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6-14)

 

 

제목은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인 아벨이 죽임을 당했고, 그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그러나 신앙 자체를 보존하시고,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황폐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지난주 시작한 창5에서는 또 다른 계열인 셋 계열을 통해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의 계승과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였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였습니다. 그러나 셋 교회에 이르면서 그 완전성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변화가 에노스와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어떻게 깊어지는지 살펴봅니다. 특별히 기억할 것은 ‘참된 신앙의 생명은 진리를 아는 데만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96-509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1-5을 통하여, 태고교회가 어떤 교회였으며 그 뒤를 이은 셋(Seth) 교회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오는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셋 교회에 이르면서 사랑의 중심성과 퍼셉션의 완전성에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6-14, AC.496-509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셋이 에노스(Enosh)를 낳고, 에노스가 게난(Kenan)을 낳으며, 게난이 다시 마할랄렐(Mahalalel)을 낳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나이, 자녀들의 출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가 어떻게 서로 다른 상태를 거치며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6절은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라고 합니다. AC.496-498에 따르면 여기서 ‘셋’은 태고교회의 뒤를 이은 두 번째 교회이며, ‘에노스’는 셋 교회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입니다. 셋 교회는 최초의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넘어,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어졌다’는 사실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노스 교회는 셋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았지만, 셋 교회와 완전히 같은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앞선 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과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에 그대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것들이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교회가 차례로 생겨났다는 기록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상태가 세대를 따라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97은 이러한 변화를 ‘교회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지나면서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모습이 반드시 먼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이름도 남아 있고, 신앙의 형식도 남아 있으며, 앞선 세대가 전해 준 진리도 상당 부분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을 행하는 생명,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능력은 점차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어 7절과 8절에서는 셋이 에노스를 낳은 뒤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499는 여기서도 ‘날들’과 ‘연수’는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것은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셋 교회가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 교회가 일정한 상태들을 지나며 존속했다는 뜻이고,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죽었다는 것은 셋 교회를 특징짓던 고유한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셋으로부터 이미 에노스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9절은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00은 에노스를 세 번째 교회, 게난을 네 번째 교회라고 밝힙니다. 에노스는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천적 상태는 점차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AC.501은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열매와 씨앗’이고, 다른 하나는 ‘뇌와 그 덮개들’입니다.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에는 생명을 품고 있는 중심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열매의 열매’, 또는 ‘씨앗의 씨앗’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중심에서 바깥으로 나아갈수록 본질적인 것은 점차 적어지고, 마침내 얇은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내적인 섬세한 조직으로부터 점차 더 일반적이고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져 마지막에는 두개골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이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로부터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이어졌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가장 내적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본질적 생명은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껍질’이나 ‘덮개’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껍질은 열매를 보호하고 덮개는 그 안에 있는 것을 감쌉니다. 문제는 껍질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이 점차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와 예배, 신앙의 형식과 전통은 모두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지 않다면, 교회는 겉모습을 유지하면서도 그 본질적 생명은 잃어 갈 수 있습니다.

 

