안의 개인들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역시 같은 원리로 지옥과 천국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지옥은 천국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HH.193)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천국에도 지상과 같이 공간이 있지만 그것이 공간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상태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천국의 공간은 이 세상 척도로 잴 수 없으며, 오직 그곳 천사들의 내면 상태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HH.198)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주께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사랑과 신앙의 정도에 맞게 임재하시기 때문이며, 주의 임재에 따라 모든 것이 가깝고 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의 임재가 천국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의 임재하심에 따라 천사들은 지혜가 생기고, 그들의 생각이 확산되며, 생각의 확산에 의해 천국의 모두는 서로 교통한다. 한마디로, 이로 인해 그들은 사람이 자연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HH.198)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다시 오늘의 메인 글들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2. ‘천사들과 영들 역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기 때문에

 

사람이 아직 지상에 있을 동안은 그 영은 육체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만, 사후, 즉 육체의 옷을 벗은 후에는, 이번에는 영체라는 옷을 입게 되지요. 육체에 눈이 있듯, 영체에도 영적 눈이 있습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자신의 영체에 속한 눈으로 천국 모든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천사들과 영들은 반대로 아주 명료하게 이해한다는 것, 그 결과, 사람 역시 그가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 즉 영적 사고를 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5) 하신 주님 말씀처럼, 주님 비추시는 사랑의 빛, 영적 빛에는 무슨 조건 같은 거 없습니다. 그냥 내가 마음을 열고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듯 주님을 바라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는 입류(入流, influx)에 의해 서서히 내 안에서 영적 사고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나의 내면의 첫 번째 단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4. ‘퍼셉션(perception, 지각)

 

다음은 퍼셉션에 대한 설명입니다.

 

오늘날은 퍼셉션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퍼셉션은 일종의 무슨 내적 느낌(a certain internal sensation) 같은 건데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으며, 어떤 게 선인지 진리인지를 아는 것으로, 태고 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가장 잘 알려졌던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것은 천사들한테 있어 가장 퍼펙트(perfect)해서, 그들은 이것으로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무엇이고,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은 무엇인지, 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상대방이 어떤 퀄러티(quality)의 소유자인지를 단지 그의 접근과 그가 가진 생각 한 토막으로 알아차리며 관련 지식을 얻습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지요. 많은 사람이 양심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그러니 퍼셉션에 대해서는 더 모릅니다. (AC.104)

 

영어 ‘perception’을 ‘지각’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퍼셉션’으로 적는 이유는, 우리말 ‘지각’ 하나로 다 담을 수 없는 더욱 많은 의미와 뉘앙스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용어가 몇 개 더 있는데요, 예를 들면, ‘affection’이라든가 ‘charity’같은 것입니다. 각각 ‘애정’, ‘인애’ 등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저는 좀 망설여져서 거의 대부분, ‘어펙션’, ‘체어리티’로 그대로 옮기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위 104번 글을 통해 살짝 느끼셨겠지만 이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엔 사라지고 없는 영적 능력 내지는 통찰력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내면이 열린 사람들한테는 이 퍼셉션이 나타나고 있어 특히 주님의 아르카나에 대한 이해에 없어서는 안 될 통찰력이요, 빛이지 싶습니다. 제가 매일 이 컴펜디움 작업 때마다 맨 먼저 하는 기도가 바로 이 퍼셉션 기도, 곧 주님의 빛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랍니다.

 

오늘 작업은 그 분량이 과연 역대급입니다. 이렇게 장편의 내용을 나누는 게 과연 유익이 있을까, 괜히 힘들게 해드리는 건 아닐까 좀 고민도 됩니다...

