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단어를 단순한 동의어의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 안에서는 서로 비슷해 보이는 표현도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며, 스베덴보리는 이 세 동사 역시 거듭남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나타낸다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16 자체는 그 차이를 여기서 자세히 정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조는 생명을 처음 넣어 주는 단계, 형성은 그 생명을 질서 있게 만드는 단계, 만듦은 그것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세 동사를 하나의 고정된 순서표로 확정하는 것은 AC.16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런 설명은 이해를 돕는 비유로는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AC.16에서 그렇게 정의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창조하다’는 거듭남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날 때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거듭남 자체를 ‘새 창조’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창조’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일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실제로 뒤의 AC에서도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로 창조되거나 거듭나는 것과 특별히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만들다’ 역시 단순한 물건 제작의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뒤의 설명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가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경우 ‘만들다’라는 표현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들다’를 단순히 외적인 행동으로 구현하는 단계라고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시작하신 거듭남의 역사가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측면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짓다’ 또는 ‘형성하다’(form)도 고유한 뜻을 갖습니다. 이 말은 이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형식과 질서를 갖도록 형성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AC.16 한 번호만으로 세부 의미를 완전히 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곳에서 ‘형성하다’를 다른 표현들과 구별하여 사용하며, 각 문맥에서 그 속뜻을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가 모두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를 말하지만 서로 같은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43:7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한 사람을 두고 세 동사가 연속하여 사용됩니다. 만일 세 말이 완전히 같은 뜻이라면 이런 반복은 단순한 수사적 장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에 속뜻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세 동사 역시 한 사람의 거듭남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나타낸다고 읽습니다.

 

AC.88에서도 이 원칙은 다시 확인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주님의 ‘일’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세 표현이 말씀에서 ‘아주 구별되게’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도 각 단어를 간단한 세 단계 공식으로 정의하기보다는, 말씀에서 각각 고유한 관념을 전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AC.16을 읽을 때도 가장 안전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세 동사의 차이를 기억할 때는 ‘첫째는 이것, 둘째는 이것, 셋째는 이것’이라고 너무 빨리 고정하기보다, ‘거듭남은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형성하시며, 마침내 온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전적인 역사이고, 말씀은 이 한 역사를 여러 고유한 표현으로 구별하여 말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후 AC에서 이 단어들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그 문맥에서 구체적인 뜻을 확인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한 ‘의미의 차이’가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세 동사가 함께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거듭남의 주체가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하지만, 사람 자신이 스스로를 새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AC.16에서 이 세 단어의 차이를 묻는 일은 단순한 어휘 연구가 아니라, 거듭남 전체가 누구의 역사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AC.16 심화 1)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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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뜻한다고 말하면,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익숙한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보다 더 높은 분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삼위 가운데 한 위격을 다른 두 위격보다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신적 삼위일체는 그 한 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세 신적 인격으로 생각하고, 그 셋을 다시 한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려는 방식입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에는 신적 삼위일체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을 한 분 하나님 밖에 따로 존재하는 세 분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신적 삼위일체는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구별은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입니다. 성부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 자체, 곧 모든 것의 근원이신 신성을 가리키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 오셔서 취하시고 영화하신 신적 인간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과 천사에게 역사하는 신성을 가리킵니다. 이것들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말은 성부를 제외하고 성자만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며, 주님에게서 성령이 발출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다음 AC.15에서 스베덴보리가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14와 AC.15는 따로 떼기보다 서로 이어서 읽을 때 스베덴보리의 의도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성육신 이전과 이후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신성 자체는 영원부터 계셨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인간성을 취하셨고 그 인간성을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외적인 모습이나 임시적인 육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권세를 받은 피조된 중개자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사람의 영혼과 몸과 활동을 비유로 사용하는 것도 이 하나 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성 자체와 신적 인간과 발출하는 신성은 세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만 이 비유 역시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구조로 축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위가 한 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4에서 왜 ‘주님’이라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적용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삼위 가운데 ‘성자’라는 한 위격만을 선택하여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구원을 이루신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성부를 지나쳐 성자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기도와 예배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부를 따로 생각하고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중간 단계처럼 통과하는 구조가 중심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오신 분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 가운데 한 분만을 골라 예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그분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 안에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14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선언은 성부와 성령을 밀어내는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 삼위일체를 한 분 하나님 안에서 다시 붙드는 선언입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신성 자체이며,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간이고, 성령은 그분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선은 세 분 사이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 향합니다. 그분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으며, 그분에게서 모든 신적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인간에게 옵니다. (AC.14 심화 1)

