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
방금인용한말씀이그교회의체어리티에서비롯된예배를뜻한다는것은,‘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calluponthenameofJehovah)가주님께드리는모든예배를나타내는관용적이고일반적인표현이라는사실에서분명합니다.그리고이예배가체어리티에서비롯되었다는것은앞절에서는그분을‘하나님’(God)이라고했으나여기서는‘여호와’(Jehovah)라고한사실에서도분명합니다.또한주님은체어리티가아니고서는예배할수없기때문입니다.체어리티에속하지않은신앙에서는참된예배가나올수없습니다.그런예배는단지입술의것일뿐마음의것이아니기때문입니다.‘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callonthenameofJehovah)가주님께드리는모든예배를나타내는관용적인표현이라는것은말씀에서도확인할수있습니다.그래서아브라함에관해, That by the words just quoted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o “calluponthenameofJehovah” is a customary and general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nd that this worship was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ehovah” is here mentioned, whereas in the preceding verse he was called “God,”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the Lord cannot be worshiped except from charity, since true worship cannot proceed from faith that is not of charity, because it is merely of the lips, and not of the heart. That to “callonthenameofJehovah” is a customary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ppears from the Word; thus it is said of Abraham, that
이말씀에는모든표상적예배의요약이제시되어있습니다. in which text a summary is given of all representative worship.
해설
AC.440은 창4:26의 ‘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불렀더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에서 주님께 드리는 ‘모든예배’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창4:26의 초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발음한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에서 어떠한 예배가 이루어졌는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AC.44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예배의 근원이 ‘체어리티’였다고 말합니다. 그 첫 번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God)과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의 차이입니다. 앞 절, 곧 창4:25에서는 ‘하나님이내게가인이죽인아벨대신에다른씨를주셨다’고 하여 ‘하나님’이라고 했지만, 창4:26에서는 ‘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명칭의 변화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 여기서 말하는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다만 AC.440은 이 글에서 ‘하나님’과 ‘여호와’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그 구체적인 의미까지 미리 확대해서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 근거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은체어리티가아니고서는예배할수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배의 외적 형식보다 그것을 낳는 내적 생명입니다. 신앙이 있다고 말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입술로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 역시 ‘입술의것’일 뿐 ‘마음의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설명은 창4전체의 흐름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고, 그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셨고, 셋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이 나타났으며, 에노스에서는 ‘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긴교회’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비롯된예배’라고 설명됩니다. 결국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예배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가만이 아니라 그 믿음이 어떠한 사랑과 삶에서 나오는가가 예배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창12:8, 13:4와 창21:33의 인용은 ‘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라는 표현이 예배 전반을 가리킨다는 것을 말씀 자체에서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이름을불렀다’거나 브엘세바에서 ‘영원하신하나님여호와의이름을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한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포괄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26의 같은 표현 역시 이러한 말씀의 용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사43:22-23의 인용은 그 의미를 더욱 넓혀 줍니다. 그 말씀에는 여호와를 부르는 것과 함께 번제, 제물, 향 등 당시의 여러 예배 행위가 함께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모든표상적예배의요약’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이름을부른다’는 표현 안에는 한 가지 기도 행위만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예배 전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단, 번제, 제물, 향과 같은 외적 형식들이 서로 달라도 그것들은 모두 예배라는 하나의 큰 범주 안에 놓입니다.
그러나 AC.440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예배를 참된 예배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며 향을 피우는 외적인 예배가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마음의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도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입술의것’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체어리티에서 예배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창4:26의 ‘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시작하였다’는 말씀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문제가 마침내 예배의 문제로까지 나아간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예배는 입술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있는 마음에서 나와 입술과 삶으로 표현되는 예배입니다. (AC.440해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
‘셋’(Seth)이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을뜻한다는것은앞절에서설명했습니다.그의‘아들,곧이름이에노스인이’(son, whosenamewasEnosh)가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긴교회를뜻한다는것역시앞에서말한내용으로분명하며,또한그에게‘에노스’(Enosh)라는이름을붙였다는사실에서도분명합니다.이이름역시‘사람’(man)을뜻하는데,천적인간(celestialman)이아니라여기서‘에노스’라고하는바로그영적인간(spiritualman)을뜻합니다.이것은바로이어지는‘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시작하였다’(thenbegantheytocalluponthenameofJehovah)는말씀에서도분명합니다.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was shown in the preceding verse. That by his “son,whosenamewasEnosh,” is signified a church that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t is called “Enosh,” which name also means a “man,” not a celestial man, but that human spiritual man which is here called “Enosh.”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words that immediately follow: “thenbegantheytocalluponthenameofJehovah.”
