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7.심화

2.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 하는가?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없고,  나아가 퍼셉션,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진술은  놀랍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천국은,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삶이  행복, 만수무강하게  ,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알기 때문이지요...

 

 

AC.37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alternations) 다양함(varieties)이 있으며, 만일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 전혀 없게 된다고 합니다. 변화가 없으면 단조롭다는 말까지는 쉽게 이해되는데, 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말하는 단조롭다는 것을 단순히 지루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원문은 `uniform`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한결같아서 차이와 변화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재미가 없으니 생명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에는 본래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있다는 훨씬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7은 그 이유를 바로 이어서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선과 진리가 분별되거나 구별될  없고,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가 왜 교대와 다양함을 생명과 연결하는지 중요한 실마리를 얻습니다.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은 선과 진리가 아무런 차이 없이 하나의 평평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분별하고 구별하며 퍼셉션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생명을 생각하면 이해에 조금 도움이 됩니다. 하루에도 빛의 상태가 달라지고, 한 해에도 열과 빛이 달라집니다. 봄의 자연과 한여름의 자연, 가을과 겨울의 자연은 서로 다릅니다. 바로 그 변화 속에서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다시 새로운 때를 준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AC.37에서 자연계의 날과 해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하는 이유를 이런 모습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나쁜 상태를 겪어야 한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교대와 다양함은 곧바로 선과 악의 반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를 말합니다. 따라서 악에 빠지는 것 자체가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거나, 신앙이 무너지고 사랑이 식어야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입니다.

 

차이가 있어야 선을   있으니 악을 경험해야 선을 안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악을 경험해야만 선을 퍼셉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선과 진리가 분별되고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양함 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생명도 교대가 있다는 뜻일까요? AC.37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고 말하므로, 적어도 영적 생명을 언제나 똑같은 강도의 빛과 사랑과 기쁨이 끝없이 지속되는 정지된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다만 천국에서 그 교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되는지는 AC.37의 설명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천국의 상태 변화를 직접 다루는 다른 글들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완전함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꾸어 줍니다. 우리는 완전한 영적 상태라면 아무런 변화도 없이 항상 최고조의 사랑과 빛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37은 영적·천적 생명 자체에 교대와 다양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변화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곧 불완전함이나 실패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변화를 주님께서 주신 좋은 변화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는 자기 사랑 때문에 생기는 후퇴도 있고, 잘못된 선택의 결과도 있으며,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도 있기 때문입니다. AC.37 교대를 이런 모든 상태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면 오히려 자신의 악을 영적 성장 과정으로 합리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가장 안전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생명은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생명에는 다양한 상태가 있고, 그 상태들은 서로 구별되며, 바로 그 안에서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되고 퍼셉션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살아 있는 다양함을 자연계의 날과 해, 빛과 열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7 결국 생명이 전혀 없게 된다는 표현도 조금 이해됩니다. 생명은 단순히 어떤 좋은 상태 하나를 얻은 뒤 그것을 영원히 얼려 놓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은 다양한 상태를 가지며,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구별되고 퍼셉션됩니다. 적어도 AC.37이 보여 주는 영적 생명은 변화 없는 정지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생명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볼 때도 이 원리는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내적 상태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러 상태 가운데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주님 앞에서 더욱 분명히 분별해 가는 것입니다.

 

결국 AC.37이 말하는 교대와 다양함은 영적 생명이 죽은 평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놀랍게도 바로 그 다양함 속에서 선과 진리가 분별되고 구별되며 퍼셉션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변화가 있으니 생명이 있다는 단순한 말보다, ‘살아 있는 영적 생명에는 선과 진리가 퍼셉션될  있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AC.37의 뜻에 더 가깝겠습니다.

