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29(D1)-주일예배(2510, 눅13,31-35), '오늘과 내일, 그리고 제삼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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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9(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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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_MKK8PXysU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31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3:31-35)

 

 

※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과 새 교회 이야기입니다.

 

새 교회(new church)는 특히 시험이 많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요,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 스베덴보리를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직장에 다닐 때였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에 한 분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서 읽게 됐는데, 새 교회의 진리가 매우 합리적인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 여기서 잠깐, 이런 경우, 즉 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입니다. 그나마 읽어보겠다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있어도 천 명 중 한 명꼴일까요? 거의 99.99%가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 하거나 읽으면서 자기가 아는 교리와 달라 속에서 불이 난다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괜히 속에서 화가 난다 하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지난 일지를 보니, 5년 전인 2018년 10월에 이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새 교회’라는 게 뭔지도 몰랐고, 수도원 수도사 공부, 한밭제일교회 이영환 목사의 40일 금식 훈련,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 및 공영복 선생의 핵심진리 등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지요. 즉 천국과 지옥에 관한 수많은 견해와 입장, 간증, 풀이 등에 둘러싸여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그래서 책을 접하면서도 무슨 또 하나의 입장이 등장함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는 난생처음 접하는 내용이었지만 그럼에도 저는 아, 맞다. 바로 이것이다! 싶었습니다. 뭔가 뿌옇던 시야가 바람에 걷혀 갑자기 확 밝아지는 그런 느낌, 백두산 천지가 구름과 안개로 안 보이다가 바람에 걷혀 갑자기 확 드러날 때의 그 숨이 막힐 듯한 위용과 장관같이 말이지요! 저는 특히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첫째, 이 책의 풀이를 가지고는 그동안 석연찮던 거의 모든 신학적 궁금점들이 거의 다, 적어도 제 수준에서는 말이지요, 설명이 된다는 것이었고, 둘째,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기록을 통해 오직 주님만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입장과 견해가 사사로운 것이었다면, 분명 어딘가에 그 흔적이 교묘히 숨어있을 텐데도 추호도, 그리고 지난 5년간 저는 이 책 말고도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 번역을 해오고 있는데요, 그 10,837개나 되는 글 어디에도 스베덴보리는 오직 주님만 높이며, 허락하신 것만 밝히고 있는 걸 볼 때, 이는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셋째는, 이 새로운 계시를 통해 저는 참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나아가 어떤 신(神, The Divine)이신지 어렴풋이라도 알게 되었으며, 참으로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바울 서신에 뿌리를 둔 현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의 입장에서 물러나되 마치 지상에서 발사된 로켓이 죽을힘을 다해 중력을 거슬러 올라 궤도 위에 안착하듯 그렇게 물러날 수 있었고, 지금은 남은 생애를 오직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을 번역,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 잠깐 제 얘기였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이순철 목사님 얘깁니다.

 

처음 세례를 받고 한동안은 아내와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말씀에 따라 생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시험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은 목회를 하게 되고, 교인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대개 말씀을 읽는 중에, 또는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진리의 영감을 얻습니다. 그리고 각자 삶으로 돌아가 진리를 실천하게 되는데, 그러나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뜻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첫째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르고요, 그래서 고쳐야 할 점이 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고쳐야 할 점이 뭔지는 아는데, 의지가 약해서 고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의 나라에 둬야 하는데,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에 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결국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영적인 시험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즉 시험을 통해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고요, 믿음과 사랑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시험이 없으면 이런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새 교회인들에게 특히 시험이 많은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거룩하게 되셨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인간은 주님의 능력에 의지해 거듭나지만, 주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주님이 거룩하게 되시는 과정과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을 대비해 볼 수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31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께 헤롯이 죽이려고 하니 이곳을 떠나시라고 말합니다. 헤롯은 주님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 분봉왕으로, 세례 요한을 죽였던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예수님 탄생 시 헤롯은 이 헤롯 안티파스의 아버지인 헤롯 대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주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헤롯이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유대교회의 거짓 교리가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는 영적으로 교회를 뜻하고, 왕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왜 그렇게 진리를 미워할까요? 그 이유에 대해 요한복음 3장 20절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이렇게 말합니다. 악하고 거짓된 자들은 진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밝은 빛 아래 자신의 악과 거짓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헤롯은 주님만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안에도 진리를 위협하는 헤롯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불순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입니다. 진리 때문에 욕망을 눌러야 할 때, 또는 참된 진리 안에 들어왔는데도 질병이나 시험이 그치지 않을 때, 그때 진리가 불편하고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새 교회 말고도 진실한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 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가 헤롯과 바리새인이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죽이려고 하는 때입니다. 바리새인의 그와 같은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주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십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이유는 헤롯으로 표상되는 거짓 진리나 지옥의 거짓 영들의 교활함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짐승은 우리 안에 있는 애정을 나타내는데, 특히 여우나 뱀은 교활한 애정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거짓 영들은 다양한 욕망과 거짓말로 신앙인들을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진리를 의심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진리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주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오늘과 내일과 모레, 삼일 동안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과 내일과 모레, 삼일은 한편으로는 주님의 인간성이 거룩해지는 과정을 나타내며, 또 한편으로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완전해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이 세 단계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귀신(demon)이란 진리를 마음대로 추론해 거짓으로 만들게 하는 영을 말합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악과 거짓이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온전한 거울 역할을 할 진실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자주 말씀하신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늘 하실 일은 귀신을 쫓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는 뭘까요? 주님에 의해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진리에 따라 악을 끊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병에 걸려 있을 때는 몸이 마치 족쇄에 매여 있는 것처럼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을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셔서 병을 고쳐주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삼 일째, 즉 거듭남의 세 번째 단계는 비로소 완전하게 거듭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거듭나는 것처럼, 주님도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신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악과 거짓을 단계적으로 극복하셔야 했고, 사흘째 되는 날 지옥을 완전히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주님께서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신앙인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진리를 붙잡고 있는 한, 언젠가는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도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귀신에게 사로잡혀 꼼짝 못 하게 되고, 병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명예나 재물을 얻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기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총명을 앞세워 진리를 마음대로 왜곡, 파괴하는 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는 그들을 바벨론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안의 바벨론에 의해 진리가 변질, 파괴되는 모습을 말씀에는 유대교회가 선지자를 죽이고, 주님을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선지자는 진리를 뜻하고, 가장 높은 의미로는 주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하신 것은 교회 밖의 이방인들은 진리를 파괴할 수 없고, 오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진리를 파괴하고 죽인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욕심 때문에 거룩한 진리를 파괴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는 암탉이 새끼를 품듯 교회의 진리로 믿는 자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담교회(태고교회)를 통해 지켜주셨고요, 아담교회가 무너졌을 때는 노아교회(고대교회)를 통해 지켜주셨습니다. 노아교회가 무너졌을 때는 히브리교회와 유대교회(모세교회, 표상교회)를 통해 인류를 지옥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때마다 주님의 보호를 내팽개쳤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진리를 더럽히고 파괴했습니다. 그것이 선지자를 죽이고 돌로 치는 것입니다. 돌은 본래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생각으로 조작, 손을 댄 거짓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35절에서,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집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기도 하고 교회를 뜻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작은 교회가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황폐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집이 황폐하다는 것은 교회, 또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스스로 진리를 파괴해 버렸으며, 또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가 겉으로 드러나신 모습이며, 그러므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서 ‘이름’은 그 사람, 또는 사물의 퀄리티(quality), 그 사람, 또는 사물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말합니다.

 

그러면 찬송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는 진정한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속으로는 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진정한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인이란 진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로 오셔서 구원을 위해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작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고, 크게는 그들이 모인 외부의 교회에도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회들은 말씀의 진리를 끊임없이 파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을 죽이려는 헤롯과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는 바리새인은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 진리이며, 동시에 지옥의 거짓 영들입니다. 지옥의 영들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회 안의 믿는 자들을 이용해 오랫동안 그렇게 말씀의 진리를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유대인들이 선지자를 죽이고 돌로 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온갖 술수를 꾸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과 그들을 사주하는 지옥의 거짓 영들을 향해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하십니다. 선지자, 즉 진리를 죽인 자들은 진리를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의 믿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바벨론, 즉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경계하라 하십니다. 그것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 앞에서 낮아지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오늘과 내일의 일을 하시고, 삼 일째 되는 날 그들과 함께 완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얼마나 시험이 많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진리가 완전해지는 만큼 시련이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도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시며 절망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험이라는 것을 믿으시고, 시험을 꼭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견뎌내시는 모든 성도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오늘로 누가복음 13장을 마치고, 11월 첫 주인 다음 주부터는 14장을 들어갑니다.