AC.502는 이러한 쇠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퍼셉션의 완전성이 감소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인 ‘사람’, 곧 아담 교회와 그 뒤를 이은 셋과 에노스 교회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퍼셉션의 완전성은 서로 달랐습니다. 최초의 교회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매우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후대의 교회들에서는 그 능력이 점차 약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은 퍼셉션의 범위가 넓어져 더 좋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선과 진리의 차이와 그 성질을 매우 분명하고 세밀하게 알아차렸지만, 후대로 갈수록 그것을 점점 덜 명료하게, 보다 막연하게 퍼셉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분명했던 것이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의 완전성이 ‘명료하게 퍼셉션하는 능력’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이 점차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AC.503에 이르면 퍼셉션에 관한 더욱 깊은 가르침이 나타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단순히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능력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무엇이 선인지 분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선을 실제로 행하기를 사랑하고, 선을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이 살아 있는 퍼셉션의 본질이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아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쓰임’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마음속에 있는 좋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로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이러한 쓰임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특히 AC.503은 ‘주님께서는 쓰임으로부터, 쓰임을 통하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생명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이 인간의 행위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날 때, 그 사랑과 신앙이 살아 있는 생명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단지 아는 것 자체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곧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AC를 읽는 목적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많이 알고, 상응을 정확히 이해하며,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마지막 목적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에 관한 지식은 많아질 수 있어도 그 안의 영적 생명은 그만큼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지난주 살펴본 ‘천국의 기쁨은 쓰임에 있다’는 가르침과 오늘의 AC.503은 깊이 연결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이웃을 섬기는 데서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태고교회 사람들 역시 선을 행하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사랑은 선을 행하는 데서 기뻐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의 질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했다는 것은 단지 특별한 영적 감각이 약해졌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 퍼셉션에 생명을 주던 사랑과 선한 쓰임의 기쁨 역시 약해져 갔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의 생명이 약해지면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보는 능력도 함께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10절과 11절에서는 에노스가 게난을 낳은 뒤 자녀들을 낳고,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04-505는 여기서도 앞서 설명한 ‘날들과 연수’, ‘아들들과 딸들’, ‘죽음’의 의미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AC.505는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덧붙입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와 셋, 에노스라는 세 교회는 뒤에 이어지는 교회들과 비교할 때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 뒤에 이어지는 교회들은 그 알맹이를 둘러싼 ‘막과 같은 부분들’에 비유됩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에 하나의 중요한 경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 곧 아담 교회에서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퍼셉션은 점차 감소했지만, 이 세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 생명에 가까운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게난부터는 그 상태가 한층 더 외적인 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12절에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06은 게난을 네 번째 교회, 마할랄렐을 다섯 번째 교회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507에서는 게난 교회의 상태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게난은 앞선 세 교회처럼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 포함시키기 어려웠습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비교적 명료했던 퍼셉션이 게난에 이르러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를 둘러싼 ‘첫 번째의 더 부드러운 막’에 비유합니다. 여기서도 변화는 갑작스러운 단절이 아닙니다. 게난 교회가 곧바로 가장 바깥의 딱딱한 껍질처럼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알맹이에 가까운 부드러운 막에 해당했습니다. 다시 말해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내적 생명으로부터 조금 더 멀어졌지만, 여전히 그 계승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의 상태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선과 진리를 비교적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구체적인 차이와 성질을 이전처럼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퍼셉션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이어질 에녹(Enoch)과 노아(Noah)의 교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점차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훗날 에녹을 통하여 퍼셉션에서 나온 것들이 교리의 형태로 보존되고, 마침내 노아에 이르러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달라진다고 해서, 주님께서는 곧바로 인간을 버리시거나 교회의 역사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계속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가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어 13절과 14절에서는 게난이 마할랄렐을 낳은 뒤 자녀들을 낳고,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08은 여기서도 ‘아들들과 딸들’이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게난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 진리와 선을 ‘더욱 일반적인 방식으로’ 퍼셉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앞선 교회에도 진리와 선이 있었고, 게난 교회에도 진리와 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퍼셉션하는 상태는 같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같은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도, 그 표현이 나타내는 진리와 선의 구체적인 어떠함은 각각의 교회에 따라 달라집니다. ‘죽었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난이 죽었다는 것은 게난 교회를 특징짓던 그러한 퍼셉션의 상태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선과 진리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게난으로부터 마할랄렐이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AC.509는 이 모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모든 것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 짧은 문장은 창5뿐 아니라 말씀의 상응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날들과 연수’는 때와 상태들을, ‘죽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의 끝을 의미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응의 기본 의미를 안다고 해서 그 말씀이 나타내는 구체적인 속뜻까지 모두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아들들’이 진리를 의미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교회에서 나온 진리인지에 따라 그 진리의 질이 달라집니다. 같은 ‘딸들’이 선을 의미하더라도 그 선이 어떤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에 속하는지에 따라 그 어떠함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같은 ‘죽었다’는 말씀도 무엇의 끝인지는 해당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몇 가지 단어의 뜻을 외워서 성경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암호표가 아닙니다. 