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0(D1)-주일예배(2534, 눅17,11-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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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17:11-19)

 

주님께서 치유하신 모든 자연적 질병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 질병들을 의미한다. 영적 질병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all the diseases healed by the Lord represented and thus signified the spiritual diseases that correspond to these natural diseases; and spiritual diseases can be healed only by the Lord, and in fact by looking to His Divine omnipotence and by repentance of life. (AE.815.5)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그동안 살면서 은혜를 입은 많은 분들 생각이 났습니다. 가깝게는 부모님과 형제들, 처가, 그리고 고등학교 동기들, 서울침례교회 청년부 형제자매들, 지구촌교회를 비롯, 침신대 신대원 동기들, 늘사랑교회 성도들과 그 외 개척 시절 물심양면 많은 도움을 주신 평책사 목회자 부부들, 그리고 수도원이나 4014 금식 운동 등으로 알게 된 많은 지인들 등, 제가 지난 4, 5년 꾸준히 틈틈이 글 공유를 하는 카카오톡 명단이 있는데, 그중 거의 대부분이 바로 한 번이라도 저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분들을 대상으로 초창기 처음 명단을 선정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무슨 대신 갚을 것 없는 때여서 제가 받은 은혜와 감사의 글 나누는 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제가 하는 이 스베덴보리의 낯설고 생소한 말씀 풀이와 이질적 교리로 그마저 많이들 소원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한 분 한 분 저희를 기억하시고 사랑과 은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푸신 기억들은 두고두고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다 제 일지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러나 정작 실제로 그 고마움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일에는 저희가 너무 서툴러 본의 아니게 섭섭함과 서운함을 드리는 경우들도 가끔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 한분 한분이 사실은 그분들 모습으로 저희를 도우신 주님이셨을 텐데 말입니다.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 경우였지만... 이처럼 우리는 왜 보통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을 모를까요?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주님이 갈릴리를 출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즉 그 속뜻으로는, 이 말씀은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이 지옥의 시험을 이기시고, 점차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 되시는 과정을 의미하지요. 이에 대해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조금 어려우실 듯 합니다만... 주님이 빛을 더하사 이해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갈릴리는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하고, 사마리아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도 처음에는 교회 밖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계시다가, 그러니까 아주 어린 영유아 시절이셨겠지요, 점차 진리의 인도를 받아 내면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가신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전반적으로는 주님의 영화의 과정을 의미하는데요,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주님의 영화, 즉 주님이 입으신 인성과 주님 안의 신성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거기서 부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뜻하고, 부활은 시험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신성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주님의 영화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그렇게 한편으로는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아직 신성과 완전히 결합하지 않으신 주님이 그러면 어떻게 병자들을 고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과정을 보면,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도 있었고, 분리된 상태일 때도 있었는데요, 전자의 상태, 즉 인성과 신성이 결합한 상태를 주님의 영화의 상태라 하고, 후자의 상태, 즉 인성과 신성이 분리된 상태를 겸비(humiliation)의 상태라고 합니다. 겸비라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신성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하나가 된 상태일 때, 즉 영화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인데요, 그때 신성의 능력이 인성을 거쳐 병자들에게 전해져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12절과 1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영적 의미로 나병환자는 진리를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진리를 더럽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영적 나병환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까지 인정하지는 않는 걸 의미하는데요, 왜냐하면 본문을 보면, 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예수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주님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병환자의 경우, 시대적으로, 즉 유대 정결법이 우선되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속뜻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거나 세상 재물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주님 앞에 나오면 영적인 복과 자연적인 복을 주님께 구합니다. 나병환자가 멀리서 주님께 병의 치유를 구하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십니다. 레위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나병환자가 생기면 먼저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를 통해 나병의 유무와 그 상태를 판단 받도록 했습니다. 주님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말씀에서 제사장은 선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보이라 할 때, 몸은 겉 사람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선의 관점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걸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돌아서서 악을 행하는지, 아니면 아직 선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진리의 상태에 있다가 악을 행하는지 스스로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상태가 후자보다는 내적인 나병이고, 그러므로 위중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속까지 병드는 게 겉만 병든 것보다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지요. 상한 양파나 감자, 사과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병환자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그러니까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나병환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병의 상태를 진단한 후, 악에서 돌아설 때 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저들처럼 주닙의 말씀대로 하면, 일상 가운데 이런 일이 고스란히 그대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15절과 16절에는 병이 치유된 나병환자 중 한 사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나병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것은 그가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77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힘과 지혜에 있어 하나님은 모든 것이고 그에 비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또는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인간으로부터는 악 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 사람이 이러한 것을 마음으로 인정할 때, 그는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처럼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때 또한 그에게서 자아가 제거된다. (이순철 역) when man thinks that the Divine in respect to power and wisdom is everything, and man in comparison is nothing, or that from the Divine is all good and from man nothing but evil. When man is in this acknowledgment from the heart he comes as it were out of himself, and thence falls upon his face, and when he is thus out of himself he also is removed from the proprium [what is his own], which in itself is wholly evil; when this is removed, the Divine fills him and raises him up; (AE.77)

 

주님께 감사드리는 나병환자는 자신은 아무 힘도 없고, 오로지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침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주님께서 발아래 엎드린 그 사람을 향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물으십니다. 여기서 열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열이라는 숫자는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홉은 결합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주님과의 결합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과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인애(仁愛, charity)의 신앙을 버리고, 자아에서 나오는 신앙으로 자기 자신 및 세상과 결탁, 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세상의 부귀를 좇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아 겨우 숨통이 트여 살만하게 되면 금방 또 제힘을 의지하여 세상 가치관으로 돌아서는 그런 버릇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있는 것을 보는데요,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이는 들어가는데 이루거나 모아놓은 건 전혀 없이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맴 도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게 되지요. 이런 못된 버릇이나 습관은 아주 단호하게 끊어내야 할 줄 믿습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이 9:1 비율은 의외로 많은 곳에서 발견되거나 경험할 수 있는데요, 가령, 제가 몇 년째 대략 100여 분께 받은 바 은혜를 나누어 오지만, 그 가운데 꾸준히 답신을 보내오시거나 무슨 반응을 보이시는 분은 대략 열 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처음엔 좀 서운함이 있었으나 ‘아, 원래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알게 되고 나선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에는 그를 사마리아인 또는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교회 밖의 이방인이지만 그럼에도 진리를 사랑하여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먹는 개에 비유하신 주님의 비유에 기꺼이 동의한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겸손한 믿음이며, 부잣집 문 앞에서 음식을 구걸하듯 진리에 갈급했던 거지 나사로와 같은 믿음입니다.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일어나는 것’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으로 그의 신앙이 자아의 이기적 신앙에서 주님이 주시는 이타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는 것’은 신앙의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걷는 것이나 가는 것은 삶의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는데요, ‘구원하였다는 것’은 그의 병이 일시적으로 치유된 게 아니라 영원히 치유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이유는 그의 신앙이 인간의 이기적 신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인애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신앙이라고 모두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구원과 세상에서의 영달(榮達)을 위한 그런 신앙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전자의 신앙, 즉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신앙이라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후자의 신앙, 즉 이기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오히려 그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악을 끊고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병자들에게 언제나 ‘네가 나를 믿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물으실 때의 그 믿음은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타적인 신앙입니다. 겸손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에 따라 자아의 신앙을 버리고, 주님이 주신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고질병인 나병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었고, 주님의 발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반대로 나머지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을 통해 일시적으로 병을 고칠 수는 있었지만, 곧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이타적인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기적인 신앙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인 질병을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고, 주님 앞에 겸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에게로 돌아온 한 사람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에 따라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통찰력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이라면 과감히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신앙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6)

 

아멘

 

 

 

원본

2021-09-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맞춤 설교

2024-03-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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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의 속뜻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7-10)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천국으로부터 하는 것,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 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계시록 해설 794:3, 이순철 역) whatever man does 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he does from heaven, that is, through heaven from the Lord; but anything that a man does 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this he does from self. (AE.794:3)

 

 

