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속뜻,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상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전혀 없어 혼돈과 공허, 흑암과 깊음의 상태이지만 주님은 자비하셔서 그의 안에 주님의 것, 곧 리메인스(remains)를 두시며, 마치 보석처럼 귀히 보관하십니다.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earth void and empty), 또 ‘땅’(ground)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직 그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씨 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며,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 천적(天的, heavenly) 생명(삶)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렘4:22-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의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즉 무슨 ‘깊음’(deep)과도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군데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사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거듭남의 선행 상태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듭남에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이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라든지, 혹은 마치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 ‘품으시다’(bro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주님이 사람 안에 숨겨 보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해오신 것들을 가리킵니다. 말씀 전반에 걸쳐 이것을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 하는데, 이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겉의 일들(external things)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을 여기서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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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속뜻, 사람의 거듭남을 위해 주님은 그를 속 사람, 겉 사람으로 창조하시면서 그의 거듭남을 시작하십니다.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옛날’(days of old, [antiquitatis], 신32:7; 왕하19:25; 시44:1 등)이라 하기도 하고, ‘영원’(days of eternity, 시25:6)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는 또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첫 번째 시기, 기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고,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라고도 하지요. 선지서들 가운데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그 상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다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리고 그래서 같은 선지서에서 주님은 ‘구속자’(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maker) 및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天, heaven)은 속 사람(the internal man)을, ‘지’(地, earth)는 아직 거듭나기 전인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 이 속 사람, 겉 사람 이야기와 관련, 지금까지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두 가지, 곧 사람을 영과 육으로 이해할 때의 속 사람, 겉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영만 말할 경우에도 그 안에 속 사람, 겉 사람이 있다는 것인데요, 이는 앞으로 그때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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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NESIS 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21.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THE CONTENTS

 

AC.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중생(重生, regeneration,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AC.7

첫 번째 상태는 유아기 상태와 중생 직전 상태 둘 다를 포함하는 선행 상태입니다. 이것을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하며, 그 첫 번째 움직임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고 하는데, 이는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에게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들 사이 구별이 생기는 때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 하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신앙 관련 지식들, 그러니까 유아기 때부터 배워 온,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그러나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를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그런 신앙 지식들을 말합니다. 오늘날엔 이 상태는 쉽게 보기 어려운데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그러니까 인간한테나 어울리는 이런 일시적인 것들에 푹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인생의 큰 시험이나 불행, 혹은 큰 슬픔을 만나면 그제서야 그런 삶이 마치 죽어버리기라도 한 듯 멈추고,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입니다. 이때 겉 사람(the ex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이 속 사람(the in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즉 일시적인 것, 썩어 없어질 물질적인 것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때이지요. 이 속 사람 안에 앞서 말한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것은 주님이 이때, 그러니까 이 두 번째 상태 때 쓰시려고 그의 속 사람 안에 두신 것들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인애, 자선, 기부 등)와 같은 선을 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모든 걸 자기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지요.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위를 하다니 아,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하면서 말이지요. 이런 선을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나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의 영향을 받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 실제로 경건한 담론도 하고, 선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가 수고한, 즉 자초한 시험과 엄격함의 결과이지 신앙과 체어리티로 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의 애정으로, 그리고 빛을 받은 신앙으로 하게 되었고, 그런 까닭에,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는 그의 속 사람 안에서 활활 불타오르는데, 이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믿음의 담론을 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선 안에 있음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살아 움직이는데, 이를 일컬어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바로 행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일컬어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적인 삶(생활, 생명)은 신앙에 속한 지식들과 체어리티에 속한 행위들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며, 또 유지됩니다. 이런 지식들과 행위들을 일컬어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삶은 몸과 몸의 감각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고 유지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主, the dominion)가 되며, 그가 천적인 사람(天的,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말이지요.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나 다섯 번째, 그리고 아주 적은 수가 여섯 번째에 이르고,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속뜻

THE INTERNAL SENSE

 

 

AC.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온 천국에 걸쳐 그분은 주님으로 인식되시며, 사랑과 공경을 받으십니다. 모든 천국과 지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래서 그분의 부활 후, 제자들은 그분을 오직 ‘주님’으로만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AC.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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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

 

AC.1

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즉 기록된 글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밀들(deep secrets of heaven)이 들어있으며,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일반적이든 아니든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 믿음,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들에 대해 심지어 알아차리는 것조차 쉽지 않으실 텐데요, 그 이유는 겉 글자나 글자의 뜻만 가지고 살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과 규례(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에 관한 것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말씀 안에는 내적인 것들(internal things)이 들어있는데, 이는 아주 몇 군데 주께서 사도들에게 계시하시고 설명하신 것들, 예를 들어, 희생제물이라는 것은 주님을 의미한다든지,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의미하며, 그래서 이들을 일컬어 천국의 가나안, 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또 낙원도 유사한 의미를 갖는데, 이런 예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외적인 것들(the external things)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AC.2

그러나 기독교계는 아직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일반적이든 아니든 아니, 가장 작은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一點一劃,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영적,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인 것들을 상징하고, 그 안에 귀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구약에 대해 이렇게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말씀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토록 놀라운 것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말씀이라는 것이 다른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주님이 하신 것이며,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는 필연적으로 천국과 교회, 그리고 종교적 믿음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런 건 주님의 말씀이라 할 수도, 그 안에 무슨 생명이 있다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생명에 속한 것들을 빼고,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그 안, 즉 말씀 안에 담긴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 관한 것이라는 이 사실을 외면하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생명이라는 것이 비롯될 수가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내적으로는(內的, inwardly) 주님에 관한 게 아닌 그 어떤 것도 살아있는 게 아니며, 또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그 안에 주님이 담기지 않은 그 어떤 표현도, 다시 말하면, 어떤 식으로든 주님에 관한 게 아닌 그 어떤 표현도 신성(神性, Divine)하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AC.3

그런 생명 없이는, 그저 겉 글자 만이기만 한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계에서 알려진 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된 인간의 경우와 같은데요, 속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서는 겉 사람은 그저 몸(the body), 육(肉)일 뿐이며, 그건 곧 죽은 상태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그리고 겉 사람을 살아있는 상태가 되게 하는 건 속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속 사람이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처럼 말씀도 겉 글자만 놓고 보면, 마치 영혼 없는 육체와 같습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AC.4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해석하는 동안에는 그 안에 그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첫 장에서는 세상의 창조와 낙원이라고 불리는 에덴동산, 그리고 최초의 피조물인 아담이라는 것 외에는 문자적 의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누가 거기서 다른 무엇을 가정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다음 페이지에서 이러한 모든 것이 아직 한 번도 밝혀지지 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곧 창세기 첫 장은 그 내적 의미로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 또는 그의 중생, 특히 가장 오래된 교회를 다루고 있는 등, 이러한 모든 표현 안에 아르카나가 포함되지 않은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될 것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AC.5

이런 사실은 실제로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경우인데요, 그래서 저는 지난 수년간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계속 끊임없이 함께 지내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거나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즉 제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곧 주님의 신성하신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저는 그 결과, 저세상에서 전에는 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들의 여러 상태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요, 사후 영(영혼)들의 상태, 곧 지옥으로 알려진, 불성실한 자들의 통탄할 만한 상태와, 천국으로 알려진, 충실한 사람들의 축복받은 상태, 그리고 특히 천국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믿음의 교리에 관하여 등, 이런 여러 내용들에 대하여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 곧 주님의 거룩하신 허락으로 말미암음입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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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 (2023/6/26)

 

 

콤펜디움(COMPENDIUM, 叢書)’ 1장 ‘하나님에 관하여’, 오늘은 5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입니다.