상응에는 일정한 질서와 기본 의미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전체 문맥과 그것이 관계하는 영적 상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상응의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응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영적 상태를 드러내고 계시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을 읽더라도 그 말씀이 어떤 사랑과 선, 어떤 신앙과 진리의 상태에 관계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AC.496-509를 하나로 모아 보면, 창5의 계보에는 두 가지 흐름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는 ‘퍼셉션의 점진적인 쇠퇴’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능력이 점차 약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명료했던 퍼셉션이 점점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열매와 씨앗의 알맹이에서 그것을 둘러싼 부드러운 막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교회의 내적 상태도 점차 외적인 것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쇠퇴 속에서도 계속되는 주님의 보존과 계승’입니다. 한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이 최초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구원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의 중심에는 오늘 AC.503에서 살펴본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참된 영적 생명은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의 생명은 단지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선을 행하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사랑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생명도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 얼마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완전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가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살아 있으며,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우며 신앙의 지식을 쌓아 갑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을 행하는 기쁨이 점점 커지고 있는지, 아니면 아는 것은 많아지지만 실제로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로 살아가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이 주어져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이 형성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에서 행할 때, 그 진리는 단순한 지식으로 머무르지 않고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특별한 퍼셉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이웃을 판단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일을 무거운 의무로만 여기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흘러가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창5:6-14은 우리에게 교회의 쇠퇴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쇠퇴의 한가운데서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흐려지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약해졌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 자체가 약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달라진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다음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다시 게난에서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계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하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이어 가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처음의 완전한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곧바로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흐려질 때에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때에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과 진리를 붙들고,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옮기며, 작은 일에서부터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이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받은 사랑이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창5의 계보는 그렇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를 넘어, ‘내가 아는 진리는 지금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사랑은 누구를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살아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의 열매가 맺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상태가 변하고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음 길을 준비하시는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오늘 창5:6-14, AC.496-509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퍼셉션은 흐려져도 주님의 사랑과 섭리는 흐려지지 않으며, 참된 신앙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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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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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8,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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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7-8, AC.499, ‘날들과 연수,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음의 의미’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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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0,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던 에노스와 그 뒤를 이은 게난’(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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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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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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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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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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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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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C.506-507)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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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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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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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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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6-14, AC.496-509 중 리딩 필독 세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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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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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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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025) 리딩 본문(창5:15-20, AC.510-515)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마할랄렐과 야렛, 그리고 에녹으로 이어지는 교회의 계승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게 되면서 사랑과 퍼셉션의 생명이 더욱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야렛을 거쳐 에녹에 이르면,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진리들을 후대를 위해 교리로 보존하는 새로운 전환이 나타납니다. 다음 주에는 이 변화를 통하여 ‘진리를 아는 기쁨과 선을 행하는 기쁨 중 무엇이 앞서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의 퍼셉션이 약해지는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진리를 보존하시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18(D1)