 

 

16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17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 (사14:16-17)

 

아멘

 

원본

2021-01-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2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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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22(D1)-주일예배(2509, 눅13,22-30),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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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2(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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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yUEsvBj7hE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

 

 

22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13:22-30)

 

 

종교를 가진 세상 모든 민족은 십계명과 비슷한 내용의 계율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종교 때문에 그 계율대로 사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 종교 때문에 계율대로 산 사람은 사후에 천사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을 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인정한다. (삶의 교리 65)

 

 

※ 오늘 설교 원본에서는 새 교회, 곧 스베덴보리를 통하신 주님의 계시를 따르는 사람들의 교회인 새 교회가 한국 땅에 세워진 역사를 돌아보고 계시는데요, 필요할 것 같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 아, 참고로, 스베덴보리를 통하신 주님의 계시를 따르는 교회를 새 교회라 하는 이유는, 다시 오실, 정확히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주님의 새로운 교회를 새 교회(The New Church), 새 예루살렘 교회라 하기 때문이며, 이 교회는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기독교회를 거쳐 인류 다섯 번째 마지막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전남 광주 빛고을 새 교회 분들의 얘기에 따르면, 정인보 목사님이 처음 새 교회 진리로 예배를 드린 것은 1958년 광주 YMCA 강당에서부터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난 1960년에 지금의 학동에 교회를 세우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빛고을 새 교회입니다. 그러면 서울 새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정인보 목사님에게서 새 교회 신학을 배우신 양규대 목사님이 1986년 1월, 자택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서울 새 교회의 시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9년 1월 12일, 서울 녹번동에 서울 새 교회 건물을 짓고 헌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생각해보면 헌당 예배를 드린 2019년은 광주에서 처음 새 교회가 시작된 해로부터 61년째 되는 해이고요, 양규대 목사님이 서울 새 교회를 개척한 해로부터는 33년째 되는 해입니다,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뭔가 특별해 보입니다. 새 교회에서 6이라는 수는 내적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든 사람이든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한데요, 사람마다 타고난 자아가 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 새 교회의 지난 60년은 교회의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긴 싸움의 기간이었다 생각됩니다.

 

※ 위 양규대 목사님은 지난 2015년 서울 새 교회 담임을 사임, 2016년 12월, 그동안 청주 새 교회 담임으로 섬기시던 이순철 목사님을 청빙,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펼쳐질 날들은 어떤 시간일까요? 단언하건대 사랑 없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 체어리티(charity, 仁愛)의 신앙으로 바뀌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는 그냥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다가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점 진리에 대한 사랑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사용하기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검이 되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검이 되기도 하지요. 만약 우리의 진리가 지식적인 진리, 사랑 없는 진리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진리가 될 것이지만, 그러나 진리 안에 사랑이 생기면, 그 진리는 우리 자신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그런 진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자, 또는 신앙은 있는데 체어리티의 삶은 없는 자의 사후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2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말씀에서 성이나 예루살렘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각 성과 마을, 예루살렘으로 다니시며 가르치셨다는 것은 주님은 각 사람이 이해하는 교리, 또는 말씀의 속뜻을 통해 진리를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속뜻이나 교리를 모르면 말씀 안에 숨어있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에게 스베덴보리 신학 서적 한 권을 드리면서 읽어보시기를 권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분은 대강 훑어보고는 다 아는 내용이라며, 읽어볼 생각이 없어 보이시더군요. 그러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게 중요하지, 진리, 진리 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를 모르면 이웃을 올바로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진리가 없는 사랑은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진리가 내재된 사랑입니다. 그것은 마치 꽃향기가 문득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은은한 사랑입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렬한 향기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 지혜롭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는 말씀의 속뜻인 교리를 통해서만 터득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주님께서는 각 성과 예루살렘을 다니시며 진리를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주님이 여행을 하시는 동안, 어떤 사람이 주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영어 성경의 번역은 “주여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입니다.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와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는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가끔 자기 자신이나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느끼는 것이, 사람은 참으로 바뀌기가 어렵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세상 사람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바로 그런 순간이 “주여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라고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런 생각을 들으시고, 2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 걸까요? 아시는 것처럼, 우리 각 사람에게는 적어도 둘 이상의 천사와 지옥의 영들이 함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시는 것은 그중 지옥의 영은 멀리하고, 천사들의 인도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사들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 능력으로 매일 같이 순간순간 거듭남의 여정을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할 때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던 우리의 성품이나 말투, 의지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진리와 선, 곧 주님이 천사들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려면 자아의 욕망을 밀어내야 하는데, 그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아의 욕망은 마음에서 가깝고, 천사들의 진리와 선은 너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의 손을 잡는 것, 곧 천사들의 인도를 따르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이 내미는 손을 잡는 것은 그냥 내 평소 욕심대로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 길은 쉽고도 넓은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나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신과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했으나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깊이 잠든 제자들에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동안 새 교회를 거쳐 갔던 수많은 교우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와 이 교회를 가득 메우기를 바랍니다. 25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누구나 마음속에 있는 천국의 문, 또는 지옥의 문을 자유롭게 열거나 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살 때 굳게 닫힌 문은 사후 영계에 가면 다시는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집주인이 문을 닫은 후,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이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살 때 그들이 스스로 천국의 문을 닫아 버린, 그것도 영원히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닫힌 문은 사후에는 영원히 열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열린 문은 사후에도 영원히 열려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문을 두드리던 자들이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합니다.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말씀에서 “주 앞에서”라고 할 때 “”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 먹고 마신다 했는데, 먹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가르치는 것이고요, 마시는 건 진리를 가르치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건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이웃에게 선과 진리를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또 주가 길거리에서 우리를 가르치셨다 했는데, 이 말은 그들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웠다는 뜻입니다. 길거리(street)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사후 영계에서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 살 때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행악하는 자라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살 때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다 하고, 실제로는 주님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부끼리 말로는 서로 사랑한다 하면서 남편은 아내의 말을, 아내는 남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이일까요? 주님과 우리하고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믿는다 하고, 실제로는 주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그래서 주님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국에 데려다 놔도 그곳에서 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도박꾼, 마약을 하는 사람, 난봉꾼, 사기꾼, 강도 이런 사람들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순진한 사람들과 천국에서 함께 살라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구별해 놓으신 것은 지옥에 속한 사람들을 벌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 살 때의 애정대로 영원히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기꺼이 진리를 배우고 이웃에게 가르치는 것을 즐긴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누굴까요? 그들은 세상에 살 때, 인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사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하십니다. 반면, 믿음만의 구원을 주장하면서, 그러나 체어리티를 실천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천국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했습니다. 슬피 우는 것은 그들의 악을 뜻하고요, 이를 간다는 것은 그들의 거짓을 뜻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며 서로 다툴 때, 천국 밖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이를 가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몸의 가장 바깥에 있습니다. 잇몸보다도 밖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영적으로 볼 때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를 간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세상 논리로 진리를 비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믿었고, 그러므로 마땅히 천국에 들어간다 믿었던 사람들이 사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때, 그들은 그렇게 울며 이를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악과 거짓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입니다.