 

 

 

AC.37, 창1:14-17, ‘영적 생명의 리듬 : 낮과 밤, 계절처럼 반복되는 거듭남의 질서’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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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심화 1,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AC.37.심화 1.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위 AC.37 본문에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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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days), (years)

 

 AC.37 본문에   속에는 지금 당장  펼쳐 보일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의  역량과 상태가, 펼쳐 보여도 아직은 이해할  없는, 감당할  없는 역량이어서 그런  같은데... 그럼에도 혹시 한두 가지만  보여 주실  있나요?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말씀과,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라는 8:22 말씀을   와닿게 이해하고 싶어서입니다.

 

 

1:14에는 징조(signs), ‘계절(seasons), ‘(days), ‘(years)라는 네 표현이 한꺼번에 나옵니다. AC를 읽는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집니다. ‘그렇다면 징조는 무엇을 뜻하고, 계절은 무엇이며, 날과 해는 각각 어떤 영적 상태를 뜻할까?

 

그런데 뜻밖에도 AC.37은 이 네 단어를 하나씩 풀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현재로서는 말할  있는 것보다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네 단어의 개별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존재하는 교대(alternations) 다양함(varieties)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AC.37을 읽으면서 징조는 이것, 계절은 이것, 날은 이것, 해는 이것이라는 네 개의 고정된 정의를 당장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먼저 이 네 표현을 이해하기 위한 더 큰 배경을 보여 줍니다. 영적 생명에는 상태의 변화가 있으며, 그 변화는 자연계에서 날과 해가 변하는 모습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아침, , 저녁, 밤이 교대하고, , 여름, 가을, 겨울이 교대합니다. 그에 따라 빛과 열이 달라지고 자연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인 것들에도 이와 같은 교대가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영적 상태가 자연계의 하루나 계절과 정확히 같은 시간표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의 변화가 영적 상태의 변화를 이해하도록 보여 주는 상응적 모습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는 각각 짧은 영적 주기와 긴 영적 주기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해를 돕는 하나의 추측이나 비유로는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AC.37이 그렇게 정의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가 날과 해의 교대에 비유된다는 데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정도의 경계를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계절 역시 곧바로 하나의 영적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정해진 시점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에서 계절이 변화와 교대를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AC.37 `seasons`의 속뜻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말할  있는 것보다  많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한 이상, 오히려 독자가 성급하게 하나의 뜻으로 고정하지 않는 것이 본문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징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내가 현재 어느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 주는 표시라고 설명하면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것 역시 AC.37의 직접적인 정의는 아닙니다. 더구나 성경에서 징조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으므로, 1:14 `signs`를 하나의 심리적인 자기진단 표지로 좁혀 버리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AC.37은 왜 굳이 징조와 계절과 날과 를 언급하면서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AC를 읽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한 글에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표현을 먼저 제시하고 그 의미의 큰 틀만 보여 준 뒤, 말씀의 다른 부분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 더 깊이 설명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AC.37 마지막에서 그는 이 주제가 창8:22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지금 AC.37에서 모든 세부를 확정하기보다, 앞으로 말씀의 다른 곳에서 같은 주제가 어떻게 다시 펼쳐지는지를 기다리는 것이 AC를 읽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AC.37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중요한 원리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영적 생명은 하나의 상태에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런 변화가 없으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 없고,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원리를 먼저 붙들면 징조와 계절과 날과 를 성급하게 네 개의 공식으로 외우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이 네 표현 전체가 우리에게 영적 생명에는 상태와 상태의 변화가 있다는 더 큰 세계를 열어 주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를 처음 읽을 때 이런 미완성된 설명을 만나면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 여기서 정확히 뜻을 말해 주지 않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뜻을 붙인 사전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표현들이 말씀의 여러 곳에서 다시 나타나고 서로 연결되면서 점차 더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AC.37에서 징조, 계절, , 의 뜻을 묻는 가장 안전한 답은 이렇습니다. 이 네 표현에는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것들을 각각 상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지금 그가 먼저 가르치는 것은 영적·천적 생명에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의 날과 해의 변화에 비유된다는 사실입니다. 세부적인 뜻을 서둘러 채우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펼쳐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AC.37, 심화 2, ‘삶은 단조로워지고’

AC.37.심화 2. ‘삶은 단조로워지고’ 위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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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영적 생명의 리듬 : 낮과 밤, 계절처럼 반복되는 거듭남의 질서’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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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심화

2.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나오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22:37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생각해 보면 질문이 생깁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단순히 하나님을 아주 많이 사랑하라는 강조의 반복일까요, 아니면 각각의 말에 서로 다른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일까요?

