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1-24)

 

에녹(Enoch)은 아담(사람, man)부터 시작, 일곱 번째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입니다. 태고교회 첫 번째 교회인 아담부터 셋, 에노스까지, 이 세 교회는 비유하자면, 태고교회라는 방 전체를 한 가운데서 환히 비추는 등과 같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핵은 첫 번째 교회인 아담이지요.

 

비록 등이 한 가운데서 방을 비추지만 둘레로, 주변으로 갈수록 흐릿, 어두워지는 것처럼 태고교회도 후대로 갈수록 그렇게 어두워지다가 끝에 가서는 홍수로 종말을 고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와 홍수, 그리고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를 잇는 아주 특별한 교회이지만, 그러나 태고교회에 포함시키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더이상 퍼셉션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 첫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노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오늘은 점점 어두워져 가던 중 끝에서 두 번째인 이 에녹에 대하여, 평소 우리가 알던 그 경건해(?) 보이는 겉뜻과는 많이 다른, 그 속뜻을 좀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이 읽는 에녹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태고교회는 지금은 사라진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지금은 거의 이해 불가한 내적 커뮤니케이션이 있던 때였으므로, 그리고 주님은 인류를 이런 방식으로 자신과 연결되게 하셨으므로, 태고교회가 어두워져 간다는 건, 점점 그 퍼셉션이 희미해져 간다는, 그러므로 서서히 무언가로 그걸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 곧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두 가지, 그러니까 주님 음성을 직접 듣는 방법과, 잘 정돈된 교리를 학습하여 듣는 간접 방법이 있는데, 얼핏 느껴지시는 대로, 이 둘은 그 근본이 아주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퍼셉션, 내적 음성으로 아는 것이고, 후자는 학습을 통해 지식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하여 삼층천을 이루고, 후자는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이층천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태고교회 일곱 번째 후손인 에녹 정도 되자, 아직 주님 음성 듣는 퍼셉션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너무 희미해져서, 두루뭉술 일반적으로는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알쏭달쏭 주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고, 이쯤에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 그동안 퍼셉션으로 알던 주님의 신성, 곧 선과 진리를 글로 정돈, 교리화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엄청난 짓(?)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 에녹이라는 교회입니다. 위 본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To walk with God)라는 표현들의 속뜻이 바로 이겁니다.

 

나름 필요에 의해 이런 짓을 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아직은 퍼셉션으로만 사람들은 주님과 연결되어야 하였으므로, 이들이 만든 교리를 주님은 이때는 사용을 금하시고, 나중을 위해 따로 보관하셔야 했는데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의 속뜻입니다. 

 

인류는 곧 지금 태고교회처럼 하나님과 천사들 간 다이렉트로 하는 퍼셉션 같은 커뮤니케이션을 더 이상 못하게 되고, 홍수 후 주님은 대신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인 ‘양심’으로 주님과 연결되게 하셨고, 이후 인류는 퍼셉션이 아닌, 학습을 통해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를 위해 이 에녹이라는 교회가 수고하여 만든 교리를 따로 보관하신 것이지요.

 

어떠신가요? 말씀의 겉뜻과 그 속뜻이 참 다르지요? 저 자신,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번역을 하다가 좀 충격을 받은, 그래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말씀이어서 이렇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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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눅23:7-9)

 

이런 상황이 앞서도 있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였는데요, 다음은 그 본문입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눅22:63-65)

 

즉, 헤롯이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란 거’나 여기, 지키는 사람들이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한 거나 같은 건데요, 그러니까 창조주요, 모든 내적인 것(內的,  internal, 속)의 주되신 분을 육안으로 뵙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저 내적인 걸 담는, 속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외적인 거(外的,  external, 겉), 여기서는 무슨 마술이나 신통력같이 좀 극단적으로 표현된, 이런 걸 추구하다가 그만 날려버린다는 측면에서 말이지요.