다음은 마태복음에 실린 주님의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5:1-4)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할 때는 생색을 내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말씀이지요.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왜일까요?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높이는 건 자아에 대한 사랑이며, 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문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선(善,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의 유입이 끊어집니다. 그런 상태가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서 살아가는 상태인데, 그때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할 뿐 이웃에게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장 39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눅11:39-40)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41절) 하십니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는’ 건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겉 사람으로부터 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고,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자는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속 동기는 주님 보시기에 불순하고 악합니다. 반면, 후자, 즉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고 선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웃을 구제할 때는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익한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 앞에 스스로 무익한 종이 되는 건 겉 사람의 마음으로는 어렵고, 속 사람의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의 말씀들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7절입니다.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종이 밭에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종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건 말씀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배워 익숙해지는 걸 의미합니다. 밭을 가는 건 진리의 지식을 배워 믿음이 자라가는 걸 의미하고, 양을 치는 건 그 믿음에 따라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면 밭은 무엇일까요? 밭은 교회를 뜻합니다. 신앙인은 교회를 통해 매일 선과 진리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묵상, 실천하는데요, 그것이 종이 밭을 일구고, 양을 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종이 밭에서 돌아와 앉아 누군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말씀에서 앉는 건 의지의 상태를, 먹는 건 진리와 선을 실천하는 거, 즉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종의 상태는 어떤 겁니까?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대해 아는 걸 자랑하고, 진리를 이용해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상태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종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물으신 겁니다. 그러면 종은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을까요? 그에 대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종은 자기가 먹기 전에 마땅히 주인의 먹을 것을 먼저 준비하고, 주인이 먹는 동안 곁에서 수종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이 진리를 가지고 선을 행할 때는 자기 자신보다 먼저 주님과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기쁨과 행복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주인이 먹은 다음, 종이 먹고 마실 음식은 바로 그런 천국의 것, 곧 천국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 된 사람은 허리에 띠를 두르고 먼저 주인을 수발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허리는 생식능력과 관련이 있는데요, 그래서 영적으로는 선한 열매를 생산하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걸 뜻합니다. 그리고 띠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띠를 두르고 주인을 수종, 수발하는 건 선을 행함에 있어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진리에 따라 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때, 주님과 이웃을 위한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걸 가지고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평화와 자유를 주십니다. 주님은 그걸 위해 종더러 먼저 주인을 수발하고, 그다음에 먹고 마시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에는 이와 같은 반전의 미학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육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것이나, 신앙인들이 자아라는 생명을 버림으로 주님으로부터 참 생명을 얻는 건 겉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전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인들 가운데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과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기보다 이웃들로부터 섬김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주인보다 먼저 먹고 마시려는 종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잠깐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믿고, 그것에 따라 살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그걸로 추앙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걸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주님 앞에 스스로 무익한 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잘나거나 총명해서 참된 진리 안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 내가 선해서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아주 작은 선도 스스로 행할 수 없고, 아주 작은 악도 스스로 끊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악하고 거짓된 것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게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인정할 때,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고백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한 일들에 대해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겸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속 사람이라는 마음과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이 계시고, 겉 사람 안에는 인간의 자아가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만 오고, 사람으로부터는 아니라는 건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행위는 겉 사람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하고, 성실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더라도 그 동기가 주님과 이웃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서 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속 사람이 열리고, 속 사람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겸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과 함께’라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많은 것입니다. 시험을 잘 견디고 이김으로써 속 사람은 열립니다.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을 하든 자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매일 같이 띠를 두르고, 정성껏 주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에게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107:15)

 

아멘

 

원본

2021-08-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3-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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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1(D6)-추모예배(2532, 마24,35-40), '故 권성조(權聖祚, 1923생 - 2015졸, 향 91세) 9주기 추모(追慕) 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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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지금부터 작년 11월 5일, 포천 황동묘원에서 이곳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로 새롭게 모신 故 권성조(權聖祚, 1923생 - 2015졸, 향 91세) 아버지, 할아버지 추모(追慕)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설교

다들 오늘 특별히 삼일절(105주년) 아침, 원근 각처에서 서둘러 오시느라고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께서 그 귀한 걸음들 위에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아주 특별한 날인 삼일절이면서, 한편으론 고 권성조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9주기 되는 기일이기도 합니다.

 

이 ‘기일’(忌日)이라는 표현은 다른 말로는 제삿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는 이런 예배가 아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였을 것입니다.

 

원래 조선 말, 이 땅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된 건 가톨릭(Catholic, 公, 보편적, 일반적), 그러니까 천주(天主)교를 통해서입니다.

 

※ 참고로, ‘기독교’라 하면 천주교를 포함, 개신(改新)교 전체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기독’(基督, 중국어로는 기두’로 발음)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에 대한 한자 표기인 基利斯督’(중국어로는 기리스두’로 발음)를 음역(音譯), 그러니까 우리식대로 축약해서 읽은 건데요, 가령, 프랑스를 佛蘭西(중국어 발음은 포란시), 즉 우리말 불란서로 읽는 것과 같은 겁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둘 다 그 뿌리가 ‘기독’,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타 종교 입장에서 봤을 땐 다 기독교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뿌리로 하는 다양한 종파, 예를 들면, 정교회라든지, 콥트라든지 등등 모두 무슨 세계 종교 분포도 같은 통계를 낼 때는 다 합쳐서 기독교로 분류합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잠깐 위키백과를 보니 세계 종교에서 기독교가 25억이며, 그 안에서 가톨릭이 12억, 개신교가 6억, 정교회 3억 등으로 나오며, 현 전 세계 인구가 대략 80억으로 나오는 걸 보면, 기독교는 30프로 좀 넘네요. 주님의 시야엔 이 나머지 70프로, 55억의 인구 역시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자녀라는 사실과, 만일 개신교만 놓고 볼 때, 주님의 구원은 나머지 74억한테도 중요하여, 그래서 주님은 모두를 아우르는 어떤 공정한 ‘구원 시스템’을 구비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개신교(1879)가 들어오기 백 년 전 천주교(1784)가 들어왔는데요,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처음 들어온 천주교는 처음에는 서양 기독교 입장에서 당시 조선에 만연, 큰 폐단을 낳고 있던 조상 제사를 금했는데, 이게 나중에 수많은 구한말 천주교 박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것이 바로 흥선 대원군 때 있었던 병인박해(1866-1872)입니다. 당시 심화되던 민심 이반을 달래느라 안 그래도 조상 제사를 금하던 천주교를 향해 가진 백성들의 반감을 이용했던 건데요, 전국적으로 이 기간 팔천 명이 참수(斬首)된,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박해였습니다.

 

이런 시행착오, 단순히 시행착오라기엔 그 흘린 피가 너무 진한 아픈 역사를 거쳐 천주교에서는 제사 허용으로 입장을 바꿨고, 그걸 미사 형태로 오늘날 드리고 있으며, 개신교는 교단마다 좀 다르지만 어디는 ‘추모’(追慕) 예배, 어디는 ‘추도’(追悼) 예배, 또는 편의상 기일 예배 등으로 부르면서 지금처럼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도 죽은 자를 해마다 기억하여 무슨 의식을 진행하는 장면이 한 군데도 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죽었을 때, 그와 관련된 장례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말입니다. 성경에도 이 ‘제사’ 이야기는 많이 나옵니다만, 우리말 번역 표현이 그저 ‘제사’일 뿐, 원어는 영어로 ‘worship’, 즉 예배하다, 경배하다입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제사 정신인 것이지요. 성경의 유일한 예배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며, 이를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아래와 같이 아예 돌판에 새겨주셨습니다.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20:3-6)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명목상으로는 추모예배로 모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것임을 하나님이 보시고, 이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만약 지상의 이 부모-자식, 남편과 아내 등의 혈연관계가 사후(死後) 천국에까지 영원히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좀 엉뚱해 보이기도 하는 이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해본 적이 있는데요, 만일 사후 내가 천국에 가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또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리고 제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등 끝없이 이어지는 위아래 관계 속에서 아마도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 되지 않을까 한 적이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아마 혼란도 그런 혼란이 없지 싶었는데요, 지상 혈연관계가 천국까지 이어진다면 말입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썼던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는 그 시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대부분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에게 신앙적 권면을 위한 편지, 서신들을 썼을 뿐인데, 그 서신들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아서인지 후대에 이르러 몇 차례 공의회를 거치며, 그 서신들이 성경에 포함된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은 그의 생전에 그를 한번 천국, 그것도 삼층천을 다녀와 보게 하셨는데요(고후12:2), 이런 일을 세월이 흘러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주님은 또 한 사람, 그의 나이 57세에 찾아오셔서 천국을, 이번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무려 27년 동안 구석구석 경험하여 글로 남기게 하셨습니다. 천국을 한 번만 다녀왔던 사도 바울의 글도 성경이 되었거든, 하물며 27년간을 다니며 라틴어로 수만 장의 기록을 남긴 사람의 글은 더 말할 게 없겠지요?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그가 남긴 기록을 참고한 건데요, 그의 글을 가급적 제가 소화한 걸로 말씀드립니다. 그의 기록을 이런 예배에서까지 인용할 정도로 제가 신뢰하는 이유는, 그 역시 참으로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서 남은 삶을 오직 주의 쓰임새의 삶을 살면서 지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하며 높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추모예배 관련, 사후의 일, 곧 천국의 실상을 논할 때, 이보다 더 생생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스웨덴)이며,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톤(1643-1727, 영국)과 40년 정도 겹치는 시대를 산, 역량으로는 거의 동급의 천재였습니다.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통한 이 영계 체험을 시작하기 전 이룩한 과학적 성취는 당시 유럽의 학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가 나중에 과학계를 은퇴, 오직 주님 부르신 일에만 전념하자 당대 학자들이 다 만류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그때 한 대답입니다.

 

저와 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 곧 영계에 관한 진리를 남기는 일은 인류 전체의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 받은 이 특별한 소명은 제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천수만 배 더 중요합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한테는 무척 생소하지만, 그는 서양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서 서양에서는 유명하며, 심지어 그의 모든 영적 저작은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재까지 된, 그런 사람입니다.