 

주님께서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동쪽과 서쪽, 남쪽, 북쪽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은 각각 빛의 상태, 즉 진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이 가장 밝기로는 동쪽과 남쪽이겠지요. 그에 비해 서쪽은 희미한 빛이 있는 곳이고요, 북쪽은 빛이 아주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동쪽과 남쪽, 서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나타내고, 북쪽에서 오는 사람은 교회의 진리에 대해 무지한 교회 밖의 이방인들이지만, 그러나 마음속에 체어리티가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있다 하셨을까요?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은 무슨 경주를 하듯 등수가 매겨지는 일이기 때문일까요? 그런 게 아니고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는 비록 교회 밖 이방인이었어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후, 천사들로부터 천국의 교리를 배울 때, 무슨 거부감 없이 바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들의 마음속에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인 체어리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자는 누굴까요? 이들은 교회 안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다만 믿기만 하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는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고, 속으로는 전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그래서 결국은 위선의 삶을 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체어리티가 없는,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사후에 천국 문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했습니다. 말씀의 다른 곳에서는 그들을 등의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 하고, 실제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삶, 즉 체어리티의 삶이란 그렇게나 힘든 일일까요? “천국과 지옥” 528번 글은, 천국으로 가는 삶은 생각만큼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도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때문인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세상 재물이나 지위에 목표를 두고, 천국을 지향하는 사람은 주님과 이웃 사랑에 목표를 둘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표만 조금 바꾸면 주님이 원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내면에서 천국문은 열리고, 지옥문은 닫힙니다. 천국으로 가는 여행은 그렇게 시작이 됩니다.

 

일단 거듭나는 길에 들어서면 그동안의 잘못된 행동 양식들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빠르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아주 천천히 바뀝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조바심을 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나는 바뀌지가 않지?, 왜 이렇게 나는 실수를 많이 하고 지혜롭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비록 느리더라도 지금 현재 천국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구원은 등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느리게 가더라도 천국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상태에서 주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지지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 저 역시 여전히 잘 안 고쳐지는, 매일 밤 결심하지만, 다음 날이면 또 되풀이하고 마는 악습들이 있습니다. 가령 유튜브를 비롯, 너무 세상 뉴스에 귀를 쫑긋 세우는 바람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특히나 더 이런 거에 제 마음이 힘든 이유는, 저는 좀 어서 영감이 계발되어 영안이 열렸으면 좋겠는데, 제가 계속 이 세상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영적, 천적인 것에 관해서는 희미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저는 하루 5 미리 움직인 거에도 감사합니다. 비록 달팽이처럼 정말 느리고 답답하게 하루 5 미리를 움직이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날마다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며, 천사들을 통해 저를 거들어 주시며, 격려하시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을 향할 때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느껴질 때는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을 바라보는 삶은 세상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묵상과 기도에 힘쓰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과 담쌓고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일과 의무를 다하고, 그렇게 해서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저희 사모와 우리 두 아들이 오히려 더 큰 상 받을 줄 믿습니다. 세 사람의 삶 가운데는 실천과 기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국을 지향하는 삶이며, 쓰임 받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때, 주님께서는 수시로 세상의 기쁨을 허용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는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통해 천국을 지향하는 삶의 에너지를 얻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지향하는 삶은 세상을 버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직면하는 삶이며, 그것을 통해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는데 기여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은 생각보다 그렇게 힘든 삶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자신의 모습이 5년 전 또는 10년 전의 모습에 비해 긍정적으로 변했다면 먼저 주님께 감사하고, 스스로를 격려, 칭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남은 한 해에 더욱 힘을 내어 분발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7:13-14)

 

아멘

 

원본

2021-01-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2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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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15(D1)-주일예배(2508, 눅13,18-21),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pdf
0.36MB
2023-10-15(D1)-주일예배.축도.pdf
0.22MB

https://youtu.be/rHHowQJxzbs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18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눅13:18-21)

 

 

악과 결합한 거짓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사회 안으로 흘러들어오면 그때 곡식 가루와 포도즙 안에서 발효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작용이 일어난다. 이 발효로 인해 서로 맞지 않는 것은 분리되고, 맞는 것은 합쳐진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사회가) 정화되고 맑아진다. (하나님의 섭리 25)

 

 

오늘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하는 내용인데요, 본문을 살피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대한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김은경 역, ‘천국과 지옥’ 44장 ‘중간영계란 무엇인가?’(What the World of Spirits Is)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422.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은 바로 그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하나된 상태다. 또 사람 안의 지옥은 그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이 하나된 상태다. 영인(靈人) 안에서 선이 진리와 하나되면 그는 천국에 이른다. 이미 말했듯이 그 하나됨이 사람 안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람 안에서 악이 거짓과 하나되면 그는 지옥에 이른다. 그 하나됨이 사람 안의 지옥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됨의 과정은 중간영계에서 일어난다. 사람은 그때 중간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 천국이든 지옥이든 사람이 100% 선하거나 악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100% 선한 상태여야만 갈 수 있는 나라, 지옥은 100% 악한 상태여야만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100% 상태를 윗글에서는 ‘하나됨’이라고 표현했네요.

 

※ 그래서 모든 사람은 사후 일단은 이 중간영계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곧 중간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아직 천국도, 그리고 지옥도 아닌 상태이기 때문이며, 모든 사람은 아주아주 희귀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선과 악이 조금씩은 섞인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이 중간영계를 합쳐 ‘영계’(靈界)라 하는데. 이 영계는 지상 자연계처럼 무슨 시공간(視空間)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상태변화의 나라입니다.

 

※ 사람의 일생은 사실은 천국을 가기 위한 준비기간이며, 그것을 다른 말로 ‘거듭남을 위한 과정’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일생은 이 거듭남을 위한 과정을 통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 윗글에서 계속 ‘선과 진리, 선과 진리’ 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이 ‘선과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천국이 이 ‘선과 진리’, 곧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주님의 사랑이라는 해로부터 선이라는 열과 진리라는 빛이 뿜어져 나와 온 천국에 충만한 그런 나라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이란 모든 악과 거짓에서 물러나 이 선과 진리로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 진리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다만 세상, 세속 진리와 주님의 진리가 다른 점은, 주님의 진리에는 주님의 선을 행할 능력이 있지만, 세상 진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속적 진리에 정통한 사람들이 주님을 위한 선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으며, 이들은 각각 ‘(good)과 ‘진리(truth)로 연결됩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은 선한 의지로 올바른 생각을 하지만, 지옥에 속한 사람은 악한 의지로 그릇된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의지는 ‘행위’로, 사람의 이해, 생각은 ‘’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그의 하는 행위와 하는 말을 보면, 그가 천국과 지옥 중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18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면,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으며, 각 사람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요, 땅에 있는 것은 교회이며,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신앙과 사랑은 사람마다 다르고, 교회마다 다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교리인데, 교회마다 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고, 사람들은 자기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들은 각자의 신앙과 사랑의 특성에 따라 천국의 수많은 사회 중 하나와 결합하고, 그것을 통해 주님과 결합합니다. 신앙과 사랑으로 주님과 결합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진정한 교회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 천국은 무슨 평평한 곳에 다함께 모여 있는 데가 아닙니다. 오히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 크고 작은 사회로 되어 있는데요, 이는 주님의 선의 종류가 이렇게 많기 때문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사후 각자 자신의 선과 맞는 곳으로 배정됩니다. 사실은 본인은 못 느끼지만, 생전에도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선의 종류와 맞는 천국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무지하고 지혜가 없다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 내면의 교회가 아직 주님과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진정한 주님의 나라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교회들을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실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1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9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통해 겨자씨를 구경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겨자씨를 실제로 보면 아시겠지만, 겨자씨는 들깨만큼이나 작은 씨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을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은, 그것이 작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거창한 일을 해야만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작은 선을 행하더라도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길에다 담배꽁초나 일회용 컵을 버리지 않는다든가, 일을 할 때 두 번 손이 가지 않도록 꼼꼼하게 한다든가, 이웃을 보면 밝게 웃으며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모여 천국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작은 진리들을 하나씩 실천할 때 그의 진리는 큰 나무가 되어 씨를 많이 품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자신의 밭에도 떨어지고 이웃의 밭에도 떨어져 끝없이 씨를 퍼뜨립니다. 진리는 이렇게 겨자씨처럼 작은 것이지만 무한히 천국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문제는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면으로부터 자아의 저항과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진리라 하더라도 이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자아와의 싸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겨자씨 한 알의 진리가 큰 나무로 자라고 그곳에 새가 둥지를 틀고 날아다닙니다. 씨가 나무로 자라는 것은 작은 진리로부터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새가 둥지를 틀고 날아다닌다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이 주신 지성을 뜻합니다. 새는 진리를 바탕으로 한 수많은 생각과 추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내면의 교회에서 천국의 새들이 날아다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 지금 내가 있는 곳, 이 직장, 이 현장이 오늘 본문의 ‘채소밭’일 수 있으며, 나의 생각 하나, 나의 일처리 하나, 나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하나하나가 다 ‘겨자씨 한 알’일 수 있습니다. 나는 비록 무슨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단지 주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하지만, 주님은 그걸 씨앗 삼아 나중에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21절에서는 천국을 다르게 비유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1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여기서 여자는 교회를 뜻하고, 가루는 진리인데 선이 들어있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면 누룩은 뭘까요? 누룩은 악과 결합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거짓이 아니라 진짜 거짓, 즉 악의적인 거짓이 누룩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가루 속에 누룩을 넣는 것은 주님께서 영적인 발효를 통해 교회를 정화시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적인 시험을 통한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른바 영적인 발효를 통한 방법입니다. 영적인 발효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 25항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과 결합한 거짓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사회 안으로 흘러들어오면 그때 곡식 가루와 포도즙 안에서 발효 작용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발효로 인해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은 분리되고, 맞는 것은 합쳐진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사회가 정화되고 맑아진다.” 사람 안에 수많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들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그렇게 선과 악, 진리와 거짓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으면 사람도 사회도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순수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바탕이 순수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들을 이용해 선과 진리를 도발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마치 누룩이 포도즙을 발효시킬 때 원액은 원액대로, 찌꺼기는 찌꺼기대로 모여 서로 분리되는 것처럼 선과 진리가 모이고, 악과 거짓이 따로 모여 두 진영 사이에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될 때 개인이나 사회, 또는 교회가 내적으로 정화되고 맑아집니다. 그것이 영적인 발효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발효가 내면에서 일어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영적인 발효와 시험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가 이념 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사태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다음 차례는 우리 한반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의 두 나라처럼 우리도 지금 좌우가 갈려 극심한 대립 가운데 있으며, 특히 북한 때문입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악과 거짓의 유혹과 맞서 싸워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발효를 통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선을 순수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의 교회가 새들이 둥지를 틀고 날아다니는 큰 나무와 같은 교회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거듭날 때 비로소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의 사람들의 무지에서 벗어날 때 그들을 통해 새 교회의 진리가 세상 밖으로 끝없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밖의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찾아 몰려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23)