 

신앙생활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적의 유익은 분명합니다. 비록 내적 신앙에 대해 잘 모르셔도 그 본 바탕이 선하고 진실하신 분들은 그 구하는 외적인 것들의 기저에 이미 내적인 것들이 깔려있어 이런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고, 그것이 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육체라는 옷을 입고 사는 이 세상 삶에서는 이 정도가 무난한 신앙생활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내면이 열린 분들, 참으로 주님의 내적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분들은 보통은 기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천사들이 우리처럼 무슨 금식기도나 철야기도, 산기도, 대적기도, 방언기도, 안수기도, 예언기도 및 치유기도 같은 걸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이미 내적 존재들이어서 주님 앞에 늘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터라 존재 자체가 늘 기도이며, 그래서 늘 능력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로 하여금 늘 주님을 향하게, 늘 자기 앞에 있어 주님의 현존을 경험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런 내적 신앙이 뭔지 모르시면서, 그리고 나는 신앙인이다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깊게 가라앉아 저런 겉의 것들을 추구하시는 분들한테는 저런 기적과 이적이 오히려 해로울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장 내적이신 주님, 가장 인모스트(inmost)하신 주님 대신 제법 그럴듯하신 주님을 찾게 만들기 때문인데요. 마치 그럴듯한 메시아를 구했던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기적과 관련된 우리 기도 중에 그 응답이 무응답이어서 어리둥절하신 분들은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속 사람의 주이신 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속 사람의 나라로,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주님의 나라, 곧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야 임하는 나라입니다. 주님 말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2)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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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눅23:1-2)

 

일단 저들의 고발은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은 위 제목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는 하셨지 금하신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바리새인들이 놓은 덫 때문에 할 수 없이 하신 말씀이시고요.

 

저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소위 가짜 뉴스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원수처럼 여기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지금은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저들이 이러고 있는 이유는, 예수를 죽이고는 싶은데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인 지금은 자기들한테는 사형집행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성전 뜰 안으로 무단침입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마침 이 유명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가 나왔으니 이 말씀의 속뜻, 그 내적 의미를 잠깐 살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적어봅니다.

 

가이사, 즉 케사르(Caesar, 라틴)는 당시 로마 황제를 일컫는 호칭입니다. 헬라어 카이사르(Καῖσαρ)를 라틴으로 읽은 것이지요. 말씀에서 왕이나 황제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는 세상 진리, 법 따르는 것, 곧 자연적 삶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는 하늘 진리, 법 따르는 것, 곧 영적인 삶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늘을 담는 그릇입니다. 마치 우리 육체가 영을 담는 그릇인 것처럼, 또는 진리는 선을 담는 그릇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하신 이 말씀은 세상에서 세상 법도를 따라 자연적 삶을 살되 그 안에 하늘의 법, 곧 영적인 삶을 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둘의 조화를 말씀하신 것이지, 결코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 법도를 따라 살되 반드시 그 안에 하늘의 법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선택, 무슨 행위를 했으면, 그 이유와 동기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신 말씀처럼 말입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말씀에서 ‘하나님’은 주님의 신성 중 진리 관련 호칭이고, ‘여호와는 선 관련 호칭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 호칭 관련, 1과 창2를 유심히 비교해 보세요. 거기 보면 창1에는 하나님만 나오는 반면, 2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오는데요, 여기엔 정말 깊은 아르카나(라틴, Arcana, 秘義)가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나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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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3-5)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겉뜻들과는 달리 어떤 속뜻들이 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령, 3이라는 숫자, 7이라는 숫자, 10이라는 숫자, 12라든지, 40이라든지, 100이라든지, 더 나아가 계시록에 나오는 1,000, 144,000 등... 1에서 9까지의 숫자들의 의미는 두 자릿수, 세 자릿수 등 복합수가 되면서 그 의미가 확장, 예를 들면, 책 한 권 분량의 의미가 어떤 큰 숫자 하나로 표현될 정도로 깊은 의미들을 지니게 됩니다. 천사들한테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의 나라와는 달리 천국은 상태와 그 상태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저 숫자들 역시 어떤 상태와 그 변화를 나타내는 쓰임새를 가지며, 그래서 말씀 역시 천사들은 그렇게 이해하며 읽는데요,

