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은 자기 제사를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그 이유를 말씀하셨으나 결국 그는 들에 있을 때 아우 아벨을 쳐죽이지요. 이 정도로도 그의 악은 충분한데 심지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시는 여호와 앞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 대답하는 등 정말 뻔뻔하기까지 합니다.
그랬던 그가, 여호와의 설명, 곧 그가 자초한, 앞으로 전개될 삶의 무게 앞에 절망하며,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자 여호와께서는 ‘네가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하시는 대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시며, 사람들이 그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여러분, 이 부분이 이해가 되십니까?
다음은 말씀을 속뜻, 즉 내적 의미로 읽는 천사들이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이렇게 밖에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아벨은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 신앙, 가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faith without charity)을 말합니다. 가인의 제사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며, 그래서 주님이 결코 받으실 수 없으셨던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인류의 역사는 결국 이 가인의 역사로 흐를 걸 아시고는 이 가인이라는 신앙을 통해서 아벨이라는 신앙을 일으키실 것을 섭리하셨으며, 그래서 이 가인 신앙을 보호하기로 하시고, 그래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즉 이 신앙을 건드리면 그걸 신성모독(神性冒瀆, sacrilege)으로 보겠다 하신 것입니다.
타인의 신앙이 나와 다르다 하여 함부로 말로, 행동으로 그의 신앙에 폭행을 가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 역시 주님이 공을 들이시는 사람이며, 나만 가만히 있으면, 즉 훼방을 놓지 않으면, 그는 어쩌면 주님의 인도대로 체어리티의 사람, 아벨 신앙의 후손이 될 수도, 그러니까 지금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신앙인이지만, 그의 안에 신앙심이라는 게 남아있기만 하면 주님은 그걸 가지고 일을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창세기 1장부터 쭉 읽다 보면, 아직 지상에 사람은 가인까지 셋뿐인데, 아벨은 죽었으므로, 갑자기 가인의 입에서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는 말이 나옵니다. 나중엔 놋 땅에 거주하며 아내까지 얻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요?
천사들은 창세기 11장 아브람 전까지는 그 등장인물들을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그 이름으로 부르던 교회로 봅니다. 다른 말로는 그 이름으로 부르던 신앙이나 교리로 보지요. 참고로 아브람 전까지는 실제 역사가 아니며, 그 전까지의 장구한 역사(※ 참고로, 저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인 45, 6억 년을 받아들입니다)를 일종의 스토리처럼 엮은 것입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그러므로 아담, 가인, 아벨 등은 모두 교회를 말합니다. 즉 아담이라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서 두 종류의 신앙이 일어났는데, 그 하나가 가인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다른 하나는 아벨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라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특별히 에벨(창11) 전까지 등장하는 인명(人名)들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눅22:63-65)
영어 성경에는 주님의 눈을 가리는 게 아니라 얼굴을 가리고 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에는 주님께서 아론에게 명하시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하십니다. 즉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사랑과 자비는 모든 악과 거짓을 이기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는 것은, 타락한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 말씀의 생명인 사랑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교리가 바로 사랑 없는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입니다. (이상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설교에서 인용)
이 ‘오직 믿음’(Faith Alone) 교리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심판의 대상이 모두 이 ‘오직 믿음’ 교리에 함몰된 교회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저는 이 교리가 왜 이토록 위험한 교리일까 좀 생각해 봤는데요, 그것은...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곳인데, 이 ‘오직 믿음’ 교리로는 이런 사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즉 평소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소홀,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1, 22)
즉,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속 사람의 상태 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믿음’ 교리에 취해 속 사람의 상태에 소홀히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없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얘깁니다.
