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AC.60

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고만 하시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고 하시는 이유는, 지금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마치 서로 결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AC.61

신앙의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 사랑, 이웃 사랑(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사람의 이해에, 후자는 사람의 의지에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 조금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머리 신앙은 영적이요, 가슴 신앙은 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열의 문제라기보다는 태생적 특성에 가깝지만, 하여튼 주님은 천적 천사들은 가까이, 영적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 다음으로 가까이하십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특성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가급적 너무 교리, 교리 하지 마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AC.62

사람의 거듭남과 관련하여 그 시기와 상태를 일반적, 그리고 구체적으로 여섯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 합니다. 전혀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서서히 그는 먼저 뭔가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섯째 날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 여섯째 날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됩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즉 영적인 사람은 형상, 곧 주님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며, 천적인 사람은 그 영적인 사람 안에 담기는 주님이십니다.

 

 

AC.63

그를 위해 악과 거짓을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시는 한편, 주님은 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서 확실하게 하십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 다음은 이 ‘주님이 나를 위해 대신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심’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책, ‘천국과 지옥’ 577번 글(김은경 역)입니다.

 

천사에게 지혜와 지성이 있는 것처럼 지옥 영들에게는 그만큼의 악의와 교활함이 있다. 사람의 영은 몸을 벗어나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적 영이 그의 선 안에 있다면, 지옥적 영은 그의 악 안에 있다. 앞에서 자주 설명했듯이 모든 영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인 것은 영이 그 자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적 영은 그의 선에서, 지옥적 영은 그의 악에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악 자체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 악에 포함된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In the same degree in which angels have wisdom and intelligence infernal spirits have malice and cunning; for the case is the same, since the spirit of man when released from the body is in his good or in his evil—if an angelic spirit in his good, and if an infernal spirit in his evil. Every spirit is his own good or his own evil because he is his own love, as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Therefore as an angelic spirit thinks, wills, speaks, and acts, from his good, an infernal spirit does this from his evil; and to think, will, speak, and act from evil itself, is to think, will, speak, and act from all things included in the evil.

 

[2] 사람이 몸을 입고 살 동안은 그렇지 않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받는 법의 제재와 이득, 명성, 평판을 얻을 희망 또는 그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의 제재로 그 영의 악이 억눌려 있었고, 따라서 그 악의 참모습이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는 사람의 영에 있는 악은 그가 세상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꾸미는 외적인 정직함, 올바름,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 등으로 포장되고 가려져 있다. 이런 가면 뒤에서 그 악은 너무도 단단히 밀폐되고 숨겨져 있어 그 자신도 자기 영이 그렇게 엄청난 악의와 교활함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즉 사후에 영이 되면 드러날 자기의 본성이 악마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So long as man lived in the body it was different, since the evil of the spirit was then under the restraints that every man feels from the law, from hope of gain, from honor, from reputation, and from the fear of losing these; and therefore the evil of his spirit could not then burst forth and show what it was in itself. Moreover, the evil of the spirit of man then lay wrapped up and veiled in outward probity, honesty, justice, and affection for truth and good, which such a man professes and counterfeits for the sake of the world; and under these semblances the evil has lain so concealed and obscured that he himself scarcely knew that his spirit contained so much malice and craftiness, that is, that in himself he was such a devil as he becomes after death, when his spirit comes into itself and into its own nature.

 

[3] 사후에는 그런 악의가 스스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악하다. 악은 하나에서 수천 가지 종류가 파생하는데 그 중에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나는 내게 허락된 수많은 경험으로 그 악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관찰할 수 있었다. 주께서 내게 영으로는 영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몸으로는 자연계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은 너무도 엄청나서 그 천분의 일을 기록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증언한다. 그 악이 너무도 커서, 만일 사람이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결코 지옥에서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온 천사들과 지옥에서 온 영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292, 293) 그러나 사람이 신성을 인정하고 신앙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께서는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지옥 영들에게 돌아서며, 그렇게 되면 그의 영은 자기와 동질의 악의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Such malice then manifests itself as exceeds all belief. There are thousands of evils that then burst forth from evil itself, among which are such as cannot be described in the words of any language. What they are has been granted me to know and also to perceive by much experience, since it has been granted me by the Lord to be in the spiritual world in respect to my spirit and at the same time in the natural world in respect to my body. This I can testify, that their malice is so great that it is hardly possible to describe even a thousandth part of it; and so great that if man were not protected by the Lord he could never be rescued from hell; for with every man there are spirits from hell as well as angels from heaven (see above, n. 292, 293); and yet the Lord cannot protect man unless he acknowledges the Divine and lives a life of faith and charity; for otherwise man turns himself away from the Lord and turns himself to infernal spirits, and thus his spirit becomes imbued with a malice like theirs.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그가 달라붙는 악에서, 그리고 지옥의 영들과 교류함으로써 스스로 끌어들인다고 할 수 있는 악에서 떼어내신다. 사람이 신성을 부인하면 양심의 내적 제재를 받지 못하는데, 사람이 양심의 내적 제재로 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외적 제재로 떼어내신다. 외적 제재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법에 대한 두려움과 이득, 명성, 평판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즐거움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악에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영적 선으로 인도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영적 선을 대하면 그 즉시 남을 꾀고 속이려고 선함과 정직함과 올바름을 가장함으로써 그 선을 술책과 교활함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교활함은 그의 영에 들어있는 악과 결탁하여 그 특성을 주입함으로써 악에 형태를 부여한다. Nevertheless, man is continually withdrawn by the Lord from the evils that he attaches and as it were attracts to himself by his affiliation with infernal spirits. If he is not withdrawn by the internal bonds of conscience, which he fails to receive if he denies a Divine, he is nevertheless withdrawn by external bonds, which are, as said above, fears in respect to the law and its penalties, and fears of the loss of gain and the deprivation of honor and reputation. In fact, such a man may be withdrawn from evils by means of the delights of his love and through fear of the loss or deprivation of those delights; but he cannot be led thereby into spiritual goods. For as soon as such a man is led into these he begins to give his thought to pretenses and devices by simulating or counterfeiting what is good, honest, and just, for the purpose of persuading and thus deceiving. Such cunning adjoins itself to the evil of his spirit and gives form to it, causing his evil to be of the same nature as itself.