 

그러니까 이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의 의미는, 아담이라는 첫 번째 태고교회에 ‘구백삼십’(930)으로 표현되는 어떤 수많은 상태와 그 변화가 있었으며, 그후 이 교회의 퍼셉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이 퍼셉션으로 늘 주님과 연결된 상태가 살아있는 상태인데, 그러므로 교회에 이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곧 그 교회는 죽었다, 그 교회의 쓰임새가 다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참고로, 퍼셉션(perception)이란 천국에서 주님과 천사들 간에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음성(an internal dictate)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창3:8) 같은 것이지요. 이런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아직까진 그래도 존재했던 시기를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라 하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이 시작된 때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라 합니다. 새로운 방식은 양심(conscience)입니다. 즉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그 이후 사람들은 이전 선조들이 누렸던 방식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저급한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내면이 열린 사람들, 즉 삶이 받쳐주는 신앙인들은 이 퍼셉션으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은, 특별히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학습하지 않고도 지금 이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았는지 여부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신, 내 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처럼 말입니다.  

 

이 ‘구백삼십’을 비롯, 노아의 홍수 전까지 존재했던 태고교회 전체 기간이 실제로, 그러니까 지구 나이로 얼마만큼 존속했는지는 모릅니다. 지구의 나이가 45, 6억 년이나 되고, 그 사이 오늘날 고고학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한 소위 오파츠(Out-of-place artifacts, OOPARTS)라는 것들이 발견되는 걸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주님도 굳이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주시지는 않는, 그런 어떤 장구한 세월이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입니다.

 

첫 번째 태고교회인 아담은 그동안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교회 중 주님이 가장 사랑하신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천적(celestial) 교회, 천적 인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창세기 2장 3절에 나오는 일곱째 날’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반면, 창5에 쭉 나열되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및 므두셀라 등 이후 노아로 연결되는 교회들은,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점점 황폐해져서 결국 대홍수, 노아의 홍수로 표현되는 첫 번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교회들입니다. 교회가 황폐해진다는 건, 교회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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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은 자기 제사를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그 이유를 말씀하셨으나 결국 그는 들에 있을 때 아우 아벨을 쳐죽이지요. 이 정도로도 그의 악은 충분한데 심지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시는 여호와 앞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 대답하는 등 정말 뻔뻔하기까지 합니다.

 

그랬던 그가, 여호와의 설명, 곧 그가 자초한, 앞으로 전개될 삶의 무게 앞에 절망하며,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자 여호와께서는 ‘네가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하시는 대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시며, 사람들이 그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여러분, 이 부분이 이해가 되십니까?

 

다음은 말씀을 속뜻, 즉 내적 의미로 읽는 천사들이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이렇게 밖에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아벨은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 신앙, 가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faith without charity)을 말합니다. 가인의 제사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며, 그래서 주님이 결코 받으실 수 없으셨던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인류의 역사는 결국 이 가인의 역사로 흐를 걸 아시고는 이 가인이라는 신앙을 통해서 아벨이라는 신앙을 일으키실 것을 섭리하셨으며, 그래서 이 가인 신앙을 보호하기로 하시고, 그래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이 신앙을 건드리면 그걸 신성모독(神性冒瀆, sacrilege)으로 보겠다 하신 것입니다.

 

타인의 신앙이 나와 다르다 하여 함부로 말로, 행동으로 그의 신앙에 폭행을 가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 역시 주님이 공을 들이시는 사람이며, 나만 가만히 있으면, 즉 훼방을 놓지 않으면, 그는 어쩌면 주님의 인도대로 체어리티의 사람, 아벨 신앙의 후손이 될 수도, 그러니까 지금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신앙인이지만, 그의 안에 신앙심이라는 게 남아있기만 하면 주님은 그걸 가지고 일을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창세기 1장부터 쭉 읽다 보면, 아직 지상에 사람은 가인까지 셋뿐인데, 아벨은 죽었으므로, 갑자기 가인의 입에서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는 말이 나옵니다. 나중엔 놋 땅에 거주하며 아내까지 얻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요?

