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7.심화
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위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 곧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진술은 참 놀랍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천국은,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삶이 늘 행복, 만수무강하게 될 줄,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줄 알기 때문이지요...
AC.37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alternations)와 ‘다양함’(varieties)이 있으며, 만일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 전혀 없게 된다’고 합니다. 변화가 없으면 단조롭다는 말까지는 쉽게 이해되는데, 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말하는 ‘단조롭다’는 것을 단순히 ‘지루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원문은 `uniform`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한결같아서 차이와 변화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재미가 없으니 생명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에는 본래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있다는 훨씬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7은 그 이유를 바로 이어서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선과 진리가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가 왜 교대와 다양함을 생명과 연결하는지 중요한 실마리를 얻습니다.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은 선과 진리가 아무런 차이 없이 하나의 평평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분별하고 구별하며 퍼셉션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생명을 생각하면 이해에 조금 도움이 됩니다. 하루에도 빛의 상태가 달라지고, 한 해에도 열과 빛이 달라집니다. 봄의 자연과 한여름의 자연, 가을과 겨울의 자연은 서로 다릅니다. 바로 그 변화 속에서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다시 새로운 때를 준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AC.37에서 자연계의 날과 해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하는 이유를 이런 모습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나쁜 상태를 겪어야 한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교대와 다양함’은 곧바로 ‘선과 악의 반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를 말합니다. 따라서 악에 빠지는 것 자체가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거나, 신앙이 무너지고 사랑이 식어야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입니다.
‘차이가 있어야 선을 알 수 있으니 악을 경험해야 선을 안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악을 경험해야만 선을 퍼셉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선과 진리가 분별되고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양함’과 ‘악’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생명도 교대가 있다는 뜻일까요? AC.37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고 말하므로, 적어도 영적 생명을 언제나 똑같은 강도의 빛과 사랑과 기쁨이 끝없이 지속되는 정지된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다만 천국에서 그 교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되는지는 AC.37의 설명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천국의 상태 변화를 직접 다루는 다른 글들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완전함’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꾸어 줍니다. 우리는 완전한 영적 상태라면 아무런 변화도 없이 항상 최고조의 사랑과 빛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37은 영적·천적 생명 자체에 교대와 다양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변화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곧 불완전함이나 실패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변화를 ‘주님께서 주신 좋은 변화’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는 자기 사랑 때문에 생기는 후퇴도 있고, 잘못된 선택의 결과도 있으며,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도 있기 때문입니다. AC.37의 ‘교대’를 이런 모든 상태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면 오히려 자신의 악을 영적 성장 과정으로 합리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가장 안전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생명은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생명에는 다양한 상태가 있고, 그 상태들은 서로 구별되며, 바로 그 안에서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되고 퍼셉션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살아 있는 다양함을 자연계의 날과 해, 빛과 열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7의 ‘결국 생명이 전혀 없게 된다’는 표현도 조금 이해됩니다. 생명은 단순히 어떤 좋은 상태 하나를 얻은 뒤 그것을 영원히 얼려 놓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은 다양한 상태를 가지며,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구별되고 퍼셉션됩니다. 적어도 AC.37이 보여 주는 영적 생명은 ‘변화 없는 정지’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생명’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볼 때도 이 원리는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내적 상태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러 상태 가운데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주님 앞에서 더욱 분명히 분별해 가는 것입니다.
결국 AC.37이 말하는 ‘교대와 다양함’은 영적 생명이 죽은 평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놀랍게도 바로 그 다양함 속에서 선과 진리가 분별되고 구별되며 퍼셉션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변화가 있으니 생명이 있다’는 단순한 말보다, ‘살아 있는 영적 생명에는 선과 진리가 퍼셉션될 수 있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AC.37의 뜻에 더 가깝겠습니다.
AC.37, 창1:14-17, ‘영적 생명의 리듬 : 낮과 밤, 계절처럼 반복되는 거듭남의 질서’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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