참고로, 이 ‘오직 믿음’ 교리, 다른 말로 ‘이신칭의’(以信稱義)라 해도 될까요?, 이 교리의 출처는 로마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디모데전서 등 주로 사도들, 특히 바울의 서신들입니다만, 그러나 이들은 사실은 ‘말씀’(The Word)이 아닙니다. ‘말씀’은 오직 주님,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신(神, The Divine)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속뜻, 그러니까 내적 의미(다른 말로는 아르카나 Arcana 라틴)가 있어야만 말씀이기 때문이며, 신이 아닌 사람이 쓴 글에는 이게 없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건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눅22:63-65)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Faith)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제작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와 함께 초대교회 3대 신경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신조의 주된 내용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입니다.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스웨덴)는 그의 유작,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첫 라틴 출간 1785-1789, 쓰기는 1757, 계19:10에서 멈춤)에서 이 신조를 다루고 있는데, 아래 내용은 그중 어떤 게 ‘말씀을 더럽히는 것’인지 당시 종교, 특히 교황 교회(the papal church, 스베덴보리식 표현, the papal religion이라고도 함)의 부패상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의 뼈와 무덤에 거룩함이 있다는 것, 시체가 기적을 행한다는 것, 사람이 자신의 부를 우상이나 수도원에 성별(聖別)하지 않으면 나중에 연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 천국과 지옥의 권세를 가졌으므로 사람이 신이라는 것even that there is holiness in the bones of the dead and in sepulchers, that carcasses perform miracles, that man will be tormented in purgatory if he does not consecrate his wealth to idols or to monasteries, that men are gods because heaven and hell are in their power
위 하나하나의 사례는 우리가 교회사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듯 당시 아주 지독하게 부패한 교황 교회의 폐단들이며, 결국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사례들입니다.
위 본문은 또한 교회의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그러니까 말씀을 앞세우는 목적이 주님 사랑이 아닌, 저들 교황 교회들처럼 말씀을 그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삼는 일체의 종교적 행위가 곧 말씀을 더럽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전체가 이런 건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 정교회, 카톨릭, 개신교 (발생순) 등 여러 기독 신앙이 있는데, 그중 삶은 소홀히 하고, ‘오직 믿음’에 치우친 나머지 그 사고와 언행이 매우 세속화된 모든 교회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오직 믿음’의 뿌리는 의외로 그 기원이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표현만 마틴 루터 때 생겨났을 뿐, 그 본질은 아벨을 죽인 가인한테까지 올라갑니다. 아벨의 속뜻이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된 교회, 곧 신앙고백이라면, 가인은 사랑 따로 신앙 따로의 교회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눅22:63-65)
위 본문은, 겉뜻으로는 기록된 대로 이들이 주님을 괴롭히며 욕보이고 있는 것이지만, 속뜻으로는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The WORD)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상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설교에서 인용)
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힘’이라는 건 말씀에 손을 댄다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에 사람이 무엇을 섞는 것, 곧 자의적으로 해석, 곡해, 왜곡하는 걸 말합니다. 말씀은 오직 말씀하신 분만이 푸실 수 있으며,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계시받은 자만이 풀 수 있으며, 이때에도 푼다고 하지 않고, 전달한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은 오직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달자는 자신의 상태를 순도 100%로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절대로 결코 뭘 섞으면 안 됩니다.
다음은 제게 ‘할 말은 태산이지만 지금은 침묵할께요...’ 하신 어느 권사님께 보낸 답신입니다.
곧 팔 학년 되실 그분의 어떤 정황을 좀 아는 저는 다음날 아래와 같은 카톡 답신을 보내드렸는데요, 자세한 건 프라이버시 있어 좀 가리고, 내용 또한 좀 다듬어 글 올립니다.
권사님, 오늘은 어제 한글날을 피해 세종시 모처에서 외식 후, 국립 세종수목원에 들러 저희 부부, 둘째와 함께 좋은 시간을 가진 하루였습니다. 세종 국립수목원은 대전 저희 집에서 차로 25분 거리입니다.
이곳은 두 번째 오는 데, 처음 방문 때 놓쳤던 여러 가지, 가령 수목원 전체 전기차 버스 투어라든지, 지중해 전시 온실 전망대를 새롭게 경험하면서, 그러나 이 모든 눈에 보이는 겉의 나라의 것들을 통해 이것들과 서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고 있는 저 천국, 속의 나라의 어떠함들을 마음에 그리며 구경하는 중에 권사님 생각이 났지요...
