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스베덴보리를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직장에 다닐 때였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에 한 분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서 읽게 됐는데, 새 교회의 진리가 매우 합리적인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여기 이런 경우, 즉 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고, ‘새 교회의 진리가 매우 합리적인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하는 경우는, 적어도 제 경험에 의하면 매우 희귀한 경우입니다.
 
그나마 읽어보겠다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있어도 천 명 중 한 명꼴일까요? 거의 99.9%가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거나, 읽으면서 자기가 아는 교리와 달라 속에서 불이 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괜히 속에서 화가 난다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천국 이야기를 하는데 왜 화가 날까요? 주님 식사 준비를 하면서 동생 마리아 때문에 힘들어 하던 마르다가 생각납니다. 하나 더 있다면, 이 책을 그저 새로운 지식 습득으로만 읽으시는 경우입니다. 위 여러 사례는 참 안타까운 경우들인데요, 만일 돌이키지 않으실 경우, 이런 분들의 사후, 어떤 운명이 이 분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저는 이 책을 읽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지난 일지를 보니, 5년 전인 2018년 10월에 저는 이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스베덴보리’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고, 충주봉쇄수도원 수도사 공부를 하면서 특히 성 프란체스코, 성 분도 요셉 라브르,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등 수많은 수도사들과, 이영환 목사의 40일 금식 훈련,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 및 시흥영성수련원 공용복 선생의 핵심진리, 정원 목사의 저서들 등에 몰두하던 때였지요. 즉 천국과 지옥에 관한 수많은 견해와 체험, 간증 등에 둘러싸여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그래서 새로운 책을 접하면서 이건 또  무슨 새로운 견해의 등장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는 난생처음 접하는 내용에, 처음엔 당혹해 하며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아, 맞다.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뭔가 뿌옇던 시야가 바람이 불더니 갑자기 확 맑아지는 그런 느낌, 백두산 천지가 구름과 안개로 안 보이다가 바람에 걷히더니 갑자기 확 드러날 때의 그 숨 막힐 듯한 위용과 장관처럼 말이지요!
 
저는 특히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첫째, 이 책을 비롯, 특히 스베덴보리의 수년간의 역작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를 통해서 천국을 비롯, 그동안 석연찮던 거의 모든 신학적 주제들과 영적 이슈들이 거의 다 설명된다는 것이었는데요, 적어도 당시 제 수준과 역량에서는 말이지요,설명이 된다’는 게 제게는 중요했습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기 전, 특별히 물리학 등 순수 과학에 끌렸던 제게 이런 접근은 의미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과거 천동설이 지동설로 갈아타던 과정처럼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던 어떤 현상이나 증거를 새로운 이론으로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비록 당시엔 당혹스럽고 힘들더라도 후자를 새로운 정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학문적으로도 옳다 저는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설명하실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이 저는 평소 좀  납득이 잘 안 되었었습니다.
 
둘째,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기록을 통해 오직 주님만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입장과 견해가 사사로운 것이었다면, 분명 어딘가에 그 흔적이 교묘히 숨어있을 텐데, 추호도, 그리고 지난 5년간 저는 이 책 말고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번역을 해오고 있는데요, 그 10,837개나 되는 글 어디에서도 스베덴보리는 그 흔한 이단 사설들에서 볼 수 있는 더러운 사사로움 없이 오직 주님만 높이며, 또 주님이 허락하신 것만 밝히고 있는 걸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새로운 계시이며,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흔히들 인터넷 검색을 통한 다른 사람들의 글만 읽고는 스베덴보리는 이단이래 하면서 물러나시는데요, 그보다는 본인이 직접 스베덴보리를 읽고 판단하시기를 권합니다. 본인이 참으로 반듯하고 정직하다면 분명 그 영이 꿈틀하며 어떤 유의미한 반응을 할 것입니다. 주님의 빛, 천국 빛에 건강하게 반응하는 것이지요.
 
끝으로, 저는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이 새로운 계시를 통해 참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나아가 어떤 신(神, The Divine)이신지를 점점 또렷이 알아가고 있으며, 그래서 참된 평화 가운데 거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참으로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천국에 주목할수록,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참으로 '말씀'(The Word)이란 무엇이며, 구원이란 무엇인가?  타종교 등 교회 밖의 사람들은? 타교단, 교리가 다른 사람들은? 등, 사람의 사후 전개될 양상에 대한 지식이 생기자 그동안 잘 몰라서 붙들고 추구했던 것들로부터 물러나 보다 더 자유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이 고백은 다른 말로 하면, 어느 순간부터 저는 천국 관점, 곧 천사들의 관점에서 지상의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후 바울서신에 뿌리를 둔 현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의 많은 근본적인 오류에서 물러나되 마치 지상에서 발사된 로켓이 죽을힘을 다해 중력을 거슬러 올라 궤도 위에 안착하듯 그렇게 물러날 수 있었고, 지금은 남은 생애를 오직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Writings)을 번역,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 아래는 혹시 도움되실까 제가 읽었던 번역인 김은경 역을 공유합니다. 이 말고도 여러 번역이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그리고 가능하면 영역본으로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라틴 원본으로 읽으실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요. 저는 라틴을 몰라 못 읽고 있지만 말입니다. 제가 읽고 있는 영역본도 아래 공유합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spiritual-world.com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Posted by bygracetistory
,

