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 곧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  (16:21-24)

 

 

21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출16:21-24) And they gathered it morning by morning, everyone according to the mouth of his eating; and the sun grew hot and it melted. And it was that on the sixth day they gathered bread double, two omers for each one; and all the princes of the assemblage came and told Moses. And he said unto them, This is what Jehovah spake, A rest, a sabbath holy to Jehovah, is the morrow; what ye will bake, bake ye; and what ye will boil, boil ye; and all that is left over, this lay ye by for you to keep until the morning. And they laid it by till the morning, as Moses commanded, and it did not stink, and the worm was not in it. (Exod. 16:21-24)

 

※ 지난주부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1장이 아닌 16장부터 갑자기 시작하는 이유는 그 앞부분 원본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이 부분은 훗날 제 역량이 준비가 되고, 주님의 허락 있으시면 그때 마저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출애굽기 16장을 1절부터 지난주 본문까지 다시 읽겠습니다. //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20)

 

※ 이스라엘의 어느 한국인 선교사는 한국에서 오시는 성지순례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광야 체험 코스를 반드시 권하신다고 합니다. 자동차로 한 바퀴 휙 둘러보고 갈 요량으로 가이드를 부탁하시는 분들에겐 절대 사양하신다고 하네요. 이스라엘은 광야의 백성이기 때문에 광야를 자동차 타고 대충 둘러보는 걸로는 참된 순례의 정신을 놓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직접 두 발로 하루를 걸어보아야, 예를 들면, 오늘 이 출애굽기 16장 같은 본문, 그러니까 왜 이들이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는지 하는 그 정황이 생생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 선교사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러나 다음 말씀들을 보면 실제로 주님은 자기 백성을 한낮 광야 그 타는 열기에서는 구름 기둥으로, 한밤 광야 그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에서는 불 기둥으로 돌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13:21-22)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 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민14:14)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느9:19)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처럼 자기 자녀를 훈련을 빙자, 혹독하게 인도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지요. 인생들이 겪는 혹독함은 불의의 사고 등을 제외하면 거의 본인들이 자초하는 것이며, 그 불의의 사고라는 것조차도 다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우주에서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범사 주님을 의뢰하는 자녀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돌봄과 보살핌의 약속을 하시는 분입니다. //

 

만나는 주님이 당신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내려 주시는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고 새 교회에서는 가르칩니다.

 

※ ‘선한 진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 안에 선이 들어있다는 의미라면 말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알고 있었던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말씀을 통해서나 또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배운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우리가 머리로 기억하는 지식일 뿐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전에 알았던 진리가 단순히 지식에 그쳤다면 이 진리의 선, 곧 선한 진리는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지식적인 선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선은 아무나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선을 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알고 있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삶으로 옮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잘 안될 때는 주님을 향한 간절히 매달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긴 시련과 아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만나라고 하는 진리의 선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이 있는 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는 순간부터 비로소 삶이 조금씩 변합니다. 그전에는 잘 변하지가 않아요. 진리 속에 들어있는 선의 능력이 우리를 그렇게 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를 받아먹으면 이전에 즐기던 악한 것, 거짓된 습관들을 더 이상 즐거워하지 않게 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주님보다 나를 더 믿었다면 이제는 나보다는 주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만나를 받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들입니다.

 

21절입니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여기서 ‘아침마다’의 속뜻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일단 진리의 선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는 각자의 그릇에 따라 선을 받는다는 뜻인데요, 그러니까 각 사람의 역량, 곧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바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 즉시 생활로 옮기는 사람의 역량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선을 많이 주세요. 흘러들어오는 선을 방해할 무슨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선을 받아서 그것을 생활로 옮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

 

※ 사실은 안 주시는 게 아니라 본인이 못 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한테는 하늘을 향한 창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을 자꾸 더럽히는 것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 본인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각자의 분량이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삶으로 살아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 능력에 따라 만나를 받는 분량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다음은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의 속뜻입니다. 말씀에서 햇볕은 보통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반대니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concupiscence)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은 우리 마음에 세상적 욕망이 뜨겁게 일어날 때, 즉 자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뜨거울 때, 그때는 주님으로부터 선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 일단 선의 물꼬가 터지면 그때부터는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는데, 그러나 그 선의 유입이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많이, 어떨 때는 잠시 중단될 때도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 때에는 선이 많이 흘러들어오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욕망이 많을 때에는 선의 흐름이 중단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의 목적에 충실할 때, 즉 나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 일을 내게 주신 주님의 목적 자체에만 충실할 때, 그때는 주님으로부터 선이 활발하게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일을 하면서 자기를 내세우려 하거나, 그 일의 결과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 할 때는 선이 흘러들어오다가 딱 멈춥니다.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선의 흐름을 그때그때 조절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그것을 기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우리의 인생은 천국을 향한 준비 과정이며, 그래서 현재 거듭남의 풀코스를 밟고 있는 우리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역시 날마다 주시는 주님의 만나를 소홀히 여기는데요,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4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10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민11:4-6, 10)

 

그들은 만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릴 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며, 그리고 만나 속에는 온갖 순진함과 평화, 안전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갓난아이와 어린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며 돌보듯 주님에게 만나는 그런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니 우리도 주님보다는 자기를 더 사랑하며, 천국보다는 세상 것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런 걸 몰랐습니다. 하늘의 것에 대한 소중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21:5)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하찮게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선이나 진리는 청정한 공기와 물, 그리고 화창한 봄날의 햇볕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많을 때는 그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만, 그러나 잠시 마음을 비우고 그것을 바라볼 때, 아니면 가끔 도시를 떠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물을 대할 때 우리는 그것이 생명같이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선이나 진리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자의 내면 상태를 보시고, 그것에 따라 선의 흐름을 조절하십니다.

 

22절입니다.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여섯째 날’은 영적인 어떤 상태의 마지막 단계를 뜻합니다. 그다음 날이 하나의 상태를 마무리하는 날, 즉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나는 동안 수많은 영적 상태를 거칩니다. 그리고 하나의 상태 안에서도 여러 단계를 넘어가야 합니다. 마치 일주일에 일곱 날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첫째 날이 지나면 둘째 날이, 둘째 날이 지나면 셋째 날이, 그렇게 해서 여섯째 날이 지나야 하나의 상태가 마무리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수많은 진리와 선의 구슬들을 꿰어 하나의 큰 목걸이를 만드십니다. 그것이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그 여섯째 날인 마지막 단계에 주님은 평소보다 만나를 두 배로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겉뜻으로는 다음 날은 쉬는 날이니까 두 배로 거두라는 뜻이지만 속뜻은 다릅니다. 둘이라는 숫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요, ‘’이란 숫자의 속뜻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두 배를 거두라는 말씀은 그동안 주님이 주셨던 선과 진리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계속 먹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선을 가지고 계속해서 영적 싸움, 영적 전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선과 반대되는 악이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만나를 매일 먹는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이 선을 가지고 영적 싸움을 하는 것이구요, 또 삶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전, 그러니까 만나를 받기 전에는, 영적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선의 능력에 힘입어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이깁니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확실히 결합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싸움에서 이긴다고는 하는데, 때로는 완전히 이기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냐 하면 악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때, 그때에는 완전히 이기는 게 아닙니다. 또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진리에 입각해서 선을 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생각대로 선을 행할 때인데요, 주님의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따라 선을 행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사기 백성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 같지만 실제로는 선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많은 상태에서는 아직 선과 진리가 결합되었다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이제까지의 내적 싸움과 수고를 묶어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주시려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그것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을 거둔지라’의 속뜻, 곧 선과 진리의 결합을 준비하라, 안식일을 준비하라시는 뜻입니다.

 

각 사람이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인데요, 여기서 ‘오멜’은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충분한 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능력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두 오멜씩 거두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능력을 내가 너희에게 줄 터이니 그것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혼신의 힘을 다하는 데도 마지막 단계를 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죠. 세상일도 그렇고, 영적인 일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한고비만 넘기면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까지 잘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지금까지 잘했으니 이제 한고비만 넘기자’, 그리고 ‘내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 그러니 그것을 받아 유종의 미를 거두어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 앞에 두 오멜 씩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마지막 단계를 넘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23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안식일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가장 높은 의미는, 주님 안에 신적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을 의미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것은 원인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안에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신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이 그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도, 거듭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모든 능력이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지옥과의 싸움을 온전히 이기지 못하시고, 그래서 주님의 인성 안에 여전히 육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 즉 유전악에 속한 것이 남아있었다면 주님이 과연 완전하신, 온전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주님에게서는 아무런 능력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지옥과 싸워 온전히 이기심으로 불완전한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오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이 정말 정말 중요하였고, 그렇게 해서 주님의 인성은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거룩한 인간이시며, 거룩한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이란 의미는 주님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이구요,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 되는 걸 의미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걸 위해 세상에 오셔서 지옥과 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구요,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스스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위한 씨앗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그 씨앗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과 진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영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곧 영적 싸움이 이제 더 이상 없으니 ‘휴일’이라 하시고, 선과 진리가 결합했기 때문에 ‘거룩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를 말하구요, 우리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것,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상태가 거룩한 것입니다.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의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울 것을 굽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합니다. ‘’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은 진리이며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안식일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진리와 선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위해 이 두 가지를 준비하라 하십니다. 그냥 신앙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함께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냥 신앙만으로는, 즉 ‘오직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바탕에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선 없는 진리는 너무나 무섭고 살벌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와 선을 하나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의 속뜻입니다. ‘나머지’라는 것은 우리가 안식일을 위해 준비해 온 모든 선과 진리인데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선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즐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부터 내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라는 게 아니고, 그러면서도 사실은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다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즐기라는 것입니다. 마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선을 행할 때, 항상 ‘이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냥 하는 거야. 주님의 명령이니까...’ 하면서 한다면 선을 행하면서도 우리는 조금도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할 때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의 자아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늘 나쁘게 말하지만, 그러나 자아가 있어야 살아있는 사람이며, 자아가 없으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자아의 기쁨을 존중하세요. 그래서 주님은 선과 진리를 행하면서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기쁘고 즐겁게 여기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내가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그것으로부터 기쁨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의 기쁨은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자아, 잘난체하고 나만 잘되려는 자아에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구요, 거듭남에 따라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천국적 자아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자아를 그냥 계속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거듭남을 위한 수고와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떠날 때까지 타고난 이기적 자아를 가지고 살겠지요. 그러나 거듭나기 위해 싸우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우리 신앙인들은 거듭남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를 받습니다. 그 천국적 자아를 통해 우리는 마치 자기가 선을 행하는 것 같은 기분과 그것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24절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있습니다. 왜 거역했을까요?

 

※ 아마도 ‘내일 염려’(care for the morrow) 때문이겠죠.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내일 또 주신다시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덜 먹고 아침까지 남깁니다. 오늘 다 먹었다가 혹시 내일 안 주시면 어떻게 하지? 하는 염려 말입니다. 다음은 천국 천사들의, 이 ‘내일 염려’에 대한 글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HH.278:2)

 

욕심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7, 18절에,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랬더니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구요, 악취가 풍겼습니다.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만나를 남겨두는 행위는 주님의 뜻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대로 선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선이 아닙니다. 그러니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길 수밖에 없겠죠. ‘악취’라는 것은 그 행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악한 의도입니다. 여기서 악한 의도란 자기만 생각하는 것, 이기적인 의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마치 선을 행하는 것 같이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를 생각하는 것, 즉 자기를 높이려 한다거나 자기를 선하게 포장하려 하는 그런 의도가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악취입니다. 그런데 악취가 나는 곳에는 보통은 또 벌레도 생기는데요, 그래서 ‘벌레’는 악한 의도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사람들은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다릅니다. 주님은 5절에,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말씀하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안식일을 위해 갑절의 만나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행위는 순수한 선이며 진리입니다. 그래서 벌레가 생기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영적 만나를 받기 시작할 때, 우리의 신앙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만나는 진리이기도 하고, 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나 속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넘어서지 못했던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들을 만나를 통해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우리가 만나를 받기 시작할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밋밋하게 느끼고요, 여전히 세상에서 오는 자극적인 즐거움들을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속 자아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구요, 그래서 자아로부터 수시로 욕망이 올라온다는 증거입니다. 그 욕망 가운데는 흔히 생각하는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욕망도 있겠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욕망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할 때, 그로 인해 일어나는 욕망이 사실은 그렇게 다양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의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욕망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욕망 가운데 있고,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흐름이 중단될 때, 그때 우리는 행복할까요? 욕망을 따라 사니까 행복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공기가 부족하거나 물이 없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불안하고 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며, 무언지 모르는 불편함이 있구요, 그리고 실질적인 고통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선하고 진실한 것들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매일같이 영적으로 끌어올리며,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에게 살아가는 동력을 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 주님은 다시 우리에게 영적 아침을 열어주시고, 만나를 우리 마음의 지면 위로 하얗게 내려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만나가 주는 평화와 순수함을 느낄 수 있고, 또 무언가 모르는 안정감과 은근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이 당신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선과 진리를 우리 속에서 하나로 만들라는 뜻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 새 교회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선과 진리가 우리 의지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늘 진리에 입각해서, 즉 주님 주신 진리에 기초해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선과 연관된 진리가 결합하는 일이 거듭나는 동안에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주님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하나 되기를 바라세요. 그래서 주님은 오늘 23절에,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뜻이구요,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처럼 소유하기를 원하시고, 또 그것을 우리가 즐기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그런 마음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늘 새겨야 할 줄로 압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56:6-7)

 

아멘

 

 

※ 설교가 길다고 다들 시험 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점일획도 모두 주님의 말씀입니다.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꼭 원고를 함께 제공하는데요, 그 이유는 첫째, 설교 중 제가 무슨 사사로운 말을 할까 봐서이고, 둘째, 설교 중 다들 메시지보다는 메신저, 곧 설교자를 주목할까 봐서입니다. 

 

 

 

원본

2016-05-15(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18(D1)-주일예배(2598, 출16,21-24),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 곧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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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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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그리고 함께 주신 두 계명 (16:15-20)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5-20) And the sons of Israel saw, and they said a man to his brother, What is this [Man hoc]? for they knew not what it was. And Moses said unto them, This is the bread which Jehovah hath given you to eat. This is the word that Jehovah hath commanded, Gather ye of it everyone according to the mouth of his eating, an omer a head, according to the number of your souls, take ye everyone for him who is in his tent. And the sons of Israel did so, and they gathered, collecting for the numerous and the few. And they measured it with the omer, and it made nothing over for the numerous; and for the few there was no lack; they gathered everyone according to his eating. And Moses said unto them, Let no one make a residue of it till the morning. And they heard not unto Moses; and men made a residue of it until the morning, and it bred worms and stank, and Moses was angry with them (Exod. 16:15-20).

 

 

오늘 본문을 좀 더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출16 1절로 14절까지를 먼저 좀 보겠습니다.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16:1-14)

 

만나’(히브리어: מָן, 그리스어: μάννα)는 15절의 ‘이것이 무엇이냐’를 히브리어로 말한 것입니다. 아침에 처음 보는 그걸 보고 이게 뭐지? 서로 묻던 그 의문문이 그대로 ‘만나’라는 이름이 된 것이지요.