권사님, 이제 얼마 안 남은 이 지상 생활 후,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천국으로 가게 되는데요, 그런데 천국은 눈에 보이는 이 겉 사람의 세상과 달리 속 사람으로 가게 되는 나라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천국은 이 겉의 나라가 아닌, 속의 나라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중에 아직 아무도 자기 영의 모습을 본 자가 없듯 자기 육의 모습인 지금 거울에 비친 자기 외모 밖에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속 사람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어떤 섭리로 다른 사람들의 영을 잠깐 볼 수 있도록 허락받으신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육신의 외모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그 영은 가히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괴물 형상인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외모는 주름투성이인 노파이지만 그 영은 가히 이를 데 없이 젊고 아름다우신, 천사 같은 분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하나의 예이지만,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대로,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임을 기억, 그러므로 권사님, 이제 그만 이 세상 일, 곧 겉의 나라의 일들로부터는 물러나시고, 저 천국, 곧 속의 나라에 대해서만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겉의 나라에 속한 모든 일은, 그 동기가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닌 한, 우리 속 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일에 아무 상관이 없거나 쓰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전히 겉의 일에 마음을 기울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실 경우, 이번에는 그 빈틈으로 계속해서 지옥이 우리 삶에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삶의 우환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지옥, 곧 악한 영들은 우리의 속 사람, 곧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한, 우리 속 사람을 못 건드리지만, 그러나 우리의 겉 사람, 곧 유전 악 아래에 있어 지키기 쉽지 않은, 겉의 일들은 건드리며,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너는 그의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하신 대로 악에게 공격을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생전에 주님도 육으로는 마리아로 유전한 유전 악 가운데, 즉 십자가 마지막 시험 전까지는 아직 불완전한 인성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지요. 악은 오직 감각을 비롯, 이 겉의 나라에 속한 것들만 건드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을 비롯, ‘발꿈치’ 등은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겉의 일에서 물러나는 것은 주님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하신 말씀을 붙들고, 그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것이지만, 반대로 계속 겉의 일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위 주님의 권면을 거스르는 것으로, 그 결과 주님도 더 이상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수 없어, 즉 더 이상 우리를 도우실 수 없어 우리는 지옥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사님, 이제 그만 이 세상 겉의 일에서 손을 떼고 물러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계속된 주님 말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11:29-30)
하시는 이 말씀의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혹은 자초하는 모든 시험은 사실은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이 홀로 싸우시는 시험들이며, 그래서 우리 힘으로 싸우면 지지만, 주님이 대신 싸워주셔서 우리가 이기는 줄을 믿습니다. 아멘!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사람들에 관한 네 가지 경우
아래 며칠 전 올린 글이 다소 산만해 보여 조금 정돈해 보았습니다.
전자, 그러니까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 줄여서 ‘교리’라 하겠습니다. 이것과 후자, 곧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실천, 역시 줄여서 ‘체어리티’라 하겠습니다. 이 각각에 대한 진심 여부로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교리도 진심, 체어리티도 진심
2. 교리엔 진심, 체어리티는 별로
3. 교리엔 별로, 체어리티는 진심
4. 교리도 별로, 체어리티도 별로
먼저 1번, ‘교리도 진심, 체어리티도 진심’의 경우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우가 가능할까 싶지만, 실제로, 그러니까 겉보기엔 가능합니다. 제가 이런 경우들을 목격했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겉보기’라 한 것은, 이분들이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잘 모르시고 오해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나오며, 주님에 대한 사랑과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분들은 “나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애정도 있다. 분명히 느낀다.” 하시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주님을 사랑하면서 이 ‘오직 믿음’의 교리에 진심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의 교리는 교리화만 지난 16세기에 루터가 했을 뿐, 사실 그 기원은 아득히 저 멀리 창세기 ‘가인’이라는 사람들한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 이 ‘오직 믿음’의 교리와 체어리티가 절대 어울릴 수 없다, 함께할 수 없다 하는 이유는, 첫째는 이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선과 진리를, 체어리티와 신앙을 따로 떼어놓겠다는 것이며, 그렇게 해도 구원을 받는다, 천국을 갈 수 있다 가르치는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사람의 내면이 어떤 건지를 잘 모르는 무지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무엇이며, 영이라고도 하는 속 사람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만든 교리여서 저런 그럴듯하지만 매우 이상한 교리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 루터, 칼빈 등이 ‘말씀’(The Word)인 줄 알고 사용했던 사도들의 서신서들은 사실은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 안에 하늘의 비밀을 담아놓으신 성경만이 ‘말씀’이며, 천사들에게는 이것이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 위 ‘가인이라는 사람들’이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에 관하여는 아래 링크부터 시작, 창4 관련 링크들을 주욱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체어리티의 참, 거짓에 대한 구분은 그 숨은 동기가 무엇인가를 살피면 됩니다. 즉 이웃을 향한 그 체어리티를 행하는 동기가 자기 사랑이면 거짓, 주님 사랑이면 참인 것이지요. 이 ‘체어리티’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오직 믿음’의 교리가 왜 오류인지에 대한, 더욱 정돈된 글들을 준비,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오늘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정돈만 하겠습니다.