‘10.26(1979) 사태, 올해로 44주기를 맞이하며’ (2023/10/27)

 

44년 전인 지난 1979년 10월 27일 오늘, 지금의 대전 전민동 사시는 형님(일오, 53생)과 수원 한일합섬 옆 송죽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당시 수원 유신고 2학년이었던 나는 아침 기상 전, 이른 아침 이 작은 동네에 웬 갑자기 난데없는 호외 소리에, 형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간밤 갑작스런 서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아니, 육영수 여사,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 총탄에 역시 갑자기 돌아가신 지가 이제 겨우 5년 전인데, 왜 또? 하는 어리둥절과 함께 그 어린 고등학생 마음에도 나라의 앞날이 어찌 되는가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는 나라의 큰 국장으로 청와대를 출발, 동작동 국립현충원까지 이어지는 큰 도로변을 가득 채운 국민은 모두 크게 울었고, 그때 영상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지금도 울게 된다...

 

이후 일어난 군부 쿠데타와 이듬해 광주 5.18 사태, 그리고 그해 가을, 어머니의 교통사고로 인한 갑작스런 사별, 그리고 아주대 전자공학 입학, 남성합창단 Glee의 추억, 서울침례교회 대학부에서 엄마를 만나 교제, 22사 군 입대, 전역 후 복학하면서 학교 앞 아파트에서 네비게이토식 홈 생활 시작, 계속되는 대학가 데모로 연일 최루탄으로 자욱했던 시절, 아버님 별세, 삼성 입사, 결혼(1989), 이듬해 우석, 3년 후 준석 ^^ 등...

 

참 예사롭지 않았던 이 10월 27일의 아침, 당시를 생각하니 무슨 기억의 실타래처럼 좌악 풀려나오는구나. 어찌 보면 참 격동의 세월이었다 싶다.

 

부디 너희 세대는 이런 비극 없이 평화롭고 복된 시간들 보낼 수 있기를!

Posted by bygracetistory
,

'선을 실천하는 사람과 결합하시는 주님' (2022/10/24)

 

※ 작년 오늘 있었던 일이 생각나 공유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우리와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모두, 이웃들을 선대하며, 사랑으로 공손, 겸손히 선을 행해야 하겠습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사랑함이란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함이란 이웃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을 사랑하는 것이며, 더 확장하면,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 깃든 주님의 신성을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

 

오후 동네 한 바퀴 산책 직전, 영감(靈感) 있어 그 자리에서 바로 윗글을 어느 카톡 방에서 나눈 후, 산책 마치고 우리 아파트 라인 현관으로 들어오는데...

 

웬 살짝 허름한 잠바 차림의 다소 작은 키, 오동통한 마스크 차림 아가씨가 저 앞에서 급히 제게 다가오며 묻습니다.

 

“여기가 택배인가요?”

 

말도 좀 어눌한데다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여 그 연유를 살피니 자기는 네팔에서 왔는데 지금 서울로 피아노를 보내야 해서 택배 보내는 데를 찾아왔다는군요!

 

연유마저 참 뚱딴지같아 할 수 없이 좀 더 자세히 보니... 보낸다는 피아노는 다름 아닌 길쭉하니 얇은 키보드였고, 그걸 박스 포장, 택배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택시 기사가 뭘 잘못 알고 우리 아파트 바로 우리 동에 내려 주고 간 모양입니다. 아이고...

 

혹시 마침 아파트 마당에 와있는 택배 차량이 있나 보니 한 대도 없고... 그렇다고 아가씨가 제시하는 ‘로젠택배 전민 지점’이라는 데로 가시라 할 수도 없고... 근처 우체국 택배 관련해서는 송강 시장 곁 간이우편취급국이 유일한데, 아가씨가 이 키보드를 들고 거기까지 걸어가기엔...

 

나는 어떤 예정에 없던 돌발상황 같은 것에 참 약한 사람이라 살짝 좀 망설여지는 순간, 아까 올린 윗글이 생각나면서 ‘아, 혹시 어쩌면 지금 주님이 이 네팔 아가씨 모습으로 내 앞에 계심인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아가씨, 여기 잠깐 있어요. 내, 얼른 가서 지하 주차장 차 꺼내 올 테니까... 내가 데려다 줄께요. 내가 지금 차 키가 없어 먼저 키 가지러 가야 해 ^^”

 

걸어가기엔 한참이지만 차로는 금방이어서 금방 도착, 주정차 금지 구역이라 양쪽 깜빡이 켜고 얼른 내려 주고 나는 출발해야 하는데, 이 아가씨...