 

 

자, 그럼 다시, 이 지상 혈연이 천국까지 이어지는가 하는 건데요, 그를 통해 주님이 계시하신 천국 실상에 의하면, 지상의 혈연관계는 지상 생활로 그치고, 천국에서는 모든 게 전혀 새롭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부모-자식, 부부 등의 관계가 사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뭐랄까... 초기화가 된다고 해야 할까요? 네, 기존 지상의 모든 것, 곧 지상에서 익힌 모든 학문과 지식, 인맥, 경력, 경험 등은 다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이후 모든 걸 전혀 새롭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한 가지, 아주 근본적인 게 궁금해집니다. 사후 어차피 초기화가 될 거라면, 굳이 생전에 효도다 뭐다, 부부 사랑이니 자식 사랑이니 애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말이지요. 네, 그런 생각이 당연히 들지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주님이 그런 걸 모르고 우리가 누구의 자식으로, 누구를 우리의 부모로 세상에서 이렇게 연결시켜 주셨겠습니까? 거기엔 주님의 깊으신 섭리, 신적(神的) 섭리와 목적이 있으신데요, 그건 바로 우리가, 그리고 온 인류가 지상 생활을 마치고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먼저 천국에 합당한 주님의 신적 성품을 지상에서 함양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에게 있어 지상은 천국을 위한 일종의 모종밭인데요, 지상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주님이 맺어주신 혈연관계를 통해 주님을 닮도록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아버지를 아버지의 모습으로 계신 주님으로, 어머니를 어머니의 모습으로 계신 주님으로, 형, 누나, 동생을, 남편 혹은 아내, 그리고 자녀를 각각 그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으로 인식, 마치 주께 하듯 하여 어떤 인간관계에서든지 주님의 성품을 갖추어 나갈 수 있게 말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인데, 그 속 사람이 천국의 주(主)이신 주님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속 사람은 무슨 교리에 밝다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무슨 신학적 입장에 목숨을 걸 정도로 단호하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고, 오직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오직 주님의 진리를 실천, 선한 삶을 살아야만 형성되는 겁니다.

 

 

다음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주인공 마르틴은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제화공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5년 전에 자식 둘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고픈 마음이 들어 그날부터 성경을 읽다가 그리스도의 삶에 감동을 받고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더욱 성경 읽기에 열중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르틴, 내가 내일 찾아갈 테니 창밖을 보아라.

 

마르틴은 다음날 하루 종일 일 끝날 때마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언제쯤 오시려나...”

 

하며,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신다던 하나님은 오시지 않고, 마침 창밖엔 늙은 청소부가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은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시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몸을 좀 녹이시게 하였습니다.

 

청소부가 나간 후, 두어 시간이 지나 창밖을 보니, 이번엔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걸 대접하고, 그 사이 얼른 엄마와 아이를 위한 따뜻한 옷을 장만해 주었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거의 해가 질 무렵, 역시 창밖을 보니 이번엔 사과를 파는 노파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고 야단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소년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사과값을 대신 갚아주며, 노파가 소년을 용서하시도록 권유,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마르틴은 날이 어두워지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노파와 소년이 나타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이후 마르틴은 꿈에서 깨어나 마침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니,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4:35-40)

 

 

이 단편의 핵심은 바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곧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하신 대목이지요. 즉 주님은 나이 많은 청소부의 모습으로, 아이를 안은 아이 엄마의 모습으로, 그리고 사과를 훔친 소년과 그 소년을 야단치는 노파의 모습으로 마르틴을 만나러 오셨고, 마르틴은 그 사실을 까맣게도 모르고 단지 그들을 주께 하듯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을 베풀었을 뿐인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웃 사랑이 곧 주님 사랑이 되는 이유이며, 주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를 통해 내 안, 내 속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닮게 하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게 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마5:44)인데요, 이 말씀의 속뜻은, 비록 나를 힘들게 하고, 원한이 있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라 할지라도 그 역시 주님이 지으신 사람이므로 그의 안에도 역시 주님의 형상, 곧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으니, 비록 그는 미울지라도 그의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에 대해서는 예를 갖추고, 함부로 하지 말라는,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말씀인데요, 그러니까, 원수일지라도 그저 하나님 앞에 네 할 도리만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을 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19-21)

 

사후 속 사람의 겉은 휴면 상태에 들어가고, 속 사람의 속이 드러나 그걸로 천국, 또는 지옥을 가게 된다는, 이것 때문에 지상 혈연관계가 천국까지 이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은 아래 소개하는 책자인,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그러나 오히려 이런 사실, 이런 영적 실상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끼치는 유익은 참 큰데요, 가장 큰 유익은, 우리가 이렇게 모든 관계가 지상 생활로 끝난다는 걸 알면, 더 이상, 무슨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기 위해, 또는 가문의 이름을 빛나게 하기 위해, 아니면 재물을 쌓기 위해,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자녀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거나 큰 부담을 지우는 그런 무리수를 두는 인생을 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든 아니든 거진 다 공통인데요, 이런 건 어떤 말로 포장하든 사실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른 돌이키지 않으면, 그 속 사람이 지옥에게 먹히게 되어 살아서도 지옥에 연결되어 살게 됩니다. 그 끝이 비참하며, 사후 운명이 매우 안타깝게 되지요. 아주아주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을 열심히 사는 게 무조건 나쁘다거나 죄가 된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모든 노력과 방향, 초점이 주님이 원하시는 어떤 쓰임새에 맞춰진 게 아닌,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맞춰지는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아주 깔끔하게 살 수 있습니다. 부모-자식, 남편과 아내, 그리고 교회 교인들과 회사 동료들, 이웃들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마르틴처럼 주님을 대접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해도 정말 순수하게, 자식을 사랑해도 정말 순수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지상의 모든 관계는 지상 생활로 마감한다는 이 계시는 정말 정말 귀한 계시이며, 그래서 아마도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여신 많은 계시 중 하나로 이것을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작하면서 던진 일종의 화두지요. 성경엔 장례 관련 사례는 많으나 죽은 자를 기억하여 해마다 무슨 의전을 행한 기록은 전혀 없다는...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한 답이라고 할까요? 지금까지 살핀 바에 따른 당연한 결론인데요, 그것은 지상 모든 혈연은 지상 생활로 그치고, 천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즉 지상 모든 혈연은 속 사람의 겉과 함께 영원히 휴면 상태로 가라앉는 대신, 속 사람의 속으로 천국의 새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론,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유는, 영계인 천국에서는 자연계에서 습득한, 자연적이기만 한 모든 것은 재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며, 소개하고픈 책 두 권이 있는데요, 이는 주님의 신성, 곧 선(,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진리와 관련된 책으로, 중간에 잠깐 언급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입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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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하나는 ‘성 프란치스코’라는 이 책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은성출판사, 영성, 영성형성

eunsungpub.co.kr

 

프란치스코는 800년 전 사람으로서, 인류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의 정신 그대로를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의 신성 중 진리를 접한다면, 프란치스코를 통해 주님의 신성 중 선을 접할 수 있습니다. ‘아, 주님의 진리를 일상 가운데 저렇게 실천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선이구나!’ 깨달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이야말로 지상에서 주님의 신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는데 결정적인 가이드요, 등불이 될 줄 믿습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 성경이 그 첫 자리임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작년 이장 후, 오늘 이곳에서 처음 드리는 이 추모 형태의 예배를 통해 진정한 추모의 의미에 대해 듣고, 앞으로 더욱 서로를 주께 하듯 그렇게 사랑해야지 마음에 굳게 결심하고 돌아가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024-03-01(D6)

삼일절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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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D1)-주일예배(2531, 눅17,1-6),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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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2-25(D1)-주일예배(2531, 눅17,1-6),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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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속뜻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1-6)

 

 

말씀에서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을 뜻한다. (계시록해설 1182:3, 이순철 역) To cause one of the little ones that believe in Jesus to stumble,” signifies to pervert those who acknowledge the Lord; (AE.1182:3)

 

 