2번,‘교리엔 진심, 체어리티는 별로’의 경우입니다. 아마 이 경우가 거의 최악일 것 같은데요, 이분들이 곧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며,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찾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개신교인들 중에는 ‘나는 설마 아니겠지...’ 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은데요, 우리는 자기 마음속 숨은 동기를 잘 모르거나 속는 경우가 의외로 참 많음을 볼 때, 그건 정말 모르는 겁니다. 참으로 주님이 빛을 비추어 주셔야 우리 눈이 밝아짐을 고백합니다.
참고로, 저는 평소 기독교인과 개신교인을 의도적으로 구분하는데요, 전자는 후자의 상위(?) 개념으로, 정교회, 카톨릭, 개신교 등, 그리고 기타 예수 그리스도에 그 뿌리를 둔 모든 기독 신앙을 말합니다. 개신교는 기독교 신앙의 한 갈래입니다.
그러니까 이 2번의 경우가 제가 며칠 전 올린 글에서 ‘제발 이런 사람은 되지 마세요!’ 거듭거듭 극구 말린 경우가 되겠습니다.
세 번째인 3번,‘교리엔 별로, 체어리티는 진심’의 경우입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그 당시 아프리카 사람들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1688 생, 1772 졸한 사람인데, 그때만 해도 아프리카는 거의 미지의 대륙이었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오랜 기간 영계를 방문, 그곳에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이 천국에 참 많이 와 있더랍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겠지요? 아프리카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지금도 모든 대륙, 수많은 인종과 종교를 망라, 그 가운데 체어리티의 삶을 살며,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깃든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을 가까이한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올라가고 있겠지요.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의 신성의 나라로, 생전에 자기 안에, 그러니까 자기 속 사람 안에 이 주님의 신성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심지어 주님도 그를 천국에 머무르게 하실 방법이 없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체어리티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인데요, 아래 요한복음 말씀에서 확인하세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가까이하고, 그 계명대로 사는 것, 이것이 체어리티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마지막, 4번,‘교리도 별로, 체어리티도 별로’의 경우입니다. 이 경우 역시 거의 끝에서 두 번째를 달리지 싶은데요, 이런 분들은 교회를 왜다니시는 걸까 싶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고, 그냥 복과 구원만 받으며, 살면서 여러 악한 기운으로부터 보호받고자 일종의 보험으로 다니시는 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분들 역시 지옥 열차표를 예약하신 분들인데요, 왜냐하면 이런 분들의 속 사람이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실제 정체는 자기 사랑의 사람들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는 또 다녀야 하는, 그래서 비록 몸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눈은 세상을 향하고 있는, 그래서 세상 사랑의 사람들이기도 한, 참 안타까운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위 1번, 3번의 경우는 천국 가는 황폐화 과정을 밟되 1번은 지독하게, 3번은 가볍게 밟습니다. 2번, 4번 역시 이 과정을 밟지만, 이분들의 경우는 지옥에 들어가기 위해 밟는 경우인데, 그래서 안타깝다 한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니시는 교회를 그만 두시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우시면, 일단 계속은 다니시되, 1번, 3번은 그나마 괜찮지만,2번, 4번은 반드시 피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은 건, 위 네 가지 경우에는 없는데요, 참된 교리로 올바른 체어리티의 삶을 사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참된 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하나 됨을 가르치는 교리이며, 어떤 신앙이 구원의 신앙이 되려면, 신앙 고백과 함께 체어리티의 삶이 받쳐주는, 그런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아래 창4, ‘아벨’이라 하던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부디 이 권면을 마음으로 받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는 모든 분께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빛을 비추심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선량하지만,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사후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접한 후, 그 전반적인 걸 어느 정도 알게 되면서부터, 그러니까 지난 한 4, 5년 동안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그래서 늘 개운치가 않았던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기록은, 어떻게 보면 결국 이 ‘오직 믿음’의 교리로 사는 삶에 대한 대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며, 저의 오랜, 지난날 개신교인으로서의 삶 동안 혈육과 친구, 지인들의 거의 백 프로가 모두 위 제목에 해당하는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리신 모든 계시의 결론은, 천국은 ‘오직 믿음’으로 가는 게 아닌, 각 사람의 내면, 곧 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여야 갈 수 있는,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은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을 삶과 생활 가운데 실천하기 때문에, 당연히 천국에 합당한 속 사람의 상태가 되며, 그러므로 그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현 개신교, 그리고 기독교인 중에서 비록 ‘오직 믿음’의 교리 가운데 있지만, 그러나 겉보기에 삶과 생활, 일상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같은 분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의 선한 삶으로만 보면 그가 스베덴보리를 통한 주님의 새로운 계시의 사람인지, 아니면 ‘오직 믿음’의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후덕하고 선량하다가도, 이 ‘오직 믿음’ 교리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태도가 돌변, 표정이 굳어지는 그런 분들이라면 말입니다.