 

만나는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을 뜻합니다. 그것을 진리의 선이라 하는 것은, 바로 영적 교회의 사람들에게 내려 주신 선(善)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진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라는 의미라면 말입니다. 영적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영적 교회에는 처음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 이 교회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4장 아벨과 가인에까지 이릅니다. 여기서 아벨은 체어리티(charity)를, 가인은 신앙(faith)을 말합니다. 원래 주님은 이 둘이 하나로 결합하기를 원하셨지만, 가인이라는 사람들, 즉 신앙, 신앙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했는데, 이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절)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이런 가인을 어떻게 해버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주님은 인류 역사가 결국 가인 쪽으로 흐를 것을 아시고,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십니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4, 15절)

 

그러니까 주님은 이런 가인들일지라도 그 쥐고 있는 신앙, 즉 진리를 통해 결국은 다시 체어리티를 회복, 체어리티와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되게 하시려는 장구한 계획, 그것이 곧 인류의 역사가 되는 그런 계획을 섭리하신 것입니다. //

 

그래서 주님은 먼저 진리를 주시고, 그다음 그 진리를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게끔 하십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가지고 선을 행하도록 만드시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하실까요? 진리를 모르면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 뭐가 참이고 뭐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그때 주님은 선이나 선한 애정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만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리의 선입니다. 진리면 진리고 선이면 선이지, 왜 진리의 선이라고 하냐면 이 선은 진리를 통해 얻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겉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그 속을 보면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선이 담긴 진리인 것이지요. 진리로 말미암는 선이라고도 해도 됩니다. 선은 능력입니다. 선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 이 선이 없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진리, 앉은뱅이 신앙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거듭나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진리의 선을 받는 것이구요, 그러므로 그것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선, 곧 선한 진리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때 일어나는 삶의 변화는 어떤 것입니까?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악과 거짓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대부분 나는 항상 경우가 밝다, 나는 항상 옳다, 나는 참 합리적이다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실상은 정반대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이제 진리의 선, 선한 진리라는 빛이 비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어두워서 안 보이던 것들, 내 안의 모든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깜깜한 데서 밤을 보내며, 아, 참 좋다, 여기는 무슨 호텔 같아 했는데 정작 아침 동이 틀 때 보니 자기가 쓰레기 더미들 가운데 있었던 걸 알게 되는, 그런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변화는, 그런 악하고 거짓된 것을 몰아내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동안은 악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걸 끊는 게 어려웠는데, 이제는 그걸 끊어낼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의 선은 설교나 말씀을 통해 배우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의 선, 선한 진리 안에는 주님이 계세요. 그래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끊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쉬워집니다. 세 번째 일어나는 변화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한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 우리는 어땠습니까? 무슨 선한 일을 하든 반드시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니라 뭘 얻어내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아무 대가 없이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이전에는 몰랐던 행복입니다. 놀라운 변화 아닙니까? 이러한 모든 일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라는, 즉 진리의 선, 선한 진리를 받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변화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이지? 했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과 그것에 수반되는 은근한, 은은한 기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세상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만 익숙해 있고,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살면서 빠르고 자극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체로 시골의 단순하고 느리게 사는 삶의 기쁨, 소확행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 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만나를 내려 주시면서 두 가지 지킬 것을 명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 앞에 한 오멜 씩 거두라’입니다.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말씀은 각자의 분량에 맞게 선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오멜(omer) 씩 거두라는 말씀은, 오멜은 곡식 같은 걸 측정하는 단위인데, 성경에는 오멜이란 것도 있고, 에바라는 것도 있습니다. 오멜은 에바의 십 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오멜은 속뜻으로는 충분한 것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 ‘’(10)이란 수는 충분하다는 속뜻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배수나 분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에바의 십 분의 일인 한 오멜 역시 충분하다(enough for)라는 속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에 한 오멜 씩 거두라는 말씀은 주님은 각자의 능력에 맞게 선을 주시되 충분한 양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 그러니까 저마다 가진 잔의 크기는 다르지만, 그 모든 잔을 주님은 넘치게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 사람에게 해당하는 분량은 어떤 식으로 정해질까요? 그것은 개개인이 행하는 선의 질과 양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선을 행하더라도 얼마만큼 진리를 따라 행하는가에 따라서 선의 질이 달라집니다. 또 선과 결합한 진리가 얼마나 내적인 진리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리에도 외적인 진리가 있고, 내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내적인 진리는 주님과 보다 가까운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 가운데 있는 진리가 보다 내적인 진리일수록 선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따라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을 선의 분량을 정해주십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천국의 어떤 사실들입니다.

 

한 천국 안의 천사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지 않고, 그들의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선의 차이에 따라 크고 작은 공동체로 나뉘어 있다. 같은 선을 지닌 천사들이 한 공동체를 이룬다. 천국의 선은 무한히 다양하며, 각 천사마다 선이 다르다.주44 (HH.41)

 

주44. 무한한 다양성이 존재하며, 그 어떤 것도 결코 다른 것과 똑같지 않다 (AC. 7236, 9002). 천국에는 그래서 무한한 다양성이 존재한다 (AC. 684, 690, 3744, 5598, 7236). 천국의 무한한 다양성은 선의 다양성이다 (AC. 3744, 4005, 7236, 7833, 7836, 9002). 이들 다양성은 다양한 진리를 통해 존재하며, 각 천사의 선은 이들로부터 나온다 (AC. 3470, 3804, 4149, 6917, 7236). 천국의 모든 공동체와 어느 한 공동체 내 모든 천사가 서로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AC. 690, 3241, 3519, 3804, 3986, 4067, 4149, 4263, 7236, 7833, 783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된다 (AC. 457, 3986).

 

천국의 천사 공동체들은 그 선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 만큼 서로 떨어져 있다. 영계에서 거리는 오직 사람의 내면 상태의 차이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사랑의 상태가 다르면 거리가 생긴다. 많이 다른 사람들은 멀리, 약간 다르면 조금 떨어져 있다. 유사성이 그들을 함께 있게 하는 것이다.주45 (HH.42)

 

주45. 천국 모든 공동체는 그들 생명의 상태 차이,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차이에 따라 어떤 일정한 위치가 정해진다 (AC. 1274, 3638, 3639). 저세상, 곧 영들의 세계에 있는, 거리, 상황, 장소 및 시공간에 관한 놀라운 것들 (AC. 1273–1277)

 

한 공동체 내 천사들은 모두 서로 간에 위와 같은 방식으로 배열되는데, 보다 완전한 천사들, 즉 선에 있어 뛰어난, 그래서 사랑, 지혜, 지성에 있어 뛰어난 천사들은 가운데 중앙으로, 덜한 천사들은 그 완전함이 덜한 정도에 따라 주변으로 빙 둘러 퍼지게 된다. 이 배열은 마치 중앙의 빛이 주변으로 퍼져 감소하는 것과 같으며, 중앙에 있는 천사들은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주변으로 퍼져 있는 천사들은 점점 더 희미한 빛에 있는 것과 같다. (HH.43) //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두 번째 명령은,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입니다. 여기서 자기 장막에 있는 자는 자기 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선의 공동체(society)를 뜻합니다. ‘선의 공동체’란 무엇일까요? 선의 공동체는 천국에서는 천사들의 사회가 선의 공동체이구요, 지상에서는 교회가 선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연대가 바로 선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자기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만나를 거두라는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쓰지 말고, 교회를 위하여 쓰라는 말씀입니다. 선하고 진실한 모든 사람과 서로 나누라는 것이죠.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나의 선이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고, 또 모든 사람의 선이 끊임없이 내게로 흘러오는 그런 관계 속에서 주님의 교회는 점점 천국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걸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글입니다.

 

앞의 두 가름에서, 천국 전체가 한 사람의 모습이고, 각 공동체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밝혔다. 각 천사도 이와 똑같다는 것은 거기 설명한 원리에 따른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천국이 가장 큰 형태의 사람이고,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사람이듯이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사람인 것이다. 천국 형태처럼 지극히 완벽한 형태는 전체와 부분이 서로 같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천국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곳이라는 데 있다. 천국의 모든 것은 모든 구성원에게 나누어지며, 각 구성원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그 나누어짐에 의해 받기 때문이다. 앞의 해당 가름에서 말했듯이, 천사는 그처럼 받아들이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가장 작은 형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도 그가 천국을 받아들이는 한, 그릇이며 천국이고 천사이다. (HH.73) //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말씀은 각자의 분량대로, 각자의 그릇대로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중심에 계시는 분들은 선을 많이 받을 것이고, 반면에 변두리에 계신 분들은 선을 조금밖에 받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이분들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천국과 연결된 분들이시라면, 아래 천사들처럼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HH.278)

 

여기 ‘필요한 만큼’이란 주님이 맡기신 어떤 쓰임새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마다 가진 잔의 크기는 달라도 그 모든 잔을 주님은 넘치게 채우시기 때문에, 저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는 데가 천국입니다. //

 

그러면 누가 교회 중심에 계시고, 누가 변두리에 계실까요?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만큼 우리는 교회의 중심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발언권이 세고 영향력이 있다고 해서 꼭 교회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은,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구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선을 쌓아 두려는 마음입니다. 만약 주님이 주시는 대로 받고,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것을 모두 이웃과 나누려고 한다면, 우리는 아마 매일 매일을 만족하면서 살 것입니다. 내일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아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들이 자기 본성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만큼 주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신다. (HH.278) //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같이 내일 일을 걱정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이 뜻대로 되고,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봅니다. 반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지나치게 절망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도 오만하지 않구요, 비천한 자리에 내려와 앉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매일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라 말씀하신 데에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더러는 순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내일 먹을 게 걱정되어 다 안 먹고 남겨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려는 것이구요, 주님의 것을 자기 창고에 쌓아 두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진리를 실천하고 선을 행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선 안에, 즉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났다고 말합니다. 벌레는 주님의 선이 아닌 인간의 선 안에 들어있는 거짓입니다. 그리고 악취가 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행하는 선은 결국 불결한 선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천국 선이 아니라 지옥 선으로 바뀐다는 뜻이지요. 그것이 악취가 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분명히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아침까지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리에 등을 돌린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잘못하더라도 성을 내시거나 보복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며,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깐 진리에 등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진리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들의 그런 모습을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로 표현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주님이 선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같이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에게 만나를 줄 터이니 이 두 가지는 꼭 지키라 하십니다. 그 하나는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자기 분량 이상으로 거두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선은 겉으로 보기에만 선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악하고 거짓된 것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6장 29절에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옷을 짓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인들의 노력과 지혜가 들어갔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들에 핀 백합 한 송이만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엇을 섞지 말고 주님 주시는 선 그대로를 가지고 행하라 하시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다른 하나는, 자기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라고 하시는데요,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선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쌓아 두지 말고 이웃과 교회를 위해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들을 자기 곳간에 쌓아 두는 일은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이 땅을, 이 교회를 주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분량에 맞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받을 상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 마태복음 6장 28절로 34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6:28-34)

 

아멘

 

원본

2016-04-1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11(D1)-주일예배(2597, 출16,15-20), ‘만나’, 그리고 함께 주신 두 계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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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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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공경하라’의 속뜻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20:12)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upon the land which Jehovah thy God giveth thee. (Exod. 20:12)

 

 

앞에서 말씀드린 십계명의 네 가지 계명에 이어서 나머지 계명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십계명의 각 계명은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적으로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아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는, 그렇게 되면 속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천국의 흐름이 막히고, 지옥의 흐름이 열리게 되며, 그렇게 해서 지옥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한마디로 자아를 사랑하지 말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 이 설교는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및 서울 새 교회 시절 설교하신 ‘출애굽기 속뜻 강해’ 중 한 편입니다. 원래는 13절, 14절까지 포함된 본문이지만, 5월이 가정의 달이며, 어버이날, 어린이날이 있는 달이어서 12절만 따로 다루겠습니다.

 

※ 다음은 십계명 관련, 먼저 좀 알고 있어야 할 내용입니다.

 

...부모 공경에 관한 계명이 그러한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겉 글자의 뜻하고는 너무 거리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십계명(the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은 세상과 천국, 양쪽 사람들의 삶을 다스리는 계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겉 글자, 즉 겉뜻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그리고 영적, 즉 속뜻으로는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계명이라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겉과 속, 즉 세상 살 동안 천국에도 속한 사람들을 위한, 그러니까 교리적 진리를 따라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십계명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말씀에 나오는 모든 것의 속뜻으로부터,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도, 그리고 또 천사들, 아니 온 천국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로부터도 아주 명백한데요, 이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는 천국을 경유, 관통, 사람한테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시내 산에서 이 십계명을 말씀하신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천국의 비밀 8899) ...That such things are signified by the commandment about honoring parents, may seem strange, because they are remot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be it known that the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 are rules of life both for those who are in the world and for those who are in heaven—the sense of the letter or the external sense being for those who are in the world, and the spiritual or internal sense for those who are in heaven—and consequently both senses, external as well as internal, are for those who while they are in the world are also in heaven, that is, for 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ife according to the truths of doctrine. That the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 are also for those who are in heaven, is plain from the internal sense of all things in the Word, and clearly from the fact that the things which Jehovah God (that is, the Lord) Himself speaks, are not only for men, or for the world; but are also for angels, nay, for the whole heaven, because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Lord flows through heaven and passes through down unto man. This is the case with these ten commandments, which the Lord Himself spoke from Mount Sinai. (AC.8899) //

 

※ 주님이 우리에게 한 부모 밑에 태어나게 하시고, 부모와 자녀, 즉 가족이라는 혈연으로 묶어주시는 이유를 살피기 위해, 이 지상 혈연관계가 사후 천국에까지 이어지는 여부에 대해서 본 설교 후반에 따로 조금 다루겠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천국을 염두에 둔 올바른 자녀 사랑, 그리고 부모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 스베덴보리는 히브리 및 슈미트(Schmidt)의 라틴 성경(1696) 넘버링을 따르고 있으며, 그래서 이 계명을 네 번째 계명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관련 내용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계명은 순서상 네 번째이며, 거룩함에 있어 이어지는 계명들을 능가합니다. 여호와, 즉 주님을 경배함에 관한 계명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인데, 이는 주님은 가장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안식일(the Sabbath)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의 신성 자체와 신적 인성 간 연합(the union of the Divine Itself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으로 부모 공경의 계명이 이어집니다. 이 계명은 주님을 사랑함과 그에 따른,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를 사랑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 8899:2) ...therefore this commandment is the fourth in order, and surpasses in holiness those which follow. The commandment concerning the worship of Jehovah, that is, the Lord, is first and second, because the most holy one. Next comes the commandment concerning the Sabbath, because by this in the supreme sense is signified the union of the Divine Itself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 After this follows the commandment concerning honoring parents, because by this is signified the love of the Lord and the consequent love of good and truth which are from the Lord. (AC.8899:2)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부모는 육신의 부모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건 겉뜻이고요, 속뜻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내적 의미가 이렇게 다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자연적인 것들은 천국에 있는 것들과 내적으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기 때문입니다.

 

※ 즉 그래서 말씀 또한 모두 상응으로만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라고 하면 세상에서는 육신의 부모라고 생각하지만, 천국의 천사들은 선과 진리로 이해합니다. 즉 아버지는 선을 뜻하고, 어머니는 진리를 뜻하지요. 선과 진리를 부모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은 선과 진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부모는 선과 진리이며, 궁극적으로는 선과 진리 그 자체인 주님이십니다. 세상 부모는 세상에 있는 동안만 우리를 돌보는 부모이지만, 주님은 영원한 부모이십니다.