마태복음 24장 41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여자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고, 맷돌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여자들이 맷돌질을 하는 것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교리를 배우고 교리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데려가는 사람은 주님에 의해 구원을 받는 사람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할까요? 주님이 주신 참된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인간이 만든 거짓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또 참된 교리 안에 있더라도 인애(仁愛, charity)의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인애가 없는 믿음, 그러니까 자아 사랑의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노아 홍수 직전에도 그랬습니다. 방주에 오른 사람들은 살고, 방주 밖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 간 사람들은 홍수에 휩쓸려 사라졌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열심히 맷돌질을 했음에도 버림을 받는, 본문에 나오는 여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말세, 즉 교회의 마지막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진리를 가르쳐야 할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 교인들에게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거짓들 속에서 실족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믿고, 주님 뜻에 따라 생활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신앙인들이 주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하고, 실망을 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행동할 때 그렇습니다. 그럴 경우, 의도가 나쁘지만 않다면 주님께서도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족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잘못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자를 뜻합니다. 예를 들면, 고의적으로 말씀을 왜곡,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자입니다. 말세에 교회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거짓인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만든 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씀을 왜곡하는 이유는 주님보다 자신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다 하셨습니다. 거짓 교리로 교인들을 타락시키는 사람들이 당할 화는 어떤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믿음이 사라지며, 대신 진리에 대한 반감과 혐오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질과 명예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고통받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의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거룩해 보였지만, 영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진리이신 주님을 그토록 미워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23:27)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고의로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이 당할 화입니다. 2절에서는 말씀을 왜곡하여 많은 사람을 실족시키는 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거짓 교리를 만들어 그것으로 신앙인들을 타락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십니다. 목(neck)은 사람의 머리와 몸통을 연결하는 부위로 영적으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있는 합리적(이성적) 사람(rational man), 곧 마음을 뜻합니다. 이 합리적 사람을 통해서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겉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에게는 이 합리적 사람은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연자 맷돌을 목에 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맷돌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주님이 주시는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거짓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연자 맷돌을 목에 매는 것은 거짓 교리로 인해 합리적 사람이 닫혀 말씀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배울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신 것은 진리를 악용, 다른 사람을 타락시킬 바에는 차라리 진리를 모르는 편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고 악용하는 것보다 진리를 모르는 상태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죄가 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하면 말세에 말씀을 가지고 이웃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이웃이 우리에게 죄를 지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3절과 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람마다 신앙이 다 다릅니다. 또 신앙은 같아도 각자 생각과 애정이 다르고, 거듭남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사람의 생각 없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할까요? 본문에는 먼저 경고하고, 상대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경고하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타이르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은 그때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용서하는 것은 사랑으로 잘못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잘못을 덮어준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상대에 대해 원한이나 미움, 복수심 같은 악한 감정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용서하되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십니다. 일곱은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은 끝까지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루’는 무슨 뜻일까요? 하루(a day)는 빛이 있을 때를 뜻하고, 그러므로 잘못을 한 상대가 진리 안에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진리를 가지고 타이르거나 용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하더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상대가 진리 안에 있어서 진리를 통해 잘못을 회개할 때는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가 진리를 믿지 않거나 거짓 진리 안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은 회개를 하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는 용서나 화해가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람들과는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용서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이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사람과 결합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용서도, 구원도, 삶의 형통과 복도, 데려감과 버려둠도 다 시스템입니다.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안 봐주고 하는 이 세상 무슨 재량권 같은 게 아닌, 어느 나라, 무슨 민족, 어떤 인종과 종교, 무슨 교단과 교파에 상관 없이 주님의 영원하신 하나의 원칙은 ‘시스템’입니다. 그 정하신 시스템에 따라 공정하게 지상에서 행복, 또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두 번째 원칙은 ‘만큼’의 원칙입니다. 주님을 사랑한 만큼, 또는 미워한 만큼, 사람의 내면이 열린 만큼, 또는 닫힌 만큼 그에 합당한 행복, 또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그에 합당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이웃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며, 이웃이 잘못할 때 진리와 선으로 끝까지 용서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믿음, 즉 인애를 바탕으로 한 믿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하십니다. 말씀에서 뽕나무는 믿음을 뜻하는데, 인간의 믿음, 즉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한 믿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뽕나무가 바다에 심어지는 것은 자아 사랑에 속한 믿음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말합니다. 바다는 지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고, 앙심을 품거나 하는 이유는 인애의 믿음이 없고, 자아의 믿음만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에 속한 믿음을 가지고는 이웃을 사랑하거나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에 속한 믿음을 던져 버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인애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인애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는 교회의 마지막 때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세는 노아 시대에 큰 홍수가 났을 때이고,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유대교회가 무너졌을 때이며, 계시록에 예언된 마지막 교회가 나타나는 지금 이 시대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는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 혼돈의 시대입니다. 교회 안에는 거짓 진리들이 만연하고, 교회 밖에는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전염병이 창궐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이러한 환난들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신앙인들이 말세에 실족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말세에는 말씀을 왜곡, 거짓 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물질이나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합니다. 말세에 신앙인들은 그런 유혹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안팎의 이웃들로부터 오는 시험도 많습니다. 교회 안의 이웃, 즉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시험은 사랑과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서로 화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는 화합할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때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하자 주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말세에 신앙인들이 시험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인애의 믿음은 없고, 자아에 속한 믿음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인애의 믿음을 구해야 하고, 그것으로 자아에 속한 믿음을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눅22:22)

 

아멘

 

원본

2021-08-0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2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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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8(D1)-주일예배(2530, 눅16,26-31),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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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2-18(D1)-주일예배(2530, 눅16,26-31),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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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2)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6:26-31)

 

 

악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선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뿐만 아니라 그것을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악을 끊기 전에는 천국의 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 9346, 이순철 역) ...those who are in evils not only do not receive the goods which continually flow into everyone from the Lord; but also absolutely turn them away. And therefore a man cannot possibly receive the good of heaven until he abstains from evils. (AC.9346)

 

 

여러 해 전에 우울증을 앓던 어떤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가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라며 음성파일이 인터넷에 떠돈 적이 있습니다.

 

※ 지난 2008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배우 최진실씨 말씀인 듯합니다. 저 역시 이 음성파일을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음성파일 속에서 그 배우는 지옥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곳이며,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동안 생명을 소중히 여겨 지옥에 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녹음파일은 의도를 가지고 조작한 것이 분명합니다.

 

※ 아니면, 누군가 무슨 집회 중에 잠시 그 배우의 영에 빙의(憑依)되어 부르짖는 걸 녹음한 것일 수도 있는데요, 저는 그때 들으며,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빙의는 일종의 신접(神接)으로, 주님이 금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금하셨어도 사람들 중에는 기어코 범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천국이나 지옥은 주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니면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녹음기를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은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그 일로 충격을 받았고, 그러나 잠시 그때뿐, 그리고는 곧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혔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의하면, 천국의 천사나 지옥의 영들은 그들의 생각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을 수는 있지만 직접 말을 걸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을 조작해 퍼뜨렸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천국의 천사나 지옥의 영들로부터 사후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에 사는 동안 좀 더 진지하게 사후의 삶을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겠지요. 오늘 말씀에서 지옥에 떨어진 부자도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형제들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알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뭐라고 하셨을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2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주님께서 부자가 있는 지옥과 거지가 있는 천국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다고 하십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큰 구렁텅이란 어떤 것일까요? 천국이나 지옥을 이루는 것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사랑인데 두 사랑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천사들의 사랑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또는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반대로 지옥 악마들의 사랑은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며, 또는 악과 거짓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고 반대로 자아는 미워하지만, 지옥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자아를 사랑하는 대신 주님을 미워합니다. 이와 같이 천국과 지옥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은 정반대여서 영원히 상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입니다. 그런가 하면 “큰 구렁텅이”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사후에 잠시 머문다는, 이른바 ‘영들의 세계’라고도 하는 ‘중간 영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중간 영계에 머물던 사람이 그곳을 떠나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면 그 후에는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간 영계, 또는 영들의 세계에 대해 “천국과 지옥” 421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인들의 세계는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며, 둘 사이의 중간 지역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사람이 사후에 처음 들어가는 곳이고, 그 후 때가 되면 세상에서의 삶에 따라 그곳으로부터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거나 또는 지옥으로 던져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순철 역) The world of spirits is not heaven, nor is it hell, but it is the intermediate place or state between the two; for it is the place that man first enters after death; and from which after a suitable time he is either raised up into heaven or cast down into hell in accord with his life in the world. (HH.421)

 

주님께서 부자에게 천국과 지옥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영원히 오고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부자가 절망하며 말합니다.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세상 살 때 말씀에 대해 많이 안다 자부했지만, 그러나 말씀을 따라 살지는 않았습니다. 말씀에서 ‘부자’의 속뜻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아마 지옥의 실상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위선자로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상황을 세상의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계신 주님께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 증언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에서 내 아버지의 집은 세상에 있는 교회를 뜻합니다. 아버지는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형제는 누굴까요? ‘형제’는 보통 말씀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부자와 같은 교회 안의 사람들, 즉 말씀에 대해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 위선자들을 뜻합니다. 형제가 다섯이라고 할 때 ‘다섯’ 역시 보통은 작은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 다섯에게 증언하게 하라는 것은 교회 안의 모든 위선자들에게 지옥의 실상을 그대로 알려달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29절 말씀입니다.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말씀에서 ‘모세’는 좁은 의미로는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말씀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의 모든 역사적인 말씀을 뜻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하시는 것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굳이 천국의 천사들을 보내지 않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듣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옥의 부자는 또 한 번 간청합니다.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감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눈에 보이는 기적, 즉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기적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을 그렇게 따라다녔던 사람들은 오히려 주님을 비난하고 욕하기 바빴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제자들도 다 흩어져 버리고, 주님 곁에 남은 사람은 사랑하는 제자 하나와 몇 명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의 설득력은 일시적인 것일 뿐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 134항은,

 