 

천사들은 창세기 11장 아브람 전까지는 그 등장인물들을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그 이름으로 부르던 교회로 봅니다. 다른 말로는 그 이름으로 부르던 신앙이나 교리로 보지요. 참고로 아브람 전까지는 실제 역사가 아니며, 그 전까지의 장구한 역사(※ 참고로, 저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인 45, 6억 년을 받아들입니다)를 일종의 스토리처럼 엮은 것입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AC.66, 창1 뒤,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66 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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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아담, 가인, 아벨 등은 모두 교회를 말합니다. 즉 아담이라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서 두 종류의 신앙이 일어났는데, 그 하나가 가인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다른 하나는 아벨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라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특별히 에벨(창11) 전까지 등장하는 인명(人名)들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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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눅22:63-65)

 

영어 성경에는 주님의 눈을 가리는 게 아니라 얼굴을 가리고 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에는 주님께서 아론에게 명하시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하십니다. 즉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사랑과 자비는 모든 악과 거짓을 이기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는 것은, 타락한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 말씀의 생명인 사랑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교리가 바로 사랑 없는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입니다. (이상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설교에서 인용)

 

이 ‘오직 믿음’(Faith Alone) 교리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심판의 대상이 모두 이 ‘오직 믿음’ 교리에 함몰된 교회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저는 이 교리가 왜 이토록 위험한 교리일까 좀 생각해 봤는데요, 그것은...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곳인데, 이 ‘오직 믿음’ 교리로는 이런 사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즉 평소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소홀,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1, 22)

 

즉,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속 사람의 상태 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믿음’ 교리에 취해 속 사람의 상태에 소홀히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없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얘깁니다.  

 

참고로, 이 ‘오직 믿음’ 교리, 다른 말로  이신칭의’(以信稱義)라 해도 될까요?, 이 교리의 출처는 로마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디모데전서 등 주로 사도들, 특히 바울의 서신들입니다만, 그러나 이들은 사실은 ‘말씀’(The Word)이 아닙니다. ‘말씀’은 오직 주님,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신(, The Divine)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속뜻, 그러니까 내적 의미(다른 말로는 아르카나 Arcana 라틴)가 있어야만 말씀이기 때문이며, 신이 아닌 사람이 쓴 글에는 이게 없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건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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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눅22:63-65)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Faith)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제작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와 함께 초대교회 3대 신경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신조의 주된 내용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입니다.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스웨덴)는 그의 유작,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첫 라틴 출간 1785-1789, 쓰기는 1757, 계19:10에서 멈춤)에서 이 신조를 다루고 있는데, 아래 내용은 그중 어떤 게 ‘말씀을 더럽히는 것’인지 당시 종교, 특히 교황 교회(the papal church, 스베덴보리식 표현, the papal religion이라고도 함)의 부패상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의 뼈와 무덤에 거룩함이 있다는 것, 시체가 기적을 행한다는 것, 사람이 자신의 부를 우상이나 수도원에 성별(聖別)하지 않으면 나중에 연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 천국과 지옥의 권세를 가졌으므로 사람이 신이라는 것 even that there is holiness in the bones of the dead and in sepulchers, that carcasses perform miracles, that man will be tormented in purgatory if he does not consecrate his wealth to idols or to monasteries, that men are gods because heaven and hell are in their power

 

위 하나하나의 사례는 우리가 교회사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듯 당시 아주 지독하게 부패한 교황 교회의 폐단들이며, 결국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사례들입니다.

