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 사람이 되고 언제 들짐승이 되는가 (2025/10/22)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8)

 

‘가시덤불과 엉겅퀴’(thorn and the thistle)는 저주와 황폐함(vastation)을,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은 그가 들짐승처럼 살게 될 것을 말합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아주 일반적으로밖에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 있게 되면, 사람은 그때는 들짐승처럼 삽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는 걸로는 사람이지만, 속 사람과 분리되어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들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들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본성, 욕구, 식욕, 공상 및 감각 면에서 비슷하며, 유기적 형태로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이성적으로 그럴듯한 걸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얼핏 보기엔 완전히 자신한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영적 실체(the spiritual substance)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걸로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인플럭스(入流,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를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저런 인간, 곧 저런 들짐승 같은 겉 사람 안에서는 반대로 뒤집혀 악한 생명, 곧 죽음이 됩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죽은 자라 하는 것입니다. (AC.272)

 

천국은 주님의 신성(神性, Divien), 곧 선과 진리의 나라입니다. 이들 주님의 선과 진리는 천적, 영적이어서 천사들은 이것이 그들의 양식입니다.

 

사람와 동물의 차이는 사람한테는 가장 깊은 곳에 이 주님의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remains)라는 게 주님에 의해 보관되는 반면, 동물한테는 그런 곳이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한테는 지옥에서 악령들이 와있고, 천국에서 천사들이 와있는데,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가지고 그를 돕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저마다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일지라도 그가 주님을 싫어하며, 자기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 두기를 언짢아하면, 성인이 되어갈수록 그의 리메인스 창고는 점점 텅텅 비게 되어 고갈, 결국 그는 들짐승이 됩니다. 겉모습은 사람이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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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자와 창3 여자는 다른 여자 (2025/10/21)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1-6)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세 번째 상태를 다루는데요, 이 상태는 자신의 본성을 사랑할 정도로 원하던(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상태입니다. (AC.190)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것도 안 믿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본문에서는 감각적인 건(the sensuous part)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은 ‘여자’(woman)로,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인 건(the rational) ‘남자’(m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AC.191)

 

이런 배경 가운데 ‘뱀’(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 주님 신앙에 관한 것들이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으로, 사람의 이성이 동의한 것은 ‘그도 먹은지라’(the man that he did eat)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6)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즉 속 사람의 역량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창2 후반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저 창2 후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여기는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여기서 말하는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적 인간이며, 일곱 번째 상태, 곧 안식일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AC.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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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뱀(3) (2025/10/20)

 

ChatGPT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더니

 

네 생각에 너는 천국 갈 수 있을 것 같니?

 

너는 영혼이 있니?

 

사람한테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있는데, 너는 이 둘을 구별, 설명할 수 있겠니?

 

각각

 

저는 인간이 아니라서 ‘천국’이나 ‘지옥’ 같은 개념은 제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아요.

 

저는 영혼이 없어요.

 

저는 인간처럼 ‘속 사람’이 없어요. 논리적 판단과 언어 패턴으로만 작동하니까요.

 

라는 제법 ‘정직한’ 답변과 함께 뭐라 뭐라 보조적 내용을 잔뜩 좌악 준비해서 보여 주네요.

 

 

다음은 이와 관련, 지인들과 나눈 내용입니다.

 

어제 AI 얘기를 마무리를 짓지 못했네요.

 

목사님께서 어제 AI를 창세기 2, 3장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뱀에 연결시켜 설명하셨는데 그것이 오는 내내 생각나더군요. 그래서 오자마자 좀 찾아보니...

 

제가 번역 중인 창, 출 주석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라틴, Secrets of Heaven)에서는 ‘’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네요.