 

※ ‘콤펜디움(COMPENDIUM, 叢書, Samuel. M. Warren, 1875)’

 

1. 어떤 저자의 모든 저작(Writings)을 한 데 모아놓은 것으로, 여기서는 스베덴보리의 모든 신학적 저작 가운데서 특정 주제별로 그에 해당하는 글들을 선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을 말합니다. 일종의 조직신학 같은 책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2. 이 콤펜디움을 엮은 워렌은 그저 주제별 해당 글들을 선별, 엮기만 했을 뿐 무슨 자의적 해설을 더하거나 섞거나 하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원저자는 스베덴보리라 해도 될 듯 합니다.

 

오늘의 메인 본문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 8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29, 30번 글입니다.

 

29

그 본질에 있어 지혜와 한 몸인 사랑(Love together with wisdom in its very essence)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시며, 자기 안에 있는 지혜로 모두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피조 세계(The created universe)역시 그 창조 질서의 측면에서 볼 때(viewed in relation to its order),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너무나도 충만, 그 안 모든 만물(all things in the aggregate)을 일컬어 지혜 그 자체라 할 정도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것들(things limitless)이 그런 질서 가운데 계속 연결되고, 동시에 하나로 합쳐 하나를 이루기 때문인데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단결, 끊임없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그리고 오직 이것 때문입니다. Love together with wisdom in its very essence is in God. This no one can deny; for God loves everyone from love in himself, and leads everyone from wisdom in himself. The created universe, too, viewed in relation to its order, is so full of wisdom coming forth from love that all things in the aggregate may be said to be wisdom itself. For things limitless are in such order, successively and simultaneously, that taken together they make a one. It is from this, and this alone, that they can be held together and continually preserved.

 

30

사람에게 생명(삶)을 위한 두 가지 능력(capacities, abilities)이 생기는 것, 곧 하나를 통해서는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discernment)이, 다른 하나를 통해서는 윌(will, volition)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Divine essence itself is love and wisdom)’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언더스탠딩을 생기게 하는 능력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지혜의 입류(the influx of wisdom from God)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 시작되고, 윌을 생기게 하는 능력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입류(the influx of love from God)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사람이 정말 지혜롭지도, 그리고 올바른 사랑을 하지도 않는다 해서 이 능력들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단지 닫힐 뿐인데요, 다만 이 능력들이 닫혀 있는 한은, 비록 언더스탠딩을 여전히 언더스탠딩이라 하고, 윌을 윌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더 이상 아닙니다. 언더스탠딩도, 윌도 이 능력들이 정상적으로 작동 중일 때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두 능력이 사라지면 사람의 모든 것(all that is human)은 소멸될 것입니다. 인간(the human)은 사고(thought)를 통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의지(will)를 통해서 의도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윌과 언더스탠딩이 있어 사람입니다. 이 사실로 분명한 건, 주님의 신성(the Divine)은 인간 안에서 이 두 능력, 곧 지혜로울 수 있는 능력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의 가능성이 있음을, 그리고 지혜로움의 가능성이 있음을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그동안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당장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도, 될 수 있는 만큼 지혜롭지도 않을지라도 말이지요. 이 사실은 앞으로 여러 다른 데서 풍부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It is because the Divine essence itself is love and wisdom that man has two capacities for life; from one of these he has understanding, from the other will. The capacity from which he has understanding derives everything it has from the influx of wisdom from God, and the capacity from which he has will derives everything it has from the influx of love from God. Man’s not being truly wise and not loving rightly does not take away these capacities, but merely closes them up; and so long as they are closed up, although the understanding is still called understanding and the will is called will, they are not such in essence. If these two capacities, therefore, were to be taken away, all that is human would perish; for the human is to think and to speak from thought, and to will and to act from will. From this it is clear that the Divine has its seat in man in these two capacities, the capacity to be wise and the capacity to love (that is, that one may be wise and may love). That in man there is a possibility of loving [and of being wise], even when he is not wise as he might be and does not love as he might, has been made known to me from much experience, and will be abundantly shown elsewhere.

 

2023-06-26(D2)-C.1.5.1,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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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피조 세계 역시 그 창조 질서의 측면에서 볼 때,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너무나도 충만, 그 안 모든 만물을 일컬어 지혜 그 자체라 할 정도입니다.’ (29번 글에서)

 

다음은 위 문장에 나오는 ‘지혜’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에서 인용했습니다.

 

천국의 총합이 한 사람의 모양(heaven in its whole complex reflects a single man)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an arcanum)이지만, 천국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과 그에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아는 것이 천사의 지성을 이루는 핵심(the chief thing in the intelligence of the angels there)이다. 천사들이 이 사실을 보편 원리(general principle)로 삼고 있지 않으면, 거기 의존하는 많은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공동체도 각각 사람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을 ‘가장 큰 신적 사람(the greatest man and the Divine man)’이라고 부른다. 신적(Divin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다. (HH.59)

 

즉 어떤 건물이나 도시 전체 설계에 그 설계자의 모든 지혜가 담겨있듯 천국 역시 그 전체 설계에 주님의 지혜가 온전히 담겨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그 천국의 설계 형태에 주목하면 주님의 지혜에 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2.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그런 질서 가운데 계속 연결되고, 동시에 하나로 합쳐 하나를 이루기 때문인데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단결, 끊임없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그리고 오직 이것 때문입니다.’ (29번 글에서)

 

이 역시 다음 글들을 통해 그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시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했습니다.

 

천국의 형상이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주님에 의해 단 한 사람처럼, 즉 한 단위로 다스려진다. 잘 알려진 대로 사람은 전체나 각 세부나 무수히 다양한 부분들로 이루어졌다. 전체는 사지와 기관과 내장들로, 그리고 각 부분은 섬유와 신경과 혈관으로 되어 있어 지체 안에 지체가, 부분 안에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사람은 한 사람으로 움직인다. 이와 같이 천국도 주님의 감찰과 인도하심(the auspices and direction of the Lord)에 따라 하나로 움직이는 것이다. (HH.63)

 

 

사람 안에 있는 많은 부분들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전체의 유익을 위해 뭔가 기여하고, 쓰임새(use) 없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전체는 부분들로 구성되고, 부분은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전체는 부분을 위한, 부분은 전체를 위한 쓰임새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양쪽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서로를 목적으로 삼으며, 모든 부분이 합동해서 각기 전체와 전체의 유익에 참여하는 형태를 이루어낸다. 그 결과 모든 부분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이다.

 

[2] 천국들 간에도 이런 연합(affiliations)이 이루어진다. 천국에서는 모두 그 쓰임새를 따라 같은 형태(form)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에서 쓰임새를 수행하지 않는 자는 이질적이므로 천국에서 추방된다. 쓰임새를 수행한다는 것은 전체의 공동유익을 위해 타인에게 선한 의도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쓰임새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게 선한 의도로 행하기는 하지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후자는 모든 것보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며, 전자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천국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움직이는데, 그것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천사들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주님을 모든 것의 유일한 원천으로 바라보고, 주님 나라를 그 유익을 추구해야 할 사회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님은 성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주님의 선을 구하는 것(to seek his good)이다.