 

잠깐만 기다리실 수 있으셔요? 하는 눈치가 뭔가 고마움의 선물을 사러 가려는... 그래서 한사코 아이고, 나는 괜찮아, 아가씨, 돈 아껴야지... 하는데도 아니라고 하면서 키보드는 둔 채 얼른 내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한참 만에 나타나서는 페레로 로체 초콜렛을 선물하며 하는 말,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가 마치 아버지 같으셔서고요, 마침 오늘이 저희 네팔 명절이에요, 거기다 이틀 후 저는 캐나다에 가요. 겸사겸사 고맙고 감사해서 드리니 받아주세요.” 하는 취지의 말을...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래요, 아가씨, 잘 먹을께요. 그리고 캐나다 잘 가고...”

 

“네, 감사합니다.”

 

“안녕”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

 

‘아, 이웃을 사랑함이 이런 거구나! 저 아가씨 안에 계신 주님을 정성을 다해 모신다는 게 이런 거구나...’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아주 생생하게 경험한, 아주 따끈따끈한 일화였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Posted by bygracetistory
,

모친 별세 소식에 불현듯 지난날 유신고 시절인 1980년 9월 30일 밤, 당시 기숙사 사감이셨던 ○ 선생님 전화 받고 우리 A동 같은 방 모두 사감실 올라가 내 어머니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 접하고는, 룸메이트들이었던 자네와  , 이 등과 함께 전원, 그 밤, 성 빈센트 병원 장례식장을 찾아간 기억이 마치 비디오를 보듯 생생하게 떠오르더군... 벌써 햇수로 43년 전 일이야 ^^

 

목사로서 몇 가지만 간단히 적음세.

 

① 오늘이 사흘째지? 이제 어머니께서는 영계에서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눈을 뜨시게 되고, 몇 가지 절차를 밟으신 후, 드디어 생전에 먼저 떠나보내셨던 모든 그리운 분들, 곧 부모님 및 여러 혈육들, 친구, 지인들 등, 먼저 가신 모든 분과 재회하시는 너무나 반가운 시간들을 가지실 걸세.

 

② 처음엔 지상의 모습 그대로이셔서 어머니를 기억하던 모든 분들이 알아보시겠지만 서서히 어머니의 내면, 곧 속 사람이 주가 되고, 외면, 곧 겉 사람은 휴면 상태에 들어가면서 어머니는 천국으로 올라가실 준비를 마치게 되지. 이때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가 생전에 결코 본 적 없던 놀랍도록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이라네. 어머니의 일생이 선한 삶이셨다면 말일세.

 

③ 우리의 육체는 사실 우리의 영이 잠시 이 지상 생활을 하기 위해 빌려 입었던 거라, 이렇게 말하면 좀 불경스러울까?, 무슨 특별한 의미는 없어. 죽음이란 다음 세계인 영계로 이사 가는 거니까 말일세.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에 굳이 지상에 묻어둔 육체를 다시 찾을 일은 없어. 육체의 다시 살아남, 곧 우리가 부활이라 믿고 있는 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 주님의 부활로 족하며,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하네. 우리의 부활은 이렇게 지상에서 잠들었다가 영계에서 깨어나는 것을 말하지.

 

④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슬퍼하고, 보내드리는 예를 다하는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며, 그것이 그동안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무르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와 애정의 표현이기 때문이라네. 거듭 부모는 사실은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늘 계셨던 주님이시며, 그래서 부모에 대한 태도는 곧 주님에 대한 태도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더러 십계명에서조차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하신 것이네.

 

거듭 모친을 떠나보내는 자네와 모든 유족을 주님이 크게 위로하시며, 또 이후 모든 일정에 크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도하네.

 

어머니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였을 참 진실한 친구 에게 주께서 천 대까지 은혜 베푸시기를 간구하오며...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천국을 아는 데 도움 되는 사전 지식들’ (2023/10/15)

 

천국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김은경 역, ‘천국과 지옥’ 44장 ‘중간 영계란 무엇인가(What the World of Spirits Is)에 나오는 글이며, 이어지는 글들은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한 도움말들입니다.

 

422. ...사람 안에 있는 천국(The state of heaven in man)은 바로 그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하나된 상태(the conjunction of good and truth)다. 또 사람 안의 지옥은 그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이 하나된 상태다. 영인(靈人, a man-spirit) 안에서 선이 진리와 하나되면 그는 천국에 이른다. 이미 말했듯이 그 하나됨이 사람 안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람 안에서 악이 거짓과 하나되면 그는 지옥에 이른다. 그 하나됨이 사람 안의 지옥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됨의 과정은 중간 영계(the world of spirits)에서 일어난다. 사람은 그때 중간 상태(an intermediate state)에 있기 때문이다...

 

※ ‘영인’이란 사후 영이 되었지만, 아직 천국 상태도, 지옥 상태도 아닌 상태의 영을 말합니다.

 

※ 천국이든 지옥이든 사람이 100% 선하거나 악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100% 선한 상태여야만 갈 수 있는 나라, 지옥은 100% 악한 상태여야만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100% 상태를 윗글에서는 ‘하나됨’이라고 표현했네요.