저는 지난 수년간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및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마지막 글 번호는 10837)를 가급적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고자 애쓰고 있는데, 최근 이에 대한 무슨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어 이렇게 나름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실마리’라 함은 다름 아닌, ‘황폐함의 과정’ 또는 ‘황폐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영어로는 Vastations라는 과정을 말하며, 다음은 이와 관련된 요약들과 해당 글 번호들입니다. 해당 글은 위 ‘천계비의’, 즉 라틴어 Arcana Coelestia의 글 번호를 말합니다. 혹시 아래 해당 번호의 글들 또한 읽어 보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글을 열어 거기서 해당 pdf들을 다운받으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pdf들은 영어입니다.
내세에는 황폐함의 과정이라는 게 있는데, 그러니까 생을 마감하고 내세에 들어가는 사람들한테 일어나는 것이다 (AC.698, 7122, 7474, 9763).Vastations are effected in the other life, that is, those that pass into the other life from the world are vastated (n. 698, 7122, 7474, 9763).
선한 사람들은 거짓에 대해 황폐화가 일어나고, 반면 악인들은 진리에 대해 황폐화가 일어난다 (AC.7474, 7541, 7542).The well-disposed are vastated in respect to falsities, while the evil are vastated in respect to truths (n. 7474, 7541, 7542).
선한 사람들이 겪는 황폐함의 과정은 지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과정인데, 이것들은 세상에 살 동안 함께했던 것들이다 (AC.7186, 9763).The well-disposed undergo vastations that they also may be divested of what pertains to the earth and the world, which they had contracted while living in the world (n. 7186, 9763).
또한 악과 거짓의 제거,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주님한테서 나오는 천국 선과 진리의 유입을 위한 여지, 그리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AC.7122, 9330).Also that evils and falsities may be removed, and thus there may be room for the influx of goods and truths out of heaven from the Lord, and ability to accept these (n. 7122, 9330).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은 그런 것들이 제거될 때까지는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천국에 있는 것들을 방해하고, 그들과 조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AC.6928, 7122, 7186, 7541, 7542, 9763).Elevation into heaven is impossible until such things have been removed, because they obstruct heavenly things and are not in harmony with them (n. 6928, 7122, 7186, 7541, 7542, 9763).
천국으로 올려지는 사람들은 그래서 미리 준비된다 (AC.4728, 7090).Those who are to be raised up into heaven are thus prepared for it (n. 4728, 7090).
준비도 되기 전, 천국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AC.537, 538).It is dangerous to come into heaven before being prepared (n. 537, 538).
황폐함의 과정을 마치고,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의 내적 밝아짐과 기쁨의 상태,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리셉션에 관하여 (AC.2699, 2701, 2704) The state of enlightenment and the joy of those who come out of vastation and are raised up into heaven, and their reception there (n. 2699, 2701, 2704).
이들 황폐함의 과정이 진행되는 지역을 가리켜 낮은 땅이라고 한다 (AC.4728, 7090).The region where those vastations are effected is called the lower earth (n. 4728, 7090).
그 지역은 지옥들로 빙 둘러싸인 발바닥 아래이다. 그곳에 대한 설명(AC.4940–4951, 7090)과 그곳을 경험한 이야기(AC.699) That region is under the soles of the feet surrounded by the hells; its nature described (n. 4940–4951, 7090); from experience (n. 699).
그 무엇보다 훨씬 더 감염되게 하고, 황폐하게 하는 지옥들이란 무엇인가 (AC.7317, 7502, 7545) What the hells are which more than others infest and vastate (n. 7317, 7502, 7545).
선한 사람들을 감염시켜 황폐하게 한 사람들은 나중에는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피하며, 그들로부터 돌아선다 (AC.7768).Those that have infested and vastated the well-disposed are afterwards afraid of them, shun them, and turn away from them (n. 7768).
이들 감염과 황폐함의 과정은 악과 거짓의, 들러붙은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되며, 그들의 질과 양에 따라 계속된다 (AC.1106–1113).These infestations and vastations are effected in different ways in accordance with the adhesion of evils and falsities, and they continue in accordance with their quality and quantity (n. 1106–1113).
일부는 이 황폐함의 과정을 진심으로 기꺼이 원한다 (AC.1107).Some are quite willing to be vastated (n. 1107).
일부는 두려워하면서 이 과정을 밟는다 (AC.4942).Some are vastated by fears (n. 4942).