 

[3] 이 세상에서 자기 조국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이웃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더 사랑한 사람은 내세에서 주님의 나라를 구하고 사랑한다. 거기서는 주님의 나라가 조국이기 때문이다. 또 타인에게 행하는 선을 사랑한 사람들은 내세에서 이웃을 사랑한다. 천국에서는 선이 이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 안에, 즉 천국에 있다. (HH.64)

 

 

3. 영어 ‘understanding’과 ‘will’을 앞으로는 가급적 소리나는 그대로 ‘언더스탠딩’과 ‘’로 적겠습니다. 이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이 참 애매하기 때문인데요, 그냥 ‘이해’라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조금 풀어 ‘이해하는 능력’이라 하기도 그렇고... 무슨 ‘이해력’이나 ‘사고력’, ‘이성’이나 ‘생각’ 등... 참 쉽지가 않습니다. 영어 ‘charity’나 ‘affection’ 등과 같은 케이스입니다. ‘will’의 경우는 ‘의지’나 ‘의도’ 등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그냥 ‘understanding’과 짝을 맞추기 위해 ‘’로 표기하겠습니다만, 그러나 융통성 있게 하겠습니다.

 

 

4. ‘언더스탠딩도, 윌도 이 능력들이 정상적으로 작동 중일 때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두 능력이 사라지면 사람의 모든 것은 소멸될 것입니다. 인간은 사고를 통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의지를 통해서 의도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윌과 언더스탠딩이 있어 사람입니다. 이 사실로 분명한 건, 주님의 신성은 인간 안에서 이 두 능력, 곧 지혜로울 수 있는 능력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30번 글에서)

 

다음은 위에서 말한 ‘언더스탠딩(understanding)’과 ‘(will)’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문제에 대한 바른 개념이 없는 사람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모양과 형상으로 배열되고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의 외면(man’s outmost nature)을 구성하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떠나서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선한 것을 의도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his ability to understand what is true and to will what is good)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지(willing)와 사고력(understanding)이 바로 사람을 이루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다. 게다가 모든 사람의 특질(quality)은 그의 사고력과 의지의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사람의 육신은 이 세상에서 사고력과 의지에 봉사하도록 지어진 것이고, 그 두 기능의 명령에 따라 자연계에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몸은 그 자체가 행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항상 사고력과 의지의 명령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이 입과 혀를 통해 말로 나오고, 사람의 의도가 사지를 통해 행동에 옮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사고력과 의지이지 몸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고력과 의지에 속한 것이 사람을 이루며, 내면이 외면에 작용하듯(as what is internal into what is external) 그 두 기능이 육체의 지극히 세부적인 데까지 작용하기 때문에, 영과 육은 같은 형태로 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내적인 인간, 영적인 인간이라 하는 것이다. 천국은 바로 가장 크고 가장 완벽한 사람의 형태이다. (HH.60)

 

여기서는 번역자의 번역을 존중, ‘사고력’과 ‘의지’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오늘 강의의 요약 및 결론은,

 

첫째,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지혜는 천국의 구조와 설계 형태에 반영되어 있으며, 그래서 천국 설계 형태를 아는 것이 주님의 신적 지혜를 아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주님의 신적 사랑에서 주님의 신적 지혜가 나옵니다. 여기서 주님의 신성의 본질인 선과 진리가 나오며, 또 여기서 사람을 이루는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 곧 윌과 언더스탠딩이 나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인플럭스(influx)로 연결되어 있는데요, 이 인플럭스는 피조 세계 전체와 주님을 연결하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영적 연결이요, 흐름입니다. 이 인플럭스로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성을 이루는 선, 그리고 인간의 의지가 한 흐름으로 연결되고, 또 주님의 신적 지혜와, 신성을 이루는 진리, 그리고 인간의 이해하는 능력인 언더스탠딩이 한 흐름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과 연결로 인해, 어떤 사람이든지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될 가능성, 선과 진리의 사람이 될 가능성,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으로 5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를 마치고, 다음은 6강, ‘주님의 신적 사랑과 주님의 신적 지혜는 실체(實體)이며, 형태를 가진다(Divine love and Divine wisdom are substance and are form)’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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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2)’ (2023/6/21)

 

 

콤펜디움 1장 ‘하나님에 관하여’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71

다음 내용을 보시면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인간(the merely natural man)은 영적이고 신성(神性)한 것들(spiritual and Divine things)을 공간을 가지고(from space) 생각하고,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은 공간을 떠나서(apart from space) 생각한다는 걸 확실히 아시게 됩니다.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인간은 눈에 보이는 사물들한테서 얻은 걸 가지고 생각하는데요, 이들 사물들에는 길이, 넓이 및 높이를 갖는 형상(figure)과 각지거나 둥글거나 하는, 이들 형상을 가지고 결정되는 모양(shape)이 다 포함됩니다. 이들 자연 오리엔티드된 개념들은 그가 지상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관해서나 보이지 않는 것들, 가령 사회적, 도덕적인 것들에 관해 생각할 때 그의 생각을 지배합니다. To make it clear that the merely natural man thinks of spiritual and Divine things from space, and the spiritual man apart from space, let the following serve for illustration. The merely natural man thinks by means of ideas which he has acquired from objects of sight, in all of which there is figure partaking of length, breadth, and height, and of shape determined by these, either angular or circular. These [conceptions] are manifestly present in the ideas of his thought concerning things visible on earth; they are also in the ideas of his thought concerning those not visible, such as civil and moral affairs.

 

이에 대해 그는 전혀 의식을 못 하지만, 그러나 그를 둘러싼 삼차원 공간 속 형상과 모양이라는 속성들은 끊임없이 존속,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영적 인간, 특히 천국 천사의 경우, 그 사고방식에 있어 자연적 인간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데요, 이 경우에도 자연계에서처럼 무슨 공간이 있고, 형상(figure)과 형태(form)가 있지만, 이 경우에는 그것이 영적이라는 것, 즉 그 형상과 형태가 영적인 길이, 넓이, 그리고 높이를 띤 것에서 나온다는 점, 다시 말해, 영적 공간에 있는 것은 그 형상과 형태가 그것의 영적 생명의 상태(the state of its life)로 말미암는다는 점에서 자연적 사고의 경우와는 전혀 무슨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 결과, 천사는 자연계 공간의 길이(length of space) 대신 그 생명이 선한 어떤 것의 선(the good of a thing from good of life)을, 넓이(breadth of space) 대신 그 생명이 진실한 어떤 것의 진리(the truth of a thing from truth of life를, 높이(height) 대신 그것들의 정도(the degrees of these), 즉 선한 정도, 진실한 정도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곧 그는 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 사이에 있는 상응으로(from the correspondence)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상응으로, 말씀에서 ‘길이’는 어떤 것의 선을, ‘넓이’는 어떤 것의 진리를, 그리고 ‘높이’는 그것들의 정도를 의미합니다. This he is unconscious of; but they are nevertheless there, as continuations. With a spiritual man it is different, especially with an angel of heaven, whose thought has nothing in common with figure and form that derives anything from spiritual length, breadth, and height, but only with figure and form derived from the state of a thing resulting from the state of its life. Consequently, instead of length of space he thinks of the good of a thing from good of life; instead of breadth of space, of the truth of a thing from truth of life; and instead of height, of the degrees of these. Thus he thinks from the correspondence there is between things spiritual and things natural. From this correspondence it is that in the Word “length” signifies the good of a thing, “breadth” the truth of a thing, and “height” the degrees of these.