 

AC.36 자체는 마음’, ‘목숨’, ‘을 각각 따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들을 곧바로 마음=의지, 목숨=행위, =이해라고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 구절에서 AC.36이 직접 붙드는 핵심은 훨씬 분명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며,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신앙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장 평범한 의미에서 이 말씀을 읽어도 충분히 깊습니다. ‘마음을 다하여는 내 사랑과 애정에서, ‘목숨을 다하여는 내 생명과 삶에서, ‘뜻을 다하여는 내 생각과 이해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스베덴보리가 AC.36에서 각각 그렇게 정의했다고 말하기보다,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본 설명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쉽게 말하면  삶의  부분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예배드릴 때의 마음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 선택과 행동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과 생각과 삶 전체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을 마음으로 아끼고, 자주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하고, 중요한 선택을 할 때도 그것을 고려합니다. 물론 주님 사랑을 인간적인 애착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 존재를 다하여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이런 예가 도움이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결국 삶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내가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입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을 잃을까 가장 두려워하며, 무엇을 얻기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희생하는지를 보면 자기 사랑의 방향이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주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의 중심에 두는 것과 연결됩니다.

 

목숨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그 사랑이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AC.36이 신앙을 단순한 앎과 인정에 두지 않고 교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한 순종까지 말하는 것도 이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이 삶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AC.36이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이해도 주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생각하지 않는 맹목적인 열정이 아닙니다. 무엇이 참인지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진리 앞에서 살피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사랑은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며 어떤 기준으로 생각하는가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 표현을 지나치게 분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막12:30에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AC.36도 바로 이 구절을 함께 인용합니다. 만일 마음, 목숨,  각각을 인간의 세 가지 고정된 기능에 정확히 대응시킨다면 막12의 네 번째 표현인 을 다시 어디에 대응시켜야 하는지 문제가 생깁니다. 오히려 이런 여러 표현이 함께 사용되는 것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부를 강조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를 가장 쉽게 풀면 너의 존재와  전체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 생각하는 것, 원하는 것, 선택하는 것, 행하는 것 가운데 어느 한 영역만 따로 떼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순간에 주님만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일하고, 가족을 돌보고, 쉬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며 자연계의 수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가 어떤 사랑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의 정상적인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속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AC.36은 이 주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떼어 놓지 않습니다. 주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전혀 없다면, 바로 다음 계명과 분리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두 계명으로 함께 말씀하셨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십시오라는 감정적 권면보다 훨씬 깊습니다. ‘당신의  가운데 주님과 무관한 영역을 따로 만들어 놓지 마십시오라는 요청으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도, 생각도, 선택도, 실제 삶도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를 향하게 하는 것,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을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이해하는 한 방법입니다.

 

다만 다시 한 번 구별할 것은, 이러한 설명이 AC.36에서 마음은 이것, 목숨은 이것, 뜻은 이것이라고 각각 속뜻을 규정한 결과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6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중심을 놓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 익숙한 말씀을 나의 일부가 아니라 나의  존재와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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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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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주님 사랑 전치사 to  반면, 이웃 사랑 toward 쓰나요?