 

※ 그러니까 세상 부모는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효가 고스란히 주님을 향한 효가 되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말입니다. 한 가지,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따르고 의뢰할 때까지만 세상 부모는 부모이고, 더 이상 의뢰하지 않고, 제 뜻대로 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하늘의 하나님이 그의 부모가 된다고 합니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지난날 제가 써놓은 글입니다.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 후에는 그는 전처럼 아버지(father)를 아버지로 인정하면 안 되는데, 그 이유, 즉 왜 아버지는 자녀가 자랄 동안만 아버지인가 하는 이유는, 그때는 그가 주님을 대신하기 때문이며, 그때는 아직 자녀가 어려 아버지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 제법 스스로 생각할 줄도 알고, 스스로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때는 이미 주님이 그의 아버지(Father)이심이 틀림없는데요, 이 아버지 노릇을 그동안은 육신의 아버지가 해왔었죠... (천국의 비밀 6492) ...after a son becomes his own master he ought not to acknowledge his father as father, as before; for the reason why the father is to be acknowledged during the bringing up of the son, is that the father is then in the Lord’s stead, nor does a son know at that time what he ought to do except by the direction of his father. But when a son becomes his own master, and competent to think for himself, and seems to himself to be able to direct himself from himself, then the Lord must be his Father, whose vice regent his natural father had been... (AC.6492)

 

이 글은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중, 입류(influx)와 사람의 영과 육 사이 교류를 다룬, ‘About Influx and The Intercourse of The Soul and The Body’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인데, 어느 날 꿈에 자기에게 나타나신 아버지와 나눈 대화의 주 내용입니다.

 

사람이 장성하면 더 이상 육신의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며, 그때는 주님이 그의 아버지시라는 이 글을 읽고 했던 몇 가지 생각을 적어봅니다.

 

이 글에 의하면, 그 이유는 먼저, 육의 아버지는 우리의 어린 시절, 어디까지나 주님의 대역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때 아버지 노릇을 하는 우리 육의 아버지들은 끊임없이 실제 아버지이신 하늘의 주님께 안테나를 세우고, 그 주파수를 고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당연한 귀결, 곧 그때 주님으로부터 나와 내게 흘러들어오는 입류를 통해, 내게 맡기신 이 아이를 내 뜻, 내 생각, 또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서는 안 되고, 늘 주님 뜻대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장성한 자녀도 이제는 하늘의 주님께 직접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상의 혈연, 그리고 서류상, 행정적으로는 여전히 부모-자식 간이지만, 그러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의 실제 아버지는 주님이심을 시인, 아버지를 사랑하는 가운데 끝없이 아버지께 여쭙고, 아버지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위 원본 내용 중, ‘세상의 부모는 세상에 있는 동안만 우리를 돌보는 부모’라는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아니면 물질적 이득을 보기 위해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아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보통 행하지는 않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원하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이성 가운데 있던 선과 진리가 의지 가운데 심어지고, 그렇게 해서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의도하고 행하느냐가 바로 그 사람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여호와가 주신 땅이란 주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하늘의 천국과 땅에 있는 교회가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면 그곳에서 생명이 길다고 하십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폐의 호흡이나, 심장의 박동을 생명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육체의 생명이지 영원한 생명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사람의 의지, 또는 의지 속에 있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생명의 질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의지와 사랑입니다. 그렇게 볼 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사후에 천국에서도 그 사랑이 영원히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며,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많은 세상 사람처럼 세속적 성공이나,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교회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복을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영원한 복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우리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는 머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직 의지에 심어지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한 번 두 번 진리를 행할 때, 그것은 의지에 심어지고 생명이 됩니다. 진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생명이 되는데 그것은 사후에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생명이 될 때의 기쁨은 세상 어느 것에서 얻는 기쁨보다 비교할 수 없는 내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은 그 기쁨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이 세상에 내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살 때에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사후에는 천국에서 그 사랑이 영원히 커진다는 뜻입니다.

 

※ 다음은 시작 때 말씀드린, ‘이 지상 혈연관계가 사후 천국에까지 이어지는 여부’ 관련, 전에 제가 정리해 둔 글입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53장, ‘사람의 사후 셋째 상태’ 512번 글입니다.

 

죽은 후의 사람, 즉 영의 셋째 상태는 교육받는 단계다. 이 상태는 천국에 들어가 천사가 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지옥에 갈 사람들에게는 이 단계가 없다.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둘째 상태는 셋째 상태를 겸한 것이며, 그들이 자기 자신의 사랑, 즉 그 사랑이 있는 지옥 사회로 완전히 돌아서면 완료된다. 이렇게 완료되면, 그들은 그 사랑으로 의도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옥적이므로, 그들은 오직 악한 것만 의도하고, 그릇된 것만 생각한다. 그런 생각과 의도를 그들은 즐긴다. 그것이 그들의 사랑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이전에 자기의 사랑을 위해 수단으로 이용했던 모든 선하고 참된 것을 거부한다. The third state of man after death, that is, of his spirit, is a state of instruction. This state is for those who enter heaven and become angels. It is not for those who enter hell, because such are incapable of being taught, and therefore their second state is also their third, ending in this, that they are wholly turned to their own love, thus to that infernal society which is in a like love. When this has been done they will and think from that love; and as that love is infernal they will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think nothing but what is false; and in such thinking and willing they find their delights, because these belong to their love;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y reject everything good and true which they had previously adopted as serviceable to their love as means.

 

선한 영들은 이와 반대로 둘째 상태에서 셋째 상태로 인도된다. 이 상태는 교육을 통해 천국에 갈 준비가 이루어지는 상태다. 선과 진리를 알아야만, 즉 가르침을 통해서만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될 수 있다.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영적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그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세상에서 무엇이 올바름과 정직함인지, 즉 무엇이 사회적, 도덕적 선과 진리인지 배울 수 있다. 세상에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가르치는 사회적 법이 있고, 또 대인관계에서 도덕적 법에 따라 사는 것을 배울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정직하고 올바른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선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세상에서 나오지 않고 천국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도출된 교회의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람 마음에 속한 내면이 천국에 있지 않으면, 영적 선과 진리는 사람의 삶 속으로 유입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신성을 인정하고, 말씀에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올바르고 정직하게 행할 때, 그 마음이 천국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나 세상을 목적으로 해서가 아니라 신성을 위해서 올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Good spirits, on the other hand, are led from the second state into the third, which is the state of their preparation for heaven by means of instruction. For one can be prepared for heaven only by means of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that is, only by means of instruction, since one can know what spiritual good and truth are, and what evil and falsity are, which are their opposites, only by being taught. One can learn in the world what civil and moral good and truth are, which are called justice and honesty, because there are civil laws in the world that teach what is just, and there is association with others whereby man learns to live in accordance with moral laws, all of which have relation to what is honest and right. But spiritual good and truth are learned from heaven, not from the world. They can be learned from the Word and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that is drawn from the Word; and yet unless man in respect to his interiors which belong to his mind is in heaven, spiritual good and truth cannot flow into his life; and man is in heaven when he both acknowledges the Divine and acts justly and honestly for the reason that he ought so to act because it is commanded in the Word. This is living justly and honestly for the sake of the Divine, and not for the sake of self and the world, as ends.

 

그러나 아무도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그렇게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사후 생활이 있다는 것,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 말씀은 신성하기 때문에 말씀 안의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는 것 등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을 알고 인정하지 못하면, 사람은 영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영적인 생각이 전혀 없다면, 영적인 것을 의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의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위와 같은 것을 의도할 때, 천국이, 즉 천국을 거쳐서 주께서 그의 삶 속에 들어오신다. 주께서는 사람의 의지 속으로 들어오시고, 의지를 통해서 생각 속으로 들어오시며, 그 둘을 통해 삶 속으로 들어오신다. 사람의 삶 전체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영적 선과 진리는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천국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며,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서만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But no one can so act until he has been taught, for example, that there is a God, that there is a heaven and a hell, that there is a life after death, that God ought to be loved supremely, and the neighbor as oneself, and that what is taught in the Word ought to be believed because the Word is Divine. Without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these things man is unable to think spiritually; and if he has no thought about them he does not will them; for what a man does not know he cannot think, and what he does not think he cannot will. So it is when man wills these things that heaven flows into his life, that is, the Lord through heaven, for the Lord flows into the will and through the will into the thought, and through both into the life, and the whole life of man is from these. All this makes clear that spiritual good and truth are learned not from the world but from heaven, and that one can be prepared for heaven only by means of instruction.

 

나아가서 주님은 사람의 삶 속으로 유입하시는 정도만큼 그를 가르치신다. 그 정도만큼 주님은 사람의 의지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랑으로 불붙이시고, 진리를 앎에 따라 그의 사고를 밝히 깨우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만큼 사람의 내면은 열리고, 천국이 그 안에 심어진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신성하고 천국적인 것이 사람의 도덕적 삶에 속하는 정직한 행위와, 사회적 삶에 속하는 올바른 행위 안으로 유입되어 그것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그때 사람은 그런 행위를 신으로 말미암아, 즉 신성을 목적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도덕적, 사회적 삶에서 그런 목적으로 행하는 정직하고 올바른 행위는 영적 삶의 필수적인 결과이며, 결과의 모든 요소는 그 결과를 낸 원인에서 파생된 것이다. 원인의 성격이 결과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Moreover, so far as the Lord flows into the life of anyone he instructs him, for so far he kindles the will with the love of knowing truths and enlightens the thought to know them; and so far as this is done the interiors of man are opened and heaven is implanted in them; and furthermore, what is Divine and heavenly flows into the honest things pertaining to moral life and into the just things pertaining to civil life in man, and makes them spiritual, since man then does these things from the Divine, which is doing them for the sake of the Divine. For the things honest and just pertaining to moral and civil life which a man does from that source are the essential effects of spiritual life; and the effect derives its all from the effecting cause, since such as the cause is such is the effect. (천국과 지옥 512, 김은경 역)

 

좀 길었지요? 네, 좀 길었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내용이라, 가령, 주님은 어떤 조건과 상황 가운데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지, 우리의 내면은 어떻게 열리는 건지, 우리의 지상 생활이 어떻게 해서 영적으로 변화되는지 등등...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번역도 참 깔끔하게 잘 되었고요. 주님의 빛을 구하시며, 충분히 ‘정독’하시면, 점차 밝아지며, 환하게 이해되실 줄 믿습니다.

 

이 외에도 이 교육장의 전체 구조 및 교육생들의 구성, 그리고 생전에 비기독교인이었던 영들의 경우, 이곳에서 어떻게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지 등은, 그리고 교육이 다 끝나면, 주님이 직접 한 사람 한 사람, 앞으로 그가 영원히 있게 될 해당 공동체로 인도하시는 등등은, 글이 너무 길어져 나중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중에 사후 다 알게 될 사항들을 굳이 이렇게 미리 다루는 이유는, 이런 내용은 닥쳐서 깨닫기에는, 그리고 겪어서 알기에는 너무 늦어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 혈연과 혈육으로 지내게 하신 그 참뜻을 몰라 이 관계가 천년만년 갈 줄 알고, 내 핏줄, 내 혈육, 우리 집과 가문 등에 올인하는 삶을 사는 것은, 내면, 곧 속 사람의 형성에 올인해도 모자랄 시간을 외면, 곧 겉 사람의 삶으로 죄다 낭비를 하는 것과도 같아 사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참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이란 실상은 그의 애정, 곧 그의 중심 사랑(ruling love, 그 사람의 모든 언행을 지배하는 사랑)이 사람의 모양을 띤 것이며, 이것은 오직 삶을 통해서만 형성됩니다. 삶의 대부분을 겉과 속이 다르게 살아놓고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그런 건 없습니다. 구원,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공정하지 않은 무슨 허락이나 자비, 은혜를 받아 들어가는 게 아닌, 오직 이런 만인 앞에 공정하고도 공의로운 방법과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섯 번째인,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인데요, 이 내용은 위 책, 40장, ‘천국 안의 결혼’ 383번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윗글에 대한 저의 결론입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곧 선이 비슷한, 거의 같은 사람들끼리는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물론, 한 공동체 내에서도 모든 구성원의 선이 다 다르며, 그것은 중심에서 동심원 퍼져나가듯 그렇게 다릅니다. 즉 중심에는 그 공동체의 가장 뚜렷한 선을 가진 사람이, 바깥으로 갈수록 좀 덜한 사람이 배열됩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을 정도로만 다릅니다. 마치 아들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이 반영된 것처럼 말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는 비록 처음 보는 초면일지라도 마치 오랜 고향 사람 만나듯 친숙하고 반갑습니다. 그러나 천국일지라도 공동체가 다르면, 즉 선이 다르면 마치 외국인을 만난 듯 그저 대면대면합니다.

 

네, 이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상의 혈육 관계는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전혀 새로운 존재로 새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의 남편 혹은 아내를 천국에서도 계속 부부로 만나 지내고 싶으면, 그리고 지금의 자녀들과 또 그리 하고 싶으면, 방법은 하나, 서로 선이 같으면 됩니다. 즉 그 중심 사랑이 같으면, 참된 결혼 생활을 하면 됩니다. 아내가 원하는 걸 남편도 원하고, 남편이 말하는 걸 아내는 따르고... 하여 둘이 한 몸 되면 됩니다!

 

끝으로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입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속 사람, 곧 내면을 준비하게 하시려고’입니다.

 

땅 위 혈연관계는 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모종밭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인류로 채워지며 구성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천사들은 땅 위 혈연관계, 그중에서도 특히, 결혼을 가장 신성시합니다. 천국 자체가 ‘결혼’입니다. 천국 결혼과 지상 결혼의 차이는 천국 결혼은 그 결과 선과 진리가 생겨나지만, 지상 결혼은 그 결과, 아들, 딸들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손주, 우리의 자녀들을 보며, ‘이 아이의 선과 진리는 어떤 면에서 나랑 살짝 다를까?’, 영적 시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땅 위 혈연관계를 통해 부지런히 우리는 자신의 속 사람, 영의 내면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녀, 부모, 손주 등 혈육, 핏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육의 눈으로 이들을 볼 때, 영의 눈이 함께 켜져서 주님의 모습 또한 겹쳐 보여야 하겠습니다. 자녀를 볼 땐, 부부,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새로운 선과 진리가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뵐 땐, 자신의 뿌리이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역시 볼 수 있어야 하겠고 말입니다.

 

이래야 우리의 지상 혈육, 핏줄 사랑이 주께 복을 받으며, 안전할 것입니다. 이걸 놓치면, 우리는 그저 겉 사람의 일로, 육체의 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동안 십계명의 의미를 배우면서 겉뜻과 속뜻의 의미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셨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십계명은 자연적 법이면서 영적인 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법이면서 천국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뜻과 속뜻이 모두 중요합니다.