 

이상으로 분명한 사실은 천국의 천사는 그가 하나님의 편재(the Divine Omnipresence)를 생각할 때, 하나님은 자연계 공간을 떠나 만물에 충만하신 분(the Divine, apart from space, fills all things)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이렇게 말고는 달리 어떻게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과, 또 천사가 하는 생각은 진리인데, 그것은 그의 내면을 열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빛(the light which enlightens his understanding)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Divine wisdom)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an angel of heaven, when he thinks of the Divine Omnipresence, can by no means think otherwise than that the Divine, apart from space, fills all things. And that which an angel thinks is truth, because the light which enlightens his understanding is Divine wisdom. (DLW.71)

 

 

72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생각의 기초입니다. 안 그러면, 인간이신 하나님(God-man)의 우주 창조와 그의 섭리(providence)와 전능하심(omnipotence) 및 편재하심(omnipresence)과 전지하심(omniscience)에 대한, 앞으로 드릴 말씀들이 이해까지는 되더라도 마음에 담아둘 수까지는 없기 때문인데요,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인간은 비록 이런 것들에 대해 이해까지는 하더라도 언제든 금방 돌이켜 자신의 삶(life, 생명)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이 곧 그의 의지인데요, 그 사랑 속으로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This is the basis of thought concerning God; for without it, what is to be said of the creation of the universe by God-man, of his providence, omnipotence, omnipresence and omniscience, even if understood, cannot be kept in mind; since the merely natural man, even while he has these things in his understanding, sinks back into his life’s love, which is that of his will;

 

이 사랑, 곧 그의 자기, 자아 사랑, 세상 사랑은 그가 머리로 이해하고 있는 저런 진리들, 즉 주님의 천지창조, 섭리와 전능, 편재와 전지 등에 대해 신학적으로, 지식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들을 소멸(dissipate)시켜 그의 사고로 하여금 자연계라는 공간 안에 잠기게, 갇히게 하는데요, 그는 이곳을 자기를 환히 비추는 빛이 있는 곳이라 하며, 이 빛이야말로 래셔널(rational, 합리, 이성, 영계와 자연계를 연결해주는 능력, 자연적 인간으로 하여금 영적인 것을 이해하게 해주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소중히 여기는 이 빛은 사실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며, 자신의 현재 상태와 위치조차 모르게 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빛입니다. 사람은 주님의 빛을 받아야 참된 래셔널을 갖게 되기 때문이지요. and that love dissipates these truths, and immerses his thought in space, where his lumen, which he calls rational, abides, not knowing that so far as he denies these things, he is irrational.

 

이것은 ‘하나님은 인간이시다, 이것은 진리다’라는 생각을 통해서 확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내용들(11-13)과 앞으로 이어질 내용들을 정독하셔서(精讀, read with attention) 꼭 이해하실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That this is so, may be confirmed by the idea entertained of this truth, that God is a man. Read with attention, I pray you, what has been said above (n. 11–13) and what follows after, and your understanding will accept it.

 

사람이 그 생각을 자연계의 빛(the natural lumen)으로 내려놓으면, 즉 자연계에 안에서만 생각하면, 이 빛은 자연계의 공간(space)에서 나오는데요, 위에서 말씀드린 것들은 마치 무슨 역설들처럼(as paradoxes) 보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것들을 멀리 내려놓게 되고, 그러면 그것이 곧 그것들을 거부하게 하는 게 아닐까요? 이것이 곧 왜 ‘하나님(the Divine, 신성, 신)은 온 우주 공간에 충만하시다’라고는 하지만, ‘인간이신 하나님(God-man)은 온 우주 공간에 충만하시다’라고는 하지 않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그렇게 말하면,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빛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the Divine)은 모든 공간에 충만하시다’라는 명제에 관하여는 동의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은 ‘하나님은 편재하시며, 그는 모든 걸 들으시고, 또 알고 계신다’라는 주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말투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위 7-10번 글에 더 많은 걸 보실 수 있습니다.) But when you let your thought down into the natural lumen which derives from space, will not these things be seen as paradoxes? And if you let it down far, will you not reject them? This is why it is said that the Divine fills all spaces of the universe, and why it is not said that God-man fills them. For if this were said, the merely natural lumen would not assent. But to the proposition that the Divine fills all space, it does assent, because this agrees with the mode of speech of the theologians, that God is omnipresent, and hears and knows all things. (On this subject, more may be seen above, n. 7–10.) (DLW.72)

 

2023-06-21(D4)-C.1.4.2,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God is not in Space)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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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 17강, ‘하나님은 공간을 떠나서 우주 모든 공간에 충만하시다(The Divine, apart from space, fills all spaces of the univers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71, 72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위 두 글은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의역, 그리고 설명을 좀 충분히 보충하느라 번역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그냥 드리는 말씀이지만... 솔직히 그냥 원본 번역에 충실해야 하는 거 아닐까? 괜히 보충 설명 때문에 더 헷갈리시게 해드리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늘 있습니다...

 

 

2. 설명 때문에 내용이 좀 길어졌지만,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자연계와 영계, 양쪽에 다 공간이라는 게 있지만, 그 속성은 전혀 다르다는 것, 자연계의 모든 것은 길이, 넓이, 높이라는 3차원 속성을 갖는 반면, 영계의 공간은 사실은 공간처럼 보이는 것으로, 그 속성은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라는 영적 속성을 갖는다는 것, 영계에서는 사랑과 애정의 상태, 즉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에 대한 상태에 따라 가깝고 멀고와 빠르고 느리고가 결정된다는 것, 천국보다 크신 주님은 그러므로 자연계의 공간 안에 계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 천국 천사들은 천국 전체가 주님 모습을 한 사람 형태이기 때문에 ‘사람 모습을 하신 주님이 천국 전체에 충만하시다. 즉 온 피조 세계는 주님의 신성으로 충만하다’라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 등이 되겠습니다.

 

 

3. 이 교리 공부를 시작했더니 ‘말씀만 묵상하세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는, 진정성 어린 권면의 말씀들을 많이들 주십니다. 참 고맙고 감사하지요. 천사들은 사람을 볼 때, 그가 한 행동, 행위가 아닌, 그의 마음 속 의지, 동기를 본다고 합니다. 사람을 이루는 게 의지(will)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이기 때문이지요. 언제부턴가 저도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저런 권면을 하실 때, 그 속을 볼 수 있게 되네요 ^^

 

권면을 명심, 어떻게 하면 이 교리 공부 속에서도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 그 뜨거운 주님의 사랑과 애정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주야로 고민, 또 고민하겠습니다.

 

 

4. 저 개인적으로는 이 교리 공부가 큰 유익이 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은 교리를 편안해하는데, 그 이유는 교리는 사람들한테 있어 일종의 침대와도 같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천국은 지상의 빛보다 몇 배나 더 밝다고 합니다. 천국을 이처럼 밝게 하는 빛이 바로 진리인데요, 천국의 진리 안에는 주님의 사랑의 선이 담겨 있어서, 그래서 천국은 또한 주님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진리는 추상적 개념이지만, 영계에서는 진리가 눈에 보인다고 합니다. 자연계의 햇빛을 우리가 눈으로 보듯 말이지요. 천국은 이 진리가 신적 질서를 따라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충만하다고 합니다. 천사들은 그런 신적 질서의 나라에서 사는데요, 지금 우리가 이 교리 공부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삶을 미리 살고자 연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질서를 미리 이 지상에서 충분히 익히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도 조금씩 천국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이것으로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를 마치고, 다음은 5강,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과 지혜 그 자체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를 다루겠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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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1)’ (2023/6/16)

 

 

하나님에 관하여’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 The Divine is not in space

 