 

위 본문은 또한 교회의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그러니까 말씀을 앞세우는 목적이 주님 사랑이 아닌, 저들 교황 교회들처럼 말씀을 그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삼는 일체의 종교적 행위가 곧 말씀을 더럽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전체가 이런 건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 정교회, 카톨릭, 개신교 (발생순) 등 여러 기독 신앙이 있는데, 그중 삶은 소홀히 하고, ‘오직 믿음’에 치우친 나머지 그 사고와 언행이 매우 세속화된 모든 교회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오직 믿음’의 뿌리는 의외로 그 기원이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표현만 마틴 루터 때 생겨났을 뿐, 그 본질은 아벨을 죽인 가인한테까지 올라갑니다. 아벨의 속뜻이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된 교회, 곧 신앙고백이라면, 가인은 사랑 따로 신앙 따로의 교회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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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눅22:63-65)

 

위 본문은, 겉뜻으로는 기록된 대로 이들이 주님을 괴롭히며 욕보이고 있는 것이지만, 속뜻으로는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The WORD)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상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설교에서 인용)

 

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힘’이라는 건 말씀에 손을 댄다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에 사람이 무엇을 섞는 것, 곧 자의적으로 해석, 곡해, 왜곡하는 걸 말합니다. 말씀은 오직 말씀하신 분만이 푸실 수 있으며,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계시받은 자만이 풀 수 있으며, 이때에도 푼다고 하지 않고, 전달한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은 오직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달자는 자신의 상태를 순도 100%로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절대로 결코 뭘 섞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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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권사님께 드린 권면 (2024/10/11)

 

다음은 제게 ‘할 말은 태산이지만 지금은 침묵할께요...’ 하신 어느 권사님께 보낸 답신입니다.

 

곧 팔 학년 되실 그분의 어떤 정황을 좀 아는 저는 다음날 아래와 같은 카톡 답신을 보내드렸는데요, 자세한 건 프라이버시 있어 좀 가리고, 내용 또한 좀 다듬어 글 올립니다.

 

 

권사님, 오늘은 어제 한글날을 피해 세종시 모처에서 외식 후, 국립 세종수목원에 들러 저희 부부, 둘째와 함께 좋은 시간을 가진 하루였습니다. 세종 국립수목원은 대전 저희 집에서 차로 25분 거리입니다.

 

이곳은 두 번째 오는 데, 처음 방문 때 놓쳤던 여러 가지, 가령 수목원 전체 전기차 버스 투어라든지, 지중해 전시 온실 전망대를 새롭게 경험하면서, 그러나 이 모든 눈에 보이는 겉의 나라의 것들을 통해 이것들과 서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고 있는 저 천국, 속의 나라의 어떠함들을 마음에 그리며 구경하는 중에 권사님 생각이 났지요...

 

권사님, 이제 얼마 안 남은 이 지상 생활 후,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천국으로 가게 되는데요, 그런데 천국은 눈에 보이는 이 겉 사람의 세상과 달리 속 사람으로 가게 되는 나라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천국은 이 겉의 나라가 아닌, 속의 나라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중에 아직 아무도 자기 영의 모습을 본 자가 없듯 자기 육의 모습인 지금 거울에 비친 자기 외모 밖에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속 사람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어떤 섭리로 다른 사람들의 영을 잠깐 볼 수 있도록 허락받으신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육신의 외모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그 영은 가히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괴물 형상인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외모는 주름투성이인 노파이지만 그 영은 가히 이를 데 없이 젊고 아름다우신, 천사 같은 분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하나의 예이지만,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대로,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임을 기억, 그러므로 권사님, 이제 그만 이 세상 일, 곧 겉의 나라의 일들로부터는 물러나시고, 저 천국, 곧 속의 나라에 대해서만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겉의 나라에 속한 모든 일은, 그 동기가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닌 한, 우리 속 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일에 아무 상관이 없거나 쓰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전히 겉의 일에 마음을 기울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실 경우, 이번에는 그 빈틈으로 계속해서 지옥이 우리 삶에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삶의 우환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지옥, 곧 악한 영들은 우리의 속 사람, 곧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한, 우리 속 사람을 못 건드리지만, 그러나 우리의 겉 사람, 곧 유전 악 아래에 있어 지키기 쉽지 않은, 겉의 일들은 건드리며,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하신 대로 악에게 공격을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생전에 주님도 육으로는 마리아로 유전한 유전 악 가운데, 즉 십자가 마지막 시험 전까지는 아직 불완전한 인성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지요. 악은 오직 감각을 비롯, 이 겉의 나라에 속한 것들만 건드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을 비롯, ‘발꿈치 등은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겉의 일에서 물러나는 것은 주님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하신 말씀을 붙들고, 그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것이지만, 반대로 계속 겉의 일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위 주님의 권면을 거스르는 것으로, 그 결과 주님도 더 이상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수 없어, 즉 더 이상 우리를 도우실 수 없어 우리는 지옥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사님, 이제 그만 이 세상 겉의 일에서 손을 떼고 물러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계속된 주님 말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11:29-30)