 

 

AC.36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두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큰 두 계명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스베덴보리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자주 등장하는 체어리티(charity)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주님 사랑은 단순히 주님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애정과 고백을 무가치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가장 높이 여기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데서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AC.36의 문맥에서도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있다고 말한 직후, 그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그 사랑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친절한 감정을 가지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언제나 이웃 사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웃의 범위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보다 넓습니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여러 사람의 공동체, 사회와 국가, 교회,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까지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집니다. 다만 AC.36에서는 이웃의 단계와 질서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웃 사랑은 이웃의 참된 선을 원하고  선을 행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 체어리티(charity)는 어떤 관계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charity`는 흔히 이웃을 향한 사랑과 그것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어의 `charity`를 보고 단순히 자선’, ‘기부’, ‘구제라고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뜻보다 지나치게 좁아집니다. 그에게 체어리티는 훨씬 넓은 영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번역에서는 `charity`를 문맥마다 곧바로 이웃 사랑으로 바꾸기보다 체어리티라고 살려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은 말 그대로 사랑의 대상을 이웃에 두는 표현이고, ‘체어리티는 그러한 이웃 사랑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삶의 원리로 나타나는 것을 폭넓게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교리적 용어로 계속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나눌 필요도 없지만, 언제나 완전히 같은 단어처럼 바꾸어 써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영어 표현 자체로는 가능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도 charity neighbor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원문이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하면 이웃 사랑으로, `charity`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독자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라고 하면서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했을까요? `to` `toward`가 다르니 여기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6은 이 전치사의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to`는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을, `toward`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고까지 확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은 영어 표현의 미묘한 차이에서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은 신학적 의미를 끌어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치사의 차이보다 두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반대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 역시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주님께 둡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을 뿌리’, 이웃 사랑을 열매라고 비유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도 AC.36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기보다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핵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AC.36이 신앙을 설명하다가 결국 이 두 사랑으로 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이웃 사랑’, ‘체어리티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될 서로 깊이 연결된 핵심 개념들입니다.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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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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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AC.35 마지막의 만일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말은 짧지만 참으로 큰 위로를 줍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는 지옥을 향할 수 있으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사람 전체가 지옥으로 곤두박질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적인 문장의 끝에 주님의 자비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마지막 말이 인간의 악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라고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자비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AC.35의 문맥에서 자비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람이 자기 악한 의지에 따라 끝까지 떨어지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엄중한 진단과 주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조금 노력하면 자기 힘으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깊이 자기 사랑과 악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가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사람이 여전히 돌이킬 수 있고,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선을 향하여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붙들어 주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여기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5은 그 작동 방식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 어떤 일이 뜻밖에 막히는 것, 고통이나 시험을 겪는 것 등을 하나하나 가리켜 이것이 바로 그때 주님께서 붙드신 것이다라고 AC.35만을 근거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와 거듭남에 관한 다른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 주님의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인간이 자기 악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붙드신다고 해서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악과 싸울 수도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과 진리를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길을 열어 주시는 자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자비를 공의라면 벌해야 하지만 자비가 그것을 눈감아 주는 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신적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거나 거짓을 진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그가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원을 향해 이끄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비는 인간의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건져 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AC.35의 이 한마디는 거듭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다 보면 나는 아직도 이렇지?’, ‘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삶이 이렇게 다르지?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5처럼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 의지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씀을 읽으면 자기 안의 모순이 더욱 크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문장의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끝내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자비로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의지가 이미 완전해졌다는 데 있지 않고,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어차피 주님께서 붙드시니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알수록 우리는 그 자비에 응답하여 악에서 돌아서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자비는 거듭남을 대신해 주는 면허가 아니라 거듭남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은 AC.35을 읽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AC.35은 그 자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든 방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악한 의지의 무게만을 따라 끝없이 떨어지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짧은 한마디 때문에,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그렇게 엄중하게 말한 AC.35도 결국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AC.35, 창1:14-17, ‘의지와 이해 : 하나의 생명이냐, 둘로 갈라진 마음이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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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심화

2. 도망함(flight) 마지막 때와 사람이 죽을 뜻하는가?