 

 

 

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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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분명 서로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개념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서로 닮은 영적 지향이 어디에 있으며, 그 지향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AC.13의 일곱 번째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 창조의 여섯 날은 인간이 거듭나는 상태들을 나타내며, 그 뒤의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안식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휴식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들에서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실제로 싸우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더욱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상태의 안식은 인간의 proprium이 주도권을 쥐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된 분이 되시는 질서와 관련됩니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 수도원과 신비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서방 기독교 영성에서는 영적 여정을 ‘정화’, ‘조명’, ‘합일’이라는 틀로 설명해 온 전통이 있으며, 여기서 합일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더욱 깊이 일치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기중심적인 의지가 약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여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안식과 비교해 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전통 전체를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영성’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수도원과 신비 전통 안에서도 합일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관상 체험만을 뜻하지 않았으며, 순종과 사랑과 덕의 삶, 기도와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변화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흐름이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수도원 전통은 체험이고 스베덴보리는 삶이다’라고 양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질서를 설명할 때 특별한 종교적 체험 자체를 그 상태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데서 찾는 편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황홀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에게서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있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랑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상태를 판단하는 핵심은 특별한 감각적·신비적 경험이 아니라 인간 안의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있습니다.

 

또한 이 상태를 수도원이나 세상과 격리된 특별한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실제 무대는 인간의 삶 전체입니다. 가정과 직업과 인간관계와 맡겨진 쓰임 속에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배우며, 선을 행하고, 그 선이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이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상태를 특정한 생활 형태나 수도 제도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곱 번째 상태를 누구나 쉽게 도달하는 일반적인 단계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AC.13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사람이 실제로 이 여러 상태 가운데 어디까지 이르는지를 말하면서,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도 드물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실제 인간에게서 그 충만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일곱 번째 상태의 ‘안식’을 이후에는 아무런 시험이나 영적 싸움도 없다는 절대적인 무전투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싸움의 주체와 인간의 내적 태도가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악과 싸워 이긴다고 여기기보다 주님께 의지하며, 주님께서 싸우시고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질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단순히 갈등이 사라진 심리적 평온이라기보다 주님의 질서 안에서 오는 영적 평안과 관련됩니다.

 

이렇게 보면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의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비교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변화를 말하며,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일곱 번째 상태를 어떤 특정 수도 전통의 완덕론이나 신비적 합일론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이라는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마침내 주님께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안식의 질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13을 수도원 영성과 연결하여 읽을 때 가장 유익한 질문은 ‘어떤 특별한 합일 체험에 도달했는가?’가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이 실제로 누구에게 있는가?’일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내 힘과 공로로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도록 내 삶을 맡기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세상을 떠나 얻는 특별한 종교적 경지가 아니라, 인간의 중심이 proprium에서 주님께로 옮겨 가면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삶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AC.13 심화 1)

 

 

 

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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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하고, 이어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고 합니다. 또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는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2는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예들은 ‘스베덴보리가 AC.12에서 바로 이런 경우를 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AC.12가 말하는 상태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해해 보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시다. 그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곁의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실제로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단지 순간적인 기분이나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 AC.12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가 말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선한 행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직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거짓을 피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면, 단지 정직이라는 원칙을 알고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자기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을 실제 삶에서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했으니 이 사람은 AC.12의 여섯 번째 상태에 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행동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를 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거듭남 단계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한다’는 표현이 실제 삶과 무관한 추상적인 말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기능처럼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고 행하는 것이 함께 가는 상태로 이해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사랑한다고 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무엇이 아이에게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고, 필요하면 가르치고 바로잡으면서도 아이의 선을 진심으로 원합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옳고 유익한가를 살피는 것과 실제로 아이의 선을 원하는 것이 함께 필요합니다. 이것 역시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상대방의 형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진정한 유익을 바란다면, 우리는 ‘진리와 선이 함께한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2의 또 하나 어려운 표현은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착한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는 영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을 먹고 사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연적 생명은 음식과 물로 유지되고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점점 소중히 여기고, 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자기 이익과 인정만이 중요했는데,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 소중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2가 직접 제시한 구체적인 사례라기보다 ‘영적 생명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적용입니다.