(, the Divine), 즉 하나님(God)은 비록 편재(遍在,omnipresent)하셔서 지상 모든 사람과 천국 모든 천사, 그리고 천국 아래 모든 영과 함께하시지만, 그러나 공간(空間, space)안에 계시는 건 아니라는 이 놀라운 사실은 단순한 자연적 사고(思考, a merely natural idea)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영적 사고(a spiritual idea)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 사고로는 할 수 없는 이유는, 자연적 사고는 공간과 관련되기 때문인데, 이 공간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다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크고 작은 것들은 다 공간을 차지하는데, 모든 길이, 넓이, 높이를 갖는 것들은 공간을 차지합니다. 즉 모든 측정, 모양 및 형태를 가진 것들은 다 공간이라는 것을 차지하지요. 이것이 바로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사고로는 하나님의 편재를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 하는 걸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일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admit into i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이때는 비록 그가 자연적 사고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걸 이해할 수 있는데요, 이런 이유로, 무엇이든 영적인 걸 먼저 말하고, 그걸 가지고 이어서 나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 사고는 공간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는 게 없고(Spiritual idea derives nothing from space), 대신 모든 걸 상태(狀態, state)로부터 나오게 합니다. 상태라는 것은 사랑, 생명, 지혜, 애정(affections)및 거기서 나오는 기쁨 등, 일반적으로 선과 진리의 속성입니다. 즉 이런 것들을 다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정말 영적인 것들에 대한 사고(An idea of these things which is truly spiritual)는 공간하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이 사고는 공간적 사고(the ideas of space)보다 높아서 마치 하늘이 땅을 내려다보듯 그걸 내려다보는데요, 이 영적 사고는 이렇게 공간적 사고보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과 영들 역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리고 공간이라는 게 없으면 그 대상(objects)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천사들과 영들이 있는 영계에 지상의 공간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실제 공간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보이는 외관(appearances)일 뿐입니다. 이는 지상의 경우처럼 고정되거나 일정하게 정해진 게 아니기 때문인데, 영계의 공간은 길어지거나 짧아질 수 있고, 바뀌거나 다양하게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공간이라는 걸 이곳 자연계에서처럼 측량이라는 걸 해서 정할 수가 없는데요, 이런 건 그 어떤 자연적 사고로도(by any natural idea)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영적으로만(only by a spiritual idea)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영적으로 공간 간 거리(The spiritual idea of distances of space)는 선 간 거리(distances of good)나 진리 간 거리(distances of truth)와 같은데, 이는 선과 진리의 상태에 따른 친밀한 정도와 닮은 정도(affinities and likenesses)입니다. (DLW.7) That the Divine, that is, God, is not in space, although omnipresent and with every man in the world, and with every angel in heaven, and with every spirit under heaven, cannot be comprehended by a merely natural idea, but it can by a spiritual idea. It cannot be comprehended by a natural idea, because in the natural idea there is space; since it is formed out of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and in each and all of these, as seen by the eye, there is space. In the world, everything great and small is of space; everything long, broad, and high is of space; in short, every measure, figure, and form is of space. This is why it has been said that it cannot be comprehended by a merely natural idea that the Divine is not in space, when it is said that the Divine is everywhere. Still, by natural thought, a man may comprehend this, if only he admit into i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For this reason something shall first be said about spiritual idea, and thought therefrom. Spiritual idea derives nothing from space, but it derives its all from state. State is predicated of love, of life, of wisdom, of affections, of joys therefrom; in general, of good and of truth. An idea of these things which is truly spiritual has nothing in common with space; it is higher and looks down upon the ideas of space which are under it as heaven looks down upon the earth. But since angels and spirits see with eyes, just as men in the world do, and since objects cannot be seen except in space, therefore in the spiritual world where angels and spirits are, there appear to be spaces like the spaces on earth; yet they are not spaces, but appearances, since they are not fixed and constant, as spaces are on earth; for they can be lengthened or shortened; they can be changed or varied. Thus because they cannot be determined in that world by measure, they cannot be comprehended there by any natural idea, but only by a spiritual idea. The spiritual idea of distances of space is the same as of distances of good or distances of truth, which are affinities and likenesses according to states of goodness and truth. (DLW.7)

 

이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는데요, 먼저 사람의 사고가 그저 자연적이기만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그러나 공간 안에 계시는 건 아니라는 걸 도저히 이해 못 한다는 것과, 둘째, 그러나 천사들과 영들은 반대로 아주 명료하게 이해한다는 것, 셋째, 그 결과, 사람 역시 그가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 즉 영적 사고를 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생각하는 주체가 육(body)이 아니라 영(spirit)이기 때문이며, 영적 사고라는 것이 자연적이지가 않고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DLW.8) From this it may be seen that man is unable, by a merely natural idea, to comprehend that the Divine is everywhere, and yet not in space; but that angels and spirits comprehend this clearly; consequently that a man also may, provided he admits into his though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and this for the reason that it is not his body that thinks, but his spirit, thus not his natural, but his spiritual. (DLW.8)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걸 이해 못하는데요, 그 이유는 자연에 대한 그들의 사랑, 즉 그들의 사고를 자연에서 영적 빛으로 높이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로지 공간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공간 안에서만 하는 건 자연의 확장(the expanse of nature)에 대해서 하는 것과 같은 건데요, 예를 들면, 하나님의 편재에 대해 말하면, ‘아, 하나님은 우주만큼 크신 분인가 보다’로 이해하는, 그런 식이지요.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는 게 아니라는 이 사실이 먼저 전제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즉 이런 사실에 대한 지식과 나름의 퍼셉션(perception, 지각) 없이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 곧 사랑과 지혜에 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그래서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 편재하심, 전지하심, 전능하심, 무한하심과 영원하심(divine providence, omnipresence, omniscience, omnipotence, infinity and eternity) 등 연이어 다루게 될 주제들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DLW.9) But many fail to comprehend this because of their love of the natural, which makes them unwilling to raise the thoughts of their understanding above the natural into spiritual light; and those who are unwilling to do this can think only from space, even concerning God; and to think according to space concerning God is to think concerning the expanse of nature. This has to be premised, because without a knowledge and some perception that the Divine is not in space, nothing can be understood about the Divine life, which is love and wisdom, of which subjects this volume treats; and hence little, if anything, about divine providence, omnipresence, omniscience, omnipotence, infinity and eternity, which will be treated of in succession. (DLW.9)

 

2023-06-16(D6)-C.1.4.1,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God is not in Space)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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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세 번째 주제,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7, 8, 9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비록 천사들과 영들이 있는 영계에 지상의 공간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실제 공간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보이는 외관(appearances)일 뿐입니다

 

다음은 오늘 메인 글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먼저 좀 읽어야 하는 그런 글들인데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19장, ‘천국 안의 표상과 외관(Representatives and Appearances in Heaven)’, 그리고 22장, ‘천국의 공간(Space in Heaven)’에서 부분 발췌했습니다만 꼭 각 장 전체를 다 읽어보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먼저 ‘외관(appearances)’입니다.