 

 AC.34 본문 인용 구절,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3:18) 나오는 (flight)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는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각각 겨울과 봄의 햇빛에 비유한 뒤, 13:18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그리고 곧바로 여기서 도망함(flight)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은 저세상에서의 비참한 상태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뜻밖입니다. ‘도망함이라는 말이 어떻게 마지막 를 뜻하고, 더 나아가 사람이 죽을 를 뜻할 수 있을까요? 혹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 어디론가 날아가는 flight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먼저 이 가능성부터 제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영어 flight비행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13의 문맥에서 flight는 위험을 피해 도망함, 피신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해하면서 영어 단어의 다른 뜻인 비행을 끌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것을 현대 종말론에서 흔히 말하는 휴거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flight를 휴거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직접 제시하는 속뜻은 마지막 사람이 죽을 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화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가 실제로 제시한 이 두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도망함마지막 를 뜻할까요? 13의 문자적 문맥에서 도망함은 한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결정적인 끝을 향해 가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 적용합니다. AC.32에서도 세대의 종말을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어느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도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한 교회의 상태가 마지막에 이르는 영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사람이 죽을 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의 마지막과 한 개인의 자연계 삶의 마지막 사이에 대응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그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있고, 개인에게는 자연계에서의 삶을 마치는 때가 있습니다. AC.34는 막13의 말씀을 이 두 차원에 함께 적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을 를 단순히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이동 순간으로 이해하면 AC.34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어 설명하는 것은 이동의 방식이 아니라 그때의 상태입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을 AC.34의 속뜻에 따라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죽을 영혼이 어떻게 이동하는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마칠 사람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입니다. 그때가 겨울’, 곧 사랑이 없는 삶의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4 전체의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 글의 처음부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지고 있는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그는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을 겨울철 햇빛에 비유합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어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고 모든 것이 굳어 있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빛과 함께 열이 있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바로 이 겨울과 봄의 대조를 설명한 다음에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따라서 겨울의 의미는 앞의 설명과 분리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람이 죽을 를 언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연계에서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삶을 향하여 거듭날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계의 삶을 마칠 때 그 사람의 지배적인 생명이 사랑 없는 겨울과 같은 상태라면, 그것은 단순히 추운 계절에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계의 삶을 마쳤다는 뜻이 됩니다.

 

AC.34은 그 뒤의 환난의 저세상에서의 비참한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자연계의 재난이나 종말 시간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 없는 삶이 사후에 어떤 상태와 연결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인용 전체는 AC.34가 계속 말해 온 사랑 없는 신앙에는 참된 생명이 없다는 원리를 매우 엄중한 방식으로 강조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죽을 라는 표현 때문에 임종 순간의 감정이나 마지막 몇 분의 상태에 지나치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34가 말하는 겨울은 사랑이 없는 입니다. 즉 문제는 죽는 바로 그 순간 사람이 평안했는가 두려워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아 살아왔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거나, 의식을 잃은 채 죽었거나, 임종 때 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겪었다고 해서 그것을 겨울에 도망한 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겨울은 육체적 임종 상황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이라는 영적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13:18AC.34의 설명에 따라 읽으면서 좋은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을 임종의 외적 모습에 적용하면 불필요한 두려움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평안하게 임종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봄인 것도 아니고, 고통스럽게 임종했다고 해서 영적으로 겨울인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보는 것은 자연적 죽음의 외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이루어 온 사랑의 성질입니다.

 

이렇게 보면 도망함이 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하는지도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막13의 종말에 관한 말씀을 교회의 마지막에만 한정하지 않고 개인의 자연계 삶의 마지막에도 적용합니다. 그리고 그때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 사랑 없는 겨울의 상태인가, 아니면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생명 가운데 있는가입니다.

 

따라서 AC.34에서 flight비행이나 휴거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서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이동 자체를 flight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는 열쇠는 마지막 ’, ‘ 사람이 죽을 ’, 그리고 겨울은 사랑이 없는 이라는 세 표현입니다.