 

전투의 때는 주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는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신 작품(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 합니다.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8)

 

사랑이 그의 모든 행위의 원리가 될 때까지, 이때 전투가 그치는데요,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이 일이 아주 순조롭게 되어 드디어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이 일어날 때가 바로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하시는 때입니다. 이때 주님은 그를 주님의 모양대로(as his likeness)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 거듭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릇, 천적인 사람은 내용입니다. 그릇보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듯 주님의 목표, 즉 거듭남의 최종목표는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적인 사람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요, 안식일입니다.

 

※ 천적인 사람은 가슴 신앙이며, 매사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의 동기가 주님 사랑인 상태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도하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 프란체스코 앞에 ‘(聖)자를 붙여 부르는 것은 단순히 관례를 따른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聖), 즉 ‘거룩하신 분(The Holy)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시며, 그래서 이 칭호는 오직 주님에게만 사용해야 하는 칭호입니다.

 

※ 은성출판사(http://eunsungpub.co.kr/)의 엄두섭 저, ‘성 프란치스코’를 꼭 읽어 보시기 바라며, 읽으신 분들도 거듭거듭 계속 읽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책을 읽는 우리를 깊은 신앙, 무거운 영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은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천국, 혹은 천적인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곳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본성 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악을 상대하실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 안에 와 있는 지옥의 영들을 상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는 주님과 악한 영들 간 싸움입니다.

 

※ 우리가 거듭남의 최종단계에서 이제는 의지로도 주님을 사랑하여 매사에 주님 편에 서면 악한 영들은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만 우리를 포기하고 떠납니다.

 

※ 우리 안에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게 되어 드디어 싸움이 끝나고 쉼이 찾아오는데, 이 쉼은 주님의 쉼입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이 싸워오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주님이 쉬시는 걸 표상한 것이며,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을 가리켜 ‘내 안식일’이라 하신 것입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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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AC.58

동일인, 곧 영적인 사람의 자연적 음식을 여기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의 자연적 속성을 ‘땅의 모든 짐승’(the wild animal of the earth)과 ‘하늘의 모든 새’(the fowl of the heavens)를 가지고 상징하고 있는데요, 그런 그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면, 그의 자연적, 영적 양식 둘 다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The natural meat of the same man is here described. His natural is signified by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by the “fowl of the heavens,” to which there are given for food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Both his natural and his spiritual food are thus described in David: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시104:14) Jehovah causeth the grass to grow for the beast, and herb for the service of man, that he may bring forth bread out of the earth, (Ps. 104:14)

 

여기서 ‘가축’(beast)이라는 말이 같은 시편 앞 구절들인 11, 12절에서 언급한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둘 다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where the term “beast” is used to express both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he fowl of the heavens which are mentioned in verses 11 and 12 of the same psalm.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시104:11-12)  

 

 

AC.59

여기 자연적인 사람의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reason why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only are here described as food for the natural man is this.

 

※ 자연적인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자연적인 속성, 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when man is being made spiritual, he is continually engaged in combat, on which account the church of the Lord is called “militant”; for before regeneration cupidities have the dominion, because the whole man is composed of mere cupidities and the falsities thence derived.

 

※ 그러므로 교회 안에 별별 사람이 다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아주 정상이며, 교인 하나하나, 성도 하나하나를 이런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모두 안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 거듭남이란 악과 거짓의 사람이 선과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태생적으로 지옥에 적합한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 사람은 의지와 이해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그리고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은 두 종류의 천국과 지옥에서 파송된 두 종류의 천사들과 악한 영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최소 두 명의 천사와 두 명의 악한 영들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이해로 매 순간 일평생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하여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이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During regeneration these cupidities and falsities cannot be instantaneously abolished, for this would be to destroy the whole man, such being the only life which he has acquired; and therefore evil spirits are suffered to continue with him for a long time, that they may excite his cupidities, and that these may thus be loosened, in innumerable ways, eve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an be inclined by the Lord to good, and the man be thus reformed.

 

※ 그래서 인생 막장,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거기서 회심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지요. 악한 영들이 아무리 끈질겨도 그들이 우리 주님의 한결같으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무슨 의로운 습관을 결심했다가도 반나절이 못되어 또 넘어지더라도, 그리고 똑같은 결심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더라도,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이제는 더 이상 못 믿겠다 하더라도 이런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을 믿고 다시 일어서며, 다시 결심, 다시 정진하는 태도, 자세가 필요합니다.