해설
AC.439는 앞의 AC.438에서 제시한 에노스의 의미를 그의 이름을 통해 한층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셋은 ‘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을 뜻하고, 그의 아들 에노스는 ‘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긴교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에노스’라는 이름 자체도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덧붙입니다. 에노스가 나타내는 사람은 ‘천적인간’(celestialman)이 아니라 ‘영적인간’(spiritualman)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어 온 독자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질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창1에서는 거듭남의 과정을 거쳐 영적 인간이 되고, 창2에서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된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는 이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홍수 이전인 창4의 에노스에게 스베덴보리가 다시 ‘영적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에노스의 등장을 태고교회 처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회복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AC.439자체는 왜 이 시점에서 다시 영적 인간이 나타나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에노스가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머뭅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에서는 마침내 ‘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이 나타납니다. 이제 에노스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노스는 앞의 가인과 같은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다시 올바른 방향을 찾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겼다’(regardedcharityastheprincipaloffaith)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는 신앙을 버리거나 가볍게 여긴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인정하면서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 교회입니다. 가인에게서 문제였던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것이었습니다. 셋과 에노스에 이르러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고,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시작하였다’는 말씀도 에노스의 의미를 뒷받침한다고 합니다. AC.438에서는 이 말씀을 ‘체어리티에서비롯된그교회의예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겼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나타났다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단순히 교리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예배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439는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를 직접 ‘영적교회’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이 뜻하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한 글만을 근거로 에노스의 교회를 훗날 홍수 후에 등장하는 고대교회와 같은 의미의 ‘영적교회’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태고교회 처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며, 에노스라는 이름에는 분명히 ‘영적인간’이라는 새로운 성격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AC.439는 창4마지막의 회복을 단순한 원상복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을 그대로 두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처음의 천적 상태를 단순히 되돌려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셋으로 나타나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중심에 놓이는 교회를 마련하셨고, 그 교회를 나타내는 에노스라는 이름에는 ‘천적인간이아니라영적인간’이라는 중요한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교회에서 체어리티로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나타납니다. 왜 홍수 이전에 벌써 ‘영적인간’이 등장하는지는 이후의 설명까지 더 살펴보아야 하지만, 적어도 AC.439는 태고교회의 쇠퇴 이후 이루어지는 회복이 처음 상태의 단순한 반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39해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창4:26)
AC.438
‘셋’(Seth)은앞에서말한것처럼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을뜻합니다.그의‘아들’(son),곧이름이‘에노스’(Enosh)인이는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긴교회를뜻합니다.그리고그때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callonthenameofJehovah)시작했다는것은체어리티에서비롯된그교회의예배를뜻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onthenameof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해설
AC.438은 창4:26전체의 속뜻을 먼저 압축하여 제시하는 글입니다. 바로 앞의 AC.434-437에서 셋은 ‘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 곧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해 주신 새로운 신앙을 뜻했습니다. 이제 그 셋에게서 ‘아들’ 에노스가 태어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노스는 단순히 셋 다음에 태어난 한 인물을 넘어, 앞에서 준비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실제로 교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새로운 교회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에노스가 ‘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긴교회’(achurchwhichregardedcharityastheprincipaloffaith)를 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으뜸’은 단순히 체어리티가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로서 중요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무엇이 신앙의 중심이며 무엇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이 교회가 체어리티를 중심적인 것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나타낸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다면, 에노스로 나타난 교회에서는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질서를 찾게 됩니다.
이 점에서 셋과 에노스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곧 체어리티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을 뜻하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형성되어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인정하는 ‘교회’를 뜻합니다. AC.436에서 이미 셋은 ‘체어리티가심어지는신앙’, 에노스는 ‘신앙을통해심어진체어리티’라고 예고되었습니다. AC.438은 이제 그 관계를 창4:26의 본문에 맞추어 더욱 분명하게 풀어 줍니다. 따라서 셋에서 에노스로의 진행은 단순한 부자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신앙에서 그 신앙의 목적이었던 체어리티 중심의 교회로 나아가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보존과도 연결됩니다. 가인이 나타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그 신앙까지 완전히 없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창4마지막에 이르러 셋은 그 목적에 맞게 새롭게 주어진 신앙을, 에노스는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삼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주님의 보존과 회복의 역사가 하나의 교회 형태로 나타난 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불렀더라’는 말씀도 이러한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438은 ‘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callonthenameofJehovah)를 단순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로만 읽지 않고, 그 교회의 ‘예배’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예배가 ‘체어리티에서비롯된’(fromcharity)예배라는 점입니다. 즉 에노스로 나타난 교회의 예배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나 고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그 내적 생명으로 삼은 예배였습니다.