 

결국 이 인용의 중심은 어떻게 세상 끝에서 탈출할 것인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마칠 나는 어떤 사랑의 상태에 있는가?입니다. AC.34 전체가 말하듯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사랑 없는 신앙은 겨울의 햇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 삶의 중요성을 마지막 순간의 관점에서 다시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다 : 겨울의 빛과 봄의 빛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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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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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심화

1.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어떤 상태일까?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말인데요,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떤 묘사가 가능할까요? 저렇게만 말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요...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천적 사랑 가운데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읽으면 오히려 궁금증이 커집니다. ‘말로 표현할 없다니, 도대체 어떤 상태라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AC.34에서 실제로 말한 범위를 정확히 붙드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 상태를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적 천사들이 어떤 느낌을 느끼는지, 생각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보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워 천적 천사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AC.34 자체가 알려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천적 사랑 가운데있습니다. 둘째, 그 사랑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셋째, 그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있습니다. 넷째, 그 결과 그들에게는 놀라운 생명과 지성의 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함께 보면 어느 정도 그 상태의 윤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생명입니다. 바로 앞의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생명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과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이 놀라운 생명가운데 있다는 말은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에 따른 생명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지성의 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머리가 매우 좋다거나 지식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4가 강조하는 것은 천적 천사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성의 빛은 사랑 없는 지적 능력이나 교리 지식의 축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뒤에 나오는 반대 사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가운데 있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에게는 생명과 지성의 이 있고,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에게는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대조가 AC.34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천적 천사들의 지성의 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은 지성의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차가운 지식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결합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상태를 단순히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의 AC.32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이 사랑에 속한 신앙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을 이해할 때에도 같은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빗대어 조금이라도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아주 제한적인 비유는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하니까억지로 하는 경우와, 진심으로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여 기쁘게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이라도 후자의 경우에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앎과 그것을 하고 싶다는 애정이 더 가까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천적 천사들의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연적 수준에서 희미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 정도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모든 진리를 한순간에 직관적으로 아는 상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가 여기서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지성의 을 어떤 특별한 황홀감이나 감정 상태로 묘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왜 그 상태를 거의 말로 표현할 없다고 했는지도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경험했다고 말하는 천적 사랑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자연계에 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랑과 지식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리에 어긋날 수 있고,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살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신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실제 사랑의 삶과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에서 천적 천사들의 상태는 바로 그 반대편에 놓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결합되어 있고, 거기에서 생명과 지성의 빛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분리된 상태를 가지고 그 결합의 상태를 온전히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도 거의 말로 표현할 없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할 없다는 문장을 신비한 황홀경에 대한 묘사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AC.34의 문맥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신앙의 결합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지식은 겨울 햇빛처럼 생명을 내지 못하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킵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은 바로 이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천국에서 얼마나 충만한 생명을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상태를 완전히 묘사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무엇이 그 상태의 핵심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지식이 살아 있는 상태’,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아 생명과 지성의 빛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은 결국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AC.34가 천적 천사들의 놀라운 상태를 보여 주는 목적은 단순히 천국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바로 다음에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차갑고 어두운 상태를 대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삶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은 우리에게 아직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AC.34가 밝혀 주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생명과 빛의 근원은 천사들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질서가 그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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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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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심화

2. 광명체 본문에서 갑자기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말하는가?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풀어 설명해 주세요.

 