 

아멘

 

 

원본

2020-12-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08(D1)-주일예배(2507, 눅13,10-17),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pdf
0.32MB
2023-10-08(D1)-주일예배.축도.pdf
0.23MB

 

https://youtu.be/zOmvD61wZjY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10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눅13:10-17)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주님에 대한 표상들이 사라졌을 때, 안식일은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날이 되었고, 또한 노동에서 벗어나 휴식하는 날이 되었으며, 구원과 영원한 삶에 대해 묵상하는 날이 되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날이 되었다. (참된 기독교 301)

 

 

말씀에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회당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렸으며, 교리의 해석을 둘러싼 이견들을 조율했습니다. 때로는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그곳에서 벌하기도 했지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희생과 번제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의 침략으로 수많은 유대인이 바빌론 등지로 유배되면서 더 이상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지역마다 회당을 짓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교회의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은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지요.

 

회당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은 대부분 회당장이라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수행했는데, 가끔은 외부에서 랍비들을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주님은 이렇다 할 학벌이나 지위가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을 뿐 아니라,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그곳에 귀신 들려 앓으며 장애를 가진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11절에는 그 여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1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뜻하기도 하고 자아를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봐야 합니다. 교회를 뜻한다 하는 것은, 그녀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이고, 자아를 뜻한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아직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주님과 인간의 자아를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여자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자아를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귀신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한 싸움이었고, 그러므로 거룩한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열여덟 해 동안 싸운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열여덟은 3과 6을 곱한 수로, 3은 거룩한 것을 뜻하고 6은 내적 싸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싸웠음에도 여자는 아직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리를 펴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여전히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아무리 주님을 바라보려 해도 지옥에 붙잡혀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 앓고 있는 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여자를 보시고, 그에게 다가가셔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는 주님이 병을 고치시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2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주님이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는 것은 주님 혼자 병을 치유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능력이 나와 여자에게 전해지고, 여자가 겸손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이끄시고 인간이 겸손하게 따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때 여자의 허리가 즉시 펴졌습니다. 허리를 펴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만 바라보던 사람이 이제 주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26장 13절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그의 멍에와 빗장을 부수고 바로 서서 걷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자 여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병의 치유가 주님으로부터 이루어졌음을 고백하고 모든 공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악을 끊거나, 또는 선을 행할 때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선하고 지혜롭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영적 질병들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습니다. 곧 또 다른 시험이 오고, 싸움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아주 작은 악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보고 회당장이 분개했습니다. 14절에서는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는데요,

 

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이 주님께 화를 낸 까닭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그들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진짜 이유가 뭘까요? 회당장은 유대교회의 거짓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이고,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거짓, 참과 거짓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고, 대신 반목하거나 대립합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주님을 미워하고 주님에게 분노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회의 거짓된 교리가 진리를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회당장이 분노하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5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유대교회의 회당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말씀을 왜곡, 거짓 교리를 만들어 교인들에게 지키게 했는데요, 그것은 진리를 방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진리의 편인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반대하는, 불편해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너희는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소와 나귀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물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 물을 먹이는 것은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선과 진리에 목말라하는 자들을 풀어내 마음껏 선과 진리를 마시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 귀신 들린 여자가 귀신에서 놓여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자아 사랑에 가로막혀 주님을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이 오랜 싸움 끝에 주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이 안식일에 이루어지는 것은 안식일은 영적 싸움이 끝나는 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소와 나귀를 안식일에 풀어 물을 먹이듯 귀신에 매인 여자를 안식일에 풀어 주는 것이 어째서 합당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17절에는 주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17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왜곡해 진리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그럴듯한 말로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고, 그것으로 교인들을 현혹, 진리를 대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적 진리로 오실 때, 인간이 만든 모든 거짓은 참 진리이신 주님의 빛 아래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열여덟 해 귀신 들린 여자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진리 가운데 들어온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지만, 주님을 과연 얼마나 사랑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때가 많습니다. 잘못된 습관을 끊지 못해 계속 끌려다닙니다. 주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 때문에 늘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작은 불행이나 손실에는 크게 낙심하면서 이웃의 불행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은 자아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옥의 영들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의 영들과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마치 열여덟 해 귀신 들린 여자처럼 그렇게 싸웠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주님이 어느 날 문득 여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는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안식일이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자아 사랑을 부추기는 지옥의 영들과 열여덟 해 동안이나 싸웠습니다. 주님이 안수하실 때 겸손하게 주님께 몸을 맡겼습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그는 지옥의 영들이 놓은 덫에서 벗어나 안식일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주님이 손을 내미실 때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을 통해 교리를 가르치실 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들,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레26:13)

 

아멘

 

원본

2020-11-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01(D1)-주일예배(2506, 눅13,6-9),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열지 못하면'.pdf
0.36MB
성찬.pdf
0.13MB
2023-10-01(D1)-주일예배.축도.pdf
0.22MB

https://youtu.be/1V5lp3sR7E4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열지 못하면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13:6-9)

 

 

나무에 속한 모든 것은 진리를 뜻하지만, 열매는 다양한 선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선의 상태로 들어가지 못하고 진리의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없는 나무와 같다. 마태복음 7장 19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라고 말한다. (참된 기독교 106)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세상의 재앙이나 환난은 어떤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면 그 여파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만큼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지만, 반대로 악을 행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하고, 질병과 환난과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8절 이하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 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21:18-20)

 