 

※ 그래서 모든 사람은 사후 일단은 이 중간 영계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곧 중간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아직 천국도, 그리고 지옥도 아닌 상태이기 때문이며, 모든 사람은 아주아주 희귀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선과 악이 조금씩은 섞인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아주아주 희귀한 이 몇몇의 사람은 살아생전에 이미 이 100% 상태가 완료된 사람들로서, 이들은 중간 영계에서 깨어나는 즉시 천국으로 올라가거나 지옥으로 뛰어듦으로서 괜히 이 중간 영계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이 중간 영계를 합쳐 ‘영계(靈界)라 하는데. 이 영계는 지상 자연계처럼 무슨 시공간(視空間)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이 상태 변화의 나라입니다.

 

※ 사람의 일생은 사실은 천국을 가기 위한 준비기간이며, 이것을 다른 말로는 ‘거듭남을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이 거듭남을 위한 과정을 통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 ‘역량’이라 표현한 이유는 천국은 준비된 만큼만 누릴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업무역량도 없으면서 무슨 낙하산으로 초우량기업에 들어간들 버틸 수 없어 얼마 못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윗글에서 계속 선과 진리, 선과 진리 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이 ‘(good)과 ‘진리(truth)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천국이 이 ‘’과 ‘진리’, 곧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주님의 사랑이라는 천국의 해로부터 선이라는 열과 진리라는 빛이 뿜어져 나와 온 천국에 충만한 그런 나라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이란 모든 악과 거짓에서 물러나 이 선과 진리로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 진리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다만 세상, 세속 진리와 주님의 진리가 다른 점은, 주님의 진리에는 주님의 선을 행할 능력이 있지만, 세상 진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 세속적 진리에 정통한 사람들이 그러나 정작 주님을 위한 선한 삶을 살지는 못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으며, 이들은 각각 ‘’과 ‘진리’로 연결됩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은 선한 의지로 올바른 생각을 하지만, 지옥에 속한 사람은 악한 의지로 그릇된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의지는 ‘행위’로, 사람의 이해, 생각은 ‘’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그의 하는 행위와 하는 말을 보면, 그가 천국과 지옥 중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 친구가 아래 본문과 글만 달랑 보내어 그에 대한 답 또한 달랑 보내봤습니다 ㅎㅎ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행‭15:1‭-‬2‬) Some people came from Judea and started teaching the Lord's followers that they could not be saved, unless they were circumcised as Moses had taught. This caused trouble, and Paul and Barnabas argued with them about this teaching. So it was decided to send Paul and Barnabas and a few others to Jerusalem to discuss this problem with the apostles and the church leaders. (Acts 15:1-2)

유대인의 전통인 할례 문제가 대두됩니다. 원래 할례는 구원받은 자의 표징이지 구원의 절대 조건이 아닙지요.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아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갑론을박이 커지자 문제의 정리를 위한 최초의 예루살렘 공회가 개최됩니다.

 

 

답변

 

구원이란 무슨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그런 게 아니고, 내가 과연 그 나라에서 지낼 수 있는 성품, 역량이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길,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하신 것도 그래서인데요, 쉽게 말씀드리면, 세계 최고 글로벌기업에 낙하산으로 들어간들 그곳에서 요구하는 업무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결국 못 견디고 나오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할례는 일종의 증명, 곧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일종의 증표 행위였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여 정말 내게 속한, 내 백성임을 표현하고 싶으면 그 증표로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지요. 즉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으로서 자기는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표현하기 위해 할례를 받는, 순서상으로 정반대가 되는 개념이지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30:6)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 할례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고요, 그리고 또 개신교를 포함, 전체 기독교 역시 구원에다가 ‘은혜’라는 개념을 섞음으로써 이 할례의 의미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은혜’의 참된 의미는 한 인간의 평생, 그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중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동행하시겠다는 것이지, 그가 아직 천국에 머무를 내적 역량이 안 되는데도 그냥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 하니, 눈 한번 감아주시며 천국 입국을 허락하시는, 그런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신들, 그가 천국에 머무를 내적 역량, 곧 그의 속 사람이 이미 천국 상태가 아닌 이상, 그는 천국 문턱도 넘지 못하고 바로 뛰쳐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듭, ‘할례’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대 교회가 요구했던, 겉 사람에 관련된 증표요, 예식이었음을, 그리고 오늘날에는 주님을 사랑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charity)의 삶으로 이 마음의 ‘할례’를 나타내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답이 되었을까요? ㅎㅎ

Posted by bygracetistory
,

‘저와 상담이나 교제를 원하시는 분들께’ (2023/9/23)

 

※ 처음부터 저와 전화통화하시거나 저를 만나러 오시기 전, 사전에 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시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할 것 같아 이런 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일종의 러프한 자기소개입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으로 출발, 장로교 통합에서 성장하다가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한 후에는 한동안 기업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직원으로 있었고, 그리고 다소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한 후, 어느 교회 부사역자로 있다가 지난 2013년 개척, 목사 안수를 받은 침례교회 목사입니다. 저는 1961년생입니다.