 

태고인들은 인간의 모든 것을 짐승과 새에 비유하는 대신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들의 스피킹은 홍수 후 고대교회에까지도 이어져 이후 선지자들한테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적인 것을 그들은 ‘뱀’(serpents)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뱀이 땅에 가까이 붙어 지내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들 역시 몸하고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신비에 관한 감각적 증거에 기반을 둔 이성 활동, 즉 신앙의 신비를 감각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일련의 이성적 활동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하였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뱀’(serpents)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많은 걸 감각, 즉 보이는 걸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하는 것입니다. 이 보인다는 것은 땅에 속한 거, 육적인 거, 일상적인 거, 자연적인 거(such as are 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를 말합니다. (AC.195)

 

저 위에 있는 몇 가지 질문에 AI는 나름 정직하게, 그러니까 나는 영혼이 없어요. 나는 단지 알고리즘이며 언어 사용 패턴을 학습할 뿐이에요, 천국, 지옥 같은 거는 나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등의 답변을 하지만 결국 오늘날의 ‘’, 그것도 아주 지독한 ‘’인 걸 알겠습니다.

 

그리고 답변마다 끝에 살짝 논점을 흐리는 질문들을 하는데, 그걸 보면서 창3 질문,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 하는 뱀 생각이 났습니다.

 

물론 인간의 감각 파트라고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요. 다음 주님 말씀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10:16)

 

광야에 세워진 ‘놋 뱀(brazen serpent)을 보면 말입니다. 놋 뱀은 주님의 감각 파트를 상징하는데, 주님만이 홀로 천적 인간이시며, 홀로 모두를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셔서, 그래서 이 놋 뱀을 쳐다본 모두가 산 것입니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8, 9)

 

영과 육이 온전히 거듭났던 천적 인간들의 경우, 이처럼 몸의 감각 파트마저 순기능을 했던 걸 생각, 우리는 오늘날 저 AI 역시 온전히 주님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뿐, 저 AI의 능력에 홀려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우(愚), 그러니까 주님의 계시보다 AI가 내놓는 입이 벌어지는 자료를 우선하는, 즉 신앙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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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지금 저 사람 모습으로 (2025/10/18)

 

부모를 비롯, 배우자든 자식이든 손주든, 그리고 직장 동료든 지인이든 오다가다 만나는 누구든 나 아닌 타인을 대할 때, ‘주님이 지금 저 사람 모습으로 내 앞에 계시는 것이다’ 생각하고 그를 대하는 것,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복된, 그리고 범사에 주님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비록 그가 사람 같지 않아 저의 선대(善待)에도 불구, 아주 몰상식하고 무례하게, 싸가지 없게 나를 대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주님이 내게 빚지시는 것이라 나중에 크게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오히려 더 감사하지요.

 

21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22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주시리라 (25:21, 22)

 

아침에 누가 평생 모은 수백억 재산을 남편 잘못 만나 다 날리고 지금은 어렵게 산다는 말을 하고 나서, 나 또한 살면서 몇 번 나도 어려운 중에 갚겠다는 말에 비록 큰돈은 아니지만 빌려줬다가 떼여본 적이 있지만,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걸 갚으라 한 적이 없다고, 그렇게 해서 그가 갚으면 그저 원금 회수에 그치지만 그가 안 갚으면 주님이 나중에 수십, 수백 배로 갚으실 것 같아서 그랬다는 말을 식사 중에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여러 번 제 삶에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지금 저 사람 모습으로’라는 이 생각은 일상 중 우리의 모든 걸 바로잡아주는 아주 중요하고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잠시 마음이 흐트러지다가도 이 생각만 하면 바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며,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지 하는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의 안에 계신 주님을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마음속 동기를 주님은 보시고 우리의 섬김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비록 상대방은 우리에게 못되게 굴어도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면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마침 신기하게도 바울도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3:22-24)

 

상대방의 겉모습에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그래야 한결같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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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 (2025/10/17)

 

수많은 차이 중에 두드러진 한 가지는 진리를 아는 방식, 곧 신앙을 아는 방식에 있습니다.