따라서 ‘그때에비로소’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그이전에는아무도여호와를부르거나예배하지않았다’는 뜻으로 곧바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38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예배 행위가 역사상 처음 생긴 시점 자체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새로운 교회가 이제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교회적 의미입니다. ‘그때’는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에노스로 나타난 체어리티 중심의 교회가 형성되고, 그 교회의 성격에 맞는 예배가 나타나는 흐름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마지막은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진 쇠퇴의 이야기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마침내 황폐에 이르렀지만,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새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셋에서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나타나고, 에노스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가 나타나며, 마침내 그 교회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438은 창4마지막 절을 통해 신앙의 회복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목적은 신앙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이며, 그 체어리티에서 참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AC.438해설)
창세기 4장과 5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두 계열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옵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오고, 창5에서는 아담에게서 셋을 거쳐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계보가 나옵니다. 그래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갈라져 처음부터 나란히 진행된 두 혈통이며, 하나는 점점 악해지고 다른 하나는 태고교회의 선한 흐름을 이어 갔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4-437을 함께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교회적 흐름이 드러납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AC.435입니다. 창4:25에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셋을 낳는 이야기가 나오고, 창5:1-4에는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와 셋의 출생이 나옵니다. 문자적으로는 같은 사람과 같은 사건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두 기록의 속뜻이 서로 다르다고 명시합니다. 창4:25의 ‘사람과그의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낸 ‘새교회’를 뜻하지만, 창5:1-4에서는 ‘태고교회의첫후손’이 뜻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동일한 아담, 하와, 셋을 속뜻에서도 반드시 하나의 동일한 교회나 동일한 상태로 대응시켜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창1과 창2의 관계를 들어 설명합니다. 두 장에는 사람의 창조와 피조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창1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가, 창2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가 다루어진다고 합니다. 동일한 사람이나 사물이 반복될 때에는 ‘언제나의미의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속뜻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족보 역시 문자적 혈통의 관계를 그대로 속뜻의 교회 역사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더 결정적인 설명은 AC.436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에서 지금까지 전개된 내용을 직접 하나의 ‘연속적인순서’로 정리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심으로써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가인의 표에서 바로 셋으로 건너뛰지 않습니다. 야발은 주님께서 신앙을 통해 주신 ‘사랑의거룩한것과거기서나오는선’을, 유발은 ‘신앙의영적인것’을, 두발가인은 이들로부터 나온 ‘자연적선과진리’를 나타냅니다. 이어 창4의 마지막 두 절에서 ‘사람과그의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린 새 교회를,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을, 다음 절의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실제로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마지막 두 절을 앞에서 전개된 ‘이모든것의결론,따라서그요약’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설명을 따르면 속뜻으로는 가인 계열과 셋 계열 사이에 문자적 족보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가인계열은악한계열이고셋계열은선한계열이며,두계열이처음부터서로별개로병행했다’고만 설명하면 AC.436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가인에게서 보존된 신앙, 그 신앙을 통하여 주어진 여러 선과 진리, 아다와 씰라로 나타난 새 교회, 그리고 마침내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이 하나의 교회적 흐름 안에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시 단순한 시간표로 만들어 ‘가인계열이완전히끝난다음셋계열이시작되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34-437은 각 교회가 정확히 어느 시기에 시작되고 끝났는지에 관한 역사적 연대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435는 같은 아담과 아내와 셋의 기록조차 창4와 창5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문자적 족보의 시간 순서와 속뜻의 교회적 순서를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도 빛을 줍니다. 태고교회라고 하면 창2에서 묘사된 천적 인간의 아름다운 상태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면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지는 창4의 어두운 내용이 어떻게 태고교회와 관련된 역사 안에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창3이후의 내용은 이미 처음의 천적 상태가 변하고 쇠퇴하며 여러 교회적 상태로 분화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와그후손’이라는 큰 흐름 안에 본래의 천적 상태와 크게 달라진 후대의 상태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 자체가 모순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AC.434-437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 글들만으로 태고교회 전체의 역사적 연대나 각 교회의 존속 기간, 서로 겹쳐 존재했는지 여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창4의 모든 인물을 실제 역사적 집단의 정확한 연속 단계로 환산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밝히는 것은 ‘누가언제누구와동시에살았는가’보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떻게 분리되고 소멸되었으며, 주님께서 남은 신앙을 어떻게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새 교회를 마련하셨는가 하는 영적 연속성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어두운 부분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힙니다.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이야기는 태고교회라는 밝은 역사에 우연히 끼어든 암흑기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마침내 황폐에 이르는 과정과, 그럼에도 주님께서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보존하여 다시 교회를 일으키시는 과정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표’는 그 전환에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 자체가 장차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합니다. AC.437에 따르면 셋은 ‘다른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다른신앙’입니다. 가인 역시 신앙을 나타냈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고, 셋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이어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의 끝은 ‘악한가인계열이야기를끝내고이제선한셋계열로넘어간다’는 단순한 계보 전환이라기보다, 분리되고 황폐해진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질서로 다시 이어지는 결론으로 읽는 것이 AC.434-437의 설명에 더 가깝습니다.