 

오랫동안 침례교 신학에 오리엔티드 되어 있던 저는 그러나 무슨 신학 지식 수준에만 머무르는 게 아닌, 실제 목회현장에서 어떤 영적 체험들을 좀 하게 되면서, '정원 목사'라는 분의 저서들을 통해 영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개척 초기 여러 신학적 비주류(?)들을 잠깐잠깐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그럴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떤 것을 좀 살피다 보면 어딘가 저하고는 안 맞아 거기에서 물러나 또 다른 것을 살피고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그만 결과적으로 잠깐잠깐 살펴본 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무슨 이단, 삼단을 기웃거린 것은 아닙니다 ^^ 단지, 조금만 시야를 넓혀도 금새 신앙의 패러다임이 참 다양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의 종류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그중 자신에게 맞는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제가 여러 곳을 두루 살핀 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16년 8월, 어느 기도원에서 어떤 목사님을 만나 수도원의 세계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후 시작한 수도학교에서 저는 수도학교 3년간 많은 수도사, 성인들 및 수도 영성 관련 책을 접할 수 있었고, 또 현재 수도사의 삶을 사시는 분들을 만나 교제할 수 있었으며, 이 일로 저는 현 개신교 일반 목회 스타일로부터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분들 한 분 한 분이 다 별과 같이 빛나는 분들이시지만, 제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과 성인들은 '성 분도 요셉 라브르', '성 프란치스코', 그리고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등이며, 그러다가 2017년 늦가을, '스베덴보리'(1668-1772, 스웨덴)라는 분을 알게 되었고, 6년 차인 지금은 이분의 저작들(Writings)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대한 글은 아래 제 블로그 해당 글을 참고하시고요,

 

https://bygrace.kr/376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bygrace.kr

 

제 블로그에 가장 최근에 올린 따끈따끈한 글 또한 공유하오니 한번 읽어보시지요.

 

https://bygrace.kr/1671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 라는 유튜브를 보고 나서...’ (2023/9/21)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 라는 유튜브를 보고나서...’ (2023/9/21) 어젯밤 늦게 아들이 저런 제목의 유튜브를 보내와서 잠결에 한참을 들었고, 그리고 이튿날인 오늘 오전, 몇몇 글을 더 찾

bygrace.kr

 

제 블로그를 통해 스베덴보리를 좀 살피신 후에도 마음이 동하시면, 그때 비로소 제게 연락주시면 좋겠습니다. 경험상 이런 순서가 피차 좋을 듯 싶어서입니다 ^^ 제 이메일 주소는 bygrace.byun@gmail.com 이며, 이메일로 본인의 연락처 및 간략한 자기소개를 주시면, 제가 카톡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비록 교제라 할지라도 저는 주(主, dominion)가 번역의 일이라 그저 이 글을, 저 책을 읽어 보세요 정도의 코치 밖에는 못하지 싶습니다. 제 소명의 일도 있고, 그리고 제 남은 시간이 그다지 많지도 않은 것 같아서이며, 무엇보다도 제 역량(?)이 이제 겨우 첫 단계만 열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는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으로 시작했습니다.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아래는 번역본입니다. 라틴어 전공자의 번역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그 원본이 라틴어입니다.

 

http://bit.ly/3t7Zl6Y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spiritual-world.com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저 역시 평생을 몸담았던 기존 신학적 입장에서 물러서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인공위성 발사 시, 로켓 추진체가 지면을 박차고 출발, 중력을 극복하고자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음을 말씀드립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요, 주님과 천국을 사모함에 따른 내면 열어주심과 그 열린 창으로 천국 지혜를 부어주심이십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하오며, 저를 찾으시는 모든 분 역시, 동일한 은혜 안에 드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어젯밤 늦게 아들이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라는 제목의 유튜브를 보내와서 잠결에 한참을 들었고, 그리고 이튿날인 오늘 오전, 몇몇 글을 더 찾아보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주제는 간단한 게 아니지만... 주님의 빛을 구하며, 인도하심을 따라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개신교인들, 더 나아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쉽게 풀어쓰면, ‘신앙고백에 비해 비록 좀 많이 부족해도 주님의 은혜로 천국 입국을 허락받아 그곳에 가서 많은 복락을 영원히 누리는 것’ 정도이지 싶은데요, 보통은 그렇지 않나요? ㅎㅎㅎ

 

구원에 대한 이런 개념, 관념은 천국 천사들이 볼 땐 뭔가 좀 뒤죽박죽되어 있는 관념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을 생각하려면 먼저 좀 살펴봐야 하는, 주님, 인간, 천국, 영계 등에 대한 사전 지식들이 필요해서입니다.