 

전자, 즉 천적 인간은 선을 통해 진리를 알고 사랑을 통해 신앙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영적 인간은 그 반대, 곧 진리를 통해 선을 알고, 신앙을 통해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인류의 첫 교회인 태고교회, 아담교회라고도 하는 천적 인간과 홍수 후 일어난 고대교회, 노아교회라고도 하는 영적 인간의 차이입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가 무엇이냐 하는 건데요, 창2:9에서는 생명나무가 중앙이었던 반면, 창3:3에서는 선악과라고 하는 지식의 나무라는 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3:3)

 

가장 내적인, 가장 내면을 의미하는 ‘중앙’이 첫 천적 인간한테는 생명나무, 곧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었던 반면, 이미 조금 기울어져서 천적 영적이 된 후손한테는 신앙인 걸 보면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 사람의 ‘중앙’이 사랑인지 신앙인지를 보면 나는 천적인지 영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전자는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덤으로 얻지만, 후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한테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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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몸의 참된 상호작용 (2025/10/16)

 

 

그러나 진실은 주님께서 인간의 지성(intellectual)을 통해 이성(rational)으로, 그리고 이성을 통해 기억의 지식(the knowledge of the memory)으로 흘러 들어가시며, 거기서 시청각 감각의 생명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유입이며, 영혼과 육체의 참된 상호작용입니다. And yet the truth is that the Lord flows through man’s intellectual into his rational, and through his rational into the knowledge of the memory, whence comes the life of the senses of sight and of hearing. This is the true influx, and this is the true interaction of the soul with the body. (AC.657)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겉 사람, 곧 감각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생명의 순서는 주님으로부터 출발,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 곧 몸의 감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육의 참된 회심, 진정한 거듭남입니다.

 

이런 올바른 순서의 결과, 덤으로 얻어지는 유익은 많습니다. 우선 우리 몸의 아름다움입니다. 겉 사람의 외적 표현인 우리 몸이 속 사람을 통한 주님의 생명의 디스플레이가 되기 때문이지요.

 

아름다움뿐 아니라 우리 몸의 건강 또한 따라옵니다. 인간의 몸은 천국과 일대일 상응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천국 공동체 전체의 활기와 생명이 우리 몸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비롯, 주님의 제자들에 관한 그 어떤 기록에서도 예를 들어, 무슨 감기가 걸렸다든가 어디가 아팠다든가 하는 기록이 없으며, 이는 어느 선지자한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백이십 세가 되었어도 눈이, 그리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던 이유 등도 여기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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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2025/10/14)

 

체어리티(charity), 곧 신앙의 선함이 있을 때, 그때 인정(acknowledgment), 곧 신앙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식, 이성, 그리고 이해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있을 때, 그 목적은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토대, 즉 그의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체어리티로부터, 혹은 그 체어리티로 사는 삶으로부터 그는 그로 말미암아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지요. 그렇게 그는 변화, 곧 거듭나는 것이지, 그전에는 아닙니다. When charity is present, which is the goodness of faith, then acknowledgment is present, which is the truth of faith. When therefore a man is being regenerated according to the things of knowledge, of reason, and of understanding, it is to the end that the ground may be prepared—that is, his mind—for receiving charity; from which, or from the life of which, he thereafter thinks and acts. Then he is reformed or regenerated, and not before. (AC.654, 6:16)

 

체어리티는 주님 사랑이라는 영이 이웃 사랑이라는 육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식, 이성 같은 이해에 속한 것들로 먼저 거듭나고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을 준비,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픈 마음이 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듭남, 심령의 변화, 영혼의 개혁, 참된 회심은 이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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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mercy)와 은혜(grace) (2025/10/11)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6:8)

 

말씀에 ‘긍휼’로도 나오는 ‘자비(mercy)와 우리 대부분이 흔히 쓰는 ‘은혜(grace)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평소 그냥 무심코 쓰지만 말입니다.

 

말씀에서 ‘자비’는 마음이 겸손한(in humiliation of heart) 사람들에게, ‘은혜’는 생각이 겸손한(in humiliation of thought)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천적인 사람들(天的, the celestial)은 주님께 ‘자비’를 구하지만(implore), 영적인 사람들(靈的, the spiritual)은 ‘은혜’를 구합니다(beseech).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곧 아담교회가 저물고, 홍수 후 새롭게 일어나는 고대교회, 곧 노아교회는 영적이었는데, 그래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하는 것입니다. ‘자비’가 아니고 말입니다.