결국 ‘가인계열과셋계열은처음부터병행한두계열인가?’라는 질문에는 문자적 족보와 속뜻의 교회적 의미를 구별하여 답해야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두 계보가 구별되어 기록되어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그것을 곧바로 서로 독립된 두 교회의 병행으로 옮겨 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창4에서는 가인으로 나타난 분리된 신앙의 보존에서 시작하여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 그리고 에노스로 나타날 체어리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연속적인 교회적 흐름이 제시됩니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인간의 두 혈통이 아니라, 인간이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무너뜨린 뒤에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AC.435심화1)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셋’(Seth)이체어리티로이어지는새로운신앙을뜻한다는것은그의이름으로설명됩니다.그의이름이그렇게붙여진것은하나님께서‘가인이죽인아벨대신에다른씨를주셨기’(appointedanotherseedinsteadofAbel, whomCainslew)때문이라고합니다.하나님께서‘다른씨를주셨다’(appointedanotherseed)는것은주님께서다른신앙을주셨다는뜻입니다.‘다른씨’(anotherseed)는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이기때문입니다.‘씨’(seed)가신앙을뜻한다는것은앞의AC.255에서볼수있습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anotherseedinsteadofAbel,whomCainslew.” That God “appointedanother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해설
AC.437은 창4:25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셋’과 ‘다른씨’가 왜 새로운 신앙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34에서는 셋이 ‘체어리티를얻을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이라고 했고, AC.436에서는 그것을 ‘체어리티가심어지는통로가되는신앙’이라고 좀 더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해석의 근거를 창4:25자체의 ‘다른씨’라는 표현과 셋의 이름에서 찾습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다시 ‘씨’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다른씨’(anotherseed)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다른신앙을주셨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다른신앙’은 신앙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가인으로 나타났던 신앙과는 성격이 달라진 신앙을 뜻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지만,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은 모두 신앙과 관계되지만,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맺는 관계가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는 AC.436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 자체를 완전히 없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표’를 통해 보존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AC.437의 ‘다른씨’는 그 긴 과정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가인과 같은 분리된 신앙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 이어질 수 있는 ‘다른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씨’가 신앙을 뜻할까요? 바로 이 점 때문에 AC.437은 AC.255를 참조합니다. AC.255는 창3:15의 ‘여자의씨’(seedofthewoman)를 설명하면서, ‘여자’(woman)는 교회를 뜻하고 그 교회의 ‘씨’는 신앙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님을믿는신앙으로부터교회가교회라불리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437에서 ‘다른씨’가 ‘다른신앙’을 뜻한다는 해석은 이번 글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세워진 ‘씨=신앙’이라는 상응에 근거합니다.