 

2673, 2, 창5.2, 2026-10-18(D1)-주일예배(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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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11, 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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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0-503 심화

1.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흐려졌는가?’

 

AC.500-503을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던 가장 천적인 교회였는데, 왜 그 능력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점점 흐려졌을까요?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했지만, AC.502는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여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분명했던 퍼셉션이 점점 흐릿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간 그 자체는 교회를 쇠퇴시키는 원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세대를 거치면서 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배경 가운데 하나는 AC.494에서 설명한 ‘유전적 악의 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단순히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전달된 어떤 고정된 죄의 덩어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을 반복하여 자기 삶의 일부로 만들면 그것이 그의 본성에 더해지고, 그렇게 형성된 성향이 후대에 전달되면서 유전적 악은 세대를 거쳐 더욱 증가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후손이 조상의 죄책까지 물려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AC.4563에서 분명히 하듯 사람은 유전적인 것 자체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적인 악으로 만들 때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깊어질수록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맑게 받아들이는 내적 상태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AC.501의 ‘열매와 씨앗’의 비유는 이러한 변화를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열매와 씨앗의 가장 안쪽에는 ‘열매의 열매’, ‘씨앗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중심이 있고, 거기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그 본질은 점차 적어져 마침내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뇌의 비유도 같습니다. 가장 내적인 섬세한 유기적 형태로부터 점차 더 일반적이고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져 마지막에는 두개골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비유를 든 것은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이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에서 다음 교회가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이어졌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내적인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본질을 받아들이는 상태는 점차 외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AC.502에서 퍼셉션의 쇠퇴를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됨’이라고 표현합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매우 명료하고 세밀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그 구별이 덜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양이 줄어든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진리를 즉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알아보던 내적인 능력이 점차 흐려진 것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쇠퇴는 먼저 교리책이 없어졌다거나 예배 제도가 무너졌다는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적 상태가 변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AC.503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퍼셉션은 단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아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선을 실제로 행할 때 생기는 행복과 기쁨이 퍼셉션의 생명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지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쓰임’(use)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의 쇠퇴는 단순히 영적인 감각이 둔해진 사건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던 사랑의 생명 자체가 점차 약해진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쇠퇴의 흐름을 하나로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을 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었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점차 강해지고 실제적인 악이 반복되면서 인간의 내적 질서는 달라졌습니다. 선을 행하는 기쁨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퍼셉션도 함께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세대를 거쳐 누적되면서 최초에는 명료했던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고, 마침내 태고교회 특유의 퍼셉션 자체가 사라져 간 것입니다. 따라서 ‘유전적 악의 증가’, ‘사랑과 쓰임의 생명 약화’, ‘퍼셉션의 흐려짐’은 서로 무관한 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쇠퇴 과정의 서로 다른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졌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 수 있는 길 자체를 닫으신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다른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AC.2831은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영적 인간의 양심을 구별하며, AC.7935는 영적 교회의 양심이 사람이 배우고 받아들인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은 말씀과 진리와 양심을 통하여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쇠퇴에 맞추어 진리의 기준을 낮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계속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흐려져 간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잃어버린 퍼셉션을 인위적으로 되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강렬한 직감이나 내면의 음성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분별하며,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함으로써 양심이 더욱 바르게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503이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원리는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단지 많이 아는 데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하여 쓰임이 될 때 살아납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면서도 선을 행하는 기쁨을 잃어 간다면 지식은 늘어도 영적 시야는 오히려 흐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를 삶에 옮기고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을 기뻐할수록,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소유하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양심의 빛 안에서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분별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퍼셉션의 쇠퇴를 기록한 창5의 계보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이유입니다. (AC.500-503 심화 1)

 

 

 

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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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1-485 심화

1,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는가?’

 

AC.484는 셋 교회를 가리켜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중요한 차이를 덧붙입니다.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셋 교회의 위치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단절된 교회도 아니고,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본질적인 질서는 이어받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AC.484는 실제로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를 먼저 보아야 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이는 별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에,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신앙이라는 말 자체를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가장 완전한 천적 질서입니다.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며, 따라서 신앙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AC.202에서도 천적 인간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것을 추론하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 ‘사랑이 주된 것’이라는 말은 단순히 사랑을 신앙보다 조금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랑이 신앙의 근원이며, 신앙이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질서를 뜻합니다.

 

그런데 셋 교회에서는 이 질서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 태고교회에서처럼 절대적으로 주된 위치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AC.484는 셋 교회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지만, 일곱째 날이 표상하는 완전한 천적 상태와는 아직 구별됩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같지는 않았다’는 말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창4의 가인과 비교할 때 더욱 또렷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사랑의 주도성이 조금 약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고 마침내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AC.337은 이것을 태고교회 교리의 왜곡으로 설명하고,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로부터도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셋과 가인은 매우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셋 교회에서는 ‘사랑이 이전만큼 주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마침내 사랑으로부터 분리’됩니다. 둘 다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의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셋에게서는 결합이 아직 살아 있고,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 자체가 무너집니다.