 

※ 즉 겉뜻도 지키지 않으면서, 속뜻, 속뜻 하는 것은 마치 기초 없이 집을 짓겠다 하는 것과 같고, 반대로 속뜻을 모르면서 겉뜻, 겉뜻 하는 것은 기초는 있는데 정작 집이 올라가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속뜻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겉뜻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내면에서 천국적 결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에 있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십계명의 속뜻뿐 아니라 겉뜻까지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할 수 없고, 또한 순결한 결혼 생활을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외적인 뜻은 이렇게 내적인 뜻과 서로 통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이러한 것을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들의 상응(相應)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것들을 잘 이해하셔서 모든 교우께서는 십계명의 내적, 외적 은혜 가운데 충만한 삶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15)

 

아멘

 

원본

2017-05-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04(D1)-주일예배(2596,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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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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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목차 (Contents)

 

Contents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니다; 본문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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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성(理性, the rational)이 거듭나야 하는 이유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And he said, Returning I will return unto thee about this time of life; and behold Sarah thy wife shall have a son. And Sarah heard at the door of the tent, and it was behind him. (창18:10)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것들은 인간의 진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겉 사람 안의 기억 지식과 소통하며,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자신보다 높은 것을 바라보면 그만큼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2196:2, 이순철 역) Human rational truth does not apprehend Divine things, because these are above the sphere of its understanding, for this truth communicates with the memory–knowledges which are in the natural man, and in so far as it looks from these at the things which are above itself, so far it does not acknowledge them. (AC.2196:2)

 

※ 위는 오늘 본문 중 ‘그 뒤’(And it was behind him)에 관한 풀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돈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돈이나 지위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모든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된 미래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돈이나 지위 같은 것으로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된 미래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당장의 상황 수습, 그리고 당면한 필요들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여러모로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거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궁핍했던 196, 70년대보다 더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됐을지 모르지만, 빈부의 격차나 계층 간의 차별로 인한 억압과 불화는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21년 10월 설교이지만 2025년 4월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 아래는 소유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천사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제가 참 좋아하는 글입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김은경 역) They live contented with their own, whether it is little or much, because they know that they receive just as much as is good for them— those receiving little for whom a little is useful, and those receiving much for whom much is useful; also they do not themselves know what is good for them, the Lord alone knowing this, who looks in all things that he provides to what is eternal. (HH,278)

 

이는 ‘천국과 지옥’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The State of Innocence of the Angels of Heaven, 276-283)에 나오는 글입니다. //

 

※ 그리고 다음은 같은 책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 357-365)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이 장을 통해 저는 많은 편견을 교정할 수 있었습니다. 내용이 좀 길지만 숙려 끝에 그대로 싣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부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들어가고 부자는 못 들어간다고 하고, 또 일부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들어간다고 하고, 일부는 부자는 그들의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해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주장이 전부 말씀을 근거로 한 신념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데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말씀은 그 속뜻으로 보면 영적이고, 글자의 뜻으로는 자연적이다. 따라서 말씀을 영적 뜻으로 보지 않고, 오직 그 글자의 뜻으로만 이해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오류가 생긴다. 예를 들어,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가 특히 그렇다.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처럼 어렵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쉽게 간다고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는 말씀에 아래의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그러나 말씀의 영적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은 가난하건 부자이건 간에 신앙과 사랑의 생활을 한 모든 사람을 위한 곳임을 안다. 그렇다면 말씀에 나오는 부자와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를 이제 설명하겠다. 천사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그들과 함께 지낸 결과,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과 똑같이 쉽게 천국에 간다는 것이며, 사람은 재산 때문에 천국에 못 가거나 가난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천국에 가고, 부자들 중 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보다 더 큰 영광과 행복을 누린다. (HH.357)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사람은 술책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를 얻고 쌓아도 되며, 너무 빠져들지 않는 한 고급 음식을 즐겨도 되고, 조건에 따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조건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오락을 즐기고 세상사를 얘기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사람처럼 슬프고 애통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활기에 넘칠 수 있다. 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세상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살아도, 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가지며, 이웃에게 신실하고 공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떠한가는 그의 애정과 생각이 어떠한가, 즉 그의 사랑과 신앙이 어떠한가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외적 행동은 그 두 가지 것에서 생명을 얻는 까닭이다. 사람은 의지로 말미암아 행동하고, 사고로 말미암아 말하므로 행동은 곧 의지이고, 말은 곧 생각이다. 따라서 말씀에 사람은 그의 행위대로 심판받고, 일한 대로 상을 받는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그의 행위의 근원인, 즉 행위 안에 들어 있는 생각과 애정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뜻이다. 행위는 생각과 애정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그 두 가지에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233 따라서 어떤 결과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외면이 아니라 오직 그 외면의 근원인 내면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사람이 정직하게 행하고 남을 속이지 않는 이유가 단지 법이 두렵고 평판을 잃을까 봐, 그래서 명예와 이득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라면, 그 두려움에 의해 제지당하지 않는다면 기회 있을 때마다 남을 속일 것이다. 비록 그의 행동이 겉으로는 정직해 보이더라도 그의 사고와 의지는 속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정직하지 않고 속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 안에는 지옥이 있다. 반면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남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은 기회가 주어져도 남을 속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생각과 의지는 그의 양심이며, 그 사람 안에는 천국이 있다. 이 두 사람의 행위는 외적 형태는 같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주233. 사람은 그의 행위와 한 일에 따라 심판받고 상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말씀에 자주 나온다 (AC.3934). ‘행위와 일’이라 하면, 그 내적 형태의 행위와 일을 의미하지, 외적 형태의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악인에 의한 외적 형태의 선한 일도 겉보기에는 똑같기 때문인데, 내적, 외적 형태가 같은 행위와 일은 오직 선인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AC.3934, 6073). 모든 활동처럼 일도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존재와 결과, 그리고 퀄러티를 가지는데, 이는 사람의 사고와 의지에 관한 것이다. 일은 이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면이 어떠하면, 그 일도 그러하다 (AC.3934, 8911, 10331). 즉, 그 내면은 사랑과 신앙에 관한, 그런 것이다 (AC.3934, 6073, 10331, 10332). 그렇게 일에는 사랑과 신앙이 들어있으며, 실제로도 일이라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다 (AC.10331). 그러므로 행위와 한 일에 따라 심판하고 상을 준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에 따라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AC.3147, 3934, 6073, 8911, 10331, 10332). 일이라는 것이 자신과 세상을 주목하는 한, 그 일은 선하지 않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주목하는 한, 그 일은 선하다 (AC.3147). (HH.358)

 

사람이 신을 인정하고, 이웃을 선의로 대하기만 한다면, 겉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되고,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형편과 역할에 따라 풍성한 식탁과 우아한 집과 좋은 옷을 갖추고 살 수도 있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려도 되며, 직무와 사업을 위해, 그리고 정신생활과 육신 생활을 위해 세상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낳는다. 즉 천국에 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그 두 사랑이 지배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두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234 다음의 주의 말씀은 이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 30)

 

주의 멍에는 쉽고 주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에 저항하는 정도만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주234. 모든 악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다 (AC.1307, 1308, 1321, 1594, 1691, 3413, 7255, 7376, 7488, 7490, 8318, 9335, 9348, 10038, 10742). 모든 악이란 다른 사람을 향한 경멸, 원한, 증오, 복수, 잔인, 속임이다 (AC.6667, 7370–7374, 9348, 10038, 10742). 그런 사랑들 가운데 인간은 태어나며, 그래서 인간의 유전한 악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AC.694, 4317, 5660). (HH.359) //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전자의 사람을 자연적인 사람(the natural)이라 하고, 후자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the spiritual)이라 합니다. 자연적인 사람들에게 있어 지식을 배우는 목적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좋은 학교에 진학, 출세하고 돈 많이 벌기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 그렇다고 영적인 사람은 돈, 명예, 좋은 학교 진학, 출세 및 부자가 되는 걸 죄악시 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앞 인용글들에서도 읽으셨겠지만, 단지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지상에서 주님의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이런 것들이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닌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고, 반대로 그저 목적이기만 한 사람들이 자연적인 사람들입니다. 참고로, 천국의 부(富)는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부자는 주님의 진리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 주로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지식, 즉 세상 지식에 대한 애정을 말씀에서는 이스마엘을 낳은 애굽 여인 하갈로 표현합니다.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 애굽은 세상 지식을 뜻하고, 여자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 여인 하갈은 세상 지식에 대한 애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갈에게서 태어나는 이스마엘은 누굴까요?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 창세기 본문에서는 주님의 첫 번째 합리적 능력(The Lord’s first rational)을 말합니다.

 

합리적 능력이란 지식이나 진리를 바탕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 말이 좀 어려우시면 추론하는 능력이나 이성(理性)으로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이스마엘로 표현되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the first rational)이 열릴 때, 사람들은 그동안 세상 지식을 가지고 물질만을 좇았던 자신을 반성하고, 비로소 영적인 걸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결코 간단치 않은 시간입니다. 많은 역경과 좌절이 있고, 그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은 이번에는 본처 사라로부터 두 번째 아들 이삭을 얻습니다.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생기는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을 뜻합니다.

 

※ 역시 창세기 본문에서는 주님의 두 번째 합리적 능력, 곧 주님의 신성한 합리적 능력(the Lord’s Divine rational)을 말합니다.

 

사라는 지식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애정(affection)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삭이라는 합리적 능력이 어떤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는데요, 즉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인 이스마엘이 인간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라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인 이삭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 거룩한 합리적 능력인 것입니다. 바로 그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진리인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arcana)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후자는 너무 높고 깊어 전자로는 쳐다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그 태생적 인성(human)을 신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주님에 관한 모든 것, 곧 모든 신령한 진리, 천국에 속한 진리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신 후, 부단한 영적 전투를 통해 마침내 십자가에서 이기심으로써 영광의 몸, 곧 신성으로 갈아입으셔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이삭을 얻은 후에 아브라함은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냅니다.

 

8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창21:8-14)

 

문자적으로만 보면, 참 냉정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의 영적 의미는, 거듭나는 동안 첫 번째 합리적 능력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을 그대로 두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대적하거나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누구나 때가 되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을 버려야 합니다.

 

※ 즉, 세상 지식과 세상 경험을 가지고 주님의 일, 주님의 신비를 살피려는 태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말씀하신,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비유인데요, 대부분의 신학교 교수, 그리고 유튜브에 나와 대담하는 많은 신학자 류(類)의 경우, 일단 해당 주제에 관한 많은 견해, 입장들을 좍 나열한 후, 끝에 자기 생각을 보탭니다. 연역이든 귀납이든 뭐, 하나의 방법론이니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다는 ‘자, 나는 이렇게 이 주제에 대한 열린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저는 극단적이지 않습니다’라는 사실에 더 초점을 맞춘듯하다는, 그러니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공감을 더 많이 끌어낼 수 있을까에만 초점을 맞추는듯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제게 나타나신 신은 이런 신이셨습니다’하는 신학자는 거의 보질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생기기 직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바로 앞 절인 9절 말씀,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창18:9)

 

에 의하면, 여기서 말을 하는 사람들, 즉 ‘그들’은 한 분 주님을 이루는 세 가지 본질을 나타내는데요, 이를 최대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이 세 본질은, 사실은 신성 자체(Divine itself)이시며, 신적 인성(Divine Human)이시고, 신성의 활동(Holy proceeding)이신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성 자체라는 말은 존재 자체이시며, 동시에 사랑과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를 뜻합니다. 그리고 신적 인성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적 인성이신 예수는 본질적으로는 존재 자체이신 신성의 드러나심이며, 동시에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진리이신 분입니다. 신성의 활동은 신적 인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신성의 능력, 즉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을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를 통해 발현되는 선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의 능력이 곧 성령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19-22)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그들’은 사실은 셋이 아닌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세상에 오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로 돌아오겠다는 말씀은 주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신성과 예수 그리스도이신 인성이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이루시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사람이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인간들이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고, 그래야 신적 진리들을 이해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이 되시는 과정은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 복음서에 보면, ‘주님이 시험받으시는 장면은 몇 없는데 왜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라 하는가?’ 하실 텐데요, 사실은 주님의 어린 시절 및 청소년, 청년기 모든 과정이 창세기 12장 이하에 속뜻으로 다 기술되어 있어 그러는 것이고요, 그 시험이 혹독하다고 하는 건, 사람이 받는 시험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기껏해야 자기 사랑, 혹은 가족을 포함한 주위 몇 사람이 전부이지만, 주님은 인류 전체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지옥도 우리한테는 몇 명의 악령이면 충분하지만, 주님께는 지옥 전체가 달려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시험을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이길 때마다 주님의 겉 사람인 인성은 속 사람인 신성과 하나가 되어 갔습니다.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주님의 겉 사람을 이루는 모든 생각과 의지들이 신성한 진리와 선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몸 안에 신성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그 자체가 신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그래서 주님의 영화는 인간의 거듭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을 닮는 것이지만, 주님의 영화는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은 주님의 영화의 과정에서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곧 열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때는 주님에게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이 열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은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잔재가 섞인 순수하지 않은 인간적 합리적 능력입니다. 반면, 이제 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열린다는 건 신성에서 비롯한 순수하고 거룩한 합리적 능력이 열리는 걸 의미합니다. 그 거룩한 합리적 능력이 열릴 때, 그것을 통해 주님의 인성은 빠르게 신성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여 주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영적 지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아직은 신성과 결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거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말씀에는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라고 합니다.

 

사라는 주님의 합리적 사람 안에 있는 진리, 즉 합리적 진리(rational truth)를 뜻합니다. 그리고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은 주님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합리적 진리와 결합한 합리적 선(rational good)을 뜻합니다.

 

※ 여기 이런 표현들, 즉 ‘주님의 합리적 사람 안에 있는 진리, 즉 합리적 진리’ 같은... 이런 표현들이 좀 어려우시지요? 네, 저도 이런 게 많이 마음에 걸립니다. 거의 다들 이런 설교는 어렵고 지루하실 것 같아서지요. 이 말씀의 속뜻을 풀어드리는 설교는 참 귀하고 좋은데, 딱 한 가지, 우리한테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준비하는 저도 결코 쉽지가 않아요. 아마 제 역량의 한계이지 싶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이나 강문호 목사님 같은 이름난 설교가들이시라면 아마 이런 설교도 참 재미나게 잘 전하실 것 같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창12 이후 등장인물들은 주님을 표상합니다. 다들 자기 인생을 살다 갔지만, 사실은 자기도 모르게 주님 역할을 하다 간 것이지요. 그중엔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어요. 그리고 많은 전쟁도 있지요. 이런 것이 모두 주님과 주님의 내면에서 있었던 영적 전투를 표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인성(human)을 입고 태어나신 주님은 여전히 그 속 사람은 신성(Divine), 즉 금수저 중에서도 금수저이셨으면서도 결코 쉬운 길을 안 가시고, 대신 철저히, 아주 철저히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영적 전투를 다 치루신 후,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날레인 십자가에서도 완벽하게 이기신 것이고요. 인간으로서 치룰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남김없이 통과하셨으므로, 그때 주님은 그 인성을 벗고 신성으로 옷 입으셨으며, 그 몸 또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께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우리는 오직 영으로만 부활합니다. 바울의 서신서 중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요.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7)

 

이런 구절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몸의 부활을 믿고 사모하는데요, 그러나 사실은 몸의 부활은 주님한테서 한번 일어나는 걸로 끝입니다. 만일 우리한테도 주님처럼 저런 몸의 부활이 일어나면 오히려 큰일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임종 후 사흘이 지나 영계에서 눈을 뜨는데요, 그게 곧 우리의 부활이며, 그때 우리한테는 영의 몸이 주어져 눈뜰 때 이미 자신이 영체를 입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오직 영, 곧 속 사람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지상 물질은 일체 반입 금지이며,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우리 몸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들은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주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 안에 속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속뜻 없는 글들까지 성경에 포함시킨 건, 오늘의 성경 66권이 있기까지 구약은 구약대로, 그리고 신약 역시 역사적으로 수차례 있었던 카톨릭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인데, 그때 참여한 추기경들이 아직 말씀의 속뜻에 대해 그 내면이 열리지 않았고, 단지 자기들이 정한 몇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여부만 살폈기 때문입니다. 속뜻이 있는 성경은 천사들이 읽을 수 있지만, 없는 성경은 천사들은 읽을 수 없습니다. 겉뜻만 있기 때문이지요. 신구약 66권 중 구약은 29권, 신약은 5권에만 속뜻이 있으며, 그러므로 이들만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그냥 바울의 사견일 뿐입니다.