말씀에는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요, 첫째, 주님께서 과연 그 정도로 허기를 느끼시거나 예민하셨을까 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주님이 허기를 채우려 하셨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으셨을 텐데 왜 하필이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로 가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신 데 왜 무화과나무를 그토록 저주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세상에서 보여 주신 모든 기적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 곧 속뜻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시장하시다 했지만, 그것은 주님의 생리적인 욕구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주님도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의 문제로는 그렇게 힘들어하시지 않으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믿음을 따라 선을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바로 그 마음이 주님이 느끼시는 배고픔이며 허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바로 다가가 열매가 열렸는지를 살펴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무의 열매는 신앙인들이 행하는 선한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기까지 했을까요?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자연적인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세 가지 단계의 천국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선에도 세 가지 단계의 선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인데,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진리를 믿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해서나 교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 비해 영적인 선(spiritual good)은 진리와 선을 사랑하되 자신보다는 이웃을 위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선은 무엇일까요? 바로 천적 선(celestial good)입니다. 천적인 선은 주님을 위해 또는 선 그 자체를 위해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이렇게 자연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천적인 차원으로 신앙이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나 사람을 보실 때 그에게 어떤 선이 있는가를 먼저 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살펴보신 무화과나무에는 안타깝게도 열매가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적인 선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적 선도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주님 당시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직 세상의 재물과 지위만을 탐했습니다. 말씀을 대할 때도 문자적인 의미에만 매달릴 뿐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와 관련해 마태복음 13장 15절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4-15)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의 경우는 말씀의 내적인 것을 모르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타고난 특성상 그들은 진리를 알면 오히려 그것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대교회 사람들의 영적 성향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겉으로만 신성할 뿐 내적으로는 전혀 신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의 열매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유대인들 스스로 영적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와서 보니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교회를 뜻합니다. 포도원이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영적 선이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하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에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포도원의 주인이신 주님이 당신의 뜰에 무화과나무를 심으신 것은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자연적 선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주님을 믿고 사랑하겠습니까? 누구나 처음에는 나만 구원을 받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길을 갑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일을 할 때도 공정하게 하는 것이 모두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주인이 삼 년을 기다려도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배우기만 할 뿐 전혀 실천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여기서 포도원 주인이나 포도원지기는 모두 주님을 나타내는데, 정확히 말하면 주님의 두 가지 본질을 나타냅니다. 즉 포도원 주인은 말씀 또는 진리로서의 주님이시고, 포도원지기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 하는 것은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주님이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주인은 또 삼 년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삼 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또는 완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얼마나 우리를 위해 기다리실 수 있을까요? 주님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때리고, 침을 뱉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파멸하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포도원 주인이 기다린 삼 년이요,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주님의 그런 마음을 본문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두루 파고 거름을 준다는 것은 주님께서 진리로 가르치고 설득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설득하실까요? 먼저 나무 주변을 두루 파십니다. 두루 판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쓸 만한 진리와 선이 있는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주입하시지 않고,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선을 통해 대화하듯 천천히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 거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거름은 인분과 같이 더러운 것인데 그것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628번 글의 2항을 보면 천국의 천사들은 지옥에서 오는 악한 기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그 냄새는 인분이나 시체가 썩는 냄새같이 아주 역겹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역한 냄새를 지옥의 영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거짓이나 악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 진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동안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악과 거짓들의 역한 냄새를 느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거름을 주신다는 것은 주께서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이전의 악과 거짓의 음습한 기운과 역겨운 냄새를 느끼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몸에 밴 악습과 거짓된 신념들을 혐오하게 되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가르쳐 열매 맺게 하는 방법입니다.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찍어내신다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봤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참된기독교’ 106번 글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신앙은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수동적인 신앙에서 능동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출애굽기 21장에서는 히브리 사람들의 종은 여섯 해까지만 주인을 섬기고 일곱 해가 되면 자유인이 되어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신앙인들은 진리를 위한 싸움을 이겨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수동적인 신앙에서 능동적인 신앙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여섯 해는 거듭남을 위한 싸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동적인 신앙과 능동적인 신앙은 어떻게 다를까요? 수동적인 신앙은 진리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신앙입니다. 그에 비해 능동적인 신앙은 진리를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신앙이며, 그러므로 특별한 노력 없이도 자발적으로 진리에 따라 사는 그런 신앙입니다.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웃과 뜻을 맞추고, 그들의 행동을 참아 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때 진리의 명령이니까 용서하고 참는다면 그것은 수동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능동적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잡고 매 순간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8:34-36)

 

아멘

 

 

원본

2020-10-2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24(D1)-주일예배(2505, 눅13,1-5),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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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HM4XUWZFes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1-5)

 

 

주님으로 말미암은, 사람 안에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주고받는 능력이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능력이며, 그러므로 상호 작용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은 회개를 해야 하고, 회개할 때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야 한다 하신다. (삶에 관한 교리 103)

 

 

사람에 대한 편견이 누구보다도 많았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장애인들을 비하했고, 문둥병자나 세리, 이방인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졌던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병자나 장애인, 이방인들은 영적으로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을 혐오하고 차별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요한복음 9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거기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9:1-7)

 

주님의 제자들조차 장애가 있는 사람은 유전 죄가 많거나 스스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맹인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주님을 모르면 누구나 다 맹인이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를 통해서만 맹인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직접 진흙에다 당신의 침을 섞어 맹인의 눈에 발라주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비슷한 내용의 말씀인데요, 본문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이 본문은 여러 다양한 번역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빌라도가 학살, 그들의 피가 희생제물에 흘러들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그 번역들의 예입니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공동번역)

 

바로 그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새번역)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이야기를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

 

말씀에서 갈릴리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이방인을 뜻하며,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이 흘리는 피는 이방인의 선을 뜻합니다. 피는 선이나 인애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선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거나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빌라도의 제물은 무엇입니까? 고대인들은 예배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불에 태워 드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물은 예배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이방인인 빌라도의 제물이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예배를 뜻합니다. 따라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자기의 제물에 섞었다는 것은 이방인들 중에 힘 있는 자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힘없는 사람들의 선의와 진실을 짓밟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 지난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조작과 거짓, 선동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가령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라든지 자유를 찾아 귀순한 두 청년을 판문점에서 강제 북송한 사건이라든지 말이지요. 그런데도 당시 힘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의 진실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만 했는데요,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예배하지 않고 거짓을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은 자의 진실을 짓밟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희생제물에 섞은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얘기를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우리는 자신에게 닥쳐서는 안 되는 어떤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 닥칠 때, 그들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너희보다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근거 없는 우월감이며 교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이웃들에게 그런 불행이나 시련이 닥치는 이유가 뭘까요? 개인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세상에서의 삶은 사후에 영원히 지속되는 삶에 비하면 찰나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개인에게 닥친 불행을 영원한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에게 닥치든, 이웃에게 닥치든 시련이 있을 때는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살펴보고, 고칠 점이 있으며 고쳐야 합니다. 나와 이웃이 남이 아니라 하나로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같이 망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참된 기독교 528번 글은 회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실제적인 회개는 자신을 검토하여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주님께 기도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의도와 행위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발견되면 그것을 주님 앞에 인정하고, 그러고 나서 주님을 의지해 악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앞에서 빌라도에게 희생된 갈릴리 사람들의 얘기가 이방인들의 불행에 대한 것이라면, 지금 이 말씀은 신앙인들의 불행에 대한 것입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에 있는 연못의 이름입니다. 주님 당시에는 그곳을 통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물이 공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실로암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뜻하는데요, 또 망대라고 하는 탑은 노아의 후손들이 쌓았던 바벨탑과 같은 의미로 자아에 대한 예배를 뜻합니다.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고 했는데, 열여덟은 영적 싸움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열여덟(18)이라는 수는 그 속뜻으로는 영적 싸움을 뜻하는 6의 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영적 싸움을 하는 신앙인들이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총명함을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단 교회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해 거짓 교리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고, 그 교리를 근거로 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교인들 위에 군림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실로암의 망대를 만들다 치어 죽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그러한 욕망들이 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들의 죄가 이들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단하고 무서운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거듭 말씀하신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을 이와 같이 두 번 반복해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첫 번째 회개는 진리 또는 이성에 관한 회개이고, 두 번째 회개는 선 또는 의지의 관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이성에 관한 회개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때,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지는 않는지, 그리고 진리에다 자신의 생각을 섞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검토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그의 진리는 거짓이 되기 때문이며, 그러면 선 또는 의지에 관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바르게 이해하는데 진리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의 삶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이웃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일처럼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그들 스스로 저지른 죄의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지난 수년을 겪었으며, 사실 아직도 꿈틀 중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실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어떤 형태로든 이웃에게 영향을 주고, 이웃의 행동이 또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웃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입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재앙과 환난을 짧게 끝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회개하고 거듭나는 주님의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눅3:8-9)

 

아멘

 

 

원본

2020-10-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17(D1)-주일예배(2504, 눅12,54-59),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며,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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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hWBCaaU_YM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며,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눅12:54-59)

 

 