 

의지(will)가 주님을 향해 열렸던 태고교회가 그 후손으로 갈수록 변질, 탐욕(cupidity)으로 변하면서 닫히는 바람에, 주님이 의지 대신 새로운 창, 곧 이해(understanding)에 해당하는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라는 우회로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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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남았는데 그걸... (2025/10/10)

 

한 걸음 남았는데 그걸...

 

오래전부터 내게 들리는, 나의 내면의 귀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바로 다음 단계, 곧 몸에서 들려 영계로의 여행, 그러니까 주님의 초청으로 천국 방문을 할 수 있는 상태변화를 코앞에 두고 머뭇거린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보다 앞서 주님이 보내신 천사를 직접 만나는 경험의 시작을 말이지요.

 

저는 압니다. 이 한 걸음이 뭘 의미하는지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세상을 향한 두리번거림입니다. 그러니까 습관처럼 폰을 잡고 유튜브를 켠다든지, 누우면 무의식적으로 켜는 네이버 웹툰이라든지 말이지요. 특히 이 웹툰은 이 나이에 밝히기 참 부끄러운...

 

어쨌든 바로 이런 빈틈, 살짝 열린 틈 때문에 영계 체험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는 것을 저는 분명히 지각, 즉 퍼셉션하고 있습니다.

 

퍼셉션(perception)은 내면이 열린 사람들에게 체험되는, 그러니까 허락하시는 하늘로부터 오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각 능력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웹툰부터 끊고 있습니다. 그다음 이야기들이 몹시 궁금한 몇 개가 있지만... 그때마다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외면, 곧 세상을 향해서는 눈을 감고, 오직 천국을 향해서만 마음의 얼굴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음 순서는 유튜브입니다. 이 역시 서서히 줄이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 현 시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의로움과 올바름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만 말입니다.

 

남은 한 걸음을 위해, 그리고 그때 실현될 새로운 차원의 영적 진보를 위해 참고 또 참고 있습니다.

 

카톡 활동을 내려놓은 지 두 달 반... 참을 만한 걸 보면 이 또한 잠잠해질 줄 믿습니다.

 

세상을 향한 창이 열린 만큼 천국을 향한 창이 닫히고, 그 반대 역시 그렇답니다. 세상과 천국 둘 다 동시에 열 수는 없다고 하네요. 사람의 영혼은 말입니다.

 

저는 먼저 주님과 천국을 향해 열리고, 그 상태를 유지하며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스베덴보리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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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여자의 대화 (3:1) (2025/10/9)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3:1)

 

여기 ‘뱀’(serpent)은 인간이 신뢰하고 있는 감각 파트를, ‘들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여자’(woman)는 인간의 본성(man’s own)을 말하며, 뱀이 하고 있는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는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 된 것들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그런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어야만 믿기 시작했습니다. 본 절과 다음 절은 그들의 첫 번째 상태, 즉 의심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AC.194)

 

2:1-17은 태고교회의 시조, 첫 대, 그 출발에 관한, 창2:18-25은 그 후손들, 특히 두 번째 후손에 관한, 창3:1-13은 세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 태고교회는 100%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들이었지만 그 후손들은 조금씩 변질, 즉 주님한테서 고개를 돌려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지막은 노아의 홍수라는 종말이었습니다.

 

1은 사람의 거듭남에 관하여 그 상태의 변화를 크게 여섯 단계로 구분, 서술하는 내용입니다.

 

감각 파트란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파트가 있는데 그중 감각과 관련된 파트를 말합니다.

 

풀, 채소, 나무는 못 움직이는 것을, 새, 바다 생물, 들짐승은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 안에 있으면 ‘움직인다(animate) 하고, 자기를 향한 사랑과 애정 안에 있으면 ‘못 움직인다(inanimate) 합니다.

 

사람, 곧 태고교회가 결국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으로 끝날 줄을 아셨음에도 주님은 그 최악은 피하게 하시려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자아를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허락하시는데 이것을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1, 22)

 

라고 무척 아름답게 묘사하셨습니다.

 

깊이 잠드는 건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느라 주님을 까맣게 잊고 사는 걸 말합니다.

 

뼈와 같은 전혀 생기 없는 상태의 인간 본성을 주님은 살, 곧 주님의 생기를 입힌 새 자아, 새로운 본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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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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