AC.255에 인용된 여러 성경 구절도 이 의미를 뒷받침합니다. 말2:14-15에서는 ‘하나님의씨’(seedofGod), 사44:3에서는 ‘네씨’(thyseed), 계12:17에서는 여자의 ‘남은자손’(remnantofherseed), 시89편에서는 다윗의 ‘씨’(seed)가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가운데 특히 ‘여자’가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의 ‘씨’가 신앙을 나타낸다는 관계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창4:25의 ‘다른씨’ 역시 단순히 아벨 대신 태어난 또 하나의 육적인 후손이라는 의미를 넘어, 새 교회에 주어진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창4:25은 ‘아벨대신에’ 다른 씨가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므로, 여기에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라면 아벨을 대신하여 주어진 셋도 체어리티를 뜻해야 할 것 같은데, 스베덴보리는 셋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AC.434-437을 함께 읽으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셋은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다시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의 에노스가 ‘신앙을통해심어진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벨대신’이라는 말은 상응하는 의미가 단순히 ‘체어리티에서체어리티로’ 일대일 교체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소멸된 체어리티가 다시 세워지기 위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25의 구조가 상당히 정교합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는 가인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마저 함께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보존하셨습니다.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자연적 선과 진리가 차례로 주어졌고, 마침내 셋이라는 ‘다른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의 에노스에서 그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창4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처음의 가인과 아벨 문제를 다시 풀어 가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것은 주어가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다른씨를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남아 있는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새 교회를 준비하시며, 마침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시작의 중심에는 인간의 자기 회복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결국 AC.437에서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인물도, 아벨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아들도 아닙니다. 그는 ‘다른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가인으로 나타난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셋으로 나타난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앙을 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로써 창4:25은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어떻게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글로 마무리됩니다. (AC.437해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여자의‘아들’(son),곧그가셋이라이름한아들이체어리티에이를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을뜻한다는것은앞에서말한것으로부터분명하며,또한가인에관해‘아무도그를죽이지못하도록그에게표를주셨다’(markwassetuponhim, lestanyoneshouldslayhim)고기록된사실에서도분명합니다.이주제가연속적으로전개되는순서는다음과같습니다.사랑에서분리된신앙은‘가인’(Cain)으로,체어리티는‘아벨’(Abel)로나타냈으며,분리된상태의그신앙이체어리티를소멸시킨것은가인이아벨을죽인것으로나타냈습니다.체어리티가그신앙을통해주님에의해심어질수있도록신앙을보존하신것은아무도가인을죽이지못하도록여호와께서가인에게표를주신것으로나타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wassetuponhim,lestanyoneshouldslayhim.”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후사랑의거룩한것과거기서나오는선이주님에의해신앙을통해주어진것은아다가낳은야발로나타냈고,신앙의영적인것이주어진것은그의아우유발로나타냈으며,이들로부터자연적선과진리가나온것은씰라가낳은두발가인으로나타냈습니다.창세기4장의마지막두절에는이모든것의결론,따라서그요약이들어있습니다.곧‘사람과그의아내’(manandhiswife)는앞에서아다와씰라라고불렸던그새교회를뜻하고,‘셋’(Seth)은체어리티가심어지는통로가되는신앙을뜻하며,이제이어지는절의‘에노스’(Enosh)는신앙을통해심어진체어리티를뜻합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andhis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해설
AC.436은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를 거의 한눈에 펼쳐 보이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지금까지 가인, 아벨, 가인의 표, 야발, 유발, 두발가인, 그리고 마지막의 셋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개별적으로 설명해 왔다면, 여기서는 그 모든 내용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묶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주제가연속적으로전개되는순서는다음과같다’고 하며 그 흐름을 다시 정리합니다. 따라서 창4의 인물들을 서로 독립된 상징들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와 소멸, 보존, 그리고 다시 결합을 향한 과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출발점은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AC.436은 가인의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분리된신앙’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곧바로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앞에서 이 ‘가인의표’를 신앙의 보존으로 설명했지만, AC.436은 이제 그 보존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단순히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그신앙을통해주님에의해심어질수있도록’ 하기 위한 보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그 신앙을 최종 상태로 인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실 수 있는 수단을 남겨 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가인의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인의 표는 악한 상태를 승인하거나 분리된 신앙을 이상적인 신앙으로 인정한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남아 있는 신앙을 파괴되지 않게 보존하시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인간 편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새로운 교회의 출발점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의 의미도 이러한 큰 흐름 안에서 다시 정리됩니다. 야발은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주신 ‘사랑의거룩한것과거기서나오는선’을, 유발은 ‘신앙의영적인것’을, 두발가인은 이들로부터 나온 ‘자연적선과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목축, 음악, 금속 기술의 기원을 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 안에 다시 사랑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를 마련해 가시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434-435에서 제기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가인에게서 시작된 후손들의 계보와 셋에게서 시작되는 계보를 두 개의 나란한 혈통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6은 속뜻으로는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가 셋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과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되고,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과 선 및 영적인 것이 주어지며, 마침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흐름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창4의 마지막 두 절이 ‘이모든것의결론,따라서그요약’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이것은 창4:25-26을 앞의 가인 계열과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족보의 시작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단서입니다. 