기적은 사람들을 설득해 일시적으로 예배 가운데로 이끌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서 합리성을 빼앗고, 악을 가두는 일을 한다. 그래서 기적의 주문이 풀리면 오히려 갇혔던 악이 튀어나와 불경한 짓을 하고, 신성을 모독한다. (이순철 역) Communication with the dead would have the same result as miracles (of which just above), namely, that a man would be influenced and driven into worship for a short time. But as this deprives a man of rationality and at the same time shuts his evils in, as was said above, the captivation or the inward bond is undone, and the imprisoned evils break out, with blasphemy and profanation; (DP.134r)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적의 설득력은 주문과 같아서 일시적으로 악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 효과가 느슨해지면 사람들을 이전보다 더 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만일 죽은 자들 중에서 내 가족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는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설사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결코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적은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합리적 사고를 빼앗으며, 그렇게 해서 영적으로 더 나빠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선택한 모든 행위는 사람의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만이 생명이 되어 그 사람 안에 영원히 남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을 나눴습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세상에서 악을 행하면 마음속에 지옥이 생기고, 그러므로 그 사람은 가장 작은 형태의 지옥으로 변하고, 반대로 선을 행하게 되면 마음속에 천국이 생겨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 된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매 순간의 선택에 따라 천국 형상이 되기도 하고, 지옥 형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들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 중간 지대를 큰 구렁텅이에 비유합니다. 큰 구렁텅이는 사후에는 건널 수 없는 곳이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오고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큰 구렁텅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아와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은 구렁텅이 위에 있는 천국의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부터 천국의 거룩한 것들이 그에게로 넘치게 흘러들어오지만, 반대로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문이 닫히고 구렁텅이 아래 쪽의 지옥의 문이 열리면서 지옥의 온갖 더러운 욕망들이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누적들이 사후에 우리들을 천국 또는 지옥으로 이끕니다. 주님께서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 생명나무를 두시고, 그 옆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 자유를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여 자신의 생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든 강요에 의한 것은 인간의 생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적도 일종의 강요이기 때문에 기적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각자의 자유의지를 소중히 생각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부자는 세상에 살 때 주님이 끊임없이 초대하시는 잔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일들에 바빴고, 그것들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후에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자유를 버린 대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세상의 가족들에게 나사로를 보내 증언하게 해달라고 했겠습니까? 자유가 있는 동안 자유를 선용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요12:35)

 

아멘

 

원본

2021-07-1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2024-02-11(D1)-주일예배(2529, 눅16,19-25),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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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1)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16:19-25)

 

하나님의 신성이 천국으로부터 선한 사람들 안으로 유입될 때는 그들의 영적 마음이 열리어 신성을 받아들인다. 반면에 영적 마음이 없는 악한 사람들 안으로 유입될 때는 악과 거짓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내면이 열리고, 그리하여 그곳의 악과 거짓들이 천국의 선을 혐오하고 진리를 증오하며, 온갖 죄의 욕망을 품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선으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으로 떨어진다. (계시록 해설, 504:18, 이순철 역) the Divine influx out of heaven opens, in the good, the spiritual mind, and fits it to receive; but in the evil, who have no spiritual mind, it opens the interiors of their natural mind, where evils and falsities reside, and from this they then have an aversion to every good of heaven, and hatred for truths, and a lust for every crime, and in consequence they are separated from the good, and then damned. (AE.504:18)

 

 

다음은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유명한 수로보니게 여인에 관한 본문입니다.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15:21-28)

 

주님께서 제자들과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는 중에 한 여인이 주님을 큰 소리로 부르며, 귀신 들린 딸 고쳐주기를 청합니다. 그 여인은 동일 본문인 마가복음에 보면 헬라인으로서 수로보니게 족속 사람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당시 시리아의 한 지방 이름인데요, 그러니까 그녀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데 주님께서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하신 겁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장 6절에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하신 적이 있는데요, 여기서 개, 돼지는 믿음 없는 이방인들, 혹은 교회 내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이방인들의 경우, 차라리 진리를 모르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부지불식 중 진리를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을 모르는 이 이방 여인으로서는 주님이 대놓고 하시는 이 말씀은 큰 모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녀를 개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은 성내지 않았고,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면서 그의 딸이 나았다는 에피소드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그는 주님을 믿었고, 주님 앞에 자신을 낮췄습니다. 그것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믿는 것이요, 또 진리 앞에 지극히 겸손한 모습입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여인과 그의 딸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와 비슷한 내용인데요, 본문 19절에는 어떤 부자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여기서 부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을 뜻하고, 오늘날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을 부자라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해 많이 알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영적으로는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옷은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을 뜻하는데, 자색 옷은 선에 관한 지식을, 고운 베옷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주님 당시 유대인들이나 지금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말씀 관련, 많은 지식을, 자랑은 하면서도 그러나 지키지는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오로지 지식만을 즐기는 사람들이 바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롭게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의 집 문 앞에 한 거지가 버려진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2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가 말씀 관련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지는 그렇지 않은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가 대문 앞에 버려졌다는 건 그가 교회에 입문할, 즉 교회의 일원이 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다른 종교를 믿거나, 또는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곳에서 태어나거나, 그 밖에 다른 이유로 기독교인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한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런 나사로에 대해 21절에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으로 배를 채우려 한다는 건 거지 나사로가 앞에서 말씀드린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리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종교나 교리에 구애받지 않고, 참된 진리가 나타나면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배우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면전에서 대놓고 자신을 개에 비유하는 모욕적인 말씀을 들었으나 오히려 진리 앞에 올바른 모습을 보인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했던 거지 나사로의 모습입니다.

 

※ 이는 마치 북한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여러 사정으로 탈북, 국정원과 하나원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탈북하신 분들과 비슷한데요, 이분들은 아주 사소하고 지극히 작은 것 하나로도 그렇게 감격, 감사하며 사시는데, 배정받은 LH 임대아파트에 드디어 입주하시는 날, 특히 그렇습니다. 가령, 이분들은 24시간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실에, 언제나 수돗물이 나오며, 특히 온수가 늘 나온다는 사실에, 그리고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사실에, 전기밥솥에 늘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들 어리둥절해 하시며, 신기해들 하십니다. 그들은 음식점이든, 생산라인이든 수고로이 일했다고 주는 첫 일당이나 첫 월급을 받은 날, 밥 잠을 자지 못하며, 진심으로 감격해들 하시는데요. 자신들은 그렇게 온갖 일에 동원되었어도 늘 무보수였고, 그걸 또 당연하게 여기며 평생을 살아들 오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때 개들이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았다고 합니다. 개는 보통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교회 교인들 중 품성이 좋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품성이 좋지 않다는 건 자기는 진리를 안다 말은 많이 하면서도 정작 실천은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AC.7784) 그렇다면 개들이 거지의 상처를 핥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교회 안 사람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는 교회 밖 사람을 비판하고 비웃는 걸 뜻합니다. 교회 밖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수시로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면서 또한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 밖 사람이라도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인데요, 어떤 일을 몰라서 그렇게는 했지만, 양심상 왠지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을 자기는 진리를 안다는 이유만으로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나사로의 헌데를 핥는 교회 안 개들입니다. 22, 23절에는 그런 사람들의 사후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된 후, 그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자와 거지의 신세가 사후에는 뒤집힌 것입니다. 즉 진리를 안다 자부하던, 그러면서도 정작 그렇게는 안 살아온 교회 안의 사람은 지옥에 가고, 반대로 진리를 몰라 진리를 찾아 헤매던 교회 밖 사람은 사후, 천국에 계신 주님의 품으로 간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말합니다.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부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지옥의 불은 물질을 태우는 불이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반감과 증오의 불이며, 그러므로 진리와 선을 파괴하는 불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의 천사나 지옥의 악마에게나 똑같이 선과 진리를 보내주십니다. 그때 천사들은 사랑과 믿음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만, 지옥의 악마들은 거꾸로 뒤집어서 받아들입니다. 즉 선을 악으로 받아들이고, 진리를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악마들이 진리와 선을 미워하고 파괴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들은 진리와 선을 파괴할 때,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부자는 지옥의 불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왜 고통을 호소할까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화 안에 영원히 있지만,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는 기쁨을 느끼지만 결국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가 진리를 통해 이 괴로운 욕망의 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찍은 물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부자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부자는 세상에 살 때 진리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에만 만족하고, 정작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진리를 모른다는 이유로, 교회 밖 사람들을 업신여기기도 했는데요, 그것은 개나 돼지가 진주를 짓밟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천국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진리를 모르는 이방인이었지만, 진리를 믿고 사랑했습니다. 참된 진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가 배우려 했고, 진리를 통해 거듭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주님께서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 사람 몸의 심장과 폐의 역할을 세상에서는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등불인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많은 종교에도 진리가 있지만, 교회가 가진 말씀의 밝은 빛에 비하면, 그것은 희미한 등잔불 빛 같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희미한 등잔불 빛 아래에서조차도 감사하며 살다가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곳인데, 속 사람의 상태가 세상 살면서 이미 천국인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가 이미 천국 상태가 되려면, 그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 즉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 합일되어야 하며, 이는 오직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사랑으로 신앙을 실천하며, 선으로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생전에 우리는 이 세상 대기 가운데 폐 호흡을 합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아가미 호흡을 하듯 말이지요. 그러다가 사후 천국에서는 주님의 신성으로 신성 호흡을 합니다. 비유하자면 말입니다. 신성 호흡이란, 이미 살아생전, 내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가 준비되어 있어야 사후, 주님 나라에 들어가 그곳 대기를 호흡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오직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 밖 이방인들을 천대하고 업신여긴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진리에 대한 자부심만 있고, 행하지는 않는 유대인들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진리를 배우고, 배운 만큼 행하기를 원하는 순진한 이방인들이 주님에게는 더 귀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방인들과 자주 식사를 하시기도,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부자와 거지가 그들입니다. 부자는 주님 당시 유대인들을 뜻하고, 거지 나사로는 진리에 목마른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꼭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부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도 있고, 심지어 새 교회인들 중에도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용하지 않거나 악용하는 사람은 모두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에 떨어진 부자에게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진리를 안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진리를 모르는 이방인이라고 해서 모두 지옥에 가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까요? 진리를 알기 전이나 안 다음에나 한결같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일은 고난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행하려고 할 때 시험이 오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고통을 피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중에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위한 싸움은 피하고, 대신 쉽고 편한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나중에 지옥 불의 고통이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진리 앞에 항상 겸손하고 진리를 위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6:38)