1:14-17의 넷째 날 본문은 해와 달과 별, 광명체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AC.30부터 스베덴보리는 이 광명체들을 사랑과 신앙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AC.33에 이르면 갑자기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얼핏 보면 광명체의 속뜻을 설명하다가 잠시 다른 주제로 빠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0-33의 흐름을 함께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AC.33은 앞에서 말한 광명체’, 곧 사랑이 왜 그렇게 근본적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광명체를 사랑과 신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입니다. AC.32에서는 이 질서를 더욱 분명히 하여,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사랑이 그토록 근본적일까요? 왜 사랑이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AC.33은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과 생명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없으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단순히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의 생명과 직접 관계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의 성질이 달라지고, 그 사람이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광명체인 사랑을 설명하다가 생명과 기쁨의 이야기가 나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이라고 말합니다. 앞의 심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생각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추구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라고 해서 모든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과 기쁨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3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서 큰 활력을 느낄 수도 있고, 재물이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 데서 강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 ‘나는 이것을 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사랑과 참된 기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사랑은 무엇일까요? AC.33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생명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랑, 생명, 기쁨이 하나의 질서로 연결됩니다.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이것이 AC.32와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AC.32에서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좀 더 일반적인 형태로 설명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AC.33의 사랑·생명·기쁨 이야기는 광명체 본문에서 벗어난 별도의 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광명체가 사랑이다라는 말의 깊이를 밝혀 주는 설명입니다. 사랑이 큰 광명체라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밝다거나 더 중요하다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고, 인간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 역시 사랑의 성질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사랑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점은 광명체를 단순히 진리의 이라고 바꾸어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 두 광명체는 각각 사랑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진리의 빛이 사랑과 결합되어야 참된 빛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보다, AC.30-33이 실제로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에 광명체가 나타난다는 것을 곧바로 이제 참된 기쁨과 행복이 완성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33은 거듭남의 넷째 상태 전체를 여기서 완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광명체 가운데 특히 사랑이 가지는 생명적 성격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거듭남의 과정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의 흐름은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 광명체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이 광명체인가? 사랑은 생명과 분리될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성질도, 기쁨의 성질도 달라진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과 참된 기쁨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이런 흐름입니다.

 

결국 AC.33에서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이 등장하는 이유는 광명체 이야기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광명체의 속뜻을 더 깊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해가 단순히 밝은 천체가 아니라 사랑을 나타낸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곳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창1의 넷째 날은 단순히 사람 안에 무엇인가 밝은 이 생기는 단계가 아닙니다. AC.30-33의 흐름에서 보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나타나고,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 사랑과 생명의 참된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는 단계입니다. AC.33의 사랑과 생명과 기쁨에 관한 설명은 바로 이 넷째 날의 아르카나를 한층 더 깊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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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AC.33.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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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적이 있습니다.(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말인데요, 사례에 대한 생생한 얘기를 들을 있을까요? 생각이 즉시 멈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나에게 생생하게 보여진 바와 같습니다.여기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표현입니다. 사랑이 없어지면 왜 생각까지 멈추는 것일까요?

 