 

이것은 훗날 나타나는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의 차이를 생각하게 하는 초기 징후이기도 합니다. AC.393은 인류가 태고교회와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할 것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대신 신앙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양심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셋 교회 자체가 이미 후대의 영적 교회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AC.484에서 보이는 ‘사랑의 주도성은 약해졌지만 신앙과 사랑의 결합은 유지되는 상태’는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질서로부터 인류가 점차 멀어져 가는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따라서 셋 교회의 의미를 단순히 ‘태고교회의 두 번째 버전’ 정도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셋은 ‘계승과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교회가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이어지지만, 그 상태는 이미 앞선 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모든 시대의 사람을 똑같은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상태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존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AC.484의 마지막 문장은 창5 전체를 읽는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셋 이후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늙어 죽고 다음 세대가 태어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AC.483이 밝힌 것처럼 이 이름들은 서로 다른 퍼셉션을 가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셋에게서 이미 나타난 ‘같으면서도 달라지는’ 교회의 계승은 앞으로 더욱 다양한 상태로 전개됩니다.

 

결국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같은 점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사랑이 더 이상 태고교회에서처럼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서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을 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진리가 사라지는 방식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조금씩 달라지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변화 가운데서도 아직 남아 있는 결합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교회를 이어 가십니다. (AC.481-485 심화 1)

 

 

 

창5:3, AC.481-485 심화 2,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왜 서로 다른 교회인가?’

창5:3, AC.481-485 심화2,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왜 서로 다른 교회인가?’ 창4:25에도 ‘셋’이 나오고 창5:3에도 ‘셋’이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당연히 동일한 셋이며, 창5는 창4 끝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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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1, 창5:3,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 (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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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도 이 표현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믿은 뒤, 그 믿음에 따라 사랑하고 살아가는 순서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오히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지혜와 지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에서 신앙과 지혜와 지성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것은 창2에서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AC.99). 또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했으며(AC.102), 그 생명나무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자비’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AC.105). 그러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은 AC.111에서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창2의 천적 인간을 설명해 온 중심 질서입니다.

 

여기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은 사람이 먼저 어떤 감정적인 사랑을 만들어 낸 다음 거기서 교리나 신앙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랑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가 받아들여지며,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게 신앙은 사랑과 분리된 채 머리 안에 먼저 자리 잡고 있다가 나중에 사랑과 결합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처음부터 사랑의 생명 안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거듭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AC.111에서 왜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겉 사람을 문제 삼는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실을 알고 교리를 정확히 기억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은 아닙니다. 기억지식은 필요하고 유용하지만, 그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도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AC.99). 그러므로 문제는 기억지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입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신앙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 신앙과 지혜와 지성 안으로 흘러드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AC.112는 이 질서를 더욱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 그리고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의 차이를 지나치게 공식화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을 단순한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혜에는 사랑의 생명이 있고, 지성에는 신앙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이시므로 참된 지혜와 지성의 근원 역시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보면 AC.110에서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말도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오며, 그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AC.107). 그 강이 동산을 적셔 지성을 주고, 이제 첫째 강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서로 무관한 상응들을 차례로 늘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신앙에 지성이 있는 하나의 생명의 흐름을 여러 이미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113-115에서 금과 보석을 설명하는 것도 같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금은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특히 AC.115에서는 호마노를 둘러싼 금테에서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신앙이 단순히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것보다 더 깊은 관계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살아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는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단순히 ‘사랑이 중요하고 신앙은 덜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111은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을 이루면서도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고, 천국 전체도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께서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라고 해서 신앙의 고유한 성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신앙이 각각의 고유한 자리를 가지면서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의 가장 깊은 초점은 결국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서 사랑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랑으로 신앙을 만들고, 다시 그 신앙으로 지혜와 지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12가 계속해서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라고 반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오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생명을 얻습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창2의 모습은 바로 이 생명의 질서를 그리고 있습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 살아 있는 까닭은 그가 자기 안에 특별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10-115를 읽으며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비손이나 하윌라, 금과 호마노의 개별 상응을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모든 상응을 하나로 연결하는 생명의 방향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오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바로 이 질서의 중심에 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비손은 더 이상 낯선 고대의 강 이름에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 신앙과 지성 안으로 흘러들어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AC.111 심화 1)