 

하시는 이 말씀의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혹은 자초하는 모든 시험은 사실은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이 홀로 싸우시는 시험들이며, 그래서 우리 힘으로 싸우면 지지만, 주님이 대신 싸워주셔서 우리가 이기는 줄을 믿습니다. 아멘!

 

대전에서 변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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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사람들에 관한 네 가지 경우

 

 

아래 며칠 전 올린 글이 다소 산만해 보여 조금 정돈해 보았습니다.

 

 

선량하지만,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

선량하지만,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사후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접한 후, 그 전반적인 걸 어느 정도 알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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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그러니까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 줄여서 ‘교리’라 하겠습니다. 이것과 후자, 곧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실천, 역시 줄여서 ‘체어리티’라 하겠습니다. 이 각각에 대한 진심 여부로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교리도 진심, 체어리티도 진심

2. 교리엔 진심, 체어리티는 별로

3. 교리엔 별로, 체어리티는 진심

4. 교리도 별로, 체어리티도 별로

 

 

먼저 1번, 교리도 진심, 체어리티도 진심’의 경우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우가 가능할까 싶지만, 실제로, 그러니까 겉보기엔 가능합니다. 제가 이런 경우들을 목격했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겉보기’라 한 것은, 이분들이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잘 모르시고 오해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나오며, 주님에 대한 사랑과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분들은 “나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애정도 있다. 분명히 느낀다.” 하시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주님을 사랑하면서 이 ‘오직 믿음’의 교리에 진심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의 교리는 교리화만 지난 16세기에 루터가 했을 뿐, 사실 그 기원은 아득히 저 멀리 창세기 ‘가인’이라는 사람들한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 이 오직 믿음’의 교리와 체어리티가 절대 어울릴 수 없다, 함께할 수 없다 하는 이유는, 첫째는 이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선과 진리를, 체어리티와 신앙을 따로 떼어놓겠다는 것이며, 그렇게 해도 구원을 받는다, 천국을 갈 수 있다 가르치는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사람의 내면이 어떤 건지를 잘 모르는 무지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무엇이며, 영이라고도 하는 속 사람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만든 교리여서 저런 그럴듯하지만 매우 이상한 교리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 루터, 칼빈 등이 말씀’(The Word)인 줄 알고 사용했던 사도들의 서신서들은 사실은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 안에 하늘의 비밀을 담아놓으신 성경만이 말씀’이며, 천사들에게는 이것이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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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가인이라는 사람들’이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에 관하여는 아래 링크부터 시작, 창4 관련 링크들을 주욱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C.324, '창4 본문, 개요'(AC.324-337) -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또는 이단들, 그리고 '에노스'라고

※ AC.324, '창4 본문, 개요'(AC.324-337) -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또는 이단들, 그리고 '에노스'라고 하는 새 교회 창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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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체어리티의 참, 거짓에 대한 구분은 그 숨은 동기가 무엇인가를 살피면 됩니다. 즉 이웃을 향한 그 체어리티를 행하는 동기가 자기 사랑이면 거짓, 주님 사랑이면 참인 것이지요. 이 ‘체어리티’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오직 믿음’의 교리가 왜 오류인지에 대한, 더욱 정돈된 글들을 준비,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오늘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정돈만 하겠습니다.