 

※ 주님은 우리와 달리 우리 안의 악을 한방에 어떻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조차 우리의 생명이심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놀라우심은 그 악조차 우리를 돌이키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 이 이야기는 저를 비롯,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방황하는 자녀를 둔 모든 부모가, 그러나 그 자녀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끝까지 갈 수 있는, 즉 이 아이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것, 즉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 오직 이런 것들만 선하고 진실한데요, 그것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주아주 극도로 증오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에 비교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달리 주님은 그에게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교되는 양식도 주시는데요, 이는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이며, 주님은 이 양식을 간격을 두고 사람에게 주십니다. In the time of combat, the evil spirits, who bear the utmost hatred against all that is good and true, that is, against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which things alone are good and true, because they have eternal life in them—leave the man nothing else for food but what is compared to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nevertheless the Lord gives him also a food which is compared to the herb bearing seed, and to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states of tranquillity and peace, with their joys and delights; and this food the Lord gives the man at intervals.

 

※ 여기서 우리는 악한 영들의 정체와 그들이 주는 달콤한 것의 그 숨은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결국은 보잘 것 없는 ‘채소와 푸른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곧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있어 우리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는, 그래서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 들게 하시는 분임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 즉 악한 영들이 주는 것은 짝퉁, 모조품, 가짜인 반면, 오직 주님이 주시는 것만이 진품, 정품, 진짜라는 것입니다.  

 

[2] 주님이 사람을 매 순간, 아니 정말 눈 깜빡할 순간이라도 막아주지 않으셨으면, 인간은 즉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영들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 및 신앙과 관련된 것들을 향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지독한 증오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지난 수년간, (저는 분명히 몸 안에 있었음에도) 저세상의 영들, 특히 아주 못된 영들과 본의 아니게 어울려 왔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저는 수천의 영들에 둘러싸이기도 했고, 그들은 저를 향해 독을 뱉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은 저를 향해 우글거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제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제가 주님의 보호 아래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해 경험으로, 저는 정말 영들의 세계와 그 본성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현재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영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왜 반드시 견뎌야만 하는지 하는, 영적 전투에 대하여 정말 철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주제,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도 전혀 의심 없이 믿기에는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도저히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이셨는데요, 그것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루겠습니다. Unless the Lord defended man every moment, yea, even the smallest part of every moment, he would instantly perish, in consequence of the indescribably intense and mortal hatred which prevails in the world of spirits against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e certainty of this fact I can affirm, having been now for some years (notwithstanding my remaining in the body) associated with spirits in the other life, even with the worst of them, and I have sometimes been surrounded by thousands, to whom it was permitted to spit forth their venom, and infest me by all possible methods, yet without their being able to hurt a single hair of my head, so secure was I under the Lord’s protection. From so many years’ experience I have been thoroughly instructed concerning the world of spirits and its nature, as well as concerning the combat which those being regenerated must needs endure, in order to attain the happiness of eternal life. But as no one can be so well instructed in such subjects by a general description as to believe them with an undoubting faith, the particulars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related in the following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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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AC.56

천적인 사람(天的, The celestial man)은 천적인 것들(celestial things)로만 기뻐합니다. 그것들이 그의 생명에 맞기 때문인데, 이르기를 천적인 양식(celestial food)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사람(靈的, The spiritual man)은 영적인 것들(spiritual things)로 기뻐합니다. 그 이유 역시 그것들이 그의 생명과 맞기 때문이며, 이번엔 영적인 양식(spiritual food)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사람(自然的, The natural man)은 자연적인 것들(natural things)로 기뻐합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맞기 때문인데, 이르기를 양식(food)이라고 하며, 주로 기억-지식들로 구성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 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 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

 

※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은 그 출처가 세상인 지식을 말하며, 학습을 통해서 습득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영적인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양식을 표상들(表象, representatives), 즉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열매 맺는 나무’는 보통은 ‘씨 가진 나무’(the tree yielding seed)라고도 하지요. 그의 자연적 양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 bearing seed,” and by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 yielding seed.” 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AC.57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는 쓰임새(use)와 관련된 모든 진리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는 신앙의 선인데, 여기서 ‘열매’(fruit)는 주께서 천적인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씨 가진 나무’(seed producing fruit)는 영적인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래서 ‘씨 가진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하시는 것입니다. 천적 양식을 나무의 열매라 하는 것은 다음 장을 보면 분명한데요, 다음 장에서는 천적인 사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스겔에서 하신 주님 말씀들만 인용합니다. The “herb bearing seed” is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 the “tree in which is fruit” is the good of faith; “fruit” is what the Lord gives to the celestial man, but “seed producing fruit” is what he gives to the spiritual man; and therefore it is said,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That celestial food is called fruit from a tree,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In confirmation of this we will here cite only these words of the Lord from Ezekiel: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겔47:12)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th up every tree of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2)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는 ‘성소’(the sanctuary)이신 주님의 생명과 자비를 의미합니다. ‘열매’(Fruit)는 그들의 양식이 될 지혜(wisdom)이며, ‘잎사귀’(the leaf)은 ‘약재료’(medicine)라는 이름으로 쓰임 받게 될 지성(intelligence)입니다. 한편, 영적 양식을 ‘풀’(herb)이라고 하는 건 시편을 보면 나옵니다. 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 signify the life and mercy of the Lord, who is the “sanctuary.” “Fruit” is wisdom, which shall be food for them; the “leaf” is intelligence, which shall be for their use, and this use is called “medicine.” But that spiritual food is called “herb,” appears from David: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1-2)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thou makest me to lie down in pastures of herb. (Ps. 23:1–2)

 

 

※ 다음은 ‘쓰임새(use)와 관련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402번 글입니다.