일부는 세상에서 행한 악과 세상에서 한 거짓된 생각들로 감염되어 있다. 그들은 이 악과 거짓 때문에 근심하고 양심의 큰 고통을 겪는다 (AC.1106).Some by being infested with the evils they have done in the world, and with the falsities they have thought in the world, from which they have anxieties and pangs of conscience (n. 1106).
일부는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가운데 영적 감금 상태에 있는, 그런 식으로 이 과정을 지나는데, 이 상태는 진리에 관한 무지와 진리를 차단하는 상태다 (AC.1109, 2694).Some by spiritual captivity, which is ignorance of truth and interception of truth, combined with a longing to know truths (n. 1109, 2694).
일부는 잠드는 식으로, 일부는 깨어 있음과 잠이 든, 그 중간 상태에 있는 식으로 (AC.1108) Some by sleep; some by a middle state between wakefulness and sleep (n. 1108).
자기가 한 일을 공으로 여긴 사람들한테는 자신들이 마치 장작을 패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AC.1110).Those that have placed merit in works seem to themselves to be cutting wood (n. 1110).
다른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엄청한 다양함으로 (AC.699) Others in other ways, with great variety (n. 699).
그러니까 간단히(?) 정리하면,
1. 이 황폐함의 과정은 천국 갈 사람한테도, 지옥 갈 사람한테도 공평하게 일어난다. 다만 전자한테는 악과 거짓 등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을, 후자한테는 선과 진리 등 지옥에는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을 떼어내는 과정이다. 참고로, 말이 떼어낸다지 실제로는 생살을 찢어내는 것 같은 고통을 수반한다.
2. 이 과정은 그 확신한 정도에 따라 매우 혹독, 오래 걸리거나 그냥 슬쩍 금방 지나가기도 한다. 즉 가령,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다녔어도 그것보다는 일상 가운데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힘쓴 사람은 이 과정이 가볍게 지나간다. 그에게는 떼어낼 게 별로 없어서다. 만일 그가 이런 교회가 아닌, 신앙과 체어리티의 일치를 가르치는 교회를 다녔더라면, 이 떼어냄의 과정은 그야말로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전에 어쩔 수 없이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다니게 되어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어도 그런 교리보다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참된 신앙으로 이웃 사랑에 힘쓰며 산 사람은 의도치 않게 붙은 이런 교리적 오류들만 좀 떼어내는 약간의 과정을 밟은 후, 천국으로 올라간다.
3. 당연한 결론이지만, ‘오직 믿음’의 교리를 크게 확신, 비록 목숨을 걸었어도 실제 그의 삶이 천국에 부합하지 않으면, 즉 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이면 그는 천국에 올라갈 수 없다. 그리고 역시 당연한 결론인데, 사람이 이런 상태가 되는 건 그가 겉 보기에 무슨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든 그 숨은 동기, 심지어 본인조차 몰랐던 그 진짜 동기가 바로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허락으로 영계에서 마틴 루터를 만나 그와 오랜 시간,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특히 이 주제, ‘오직 믿음’의 교리와 관련, 왜 이런 교리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자기가 이 아이디어를 교리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자 천사들이 그런 짓을 하지 말라 계속 권했지만, 그 당시 이런 교리 없이는 카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가 없어서 부득이 계속 강행하게 되었다고 하더랍니다. 루터 관련,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4. 참고로, 위 ‘낮은 땅’이라는, 이 황폐함의 과정이 진행되는 곳은 지옥에 인접한 곳으로, 특히 ‘발바닥 아래’ 같은 표현은 천국 전체가 사람 모습이라는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와 57장, ‘주님은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신다. 영이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The Lord Casts No One into Hell; This Is Done by the Spirit)에 관한 아래 스캔들을 읽어 보라.
등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이 태생적으로 온통 이런 환경이었으면, 무슨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너무 교리, 교리 하지 않으시는 것이 나중을 생각하면 보다 나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교리보다는 실천에 더 집중하시라는 말씀입니다.
