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4). 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 and for this reason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it have a spiritual meaning (n. 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1659
The things contained in this chapter appear as if they were not representative, for it treats only of wars between several kings, and the rescue of Lot by Abram; and finally concerning Melchizedek; and thus it seems as if they contained no heavenly arcanum. But still these things, like all the rest, conceal in the internal sense the deepest arcana, which also follow in a continuous series from those which go before, and connect themselves in a continuous series with those which follow.
[2] In those which precede, the Lord has been treated of, and his instruction, and also his external man, which was to be conjoined with the internal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ae et cognitiones]. But as his external man was—as before said—of such a nature that it had in it by inheritance from the mother things that hindered conjunction, and yet that were to be expelled by means of combats and temptations, before his external man could be united to his internal man, or his human essence to the Divine essence, therefore these combats are treated of in this chapter; and are represented and signified in the internal sense by the wars of which it treats. It is known within the church that Melchizedek represented the Lord, and therefore that the Lord is meant in the internal sense where Melchizedek is mentioned. It may be concluded from this, that not only the things concerning Melchizedek, but all the rest also, are representative; for not a syllable can have been written in the Word which was not sent down from heaven, and consequently in which the angels do not see heavenly things.
[3] In very ancient times also, many things were represented by wars, which they called the wars of Jehovah, and which signified nothing else than the combats of the church, and of those who were of the church, that is, their temptations, which are nothing but combats and wars with the evils in themselves, and consequently with the diabolical crew that excite the evils, and endeavor to destroy the church and the man of the church. That nothing else is meant in the Word by “wars” may be clearly seen from the fact that nothing can be treated of in the Word except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the church; because it is Divine and not human, consequently heavenly and not worldly, and therefore by “wars,” in the sense of the letter, nothing else can be meant in the internal sense. This will be more evident from what follows.
※ (주4). 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 and for this reason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it have a spiritual meaning (n. 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계속) 천사들이 살아가는 빛에 관하여, 또 그들의 낙원 같은 경관들과 거처들에 관하여
CONTINUATION CONCERNING THE LIGHT IN WHICH ANGELS LIVE; ALSO CONCERNING THEIR PARADISAL SCENES, AND THEIR DWELLINGS
1619
사람의 내적 시야(man’s interior sight), 곧 영안(靈眼, the sight of his spirit)이지요, 이 시야가 열리면, 저세상에 있는 것들, 곧 육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선지자들이 보던 것들이 딴 게 아니었습니다. 천국에는, 이미 말씀드려 온 것처럼,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표상들(表象, representations)이 계속되고요, 거기 있는 것들은 모두 이에 대한 상징들(significative)인데, 어느 정도냐면, 천사들의 시야에 표상도, 상징도 아닌 것들은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말씀(the Word)에 나오는 표상과 상징이 그래서 있는 것이며, 말씀이라는 것이 곧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When man’s interior sight is opened, which is the sight of his spirit, the things in the other life appear, which cannot possibly be made visible to the sight of the body. The visions of the prophets were nothing else. In heaven, as has been said, there are continual representations of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there are things that are significative; and this to such an extent that nothing exists before the sight of the angels that is not representative and significative. Thence come the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in the Word; for the Word is from the Lord through heaven.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눅16:1-8)
신구약 말씀에서 ‘일’과 ‘행위’, 그리고 ‘행함’과 ‘사랑’이란 말이 그렇게나 자주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일이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지도, 구원하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그것들을 신앙으로부터 분리해 온 이래, 지금은 또 이 둘을 교묘하게 신앙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해설 763:2) But inasmuch as they find in the Word of both testaments “works” and “deeds,” as well as “doing” and “loving,” so frequently mentioned, they can do no otherwise than affirm that one ought to live well; but since they have separated works or deeds from faith as not justifying and saving, they craftily join these and faith together, (AE.763:2)
오늘 말씀은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어떤 부자의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의 귀에 들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청지기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믿음만 있고, 인애(仁愛, 체어리티charity)의 삶은 없는 교회, 또는 그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 오늘 설교를 처음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과 달리 개신교 장로교 통합 가정에서 태어나 침례교인이 된 후,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제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순수하게(?)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된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개신교인들은 사실 겉으로 봐서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만, 그러나 제가 속했던 교회들이 대체로 괜찮은 교회였을 수도 있고, 또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살던 시대인 1700년대 중반 유럽 기독교회 때와는 또 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주님 보시기에는 그나마 한국 기독교회가 좀 나을 뿐, 세상이, 곧 교회가 종말을 향해 점점, 더욱 아주 심하게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청지기가 외적인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이 세상 청지기는 대개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할뿐, 주인 입장에서 정성껏 일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쌓아 두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거나, 사용하기는 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이 청지기에게 더 이상 청지기의 직무를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에서 내쫓거나 직분을 빼앗으시지는 않으시는데요, 그러면 이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신 건 무슨 뜻일까요? 외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내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나마 있던 외적인 신앙마저 없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처음 신앙을 가질 때는 외적인 신앙으로 시작합니다. 외적인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믿음에 따라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도 나오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지만, 정작 삶에 있어서는 교리대로 살지는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외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외적인 신앙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점진적으로 내적인 신앙, 즉 삶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로만 주님을 믿고, 실제 삶은 그 반대가 될 수 있으며, 그 정도가 심해지면 나중에는 신앙의 진리마저 부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존재했던 많은 교회들의 타락상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외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중에는 주님을 부인하고 진리도 부인하는 상태에 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청지기가 직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지요. 3절에서는 주님에 대한 믿음마저 잃어버린 신앙인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직분을 빼앗기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외적 신앙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회개하지 않았던, 내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종국에 가서는 그 신앙, 그 믿음마저 잃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마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의 순수함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내가 하나님도 잘 믿고, 이웃을 섬기려는 마음도 있었지 하는 감상에 빠지거나, 지금 모습을 생각하며 부끄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있어 순수했던 때로 돌아가려 해도 뜻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땅을 파는 것은 샘(fountain)을 얻기 위한 노력을 뜻하고, 샘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진리를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는 것은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적 신앙 안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믿음에 반하는 삶을 살았다가는 어느 순간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때부터는 말씀을 읽어도 더 이상 진리를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빌어먹자니 부끄럽다 했습니다. 