 

아멘

 

원본

2021-07-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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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2024-02-04(D1)-주일예배(2528, 눅16,14-18),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pdf
0.38MB
축도.2024-02-04(D1)-주일예배(2528, 눅16,14-18),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pdf
0.21MB
성찬.pdf
0.14MB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눅16:14-18)

 

 

(선이라는 것은 쓰임새이며, 인간이란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인데) 만일 쓰임새가 끊임없이 행해지지 않고 중단되게 되면, 이 기간 그는 모든 (악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강한 욕정으로 돌이킬 수 있게 되며, 그건 곧 그렇게 해서 그는 체어리티의 중단뿐 아니라 심지어 선행들로부터도 떠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이런 식으로 자기와 반대되는 것들로 인해 소멸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애의 교리 156) And if uses are not done perpetually there is an interruption, and in this interval he may turn aside into all loves and the concupiscences therefrom, and so not only intermit his charity, but even depart from good works. Charity thus perishes from its opposites, and the man serves two lords. (C.156)

 

※ 위 글은 스베덴보리 저, ‘The Doctrine of Charity’(1766) 중 여섯 번째 소주제인, ‘Man is born that he may become charity’(126-157)에 나오는 글이며,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인간이 체어리티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멈추면, 그 결과, 어떻게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지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실제 삶에 있어서는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과 세상 재물을 더 믿거나, 또는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나기 전 신앙인들은 보통 이렇게 두 얼굴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다가 사후, 영계에 가면 감춰진 본래의 얼굴이 드러나는데요, 그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그동안 어떤 주인을 섬기며 살았는지를 알게 되지요.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사람 같은데 의외로 주님과 이웃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뭘까요?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사람마다 주도적인 사랑, 우세한 사랑(dominant love)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애정, 또는 사랑이 있는데, 그것을 크게 나누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고,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랑은 이 두 가지 큰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주도적 사랑이란 뭘까요? 각 사람에게 있는 수많은 사랑 중에 으뜸이 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도적 사랑이 무엇이냐에 따라 개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즉 주님과 이웃을 위한 천국적인 삶이 될 수도 있고, 자아와 세상을 좇는 지옥적인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하시는 것은 주도적 사랑은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그것들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주된 사랑이 되어야 하고, 나머지 사랑은 보조적인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반대가 된다면, 그 사랑의 끝에는 세상의 온갖 탐심과 정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 가르침 “인애의 교리” 156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이라는 것은 쓰임새이며, 인간이란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인데) 만일 쓰임새가 끊임없이 행해지지 않고 중단되게 되면, 이 기간 그는 모든 (악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강한 욕정으로 돌이킬 수 있게 되며, 그건 곧 그렇게 해서 그는 체어리티의 중단뿐 아니라 심지어 선행들로부터도 떠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이런 식으로 자기와 반대되는 것들로 인해 소멸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애의 삶, 체어리티의 삶을 그치는 순간 주도적인 사랑이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잠시도 체어리티의 삶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세상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도적 사랑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미워하고,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바리새인이야말로 두 주인을 섬기는 자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위선자의 말로에 대해 마태복음 24장 50절에서 51절까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엄히 때린다 했는데 이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구요, 원문에는 ‘그를 갈라놓는다(divide)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라놓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께서 그들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빼앗으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위선자들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는 이유는 그대로 두면 선과 진리를 더럽힐 것이고,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를 알면서 더럽힐 바에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하나도 없고, 악과 거짓만 남아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나 연민 따위는 없고, 오로지 자기만 아는 사람, 어떻게 해서든지 이웃을 짓밟고 올라서기를 바라는 사람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 위선자들이 받을 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비웃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들은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를 모르고 오히려 높아지기를 바라고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또 자기 생각과 다르면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비웃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 “천국의 비밀” 9264번 글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적 진리와 선이 부인될 때, 이 선은 파괴되며, 그 경우, 사람 안에 있는 것 역시 끝나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주님 역시 그렇습니다. 주님은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비롯되는 분이십니다. and this good is destroyed when the Divine truth and good which are from the Lord are denied, in which case this is extinguished in the man, and consequently so is the Lord himself, from whom proceed all good which is good and all truth which is truth.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비웃을 때,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인 선을 파괴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끝냈다, 더 이상 주님이 자기들 안에서 역사하시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부인하고 비웃는 그 말씀이 바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의 말씀을 의미하고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주님이 직접 전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새로운 천국과 새로운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셔서 직접 전하신 말씀은 지상에 세워질 마지막 교회를 위한 말씀이며, 또한 그 교회를 바탕으로 하늘에 세워질 새로운 천국을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신 것은 요한의 때까지의 말씀, 즉 구약의 말씀들이 주님이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라면, 그 후의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이 직접 전하시는 영원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그 신성한 말씀을 비웃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주님은 인간이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되 온전하게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지성에 비춰 어떤 말씀은 임의로 버리고, 어떤 말씀은 왜곡하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뜨리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세워지는 교회는 신성하고 완전한 말씀으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천지는 하늘의 천국과 지상의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 말씀을 왜곡하여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말씀보다 더 높였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님이 갑자기 간음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고, 그것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걸 상기시키신 후,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는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뜨리지 말라 하신 주님께서 갑자기 간음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은 왜 이 시점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말씀에서 결혼은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 전체를 통해 가르치시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요, 믿음과 믿음에 따른 삶의 결합입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세워진 모든 교회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선과 진리, 또는 믿음과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왜곡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 아니며, 그러므로 영적인 간음입니다. 왜냐하면 간음의 영적인 의미는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을 뒤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것은 간음이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을 임의로 왜곡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하실 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중요하고, 삶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잘못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말씀을 임의로 왜곡, 믿음과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 희생시킴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누가복음 24장 47절에는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라고 말합니다. 또 마가복음 1장 15절은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믿을 뿐 아니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생각이나 애정을 면밀히 살펴 악하고 거짓된 것이 있으면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빼고,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가르칩니다. 이런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리에다가 거짓을 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각자에게 맞는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처럼 모든 진리와 선은 각기 맞는 진리와 선을 만나 결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 간의 선과 진리가 있고, 부모 자식 간의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간의 선과 진리가 있고,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직원 간의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가 같은 것 같지만 이렇게 모두 다릅니다. 쓰임새가 다르고 형태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쪽의 진리가 저쪽에서는 거짓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외적이고 내적인 의미들을 통해 우리는 그런 지혜를 깨우쳐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각자의 삶 속에서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이 일어나고 천국의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 체어리티의 행위를 멈추지 말고, 꾸준히 계속하라고 하십니다. 멈추는 순간, 불순한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의 바다로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즐거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관심을 잊을 정도로 과도하면 안 됩니다.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아멘

 

원본

2021-06-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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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8(D1)-주일예배(2527, 눅16,9-13),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신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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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1-28(D1)-주일예배(2527, 눅16,9-13),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신 속뜻.pdf
0.20MB

 

 

※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신 속뜻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9-13)

 

 

오늘날 다들 믿기를, 체어리티라는 건 단순히 선을 행하는 거고, 그러고 나서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 결과, 체어리티의 처음은 선행이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나중이라고들 믿습니다만, 그러나 이는 완전히 정반대로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처음은 악을 치워버리는(to put away)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참된 기독교 437) At the present day it is believed that charity is simply doing good, and that then one does not do evil; consequently that the first thing of charity is to do good, and the second not to do evil. But it is wholly the reverse; the first thing of charity is to put away evil, and the second to do good; (TCR.437)

 

 

요즘 시대는 각종 지식과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서점에는 매일 같이 수많은 책이 새로 나오고, 컴퓨터를 켜면 다양한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 학생들이 전문가를 뺨치는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경험이나 지혜보다는 기억력과 지식이 힘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어떤 정당에서 당 대표를 선출하는데 다선 의원들을 제치고 의원 경험이 없는 30대 젊은이가 대표로 뽑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 지난 2021년 6월, 국민의힘 당 대표로 이준석 후보가 당선된 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 설교의 원본은 지난 2021년 6월 13일,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의 주일 설교입니다.