창4전체에서 전개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이야기가 마지막 두 절에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사람과그의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렸던 새 교회이고, 그들에게서 난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셋은 앞의 이야기를 지워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인물이 아니라, 앞에서 보존되고 준비되어 온 것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지점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36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읽지 않은 창4:26의 에노스까지 미리 밝혀 줍니다. 셋이 ‘체어리티가심어지는통로가되는신앙’이라면, 에노스는 ‘신앙을통해심어진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의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체어리티인 것이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이고, 에노스에 이르러 그 체어리티가 실제로 심어진 상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전체 흐름을 보면, 분리된 신앙에서 시작하여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그럼에도 신앙이 보존되며, 그 신앙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사랑과 선을 주시고, 마침내 새로운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하나의 긴 과정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은 계속 주님께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은 보존된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AC.436은 체어리티가 ‘주님에의해’ 신앙을 통해 심어진다고 거듭 말합니다. 신앙은 통로이며,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가인의 표에서부터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과정의 중심에는 인간이 무너뜨린 것 가운데서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36은 창4의 어두운 역사를 단순한 쇠퇴의 기록으로 끝내지 않고, 그 쇠퇴 속에서도 새 교회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주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436해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
여기서‘사람’(man)과그의‘아내’(wife)가앞에서아다와씰라로나타낸새교회를뜻한다는것은누구도문자적의미만으로는알수도,추론할수도없습니다.왜냐하면‘사람과그의아내’(manandhiswife)는앞에서는태고교회와그후손을뜻했기때문입니다.그러나이것은속뜻으로는매우분명하며,또한바로다음장인창5:1-4에서사람과그의아내,그리고그들이셋을낳는일이다시언급되면서도전혀다른말로기록되어있다는사실에서도분명합니다.그경우에는태고교회의첫후손이뜻해집니다. 만일지금다루는이구절이그와다른것을뜻하지않는다면,같은일을여기서다시말할필요가없었을것입니다.이와마찬가지로창세기1장에서는사람의창조와땅의열매들과짐승들의창조가다루어지고,이어2장에서그것들이다시다루어집니다.그이유는앞에서말했듯이1장에서는영적인간의창조를다루는반면,2장에서는천적인간의창조를다루기때문입니다. 이처럼동일한사람이나동일한것이반복하여언급될때에는언제나의미의차이가있습니다.그러나무엇이뜻해지는지는속뜻을통하지않고서는도저히알수없습니다. 여기서는문맥의연결자체가앞에서제시한의미를확증합니다.여기에더하여‘사람’[homo]과‘아내’(wife)는지금다루고있는모교회(parentchurch)를뜻하는일반적인용어라는점도고려해야합니다. That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no one could know or infer from the literal sense, because the “manandhiswife” had previously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ts posterity; but it is very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mmediately afterwards, in the following chapter (verses 1–4), the man and his wife, and their begetting Seth, are again mentioned, but in entirely different words, and in this case there is signified the fir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If nothing else were signified in the passage before us, there would be no need to say the same thing here: in like manner as in the first chapter the creation of man, and of the fruits of the earth, and of the beasts, is treated of, and then in the second chapter they are treated of again, for the reason, as has been said, that in the first chapter it is the creation of the spiritual man that is treated of, whereas in the second chapter the subject is the creation of the celestial man.Whenever there is such a repetition in the mention of one and the same person or thing, it is always with a difference of signification, but what it is that is signified cannot possibly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Here, the connection itself confirms the signification that has been given, and there is the additional consideration that man [homo] and wife are general terms which signify the parent church that is in question.
AC.435는 창4:25의 ‘사람과그의아내’를 왜 앞의 아다와 씰라로 나타낸 ‘새교회’로 해석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들은 당연히 아담과 하와입니다. 더구나 바로 다음 장인 창5:1-4에서도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셋의 출생이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4:25과 창5:1-4의 기록이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창4:25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앞서 나타낸 새 교회를, 창5:1-4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것은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알수도,추론할수도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대목입니다. 독자가 창4:25의 ‘사람과그의아내’를 이전부터 등장한 아담과 하와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실제로 앞에서는 같은 표현이 태고교회와 그 후손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속뜻은 동일한 인물이나 표현에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의미만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떤 교회와 어떤 상태가 다루어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가 이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말씀의 ‘반복’입니다. 창4:25에서 이미 사람과 그의 아내가 셋을 낳았다고 했는데, 창5:1-4에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의 출생이 다시 기록됩니다. 만일 두 기록이 속뜻으로도 완전히 같은 내용을 말한다면 같은 이야기를 다시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반복은 단순한 중복이 아니라, 겉으로 비슷한 기록을 통해 서로 다른 내적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려 주는 표지가 됩니다.
그 예가 바로 창1과 창2입니다. 두 장 모두 사람과 창조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보면 같은 창조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창1은 영적 인간의 창조를, 창2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룹니다. 동일하거나 비슷한 사람과 사물이 다시 등장하더라도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원리를 창4:25과 창5:1-4에도 적용합니다.