 

쓰임새 안에 천국의 모든 기쁨이 모이며, 거기에 다 있습니다. 쓰임새는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의 선인데 천사들이 바로 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천사는 그의 쓰임새 만큼, 그리고 쓰임새에 대한 애정 만큼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In uses all the delights of heaven are brought together and are present, because uses are the goods of love and charity in which angels are; therefore everyone has delights that are in accord with his uses, and in the degree of his affection for 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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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AC.55

태고인들(太古人, the most ancient people)은 이해와 의지, 또는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을 결혼이라고 했는데요, 그래서 이 결혼의 결과, 태어나는 모든 선을 ‘생육’(fruitfulness), 모든 진리를 ‘번성’(multiplications)이라고 하였습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 실제로 천국 역시 남녀의 결혼이 있지만 천국에서는 지상처럼 무슨 ‘아이를 낳는’ 그런 결혼이 아닌, 선과 진리가 생겨나는 전혀 다른 결혼입니다.

 

그래서 선지서들에서도 그렇게 부르는데요, 예를 들면, 에스겔입니다.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겔36:11-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후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먼저 진리에 속한, ‘수가 많고’(multiplication)가 언급되고, 그 다음에 선에 속한, ‘번성하게’(fruitfulness)가 언급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닌, 앞으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 의지와, 또는 신앙이 사랑과 연합할 때, 주님은 이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사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때 열리는 열매들이 진리에 속하였으면 ‘아들들’(sons)이라 하고, 선에 속하였으면 ‘딸들’(daughters)이라 합니다. 이런 표현은 말씀에 아주 자주 나옵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 그래서 저는 제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며느리와 손녀, 더 나아가 형제와 처가, 사돈 및 친구, 친지 등을 주님의 선과 진리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니 점점 핏줄에 대한 무슨 집착(?) 같은 것을 내려놓게 되면서, 이들을 주께 맡기기가 한결 쉬워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12:50)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이 점점 더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3] 진리와 선이 많아졌을 때, 땅은 ‘충만한’(replenished) 상태, 가득 채워진 상태가 됩니다. 주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실 때, 즉 사람을 돌보실 때는 선과 진리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A 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기 전에 갖고 있던 선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씨보다 작은 것’(the least of all seeds)입니다. 그 이유는, 그때는 그가 자기 스스로 그 선을 행하는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사람의 것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가 거듭남의 어떤 상태 가운데 있게 되면서 그의 안에 뭔가 선한 게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작습니다. 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결국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으로써 점점 자라 ‘풀’(herb)이 되더니, 마침내 결합이 완성되면서 ‘나무’(a tree)가 되어, ‘공중의 새들’(the birds of the heavens)이 ‘그 가지에 깃들게’(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됩니다. ‘공중의 새들’은 진리들이나 지적인 것들을, ‘그 가지에 깃들게’는 기억-지식들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영적일 때뿐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는 동안은 그는 일종의 전투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이르시기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하신 것입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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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절,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C.53

여기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자기 형상’(his image)은 신앙을,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은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전자인 신앙은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하는 반면, 후자인 사랑은 의지(the will)에 속하는데요,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뒤따라 나오는 거지만, 천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앞서 나가는 것입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의미하는 것, 그 속뜻(the internal sense)을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를 잃어버리면서, 이 비의(秘義, arcanum, 단수, 복수는 arcana) 역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그들 행복과 기쁨의 최고의 원천이었으며, 결혼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지각하고자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만 있으면 모두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 가령, 햇볕, 곧 해의 빛과 열의 융합을 결혼으로, 자녀들 및 모든 동식물의 자식 및 열매들을 결혼의 결과로, 사람을 영과 육의 결혼으로, 삼위일체를 결혼으로 등등, 가능한 모든 것을 다 ‘결혼’으로 보고 설명할 수 있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내적(內的, internal)이었기 때문에, 오직 내적인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육안으로는 그저 볼 뿐, 그러나 이게 뭘 표현하는 걸까 그 영적, 천적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 이는 참 부러운 특성입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말이지요. 지금 사람들은 너무나 외적(external)이요, 겉, 감각의 사람들이어서 영적, 천적인 주의 말씀들도 오로지 감각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가령, 신령한 사람은 방언도 유창하고 세련되게 해야 하며, 안수기도를 하면 바로 눈앞에서 병이 척척 낫고, 각종 장애도 바로 나아야 하며, 예언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 받기를 참 좋아하며, ‘’의 참 의미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무지하며, 내적(internal)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예 이해조차 못 하면서도 자기는 믿는 사람이요,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자기는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므로 죽으면 천당 간다고 믿는 그런 현실입니다.

 

외적인 것들은 그들에겐 그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내적인 것들로 돌리게 하는, 그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내적인 것들에서 천적인 것들로, 그렇게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자기들 결혼의 행복의 근원일 것이라고 지각한 천국의 결혼에까지 연결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하였고, 이 둘이 하나로 움직일 때, 그걸 결혼이라 하였습니다.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 즉, 태고교회는 어떤 사람의 말과 행실이 일치할 때, 그는 이해와 의지가 결혼한 상태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관습이 된 말들이 나왔는데요, 선에 관한 교회의 애정으로부터 교회 그 자체를 가리켜 ‘딸’(daughter), ‘처녀’(virgin), 이 경우, ‘시온의 처녀’(the 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the virgin of Jerusalem) 등으로 묘사했지요, 그리고 또한 ‘아내’(wife)라 하였습니다. 이들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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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절,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AC.49