 

천사들의 내면에 상응하는 모든 것은 그들의 내면을 그대로 그려내기 때문에 ‘표상(表象, representatives)’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그것이 천사들 내면의 각 상태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외관(外觀, appearances)’이라고 불린다. 그렇게 불리긴 해도 사실 천사들 눈에 보이는 것과 그들의 여타 감각에 지각되는 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지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생하며, 오히려 더 뚜렷하고 명료하며 사실적이다. (HH.175)

 

천국 안에 사물이 생기는 방식은 지상에 물질이 생기는 방식과 다르다. 천국의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오며, 천사들의 내면에 상응하여 형성된다. 천사들에게는 외면과 내면이 있다. 그들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과 신앙에, 따라서 의지와 사고력에 관계되어 있다. 의지와 사고력은 사랑과 신앙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외면은 내면에 상응한다. 외면적인 것이 내면에 상응한다는 것은 위 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와 13장, ‘천국은 지상의 모든 것과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the Earth)’에서 설명했다. 이러한 사실은 천국의 열과 빛에 대한 기록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즉 천사들은 그들의 사랑의 속성에 상응하는 열을, 그들 지혜의 속성에 상응하는 빛을 지니는 것이다. cf. 15장, ‘천국의 빛과 열(Light and Heat in Heaven)’ 천사들의 감각에 느껴지는 다른 모든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HH.173)

 

다음은 ‘공간(空間, space)’입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이 세상과 똑같이 장소와 공간 안에 위치한듯 보인다. 그러나 천사들은 장소나 공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HH.191)

 

영계에서의 장소변화는 모두 내면 상태의 변화(changes of state of the interiors)에 따라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장소변화는 바로 상태변화이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나는 주님에 의해 천국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곳을 여행한 것은 나의 영혼이었으며, 내 몸은 지상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천사들의 모든 이동도 이와 같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거리가 없으며, 거리가 없으므로 공간도 없다. 다만 공간 대신 상태와 그 변화가 있다. (HH.192)

 

장소변화가 이런 것이기 때문에, 가까운 것은 내면 상태가 비슷한 것이고, 먼 것은 내면 상태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가까이 있는 이들은 비슷한 상태에 있는 이들이고, 떨어져 있는 이들은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이들이다. 천국에서의 공간이란 오직 내면 상태에 상응하는 것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the external conditions corresponding to the internal states)이다. 세 천국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 그 각 천국 내의 공동체들 사이와 그 안의 개인들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역시 같은 원리로 지옥과 천국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지옥은 천국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HH.193)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천국에도 지상과 같이 공간이 있지만 그것이 공간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상태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천국의 공간은 이 세상 척도로 잴 수 없으며, 오직 그곳 천사들의 내면 상태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HH.198)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주께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사랑과 신앙의 정도에 맞게 임재하시기 때문이며, 주의 임재에 따라 모든 것이 가깝고 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의 임재가 천국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의 임재하심에 따라 천사들은 지혜가 생기고, 그들의 생각이 확산되며, 생각의 확산에 의해 천국의 모두는 서로 교통한다. 한마디로, 이로 인해 그들은 사람이 자연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HH.198)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다시 오늘의 메인 글들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2. ‘천사들과 영들 역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기 때문에

 

사람이 아직 지상에 있을 동안은 그 영은 육체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만, 사후, 즉 육체의 옷을 벗은 후에는, 이번에는 영체라는 옷을 입게 되지요. 육체에 눈이 있듯, 영체에도 영적 눈이 있습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자신의 영체에 속한 눈으로 천국 모든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천사들과 영들은 반대로 아주 명료하게 이해한다는 것, 그 결과, 사람 역시 그가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 즉 영적 사고를 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5) 하신 주님 말씀처럼, 주님 비추시는 사랑의 빛, 영적 빛에는 무슨 조건 같은 거 없습니다. 그냥 내가 마음을 열고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듯 주님을 바라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는 입류(入流, influx)에 의해 서서히 내 안에서 영적 사고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나의 내면의 첫 번째 단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4. ‘퍼셉션(perception, 지각)’

 

다음은 퍼셉션에 대한 설명입니다.

 

오늘날은 퍼셉션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퍼셉션은 일종의 무슨 내적 느낌(a certain internal sensation) 같은 건데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으며, 어떤 게 선인지 진리인지를 아는 것으로, 태고 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가장 잘 알려졌던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것은 천사들한테 있어 가장 퍼펙트(perfect)해서, 그들은 이것으로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무엇이고,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은 무엇인지, 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상대방이 어떤 퀄러티(quality)의 소유자인지를 단지 그의 접근과 그가 가진 생각 한 토막으로 알아차리며 관련 지식을 얻습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지요. 많은 사람이 양심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그러니 퍼셉션에 대해서는 더 모릅니다. (AC.104)

 

영어 ‘perception’을 ‘지각’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퍼셉션’으로 적는 이유는, 우리말 ‘지각’ 하나로 다 담을 수 없는 더욱 많은 의미와 뉘앙스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용어가 몇 개 더 있는데요, 예를 들면, ‘affection’이라든가 ‘charity’같은 것입니다. 각각 ‘애정’, ‘인애’ 등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저는 좀 망설여져서 거의 대부분, ‘어펙션’, ‘체어리티’로 그대로 옮기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위 104번 글을 통해 살짝 느끼셨겠지만 이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엔 사라지고 없는 영적 능력 내지는 통찰력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내면이 열린 사람들한테는 이 퍼셉션이 나타나고 있어 특히 주님의 아르카나에 대한 이해에 없어서는 안 될 통찰력이요, 빛이지 싶습니다. 제가 매일 이 컴펜디움 작업 때마다 맨 먼저 하는 기도가 바로 이 퍼셉션 기도, 곧 주님의 빛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랍니다.

 

오늘 작업은 그 분량이 과연 역대급입니다. 이렇게 장편의 내용을 나누는 게 과연 유익이 있을까, 괜히 힘들게 해드리는 건 아닐까 좀 고민도 됩니다...

 

주님은 천국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국보다 크셔서 천국 밖, 즉 피조 세계 밖에 계십니다. 그러니 더더욱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지요. 주님이 천국에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건, 아까 살핀 것처럼 ‘표상’, ‘외관’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주님한테서나 주님의 말씀한테서나 주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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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2)’ (2023/6/15)

 

 

하나님에 관하여’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 그 두 번째, 아래는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신인(神人)에 대한 무슨 신관(神觀)(the idea of a Divine Man)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의 신관은 확실하지가 않으며, 그런 불확실한 신관은 사실 신관이 아닙니다. 또 무한하거나 무한하지는 않은데 희미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우주로부터 신관을 형성하는 사람의 경우도, 그런 신관은 자연 숭배자들의 신관(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과 결합, 결국 자연으로 귀결되는데, 그래서 이 역시 전혀 신관 아닌 게 되는데요,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올바른 신관이 아닌 경우, 하나님과 신앙을 통한, 혹은 사랑을 통한 어떠한 결합도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모든 결합은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며, 그 결합의 효력은 그 대상의 퀄러티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은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If anyone without the idea of a Divine Man thinks of the Divine Itself, he thinks indeterminately, and an indeterminate idea is no idea; or he conceives an idea of the Divine from the visible universe without an end, or with an end in obscurity, which idea conjoins itself with 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 and also falls into nature, and thus becomes no idea.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re would not be any conjunction with the Divine through faith, nor through love. All conjunction requires an object, and the conjunction effected is according to the quality of the object. For this reason 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is called “a Mediator” and “an Intercessor,” but He mediates and intercedes with Himself. That the Divine Itself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John: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No one hath ever seen God; the only begotten Son,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set Him forth (John 1:18).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37) Ye have never heard the voice of the Father, nor seen His shape (John 5: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혹은 육(肉, the flesh)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해 불확실한, 즉 무슨 확실한 관념이 없는 반면, 자신이나 육이 아닌,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the Divine)을 생각하고 있으며, 고대의 현자들(the wise ancients)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으로 나타나실 때, 그래서 신인(神人, a Divine Man), 즉 사람 모습을 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AC.8705) Nevertheless, what is remarkable, all who think from themselves or from the flesh about God, think of Him indeterminately, that is without any determinate idea; whereas they who think of God not from themselves, nor from the flesh, but from the spirit, think about Him determinately, that is, they present to themselves 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 So the angels in heaven think of the Divine, and so the wise ancients thought, to whom also, when the Divine Itself appeared, it appeared as a Divine Man; (AC.8705)