 

첫째, ‘속 사람이라는 게 뭐지?’하는 것인데요, 천국은 지상처럼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며, 사람은 그곳에서 이 속 사람의 상태로 지내기 때문입니다. 지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속 사람'(internal man)은 우리가 '영육간에...' 할 때, 그 ''으로 우선은 이해하셔도 됩니다. 다만 영 또한 다시 그 안에 겉 사람, 속 사람이 있다는 점, 그리고 실제 우리는 이 영의 속 사람으로 천국에서 지내게 된다는 점,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지식을 바탕으로 둘째, ‘사람의 사후 삶은 생전 삶의 연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지상 생활로 결정되는 이 속 사람의 상태는 사후 영계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말이며, 그래서 지상에서는 이렇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천국에서 저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셋째, ‘천국은 뭔가 부족한 상태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건데요, 천국이든 지옥이든 순도 100% 상태여야만, 즉 완전히 선하고 진실하든지, 완전히 악하고 거짓되든지 해야만 드디어 천국으로 올려지거나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어느 정도는 선과 악이 몇 대 몇 상태이기 때문에,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기 전, 이 비율을 순도 100% 상태로 맞추는 중간 상태가 필요한데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라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후 일단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이 중간 상태로 들어가며, 여기서 바로 이 순도 100%로 맞추는 작업, 곧 천국 갈 사람은 천국에서는 아무 쓸 데 없는 악과 거짓을, 지옥 갈 사람은 지옥에서는 아무 쓸 데 없는 선과 진리를 떼어내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이쯤에서 열 분 중 아홉 분은 꼭 '연옥'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이 '연옥'에 대해서는 아래 제 블로그 관련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는 연옥(煉獄, Purgatory)이 아닙니다. 연옥은 허구이며, 소설입니다.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는 연옥(煉獄, Purgatory)이 아닙니다. 연옥은 허구이며, 소설입니다.’ (2023/5/10)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 스웨덴)는 계시록에 관한 두 개의 저작을 남겼습

bygrace.kr

 

넷째, ‘우리의 속 사람이라는 영역은 주님조차 간섭하지 않으시는 영역’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사람이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그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따른 책임이며, 주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둘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늘 선악간, 천국과 지옥간 균형을 보장하시는, 그런 사랑과 은혜인 것입니다.

 

오래전 주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것은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으셨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당시 지옥으로 말미암아 이 균형이 거의 깨지기 일보직전이셨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마리아를 통한 인성(human)은 벗으시고, 여호와로 말미암은 새로운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을 입으셨으며, 이 새로운 신적 인성으로 지옥을 방문, 지옥의 광기를 수습하심으로써 다시 이 모든 피조세계의 균형을 맞추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인성을 입고 지옥을 찾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안 그러면, 즉 직접 여호와라는 신성 그 자체로 지옥을 직접 찾으시면, 지옥은 그대로 소멸되기 때문이며, 지옥의 소멸은 동시에 천국에도 영향을 미쳐 피조 세계 전체가 소멸되기 때문이었는데요, 피조세계는 선악간, 천국과 지옥간 균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그래서 ‘주님의 은혜란 우리의 속 사람을 뭐 어떻게 뚝딱 변화시켜주시는 그런 게 아니라 우리의 생전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평생 동행하시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평생 우리의 선택을 곁에서 도우시는 그런 은혜입니다. 미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를 그저 불쌍하다고 눈감아주시는 그런 은혜가 아닙니다. 미리 기름을 준비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최종 선택은, 그래서 우리의 최종 모습은 우리가 정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전에 제가 삼성전자 다니던 시절엔 미국 오라클이라는 회사가 참 글로벌 초우량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그 연봉이며, 복지며... 그래서 삼성맨들조차 거기 직원들을 부러워했지요. 자, 그렇게 그곳이 좋아 원했다고 해서 아무나 덜컥 거기 누구 고위직에 의해 낙하산으로 입사를 할 수 있었다 합시다. 만일 그가 그곳의 업무역량을 갖추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상태라면 그는 과연 그곳에서 며칠을 버틸 수 있을까요? 외국기업은 특히나 더 이런 거에 칼 같아서 소위 얄짤없이 바로 쫓겨나지 싶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상태)이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셔서 모두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싶어하시지만, 우리 중 그 상태가 천국에 합당한 상태, 즉 천국에 머무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면 오히려 우리가 못 견뎌 뛰쳐나오게 되는, 천국은 그런 곳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천국은 화염과도 같은 사랑의 열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주님은 우리의 속 사람 퀄러티까지는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속 사람의 최종 모습, 최종 퀄러티, 최종 상태는 전적으로 우리 소관, 우리 책임입니다.

 

주님은 모든 순간,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시는데요, 그러므로 우리는 ‘왜 내가 이 모양이 되도록 나를 내버려 두셨습니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그 사람의 상태, 즉 자기 안에 천국이 있는, 그런 사람이라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이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말씀하신 것도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하든 늘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주님의 법, 주님의 질서를 범하는 게 된다!’며 삼가는 사람입니다.