주님은 태고 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한 사람(a man)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멤버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깊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나눌 때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이 ‘사람들’(me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중,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고 지각된(perceived) 것들에 한해서만 사용했습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 처음에 주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시는 걸 본 태고 교회 사람들은 이후 자신들을 향해 감히 ‘사람’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말한 이런 것들은 ‘사람에게 속한 것’(of man)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오직 주님에게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그래서 선지서들에 나오는 ‘사람’(man),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을, 속뜻(the internal sense)으로는 지혜와 지성을, 즉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가장 높은 뜻으로는 한 사람(the one man)이신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들에게 사람으로(as a man)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은 두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인자’(人子, the son of man), 즉 같은 말인데, 사람(the man)이라 하였습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또한 주님은 자주 자신을 가리켜 ‘인자’(the son of man), 즉, 사람이라 하시고, 다니엘에서처럼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구름을 타고’(The clouds of heaven)는 말씀(the Word)의 겉 글자의 뜻(the literal sense)인 반면, ‘능력과 큰 영광으로’(power and great glory)는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인데요, 말씀의 모든 것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능력과 영광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지요.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AC.50

태고교회는 ‘주님의 형상’(the image of the Lord)이라는 표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다는 것과 모든 사람한테는 영과 천사들이 최소한 둘씩 와 있다는 사실들을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 “image of the Lord” more than can be expressed. 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

 

※ 이렇게 둘씩 와 있는 이유는, 사람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즉 사람의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이 있고, 사람의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천사들하고는 천국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

 

※ 여기서 말하는 영들은 지옥에서 파견된 영들, 곧 악한 영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지옥에서 파견되어 천국도, 지옥도 아닌,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라는 곳(상태)에 있게 되는데, 이마저도 이들에겐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태여서 굉장히 기뻐하며, 다시는 자기들이 원래 있던 지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영들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사후 일단 머무르게 되는 곳(상태)입니다. 다음 말씀은 이런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떠오른 본문입니다.

 

30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눅8:30-31)

 

영들을 통한 영들의 세계와의 커뮤니케이션 없이는, 그리고 천사들을 통한 천국과, 그리고 천국을 통한 주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없이는 사람은 전혀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전적으로 이러한 결합에 달려 있으며, 그래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떠나가 버리면 사람은 즉시 소멸될 것입니다. 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 우리가 잠시라도 생존할 수 있으려면 이런 악한 영들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참으로 우리는 태생적으로 악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이 우리의 태생적 생명이니 말입니다...

 

[2] 아직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시작한 사람과는 사뭇 다른 다스림을 받습니다.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한테는 그와 함께하는 악한 영들이 매사 천사들보다 더 우위를 점하는 반면, 천사들은 그가 가장 저급한 악 안으로 거꾸러져 들어가는 대신 어떤 선 쪽으로 구부러지도록 그를 그저 겨우 가이드만 어떻게 해볼 수 있을 뿐이며, 그마저도 사실, 그 사람의 탐욕을 가지고 선으로, 거짓된 감각을 가지고 진리로 구부리는 정도입니다. 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 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 예를 들면, 자살하려고 최종 결심, 이제 막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난다든지, 또는, 탐욕의 끝에 가서 갑자기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추하게 느껴진다든지, 그리고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던 중 어느 순간, 그런 감각의 충족이 가져다주는 모든 쾌락이 헛것이요,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뭐 이런 경우들을 예로 들 수 있겠으며, 누가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의 재산 중 제 몫을 먼저 달라 하여 그걸 가지고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하다가 굶어 죽게 되자 정신을 차리게 된 둘째 아들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기하고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지만, 천국하고는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그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이 경우, 천사들은 그들의 다스림을 외면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 천사가 뭘 하고 싶어도 사람이 마음을 먹어야만 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힌 나머지, 오직 악하고 거짓된 것만 마음먹기 때문에, 도무지 천사들이 무엇을 할 여지가, 그 결과, 도저히 천국하고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애정이 악한 것을 좋아하여 악한 영들과 호흡이 맞는 한, 천사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설령 내가 뭘 잘못해도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착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그가 거듭남 가운데 있게 되면, 그는 모든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천사들의 다스림(rule)과 격려를 받지만,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며끔찍하게 여기게 됩니다. 겉으로는 천사들이 다스리는(lead)것 같지만, 그들은 단지 사역자들일 뿐입니다.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는(governs)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먼저 복수(the plural number)로 이르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하는 것이며, 그러나 여전히 주님 홀로 다스리시며 다 하시기 때문에, 다음 구절에서는 단수(the singular number)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하시는 것입니다. 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 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이 또한 주님이 이사야에서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천사들은 더더욱 스스로 이렇게들 고백합니다. ‘저희에게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오직 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입니다.’ 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는, 본문에 나오는 ‘우리’라는 표현을 저는 그동안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삼위 하나님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세 하나님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인간 창조에 관한 의논을 하시는 줄 알았지요. ^^

 

 

AC.51

‘형상’(the image)관련해서는, 형상은 모양이 아니고, 모양처럼 생긴 것(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이며,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하신 것입니다. 영적(靈的, spiritual)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은 모양, 즉 닮음, 유사함(similitude)입니다. As regards the “image,” 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The spiritual man is an “image,” and the celestial man a “likeness,” or similitude.