 

주님은 천국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국보다 크셔서 천국 밖, 즉 피조 세계 밖에 계십니다. 그러니 더더욱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지요. 주님이 천국에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건, 아까 살핀 것처럼 ‘표상’, ‘외관’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주님한테서나 주님의 말씀한테서나 주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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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2)(AC.8705, 2023/6/15)

 

 

하나님에 관하여’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 그 두 번째, 아래는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AC.8705

신인(神人)에 대한 무슨 신관(神觀, the idea of a Divine Man)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 하나님(the Divine Itself)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의 신관은 확실하지가 않으며, 그런 불확실한 신관은 사실 신관이 아닙니다. 또 무한하거나 무한하지는 않은데 희미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우주로부터 신관을 형성하는 사람의 경우도, 그런 신관은 자연 숭배자들의 신관(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과 결합, 결국 자연으로 귀결되는데, 그래서 이 역시 전혀 신관 아닌 게 되는데요,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올바른 신관이 아닌 경우, 하나님과 신앙을 통한, 혹은 사랑을 통한 어떠한 결합도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모든 결합은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며, 그 결합의 효력은 그 대상의 퀄러티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하나님 자체(the Divine Itself)는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If anyone without the idea of a Divine Man thinks of the Divine Itself, he thinks indeterminately, and an indeterminate idea is no idea; or he conceives an idea of the Divine from the visible universe without an end, or with an end in obscurity, which idea conjoins itself with 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 and also falls into nature, and thus becomes no idea.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re would not be any conjunction with the Divine through faith, nor through love. All conjunction requires an object, and the conjunction effected is according to the quality of the object. For this reason 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is called “a Mediator” and “an Intercessor,” but He mediates and intercedes with Himself. That the Divine Itself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John: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No one hath ever seen God; the only begotten Son,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set Him forth (John 1:18).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37) Ye have never heard the voice of the Father, nor seen His shape (John 5: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혹은 육(肉, the flesh)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해 불확실한, 즉 무슨 확실한 관념이 없는 반면, 자신이나 육이 아닌,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the Divine)을 생각하고 있으며, 고대의 현자들(the wise ancients)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한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으로 나타나실 때, 이런 이유로 신인(神人, a Divine Man), 즉 사람 모습을 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AC.8705) Nevertheless, what is remarkable, all who think from themselves or from the flesh about God, think of Him indeterminately, that is without any determinate idea; whereas they who think of God not from themselves, nor from the flesh, but from the spirit, think about Him determinately, that is, they present to themselves 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 So the angels in heaven think of the Divine, and so the wise ancients thought, to whom also, when the Divine Itself appeared, it appeared as a Divine Man; (AC.870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The heavenly arcana contained in the Holy Scripture or Word of the Lord unfolded, beginning with the book of Genesis, 1749-1756)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스라엘의 모든 송사를 모세 혼자 감당하느라 피차 고생하는 걸 보고 지혜로운 권면을 하는 장면인데요,

 

19절,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Now hear my voice, I will counsel thee, and God shall be with thee; be thou for the people with God, and bring thou the words unto God.)’ 중 ‘너는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에 대한 라틴 표현인 ‘Deus(God)’ 대신 ‘Divinum(The Divine)’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아마도 deus라는 단어에 내포된, 로마 신화의 다신 숭배적 뉘앙스를 피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라틴 버전을 우리말로 옮긴 김은경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2. 오늘 메인 본문의,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자연계의 인간은 영계와 자연계로 된 피조세계 밖에 계신 주님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습니다.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이 둘 사이를 잇는 그 무엇으로 오시는 방법뿐이며, 그것이 바로 생육신(生肉身) 하신 주님이시고, 나중에 성육신(聖肉身), 곧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 되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말하는 ‘중재자’이며, ‘중보자’이며, 한 분 주님 안에서 주님의 겉인 신적 인성과 주님의 속인 신성, 곧 여호와 하나님 간 커뮤니케이션이 곧 ‘중재’요, ‘중보’인 것입니다.

 

 

3. ‘하나님 자신 또는 신성 자체(the Divine Itself)는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아래는 주석 ‘Arcana Coelestia’ 8443번 글인데요, 이 글로 위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살짝 엿볼 수 있지 싶어 인용합니다.