 

요셉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6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7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39:6-10)

 

라며, 그 짓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짓임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길어졌지요? 좀 빨리 결론을 내려보면은요, 이순신 장군이든 누구든 공정과 정의, 나라 사랑이라는 선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의 안에 올바름과 의로움의 선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천국에 갔을 것이다, 그는 지금 천국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는 생전에 주님이 누구이며, 속 사람을 비롯, 이 모든 게 무엇인지 전혀 몰랐겠지만, 그러나 사후, 천사들을 통해 이 모든 올바름과 의로움,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선함이 사실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주님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으면, 그는 거기서 주님을 시인하고 영접하는데, 그래서 주님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라는 말씀이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꼭 지상에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 태어난 나라와 종교적 환경 등의 이유로 평생 말씀을 들어보지도, 복음을 접해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전 세계 수많은 종교, 수많은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 그들 나름의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셨고, 그래서 세상 살 때,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선하게 산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주님의 신성이 그 안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사후, 주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때, 그곳에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은 그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선한 사람들은 주님의 진리, 주님에 관한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 of the Lord)를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선과 닮았기 때문이지요.

 

부언하여, 오늘 유튜브 제목인 ‘이순신 장군은 구원을 받았을까?’라는 이 모든 혼란은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주님의 말씀과 동격으로 놓고, 거기서 교리들을 추출, 그걸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현 성경 66권 중, 주님의 말씀, 곧 신(神, The Divine)이신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의 생명, 곧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들어있는 말씀(the Word)은, 구약은 , , , , , , , 삼상, 삼하, 왕상, 왕하, , , , , , , , , , , , , , , , , , 말 등 29권이고, 신약은 , , , , 계 등 5입니다. (AC.10325)

 

말씀의 속뜻이란, 사람이 육과 영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겉 글자의 뜻과 속뜻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말씀의 영인 속뜻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만 들어 있고, 신약 서신서들을 비롯, 구약의 룻기, 역대서, 잠언, 전도서 등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비록 신앙 생활에 유익하고 좋은 글이지만 그러나 순수하게 외적이기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적 존재들인 천사들의 눈에는 위에 언급한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땐, 그 속뜻, 즉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생명의 그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향기와... 등등 그 감동에 어쩔 줄을 몰라하지만, 위 리스트에 없는 성경을 읽을 땐, 그저 까맣게만, 즉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외적인 것은 저들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만유의 대 주재이셔서 이처럼 모든 민족, 모든 인종에게 참으로 공평한 구원 시스템을 준비하셨음을 깨달으시고,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넓혀 주님의 시야로 타 종교, 타민족과 인종을 사랑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탈북민들 유튜브나 베트남, 라오스 산지 유튜브 영상들을 보며, 저희 사모에게 '여보, 만약 우리도 저기서 태어났으면 저분들처럼 저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하면서 서로 웃고는 하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교회 밖에서 태어나 교회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그 나라, 그 환경 가운데 태어나신 게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니 제발, 타 종교, 다른 민족과 인종, 심지어 나랑 다른 신학적 입장 가지신 분들에 대해 너무 그렇게 무슨 결사 반대, 목숨 바쳐... 등 결연한 태도로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태도는 주님 앞에서 오히려 매우 위험하시며, 그래서 절대 안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신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구원 시스템은 공정, 공평한 시스템이며, 구원은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것이지 어떤 허가권자의 재량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 본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 생활을 감당할 수 있으면 천국에서 지내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뛰쳐나와 지옥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비록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셨어도 말입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 속 사람을 변화시켜 거듭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속 사람의 상태란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상태, 즉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와 교회 밖에 있는 분들의 차이는, 우리에게는 밝고 환한 주님의 말씀이 있는 반면, 저들에게는 없어 저들은 흐릿하고 어두운 빛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온 인류는 한 사람으로 보이며, 그 가운데 교회는 그 한 사람의 심장과 폐의 역할을, 교회 안에 있지 않은 나머지 인류는 나머지 장기들을 비롯, 나머지 지체들을 의미합니다. 전도도 선교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목회든 전도와 선교든 그를 통해 자신의 속 사람이 더욱 잘 준비되고 있다면 참 다행이고 감사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네, 그렇습니다 ㅎㅎ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시면, 우선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책 36장, ‘천국의 비 기독교인들’과 55장, ‘천국에 이르는 삶은 어렵지 않다’를 읽어보시기 바라며, 필요하신 분들 위해 관련 pdf를 공유하오니 도움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래는 영문이며,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번역본이 필요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통해 구하실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spiritual-world.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말씀드린 것처럼,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사람들은 특별히 무슨 신학교육 같은 거를 받지 않아도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처럼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을 받아 모든 걸 통찰, 지각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시대에는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오늘날처럼 신학적 교리로 정돈하는 걸 무척 꺼리며 삼가던, 불편해 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는 예를 들면, 선하고 착한 사람들한테 주님을 생활과 삶으로 보여주지는 않고, 대신 교리교육으로만 가르치려 할 때, 그들이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 그 시대에 벌써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수집, 체계화된 교리로 정돈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요, 이들이 바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 혹은 교회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인류는 나중에는 결국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교리로 주님과 연결될 것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그들을 잠시 따로 떼어 보관하시는데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말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의 배경, 속뜻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창립 10주년 예배를 사모와 단둘이 드리는데도 평안하고 감사한 이유’ (2023/9/5)

 

지난 주일(9/3) 오후, 둘째와 저 아랫동네 어느 까페에서 대화하던 중 창립 10주년에 대한 둘째의 반응이 계속 마음에 남아 이렇게 몇 자 적어봅니다.