 

천국을 다녀왔다는 많은 사람이 유튜브나 인터넷에 있는데 특이한 건, 그들이 진술하는 천국이 조금씩 다 달라요. 이상하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천국의 그 모든 외관은 보는 자의 역량에 맞추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한테는 사람의 부활에 대해 평소 저런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혹시 바울이 저 진술을 영적 체험을 하고 나서 한 거라면 틀림없습니다. 바울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천국도 자기가 보고픈 대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정말 천국을 있는 그대로 보기 원한다면, 그리고 알기 원한다면 어린아이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걸 허락하시거든요. 스베덴보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어떤 걸 인용하는 건 안전하지 않은 일입니다. 될 수 있으면 피하시길 권하며, 꼭 인용하셔야 한다면, 신약에서는 복음서들과 계시록에서만, 구약에서는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에서만 하시기를 권합니다. 아래 내용은 바울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기록입니다. 참고하세요.

 

...복음을 전하기 전에 그가 올무에 빠져있던 자아애가 그 후에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대부분의 시기도 그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아애와 자기의 기질에 휘둘려, 격동의 장(場)에 있기를 원하였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고, 이스라엘 족을 심판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그는 모든 것을 했다. 그가 그 후에도 그러한 상태에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많은 경험으로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이보다 더 많이 그와 대화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그러한 자였기 때문에, 그곳 다른 사도들은 그를 벗 삼으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일원으로도 여기지 않고 있다... 그가 신약성서의 서간을 쓴 것은 그의 내면도 그와 같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건치 못한 자도 좋은 설교를 하고, 서간을 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해진 것처럼, 말하고 쓰는 것과 그 사람이 어떠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게다가 그는 그의 서간 중에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으며, 주님의 비유의 말씀 중 한 가지도 인용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그는 주님의 생애나 그 말씀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바울의 사도서간이 속뜻이 없다는 것은 영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속뜻이 담긴 주님의 말씀에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교회 안에 허락되어 있다. 만약 사람이 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거룩한 말씀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바울의 편지가 허락되어 있으나, 바울 자신에게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이나 주님께서 가르치신 교리 중 하나라도 그것을 들어 설명하거나 밝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취했다. 교회는 분명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고는 있으나 바울의 서간을 수단으로 함으로 교회 도처에서 사랑의 선을 떠난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인애의 선이 모든 것이 되도록 하는 길로만 가르치셨다...  //

 

사람의 마음을 이루는 생각(understanding)과 의지(will)는 본질적으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good)과 진리(truth)이거나 지옥에서 오는 악(evil)과 거짓(falsity)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등차(degree)가 다른 수많은 선과 진리들이 있습니다. 속 사람(internal man)의 선과 진리가 있고, 겉 사람(external man)의 선과 진리가 있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합리적 사람(rational man)을 이루는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그 합리적 선과 합리적 진리가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로 표상되는 선과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곧 아브라함 뒤에서 들었다고 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 뒤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합리적 진리가 합리적 선과 아직 결합하지 못하고 분리된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이처럼 주님의 겉 사람 안에서 합리적 진리가 온전한 상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렇게 해서 거룩함이 떨어지는 이유는,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human rational)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 2196:2항은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 신성한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것들은 인간의 진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겉 사람 안의 기억의 지식과 소통하며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자신보다 높이 있는 것을 바라보면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같은 글 4항 이하에서는 인간적 합리적 능력이 신성한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몇 가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겉으로 나타나는 외관(appearance)만 보고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람에게서는 어떤 선도 나오지 않고 악만 나올 뿐이다.

 

둘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사람이 선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구원받을 공로를 얻는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람에게는 구원에 관한 어떤 공로(merit)도 없고 오직 주님에게만 공로가 있다.

 

셋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고, 모든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지만, 천국의 사랑 안에는 자아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없다.

 

주님의 안에도 아직 인성이셨을 때는 이스마엘로 표상되는 이런 순수하지 않은 진리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사라로 표상되는 합리적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이 자기보다 높은 차원의 합리적 능력을 방해하고 심지어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아래 말씀처럼 말입니다.

 

8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창21:8-10)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때가 되면 인간적인 합리적 능력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새롭게 입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억압과 불화 부조리가 있고, 그로 인한 고통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물질이나 인간의 지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구원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물질은 또 다른 억압을 낳고, 인간의 지식은 또 다른 굴레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젠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이나 인간의 지식이 삶의 목적이 될 때, 그것은 결국 불의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모든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며 습득한 모든 세상 지식과 경험 또한 그렇습니다. 그동안은 이것들이 우리의 주인이었다면, 이제는 새롭게 주님이 우리의 주인 되시고, 이것들은 주님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복되고 안전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아멘

 

원본

2021-10-0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4-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27(D1)-주일예배(2595, 창18,10), '우리의 이성(理性, the rational)이 거듭나야 하는 이유'.pdf
0.62MB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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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It is the same with all things that belong to man’s very life, as with those which relate to his understanding, and those which relate to his will.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출22:26,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의 풀이 중)

 

 

※ 이 원고 중 ‘’ 표시는 원고에 없는, 제가 더한 보충 설명입니다. 이 설명은 한 단락일 경우는 뒤에 아무 마감 표시가 없지만, 두 단락이 넘어가면 ‘//’로 마감합니다. 비록 원고일지라도 상당 부분 우리 교회 실정에 맞게 좀 다듬었습니다. 원고 사용에 관한 원 저자의 사전 허락을 받았습니다.

 

※ 오늘은 기독교의 부활절입니다. 주님 오신 성탄절, 그리고 가을 추수감사절과 함께 중요한 절기이지요. 그래서 ‘부활’에 관한 지난 설교 한 편을 다시 기억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9216번 글 2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최근 ‘유월절’에 관한 속뜻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들이 있는데 오늘 여기서 그걸 자세히 다룰 수는 없어 중요한 몇 문장에 대한 번역으로 대신합니다.

 

1.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에서만 거듭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고, 의지적인 면(the will part)에서는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적인 면에 주님은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 이 의지는 그들의 교회와 관련되는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따르는 의지다. (AC.6854)

 

※ 즉 영적인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들의 신앙과 그에 따른 교리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서 교리를 추출하고, 그걸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주님은 저들의 다양성을 인정, 거기에 맞춰 어떤 새로운 의지를 주신다는 겁니다.

 

2. 이들, 곧 이런 영적인 사람들은 오직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만 구원을 받았다. 그 이유는, 천국을 통과하는 신성(the Divine passing through heaven), 이 신성은 주님이 오시기 전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before the Lord’s coming)이었는데, 이 신성은 그들에게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 때문이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진리가 아니었고, 그 결과 그 의지에서 나오는 선은 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AC.6427)

 

3. 그들은 오직 주님이 오셔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전엔 천국에 올라갈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동안 ‘낮은 땅’(the lower earth)이라는 곳에 보내어져 돌봄 받고 있었다. 이곳은 말씀에서 ‘구덩이’(pits)라고 하는 곳이다. 이 땅은 거짓이 가득한 지옥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거짓으로 인해 그들은 심하게 감염되었지만,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보호하셨다.

 

4.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인성(the human)을 신성(Divine)으로 만드신 후, 이 ‘구덩이’에 있던 사람들을 구원, 천국으로 올려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영적 천국, 즉 이층천을 만드셨는데, 이것이 주님이 더 낮은 지역으로 내려오셔서 갇힌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출3:8)라는 말씀의 속뜻이다.

 

5.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은 그 신앙의 진리와 선에 있어 흐릿, 모호하다. (AC.2708, 2715, 2718, 2831, 2849, 2935, 2937, 3241, 3833, 6289)

 

6. 그들의 흐릿함, 모호함(obscurity)은 주님의 신적 인성에 의해 조명, 그러니까 밝혀진다. (AC.2716, 4402)

 

7. 그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에 있어 흐릿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지옥의 공격을 많이 받지만, 주님은 그들을 끊임없이 보호하신다. (AC.6419)

 

8. 영적인 사람들은 의지적인 면으로는 거듭날 수 없고, 단지 지적인 면으로만이지만, 주님에 의해 거기에 새 의지가 형성된다. (AC.863, 875, 895, 927, 928, 1023, 1043, 1044, 2256, 4328, 4493, 5113)

 

9. 영적인 사람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을 받았다. (AC.2833, 2834, 3969)

 

그러니까 영원하신 창조주 주님은 단지 이 세대뿐 아니라 홍수 이후 주님 오시기 전 인류의 구원에 대해서도 늘 마음을 기울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주(主, 메인)였고, 주님 후 세대인 우리는 그저 그 혜택을 받고 있었을 뿐이구나 싶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곧 주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주된 이유입니다.

 

내용이 좀 어리둥절하지요? 네, 저도 좀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아는 진리는 사실은 겨우 요만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담는 그릇인데, 지금은 이 그릇의 크기가 겨우 요 정도이기 때문이지요. 비유하자면, 발전, 송전, 배전으로 구성된 전기 이야기인데요, 역시 처음 댐이나 발전소에서 생성된 몇십만 볼트의 전기가 가정집에 맞는 볼트가 되기까지 낮추고 또 낮춰 220볼트가 되듯 주님도 그렇게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우리 역량에 맞춰 허락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기록된 성경만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겠다는,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태도는, 물론 중세 때 카톨릭의 극심한 타락으로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칼빈 등이 일어나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어서 그 배경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 또한 지나쳐 주님으로부터 오는 또 다른 형태의 계시는 모두 차단하는 우를 범하는, 그러니까 구더기 무섭다고 장 담그는 걸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영계, 즉 천국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인데요, 주님을 사랑하되 순진하게 그냥 뭘 몰라서였다면 몰라도 아니라면, 너무 이런 태도에 함몰되는 것은 그건 무슨 신념도 고백도 아닌, 그저 주님을 모독하는 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한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 여자들이 이렇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으로 찾아간 이유는, 주님 운명하신 첫날, 주님을 장사할 때, 바로 코앞이 안식일의 시작이라 부랴부랴 서두르느라 미처 주님 시신에 향품 바를 새도 없었기 때문이고, 또 관습적으로 장례 때 죽은 시신에 향품 바르는 일은 오직 여자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 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은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 없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진 걸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 그 상황을 4절로 6절에선 이렇게 전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여인들은 기뻐하는 대신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으로, 유아세례라는 것을 받은, 정말 이 나이 되도록 평생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인입니다만, 그러나 지난 2017년 여름, 처음으로 스베덴보리를 접하여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던 초창기 땐 정말이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 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신앙과 종교적 신념이 한꺼번에 떠나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고3 때 어머니를 갑자기 교통사고로 잃었던 트라우마를 훨씬 웃도는 일이었지요.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인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환한,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는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전에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그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눅18:31-34)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댑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지요.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여자들에게 일어난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저희 혈육들을 비롯, 주위 많은 지인이 영적 체험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록된 겉 글자 신앙에만 갇혀 있지 말고, 그 안에 꿈틀대는 영계를 살짝살짝,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좀 주님이 허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본인이 원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신령한 영적 체험은 두꺼운 껍질을 깨고, 저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지난날 제 안에 있는 악령을 어렴풋이나마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영안으로 보았겠지요. 정원 목사의 ‘대적기도’라는 책을 읽던 시절이었는데, 이 경험은 제가 신앙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러나 저런 체험보다는 이왕이면 천사를 만나는 그런 체험이면 더 좋겠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마음 상태가 천사가 찾아올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속뜻으로는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 장소와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 이것이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인데, 그 내면이 열려있던 태고교회가 바로 지상에서 이 방식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공부를 통해서, 학습해서 아는 게 아닌, 내가 묻거나 무슨 의문을 품을 때 내적으로 바로 답이 오는 그런 것입니다. 가령, 창세기에 나오는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8-9)

 

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딕테이트(dictate)를 나의 내면, 곧 내 영이 듣는, 가장 고급하고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비유하자면, 퍼셉션으로 아는 걸 햇빛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면, 이 세상 학습을 통해 아는 건 달빛으로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의 속뜻은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의 속뜻은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인 글자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자체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조물인 지옥은 감히 창조주이신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 제 설교가 점점 길어지지요? 저는 10년 전인 지난 2014년 5월, 경기도 고양시 헤븐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 정원 목사님 살아 계시던 시절이었지요. 목사님은 이듬해인 2015년 11월에 별세하셨습니다. 그때 주일예배가 몇 시간씩 계속되는 것에 질려, 그리고 다른 일정도 있어 할 수 없이 중간에 일어나야만 했던 경험이 있어요. 큰애와 우리 부부, 이렇게 함께 갔는데... 그 당시 제 영적 역량이 그런 예배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점점 그런 경향을 보이네요. 그나마 저는 원고 설교를 하기 때문에 이 정도이지 싶습니다. 설교를 되새김질하다 보면 계속 내용이 더해지고 보태집니다. 절제도 필요하겠지만, 대부분 퍼셉션, 곧 성령의 인도하심인지 꼭 필요한 내용들이지 싶습니다.

 

 

원본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두 번째 설교

2025-04-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20(D1)-주일예배(2594, 눅24,1-12. 부활절),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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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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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못 하게 된 사가랴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눅1:18-25)

 

 

저는 주일설교 준비에 거의 한 주를 다 씁니다. 본업이라 할 수 있는 번역의 일이 있음에도, 그리고 원본이 따로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수시로 렌더링, 그러니까 되새김질을 하지요. 보고 또 보고, 늘 다듬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기존 설교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사실 어떤 설교든 그 설교자가 주님과 결합, 성령의 퍼셉션이 있으면 그 설교는 살아있는 겁니다. 이천 년 전, 아니 수천 년 전 신구약 성경이 오늘 우리를 살리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누가복음 시리즈는 아쉽게도 맨 처음 몇 편, 그러니까 두 편 정도가 없습니다. 알아보니 분실하셨다고 합니다. 정말 아쉽지만, 그러나 이도 주님의 섭리이지 싶습니다. 나중에 주님 허락 있으시면, 저라도 채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따라서 앞에 빠진 부분은 본문 리딩으로 대신합니다.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눅1:1-17)

 

 

복음서의 시작이 예사롭지가 않지요? 이 복음서 저자, 그러니까 대필자인 누가의,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시작합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자, 사가랴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가랴로 표상되는 선한 사람에게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냥 아기를 낳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구요, 주님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주시는 때이구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거짓 진리들을 버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자신과 아내의 나이 많음을 걱정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말씀에는 항상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리라 이렇게 말하고, 또 주님께 맡기면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실제로는 잘 믿지를 못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면, 주님을 믿는다 했음에도 뜻대로 안 된 적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지는 등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에서 넘어진 것도,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도 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었고,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원했다면 주님은 아마 더 빨리 당신의 뜻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큰 시련을 겪지 않고,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않습니까? 사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었고,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동안 겪었던 많은 시련은 주님께서 우리를 바로 세우시기 위한 사랑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말씀을 하세요. ‘이제 너에게 진짜 진리를 주겠다. 그동안 네가 가지고 있었던 진리는 거짓 진리이든가 생명 없는 진리, 즉 지식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산 지식을 주겠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과연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때가 지금이란 말인가? 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또 주님께서 진리를 보내주실 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익숙해진 진리와 그것, 곧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진리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지금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사가랴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참된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때가 되어 참된 진리를 열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가랴가 천사로부터 들은 기쁜 소식은 그것입니다.