 

※ 형상, 이미지를 그릇으로 보면, 모양, 닮음은 그 그릇에 담긴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 겉모습만 보면 얼핏 주님의 이미지이지만, 실제 그의 행실, 성품, 인성 등 그 속에 담긴 내용을 가지고 주님을 닮았다, 안 닮았다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은 영적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영적 인간은, 일종의 ‘형상’(an image)인데요, 주님은 그를 가리켜 ‘빛의 아들’(a 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 The spiritual man, who is an “image,” is called by the Lord a “son of light,” as in John: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12:35-36)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 (John 12:35–36)

 

그를 일컬어 ‘친구’(a friend)라고도 하시지요. He is called also a “friend”: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4-15) 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 (John 15:14–15)

 

그러나 천적 인간은, 이 사람이 ‘모양’(a likeness)인데요, 주님은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a son of God)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But the celestial man, who is a “likeness,” is called a “son of God,” in John: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주4)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1:12-13)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John 1:12–13)

 

 

AC.52

사람이 영적인 한, 그의 전반적인 경향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말씀에,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하신 것입니다. 반면, 그가 천적인 사람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때는 그의 전반적인 경향은 반대로 속 사람에게서 겉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래서 여기 먼저 ‘들짐승’(beasts)이, 그리고 차례대로 ‘새’(fowl), ‘바다의 물고기’(the fish of the sea)가 언급되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출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의지(the will)에 속한 사랑, 즉 무엇을 의도할 때,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 인간하고는 다른 점이, 영적 인간은 먼저 ‘물고기’(fishes)와 ‘새’(fowl)가 나오고, 나중에 ‘들짐승’(beasts)이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이 물고기와 새는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하며, 이 이해는 곧 신앙에 속합니다. Here therefore “beasts” are first mentioned, and then “fowl,” and afterwards the “fish of the sea,” 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 “fishes” and “fowl” 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 “beasts.

 

※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그 성향과 속성 등 근본적인 것이 정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의지에서 출발, 이해로 나아간다면, 영적 인간은 반대로 이해에서 출발, 의지로 나아갑니다. 천적 인간은 가슴이 먼저 움직인다면, 영적 인간은 머리가 먼저 움직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의 사람인 반면, 영적 인간은 진리의 사람입니다. 참 다릅니다. 그래서 천국도 두 나라, 천적 나라, 영적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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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5절,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C.44

사람은 땅처럼 자기 안에 먼저 신앙 관련 지식이 심기지 않고서는 어떤 선도 생산, 즉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그걸 가지고 뭘 믿어야 할지, 뭘 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understanding)의,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will)의 일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행하지는 않는 것은 마치 우리는 믿음대로 살지는 않지만 믿고는 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들음과 행함을 분리, 결국 일종의 나뉜 마음을 갖게 되며,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주님이 ‘어리석다’(foolish)하신 사람들처럼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는 앞서 보여드린 대로 이해에 속한 것들을, 여기 ‘땅은 생물을 내되’(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가축과 기는 것’(the beast and creeping thing),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말합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nd also by 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also by the “wild animal of that earth.

 

 

AC.45

태고 시대(太古, the most ancient times)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관련된 것들을 이런 식으로 의미했는데요, 이런 이유로,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에서도 늘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걸 표현하고 있습니다. 짐승은 두 종류가 있는데, 사람들을 해치는 짐승은 악하다 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 짐승은 선하다 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악들은 악한 짐승들, 가령, 곰, 늑대, 개 등으로 표현하는 반면,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같은 본성을 가진 짐승들, 가령, 어린 암소, 양, 어린 양 등으로 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짐승들’(beasts)은 선하고 온순한 것들이며, 그래서 애정들(affections)을 의미하는데요, 이 본문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더 낮은 것들, 즉 몸(body)과 더 연결된 것들은 ‘땅의 짐승들’(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 하는데, 이는 탐욕들과 쾌락들을 말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 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 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 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 animals of that 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AC.46

‘짐승들’(beasts)이 사람의 애정들, 곧 악을 수반하는 악한 애정들과 선을 수반하는 선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수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먼저 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36:9, 11 거듭남을 다루면서)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요엘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시편 In David also: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 거듭남을 다루면서 In Jeremiah, treating of regeneration: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7-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2] ‘땅의 짐승들’(Wild animals)도 유사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Wild animals” have a similar signification, as in Hosea: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 In Job: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욥5:22-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 In Ezekiel: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겔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 In Isaiah: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에스겔 In Ezekiel: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겔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것은 앗수르(the Assyrian)에 관한 말씀인데요,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의미하며, 영적 인간은 에덴동산으로 비유됩니다. This is said of the Assyrian, by whom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and who is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시편입니다. In David: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시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여기서도 같은 것들이 언급되는데요, 바로 ‘용들’(whales), ‘과수’(the fruit tree), ‘짐승’(wild animal), ‘모든 가축’(the beasts),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입니다. 이것들이 사람 안에 있는 살아있는 원리들(living principles)을 가리킨 게 아니라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도록 호명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 tree,” “wild animal,” the “beast,” “creeping 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서들은 ‘가축’(beasts)과 ‘땅의 짐승들’(wild animals of the earth), 그리고 ‘가축’(beasts)과 ‘들의 짐승들’(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분하는데요, 그러면서 사람에게 있는 선들을 ‘가축’(beasts)이라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과 계시록을 보면, 천국에서 주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을 ‘생물들’(animals)이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earth,” and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field.” 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주3)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3) (Rev. 7:11)

 

※ Critical Notes

 

3. 여기 이 단어는 ‘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 아닌,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처럼 ‘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 ‘준’(ζοόν, z¯oon)과, 라틴과 영어의 ‘애니멀’은 서로 정확히 대응하며, ‘생물’(a living creature)이라는 의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원전(the original) 해당 구절들에서 사용된 단어는 준이며, 만일 ‘비스트’ 사용을 의도했다면 썼을 법한 테르(θήρ, th¯er)나 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 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 living 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또한 복음을 듣게 될 사람들을 가리켜 ‘만민’(creatures)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창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AC.47