결론입니다. 저는 사람의 사후, 그가 선한 삶을 살았으면, 즉 선과 사랑, 애정과 신앙의 삶을 살았으면, 비록 그에게 생전에 의도치 않게 덕지덕지 붙어 떼어내야 할 신앙적 오류들이 좀 있더라도 그런 걸 끝까지 떼어내시고, 순도 백 프로의 사람으로 만들어 천국에 올리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고는, 이제는 제 주변, 제 혈육이 비록 이 새로운 계시에 대해 시큰둥해하거나 적의를 드러내며 저를 멀리한다 하여도 전처럼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가 사후엔 좀 더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 안타깝지만, 그러나 그가 선한 삶, 곧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았으면 그는 결국천국으로 올려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오직 믿음’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힘써 고백하더라도 실제 그 삶이, 그리고 그 하는 모든 행위의 숨은 동기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었던 사람들은 그가 겉보기에 아무리 그럴듯한 신앙인이었어도 사후 그는 천국에 올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은 그런 사람들의 나라가 아닌,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60여 년, 저 역시 이 ‘오직 믿음’의 신앙생활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러므로 저희 부모님을 비롯, 장인, 장모 네 분 모두 천국 가셨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네 분 모두 배움은 조금 부족하셨어도 이 땅에서 정말 선한 삶들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부디 오늘 이글이 유익, 도움 되셨기를 바라며, 그 결과 주변 나와 생각이 다른 신앙의 지인들이 혹 계시더라도 전과 달리 넉넉한 심령, 후덕하심과 여유로우심으로 대하실 수 있기를 권합니다. 타교단과 교파, 심지어는 타종교에 속한 분들한테까지도 말입니다. 사람의 사후, 주님은 오직 그의 안에 천국에 합당한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는가만 보십니다. 타종교, 즉 교회 밖 사람들에 관하여는 아래 스캔을 읽어보세요. 말씀(The Word)이 없는 교회 밖 세상 나라와 종족들을 포함한, 주님의 공정하신 구원 시스템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 후에는 그는 전처럼 아버지(father)를 아버지로 인정하면 안 되는데, 그 이유, 즉 왜 아버지는 자녀가 자랄 동안만 아버지인가 하는 이유는, 그때는 그가 주님을 대신하기 때문이며, 그때는 아직 자녀가 어려 아버지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 제법 스스로 생각할 줄도 알고, 스스로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때는 이미 주님이 그의 아버지(Father)이심이 틀림없는데요, 이 아버지 노릇을 그동안은 육신의 아버지가 해왔었죠......after a son becomes his own master he ought not to acknowledge his father as father, as before; for the reason why the father is to be acknowledged during the bringing up of the son, is that the father is then in the Lord’s stead, nor does a son know at that time what he ought to do except by the direction of his father. But when a son becomes his own master, and competent to think for himself, and seems to himself to be able to direct himself from himself, then the Lord must be his Father, whose vice regent his natural father had been... (AC.6492)
이 글은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중, 입류(Influx)와, 사람의 영과 육 사이 교류를 다룬, ‘ABOUT INFLUX AND THE INTERCOURSE OF THE SOUL AND THE BODY’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인데, 어느 날 꿈에 자기에게 나타나신 아버지와 나눈 대화의 주 내용입니다.
사람이 장성하면 더 이상 육신의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며, 그때는 주님이 그의 아버지시라는 이 글을 읽고 했던 몇 가지 생각을 적어봅니다.
이 글에 의하면, 그 이유는 먼저, 육의 아버지는 우리의 어린 시절, 어디까지나 주님의 대역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때 아버지 노릇을 하는 우리 육의 아버지들은 끊임없이 실제 아버지이신 하늘의 주님께 안테나를 세우고 그 주파수를 고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당연한 귀결, 곧 그때 주님으로부터 나와 내게 흘러들어오는 입류를 통해, 내게 맡겨진 이 아이를 내 뜻, 내 생각, 또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서는 안 되고, 늘 주님 뜻대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장성한 자녀도 이제는 하늘의 주님께 직접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상의 혈연, 그리고 서류상, 행정적으로는 여전히 부모-자식 간이지만, 그러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의 실제 아버지는 주님이심을 시인, 아버지를 사랑하는 가운데 끝없이 아버지께 여쭙고, 아버지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아래는 위 본문에 대한 속뜻 주석 원문입니다.
...Jehovah bless thee and keep thee;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gracious unto thee; and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4-26). Divine truth, from which is all intelligence and wisdom, with which the Lord flows in, is meant by "Jehovah makes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protection thereby from falsities is meant by "be gracious unto thee;" and the Divine good, from which is all love and charity, with which the Lord flows in, is meant by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protection thereby from evils, and thence heaven and eternal happiness, are meant by "give thee peace;" for when evils and falsities are removed and no longer infest, the Lord flows in with peace, in which and from which is heaven and the delight that fills with bliss the interiors of the mind, thus heavenly joy...(AC.10137:12)
본문만 번역하자면...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는 신적 진리(Divine truth)를 의미하는데, 모든 지성과 지혜가 이 신적 진리에서 나오며, 주님의 흘러들어오심 역시 이 신적 진리를 동반하시는, 그런 진리를,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거짓들로부터 보호하심을,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는 신적 선(Divine good)을 의미하는데, 모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가 이 신적 선에서 나오며, 주님의 흘러들어오심 역시 이 신적 선을 동반하시는, 그런 선을,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악들로부터 보호하심을, 그리고 천국과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는 주님의 신성이신 신적 선과 신적 진리에 대한 말씀이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다른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구하며, 이것으로 복을 빌라시는 말씀입니다.