 

신적 진리(Truth Divine)는 하나가 아닌, 여러 단계(degree, 등급)로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두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proceeds immediately from the Lord) 진리인데, 이는 천사들의 이해를 초월(above the angelic understanding)합니다. 셋째 단계에 있는 신적 진리는 가장 내적 천국, 즉 삼층천(the inmost or thir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는 인간은 전혀 깨달을 수 없는(cannot in the least be apprehended by) 진리입니다. 넷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중간, 즉 이층천(in the middle or secon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 역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neither is this intelligible to) 진리입니다. 다섯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가장 바깥, 즉 일층천(in the ultimate or first heaven)에 있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빛을 받은 사람은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는(can be perceived in some small measure by man provided he is enlightened) 진리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그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인간의 언어(human words)로는 표현할 수 없지요. 그러나 만일 인간의 머릿속 아이디어로 떠오르게 되면, ‘아, 그 경우가 이런 거구나!’ 지각, 믿는 역량이 생기게 되는 그런 진리입니다. 여섯 째, 마지막 단계의 신적 진리, 이 진리가 바로 인간에게 맞는, 인간이 수용, 지각할 수 있는(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 진리이며, 그래서 말씀의 겉 글자의 뜻이 이것으로 된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구름’(cloud)이 표상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구름 속 영광’(the glory in the cloud)의 표상 역시 바로 이 내적 진리들(the interior truths)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종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AC.8443)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24:15-16)

 

 

4.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네, 이것이 오늘의 결론이겠습니다.

 

이것으로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를 마치고, 다음은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다(God is not in Space)를 다루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2023-06-15(D5)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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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1)(DLW.11, 2023/6/13)

 

 

하나님에 관한 세 번째 주제,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DLW.11

모든 천국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이시라는 신관(神觀, idea of God) 말고 다른 건 없습니다. 이는 천국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모두 사람 형태(form like a man)를 띠고 있기 때문인데요, 천국에서 천국을 이루는 것은 천사들에게 있는 신성(神性, the Divine which is with the angels)이며, 천국에서는 생각(thought)이라는 것이 천국 형태(the form of heaven)를 따라 뻗어나가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천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면서 천국과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 역시 모두 그 자신 내적으로(interiorly), 즉 자신의 영으로 생각할 때는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그건 바로 이런 사실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모든 천사와 모든 영이 그 형태에 있어 완전한 사람인 것은 바로 이 사실, 곧 하나님은 사람이시다라는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이런 결과는 천국의 형태에서 오는데요, 천국은 가장 큰 데와 가장 작은 데 어디서도 그 모습이 같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사람과 같은 형태라는 것은 저서, ‘천국과 지옥’ 8, 9, 10, 11장(글 번호로는 HH.59-86)에서 보실 수 있으며, 생각이 천국 형태를 따라 뻗어나간다는 것도 관련 글(HH.203, 204)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창세기(1:26-27)를 통해 알려졌는데요,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DLW.11)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네 번째 주제,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11번 글입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은 모두 3부 63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를 참고하세요.

 

1부 천국(Part I: Heaven)(1-43)

2부 영들의 세계와 인간의 사후 상태(Part II: The World of Spirits and Man’s State after Death)(44-55)

3부 지옥(Part III: Hell)(56-63)

 

※ 아래는 위 메인 본문에서 참고하라는 8-11장 제목입니다.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59-67)

9장,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68-72)

10장,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73-77)

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78-86)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천국의 형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는 마치 우리가 3차원 공간인 자연계에 갇혀(?) 살기 때문에, 그리고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우리의 모든, 사물을 인식하는 체계, 사고방식 자체가 ‘시간과 공간’, 즉 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천국 모든 구성원 역시 그곳 형태에 기반한 모든 사고 및 인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천국 형태의 출발점, 곧 천국이 비롯된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형태를 따라 주님의 모든 신성이 온 피조 세계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의 사람인 것도, 그리고 이런 사람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천국 수많은 사회도, 더 나아가 그런 사회 전체로 이루어지는 천국 전체의 모습도 주님 앞에는 한 사람 모습인 것은 곧 주님이 사람 모습을 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비(arcana)를 우리는 지금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어제 나눈 HH.59번 글과 비슷한 글인데요, 천국이 사람 모습이라는, 천국 형태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글입니다.