 

여기서 ‘기쁨’도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마다 반드시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으며, 용서하거나 참고 섬기는 일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기쁨을 단순한 감정적 즐거움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점차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AC.12에서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상태가 앞선 상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들을 거치면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어 가며, 이제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의 생활 사례들도 ‘이 행동 하나를 하면 여섯 번째 상태’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와 실제로 사랑하고 행하는 선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것을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는 것이 점점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삶 안에서 함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2의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표현도 조금 덜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신앙은 머릿속에만 있고 사랑은 막연한 감정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참된 것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서 선한 것을 원하며 실제로 행하는 삶 속에서 둘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예보다 중요한 것은 AC.12 자체가 말하는 방향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가장 간단히 풀어 말한다면, ‘내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이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점점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AC.12 심화 1)

 

 

 

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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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실이 틀림없음을 증명하거나 확인한다는 뜻으로 들리고, ‘자신을 확증한다’고 하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스스로 옳다고 굳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11의 문맥을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선 안에 있음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증’의 중심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자기 생각이 옳다는 증거를 모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신앙으로 말하게 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AC.10과 비교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신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즉 앞에서 받은 신앙이 단지 순간적으로 비추는 빛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정도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확증한다’는 것을 ‘삶의 경험을 통해 그 진리가 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고 설명해도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AC.11이 직접 내리는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AC.11은 사람이 여러 경험을 해 보고 진리의 효용을 검증한 뒤 확신하게 된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그가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진리를 ‘그렇다고 하니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리가 점점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길이 여러 번 다니다 보면 점차 익숙한 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확증’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라기보다 AC.11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자신을 확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진리와 선 안에 세운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부터 계속되는 전체 문맥은 사람의 거듭남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을 인간이 독립적으로 자기 안에 진리와 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굳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확증’이라는 말까지 생각하면 또 하나의 구별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확증할 수도 있지만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확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좋은 영적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고 무엇 안에서 자신을 굳히느냐가 중요합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선’이므로 좋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확증’이라는 단어만 떼어 읽으면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더욱 굳게 믿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AC.11에서는 그런 완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직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도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의 ‘확증’을 거듭남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여섯 상태 가운데 다섯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따라서 AC.11의 ‘자신을 확증하다’는 표현은 우선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하여 설명할 때에는 ‘배운 진리가 점차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으로 자리 잡아 간다’고 풀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AC.11에서 왜 ‘신앙으로 말한다’는 것과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이 함께 나오는지도 조금 더 쉽게 보입니다.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멀리서 들은 가르침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AC.11 심화 1)

 

 

 

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는 때 :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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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7