 

 

 

AC.111, 창2:11-12,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과 그 지혜와 지성을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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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인간에게는 의지 자체가 없으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선택하고 결심하는 것은 모두 탐욕일 뿐이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또한 거듭난 사람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그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AC.105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주제는 인간에게 선택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생명나무’가 왜 동산 ‘가운데’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동산 가운데’를 속 사람의 의지라고 설명하고, 말씀에서는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말해지기는 하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으로서 사람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일상적인 선택이나 결심의 능력만을 가리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의 초점은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생명의 중심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선한 의지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자기 의지라고 부를 때, AC.105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 목적은 선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가지 반대 방향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지도 없으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행하지 않는다’는 식의 수동적인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선을 원했으므로 그 선은 나에게서 나왔다’는 자기 공로의 이해입니다. AC.105의 논지는 어느 쪽도 아닙니다. 이 번호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명나무’가 중요해집니다. AC.105는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한 뒤, 마지막에는 그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다’는 강한 표현만 따로 떼어 놓으면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선언처럼 보이지만, 전체 문맥에서 보면 강조점은 인간의 무가치함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05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네 안에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내게 오라’고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믿고 선을 원할 수 있게 하는 생명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이 생명을 만들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사랑하고 믿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중심에 있는 ‘생명나무’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까요? AC.105 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의지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을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이 번호가 직접 다루는 범위에서는 인간의 모든 선택과 책임의 구조를 설명하기보다, 참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적어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고백과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국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 바로 뒤에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온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서 선의 독립적인 근원을 거두어 가는 까닭은 인간을 생명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께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자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105 심화 1)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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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도대체 어떤 호흡이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멈춥니다. 그는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97을 충실하게 읽으려면 먼저 이 한계를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번호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속도나 방식으로 호흡했는지, 특정한 사랑이나 신앙의 상태에 어떤 호흡이 대응했는지를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것을 오늘날의 명상 호흡법이나 복식호흡, 호흡 훈련 같은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AC.97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호흡법을 훈련하여 영적 상태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호흡은 영적 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관하여 읽어 온 내용과도 어울립니다. 그들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연한 직감이나 감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퍼셉션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호흡의 상태를 퍼셉션했다는 말도 단순히 자신의 몸 상태를 예민하게 관찰했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호흡이 그들의 후손들에게서 점차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독특한 내적 상태가 후대로 그대로 보존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다른 삶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호흡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고대인의 생리적 습관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련된 현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AC.97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실제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관계는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그것을 현대적인 호흡법으로 재현하거나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에 고대인들과 말씀에서 영 또는 생명이 ‘바람’과 ‘숨’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가치는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호흡법을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왜 창2:7의 ‘생명의 숨’이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제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이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그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지 않은 만큼 우리도 여기서는 밝히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AC.97 심화 1)

 

 

 

AC.97, 창2:7, '호흡과 숨이 생명을 뜻하는 이유, 태고교회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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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심화