 

천국이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임을 밝힌 이유는, 이것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앞으로 천국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천국의 형상에 대한 분명한 개념도 가질 수 없고, 주님과 천국 간의 결합이나 천국과 사람 간의 결합, 또 영계에서 자연계로 흘러드는 입류(入流, influx)나 상응(相應, correspondence)에 대한 것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앞으로 이 모든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그 전제로 천국의 형태를 미리 설명한 것이다. (HH.67)

 

 

2.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은 다들 꼭 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에 그래도 가장 포퓰러한 책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의 저작들에 대한 입문서라 해도 괜찮은 책인데요,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을 접하신 분들은 그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 읽는 순간, 마치 개안(開眼)을 하듯 영이 열리며, 그 모든 내용을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렇게 쭈욱쭉 흡수하시는 반면, 또 어떤 분들은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고 하셔요... 참고로, 저는 전자의 경우였고요, 후자와 같은 경우는 참... 저로서는 도저히 그 이유와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이에 관한 스베덴보리가 남긴 글을 읽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아래는 위 책을 구매할 수 있는 링크입니다. 그냥 편의상 알려드리는 것이고요, 저는 이 서점과 무슨 관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https://bit.ly/45XE1jr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spiritual-world.com

 

 

3. 다음은 위 메인 본문에서 참고하라고 한, ‘생각이 천국 형태를 따라 뻗어나간다’는 것은, ‘천국과 지옥’ 23장, ‘천국의 형태가 구성원 간의 관계와 교통을 결정한다(The Form of Heaven That Determines Affiliations and Communications There) 203번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천국 형태를 띠는 정도만큼 천국에 있고, 사실상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 된다.(HH.57) 따라서 그 정도만큼 지성과 지혜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개인의 사고력(understanding)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 그리고 의지(will)에서 나오는 모든 애정은 천국의 형태를 따라 놀라울 정도로 두루 퍼져나가 그곳 공동체들(societies)에 전달되며, 반대로 그 공동체들의 모든 생각과 애정도 개인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감정은 모두 자기 안에 있고 밖으로 뻗어나가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들이 보기에 생각은 멀리서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우리 시각이 멀리 있는 물체에 가 닿아 거기 보이는 형체에 초점을 맞추듯이, 우리 내적 시각(the interior sight)인 사고력의 시각도 영계에서 그렇게 뻗어나간다... (HH.203)

 

 

일곱 배로 밝은 빛 가운데 거니시는 하루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023-06-13(D3)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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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절,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속뜻,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겉 사람 안에 주님은 아주 부드러운 것들로 시작, 하나하나 심으시는데, 그것을 각각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로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은 이것들을 가지고 선도 행하고 진리를 말하지만, 그것을 자기가 하는 줄 압니다.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는 한, 아직 그는 참 신앙, 곧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어서 그를 못 움직이는 식물로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조차 기뻐하십니다. 그는 머잖아 움직이는 동물, 곧 참된 애정으로 신앙의 생명(생활)을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은 이렇게 ‘저녁’과 ‘아침’의 반복이지만 점진적으로 우상향(右上向), 결국 거듭남의 종점인 ‘안식’ 상태에 들어갈 것입니다.

 

 

AC.29

‘땅’(the earth), 즉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천적(天的, celestial)인 씨앗을 받아 뭔가 선하고 참된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면, 이제 주님은 먼저 무슨 부드러운 것, 곧 ‘풀’(the tender herb)을, 그리고 뭔가 좀 더 유용한, 그 안에 씨를 맺을 수 있는 것, 곧 ‘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를, 그리고 끝으로 열매까지 맺을 수 있는 어떤 선한 것, 곧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를 각기 종류대로 나게 하십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처음 상태, 퀄러티(quality)는 다음과 같은데요,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로 압니다.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건데도 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렇게 선과 진리가 자기로 말미암는 줄로 아는 한, 그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생활)(the life of true faith) 가운데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그는 나중에는 이런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이런 게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아직은 믿을 수 없는, 그는 이제 겨우 신앙의 생명(생활)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단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를 여기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걸로,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상태에서는 움직이는(animate) 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When the “earth,” or man, 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 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 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 which is called the “tender herb”; then something more useful, 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 and is called the “herb yielding seed”; 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 and is calle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 and the truth which he speaks, to be from himself, 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 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 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 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 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 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 by animate things.