이들 말씀에 거듭남에 관한 비의(秘義, arcana)가 들어 있다는 것은 또한 앞 구절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앞 구절인 24절에서는, 땅은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순으로 내라 하시는 반면, 다음 구절인 25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지요, 즉 하나님이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만드시고, 마찬가지로 ‘가축’(the beast)도 만드셨다고 말이지요. 바로 이 순서에 비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먼저, 그리고 나중에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 될 때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자기 힘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사람의 거듭남은 이렇게 먼저 사람의 겉(the external)에서부터 시작, 차근차근 속(the internal)으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또 다른 순서가 등장하는 것이며, 겉의 일들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AC.48

그래서 이때 이 사람을 가리켜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가운데 있다 하는데요, 이때 이 사람은 말을 할 때, 신앙과 관련된, 이해에 속한 어떤 원리로(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 진리 안에, 선 안에 있음을 스스로 확신합니다. 이때 이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 ‘움직이는’(animate) 것이며, 이를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the fishes of the sea), ‘하늘의 새’(the fowl of the heavens)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진리를 말하며선을 행할 때, 그는 여섯 번째 상태 가운데 있으며, 이때 그로 말미암는 것들을 가리켜 ‘생물’(the living soul), ‘가축’(the beast)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가 신앙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기를 시작할 때, 그는 영적 인간이 되며,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데, 이것이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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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3절,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AC.43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어마어마하게 결실하며 번성하는데요(fructifies and multiplies), 몸 안에 사는 이생뿐 아니라 사후 저생(the other life)에서는 정말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말씀에서 ‘생육하다’(生育, to be fruitful)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관한, 그리고 ‘번성하다’(繁盛, to multiply)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서술입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에는 ‘씨’(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말미암아 놀랍게 번성합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 들의 풀과 나무, 강과 바다의 물고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 가령 해바라기는 그 넓은 둥그런 꽃 한 판에 얼마나 많은 씨가 있으며, 열매, 가령, 옥수수 한 자루엔 얼마나 많은 알갱이가, 벼나 보리, 수수 같은 곡식들 한 줄기 줄기엔 또 얼마나 많은 낱알이 맺히는지... 나무 한 그루도 보면, 가령 은행, 호도, 대추, 밤, 감, 사과 등등... 얼마나 많은 열매, 과일이 열리는지... 물고기는 또 어떤가요? 명란젓 만드는 명태 한 마리가 낳는 알은, 대구는, 오징어는? 등등... 또한 얼마나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둥절할 정도로 아주 심하게 번성합니다 ^^

 

※ 인간과 달리 동, 식물의 경우, 주님의 이 정하신 복, 명령하신 축복이 예외 없이 그대로 시행되는 이유는, 동, 식물의 경우는 본능만 있을 뿐 스스로 무엇이 없어 주님이 정하신 질서를 거역하거나 뒤집거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정하신 쓰임새 그대로 존재하며,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 판단하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최선인 줄을 알면서도 버젓이 악을 행하고, 창조주의 질서를 뒤집어 훼방을 놓고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변수가 많으며, 오히려 주님의 복 받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 화와 불행은 그 스스로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오늘 본문 동, 식물의 이런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과 능력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흘러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를 통해 주님이 알리신 이 아르카나가 250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미미하게 세상에서 천대를 받고, 변죽만 울리고 있습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 초창기에도, 아브라함 이후 유대교회 초창기에도, 주님 성육신 이후 기독교회 초창기에도 늘 시작은 아주 미미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은 저마다 오랜 세월 대하처럼 흐르는 시대별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이 주님의 새 교회도 그럴 것입니다. 각 시대 초기 교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복’(福, blessing)은 풍성한 결실과 번성을 의미하는데요, 이런 생육과 번성이 모두 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 복은 사람 안에 천국이 있는 상태이며, 피조물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문제이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 지난번 다룬 것처럼 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즉, 첫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르며,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세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릅니다. 그런 식으로 나머지도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 사람의 거듭남 풀코스 가운데서 사람은 비록 주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살피시며 동행하시지만, 그렇다고 늘 하하 호호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사람의 연약함 때문인데요,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다가도 또 어느새 자아를 바라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한데요, 심지어 천국의 천사들조차 이런 상태변화를 겪는다 하니 우리는 자신의 이런 연약함의 오르락내리락을 결코 이상하게, 또는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분명한 건, 천사들의 증언처럼, 오히려 이런 굴곡을 통해 더욱 예리해져 가며, 더욱 주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에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이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반복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 성장, 성숙해져 가며, 그래서 어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만큼, 그리고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내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만큼 그만큼 우리는 더 성장, 성숙해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우리가 우리를 포기할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됩니다. 힘을 다해 공부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사고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 지식에 힘쓰고, 그걸 선용(善用, 쓰임새, use), 천적 지혜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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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C.42

‘물고기들’(Fishes)은, 앞서도 말했듯,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faith from the Lord)으로 움직이는 상태가 된, 그래서 살아있는 상태가 된 기억-지식들을 말합니다.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으면 ‘살아있는(alive), ‘움직이는(animate) 상태이지만, 자신으로 말미암으면 ‘죽은(dead), ‘못 움직이는(inanimate) 상태입니다. 지식이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 지식의 거듭남입니다. 지식의 거듭남이란, 비록 여전히 세상, 세속 지식이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주님을 향해, 주님을 위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 특히 세상 지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모든 상태가 결정됩니다.