 

※ 설교 중 이 ‘※’는 원본에는 없는, 이 원본을 조금 다듬어 설교하는 저의 보충 설명입니다.

 

이런 현상 역시 기억력과 지식과 언변이 무엇보다 힘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인간의 머릿속에 든 지식은 가장 차원이 낮은 진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고요, 더 높은 진리인 영적 진리를 얻기 위한 도구이며, 나아가서는 주님의 나라에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려는 것도 바로 그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먼저 본문 9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주님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의 기억 속에 쌓인 지식들이 불의의 재물입니다. 왜 그 지식들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셨을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부와 명예를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교우님들은 어떤 사람을 친구로 사귀고 싶으십니까? 저는 힘들고 외로울 때 자기 일처럼 저를 걱정해 주는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또는 인생의 위기에서 저를 구해 주고 기꺼이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과연 그런 친구가 있겠습니까? 아마 주님만이 그런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친구란 바로 주님, 또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것은 세상 지식을 가지고 영적 진리를 사귀라는 것이고요,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사귀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식은 진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고, 주님과 결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10절, 1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지극히 작은 것은 무엇이고, 큰 것은 뭘까요? 또 그것에 충성하는 것은 무슨 뜻이고, 불의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은 낮은 차원의 진리, 즉 기억에 속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 이 ‘기억에 속한 진리’라는 것은 세상에서 학습한 지식들을 가지고 알게 된 진리를 말합니다. ‘영적 진리’라는 표현이 있으니까 ‘자연적 진리’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큰 것은 그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 즉 영적인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충성한다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불의하다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하시는 것은,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은 영적인 진리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가지고도 주님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는 것은 세상 지식이나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지 않고 세상을 섬기는 사람은 더 높은 영적 진리가 주어졌을 때에도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기만 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 갑자기 많은 수의 영 능력자들이 떠오릅니다. 각종 병 고침, 신유, 치유, 예언, 안수, 방언, 영계 체험, 그리고 집회 인도자들, 주 강사들이 말입니다. 그 가운데 정말 드물게 주께 순수한 쓰임새로 섬기는 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잘 포장된 생업 수단으로, 그리고 자기를 높이고 주목받고자 하는 숨은 동기로 그러고들 있으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저부터도 우선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 역시도 누가 저를 무시하고 그러면 발끈하거든요... 성 프란치스코는, 스베덴보리는 그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저는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인 사람은 진리를 가지고 언제나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 오로지 세상의 부와 명예인 사람은 진리를 가지고 오직 부와 명예만을 좇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말씀으로부터 삶을 분리,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에 대해 불의하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앞에서는 남의 것, 뒤에서는 너희의 것이라고 하셨지만, 그러나 이는 모두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러면 진리를 남의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요? 진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거나 진리를 마음대로 왜곡하는 것은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를 대하는 바른 태도는 진리를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의 것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에서는 왜 너희의 것이라고 했을까요? 진리를 주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진리에 따라 신실하게 사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그들의 생명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를 가지고 당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그들의 사랑, 또는 의지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들의 생명인 의지와 사랑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따라 살지 않거나, 혹은 못 하거나 시험에서 넘어지는 이유는 진리가 아직 우리의 생명인 사랑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그러면 그때는 뭐가 사랑이며, 뭐가 생명일까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주님을 의지, 진리에 따라 세상 욕망을 이긴다면, 그때부터 그 진리는 주님에 의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진리를 너희의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 물론, 경험에 의하면, 이후에도 계속 넘어집니다만,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일어나 회복, 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넘어질 때마다 마음이 참 힘들지만, 그러면서 더욱 자신에 대해서는 낮아지고 겸손하여지며, 부인하며 내려놓게 됩니다.

 

다음 13절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신앙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동에 있어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머리로는 진리를 생각하면서 행동은 진리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와 관련해서 계시록 해설 409번 글의 7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천국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속 사람이 열리고, 그때 겉 사람은 속 사람을 섬긴다. 겉 사람은 섬기기 때문에 종이라 부르고, 속 사람은 자기 의지대로 하기 때문에 주인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속 사람이 닫히고, 겉 사람이 열린다. 겉 사람이 열리고 속 사람이 닫힐 때, 사람은 하나의 주인 즉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고, 다른 주인 즉 주님과 천국을 미워한다.” With those who love the Lord and heaven cove all things, the internal or spiritual man is open, and the external or natural man serves it; then the latter is a servant because it serves, and the former is a master because it exercises its will; but with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the world above all things, the internal or spiritual man is closed, and the external or natural man is open; and when the latter is open and the former closed, the man loves the one master, namely, himself and the world, and hates the other, namely, the Lord and heaven. (AE.409:7)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겉 사람이 열린다는 것은 겉 사람이 세상 또는 지옥을 향해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멀리할 때는 주님을 향한 마음인 속 사람이 열리고요, 주님을 멀리할 때는 겉 사람이 세상과 지옥을 향해 열립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마음이 동시에 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계에 밸브가 달린 것처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밸브가 하나 있고, 겉 사람과 지옥 사이에도 또 하나의 밸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열리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닫히고, 다른 하나가 열리면 다른 하나는 닫히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고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신앙인들이 한 손으로는 선을 행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악을 가까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차지도 덥지도 않다 하시고 토해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인애를 베풀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점검해서 모든 종류의 악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주님 한 분만 섬길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애굽인들로부터 금은 대접들과 옷가지를 빼앗아 가지고 나오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또 민수기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족과 싸워 이겼을 때 그들의 부녀와 가축과 재물들을 모두 탈취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애굽인이나 미디안족은 모두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즉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는 마음이 애굽인이며, 미디안족입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극복할 때, 그동안 세상을 섬겼던 모든 지식들이 오직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이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애굽의 재물과 미디안의 재물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을 세상을 섬기는데 쓰지 말고, 진정한 친구인 진리와 주님을 사귀는데 쓰라는 말씀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아멘

 

 

원본

2021-06-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2024-01-21(D1)-주일예배(2526, 눅16,1-8, AE.763), ‘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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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1-21(D1)-주일예배(2526, 눅16,1-8), ‘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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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눅16:1-8)

 

 

신구약 말씀에서 ‘’과 ‘행위’, 그리고 ‘행함’과 ‘사랑’이란 말이 그렇게나 자주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일이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지도, 구원하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그것들을 신앙으로부터 분리해 온 이래, 지금은 또 이 둘을 교묘하게 신앙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해설 763:2) But inasmuch as they find in the Word of both testaments “works” and “deeds,” as well as “doing” and “loving,” so frequently mentioned, they can do no otherwise than affirm that one ought to live well; but since they have separated works or deeds from faith as not justifying and saving, they craftily join these and faith together, (AE.763:2)

 

 