하나님의 신성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흘러들어온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쪽이어야 하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능력이 사람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며, 사람이 악을 제거하는 만큼 그 능력은 비록 주님의 것이지만 사람의 것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for the Divine proceeding which is “the Father in the heavens,” flows in with the evil equally as with the good, but the reception of it must be on man’s part, yet not on man’s part as from man, but as if from man, for the ability to receive is given to man continually, and it also flows in to the extent that man removes the evils that oppose, and does this also from the ability that is continually given, the ability itself appearing to be man’s, although it is of the Lord. (AE.644:23)

 

 

※ 오늘로 누가복음 12장을 마칩니다. 지난 7월 30일 주일부터 시작, 오늘까지 8주에 걸쳐 다루었는데요, 늘 이렇게 원고를 프린트하여 나누어드렸으니 수시로 다시 여러 번 읽으시고 확실히 자기 걸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겉 육을 입고 사는 사람들은 이 속뜻 설교를 결코 한번 듣고 완전히 자기 걸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렇게 속, 곧 내적(內的, internal)으로 말씀 읽기를 연습하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천사들처럼 내적으로, 영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이 세상과 세상 모든 일, 곧 주변 일상을 비롯,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에서 한발 물러나 그 영적 의미들을 천국, 천사들 관점, 곧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렇게 되면서 우리 모두 세속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어, 이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을 향해 우리를 정결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세상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몸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서 천국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복음서에는 외식하는 자에 대한 에피소드가 자주 나옵니다. 외식(外飾)이라는 말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 영어 성경 표현은 위선(僞善)입니다.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겉으로는 진실한 듯하나 속으로는 속이는 것, 겉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증오하거나 멸시하는 것이지요. 복음서에 위선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왜곡, 말씀 속에 있는 내적이고 거룩한 것들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겉으로만 경건할 뿐, 속에는 악의와 교활한 속임수가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 비난하셨던 것입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몄지만 그 속은 죽은 자들의 해골과 뼈로 가득한 무덤처럼 말이지요. 교회의 교리가 잘못될 경우, 그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가 됩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공간 안에 있으면 누구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 여기 ‘감염(感染)이라고 했는데요, 출애굽, 즉 애굽을 나오다, 애굽에서 출발하다 하는 출애굽 모든 여정은 그 속뜻으로는, 악과 거짓에 감염된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 천국을 향해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자, 그렇다면 참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위선자가 아닐까요? 비록 참된 신앙 안에 있다 하더라도 거듭나기 전에는 위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누구나 조금씩은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위선을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고, 거기서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하면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각 사람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54절과 5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고 합니다. 이는 주님 활동하신 유대 땅의 지형적 특성 때문인데요, 그러나 그 속뜻으로도,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사랑이 없는 때, 즉 교회의 마지막 때를 나타내며, 또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가리키고, 소나기는 진리를, 그러므로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절에는 남풍이 불면 심히 더울 거라는 것 역시 그 지역 지형적 특성이지만, 역시 그 속뜻으로도, 남풍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을 뜻하며, 그러므로 남풍이 불면 덥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선으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합해 보면,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아의 욕망을 좇을 때 교회는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 신앙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석양에 해 기울듯 교회 안에는 사랑이 식어갑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타락한 교회를 정리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지요. 교회는 세상의 심장과 폐와 같아서 한순간도 없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소나기는 바로 그 진리이고, 남풍은 그 선을 뜻합니다.

 

서쪽에서 구름이 일면 소나기가 올 것을 아는 것처럼 진실한 신앙인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웁니다. 마치 노아 시대에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이 세상을 덮은 거짓의 홍수와 맞서 싸우듯 그렇게 싸웁니다. 진실한 신앙인들은 그런 방법으로 시험을 딛고 한 단계 한 단계 거듭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 내면의 교회에 오신 주님, 자신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해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 644번 글 20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면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눈이 어두운 자들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럴 경우,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한탄하신 것입니다.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생각할 때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외부의 교회든 내면에 있는 교회든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는 누구나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때는 영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영이 순수하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 진리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해 마지막 때가 되면 신앙인들은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타인의 판단을 믿습니다. 자신의 순수한 영으로 진리를 바라보지 않고 타락한 교회의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바라보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말씀에서 ‘베드로’는 교회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부터 진리를 생각하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스스로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 즉 잘못된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를 판단하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은 노예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위선자가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스스로의 판단으로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주님께서는 그 대답으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고, 영어 성경의 번역은 이렇습니다. ‘네가 원수와 함께 행정관에게 갈 때 길에서 근면하여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넘겨 옥에 갇히지 않도록 하라’입니다. 말씀에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신앙인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악과 거짓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가 있어야 악과 거짓을 물리칠 수 있는데 진리가 없으니 악과 거짓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삶이 아니라 죽은 자의 삶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길에서 근면하라, 즉 진리 안에서 근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근면한 것일까요? 진리가 명령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고 진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갚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앞에 큰 빚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깨닫고 고쳐나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빚을 갚는 일이며,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한 푼도 남김없이 갚으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교회가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악이 선을 넘게 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로 두면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 같으면 지체 없이 오셔서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교회 안의 남은 자를 데리고 새 교회를 여십니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오랜 섭리이며 방법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새 교회를 세우시는 이 섭리는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삶을 살 때 주님은 어느 정도는 허용하시지만, 도를 넘으면 직접 그의 내면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임재하실 때 진실한 사람들은 주님을 받아들여 주님과 함께 내면의 악과 거짓을 몰아내는 싸움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한 번 더 거듭납니다. 반대로 진리보다는 세상에 뜻을 둔 위선자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험에서 이길 수 없으며 결국 점점 더 깊이 악의 수렁 속으로 빠져듭니다. 주님은 위선자가 되기 쉬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첫째는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겉 사람의 자아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지 말고 속 사람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며, 그를 붙잡고 있는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진리 안에서 근면하라 하십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진리 안에서 근면한 것은 진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고 진리에 합당한 일은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게으름 부리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의 명령 앞에서 게으름을 부릴 때 어둠이 내려앉는 것처럼 악하고 거짓된 것이 삶 가운데 은밀하게 내려앉습니다. 신앙인들은 그렇게 해서 지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근면해야 합니다. 항상 속 사람으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3)

 

아멘

 

 

 

원본

2020-09-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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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10(D1)-주일예배(2503, 눅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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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o9EVXAqlLQ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12:49-53)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교회 안에 거짓과 악밖에 없어서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진리와 선이 밝혀지자 비로소 분쟁이 일어났다.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간의 분쟁이 없으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계시록 해설 504:31) for before the Lord came into the world there were in the church nothing but falsities and evils, consequently there was no combat between these and truths and goods; but when truths and goods had been unveiled by the Lord, then it was possible for combats to exist, and without combats between these there can be no reformation; (AE.504: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원주민들, 즉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그리고 여부스 족속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땅에서 모두 몰아내라 하셨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가나안 도착과 함께 주님 명하신 대로 처음 땅 분배를 받아 흩어진 후, 자기 땅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완전히는 몰아내지들을 못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그동안 너무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사람이 주님을 끝까지 의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는데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끊임없이 이 남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악과 타협할 때가 있는데요, 그렇게 악과 타협할 때는 일시적으로는 평화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전보다 더 큰 악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나서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어느 한쪽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둘 사이에는 싸움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내적 싸움을 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내적 싸움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의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이 악이며 거짓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내적 싸움이 없다는 게 오히려 참 씁쓸한 케이스가 되겠네요.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면서도 내적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해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죄를 반복해서 짓다 보면 나중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수치심이나 굴욕감,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뒤집기도 합니다. 내적 싸움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자유롭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평화도 아니고 자유도 아닙니다. 지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면 진정한 평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와 관련해 오늘 본문 4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께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하십니다. 불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이에 벌어지는 내적 싸움을 뜻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이든 사회든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사이에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그런 내적 싸움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진리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진리라는 게 있어야 거짓을 볼 수 있고, 그것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악과 거짓으로 가득했고, 그러므로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붙잡혀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그때 참된 진리이신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첫째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해 존재하셨던 여호와께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같은 논리로, 그동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적 진리가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누구나 내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아래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의 증언처럼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가 되었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내적 진리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3-14)

 