 

 

2번, 교리엔 진심, 체어리티는 별로’의 경우입니다. 아마 이 경우가 거의 최악일 것 같은데요, 이분들이 곧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며,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찾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개신교인들 중에는 ‘나는 설마 아니겠지...’ 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은데요, 우리는 자기 마음속 숨은 동기를 잘 모르거나 속는 경우가 의외로 참 많음을 볼 때, 그건 정말 모르는 겁니다. 참으로 주님이 빛을 비추어 주셔야 우리 눈이 밝아짐을 고백합니다.

 

참고로, 저는 평소 기독교인과 개신교인을 의도적으로 구분하는데요, 전자는 후자의 상위(?) 개념으로, 정교회, 카톨릭, 개신교 등, 그리고 기타 예수 그리스도에 그 뿌리를 둔 모든 기독 신앙을 말합니다. 개신교는 기독교 신앙의 한 갈래입니다.

 

그러니까 이 2번의 경우가 제가 며칠 전 올린 글에서 ‘제발 이런 사람은 되지 마세요!’ 거듭거듭 극구 말린 경우가 되겠습니다.

 

 

세 번째인 3번, 교리엔 별로, 체어리티는 진심’의 경우입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그 당시 아프리카 사람들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1688 생, 1772 졸한 사람인데, 그때만 해도 아프리카는 거의 미지의 대륙이었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오랜 기간 영계를 방문, 그곳에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이 천국에 참 많이 와 있더랍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겠지요? 아프리카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지금도 모든 대륙, 수많은 인종과 종교를 망라, 그 가운데 체어리티의 삶을 살며,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깃든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을 가까이한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올라가고 있겠지요.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의 신성의 나라로, 생전에 자기 안에, 그러니까 자기 속 사람 안에 이 주님의 신성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심지어 주님도 그를 천국에 머무르게 하실 방법이 없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체어리티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인데요, 아래 요한복음 말씀에서 확인하세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가까이하고, 그 계명대로 사는 것, 이것이 체어리티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마지막, 4번, 교리도 별로, 체어리티도 별로’의 경우입니다. 이 경우 역시 거의 끝에서 두 번째를 달리지 싶은데요, 이런 분들은 교회를 다니시는 걸까 싶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고, 그냥 복과 구원만 받으며, 살면서 여러 악한 기운으로부터 보호받고자 일종의 보험으로 다니시는 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분들 역시 지옥 열차표를 예약하신 분들인데요, 왜냐하면 이런 분들의 속 사람이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실제 정체는 자기 사랑의 사람들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는 또 다녀야 하는, 그래서 비록 몸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눈은 세상을 향하고 있는, 그래서 세상 사랑의 사람들이기도 한, 참 안타까운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위 1번, 3번의 경우는 천국 가는 황폐화 과정을 밟되 1번은 지독하게, 3번은 가볍게 밟습니다. 2번, 4번 역시 이 과정을 밟지만, 이분들의 경우는 지옥에 들어가기 위해 밟는 경우인데, 그래서 안타깝다 한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니시는 교회를 그만 두시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우시면, 일단 계속은 다니시되, 1번, 3번은 그나마 괜찮지만, 2번, 4번은 반드시 피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은 건, 위 네 가지 경우에는 없는데요, 참된 교리로 올바른 체어리티의 삶을 사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참된 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하나 됨을 가르치는 교리이며, 어떤 신앙이 구원의 신앙이 되려면, 신앙 고백과 함께 체어리티의 삶이 받쳐주는, 그런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아래 창4, 아벨’이라 하던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AC.326, 창4:3-5, '창4 개요'(AC.324-337) - '가인의 제사', '아벨의 제사'의 속뜻

※ AC.326, 창4:3-5, '창4 개요'(AC.324-337) - '가인의 제사', '아벨의 제사'의 속뜻 창4 개요 326 각각의 예배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인의 제사’라 하고, 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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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이 권면을 마음으로 받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는 모든 분께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빛을 비추심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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