먼저 한 가지는 정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3에서 이것이 자신에게 생생하게 보여졌다고 말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것이 어떤 장면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에게서 사랑을 제거했더니 그 영이 갑자기 생각을 멈추었다는 식의 상세한 사례도 여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장면을 상상하여 구체적인 영계의 실험처럼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랑과 생각의 관계를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생각이 멈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말을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를 움직이는 생명의 근본적인 애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은 사랑과 완전히 독립하여 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합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고 싶기 때문에 방법을 궁리하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생각하며, 어떤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계속 이어집니다. 생각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생각을 움직이고 방향을 주는 더 깊은 곳에는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는 애정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이것의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깊은 관심이 생기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 일에 관한 생각이 계속 떠오릅니다. 반대로 아무런 관심도 목적도 없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오래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AC.33의 말을 완전히 증명하는 사례는 아니지만, 사랑과 관심과 목적이 사고의 방향과 지속성에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AC.33의 말은 단순히 관심 있는 것은 많이 생각한다는 심리적 관찰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 생명의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이 생명의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생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그 사랑에 속한 욕망을 모두 제거한다고 가정하면 생각도 즉시 멈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욕망(desires)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욕망이라고 하면 흔히 악하거나 육체적인 욕구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AC.33에서는 더 넓은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욕망은 사랑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향하여 움직이고 원하는 모든 애정적 경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선한 사랑에도 그 사랑에 속한 바람과 목적이 있고, 악한 사랑에도 그 사랑에 속한 욕망과 목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람에게 실제로 도움이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어떤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쓰임을 더 잘 수행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반대로 자기의 명예를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인정받고 높아질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각각의 생각 뒤에는 그 생각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의 핵심은 생각은 아무 가치가 없고 사랑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이해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어떤 사랑을 섬기느냐입니다. 참된 사랑에서 나오는 생각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나오는 생각은 겉으로는 똑같이 지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생명의 성질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AC.33의 앞뒤 문맥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성질이 생각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는 방향으로 형성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생각 역시 그것들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보고 곧바로 이것이 나의 진짜 사랑이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생각과 충동이 오갈 수 있고,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의 싸움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하며,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가입니다. 그런 지속적인 방향에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의 성질이 점차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말을 뇌의 작동이 물리적으로 정지한다거나 사람이 아무런 의식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의 초점은 자연적 생리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생각이 그 자체로 인간 생명의 최초 원인이 아니며, 그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랑을 제거한 사람을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원하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없고, 따라서 생각을 움직이는 생명의 동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에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을 살피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나는 무엇을 많이 생각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배후의 사랑과 목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33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말은 생각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생각은 고립되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연결되어 있으며,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각이 향하는 방향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AC.33이 마지막에 밝히듯 사람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AC.33, 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AC.33.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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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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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 본문,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말인데요, 제가 알기로 태고교회도 그 후대로 갈수록 황폐해져서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표현을 태고교회 전체를 향해 쓰면 안 되지 않나요? 그리고 바로 천적 천사들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 태고교회의 후손들일지라도 모두 천적 천사가 되었을 리는 없을 텐데, 이렇게 일반화해도 되는 건지요?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으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도 결국 쇠퇴하고 황폐해져 종말을 맞았는데 어떻게 태고교회 전체를 두고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바로 이어 천적 천사들을 언급한다고 해서 태고교회 사람들 모두가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먼저 첫 번째 질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한 교회를 그 교회의 고유한 영적 성격에 따라 말하는 경우와, 그 교회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퇴해 가는 과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AC 전체에서 천적 교회로 설명됩니다. 그 교회의 고유한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에 있고, 신앙이 그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태고교회의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언제나 동일한 사랑의 상태에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 역시 쇠퇴했고, 마침내 그 본래의 천적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AC.32의 표현은 그 교회를 특징짓는 고유한 영적 질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천적 교회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여기서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진리가 필요 없었다거나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흔히 생각하듯 서로 독립된 두 요소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신앙에 속한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에서 분리된 별도의 신앙을 그들은 참된 신앙으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의 전체 논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사랑은 광명체이고, 신앙은 작은 광명체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사랑과 신앙이 분리된 상태와 대조되는 예로 태고교회를 제시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이어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장을 자세히 보면 태고교회 사람들이 모두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태고교회에 관한 진술에 이어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즉 두 집단의 모든 개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나타나는 같은 천적 질서를 나란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라고 불리는 것과 천국에 천적 천사들이 있다는 것은 서로 관련되지만, 그렇다고 태고교회의 모든 구성원의 사후 운명이 자동으로 천적 천국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교회의 영적 성격을 말하는 것과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특히 태고교회가 후대로 가면서 쇠퇴하고 황폐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고, 모든 천국의 행복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그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얻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2의 관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사후 분류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심은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입니다. 태고교회라는 지상의 천적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서도, 천적 천사들의 천국적 상태에서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을 태고교회의 쇠퇴와 모순되는 절대적인 역사 진술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를 그 고유한 천적 성격에 따라 말하고 있으며, 그 성격을 오늘날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나란히 놓아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어떤 교회를 말할 때 그 교회가 나타내는 고유한 영적 성격과,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개인의 실제 상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였다고 해서 그 역사의 모든 사람이 천적 인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며,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태고교회가 후에 쇠퇴했다는 이유로 그 교회의 본래 천적 성격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AC.32에서 태고교회천적 천사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까닭은 둘을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양쪽에서 같은 천적 질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바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모든 사랑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가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함께 언급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AC.32, 창1:14-17, 해는 사랑이고 달은 신앙이다 :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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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AC.32.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위 AC.32 본문,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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