그러니까 주님의 인성이 문자로 된 성경이라면 내적 진리는 주님 안의 신성, 곧 문자 안에 담긴 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 세 번째 의미는, 인간에게 거듭남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세상에서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시는 과정은 사실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여 하나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치열한 내적 싸움 없이는 거듭남도 없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는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 하십니다. 말씀에서 세례는 거듭남을 의미하는데요, 그렇다면 주님이 받을 세례는 어떤 것입니까?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으신, 유전된 인성(human)을 벗으시고, 당신 안의 여호와께서 주시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과 승리로만 이루어지는데요, 그래서 인간이 거듭나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임과 동시에, 주님에 의해 인간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 속에서 주님 자신에게 일어나는 세례임과 동시에, 시간을 초월해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분쟁하는 것은 곧 내적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싸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52절과 5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오신 다음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운다고 합니다. 여기서 숫자 셋은 진리는 진리인데 선이 없는 진리를, 그리고 숫자 둘은 선은 선인데 진리가 없는 선을 말합니다. 선 없는 진리나 진리 없는 선은 둘 다 온전한 것이 아니며, 둘 다 진정한 진리와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진리는 이웃을 화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시키는데요, 교회 안에서, 아니면 개인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진리를 가장한 거짓, 또는 선을 가장한 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제게 성경이 우선이냐 성문서, 즉 스베덴보리가 쓴 글이 우선이냐 라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하기를,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인성에 해당하고, 성문서에서 밝히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과 통합니다.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듯 그 둘은 하나이며, 똑같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만약 교회 안에서 어떤 이는 성경이 우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성문서가 우선이라 한다면 그런 것이 바로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생각은 진리를 가장한 거짓입니다.

 

또 한 번은 새 교회에서는 진리 진리 하는데 진리보다는 사랑이 먼저가 아니냐고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먼저이지만 진리를 알아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으니 진리나 사랑이나 똑같이 소중합니다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말씀드려도 듣지 않는 분은 안 듣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교회 안에 이런 분쟁이 가끔 생기는데요, 이걸 잘 관리하지 못하면 자칫 교인들 간 분열이 일어나고 맙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분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버지는 자아의 악을 뜻하고 아들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분쟁하는 것은 자아의 악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머니는 자아의 욕망을 뜻하고 딸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딸이 싸우는 것은 자아의 욕망과 진리에 대한 애정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언제나 이런 내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자아가 원하는 것들은 대개 세상 물질과 쾌락, 명예 같은 것인데 하나님의 진리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싸움이 있어야 우리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시기 전 당시 세상은 암흑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자기 욕심껏 사는 것이 선이며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면서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또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가지 과정이 필요했는데요, 먼저, 문자로 된 신구약 성경이 인류에게 주어졌고, 그 다음에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말씀이신 주님이 오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1500년이 지난 후, 가톨릭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었던 성경이 평신도에게 돌아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일은 그로부터 250년 후에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250년이 흘러 극동의 한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에까지 이 말씀의 내적 의미가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류가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기독교’ 508번 글은 지금은 누구나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내적 의미로 인해 이제 완전하고 거룩한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하고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이 주신 이 진리를 가지고 각자 내면의 악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인성을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원본

2020-09-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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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03(D1)-주일예배(2502, 눅12,41-48),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자'.pdf
0.44MB

https://youtu.be/PLo_BzTYy-g

 

 

원년(2013년) 창립예배 때 특송 : https://youtu.be/pYYoLdKLOK8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자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12:41-48)

 

 

사람이 복수와 증오, 간통, 간음, 사기, 속임수, 신성모독, 거짓말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한다면 그는 보다 중한 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2장 47절에서 주님은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그 뜻에 따라 행하지 않는 종은 많은 매를 맞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Divine Providence 231:2) Thus if one acknowledges that revenge and hatred, adultery and fornication, fraud and deceit, blasphemy and lying are sins against God and yet commits them, he is therefore in the more grievous of this kind of profanation. For the Lord says: The servant who knows his lord’s will and does not do it, shall be beaten with many strokes (Luke 12:47).

 

 

※ 오늘은 우리 한결같은 교회가 지난 2013년 9월 1일 주일에 시작된 지 만 10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 개인적으로는 지난 10년 치 일지를 대략 뒤적이며, 어떤 일이 있었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오셨는지를 살폈는데요,

 

아주 짧게 요약하면... 처음 얼마 동안은 좀 여러 다양한 세미나, 집회 및 프로그램들 같은 외적인 걸 기웃거리다가 서서히 내적인, 즉 영적인 것들, 곧 헤븐 교회 정원 목사를 비롯, 서사라 목사의 천국 체험 쪽으로 방향이 잡히더니 충주봉쇄수도원(강문호 원장) 수도학교를 통해 수도사와 수도원 세계에 들어가 다양한 수도사, 성인들을 접하면서, 동시에 시흥영성수련원(박희진 원장)의 핵심진리(공용복 선생) 및 책으로는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 등을 통해 수도원 목회 쪽으로, 그리고 이윽고 지금의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일반목회를 내려놓고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여러 저작들 번역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요. 지난 십 년의 여정, 살짝 방황처럼 보이기도 했던 시간이 그러나 사실은 차근차근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하시려는 주님의 섭리였구나 싶고, 한 마디로, 기존 개신교, 기독교에서 벗어나 주님의 새로운 교회로 저를 초대하시는 과정들, 마치 한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해 그 긴 유충과 번데기, 그리고 그 껍질을 찢고 나오는 몸부림의 과정들이 있었구나 싶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저런 순서로 흐르지 않았다면 절대로 스베덴보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겉(external) 신앙에서 속(internal) 신앙으로 들어간 것이죠.

 

제가 스베덴보리 쪽으로 방향을 확정한 때가 2018년 12월인데요, 그래서 저는 오늘은 명목상의 십 주년이고, 제대로 된 십 주년은 2028년 12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끝으로, 그러나 이 환골탈태의 과정, 곧 천국을 향한, 주님을 향한 내면의 창문이 열리기까지 저와 가족, 그리고 교회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거절과 세상 관계의 단절, 그리고 외면을 맛보았으며, 특히 우리 가족이 겪어야 했던 교리적 혼란과 흩어짐 등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며, 그래서 더욱 주님이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저희 사모와 자녀들에게 하늘의 상인 내면을 확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네, 그럼 이 정도로 나누고요, 오늘 말씀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매 순간 자기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주석인 ‘Arcana Coelestia’ 5846번 글에서 5866번 글까지를 보면, 모든 사람에게는 보통 두 명의 천사 또는 지옥의 영들이 함께 있으며, 그러므로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그와 함께 있는 천사나 영들이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천사, 또는 지옥의 영들이 불어넣는 생각과 의도에 따른 것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그렇게 천사와 영들의 영향을 받는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사와 영들을 보내 인간을 이끄시는 것은 자유의지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지를 지켜주시기 위한 것인데요,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의 힘이 인간에게 동등하게 미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내면으로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이 흘러들어오고, 지옥의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이 흘러들어와야 천국과 지옥이 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때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고 자유롭게 천국 또는 지옥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상태에서 자신의 자아를 부정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을 멀리하고 자아의 욕구를 따르는 사람은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그가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는 그러한 상태를 잠이 든 사이에 도둑이 들어 벽을 뚫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도둑은 지옥의 영들을 뜻하고, 벽을 뚫는 것은 지옥의 영들이 진리의 울타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셨지요.