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와 말씀에서 ‘콧구멍’으로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합니다.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뜻밖의 상응입니다. 눈이 이해나 인식과 관계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왜 코와 냄새가 퍼셉션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우선 AC.96이 직접 제시하는 연결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콧구멍’에서 곧바로 퍼셉션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콧구멍 - 냄새 - 기분 좋은 것 - 퍼셉션’이라는 흐름이 있습니다. 즉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코라는 신체기관 자체보다 냄새를 통하여 어떤 것을 기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작용입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설명된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잘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결론을 얻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내적으로 퍼셉션합니다. AC.95에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고 했고, AC.96에서는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퍼셉션은 사랑과 신앙의 생명과 분리된 지적 판단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냄새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어떤 향기를 맡을 때 매번 논리적 추론을 거친 뒤에야 그것이 향기로운지 불쾌한지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냄새는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성질이 감지됩니다. 물론 자연적인 후각과 영적인 퍼셉션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가 고대의 표현과 말씀에서 냄새와 퍼셉션을 연결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현대적인 의미의 ‘직감’이나 ‘느낌’을 곧바로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어떤 것에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그의 사랑과 신앙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놓여 있는 가운데 주어지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콧구멍이 퍼셉션을 뜻한다’는 말을 신체기관 하나와 영적 개념 하나를 기계적으로 짝짓는 상응표로 이해하기보다, 말씀 안에서 냄새와 향기로움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그 성질을 퍼셉션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AC.96은 그 연결을 통하여 창2:7의 ‘콧구멍’이 단순한 해부학적 표현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에 관계된 표현임을 밝혀 줍니다. (AC.96 심화 1)

 

 

 

AC.96, 창2:7, ‘콧구멍과 향기와 퍼셉션,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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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심화

1. ‘시147:7에서 여호와와 하나님, 감사와 수금 찬양이 구별되는 이유는?’

 

시147:7은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응답하며 수금으로 우리 하나님께 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같은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나란히 놓인 구절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AC.420에서 이 두 표현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감사’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가 언급되고, ‘수금으로 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이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짧은 구절에서도 그는 사용된 표현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먼저 ‘감사’(confession)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들은 앞서 설명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정해진 말을 입 밖으로 내는 행위로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의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에 관련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읽을 때에는 감사의 말 자체만이 아니라, 그 감사가 관련되는 사랑과 선의 측면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반면 ‘수금으로 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AC.419에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시147:7의 수금 찬양은 앞서 밝힌 악기의 속뜻과 이어집니다. 이 구절에는 감사와 수금 찬양이 함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각각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되는 표현으로 구별합니다.

 

이 구별과 함께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감사와 관련하여 ‘여호와’가, 수금 찬양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언급된다고 직접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말씀의 모든 ‘여호와’와 ‘하나님’을 문맥과 관계없이 하나의 공식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시147:7의 두 표현이 왜 구별되어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의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시147:7에 관한 설명도 그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과 관련되고, 수금 찬양이 신앙의 영적인 것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설명을 합쳐 감사는 언제나 내면에만 있고 찬양은 언제나 외면에만 있다는 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제시된 것은 두 표현이 각각 어떤 것과 관련되는가 하는 구별입니다.

 

이 구절은 예배의 언어를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도움을 줍니다. 감사와 찬송을 단순히 비슷한 종교적 표현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가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일상적인 감사와 찬송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어느 한쪽만 천적이고 다른 쪽만 영적이라고 판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절의 속뜻을 통해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것들이 말씀 안에서 구별되어 표현될 수 있음을 이해하면 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시147:7을 인용한 이유는 감사와 수금 찬양이 각각 신앙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되며, 그에 따라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주님을 향한 한 구절의 예배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미가 표현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사랑과 신앙의 구별을 살피면서도, 그 둘이 함께 주님께 향하는 예배의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AC.420 심화 1)

 

 

 

AC.420 심화 2, ‘시150:3-5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AC.420 심화2. ‘시150:3-5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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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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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9 심화

1.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두 문장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신앙에 선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면, 그 선대로 살아가는 일을 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구별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무엇이 선한지 이해하는 일’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참된지 배울 수 있고, 무엇이 선한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의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명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려 줍니다.