 

[2] 주님이 복음서 여러 본문에서 마지못해 친히 언급하신 것처럼, 주님은 씨 뿌리는 농부요, ‘씨’(the seed)는 그분의 말씀이고, ‘땅’(the earth)은 사람입니다. (마13:19-24, 37-39; 막4:14-21; 눅8:11-16) The Lord is he who sows, the “seed” is his Word, and the “earth” is man, as he himself has deigned to declare (Matt. 13:19–24, 37–39; Mark 4:14–21; Luke 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13:19-24)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13:37-39)

 

같은 취지로, 주님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태셨습니다. To the same purport he gives this description: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4:26-28) 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 (Mark 4:26–28)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일반적으로는 천국 전체(the universal heaven)를, 그보다 덜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참된 교회(the true church)를, 그리고 특별하게는 참된 신앙(true faith)의 사람, 즉 신앙생활을 통해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또한 ‘천국’(heaven)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그의 안에 천국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안에 있기 때문인데요, 주님이 친히 이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입니다. By the “kingdom of God,” in the universal sense, is meant the universal heaven; in a sense less universal, the true church of the Lord; and in a particular sense, everyone who is of true faith, 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 and likewise the “kingdom of 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Luke 17:20–21)

 

이것은 사람의 거듭남 연속 단계 중 세 번째 상태인데요, 이 상태는 뉘우침의 상태, 곧 그늘에서 빛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하는 상태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하신 것입니다.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 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 or from evening to morning; wherefore it is said (verse 1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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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속뜻,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로 흘러드는 모든 지식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이 지식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들어와 머무르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귀하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이 모든 지식을 ‘물’이라 하며, 이 물이 모인 것을 ‘바다’라 합니다. ‘뭍’은 ‘땅’, 곧 겉 사람이며, 이제 주님은 여기에 무언가를 담으실 것입니다.

 

 

AC.28

‘물’(waters)을 가지고는 지식들(knowledges, 체험적 지식 및 학문적 지식, 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그리고 그 결과, ‘바다’(seas)를 가지고는 그런 지식들을 한데 모아놓은 걸 의미하는 것이 말씀에서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이사야입니다. 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 As in Isaiah: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그리고 이사야 다른 데서는 지식들의 결핍(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을 다루면서 And in the same prophet, where 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 is treated of: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사19:5-6) 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에서는, 새로운 교회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In Haggai, speaking of a new church: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2:6-7)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그리고 스가랴에서는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과 관련하여 And concerning man in the process of regeneration, in Zechariah: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14:7-8) 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시편 또한 지금은 황폐한 상태이나 앞으로는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 David also, describing a vastated man who is to be regenerated and who will worship the Lord: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시69:33-34) 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스가랴를 보면 ‘(the earth)은 일종의 리시피언트(recipient, 그릇, 用器)로 나옵니다. That the “earth” signifies a recipient, appears from Zechariah: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슥12:1) 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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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3)(TCR.15, 2023/6/12)

 

 

하나님에 관한 두 번째 주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오늘은 세 번째 마지막 시간입니다.

 

TCR.15

(8) 한 분이 아닌 여러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한테는 교회와 관련된 일에서 일관성(coherence)이라는 걸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With men who acknowledge several Gods instead of one there is no coherence in the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믿음으로 한 분 하나님을 인정하고, 마음으로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지상에 있는 성도들하고의 커뮤니언(communion, 교감, 같은 종교를 믿는 단체)과 하늘에 있는 천사들하고의 커뮤니언, 둘 다 가운데 있습니다. 이들 그룹들을 일컬어 ‘커뮤니언들’이라 하는데요, 실제로 이들은 서로를 향해 커뮤니언들입니다. 이들 커뮤니언들이 한 분 하나님 안에 있고, 한 분 하나님이 이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이들은 천사들의 천국 전체와,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그곳 모든, 그리고 개별 주민들하고의 결합가운데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한 아버지의 자녀들, 그리고 후손들과 같기 때문인데, 그 성향이나 매너, 그리고 특징들이 서로 비슷, 이걸 통해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의 천국은 그 소사이어티들(societies, 사회, 집단, 회)에 있어 선에 대한 사랑의 모든 다양함에 따라 하모니를 이루며 배열되어 있는데요, 이들 다양함들의 중심엔 하나의 유니버설한 사랑(one universal love),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love to God)이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한 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마음으로 예배하는 모든 사람이 태어나는데요, 이 한 분 하나님이 바로 이 온 우주의 창조주(the creator of the universe)이기도 하시며, 구속자요 거듭나게 하시는 분(the redeemer and regenerator)이기도 하십니다. (TCR.15) He who in his belief acknowledges and in his heart worships one God is both in the communion of the saints on earth and in the communion of the angels in heaven. These are called “communions,” and are communions, because such are in the one God and the one God is in them. Moreover, they are in conjunction with the entire angelic heaven, and, I might venture to say, with all and each of its inhabitants, for they are all like the children and descendants of one father, whose dispositions, manners, and features are similar, whereby they recognize each other. The angelic heaven is harmoniously arranged in societies in accordance with all the varieties of the love of good, and these varieties center in one universal love, which is love to God; from which love all are born who in belief acknowledge and in heart worship the one God, who is both the creator of the universe and the redeemer and regenerator. (TCR.1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Containing the universal theology of the new church foretold by the Lord in Daniel 7:13–14 and Revelation 21:1–2, 1771) 2장, ‘창조주 하나님(God the Creator)의 첫 번째 주제, ‘하나님의 유일성(The unity of God)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15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이 일종의 신학적 공리(公理, axiom)가 비록 이 지상에서는 그다지 와닿지도, 실감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천국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1758) 8장, ‘천국 전체는 모두 합해서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에 나오는, 글 번호 59번 글인데요, 왜 그런가 하는 이유를 나름 유추해 볼 수 있는 그런 글이어서 소개합니다.