 

주님이 제자들에게 도둑이 들지 않도록 깨어있으라고 하시자 본문 41절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베드로는 어쩌면 스스로, 즉 혼자서 주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항상 깨어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주님과 세상을 양손에 쥐고 저울질할 때가 많았고, 아주 작은 일을 하고도 보상받으려 했습니다. 자신의 허물은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봤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설마 제게 하신 말씀은 아니시지요’라는 뜻으로 주님께 물었고,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베드로처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주님을 따른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참된 진리 안에 있다고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고 하십니다. 청지기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잣집에 고용되어 주인 대신 재산이나 종들을 관리하고 또한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로 보면 주님의 나라 청지기는 바로 우리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재산인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맡아 잘 관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들을 삶에 적용하여 자신이 거듭나는 것은 물론 이웃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될 수 있을까요? 42절부터 4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께서는 청지기의 가장 큰 일은 집안의 가족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집안의 가족들은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다양한 진리들을 뜻하고, 양식은 선을 뜻합니다. 따라서 청지기의 책무는 선을 가지고 진리들을 먹이는 일입니다. 선을 가지고 진리를 먹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진리를 가지고만 있지 말고 삶에 적용해 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진리와 선의 결합이 일어나고 그 진리는 살아있는 진리가 됩니다. 본문에는 또 양식을 나누어 주되 때를 따라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이 말은 진리를 삶에 적용할 때는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자선을 베풀면 안 됩니다. 때에 따라 우리가 베푸는 선이 상대에게 독이 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에 따라 침묵하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때를 따라 진리에 선을 먹이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선을 먹일 때 주님께서는 복이 있다 하시고,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고 하십니다. 진리를 삶으로 실천할 때,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진리를 보내주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나쁜 청지기도 있는데요, 그들의 운명에 대해 4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많은 신앙인이 자기가 오래도록 살 거라 생각하고 청지기의 책무를 소홀히 합니다. 내일 하면 되지 하며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남녀 종을 때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남자 종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들을, 여자 종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자 하는 애정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남자 종을 때리는 것은 진리를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생각에 맞으면 진리로 받아들이고,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는 진리를 마음대로 해석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모두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의 인체가 그렇듯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온전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의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진리에 대한 이런 잘못된 행동들이 진리에 폭행을 가하는 것이며, 남자 종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자 종을 때리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변질,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한다 하면서 진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이 변하는 것이고, 여자 종을 때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진리와 선이 변질이 될 때, 신앙인들의 생명이 변합니다. 생명이 변한다는 것은 결국 의지가 변한다는 뜻입니다. 선하고 진실한 상태에서 악하고 거짓된 상태로 의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신앙인의 생명이 악하게 변하는 것을 청지기가 먹고 마시고 취하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주인이 들이닥쳐 그를 엄히 때리고 벌을 내린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후에 영계에서 받을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청지기가 매를 맞는 것은 진리를 모독한 사람이 사후에 영계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의 지식을 모두 빼앗기는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악과 거짓만 가지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으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크게 묻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알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나중에 크게 벌을 받습니다. 진리를 아는 자의 책임이 그만큼 무겁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나는 과연 어떤 청지기인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됩니다. 게으른 청지기는 아닌지, 또는 악한 청지기는 아닌지 하는 두려움 마음이 생겼습니다. 누구나 주님께로 불려가는 날이 아직 한참 남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 보니 그렇게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의 베드로처럼 주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자부심만 있을 뿐 진실한 청지기의 삶을 외면한 적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새로운 교회에서는 청지기의 책무를 게을리하는 것, 진리를 알고도 진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Divine Providence’ 231번 글은 신성모독의 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는 진리를 받아들이고도 진리에 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중한 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 41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세상 유혹을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능력에 의지해 세상 유혹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신성모독은 진심으로 겸손하지 않은 자에게 해당되는 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악과 거짓을 정당화하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러므로 신성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말과 행동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 같이 하면서 내심으로는 전혀 진리를 믿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선자라 하시고 심판 날에 캄캄한 바깥에 쫓겨나 이를 갈 것이라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의 신성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믿고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도할 때도 그들은 주님께 기도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주님의 인성에 해당된다면 문자적 의미 안의 영적 의미는 주님의 신성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처음에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다가 나중에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는 가장 큰 모독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진리를 부인하는 이유는 대개 주님보다는 세상의 영화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3장 15절 이하에서는 신성을 모독하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미지근한 신앙이 바로 신성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평생을 병과 싸웠던 병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병자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 직접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병을 고친 다음 다시 죄를 짓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 앞에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평생을 짊어지고 온 각자의 고질병을 고쳐주시며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

 

아멘

 

 

원본

2020-08-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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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27(D1)-주일예배(2501, 눅12,35-40),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pdf
0.33MB

https://youtu.be/b6qJdAJUEes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12:35-40)

 

 

영적 생명이 없는 자연적 생명은 자체로 잠든 것이지만,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깨어있는 것이다.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사람이 각자의 빛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것에 따른 삶을 살 때 얻을 수 있다. Natural life, considered in itself, or without spiritual life, is nothing else but sleep; but natural life, in which there is spiritual life, is watchfulness; and this cannot be acquired otherwise than by truths, which are in their own light and in their own day, when man is in the life according to them. (AR.158)

 

 

마태복음 26장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험을 앞두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결국 완벽하게 이기실 것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깨어있자 하셨을까요? 십자가의 고통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십자가를 지기까지 유대인들로부터 받을 폭행과 모욕이 두려워서였을까요? 물론 그러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육신을 입으신 인간이기도 하셨으니까요. 주님도 보통의 인간들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 마지막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신 주님이 당신 안의 여호와를 향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고민이 육신의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의 시험은 주님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개개인의 시험에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싸우시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죽게 되었다고 하신 것은 주님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시험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이 올 때 인간은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수단으로 스스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를 위해 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싸워보려고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시험이 오더라도 담대히 맞서 싸울 수 있고 그때 주님이 그 싸움에 관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시험 가운데서 넘어질 때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가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신 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연민과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당부하신 주님께서 본문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허리는 무슨 뜻일까요? 고대의 사람들은 부부의 사랑이 허리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허리의 영적 의미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등불은 진리 또는 믿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라는 것은 주님을 믿고 또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믿고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라야 악을 밀어내고 선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하시는 것은 깨어있으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36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여기서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혼인집은 세상 혼인집이 아니라 영적인 혼인집인 천국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선과 진리 또는 믿음과 사랑의 결혼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것은 주님이 천국을 통해 각 사람에게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와 선의 유입(influx)을 뜻합니다. 주님은 선과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항상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정작 우리는 그 문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흘러들어오고 지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3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깨어있는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그래야 마음을 열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187:3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있어 주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진리에 속한 지혜와 지성의 빛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에 관한 한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 그러므로 전자는 깨어있는 것이고 후자는 잠자는 것이다.

 

주님은 깨어있는 사람에게 오시며, 그때 허리에 띠를 두르고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먹여주십니다. 말씀에서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는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3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말씀에서 숫자 3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이경에나 삼경에 오시는 것은, 주님은 개인의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시하시면서 깨어있을 때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종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 여기 이경, 삼경하는 ‘경’(更)은 일몰부터 일출을 저녁 7시부터 두 시간씩 다섯으로 나눠 부르는 것으로, 각각 초경, 이경, 삼경... 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경은 저녁 7시부터 밤 9시, 이경은 밤 9시부터 밤 11시, 삼경은 밤 11부터 새벽 1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해 항상 깨어있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졸기도 하고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하지요. 신앙인들이 잠잘 때 주님은 수시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깨어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는 동안 세 번 내려오셔서 제자들이 깨어있는지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깊이 잠든 것을 보시고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며 안타까워하셨지요.

 

주님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시는데 오래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신앙인들에게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지옥의 영들에 의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선한 것, 진실한 것들이 파괴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도둑이 들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도둑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우리는 잠만 잡니다. 그래서 본문 39절과 4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지옥의 도둑들이 언제 닥칠지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말씀에는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계속 문을 두드리시는데 사람들은 아무 준비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진과 겸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문을 열어도 여는 것이 아닙니다. 순진과 겸손의 정도가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될 때 주님과 인간 사이 접점이 생기고 교류가 일어납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렇고 오늘 말씀에서도 그렇고 제자들에게 늘 깨어있으라 하셨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고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한 편으로는 죄를 고백하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읽기보다 세상 소식과 재미에 빠져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먼저 보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순진과 겸손을 비롯, 모든 종류의 선의와 근면, 순결한 부부 사랑이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잠들어 있을 때는 자기를 높이는 마음과 미움과 나태와 온갖 종류의 정욕이 지옥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반성을 하는데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세상사에만 관심을 두고 자아의 욕심대로만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영적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처음 사랑과 이웃에 대한 순수한 정을 잃게 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도둑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우리의 그런 문제들에 대해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 겉 사람이 이런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눈이 피곤하다 하셨습니다. 눈은 영적인 지성, 또는 분별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피곤하다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는 옳은 일을 한다 하는데 그것이 남에게는 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깨어있음으로 해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아는 만큼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적 지성이 밝아지고,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3)

 

아멘

 

 

 

원본

2020-07-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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