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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6:37:13 BU.001. ‘부처는 신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깨달은 인간이다’

SL.BU.001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부처는 신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깨달은 인간이다’ - 깨달은 인간과 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차이

 

해설

불교를 이해할 때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부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독교에 익숙한 사람들은 불교도 기독교처럼 어떤 신을 믿는 종교이며, 부처는 그 신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석가모니에 관한 초기불교의 기본적인 이해는 다릅니다. 부처는 세상을 창조한 신도,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자도 아닙니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생로병사의 고통을 경험하고, 수행을 거쳐 깨달음에 이른 존재로 이해됩니다. ‘부처’(Buddha)는 ‘깨달은 자’, 곧 ‘눈뜬 자’를 뜻합니다. 그의 위대함은 자신이 진리를 창조했다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을 고통에 묶어 두는 무명과 갈애의 구조를 통찰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쳤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초기불교 경전인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12.20은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든 하지 않든 연기의 법칙은 성립하며, 부처는 그것을 깨닫고 드러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가르쳐 준 지식을 단순히 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진리를 직접 통찰했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대승불교에서는 법신·보신·화신과 여러 부처에 관한 교리가 발전하였으므로, 불교 전체가 부처를 단순히 뛰어난 인간 스승으로만 이해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불교의 출발점에는 기독교인도 진지하게 살펴볼 만한 통찰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바로 그것 때문에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처가 강조한 무명(無明)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붙잡으며, 집착할 수 없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근본적인 무지를 가리킵니다. 불교는 이러한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자아적 성향을 설명하는 대목과 비교할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판단과 욕망을 선과 진리의 기준으로 삼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경계하고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불교의 노력에는 분명 인정할 만한 윤리적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무명과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프로프리움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의 문제를 진단하는 데 부분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그 문제의 근원과 해결 방법까지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통해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지혜를 얻는다면, 그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4번에서 오직 주님만이 사랑 자체이시며,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과 천사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창조되지 않은 무한한 분이시지만, 인간과 천사는 창조된 유한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리 높은 지혜에 도달하더라도 지혜 자체나 생명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이해할 능력이 주어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지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깨달음과 지혜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는지를 그 근원에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불교가 인간의 깨달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창조한다거나 진리의 근원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불교 사이의 차이는 바로 이러한 주장을 불교에 돌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모니를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15:5)고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을 넘어, 자신이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심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주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 설명합니다. 주님은 평범한 인간이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신성에 도달한 분이 아닙니다. 본래 신성이신 여호와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서 시험을 이기시며,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분입니다. 반면 불교에서 역사적 석가모니는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된 존재로 이해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주님과 불교의 부처를 단순히 서로 다른 종교에서 나타난 위대한 영적 스승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한쪽은 인간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설명하고, 다른 한쪽은 진리와 생명 자체이신 분이 인간에게 오셨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근거한 기독교적 비교이며, 불교가 스스로 받아들이는 설명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7–8번은 이 차이를 더욱 깊이 보여 줍니다. 천국이 천국인 까닭은 천사들이 본래부터 거룩하거나 자기 힘으로 완전한 지혜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선과 진리가 천사들에게 흘러들어 오고, 천사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HH.8은 천사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선도 행하지 못하고, 어떤 진리도 생각하지 못하며,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영적 성숙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나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자기 공로로 소유하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선과 진리의 근원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무아와 스베덴보리의 저작이 밝히는 인간의 영적 상태는 자기중심성에 대한 집착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는 고정불변하는 자아의 실체성을 문제 삼는 가르침인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실재하는 영적 인격으로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설명의 유사성을 인정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에 관한 차이까지 지워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발견되는 지혜와 자비,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습니까?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57번은 인간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에게 있는 사랑과 지혜의 모든 근원이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에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불교인이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며 탐욕을 절제할 때 그 안에 나타나는 선을 단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의 궁극적인 근원을 주님에게서 찾는 것은 불교 자체의 설명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기초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내적 동기나 영원한 상태를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종교적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려는 내면의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깨달음과 자비에 나타나는 진리를 정당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에 관한 새 교회의 교리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리를 인정하는 것과 서로 다른 교리를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처는 신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깨달은 인간이다’라는 명제는 역사적 석가모니와 초기불교를 이해하는 데 타당한 출발점입니다. 그가 창조주를 자처하지 않고 인간의 고통과 무지를 통찰하여 깨달음의 길을 가르쳤다는 점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집착과 욕망을 돌아보고 자비로운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에는 귀중한 도덕적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다양한 부처 이해를 단순한 인간 스승의 개념으로 축소해서도 안 되며, 불교의 깨달음을 말씀에서 말하는 거듭남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생명과 지혜의 근원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첫 번째 항목에서 살펴야 할 것은 부처를 낮추거나 불교인을 판단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가 무엇이며 그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깨달음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내려놓게 하고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는가에 비추어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를 통하여 살펴볼 때, 그러한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십니다. (BU.001 해설)

 

요약

‘부처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존재다’라는 설명은 역사적 석가모니와 초기불교를 이해하는 데 타당합니다. 무지와 집착을 극복하고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려는 불교의 가르침에도 인정할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만 대승불교의 다양한 부처관을 인간 스승이라는 개념으로 축소하거나, 불교의 깨달음과 기독교의 거듭남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힌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아무리 높은 지혜에 도달하더라도 생명 자체가 될 수 없으며,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깨달음의 가능성을 인정하되, 깨달은 인간과 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근본적인 차이는 분명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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