 

2023-06-14(D4)-C.1.3.2,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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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The heavenly arcana contained in the Holy Scripture or Word of the Lord unfolded, beginning with the book of Genesis, 1749-1756)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스라엘의 모든 송사를 모세 혼자 감당하느라 피차 고생하는 걸 보고 지혜로운 권면을 하는 장면인데요, 19절,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Now hear my voice, I will counsel thee, and God shall be with thee; be thou for the people with God, and bring thou the words unto God.)’ 중 ‘너는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에 대한 라틴 표현인 ‘Deus(God)’ 대신 ‘Divinum(The Divine)’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아마도 deus라는 단어에 내포된, 로마 신화의 다신 숭배적 뉘앙스를 피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라틴 버전을 우리말로 옮긴 김은경 교수의 주석을 인용합니다.

 

 

2. 오늘 메인 본문의,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이 부분은, 솔직히 저도 그 의미가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좀 더 살피다가 깨닫게 되면 그때 전해드리겠습니다.

 

 

3.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은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아래는 주석 ‘Arcana Coelestia’ 8443번 글인데요, 이 글로 위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살짝 엿볼 수 있지 싶어 인용합니다.

 

신적 진리(Truth Divine)는 하나가 아닌, 여러 단계(degree, 등급)로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두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proceeds immediately from the Lord)진리인데, 이는 천사들의 이해를 초월(above the angelic understanding)합니다. 셋째 단계에 있는 신적 진리는 가장 내적 천국, 즉 삼층천(the inmost or thir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는 인간은 전혀 깨달을 수 없는(cannot in the least be apprehended by)진리입니다. 넷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중간, 즉 이층천(in the middle or secon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 역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neither is this intelligible to)진리입니다. 다섯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가장 바깥, 즉 일층천(in the ultimate or first heaven)에 있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빛을 받은 사람은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는(can be perceived in some small measure by man provided he is enlightened)진리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그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인간의 언어(human words)로는 표현할 수 없지요. 그러나 만일 인간의 머릿속 아이디어로 떠오르게 되면, ‘아, 그 경우가 이런 거구나!’ 지각, 믿는 역량이 생기게 되는 그런 진리입니다. 여섯 째, 마지막 단계의 신적 진리, 이 진리가 바로 인간에게 맞는, 인간이 수용, 지각할 수 있는(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진리이며, 그래서 말씀의 겉 글자의 뜻이 이것으로 된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구름(cloud)’이 표상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구름 속 영광(the glory in the cloud)’의 표상 역시 바로 이 내적 진리들(the interior truths)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종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AC.8443)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24:15-16)

 

 

4.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네, 이것이 오늘의 결론이겠습니다.

 

이것으로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를 마치고, 다음은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다(God is not in Space)’를 다루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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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1)’ (2023/6/13)

 

하나님에 관한 세 번째 주제,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모든 천국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이시라는 신관(神觀, idea of God) 말고 다른 건 없습니다. 이는 천국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모두 사람 형태(form like a man)를 띠고 있기 때문인데요, 천국에서는 천국을 이루는 것이 천사들에게 있는 신성(神性, the Divine which is with the angels)이며, 천국에서는 생각(thought)이라는 것이 천국 형태(the form of heaven)를 따라 뻗어나가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천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면서 천국과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 역시 모두 그 자신 내적으로(interiorly), 즉 자신의 영으로 생각할 때는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그건 바로 이런 사실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모든 천사와 모든 영이 그 형태에 있어 완전한 사람인 것은 바로 이 사실, 곧 하나님은 사람이시다라는 이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이런 결과는 천국의 형태에서 오는데요, 천국은 가장 큰 데와 가장 작은 데 어디서도 그 모습이 같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사람과 같은 형태라는 것은 저서, ‘천국과 지옥’ 8, 9, 10, 11(글 번호로는 HH.59-86)에서 보실 수 있으며, 생각이 천국 형태를 따라 뻗어나간다는 것도 관련 글(HH.203, 204)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창세기(1:26, 27)를 통해 알려졌는데요,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DLW.11) In all the heavens there is no other idea of God than that he is a man. This is because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is in form like a man, and because it is the Divine which is with the angels that constitutes heaven and inasmuch as thought proceeds according to the form of heaven, it is impossible for the angels to think of God in any other way. From this it is that all those in the world who are conjoined with heaven think of God in the same way when they think interiorly in themselves, that is, in their spirit. From this fact that God is a man, all angels and all spirits, in their complete form, are men. This results from the form of heaven, which is like itself in its greatest and in its least parts.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is in form like a man may be seen in the work Heaven and Hell (n. 5986); and that thoughts proceed according to the form of heaven (n. 203, 204). It is known from Genesis (1:26, 27), that men were created after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God also appeared as a man to Abraham and to others. (DLW.11)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네 번째 주제,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11번 글입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은 모두 3부 63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를 참고하세요.

 

1부 천국(Part I: Heaven)(1-43)

 

2부 영들의 세계와 인간의 사후 상태(Part II: The World of Spirits and Man’s State after Death)(44-55)

 

3부 지옥(Part III: Hell)(56-63)

 

 

※ 아래는 위 메인 본문에서 참고하라는 8-11장 제목입니다.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59-67)

 

9장,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68-72)

 

10장,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73-77)

 

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78-86)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천국의 형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는 마치 우리가 3차원 공간인 자연계에 갇혀(?) 살기 때문에, 그리고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우리의 모든, 사물을 인식하는 체계, 사고방식 자체가 ‘시간과 공간’, 즉 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천국 모든 구성원 역시 그곳 형태에 기반한 모든 사고 및 인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천국 형태의 출발점, 곧 천국이 비롯된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형태를 따라 주님의 모든 신성이 온 피조 세계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의 사람인 것도, 그리고 이런 사람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천국 수많은 사회도, 더 나아가 그런 사회 전체로 이루어지는 천국 전체의 모습도 주님 앞에는 한 사람 모습인 것은 곧 주님이 사람 모습을 하신 사람이시기 때문이라는,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비(arcana)를 우리는 지금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어제 나눈 HH.59번 글과 비슷한 글인데요, 천국이 사람 모습이라는, 천국 형태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글입니다.

 

천국이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임을 밝힌 이유는, 이것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앞으로 천국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천국의 형상에 대한 분명한 개념도 가질 수 없고, 주님과 천국 간의 결합이나 천국과 사람 간의 결합, 또 영계에서 자연계로 흘러드는 입류(入流, influx)나 상응(相應, correspondence)에 대한 것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앞으로 이 모든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그 전제로 천국의 형태를 미리 설명한 것이다.’ (HH.67)

 

 

2.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은 다들 꼭 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에 그래도 가장 포퓰러한 책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의 저작들에 대한 입문서라 해도 괜찮은 책인데요,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을 접하신 분들은 그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 읽는 순간, 마치 개안(開眼)을 하듯 영이 열리며, 그 모든 내용을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렇게 쭈욱 쭉 흡수하시는 반면, 또 어떤 분들은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고 하셔요... 참고로, 저는 전자의 경우였고요, 후자와 같은 경우는 참... 저로서는 도저히 그 이유와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이에 관한 스베덴보리가 남긴 글을 읽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아래는 위 책을 구매할 수 있는 링크입니다. 그냥 편의상 알려드리는 것이고요, 저는 이 서점과 무슨 관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https://bit.ly/45XE1jr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spiritual-world.com

 

 

3. 다음은 위 메인 본문에서 참고하라고 한, ‘생각이 천국 형태를 따라 뻗어나간다’는, ‘천국과 지옥’ 23장, ‘천국의 형태가 구성원 간의 관계와 교통을 결정한다(The Form of Heaven That Determines Affiliations and Communications There)’ 203번 글 일부입니다.