이 설명은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문자적인 족보만 따라가면 아담과 하와에게서 가인으로 이어지는 계열과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이 서로 나란히 진행된 두 혈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창4에는 가인의 후손들이 이어지고, 창5에는 셋을 통한 아담의 계보가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5는 이러한 문자적 계보 관계를 그대로 속뜻의 교회 역사에 옮겨 놓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창4:25의 사람과 아내와 셋을 설명하면서도, 곧이어 창5:1-4에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아내와 셋은 ‘태고교회의첫후손’을 뜻한다고 명시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문자적으로는 같은 아담과 하와와 셋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단순히 ‘한쪽은악한계열,다른한쪽은선한계열이며두계열이처음부터병행했다’는 식으로만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창4의 모든 교회 상태가 시간적으로 완전히 끝난 다음 창5의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이 글 하나만으로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AC.435가 직접 밝히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곧 말씀의 족보와 반복되는 인물들은 단순한 시간 순서나 혈통 관계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들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와 창5의 관계 역시 문자적인 계보의 선후 관계만으로 결정하기보다, 각 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어떤 교회와 어떤 상태를 다루고 있는지를 따라가며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를 한 번 더 정리합니다. ‘사람’[homo]과 ‘아내’는 지금 다루고 있는 ‘모교회’(parentchurch)를 뜻하는 일반적인 용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아내’라는 표현 자체가 언제나 특정한 하나의 교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4:25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나타낸 새 교회가 지금 다루는 모교회이고, 창5:1-4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이 다루어집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문맥과 속뜻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AC.435는 창4:25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세기 초반 전체를 읽는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같은 사람과 사건이 반복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영적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1과 창2가 각각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듯, 창4:25과 창5:1-4의 사람과 아내와 셋도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적 내용을 다룹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계보 역시 문자적인 두 혈통의 병행이라는 틀만으로 이해하기보다, 태고교회와 그 후손 가운데 일어난 여러 교회의 형성과 변화라는 더 큰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AC.436-437은 이제 그 가운데 ‘셋’과 ‘다른씨’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더 밝혀 줄 것입니다. (AC.435해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창4:25)
AC.434
여기서‘사람’(man)과그의‘아내’(wife)는앞에서‘아다와씰라’(AdahandZillah)로나타낸새교회를뜻합니다.그리고그여자의‘아들’(son),곧이름을셋이라한아들은체어리티를얻을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을뜻합니다.‘하나님이가인이죽인아벨대신에다른씨를주셨다’(GodappointedanotherseedinsteadofAbel, whomCainslew)는것은가인이분리하여소멸시켰던체어리티가이제주님에의해이교회에주어졌다는뜻입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and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By “GodappointedanotherseedinsteadofAbel,whomCain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해설
AC.434는 라멕으로 끝난 계보 뒤에 왜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셋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의 AC.432-433까지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그리고 마침내 라멕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되는 황폐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창4:25은 갑자기 다시 ‘아담이그의아내와동침하매그가아들을낳아그의이름을셋이라하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가족 계보가 다시 이어지는 장면으로만 보지 않고, 황폐 이후에 주님께서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장면으로 읽습니다.
먼저 여기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씰라’로 나타난 새 교회를 뜻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곧 아다와 씰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같은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의 라멕 계열에서 아다와 씰라가 등장한 뒤, 이제 ‘사람과그의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새 교회가 다시 언급됩니다. 따라서 창4:25은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준비된 새 교회의 흐름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이 새 교회에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셋(Seth)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를얻을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으로 풀이합니다. 이 표현은 특히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신앙’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가인은 결국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반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를 다시 얻을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창4:25의 ‘아벨대신에다른씨를주셨다’는 말이 중요해집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른씨’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가인이 분리하고 소멸시킨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이 새 교회에 다시 주어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인간 스스로 되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에의해’ 다시 주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셋 자신이 곧 체어리티라고 하지 않고, 셋은 ‘체어리티를얻을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이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씨’가 아벨을 대신한다는 말씀의 목적은 단순히 아벨이라는 인물을 셋이라는 인물이 대신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가 다시 교회에 주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 셋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셋의 등장은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도록 질서가 회복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것은 앞의 라멕 이야기를 지나온 독자에게 상당히 중요한 장면입니다. 라멕에게서는 ‘사람’과 ‘어린아이’가 모두 죽었습니다. 곧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되어 ‘성한곳이없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 황폐로 창4를 끝내지 않습니다. 바로 뒤에서 ‘하나님이다른씨를주셨다’고 합니다. 황폐 이후에도 주님께서는 체어리티가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신앙을 일으키시고, 그것을 통해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AC.434는 이 전환을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결국 셋의 탄생은 단순한 족보의 연장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 주님께서 새 교회에 그것을 다시 주시는 장면입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분리했고 아벨을 죽였지만,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AC.434에서 중심에 계신 분은 셋 자체라기보다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황폐해진 뒤에도 ‘다른씨’를 주시고, 다시 사랑과 신앙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AC.434해설)