이 말씀들 안에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앞 절에서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낼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the wild animal of the earth, the beast)을 만드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이후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 다른 순서가 나오는 것이며,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AC.47은 아주 짧지만 창1:24-25의 문장을 얼마나 세밀하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단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순서의 변화’입니다. 24절에서는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을 내라고 하지만,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을 만드셨다고 하여 앞에서와 순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도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정도의 어순 차이에 정말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AC.47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단순히 자연계 창조의 순서를 기록한 문장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을 담은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대상들이 왜 다른 순서로 언급되는가도 그에게는 설명되어야 할 말씀의 일부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설명의 중심은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이후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실제로 영적 생명과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9-43에서 이미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47을 그 흐름과 분리해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이라고 말할까요? AC.47은 그 이유나 작동 방식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렇게 산출하며, 바로 그 때문에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 두 진술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사람이 외적인 행동을 반복하면 그것이 차츰 속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하나의 심리적 훈련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실제 삶의 순종과 행함은 거듭남에서 중요합니다. 바로 앞의 AC.44도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47 자체는 ‘행동 → 습관 → 애정 → 속 사람’이라는 단계나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라는 말을 주님께서 겉 사람에서 일을 시작하여 점차 속 사람으로 들어가신다는 공간적 이동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나는 사람이 경험하고 산출하는 질서를 설명하면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및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는 AC가 진행되면서 훨씬 더 세밀하게 설명되므로, 이 한 문장에 그 모든 메커니즘을 미리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24절과 25절의 순서 변화가 왜 중요할까요? 24절에서는 ‘땅’이 무엇인가를 내는 장면이 먼저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하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반면 25절에서는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 만드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AC.47이 특별히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땅이 하다가 하나님이 하신다’는 주어 변화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언급되는 것들의 순서도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순서에서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뒤바뀐 순서는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질서를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각각의 ‘땅의 짐승’과 ‘가축’을 다시 세분하여 ‘이것은 외적 행동, 이것은 습관, 이것은 길들여진 애정’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부 대응을 우리가 만들어 넣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외적인 것들이 먼저 언급된다’는 설명을 그대로 중심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과 ‘실제로 자기에게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행한다’고 경험합니다. 그러나 앞선 AC의 흐름에 따르면 그 안에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7은 이 둘을 서로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한다는 표현으로 그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매우 중요해질 주제입니다. 다만 AC.47 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 섭리, 공로 없음의 관계를 모두 완성된 교리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보다 작지만 분명한 단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에게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행하는 상태가 있으며, 그 과정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현재 제목처럼 이것을 곧바로 ‘자기에서 주님으로 옮겨가는 방향’이라고 요약하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분명해졌지만, AC.47이 설명하는 순서 변화 자체의 직접적인 의미는 ‘자기에서 주님으로 주체가 이동한다’기보다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 차이를 지켜 주어야 이 짧은 글이 말하는 아르카나가 오히려 더 선명해집니다.

 

AC.47은 동시에 말씀을 읽는 스베덴보리의 방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 눈에는 같은 것을 조금 다른 순서로 쓴 문체상의 변화처럼 보이는 것도, 그는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물론 여기서 곧바로 ‘성경의 모든 어순 변화에는 반드시 별개의 속뜻이 있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이 직접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창1:24-25의 순서 변화에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의 근원을 온전히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가며, 창1:24와 25의 미묘한 순서 변화가 바로 그 질서를 표현합니다. AC.47은 단어 하나뿐 아니라 배열의 변화까지도 거듭남의 관점에서 읽어 내면서,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얼마나 세밀하게 담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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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beasts),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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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로 지나치게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적인 사랑과 구별하기 어려우며, ‘인애’라고 하면 현대 한국어에서 뜻이 즉시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은 상당히 가까운 표현이지만, 이것 역시 charity가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나타나는 폭넓은 의미를 언제나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과 해설에서는 charity를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라고 음역하여 사용하고, 그 의미를 문맥에서 풀어 설명합니다.

 

체어리티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주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웃의 선과 유익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삶의 방향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현대 영어의 charity에서 흔히 떠올리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체어리티의 한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체어리티 전체가 그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참된 유익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 역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한 행동’과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동기와 목적까지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닙니다. 칭찬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때로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그의 잘못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에는 단순한 감정적 친절을 넘어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진리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후 AC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끊임없이 다루어집니다. 진리가 삶과 분리되어 머릿속 지식으로만 남아 있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의 인도 없이 단순한 호의나 감정에 머물러서는 온전한 질서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체어리티의 일들’(works of charity)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이제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에 속한 선들을 행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앞선 상태보다 큰 진전입니다. 체어리티가 생각 속의 이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9의 핵심 문제는 그 사람이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9는 ‘체어리티의 일을 행한다’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 수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사랑이 많다’는 생각이 중심에 자리 잡으면 체어리티의 외적인 행위 안에도 proprium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이 아직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선의 참된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 번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면서 배우고, 자기 안에 섞여 있는 동기들을 발견하며,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선을 선택하고 행하는 가운데 그 사람을 이끄십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한두 번의 특별한 선행보다 삶 전체의 방향과 더 깊이 관련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시간만 체어리티의 시간이 아니라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직장에서 맡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의 명예를 다루는 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같이 일상의 수많은 선택 속에서 체어리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삶에서 분리된 종교적 활동 하나가 아니라, 이웃의 선과 유익을 향하도록 삶이 질서 잡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번역과 해설에서 영어 charity를 ‘체어리티’라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뜻을 설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풍성한 의미를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성급하게 축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문맥에 따라 ‘이웃을 향한 사랑’, ‘이웃의 선을 위한 삶’, ‘체어리티의 행위’ 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 설명할 수 있지만, 기본 용어 자체는 ‘체어리티’로 유지합니다. 이렇게 해야 이후 AC에서 신앙과 체어리티, 사랑과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관계가 점점 더 정교하게 전개될 때 동일한 개념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선도, 따뜻한 감정도, 외적인 선행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바라며 삶으로 행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삶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에 완성된 상태가 아니지만, 사람이 실제로 체어리티의 일을 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는 거듭남의 중요한 진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선을 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도록 이끄십니다. (AC.9 심화 2)