 

그러나 무엇이 선한지 아는 것과 실제로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동의하면서도 정작 이웃을 대할 때에는 자신의 이익이나 감정만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웃에게 선하게 대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경우의 차이는 선에 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구별한 이유를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별을 ‘신앙은 지식에 불과하고 사랑만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419는 신앙에 진리와 선이 모두 포함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는 일은 그 자체로 신앙에 속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다만 그러한 이해가 실제 삶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선을 가르친다는 사실과, 사람이 그 선대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 진리와 선을 포함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호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애정과 그 표현의 관계를, 여기서는 신앙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일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설명합니다. 이 두 설명을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합치기보다는, 각각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구별하는지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이 구별은 신앙생활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그 교리가 자신의 삶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실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와 선을 배우는 일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가르치며, 사람은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AC.419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인 것이라는 설명을,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선을 실천하면 천적인 상태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가르침에서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번 번호 역시 인간의 독립적인 선행 능력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지식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선한 삶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AC.419는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신앙은 진리와 선을 모두 가르치지만, 그 가르침을 이해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지식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 지식이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선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여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AC.419 심화 1)

 

 

 

AC.419, 창4:21, ‘수금은 신앙의 진리를, 퉁소는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이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인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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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

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인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신앙에는 무엇이 참된 것인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 것인지도 이해하는 일이 속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은 이 둘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 신앙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므로, 그것들은 수금과 퉁소라는 두 악기로 의미됩니다. 수금은 누구나 알듯이 현악기이므로 영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퉁소는 현악기와 관악기의 중간에 해당하므로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so spiritual things are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it belongs to faith to understand not only what is true, but also what is good. The knowledges of faith involve both. But to be such as faith teaches is celestial. As faith involves both of these, they are signified by two instruments, the harp and the organ. The harp, as everyone knows, is a stringed instrument, and therefore signifies spiritual truth; but the organ, being intermediate between a stringed instrument and a wind instrument, signifies spiritual good.

 

해설

AC.419는 앞의 AC.417-418에서 밝힌 유발의 속뜻을 한층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악기를 함께 언급한 이유를 밝히고, 수금과 퉁소가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지 구별합니다. 수금은 영적 진리를, 퉁소는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유발의 기록은 신앙을 단순히 참된 것을 아는 일로만 이해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구별합니다. 천적인 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며,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는 앞서 야발과 유발을 구별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두 형제의 기록을 함께 읽으면 사랑에 관한 교리와 신앙에 관한 교리가 각각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문장은 ‘신앙에는 무엇이 참된 것인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 것인지도 이해하는 일이 속한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라고 하면 흔히 교리의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일부터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참된 것과 선한 것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에서 선에 관한 지식을 제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곧이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신앙의 선을 이해하는 일과 실제로 선하게 살아가는 일을 구별합니다. 무엇이 선한지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일은 신앙에 속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선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선을 삶에서 실현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앎과 삶을 구별하면서도, 신앙이 가르치는 선이 실제 삶과 무관한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제 수금과 퉁소라는 두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두 악기로 의미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수금이 현악기이므로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퉁소는 현악기와 관악기의 중간에 해당하므로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 악기 구분은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현대 악기 분류에 맞추어 퉁소를 특정 악기로 확정하거나, 그 악기의 구조에서 새로운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앞의 AC.418에서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이어받아 영적인 것 안에도 진리와 선이 함께 있음을 밝힙니다. 노래와 악기가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유발에 관한 짧은 기록은 신앙의 내용을 더욱 세밀하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나는 무엇이 참된지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나는 무엇이 선한지도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와 선을 이해하는 일은 그 가르침을 삶에서 받아들이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지식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19의 핵심은 신앙에 진리와 선이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을 아는 일과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일이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수금과 퉁소는 신앙의 두 측면을 나타내며, 유발은 이러한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을 참된 것을 아는 데에만 한정하지 않고, 선을 이해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까지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9 해설)

 

심화

1.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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