오늘 말씀은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어떤 부자의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의 귀에 들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청지기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믿음만 있고, 인애(仁愛, 체어리티charity)의 삶은 없는 교회, 또는 그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 오늘 설교를 처음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과 달리 개신교 장로교 통합 가정에서 태어나 침례교인이 된 후,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제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순수하게(?)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된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개신교인들은 사실 겉으로 봐서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만, 그러나 제가 속했던 교회들이 대체로 괜찮은 교회였을 수도 있고, 또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살던 시대인 1700년대 중반 유럽 기독교회 때와는 또 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주님 보시기에는 그나마 한국 기독교회가 좀 나을 뿐, 세상이, 곧 교회가 종말을 향해 점점, 더욱 아주 심하게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청지기가 외적인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이 세상 청지기는 대개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할뿐, 주인 입장에서 정성껏 일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쌓아 두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거나, 사용하기는 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이 청지기에게 더 이상 청지기의 직무를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에서 내쫓거나 직분을 빼앗으시지는 않으시는데요, 그러면 이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신 건 무슨 뜻일까요? 외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내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나마 있던 외적인 신앙마저 없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처음 신앙을 가질 때는 외적인 신앙으로 시작합니다. 외적인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믿음에 따라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도 나오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지만, 정작 삶에 있어서는 교리대로 살지는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외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외적인 신앙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점진적으로 내적인 신앙, 즉 삶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로만 주님을 믿고, 실제 삶은 그 반대가 될 수 있으며, 그 정도가 심해지면 나중에는 신앙의 진리마저 부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존재했던 많은 교회들의 타락상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외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중에는 주님을 부인하고 진리도 부인하는 상태에 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청지기가 직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지요. 3절에서는 주님에 대한 믿음마저 잃어버린 신앙인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직분을 빼앗기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외적 신앙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회개하지 않았던, 내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종국에 가서는 그 신앙, 그 믿음마저 잃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마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의 순수함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내가 하나님도 잘 믿고, 이웃을 섬기려는 마음도 있었지 하는 감상에 빠지거나, 지금 모습을 생각하며 부끄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있어 순수했던 때로 돌아가려 해도 뜻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땅을 파는 것은 샘(fountain)을 얻기 위한 노력을 뜻하고, 샘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진리를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는 것은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적 신앙 안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믿음에 반하는 삶을 살았다가는 어느 순간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때부터는 말씀을 읽어도 더 이상 진리를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빌어먹자니 부끄럽다 했습니다. 이 비는 것(begging)은 주님 앞에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어먹자니 부끄럽다고 하는 것은 주님 앞에 겸손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청지기가 마침내 무서운 결심을 합니다. 5절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주님 앞에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신, 말씀의 선과 진리를 선한 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빚진 자가 주인에게 기름 백 말을 빚졌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선한 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하고, 백 말의 백(100)이란 수는 완전한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청지기는 증서에 오십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오십(50)은 보통 작은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백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증서에다 오십이라 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채무가 모두 변제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믿음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외적 교회들이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7절에 청지기가 밀 백 석 빚진 사람에게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 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밀은 기름과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하고, 팔십(80)은 완전히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의미로 일곱째 날(7일), 즉 안식일은 거듭난 상태를 의미하고, 그다음 날인 여덟째 날(8일)은 천국에서 새로운 시작, 즉 구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밀 백 석을 빚진 사람에게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체어리티의 삶으로 갚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청지기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했다고 합니다. 교회들이 교인들을 그렇게 잘못 가르칠 때 주님께서 과연 칭찬하실까요? 주님은 그런 교회나 사람들을 칭찬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칭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의 교활하고 영악함에 감탄하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세대의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교활한 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교묘한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뒤집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해 빛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해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시대든 빛의 아들보다는 감각적이고 추론, 논리, 말재주에 능한 사람, 교활한 사람들이 권세도 얻고, 부도 얻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7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정한 청지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부정한 청지기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지는 않는 교회와 그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이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믿음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롯의 아내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면 나중에는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사람이 되고, 종래에는 겉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속으로는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랬고, 오늘날 주류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 재물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인간의 지식을 더 믿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외적으로만 경건하고, 내적으로는 공허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청지기입니다. 주님께서 부정한 청지기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그들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청지기는 자신이 영적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는 줄 알면서도 주님 앞에 겸손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왜곡, 다른 사람의 구원마저 가로막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621번 글 6번 항에는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날 때부터 갖고 있던 유전 악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게 됩니다. 회개는 사람이 악을 행하고자 마음먹는 걸 그만두는 것, 그건 하나님께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자신을 살펴 자신의 죄를 보고 주님 앞에 고백, 도와주시기를 구하며, 악을 삼가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할수록, 그리고 주님을 믿을수록 그의 죄는 용서되지요. (참된 기독교 621:6) [6] The angels said further, “Man must repent of his sins in order to be saved, and unless he repents he remains in the sins into which he was born; and repentance consists in man’s ceasing to will evils because they are contrary to God, searching himself once or twice a year, seeing his evils, confessing them before the Lord, praying for help, refraining from evils, and beginning a new life; and so far as he does this, and believes in the Lord, his sins are forgiven.” (TCR.621:6)

 

주님께 도움을 구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했고, 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매일 살피시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 모든 종류의 악에서 벗어나시기를, 물러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29, 30)

 

아멘

 

 

원본

2021-05-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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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D1)-주일예배(2525, 눅15,22-32),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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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22-32)

 

 

결혼 그 자체는 그 이상 거룩한 것이 없을 정도로 거룩하다. 그것으로 인해 인류가 생성되고 인류로 인해 천국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천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은 천국으로 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간음은 그 이상 불경한 것이 없을 만큼 불경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는 천국과 교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9961:4) ...marriages are so holy that there is nothing more holy, and this also for the reason that they are the seminaries of the human race, and the human race is the seminary of the heavens, for thither come the men who in the world have lived an angelic life. And on the other hand adulteries are so profane that there is nothing more profane, because they are destructive of heaven... (AC.9961:4)

 

 

오늘 본문은 2주 전 다룬,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그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본문인데, 본문이 길어 전, 후반 둘로 나눈 것으로, 오늘은 그 후반 본문입니다. 먼저 22절, 23절은 멀리 떠났다 돌아온 아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들은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고, 떠나 제 마음대로 살다 돌아와 이제는 속 사람과 결합하기를 원하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소를 잡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많이 보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좋은 옷은 진리를 뜻하고, 살진 송아지는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단절되었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시 통할 때, 주님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때 그 지식들이 살아나 진리로 변합니다. 그러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는 것은 지식들 안으로 선이 흘러 들어가는 것이고,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그때 그 지식들이 진리로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 우리는 보통 내 안에 지식이 많으면, 그러면 언제든 내가 맘만 먹으면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경험에 의하면, 지식과 실제로 그 지식을 가지고 선한 삶을 사는 건 별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가락지를 끼워주신다고 했는데, 가락지는 보통 결혼식에서 배우자들이 서로 나눠 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락지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을 의미하고, 또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겉 사람에게 힘이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 가락지로 표상되는 겉 사람의 힘이란 어떤 것입니까? 어떤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이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 결합할 때, 겉 사람은 그런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끼워주시는 가락지, 반지입니다.

 

말씀에는 또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겼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발이나 신은 겉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처음 만나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신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깨끗하게 된 겉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겉 사람을 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발을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로 돌아와 순종할 때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절에서 아버지가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겉 사람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속 사람과 결합할 때, 죽었던 겉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주님은 어떤 식으로 겉 사람을 살리실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시고, 그때 겉 사람 안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면서 능력이 생기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때 밭에 있던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모습을 25절에서는,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여기서 맏아들과 작은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의 교회를 형성하는 두 마음,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 밭에 있다는 것은 속 사람이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밭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집에서 노랫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노래와 춤은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그 선과 진리에서 비롯한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릴 때, 악기를 연주하고 찬송을 하는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을 때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춤추는 것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맏아들이 화를 냅니다. 그것에 대해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이 말하기를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속 사람은 그동안 주님의 명령에 따라 겉 사람에게 진리와 선을 충실하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겉 사람은 말을 듣지 않고 세상을 좇다가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그에게 선과 진리를 아낌없이 주십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한 이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고 성을 내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모두 더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간음은 선과 진리를 악과 거짓과 뒤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렇게 표현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속 사람은 이렇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맏아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聖) 문서에서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 즉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오픈하신 모든 계시를 특별히 구분하여 ‘(聖) 문서’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요,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면 외부의 교회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이는 목회자입니다. 선과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겉 사람은 성도들입니다. 외부의 교회 중에는 가정도 있습니다. 고대 교회 때는 각 가정에서 가장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가장입니다. 그리고 겉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입니다. 교회의 목회자나 가정에서 가장들이나 세상 즐거움을 느낄 겨를없이 성도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계속해서 맡은 일을 하지요. 그런데 때로는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잘한 것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분들도 계시지요. 서운한 일이 있다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 때 목회자나 가장은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하느라고 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아버지께 성을 내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이 설교 원본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지난 2021년 5월 16일 주일 설교인데요, 이런 설명, 이런 풀이 앞에 저는 참 마음 깊이 탄복합니다. 주님의 성품 안에서 주님의 지혜를 온전히 의뢰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적 의미로 목회자는 사랑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모든 문제를 사랑, 또는 선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데요, 그러나 본문에서 맏아들의 모습은 사랑이나 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본문 26절에 보면,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맏아들이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종에게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종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종에게 물어봤다는 것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선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상황을 선으로 이해하면 어떤 경우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로 이해할 때는 화도 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 이와 관련, 마태복음 산상수훈 말씀이 생각납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38-44)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본문은 참으로 능력의 말씀,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의 능력이 느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부족함을 느끼는 건 다름 아닌 선악 분별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선, 곧 주님의 뜻인지를 잘 모르겠는 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 요즘 가장 저를 괴롭히는 한 가지는 바로, 저를 이단으로 단정, 일체 어떤 권면도 거절하는 사람을 저는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시도 때도 없이 진리, 즉 옳고 그름의 잣대가 떠올라 저를 분노하게 하는데요, 바로 오늘 본문의 맏아들 모습이 딱 제 모습입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은 정말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해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라며 서운함을 내비쳤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마9:13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눅15:4절 이하에서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은 선한 사람보다 죄인들을 더 챙기신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특별히 누구를 더 챙기거나 덜 챙기시지 않습니다. 병든 자들에게 주님의 손길이 더 필요한 것 뿐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만큼은 영적인 병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돌아온 탕자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기실 때, 질투하거나 시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매일 같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그런데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하는 나는 왜 거듭나지를 못하나 하는 마음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웃이 거듭나고 성장할 때, 우리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탕자가 치유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참으로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참으로 주님이 제 안에 와 계시기를,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선한 능력으로 제가 즐겁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비록 제가 무례히 여김을 당하며, 모욕을 당해도 프란치스코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4:2)

 

아멘

 

 

원본

2021-05-1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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