 

둘째는 자기는 결코 이런 모양의 창립 10주년을 원하지 않았다며, 몹시 실망한 듯 고개를 돌리더군요. 자기는 그래도 번듯한, 최소한 무슨 상가 건물에 사람들도 좀 북적이고, 화환이며, 무슨 그럴듯한 감사예배 식순도 있고... 하여튼 자기는 이건 아닌 것 같다며, 강하게 부정을 하더군요...

 

다음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면서, 즉 주님이 그를 통해 허락하신 글들 중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번역을 하게 되면서 접하게 된 아래 내용들을 통해, ‘아, 그래서 이상하게 나는 이런 예배, 이런 교회가 더 좋았던 거구나...’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위 주석은 총 10,837개의 글로 되어 있는데요, 그 중 414번 글의 3번, 4번 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창세기 4장 20절,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중 ‘장막에 거주하며’에 대한 주석입니다.

 

414. [3] 말씀(the Word)에서 이 ‘장막’(tent)이라는 용어를 채택, 사랑에 속한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들과 거룩한 것들을 표현하는 이유는, 고대에는 예배의 거룩한 의식(儀式, rites)을 그들의 장막에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 신성모독스런 예배들을 통해 장막을 신성모독하기(to profane) 시작했을 때, 세워진 게 순서대로 성막(the tabernacle)이고, 나중에는 성전(the temple)입니다. 이런 이유로, 장막은 성막과 성전이 가리키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같은 이유로, 거룩한 사람을 가리켜 주님의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 같은 걸 상징한다는 것은, 시편을 보면 분명한데요, The reason why the term “tent” 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of the Lord. That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은 그의 인성(人性, human essence)과 관련하여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천인(天人, celestial man, 천적 인간, 천적 천사, 삼층천 천사)을 그렇게 부르며, 모든 천적이며 거룩한 것들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그 뒤에 일어난 교회들(고대교회, 유대교회, 기독교회 등)보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고,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혼자, 즉 자신들의 가정에서 살면서 자신들의 장막에서 지극히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장막은 신성모독을 당한 성전보다 훨씬 더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를 기념하고자 초막절(草幕, the feast of tabernacles)이 제정된 것이며, 이때 그들은 땅의 소산물을 거두고, 그 기간,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자기들도 장막에서 지낸 것입니다. (레23:39-44; 신16:13; 호12:9)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 “tent,”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39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레23:39-44)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신16:13)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호12:9) (AC.414:3, 4)

 

이상, 윗글을 통해 저는 왜 그동안 규모 큰 교회들과 그 예배들을 힘들어했는지, 그리고 왜 집에서 하는 교회와 이런 가정 예배에 오히려 끌렸는지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는 다음에 소개할 정말 놀라운 내용으로 이어지며,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참고로, 아래 내용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1.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라 한다.

 

22. 천적 나라를 이루는 천사들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보다 깊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내적인 천사, 또는 더 높은 천사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천국도 더 내적이고, 더 높은 천국이라고 한다. 더 높다, 더 낮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23.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인 천적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다.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영적 사랑이라 부르며, 이는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선(좋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한다. 따라서 그 두 나라의 선도 하나는 천적 선, 다른 하나는 영적 선이라 한다. 이로 보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과 구분되는 것처럼, 그 두 나라가 구분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선은 보다 내적인 선이고, 그 사랑도 보다 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더 내적인 천사들이고, 더 높은 천사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24. 천적 나라는 주의 성직의 나라(the Lord’s priestly kingdom)라고도 불린다. 말씀에서는 ‘주의 처소’(his dwelling place)라고 한다. 영적 나라는 주의 왕권의 나라(his royal kingdom)라고도 하며, 말씀에 ‘주의 보좌’(his throne)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주님을 신성의 천적 측면에서 ‘예수’(Jesus)라 했고, 신성의 영적 측면으로는 ‘그리스도’(Christ)라고 칭했다.

 

25. 주님의 천적 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보다 내적으로 받기 때문에, 영적 나라의 천사들보다 지혜와 영광에 있어 훨씬 뛰어나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더욱 주님과 가깝고 친밀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신적 진리(Divine truths)를 계속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먼저 그들의 기억과 사고(thought)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 진리를 직관하며, 진리를 마치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본다. 그들은 진리가 옳은지 그른지 추론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이 바로 이들에 대한 말씀이다.

 

33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렘31:33-34)

 

이상, 저는 그 성향이 천적 나라, 천적 천사가 더 끌리고 좋습니다. 물론 제 착각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굳이 가슴 신앙, 머리 신앙으로 이해하자면, 저는 가슴 신앙에 더 기울어지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이유로, 저는 조용히 아내와 함께 집에서 주님을 거룩하게 예배하는 편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들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천적 나라로, 어떤 사람은 영적 나라로 올라가듯, 그렇게 누구는 이렇게, 또 누구는 저렇게 타고나는 것이며,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