 

‘큰 바다짐승들’(whales, 고래, 또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수중 생물들)은 그들, 즉 지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세부 원리들이 이들과 종속 관계에 놓이거나(in subordination to) 말미암는(from) 그런 것들입니다. 이 우주에서는 존재(exist) 및 존속(subsist)을 할 수 있으려면 다 자기의 근원이 되는 그런 더 일반적인 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래들’(Whales), ‘큰 바다짐승들’(great fishes)이 선지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이유는, 이들이 거기서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뜻하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 29장 3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를 가리켜 ‘큰 악어’(great whale)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큰 악어’는 인간의 지혜, 지성, 즉 일반적으로 지식[scientia]을 말하는 것이지요.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겔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그리고 다른 데서도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겔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 안으로 들어가고자 무척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들인 겁니다, 이사야에서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것은 진리의 일반적 원리들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 진리의 일반적인 원리는, 모든 세부, 또는 하부 진리는 일반적, 혹은 상부 진리에서 오며, 이들 일반적, 혹은 상부 진리는 단 하나의 근원,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이는 큰 물고기가 요나에게 한 것처럼,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고 한 신앙의 지식들을 그가 삼켰다는 것입니다. ‘큰 뱀’(a whale)은 신앙 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단지 기억-지식들로만 소유하고, 또 그런 식으로만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 지식 중에서도 신앙에 관한 지식은 아주 값비싼 지식이며, 그중에서도 일반적 지식, 가령,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와 같은 말씀 지식은 가히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너무나도 귀한 생명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 그저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알고 가볍게 여기며, 도무지 무슨 가슴 신앙으로 감동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자기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신앙인이다 하는 이런 사람들을 위 예레미야 본문에서는 ‘큰 뱀’이라 한 것입니다.

 

※ 세상 지식을 학습, 습득하면서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또 그 지식을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사용하여 천국 지성에 이르는 중에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늘 시인하고,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고 싶으시면 그냥 간단히 허락만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왜 주님은 이렇게 속 사람, 겉 사람, 내면, 외면, 기억-지식, 합리와 이성, 지성 등 복잡하게 조직하시며, 다 일일이 경험하게, 순서대로 모든 단계를 다 밟게 하실까요? 그것은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설령 주님의 허락이 있다 해도 사람은 천국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방열복을 안 입고 용광로 작업을 하는 것과 같아서, 천국에 들어갔는데도 지옥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은 사전에 이렇게 아주 단단히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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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속뜻,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신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한 그는 죽은 상태이지만, ‘아닙니다.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습니다’ 고백하면서 그는 살아있는 상태가 됩니다. 전자는 식물, 후자는 동물로 표현되었습니다. 수중 생물(the creeping thing)로 표현된 겉 사람의 기억-지식, 새(fowl)로 표현된 속 사람의 합리와 지성 모두 ‘두 큰 광명체’, 곧 사랑과 신앙의 빛을 받아 생물이 됩니다. ‘생물’(the living soul)은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배치된 후, 그 빛을 겉 사람이 받으면서 일단 사람은 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말하는 줄로 여겼는데요, 사람이 이렇게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한, 사람은 소위 살아왔다고 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인데요, 그런 사람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든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선 그 자체인 그런 선을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며, 주님만이 선의 근원이십니다.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반사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주님의 선을 덧입을 수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선한 것을 의도하는 것조차 절대 불가능하며,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선한 것을 절대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를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 그만큼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정말 철저히 분리된 존재입니다.

 

또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처럼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 즉 그로 하여금 생명을 향해 거듭나게 하실 , 주님은 먼저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시는데요, 그 이유는 그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그때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도록, 그리고 나중에는 지각하도록 그를 인도할 무슨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 탤런트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 이름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듭남 스케줄 전체를 우리에게 맞추십니다. 우리더러 주님의 스케줄에 맞추라 하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주님은 과연 진정한 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에게 있는 진리와 선은 (the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  못 움직이는 것으로 비유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생해져서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이어서 땅 위를 나는 새들(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끝으로 짐승들(beasts), 곧 이 모든 움직이는 것들, 그래서 생물(living souls)이라 하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생물’(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새들’(birds)은 보통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후자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수중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이나 ‘물고기들’(fishes)이 기억-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계속해서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새로운 성전, 즉 일반적으로 새로운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사람, 즉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모두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 인간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 주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19) 가 생각납니다 ^^

 

[3] ‘새’(birds)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사야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에서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 새로운 교회, 혹은 거듭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 ‘들짐승’(wild beast)은 정말 들짐승을, ‘새’(bird)도 그냥 새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겠다’(to make a new covenant)하시기 때문입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AC.41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제법 메인으로 보일지라도 천사들이 볼 때는 무슨 딱딱한 뼈나 까만 덩어리로 보이지요.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만일 볼 수 있도록 재현될 때는 휴먼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human and living) 나타납니다. 정말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된 사실은, 천사 같은 영(an angelic spirit)의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그리고 모든 지극히 사소한 생각까지도 살아 있는 상태(alive)라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조각들 안에도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애정을 포함하면서 말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 사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그 모든 언행에서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며, 빛처럼 뿜어져 나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목격하며,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들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들어있기 때문인데요,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생물’(the living soul)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일종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기는 것’(creeps)이라 한 것입니다. 이들 진리는 사람에게는 아직 너무나 깊은 비밀들임에도 살짝 말씀드리는 것은 본문에 ‘생물’(the living soul), ‘스스로 움직이는 것’(the thing moving itself)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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