즉, ‘복’이란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주님의 신성이 갖추어지면, 자연히 천국하고도 통하게 되어 천국의 모든 복이 우리 삶 가운데 흘러들어온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모든 걸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환경부터 먼저 갖추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속 사람이 있고, 겉 사람이 있듯, ‘복’ 역시 내적(內的, internal)인 복이 있고, 외적(외적, external)인 복이 있는데요, 모든 것이 그렇듯 영적인 것은 반드시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모든 것은 반드시 자연계의 것으로 도착,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즉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그 역순은 없으며, 속, 즉 내면의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도, 겉, 즉 자연적, 물질적 복을 받는다면... 그건 정상, 그러니까 주님의 질서가 아니며, 그렇다면 뭔가 위험한 것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즉 그런 건 구하거나 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시 로또를 하십니까? 로또 자체가 선인지 악인지 여부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는 바울의 권면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이런 질문, 곧 ‘천사들이 로또를 할까?’라는 질문 말이지요. 천사들은 모든 것, 곧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과 무엇보다도 천국 지성과 지혜, 지식을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습니다. 거저 받되 천사 저마다의 역량이 감당할 수 있는 최상, 최고 수준의 것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그것들의 쓰임새, 그러니까 ‘주님이 나에게 이것을 왜 허락하셨을까? 이것의 쓰임새가 뭘까?’에만 집중합니다. 그들이 먼저 주님의 일을 구했더니 나머지를 모두 주님이 공급하시는 것이지요. 다음 말씀처럼 말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혹시 로또를 했다고 해서, 또는 지금도 하고 있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또 너무 뻔뻔하셔도 안 되겠지요 ㅎㅎㅎ 정말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자기가 로또를 했다는, 혹은 하고 있다는 사실에 양심에 가책이 있으실 겁니다. 뭔가 찝찝하고 개운치 않은 게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며, 쉽지 않겠지만 로또에서 그만 손을 떼세요. 주님을 사랑하지만, 현실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주의 자녀들, 오죽했으면 로또에 손을 댔을까요? 이런 분들에게 로또의 쓰임새는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이런 한 발 물러남이 있을 때, 주님은반드시 위 약속,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를 지키십니다. 즉, 지켜지는 것입니다.
위 민수기 6장 ‘제사장 기도’는 주님의 신성을 구하는 기도, 주님의 신적 성품을 구하는 자에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천국은 상태의 나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하신 주님 말씀으로 분명하며, 그러니까 나의 내면 상태가 천국이어야 실제로 천국이 내 안에 흘러들어올 수 있다는, 즉 하늘의 복이 내게, 내 삶 가운데 임할 수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상태 유지가 중요합니다. 내 영의 상태, 내 속 사람의 상태, 나의 내면 상태를 늘 천국에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만이 천국 금고를 여는오직 유일한 열쇠이며, 내 삶이 주님의 쓰임새가 되어 주님 뜻 온전히 수행하는, 참 형통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여기 금고 얘기를 했다고 해서, 그리고 천국의 모든 부요를 얘기했다고 해서 그걸 누리는 게 주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함이 궁극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건 다 이 목적을 뒤따르는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생전에 남기신 두 가지 예전은 침례(세례)와 성찬입니다. 주님의 모든 활동은 세 가지, 곧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며,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이 두 예전은 바로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침례가 그 첫 번째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성찬은 그 두 번째, 천국의 일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대기(大氣)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입니다. 생전에 우리 안에 이 주님의 신성이 형성되어 있어야 사후 우리는 천국의 대기를 호흡할 수 있어 천국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평소 우리 안에 이 주님의 신성 형성하는 걸 ‘주님을 닮는다’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주님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곧 체어리티(charity, 仁愛, 선행, 이웃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선(善,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떡으로는 주님의 선을, 잔으로는 주님의 진리를 각각 상징하였고, 또한 각각 주님의 살과 피로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The Divine Human)을 나타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