※오늘(2026/09/27)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5, ‘하나님의크신사랑’, 찬95, ‘나의기쁨나의소망되시며’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여섯 번째, 19절로 24절, AC글 번호로는 405번에서 433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19-24)
제목은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이며, 다음은‘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그리고여기서라멕이‘일흔일곱배로보복을받을것’(beavengedseventyandsevenfold)이라는말은지극히거룩한것을침해했기때문에정죄가있다는뜻입니다. And here, that Lamech should “beavengedseventyandsevenfold” 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해설
AC.433은 앞의 AC.432에서 ‘일흔일곱배의보복’이 정죄를 뜻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앞 번호에서는 라멕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후자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왜 그러한 상태를 하필 ‘일흔일곱배’라는 수로 표현하는지, 말씀에서 ‘일곱’이 지니는 의미를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창4:15로 돌아갑니다. 가인이 ‘일곱배로보복을받을것’이라는 말은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조차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남아 있는 거룩한 것을 함부로 파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를 ‘일곱째날’에서 찾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엿새와 창세기 2장의 일곱째 날을 설명하면서, 그는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의 거룩함은 숫자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에서 일곱째 날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칙도 덧붙입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뜻하지만, 그 거룩함은 ‘다루는대상에따라’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수가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구절의 의미가 완전히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에 관해 일곱이라고 말하는지, 그 구절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원칙을 놓치면 말씀의 숫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일정한 뜻으로만 대입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일흔’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한 시대를 십 년으로 나타내므로, 일흔은 일곱 시대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것을 표현할 때 ‘일흔일곱배’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일흔이나 일흔일곱을 실제 연수나 형벌의 횟수로 계산하는 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수들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8:22를 인용합니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자,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용서의 횟수에 상한선을 정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곧 영원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끝없는 용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수가 용서와 연결되는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의 보복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다루는대상에따라’라는 원칙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의미는 끝없는 용서이고, 창세기에서 밝히는 의미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입니다. 따라서 두 구절의 숫자 표현을 단순히 같은 결과를 나타내는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거룩함의 의미가 각 구절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일흔일곱배의보복’이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는 뜻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앞의 AC.432와 연결하면, 라멕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상태가 왜 ‘일흔일곱배’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일흔일곱 배를 실제 형벌의 배율로 계산하거나,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는 속뜻과 다릅니다. (AC.433해설)
심화
1.‘일곱번이아니라일흔번씩일곱번까지용서하라는말씀은왜인용되었는가?’
스베덴보리가 AC.433에서 마18:22를 인용한 이유는 라멕의 ‘일흔일곱배의보복’에 사용된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말씀은 얼핏 보면 서로 정반대의 내용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창세기에서 라멕은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문자적인 횟수로만 읽으면 용서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은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용서에 끝을 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단순히 ‘계속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숫자를 사용하셨을까요?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말씀의 ‘일곱’이 지니는 의미와 연결합니다.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나타내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곱은 거룩한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일곱과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단순한 계산을 넘어 거룩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할 점이 있습니다. 창4:24의 표현은 ‘일흔일곱배’이고, 마18:22의 개역개정 표현은 ‘일흔번씩일곱번’입니다. 두 표현을 산술적으로 같은 수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구절을 연결하는 이유는 숫자가 계산상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번호의 논증은 산술적 일치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같은 계열의 숫자가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표현을 끝없는 용서, 곧 영원한 용서로 풀이합니다.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두 구절은 같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대상에 적용된 숫자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용서와 창세기의 정죄를 단순히 ‘하나는무한한자비,다른하나는무한한복수’라는 대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마태복음의 용서가 끝없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라멕에 대해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번 번호에서 정죄를 ‘끝없는복수’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연결하되, 각각에 관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내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란 잘못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피해를 계속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33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용서의 횟수에 끝을 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실제 관계에서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고 어떤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까지 이번 번호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받아들이면서도, 본문이 다루지 않은 문제에 관한 결론을 성급히 덧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마18:22를 인용한 것은 라멕의 보복을 용서와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일곱과 그에 연결된 수들이 문자적인 횟수를 넘어 거룩한 의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끝없는 용서로,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로 나타납니다. 이 구별을 이해하면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는 낯선 표현을 단순한 형벌의 배율로 읽지 않고, 라멕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3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