 

사실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그 종교가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면 뭐가 진실한지, 뭐가 거짓인지를 구별 못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옳다 믿는 수많은 진리와 선 가운데는 거짓들이 섞여 있는데, 그런 것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는 교회에 그 빛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나 종교가 아닌 곳에서는 거듭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못된 교회 안에 있던 사가랴가 이제 참된 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 위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와 같은 기술(記述)에 대해서는 아래 첨부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 318-328)이라는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그 맨 처음 글인 318번 글입니다.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주219 (HH.318)

 

주219. 이교도들도 크리스찬과 더불어 똑같이 구원받는다 (AC.932, 1032, 1059, 2284, 2589, 2590, 3778, 4190, 4197). 저세상에 있는, 많은 수의 교회 밖 나라들과 사람들 (AC.2589–2604) 교회는 특별히 그곳에 말씀이 있으며, 그로 인해 주님이 알려진 곳이다 (AC.3857, 10761). 그럼에도 불구, 말씀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이 알려진, 그런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교회 때문이 아닌, 단지 체어리티와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AC.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주님의 교회는 자기 종교를 따라 선하게 살며, 신(神, a Divine)을 시인하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다. 그들은 주님께 받아들여지며, 천국에 들어간다 (AC.2589–2604, 2861, 2863, 3263, 4190, 4197, 6700, 9256). //

 

19절입니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구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구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바로 가브리엘입니다. 여기서 가브리엘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천사 개인을 뜻하는 게 아닌데요,

 

※ 다음은 ‘천국과 지옥’ 7장,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다’(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 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51-58) 51번, 52번 글입니다.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인 까닭은 사랑과 신앙의 선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 선이 모든 공동체와 거기 속한 천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마다 선이 독특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 달라도 모두 천국적 선이다. 각 천국의 특성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누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올려지면 천국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이고, 거기 있는 천사들을 각자 자기 특유의 천국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계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 밖이나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사의 무리를 보면, 천국이 여기 또는 저기에 있다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총독, 관리, 하인들이 같은 궁전 안에 사는 것과 같다. 그들이 층마다 자기 처소나 방에 따로 있지만, 여전히 같은 궁전 안에 있으면서 왕을 받드는 임무를 각자 수행하는 것이다. (HH.51)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임은 모든 공동체가 천국 전체와 똑같은 천국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확증할 수 있다. 천국 전체를 보면, 다른 천사보다 뛰어난 천사들이 그 중심에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뛰어남이 덜한 천사들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 전체를 한 명의 천사로 보시고 이끄신다. 각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따로 천사공동체 하나가 한 명의 천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나도 이것을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본 적이 있다. 나아가, 주께서 천사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여럿에게 둘러싸인 한 분으로 보이지 않으시고, 그 전체의 모습이 하나가 되어 천사 한 명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천사’가 주님을 뜻하고, 또 천국의 한 공동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은 바로 그 기능에 따라 그렇게 이름지어진 천사 공동체를 말한다. (HH.52) //

 

이에 따라 가브리엘이라는 천사 공동체가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께서 입으신 인성, 즉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지요.

 

※ 우리가 그동안 배운 삼위일체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하나님으로 이루어진, 잘은 모르겠으나 하나이신 삼위일체였다면,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바로잡아 주신 삼위일체는, 속 사람(Divine)이신 여호와 하나님, 겉 사람(Divine Human)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해처럼 방사하시는, 즉 활동하시는(Divine Operation) 성령이 한 분 주님으로 계신 신적 삼위일체(Divine Trinity)입니다. 이는 우리 한 인간이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일상 가운데 활동하는 것과 정확히 매칭됩니다.

 

따라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가브리엘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그 진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 진리로는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천사들이 나타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는 것은, 진리를 지식의 상태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신,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듭나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20절입니다.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천사는 사가랴에게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가랴는 왜 주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잘 분간 못 합니다. 물론 개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요.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아실 것이고,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인지 전혀 모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그런 건데요, 그동안 알고 있던 진리와 새로운 진리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천사가 전하는 진리를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갸라의 이런 상태를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언제 사가랴와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까? 사가랴와 같이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언제 하셨습니까? 아마 아주 우연한 경로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책을 처음 접하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가 참된 진리이니 이 진리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거라’, 그리고 덧붙여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은 진리가 아니니 모두 버리거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부분 주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새로운 진리는 그것대로 가지고 있구요, 그리고 진리 아닌 것들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전해주시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진리를 알면 그것으로 자기의 생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전해주실 때, 그것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미에 맞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전 것들을 버려야 새로운 진리가 들어설 자리가 생기는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나는 새 교회 진리를 온전히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말씀의 속뜻을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속뜻을 단지 말씀을 이해하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태도가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는 주님의 몸과,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몸과 혼이 하나인 것처럼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니구요,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둘이 함께 있어야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못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은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1절,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백성들과 사가랴는 각각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신앙과 선을 나타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와 백성들은 그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들로서, 백성들은 신앙의 진리를, 그리고 사가랴는 이웃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사가랴의 직분은 제사장이며, 제사장의 속뜻은 사랑이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성전 안에 함께 있지 않고 따로 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선은 있는데 아직 신앙의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전 밖에 백성들이 있는 것처럼 진리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아직 참된 진리,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가랴에게 이제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주님이 열어주시는 이런 진리를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22절,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사가랴는 그가 만난 주님에 대해,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진리가 오직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진리로 믿었던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1786번 글에는 환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환상이란 가장 내적인 계시이다. 그것은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일어난다. 즉 내면이 닫힌 사람이 보는 환상과 내면이 열린 사람이 보는 환상이 서로 다르다. (이순철 역) That “a vision” denotes inmost revelation, which is that of perception, may be seen from the nature of visions, which take place in accordance with the man’s state. To those whose interiors are closed, a vision is very different from what it is to those whose interiors are open. (AC.1786, Clowes 역, 창15:1)

 

주님의 계시는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과 아론이 본 것이 다르구요, 그리고 아론이 본 것과 모세가 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주님의 계시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사가랴가 환상을 봤다고 하는 것은, 사가랴가 자기의 영적 상태에 따라 주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입이 터져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는 완전한 신앙이라는 게 없는 것입니다. 23절,

 

23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에서 ‘직무’는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집은 무슨 뜻일까요? 집은 각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라는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를 받는 사가랴의 의지와 삶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한편으로는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살피는 모습입니다. 사가랴는 주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한 애정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 주님의 진리를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비로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께서 진리를 주셔도 그것이 신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가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합니다. 24절,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있으며 이르되

 

이 후에’는 어떤 뜻일까요?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삶으로 옮긴 다음에라는 뜻입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잉태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다는 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 표현되는 교회 안에 이제 신앙의 진리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섯 달이란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가 참된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본래 다섯은 작은 것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 충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숨어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정한 신앙으로 만들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어려움은 우리 내면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 때문에 생깁니다. 예를 들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거짓된 관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진리는 우리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같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것이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2장에도 나오는 말씀인데요, 계시록 12장에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12:1-4)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새 교회의 진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 할 때, 용, 즉 지옥이 그것을 삼키려고 버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해산하는 여인을 지켜주십니다. 진리를 온전한 신앙으로 만드는 일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지금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열매를 맺기까지 지옥의 방해로부터 우리를 철저히 지켜주십니다.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늘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왜 이렇게 방치하실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너무나 힘이 드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 가운데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25절입니다.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유대인들에게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도 그것을 수치로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대를 잇지 못하는 것 때문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수치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잊힌 지식이지만, 대를 잇는다는 말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영적 의미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져 우리의 DNA에 남아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교회 사람들은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귀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살아내지 못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고, 주님 앞에서는 정말로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기 것입니다. 창세기 30장에서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이를 갖지 못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걸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배운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받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한 과정입니다. 많은 분이 자신이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고, 진정한 신앙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희귀할 정도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 진리가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참 신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기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이구요, 또 지적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 실천하는 것을 주저하고, 또 자신의 구미에 맞는 진리만 실천하려고 합니다.

 

※ 그러니까 복 받는 것과 관련된 말씀들이나 자신의 명예와 이름 높일 수 있는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이런 것들이지요. ‘오, 주님, 제 사업을 크게 형통케 하사 제가 주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하옵소서’라든지, ‘오, 주님, 제 목회를 크게 성공케 하사 저로 주님께 더욱 큰 영광 돌리게 하시오며, 이를 위해 제게 치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건 다 주님의 영광, 주님을 찬양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 앞에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사가랴가 섬기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애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는 아기를 잉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마침내 우리 가운데 신앙이라는 진리의 열매가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냥 ‘이것이 진리다’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 진리 아닌 것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받은 그 새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의 열매가 우리 마음 가운데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쪼록 진리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 조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 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니라’ (사35:5-6)

 

아멘

 

원본

2016-04-10(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세 번째 설교

2025-04-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13(D1)-주일예배(2593, 눅1,18-25), '말을 못 하게 된 사가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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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39.357-365.'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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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7.51-58.'각 천사는 가장 작은 천국이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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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ana_coelestia_02(창10-17, 1114-2134), 63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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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 오늘은 본래 준비하던 다른 본문의 설교가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틀 전인 지난 4월 4일 금요일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의 너무나도 이상한 선고로 우리는 멀쩡한 대통령을 또 한 번 잃었습니다. 김문수 장관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파면하는 게 말이 되느냐?’ 저는 목사이지만, 그러나 망망대해 태평양 무슨 외딴섬 목사가 아니며, 저는 특별한 소명을 받아 좀 별난 사역에 힘쓰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저 우주 어떤 외딴 별나라 사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도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은 태어난 자기 조국을 사랑하며, 마땅히 나라와 민족을 사랑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천국이 나의 조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비록 저 역시 작금의 이런 상황에 가슴속 울분과 화가 넘쳐나지만, 그러나 저의 모든 것은 제 것이 아니라 주님 것입니다. 아마 거의 모든 목회자, 모든 참 신앙인은 다 같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가 하고픈 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펴 받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십자가 달려 운명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다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밤의 한 장면입니다.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26:51-54)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처음으로 돌아가자, 주님께 집중하자, 가장 근원적인 질문, 주님은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하셨나에 집중, 전에 나눴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말씀을 조금 더 다듬어 다시 이렇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 곧 속뜻은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로마 황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 BC.100-34)의 이름(姓)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오실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개역개정에서는 ‘호적하라’이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인데요,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성도님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을 따라 인구를 조사한다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그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법도, 또는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읽고 이해했는데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 곧 선과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 우리를 무슨 학교 교육하듯 일률적으로 가르치며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맞게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철저히 맞춤식으로 가르치시며, 인도하시지요. 비록 그것이 크고 중요한 진리라 하더라도 우리 역량에 맞게 우리 페이스에 맞춰 아주 천천히, 아주 기초부터 오랜 세월 끝까지 말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며느릿감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아람 지역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은, 수리아, 또는 아람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 지방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의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 이 역시 예를 들면, ‘퍼셉션’(perception)이나 ‘오운’(own)처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난처한 표현입니다. 난처하다는 말씀은, 원래 그 의미와 뉘앙스가 이만큼 있는데, 우리말로 옮기는 순간 확 다 사라지고 하나만 남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부득이 이 역시 그냥 ‘래셔널’(rational)로 적겠습니다. 보통은 우선은 그냥 이성(理性)이나 추론하는 능력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래셔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래셔널이라는 능력,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에서 만나는 것은, 이런 래셔널이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이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이 래셔널이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건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다음은 이 래셔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4장, ‘천국과 사람과의 말씀에 의한 결합’(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 By Means of the Word)에서 인용했습니다.

 

말씀에서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23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19:23-25)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천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씀의 문자 의미와 내적 의미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람은 글자의 뜻 그대로 이집트인과 아시리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받아들여지고, 이스라엘 민족과 융합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내적 의미에 따라서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을 생각한다. 여기서 내적 의미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성(spiritual)은 ‘이스라엘’, 자연성(natural)은 ‘이집트인’, 그리고 그 중간 기능인 합리성(rational)은 ‘아시리아인’이다. 그러나 이 두 의미는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하나를 이룬다. 천사는 영적으로, 사람은 자연적으로 생각하는데, 이때 천사와 사람은 거의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듯이 결합된다. 실제로 말씀의 내적 의미는 말씀의 영혼이고, 문자 의미는 말씀의 몸인 것이다. 이것은 말씀 전체에 해당된다. 이상으로 말씀이 천국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매체이고, 그 문자 의미는 기초와 바탕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H.307:3, 김은경 역)

 

즉, 우리가 말씀을 지상의 언어로 읽을 때, 그것이 우리 안에서 천국의 언어, 곧 영적으로 이해가 되려면 반드시 중간에서 이 래셔널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가리켜 주님의 첫 번째 래셔널, 곧 human rational이라 하고, 이삭을 가리켜 주님의 두 번째 래셔널, 곧 Divine rational이라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아직 아브람 시절, 곧 아직 주님 안에 마리아로 유전한 human이 남아 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차곡차곡 그것을 벗고, Divine Human, 곧 아브라함 시절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

 

※ 하나 더, 다음은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After Death Man Is Possessed of Every Sense, and of All the Memory, Thought, and Affection That He Had in the World, Leaving Nothing Behind except His Earthly Body)라는, ‘천국과 지옥’ 4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합리적 기능은 어떻게 계발되는가에 대해서도 간략히 말하겠다. 진정한 합리성은 진리로만 형성되고, 그릇된 것으로는 형성되지 않는다. 그릇된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은 어떤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진리에는 사회적, 도덕적, 영적인 세 종류가 있다. 사회적 진리는 국가의 법과 다스림에 관한 사항이며, 일반적으로 나라 안의 정의와 평등에 관한 문제들이다. 도덕적 진리는 대인관계에 관련된 개인의 삶의 문제를 다루며, 일반적으로는 정직과 올바름, 구체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덕성에 관한 문제들이다. 영적 진리는 천국과 교회에 속한 일에 관련된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문제들이다. (HH.468, 김은경 역)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사회적, 도덕적 진리가 영적 진리가 되도록,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진리가 우리의 도덕적, 사회적 진리로 흘러 들어가도록 천국의 천사들처럼 행하며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city)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이 동네(city)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는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천국에 있는 이교도들,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이라는, ‘천국과 지옥’ 36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HH.318, 김은경 역) //

 

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다’ 하고요, ‘요셉이 호적 하러 간 곳은 유대 땅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이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이 래셔널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 동네로 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7절입니다.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한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고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것을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요,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비록 대통령 탄핵이라는 이 기가 막히는 엄중한 상황에 부득이 갑자기 바뀐 설교이지만, 그러나 덕분에 다시 한번 주님의 탄생을 꼼꼼히 살펴보는, 그래서 우리의 첫 출발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아멘

 

원본

2016-08-0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4-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06(D1)-주일예배(2592, 눅2,1-7),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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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4-06(D1)-주일예배(2592, 눅2,1-7),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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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아브람 시절 일어난 일 : 아브람과 롯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And Abram said unto Lot,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we are men brethren.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eparate, I pray, from m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or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And Lot lifted up his eyes, and saw all the plain of Jordan, that it was all well watered, before Jehovah destroyed Sodom and Gomorrah, like the garden of Jehovah, like the land of Egypt in coming to Zoar.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And Lot chose him all the plain of Jordan; and Lot journeyed from the east; and they were separated, a man from his brother. (창13:7-11)

 