 

 

 

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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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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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는 내적인 차원인데, 거기서 나온 선이라면 당연히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핵심은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사람이 인정한다’는 것이 아직 완전히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AC.9의 사람은 이전 상태보다 분명히 진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외적인 규칙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했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내가 선을 생각했고, 내가 선을 선택했고, 내가 선을 행했다’고 여깁니다. 선이 안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는 말을 그 선행이 전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아무 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 행위의 외적인 유익성보다 영적인 생명의 귀속입니다. 선의 생명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동안에는 그 선을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변화만 생각하면 AC.9의 사람은 이미 상당한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선을 행하는가?’뿐 아니라 ‘그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를 묻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한 일을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했다’, ‘내가 옳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자기 공로를 붙들 때에도 proprium은 매우 미묘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사람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에서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노력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라고 기다리는 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 갑니다.

 

이 때문에 AC.9의 세 번째 상태는 지나가야 할 잘못된 상태라기보다 필요한 성장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을 때 자기가 걷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도 처음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자유감과 자기 활동감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시면서, 점차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은 이미 완성된 거듭남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영향이 겉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사람의 의식과 귀속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 있을 수 있습니다. AC.8에서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면, AC.9에서는 그 구별이 실제 선행 가운데서도 더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내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돕고 말씀을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누구에게 공로를 돌리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을 때 섭섭해하거나, 자신의 선행 때문에 자신을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진다면 ‘선한 일을 하는 나’를 붙들고 있는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했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9는 그러한 발견 자체가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점차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선을 행하되 점점 더 자기 공로를 내려놓게 됩니다.

 

따라서 AC.9의 ‘생명이 없다’는 표현은 선행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그 선행이 어디에서 참된 생명을 받아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진전입니다. 그러나 그 선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려면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결국 거듭남은 ‘내가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마음과 삶으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AC.9 심화 1)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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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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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심화

1. ‘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져야 하는가?’

 

AC.8에는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라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왜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있어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는 것일까요? 실제로 주위를 보면 큰 고난을 겪지 않고도 비교적 겸손하고 신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AC.8은 모든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큰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 불행,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더 거듭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문도 이 상태가 그러한 일들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하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핵심은 고난의 필연성 자체가 아니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는 것’에 있습니다.

 

평소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며 자기 힘으로 삶을 이끌어 간다고 느낍니다. 건강, 경제적 안정, 사회적 인정, 자신의 계획과 판단, 익숙한 인간관계와 생활환경 등이 잘 유지될 때에는 이러한 자기 확신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건강이나 경제적 안정이나 사회적 관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 삶의 궁극적인 토대로 여기고, 자기 판단과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 때입니다.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은 때때로 바로 이러한 자기 확신을 흔듭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나거나, 의지하던 것이 흔들리거나, 자기 판단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면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이전처럼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AC.8에서 그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은 그것들이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것들의 지배력이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때 이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것이 나타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AC.8은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평소 자기 생각과 욕망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 너무 크게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의 소리가 잠잠해지면 유아기부터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신앙의 지식과 선한 것들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이 리메인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이미 주님께서 저장해 두셨으며, 고난은 경우에 따라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또한 시험이나 불행이 자동으로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어려움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지고 원망과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변화의 원인을 고난 자체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시며, 시험과 불행과 슬픔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큰 고난 없이도 비교적 평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로 이 때문에 AC.8의 ‘거의 없다’라는 표현을 그대로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거듭남의 과정은 동일한 외적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큰 불행이 없어도 사람 안에서는 자기 뜻과 주님의 뜻 사이의 갈등, 양심의 책망, 자기 사랑을 내려놓는 내적 싸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조용한 방식으로 자기 확신이 낮아지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적 형편만 보고 그의 내적 거듭남의 과정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AC.8을 읽으면서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일부러 불행을 주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이미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시험과 불행과 슬픔까지도 주님께서는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통하여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속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가 사용될 수 있도록 섭리하실 수 있다는 쪽에 초점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난의 크기 자체는 거듭남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지나면서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사람에게 고유한 것과 주님께 속한 것을 조금 더 분명하게 구별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시련이 그 계기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조용한 내적 갈등과 깨달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고난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AC.8에서 시험, 불행, 슬픔을 강조하는 이유는 고난 자체를 영적으로 높이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들이 너무 강하게 활동하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이미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들이 드러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지배력이 잠잠해질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조금씩 배우고,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속한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8이 말하는 두 번째 상태에서 고난이 갖는 의미입니다. (AC.8 심화 1)