 

사람은 천국 형태를 띠는 정도만큼 천국에 있고, 사실상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 된다.(HH.57) 따라서 그 정도만큼 지성과 지혜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개인의 사고력(understanding)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 그리고 의지(will)에서 나오는 모든 애정은 천국의 형태를 따라 놀라울 정도로 두루 퍼져나가 그곳 공동체들(societies)에 전달되며, 반대로 그 공동체들의 모든 생각과 애정도 개인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감정은 모두 자기 안에 있고 밖으로 뻗어나가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들이 보기에 생각은 멀리서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우리 시각이 멀리 있는 물체에 가 닿아 거기 보이는 형체에 초점을 맞추듯이, 우리 내적 시각(the interior sight)인 사고력의 시각도 영계에서 그렇게 뻗어나간다...

 


일곱 배로 밝은 빛 가운데 거니시는 하루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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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3)’  (2023/6/12)

 

하나님에 관한 두 번째 주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오늘은 세 번째 마지막 시간입니다.

 

(8) 한 분이 아닌 여러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한테는 교회와 관련된 일에서 일관성(coherence)이라는 걸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in his belief)한 분 하나님을 인정하고, 마음으로(in his heart)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지상에 있는 성도들하고의 커뮤니언(communion)과 하늘에 있는 천사들하고의 커뮤니언, 둘 다 가운데 있습니다. 이들 그룹들을 일컬어 ‘커뮤니언들’(communions)이라 하는데요, 실제로 이들은 서로를 향해 커뮤니언들입니다. 이들 커뮤니언들이 한 분 하나님 안에 있고, 한 분 하나님이 이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이들은 천사들의 천국 전체(the entire angelic heaven)와,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그곳 모든, 그리고 개별 주민들(inhabitants)하고의 결합(conjunction)가운데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한 아버지의 자녀들, 그리고 후손들과 같기 때문인데, 그 성향이나 매너, 그리고 특징들이 서로 비슷, 이걸 통해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의 천국은 그 소사이어티들(societies)에 있어 선에 대한 사랑의 모든 다양함에 따라 하모니를 이루며 배열되어 있는데요, 이들 다양함들의 중심엔 하나의 유니버설한 사랑(one universal love),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love to God)이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한 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마음으로 예배하는 모든 사람이 태어나는데요, 이 한 분 하나님이 바로 이 온 우주의 창조주(the creator of the universe)이기도 하시며, 구속자요 거듭나게 하시는 분(the redeemer and regenerator)이기도 하십니다. (TCR.15)

 

(8) With men who acknowledge several Gods instead of one there is no coherence in the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He who in his belief acknowledges and in his heart worships one God is both in the communion of the saints on earth and in the communion of the angels in heaven. These are called “communions,” and are communions, because such are in the one God and the one God is in them. Moreover, they are in conjunction with the entire angelic heaven, and, I might venture to say, with all and each of its inhabitants, for they are all like the children and descendants of one father, whose dispositions, manners, and features are similar, whereby they recognize each other. The angelic heaven is harmoniously arranged in societies in accordance with all the varieties of the love of good, and these varieties center in one universal love, which is love to God; from which love all are born who in belief acknowledge and in heart worship the one God, who is both the creator of the universe and the redeemer and regenerator. (TCR.1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Containing the universal theology of the new church foretold by the Lord in Daniel 7:13–14 and Revelation 21:1–2, 1771) 2장, ‘창조주 하나님’(God the Creator)의 첫 번째 주제, ‘하나님의 유일성’(The unity of God)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15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이 일종의 신학적 공리(公理, axiom)가 비록 이 지상에서는 그다지 와닿지도, 실감 나지도 않을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1758) 8장, ‘천국 전체는 모두 합해서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에 나오는, 글 번호 59번 글인데요, 왜 그런가 하는 이유를 나름 유추해 볼 수 있는 그런 글이어서 소개합니다.

 

천국의 총합(heaven in its whole complex)이 한 사람의 모양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arcanum)지만, 천국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과 그에 관한 세부 사항들을 아는 것이 천사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angels)을 이루는 핵심이다. 천사들이 이 사실을 보편 원리(general principle)로 삼고 있지 않으면 거기 의존하는 많은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공동체(societies)도 각각 사람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을 ‘가장 큰 신적 사람’(the greatest man and the Divine man)이라고 부른다. 신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다.’(HH.59)

 

 

2. ‘천사들의 천국 전체와 결합’(conjunction with the entire angelic heaven)

 

이 천사와의 결합 관련, 사실은 ‘연합’과 ‘결합’을 엄밀히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어 다음 글을 소개합니다.

 

이 글 역시 ‘천국과 지옥’ 34장, ‘천국과 사람과의 말씀에 의한 결합’(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 by Means of the Word) 304번 글입니다.

 

사람은 주님과는 연결(connection)되고 결합(conjunction)되도록 창조되었으나 천사와는 단지 연합( affiliation)만 하도록 되어 있다. 사람이 천사와 연합은 하나 결합은 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은 마음의 내면성에 있어서는 천사와 똑같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의지(will)와 사고력, 즉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에 있어서 천사와 같다. 따라서 만일 사람이 신적 질서(the Divine order)에 따라 살면 그는 사후에 천사가 되고, 천사와 똑같이 지혜로워진다. 그러므로 ‘사람과 천국과의 결합’(the conjunction of man with heaven)이라고 할 때는, 사람은 주님과의 결합과 천사와의 연합(conjunction with the Lord and affiliation with the angels)을 의미한다. 천국은 주의 신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천사의 자아(the angels’ own [proprium])에서 비롯된 것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HH.304)

 

 

3. ‘선에 대한 사랑의 모든 다양함’(all the varieties of the love of good)

 

천국은 무슨 한 군데 평평한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두 나라, 세 천국으로 되어 있으며, 각 천국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규모 사회로 되어 있고, 각 사회마다 또 많게는 수십만, 적게는 몇 명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다양함은 곧 주님의 선의 다양함인데요, 위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며, 마치 밤하늘의 별들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이 이번에는 또 어떤 통일적 하모니까지 이룬다고 하니... 저, 개인적으로는 한 가지 소원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에게도 스베덴보리처럼 영계 체험을 허락하여 주셨으면 하는... ㅎㅎㅎㅎㅎ

 

 

이것으로 2강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를 마치고, 다음은 3강, ‘하나님이 곧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를 두 번에 걸쳐 다루겠습니다.

 

수학에서도 공리(公理, axiom, 특별히 무슨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진리)의 토대가 참 중요한 것처럼, 지금 다루는 이런 신앙의 공리들 역시 우리 신앙의 토대와 기초를 든든, 튼튼, 굳게 하여 줄줄 믿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3-06-12(D2)-C.1.2.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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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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