※ 개역 성경에는 롯이 ‘동으로 옮기니’로 되어 있고, KJV나 NIV 번역에도 ‘toward’, 또는 ‘eastward’로 되어 있지만, 영적 의미에 맞는 번역은 ‘from the east’, 즉 ‘동쪽으로부터’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을 이루는 세 가지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합리성과 기억의 지식과 외면의 감각적인 것이다. 합리성은 안쪽에 있고, 기억의 지식은 바깥쪽에 있으며 감각적인 것은 가장 바깥쪽에 있다. 합리성을 통해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결합해 하나가 된다. (천국의 비밀 1589, 이순철 역) There are three faculties which constitute the external man, namely, the rational, that of memory-knowledge, and the external sensuous. The rational is interior, the faculty of memory-knowledge is exterior, and this sensuous is outermost. It is the rational by means of which the internal man is conjoined with the external; and such as is the rational, such is the conjunction. (AC.1589, Clowes 역)

 

※ 이는 오늘 본문 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중 ‘소알까지 애굽 땅과 같았더라’(Like the land of Egypt in coming to Zoar)에 관한 AC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오늘은 아브람(Abram)과 롯(Lot)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의 예전 이름이고, 롯은 아브람의 형제 하란의 아들, 그러니까 그의 조카입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창11:27)

 

오늘 본문 창13은 주님의 겉 사람을 다루는데요, 이는 나중에 주님의 속 사람과 결합하게 되지요. 겉 사람은 인간 본질(the human essence)이고, 속 사람은 신(神) 본질(the Divine essence)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롯으로, 후자는 아브람으로 표상(表象, representative)됩니다. 아브람은 인성 가운데 계시는 주님(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을 표상합니다. 참고로 창12부터 이어지는 아브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영유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사람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두 마음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속 사람은 무엇이고 겉 사람은 무엇일까요? 속 사람은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마음으로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속 사람보다는 바깥쪽에 있는 마음이며, 그곳에는 인간의 자아가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 같은 영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나 귀 같은 감각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고요. 주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만들어 주신 이유는, 속 사람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살지 못하고,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정말로 ‘산다’ 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이 ‘산다’는 상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과 연결된 상태를 말하는데 인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며, 특히 소위 신앙인이라 하는 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한 이유는, 그 주된 관심사와 그로 인한 사고방식이 다분히 ‘’에 기반한, 세상을 더 중시하는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신앙생활을 해도 자신의 노후나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이지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사모해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말씀처럼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비로소 ‘산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연결되고,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질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거듭나기 전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겉 사람의 자아가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즉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거듭나지 못했거나 거듭나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천국의 비밀’ 1594번 글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삶 가운데 있기(he lives in corporeal and sensuous things) 때문이며, 둘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 있기(he lives in no charity, and when he is living in no charity it cannot be apparent to him that a life of the love of self and its yearnings is so contrary to heavenly love)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거나 물질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은 믿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속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물질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섬길 때는 오로지 자기에게 도움이 될 때뿐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주님도 자신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참된 진리 안에 있다가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진리를 떠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떠나는 까닭은 대개 진리를 섬기기보다 진리가 자신을 섬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내면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둘은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날 때마다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하나가 됩니다. 사람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 안에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에게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갈등하고 그 갈등을 극복하느냐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글자의 뜻 그대로만 보면, 아브람과 롯은 삼촌과 조카 사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 보면, 그러니까 거기에 담긴 영적인 뜻, 영적 존재인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보면, 아브람은 주님의 내면에 있는 속 사람을 뜻하고, 롯은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은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속 사람은 선과 진리에 따라 살려 하고, 겉 사람은 세상 욕망과 쾌락을 좇아 살려는 것입니다. 그때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뜻합니다. 즉 가나안 사람은 주님이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 악을 뜻하고, 브리스 사람은 유전 악에 바탕을 둔 거짓된 생각들을 뜻하는 것이지요. 주님이 그런 악하고 거짓된 것을 가지고 태어나신 것은, 그것들을 통해 지옥의 시험을 불러들이고, 그 불러들인 시험을 이기심으로 해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 이런 근본적인 것들을 교통 정리하신 후라야, 곧 정하신 선을 벗어나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던 지옥을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신 후라야 영계를 포함, 이 피조 세계 전체가 균형을 되찾고, 그래야 인간 구원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2차 세계 대전 때, 먼저 베를린을 점령당한 독일의 항복에 이어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일본마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항복, 전 세계 온 유럽과 아프리카에 이어 아시아에도 종전이 오고, 드디어 우리 대한민국에도 광복의 날이 온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불완전한 인간을 신성한 인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8절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는 것은 주님의 속 사람이 겉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또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 말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은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다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당신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들이 원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둘이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때가 앞에서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아브람이 계속해서 롯에게 말합니다.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주님의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속 사람을 대적하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있는데 그것이 떠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이 바로 그 악하고 거짓된 것들입니다. 그들이 떠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들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 여기 나를 떠나가라’의 앞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에 대한 내용 역시 주석에는 있으나 제가 그걸 쉽게 풀어드리지를 못하겠어서 부득이 뺐습니다. 나중에 좀더 준비가 되면 그때 싣겠습니다.

 

그러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봅니다. 그 모습을 1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눈을 들었다는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영적인 빛으로 인해 주님의 겉 사람의 눈이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은 무엇을 보셨을까요? 요단 지역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말씀의 표현을 빌리면,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요단 지역의 이런 모습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악들이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했을 때 주님의 겉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이 넉넉한 요단 지역은 겉 사람 안에 있는 교회에 선과 진리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요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주님의 교회, 또는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들을 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개인의 내면에 있는 교회는 궁극적으로는 겉 사람 안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말과 행동이 곧 교회를 이루는 진리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세워지는 교회가 태고교회처럼 순수하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의 여호와의 동산은 에덴동산을 가리키는 말이며, 에덴동산의 영적 의미는 태고교회의 순수한 지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소알까지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 교회의 지식들 속에 선이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소알이라는 지역은 선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애굽은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 안에 선이 들어있다는 것은, 그들의 지식이 세상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요단 지역의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서 속 사람에 대항하는 것들이 물러났을 때의 겉 사람의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여기서 롯은 주님의 겉 사람 전체를 의미하지 않고, 겉 사람 안에서 속 사람에게 대적하는 악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롯이 떠나는 것은 주님이 겉 사람 안에 있는 악들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결별이 속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무엇이고, 겉 사람 안의 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속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해 모르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모두 자기가 하는 것인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듭남에 있어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은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고, 모든 악은 겉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영들의 사주(使嗾, 남을 부추겨 좋지 않은 일을 시킴)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 때 신앙인들은 교만해지지 않고, 또한 지나친 자기 비하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291-302) 292번 글입니다. 위 ‘겉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영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204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그리고 아래는 위 ‘주204’ 내용입니다.

 

204.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과 영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사람은 영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AC.697, 2796, 2886, 2887, 4047, 4048, 5846–5866, 5976–5993) 자기에게 와있는 영들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AC.5993) 사람은 영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들 또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AC.5862) 영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에게 속한, 우리 태양계 내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AC.1880)

 

그러므로 부언하면, 우리는 우리의 오감(五感, 다섯 감각, 시, 청, 후, 미, 촉)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자칫 악한 영들을 통해 지옥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아브람과 롯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람과 롯은 각각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신 이유는, 주님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을 가르치시며,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안에 속 사람이 있고, 겉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를 사모하거나, 또는 그와는 반대로 세상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 그것이 모두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 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당신 안에 여호와가 주장하시는 마음이 있고, 지옥이 주장하는 마음이 있어 서로 다툰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주님이 겉 사람의 악과 결별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고, 이것은 앞으로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치열한 전쟁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1절에서 롯은 요단 지역을 택해 떠났다고 합니다. 요단 지역은 영적으로는 주님의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지역을 택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겉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의 내면에 세워지는 교회는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 세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겉 사람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 교회가 되기를 결심할 때,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동안 속 사람을 대적하던 악과 거짓들이 겉 사람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롯이 ‘동으로’(from the east) 옮겨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동쪽은 주님과 주님의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롯은 동쪽 즉 주님의 교회가 설 자리인 겉 사람의 중심을 속 사람에게 양보하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롯의 선택과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도 주님과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결단이란 각자의 겉 사람 안에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런 결단이 설 때 속 사람을 대적하던 모든 악과 거짓들이 겉 사람의 중심으로부터 떠나갑니다. 새 교회 모든 성도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아멘

 

 

2020-10-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3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30(D1)-주일예배(2591, 창13,7-11), '주님의 아브람 시절 일어난 일, 아브람과 롯'.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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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30(D1)-주일예배(2591, 창13,7-11), '주님의 아브람 시절 일어난 일, 아브람과 롯'.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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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And he drank of the wine and was drunken; and he was uncovered in the midst of his tent.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And Ham, the father of Canaan, saw the nakedness of his father, and told his two brethren without.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And Shem and Japheth took a garment, and laid it upon the shoulder, both of them, and went backward, and covered the nakedness of their father; and their faces were back ward, and they saw not their father’s nakedness. (창9:21-23)

 

※ 오늘부터는 본문에 영문도 함께 싣겠습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살피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술 취한 자라 부른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감각적인 것, 기억에 속한 것, 또는 철학이나 그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AC.1072, 이순철 역) That this signifies that he thereby fell into error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drunkard” in the Word. They are called “drunkards” who believe nothing but what they apprehend, and for this reason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And because this is done by means of sensuous things, either of memory or of philosophy, man being what he is cannot but fall thereby into errors. (AC.1072, Clowes 역)

 

※ 위 인용은 AC(Arcana Coelestia, 라틴, 천국의 비밀, 창, 출 속뜻 주석) 1072번 글에서 가져왔으며, 이는 창세기 9장 21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중 ‘취하여’에 관한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먼저, 오늘 배경입니다.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9:18-20)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 함, 야벳이었고, 이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말씀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농사를 시작했다고 하네요. 어느 날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잠이 들었는데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함이 우연히 아버지의 장막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함은 그냥 자기 선에서 조용히 처리해도 될 일을, 아니 그러는 게 더 나았을 일을 형제들에게로 가 알려요. 점잖게 말해 ‘알렸다’이지 아마 키득키득 천박, 경박하게 알렸을 겁니다. 함의 말을 듣고 그의 형제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가서는 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노아와 아들들에게 일어난 이 일은 작은 사고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이 말씀에는 영적 교회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노아와 그 자손들은 아담으로 상징되는 태고교회의 몰락 후, 주님에 의해 새로 세워진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와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聖) 문서(스베덴보리가 주님의 계시로 기술한 그의 모든 저작, Writings)에 의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 직접 대화하는 사람들, 즉 아직 지상에도 퍼셉션(perception)이 있었던 시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필요한 말씀을 그때그때 직접 들었고, 말씀을 들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태고교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天的, Celestial Church)라고도 부릅니다.

 

※ 위 퍼셉션에 관해 전에 정리했던 글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 지상에 머물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걸 잃어버린, 노아 이후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 무슨 말로도 설명이 안 되고, 또 설령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한다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천국은 퍼셉션으로 충만한 나라이며, 천국 모든 구성원은 주님과 이걸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주님의 신성은 신적 사랑(Divine Love)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이며, 그래서 천국 모든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이 둘을 즉시 아는 능력, 곧 퍼셉션이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을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처럼 무슨 공부를 통해서,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이 퍼셉션으로 그냥 압니다. 직감, 직관이라고 해야 하나요? 천사들이 뭘 궁금해하면, 그 즉시 그냥 어떤 답이 내적으로 들린답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만큼 주님과 늘 막힘없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천사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태고교회가 이런 퍼셉션을 지상에서도 누렸다는 것입니다... //

 

천적 교회는 사랑의 교회입니다. 즉 사랑이나 선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신앙, 또는 진리가 따라오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노아로 상징되는 고대교회는 영적인 교회(靈的, Spiritual Church)입니다. 영적 교회는 지성의 교회입니다. 즉 신앙이나 진리가 먼저이고, 다음에 사랑과 선이 따르는 교회입니다. 태고교회가 사랑의 교회라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의지이며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김은경 역)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일종의 천국에 관한 공리(公理, 너무나 자명하여 굳이 증명이 필요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읽고 또 읽어 거의 심비(心碑, 마음 판)에 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천국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 완전히 동일한 사회는 하나도 없고, 심지어 단 한 천사도 다른 이와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일반적, 종류별, 그리고 세부적 구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두 나라로 구분된다. 종류별로는 세 천국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무수한 사회공동체(societies)로 나누어진다. 이제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두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고 하기 때문이다. (HH.20)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라 한다. (HH.21)

 

천적 나라를 이루는 천사들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보다 깊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내적인 천사, 또는 더 높은 천사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천국도 더 내적이고, 더 높은 천국이라고 한다. 더 높다, 더 낮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HH.22)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인 천적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다.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영적 사랑이라 부르며, 이는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선(좋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한다. 따라서 그 두 나라의 선도 하나는 천적 선, 다른 하나는 영적 선이라 한다. 이로 보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과 구분되는 것처럼, 그 두 나라가 서로 구분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선은 보다 내적인 선이고, 그 사랑도 보다 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더 내적인 천사들이고, 더 높은 천사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HH.23)

 

천적 나라는 주의 성직(聖職)의 나라(the Lord’s priestly kingdom)라고도 불린다. 성경 말씀에서는 ‘주의 처소’(his dwelling place)라고 한다. 영적 나라는 주의 왕권(王權)의 나라(his royal kingdom)라고도 하며, 성경에 ‘주의 보좌’(his throne)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주님을 신성의 천적 측면(the celestial Divine the Lord)에서 ‘예수’라 했고, 신성의 영적 측면으로는 ‘그리스도’라고 칭했다. (HH.24)

 

주님의 천적 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보다 내적으로 받기 때문에, 영적 나라의 천사들보다 지혜와 영광에 있어 훨씬 뛰어나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더욱 주님과 가깝고 친밀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신적 진리를 계속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즉시(at once)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먼저 그들의 기억과 사고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 진리를 직관하며(perceive), 진리를 마치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본다. 그들은 진리가 옳은지 그른지 추론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이 바로 이들에 대한 말씀이다.

 

33...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렘31:33, 34)

 

그들이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교훈을 받는 것’(the taught of Jehovah)은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 45, 46절에 주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6:45, 46) (HH.25)

 

앞서 말한 대로, 이 천적 천사들이 지혜와 영광에 있어 다른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이 신적 진리를 생활 속에 직접, 즉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신적 진리를 듣자마자 그것을 의도하고 행하며(will and do), 결코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옳은지 그른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천사들은 어떤 진리를 들으면, 주의 입류(入流, influx)에 의해 즉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 속으로는 직접(directly) 들어가시고, 생각 속으로는 의지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지만, 주님은 선 안으로는 직접 유입하시지만, 진리 안으로는 선을 거쳐 간접적으로 유입하신다. 왜 두 가지가 같은 말이 되는가 하면, 사람의 의지와 거기서 나오는 행동에 속한 것은 선이라 부르며, 기억과 거기서 나오는 생각에 속한 것은 진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실로 모든 진리는 사람의 의지 속에 들어가는 순간 선으로 바뀌어 사랑 안에 심어진다. 그러나 그냥 기억과 생각 안에만 머무는 진리는 선이 되지 못하고 생명이 없으며,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의지와 의지에서 비롯된 사고 능력(understanding, 이해, 이성)으로 인해 사람인 것이며, 의지를 떠난 사고 능력만으로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HH.26) //

 

그렇게 순수하고 따뜻했던 천적 교회의 사람들도 자아에 눈을 뜨면서 점점 타락하기 시작했는데요,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 그리고 네피림과 같은 괴물이 출현하는 걸로 그리고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그렇게 무너지고, 이어 고대교회가 등장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대교회는 영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는 세 종류, 곧 감람(橄欖,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자주 나오는데요, 이들 나무는 각각 천적(celestial), 영적(spiritual), 그리고 자연적(natural)인 것과 상응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노아와 아들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2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습니다. ‘포도주’는 본래 진정한 신앙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릇된 신앙을 뜻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무엇이고, 그릇된 신앙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신앙은 주님 신앙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은 입으로만 주님을 신앙할 뿐, 삶은 정반대인 신앙입니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그릇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 또는 사람들이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마음대로 곡해, 잘못된 교리와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의 비밀’ 1072번 글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살피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술 취한 자라 부른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감각적인 것, 기억에 속한 것, 또는 철학이나 그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AC.1072)

 

진정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마음대로 추론하지 않습니다.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주님이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반대로 그릇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순진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대로 추론하고 왜곡합니다.