 

 

 

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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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5와 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는 선한 애정을, 다른 곳에서는 악한 애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상응이라는 것은 하나의 자연물이 하나의 영적 의미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짐승 = 애정’이라면 선한 애정인지 악한 애정인지도 하나로 정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상응을 단순한 ‘영적 암호표’처럼 생각하면 ‘물 = 진리’, ‘나무 = 지각’, ‘짐승 = 애정’처럼 하나의 단어 옆에 하나의 뜻을 적어 놓고 모든 성경 구절에 똑같이 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AC를 읽어 가면 상응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AC.46 자체가 좋은 예입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기본적인 연결은 유지됩니다. 짐승은 인간의 ‘애정’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애정 자체에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이 있으므로,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문맥과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자연계의 동물들도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AC.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끼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을 구별했습니다. 곰, 늑대, 개와 같은 동물을 악한 애정의 예로 들고, 암송아지, 양, 어린양 같은 동물을 선하고 온순한 것의 예로 들었습니다. 따라서 ‘동물’이라는 큰 범주가 애정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동물이 동일한 종류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표현도 문맥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AC.46에서 들짐승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평화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있는가 하면, 겔34:25에서는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들짐승’이라는 말을 발견하자마자 무조건 선이나 악 가운데 하나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태를 다루는 말씀인지, 그 짐승이 어떤 관계 속에서 등장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응이 임의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른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애정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애정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는 애정과,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악한 애정은 모두 ‘애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그 질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읽을 때 ‘이 자연물의 정확한 정답은 무엇인가?’라고만 묻기보다 ‘이 자연물이 인간의 어떤 영역과 관계되며, 지금 이 문맥에서는 그 영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좋습니다. 짐승의 경우에는 ‘애정과 관계된다’는 기본 관계를 먼저 붙들고, 그다음 그 애정이 선한지 악한지, 온순한지 해로운지, 질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문맥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 AC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물이 긍정적인 문맥과 부정적인 문맥에 모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대로 뜻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본적인 상응 관계 안에서도 대상의 질과 상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근거로 독자가 마음대로 문맥에 맞추어 의미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인 구절이니까 좋은 뜻, 부정적인 구절이니까 나쁜 뜻’이라고 임의로 정하는 것도 상응의 해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반복되는 용례와 상응의 질서를 통해 이러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는 개별 상응 하나를 떼어 자유롭게 응용하기보다, 그가 여러 구절을 서로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AC.46에 그토록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의 구절만 보고 ‘짐승은 애정을 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시편과 이사야와 계시록 등 말씀 전체에서 짐승과 생물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상응은 한 구절에 억지로 끼워 넣는 해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글 자체가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짐승이 어떻게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애정’이라는 기본적인 상응 관계는 유지되지만, 인간의 애정 자체가 선하거나 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에 뜻 하나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응이 말씀 전체의 문맥에서 어떤 상태와 질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AC의 상응 해석이 조금 덜 낯설어집니다. 상응은 단순한 단어 사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자연계의 형상들을 통해 표현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AC.46, 창1:24-25, 말씀의 짐승들은 왜 인간의 애정을 뜻하는가?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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