 

천국의 총합(heaven in its whole complex)이 한 사람의 모양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arcanum)지만, 천국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과 그에 관한 세부 사항들을 아는 것이 천사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angels)을 이루는 핵심이다. 천사들이 이 사실을 보편 원리(general principle)로 삼고 있지 않으면 거기 의존하는 많은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공동체(societies)도 각각 사람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을 ‘가장 큰 신적 사람’(the greatest man and the Divine man)이라고 부른다. 신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다. (HH.59)

 

 

2. ‘천사들의 천국 전체와 결합

 

이 천사와의 결합 관련, 사실은 ‘연합’과 ‘결합’을 엄밀히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어 다음 글을 소개합니다. 이 글 역시 ‘천국과 지옥’ 34장, ‘천국과 사람과의 말씀에 의한 결합(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 by Means of the Word) 304번 글입니다.

 

사람은 주님과는 연결(connection)되고 결합(conjunction)되도록 창조되었으나 천사와는 단지 연합(affiliation)만 하도록 되어 있다. 사람이 천사와 연합은 하나 결합은 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은 마음의 내면성에 있어서는 천사와 똑같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의지(will)와 사고력, 즉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에 있어서 천사와 같다. 따라서 만일 사람이 신적 질서(the Divine order)에 따라 살면 그는 사후에 천사가 되고, 천사와 똑같이 지혜로워진다. 그러므로 ‘사람과 천국과의 결합’(the conjunction of man with heaven)이라고 할 때는, 사람은 주님과의 결합과 천사와의 연합(conjunction with the Lord and affiliation with the angels)을 의미한다. 천국은 주의 신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천사의 자아(the angels’ own [proprium])에서 비롯된 것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HH.304)

 

 

3. ‘선에 대한 사랑의 모든 다양함(all the varieties of the love of good)

 

천국은 무슨 한 군데 평평한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두 나라, 세 천국으로 되어 있으며, 각 천국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규모 사회로 되어 있고, 각 사회마다 또 많게는 수십만, 적게는 몇 명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다양함은 곧 주님의 선의 다양함인데요, 위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며, 마치 밤하늘의 별들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이 이번에는 또 어떤 통일적 하모니까지 이룬다고 하니... 저, 개인적으로는 한 가지 소원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에게도 스베덴보리처럼 영계 체험을 허락하여 주셨으면 하는... ㅎㅎㅎ

 

이것으로 2강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를 마치고, 다음은 3강, ‘하나님이 곧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를 두 번에 걸쳐 다루겠습니다.

 

수학에서도 공리(公理, axiom, 특별히 무슨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진리)의 토대가 참 중요한 것처럼, 지금 다루는 이런 신앙의 공리들 역시 우리 신앙의 토대와 기초를 든든, 튼튼, 굳게 하여 줄줄 믿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3-06-12(D2)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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