 

※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 안에는 순진함, 천진난만함(innocence)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선행이 이상하게 순진하지가 않다면 그건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이 아닌 겁니다. 다음은 관련 글입니다.

 

순진함은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받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모든 것이 심기는 바탕이 된다. and in innocence all things of heaven can be implanted, for it is a receptacle of the truth of faith and of the good of love. (HH.330)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Little Children in Heaven)에서 인용 //

 

내적으로 볼 때,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나 말씀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그릇된 교리가 양산되었습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랬고,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교회들이, 이를테면 오늘 노아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자들인 것입니다. 말씀에는 술에 취한 노아가 벌거벗고 잠이 들었다 했습니다. ‘벌거벗은지라’는 교회 안에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생각으로 진리를 추론하거나 왜곡하는 교회에는 진정한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잠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자아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자는 것은 고대교회가 처음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함이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22절입니다.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은 노아의 아들들 중 두 번째로 언급되는 아들로, 영적으로는 부패한 교회를 뜻합니다. 부패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요? ‘천국의 비밀’ 1076번 글은 부패한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교회처럼 예배를 드리지만 체어리티로부터 신앙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해서 신앙을 그 본질과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키며, 그로 인해 신앙을 죽은 것으로 만든다면 그 교회는 필연적으로 부패하게 된다. (AC.1076, 이순철 역) A church is said to be corrupted when it acknowledges the Word and has a certain worship like that of a true church, but yet separates faith from charity, thus from its essential and from its life, whereby faith becomes a kind of dead affair; the result of which necessarily is that the church is corrupted. (AC.1076, Clowes 역)

 

한마디로 말해서, 겉으로만 경건하게 예배를 드릴 뿐, 삶에 있어서는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는 교회가 부패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는 부패한 교회의,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기들이 생각할 때 잘못된 교리나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는 함이 그 사실을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는 그들, 곧 잘못된 교리나 신앙을 가졌다 여겨지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우리 새 교회에서도 다른 교회의 잘못된 신앙이나 교리적 오류를 지적할 때가 있기 때문이지요. 대표적인 것으로 오늘날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 교리 같은 것입니다. 만약 비난을 할 목적으로 그런 문제들을 거론한다면, 우리는 여기 함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건 잘못이 아니겠지요. 함의 말을 듣고,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갑니다. 23절입니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함은 아버지의 잘못을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것으로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줬습니다. 함과 나머지 두 아들의 행동이 선명하게 대비가 되지요. 속뜻으로 셈과 야벳은 각각 어떤 사람일까요? ‘’은 고대교회 예배의 내적인 것인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그리고 ‘야벳’은 예배의 외적인 것을 뜻합니다. 즉 제사의 제물들과 의례들을 뜻합니다. 내적인 것 없는 외적 예배, 오직 외적이기만 한 예배는 생명 없는 죽은 예배입니다. 반대로 예배의 내적인 것만 있고, 외적인 것이 없다면 내적인 것은 허공중에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만 있고 지상의 교회가 없는 것과 같고, 사람의 내면에 속 사람만 있고 겉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상의 교회가 없이 어떻게 천국의 시민들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 안에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안에 동시에 있는 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옷을 가져다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선의로 해석하는 것을 뜻하고, ‘하체를 덮었으며’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는 있는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깨는 힘과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뒷걸음쳐 들어가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에 동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벗은 몸을 똑바로 보지 않고 뒷걸음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다양한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동조합니다. 상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함께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도 하고, 마치 공모를 하듯 진심으로 잘못된 행동에 동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더라도 그것에 동조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과 이웃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 다음은 셈, 함, 야벳 요약입니다.

 

, 참된 내적(internal) 교회

야벳, 참된 외적(external) 교회

, 부패한(corrupted) 내적 교회

가나안, 부패한 외적 교회 (AC.1227)

 

어떤 예배가 참되다 하는 것은 그 예배가 주님을 향한 참사랑의 애정(affection)을 가지고 드려지고 있다는 뜻이고, 어떤 예배가 부패했다 하는 것은 그런 애정 없이 형식적으로, 즉 다른 동기와 목적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참사랑의 애정을 말하는데, 이걸 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과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배웠습니다.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노아의 아들 함으로 표현했습니다.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달려가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허물을 주로 보고 장점은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무섭게 추궁하고 마음속으로 정죄하고 경멸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함의 형제 셈과 야벳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함의 말을 듣고 급히 옷을 가지고 아버지에게로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줬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대함을 나타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못을 해도 비난하지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용서가 안 될 때가 있지요. 그래서 말씀에는 셈과 야벳이 옷을 어깨에 메고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어깨에 옷을 메는 것은 온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렇게나 힘든 일입니다. 우리도 교회 건축을 할 때, 이유 없이 여러 가지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 제가 알기로 근처 개신교 교회들이 와서 시위를 하고, 민원을 넣는 등 그렇게 반대하고 괴롭혔다고 합니다.

 

신축 허가가 나지 않아 개축을 해야 했고, 그렇게 건축이 늦어지면서 시공비는 엄청나게 인상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쉽게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온 힘을 다해 잊으라고 하시고,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하듯 그동안 나도 다른 사람에게 많은 잘못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생각하고, 분풀이를 하려 한다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께 항상 체어리티의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이 잘못을 할 때, 선의(善意)로 해석하는 능력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되 결코 동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시15:1, 3)

 

아멘

 

2022-02-2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23(D1)-주일예배(2590, 창9,21-23), '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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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23(D1)-주일예배(2590, 창9,21-23), '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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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4.20-28.'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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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9:3)

 

 

기쁨이 없는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고, 생명이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은 기쁨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이 이른바 즐거움이다.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자체로 물질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며 죽은 것이다. 그러나 질서에 따라 내적인 것에서 비롯한 기쁨과 그 기쁨에 바탕은 둔 즐거움은 생명을 지닌다. (천국의 비밀 995, 이순철 역) Pleasure without delight is not pleasure, but is something without life, and only from delight is and is called pleasure. Such also as is the delight, such is the pleasure. Corporeal and sensuous things are in themselves only material, lifeless, and dead; but from delights which come in order from the interiors, they have life. (AC.99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창9:3 중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서울 새 교회 전 담임 이순철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아주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선친께서 저와 동생을 앉혀 놓고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가끔 물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동생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지요. 장래에 뭐가 되겠다든가, 해 보고 싶다든가 하는 꿈을 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친구의 집에 갔다가 일제 릴 테이프 녹음기로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일반 녹음기와는 소리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인생의 꿈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음향기기로 음악을 듣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그렇게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취미일 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고, 또는 거창한 무슨 이상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기쁨이나 즐거움 때문입니다. 기쁨이 없다면 일도 인생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쁨이나 즐거움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저의 경우는 어릴 때의 꿈을 한동안 좇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꿈을 좇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는데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눈이나 귀, 입 같은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새 교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질이나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차원이 낮은 기쁨, 즉 외적인 기쁨이고, 그보다 차원이 높은 기쁨이 있는데, 그것은 선과 진리로부터 얻는 내적인 기쁨이다. 외적인 기쁨은 내적인 기쁨과 연결될 때 진정한 기쁨이 된다.

 

그러니까 내적이지 않고 그저 외적이기만 한 기쁨은 찰나적이고 공허한 기쁨이며, 그러므로 죽은 기쁨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창세기 9장 3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땅을 기는 모든 살아있는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먹을 수 있는 풀도 내가 다 너희에게 주노라 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 shall be food for you; as the esculent herb have I given it all to you.

 

이 말씀은 홍수가 끝난 뒤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노아’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아담교회, 즉 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 생긴 고대교회와 그 교회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홍수가 끝난 후, 그들이 방주에서 나왔다는 것은 고대교회 사람들이 영적 시험을 모두 이기고 거듭난 것을 의미합니다. ‘홍수’는 거듭나는 과정에서의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듭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두 가지 먹을거리를 주셨다고 하는데요, 하나는 ‘모든 산 동물’(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이고, 다른 하나는 ‘채소’(the esculent herb)입니다.

 

먼저 ‘모든 산 동물’(creeping thing, 땅을 기는 동물)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가장 차원 낮은 기쁨, 즉 감각의 기쁨을 뜻합니다. 땅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몸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감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 그래서 사람을 이루는 몇 가지 중 감각과 관련된 것(the sensuous part)을 ‘’(창3:1)이라 하였고, ‘발꿈치’ 역시 그래서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창25:26) 등이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각의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한다든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오감으로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들은 자칫하면 신앙인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저속한 외적 기쁨을 내적 기쁨으로 승화(昇華, 한 단계 더 높은 상태가 됨)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 감각의 기쁨까지도 내적인 것, 즉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감각의 즐거움이 그렇게 내적인 것을 위해 쓰임 받을 때 그것은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땅을 기는 동물이라고 하시지 않고,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신 것입니다. 먹을거리로 주신다는 것은 그러한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이웃을 섬기려고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음식이나 좋은 옷, 좋은 집을 주시고, 때로는 좋은 곳을 여행하게도 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인들에게 물질이나 감각의 기쁨을 어느 정도 허락하십니다. 마치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때로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 즐거움을 허락하십니다.

 

최근 어느 스님이 젊은 나이에 좋은 집에 살면서 값비싼 전자기기를 가지고 일을 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는데 그것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성직자가, 종교인이 무소유의 삶을 살지 않고 호사를 부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새 교회 교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직자라도 지나치게 재물을 많이 모으거나 사치를 부리지만 않는다면 재산이 있다는 게 큰 흠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안락한 삶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세속의 것들에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누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물질 자체에 빠지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그것들을 선용해야 합니다. 인생의 홍수를 통과하면서 거듭난 사람들은 이 단계의 삶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사람은 술책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를 얻고 쌓아도 되며, 너무 빠져들지 않는 한 고급 음식을 즐겨도 되고, 조건에 따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조건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오락을 즐기고 세상사를 얘기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사람처럼 슬프고 애통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활기에 넘칠 수 있다. 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세상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살아도, 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가지며, 이웃에게 신실하고 공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HH.358)

 

사람이 신을 인정하고, 이웃을 선의로 대하기만 한다면, 겉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되고,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형편과 역할에 따라 풍성한 식탁과 우아한 집과 좋은 옷을 갖추고 살 수도 있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려도 되며, 직무와 사업을 위해, 그리고 정신생활과 육신 생활을 위해 세상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낳는다. 즉 천국에 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그 두 사랑이 지배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두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주의 말씀은 이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 30)

 

주의 멍에는 쉽고 주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에 저항하는 정도만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HH.359)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선한 쓰임새란,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선한 쓰임새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사람이 나태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태한 생활은 사람의 생각을 그 타고난 악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에 해롭다. 쓰임새는 그 안에 신성을 담고 있는 만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신과 천국을 바라보고, 이 쓰임새에서 유익을 찾으며, 재물은 오직 부수적 유익으로 여기는 정도만큼 선하다. (HH.361)

 

가난한 사람은 그들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생활에 따라서 천국에 간다. 모든 사람의 생활은 부자이건 가난하건 상관없이 그 사람을 따른다. 어느 한쪽을 선호하는 특별한 자비는 없다. 선하게 산 사람은 들어가고, 선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가난도 재물과 전혀 다름없이 사람을 천국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자기 형편에 불만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며, 재물이 축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재물을 얻지 못하면 화를 내며, 신의 섭리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품는다. 또한 그들은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질투하고, 기회만 오면 누구든 속일 태세이며, 불결한 쾌락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자기 형편에 만족하고, 성심껏 부지런히 일하며, 태만함보다 일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신용 있게 행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때로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을 믿었고, 공정하고 바르게 자기 일을 행한 농부들이나 서민층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았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체어리티와 신앙에 대해 계속 질문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저세상에서는 체어리티에 대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체어리티는 모두 생활에 속한 것이고, 신앙은 모두 교리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체어리티란 모든 일에 있어서 공정하고 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며, 신앙은 공정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리와 그에 따른 생활처럼, 또는 생각과 의지처럼 서로 결부되어 있다. 사람이 그가 생각하는 공정하고 올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할 때, 신앙은 비로소 체어리티가 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그 사람들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매우 기뻐했다. 믿는다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생활임을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HH.364) //

 

다음은 ‘채소’(the esculent herb), 즉 먹을 수 있는 풀도 함께 주셨습니다. ‘’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풀을 먹을거리로 주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기쁨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선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는 기쁨은 거듭난 사람에게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지요. 늘 말씀드리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거듭나게 되면 먼저 선을 행하고 그러다 보면 진리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진리를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는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노아에게 풀을 주셨을까요?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냥 풀이라고 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풀’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기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고 ‘살아있는 기는 동물’을 주셨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먹을 수 있는 풀은 내적 기쁨과 연결된 진리의 기쁨을 뜻합니다. ‘내적인 기쁨’이란 쓰임(use)의 기쁨, 쓰임 받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진리의 기쁨은 진리 자체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려고, 쓰임 받으려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그럴 경우, 주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이라도 진리의 기쁨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풀을 양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사용하려는 목적이 아니면, 쓰임 받기 위해서가 아니면 진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선을 행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 위 인용글들 중 특히 쓰임새가 나오는 다음 글처럼 말입니다.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들의 모든 기쁨은 감각의 기쁨이든 진리에 대한 기쁨이든 반드시 내적인 것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모든 내적인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기쁨을 살아있게 만드는 내적인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인애(仁愛), 즉 이웃에 대한 사랑,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어리티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이웃에게 필요한 걸 베푸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기꾼이나 도둑처럼 악한 사람들까지도 포용하는 것이 체어리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 교회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진정한 체어리티는 이웃의 진실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지 악과 거짓까지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의 근원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어리티는 한편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체어리티는 또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동시에 체어리티를 행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체어리티를 행한다면 그건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정한 체어리티는 마음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고 진리와 선을 사랑해야 합니다. 체어리티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체어리티의 마음을 가지고 물질을 사랑하고 감각에 속한 걸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면 겉으로 보여지기 위한 사랑입니다. 또한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라 지식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은 읽지 않는 책을 사 모으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일입니다. 또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감각의 기쁨을 추구하면 영적으로 피폐해집니다. 그럴 경우, 점점 더 자극적인 기쁨을 원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타락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쁨을 추구하든 체어리티의 기쁨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그때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 또는 체어리티와 신앙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몸의 감각과 서로 연결 되어 죽어있던 감각의 기쁨이 살아있는 것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부디 새 교회 모든 성도는 주님 주시는 세상 기쁨을 누리고 즐기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체어리티로부터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아멘

 

2020-11-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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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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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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