이 비는 것(begging)은 주님 앞에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어먹자니 부끄럽다고 하는 것은 주님 앞에 겸손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청지기가 마침내 무서운 결심을 합니다. 5절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주님 앞에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신, 말씀의 선과 진리를 선한 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빚진 자가 주인에게 기름 백 말을 빚졌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선한 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하고, 백 말의 백(100)이란 수는 완전한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청지기는 증서에 오십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오십(50)은 보통 작은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백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증서에다 오십이라 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채무가 모두 변제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믿음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외적 교회들이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7절에 청지기가 밀 백 석 빚진 사람에게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 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밀은 기름과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하고, 팔십(80)은 완전히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의미로 일곱째 날(7일), 즉 안식일은 거듭난 상태를 의미하고, 그다음 날인 여덟째 날(8일)은 천국에서 새로운 시작, 즉 구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밀 백 석을 빚진 사람에게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체어리티의 삶으로 갚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청지기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했다고 합니다. 교회들이 교인들을 그렇게 잘못 가르칠 때 주님께서 과연 칭찬하실까요? 주님은 그런 교회나 사람들을 칭찬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칭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의 교활하고 영악함에 감탄하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세대의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교활한 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교묘한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뒤집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해 빛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해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시대든 빛의 아들보다는 감각적이고 추론, 논리, 말재주에 능한 사람, 교활한 사람들이 권세도 얻고, 부도 얻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7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정한 청지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부정한 청지기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지는 않는 교회와 그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이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믿음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롯의 아내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면 나중에는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사람이 되고, 종래에는 겉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속으로는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랬고, 오늘날 주류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 재물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인간의 지식을 더 믿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외적으로만 경건하고, 내적으로는 공허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청지기입니다. 주님께서 부정한 청지기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그들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청지기는 자신이 영적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는 줄 알면서도 주님 앞에 겸손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왜곡, 다른 사람의 구원마저 가로막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621번 글 6번 항에는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날 때부터 갖고 있던 유전 악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게 됩니다. 회개는 사람이 악을 행하고자 마음먹는 걸 그만두는 것, 그건 하나님께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자신을 살펴 자신의 죄를 보고 주님 앞에 고백, 도와주시기를 구하며, 악을 삼가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할수록, 그리고 주님을 믿을수록 그의 죄는 용서되지요. (참된 기독교 621:6) [6] The angels said further, “Man must repent of his sins in order to be saved, and unless he repents he remains in the sins into which he was born; and repentance consists in man’s ceasing to will evils because they are contrary to God, searching himself once or twice a year, seeing his evils, confessing them before the Lord, praying for help, refraining from evils, and beginning a new life; and so far as he does this, and believes in the Lord, his sins are forgiven.” (TCR.621:6)
주님께 도움을 구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했고, 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매일 살피시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 모든 종류의 악에서 벗어나시기를, 물러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29, 30)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22-32)
결혼 그 자체는 그 이상 거룩한 것이 없을 정도로 거룩하다. 그것으로 인해 인류가 생성되고 인류로 인해 천국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천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은 천국으로 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간음은 그 이상 불경한 것이 없을 만큼 불경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는 천국과 교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9961:4) ...marriages are so holy that there is nothing more holy, and this also for the reason that they are the seminaries of the human race, and the human race is the seminary of the heavens, for thither come the men who in the world have lived an angelic life. And on the other hand adulteries are so profane that there is nothing more profane, because they are destructive of heaven... (AC.9961:4)
오늘 본문은 2주 전 다룬,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그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본문인데, 본문이 길어 전, 후반 둘로 나눈 것으로, 오늘은 그 후반 본문입니다. 먼저 22절, 23절은 멀리 떠났다 돌아온 아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들은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고, 떠나 제 마음대로 살다 돌아와 이제는 속 사람과 결합하기를 원하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소를 잡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많이 보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좋은 옷은 진리를 뜻하고, 살진 송아지는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단절되었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시 통할 때, 주님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때 그 지식들이 살아나 진리로 변합니다. 그러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는 것은 지식들 안으로 선이 흘러 들어가는 것이고,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그때 그 지식들이 진리로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 우리는 보통 내 안에 지식이 많으면, 그러면 언제든 내가 맘만 먹으면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경험에 의하면, 지식과 실제로 그 지식을 가지고 선한 삶을 사는 건 별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가락지를 끼워주신다고 했는데, 가락지는 보통 결혼식에서 배우자들이 서로 나눠 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락지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을 의미하고, 또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겉 사람에게 힘이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 가락지로 표상되는 겉 사람의 힘이란 어떤 것입니까? 어떤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이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 결합할 때, 겉 사람은 그런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끼워주시는 가락지, 반지입니다.
말씀에는 또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겼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발이나 신은 겉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처음 만나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신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깨끗하게 된 겉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겉 사람을 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발을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로 돌아와 순종할 때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절에서 아버지가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겉 사람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속 사람과 결합할 때, 죽었던 겉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주님은 어떤 식으로 겉 사람을 살리실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시고, 그때 겉 사람 안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면서 능력이 생기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때 밭에 있던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모습을 25절에서는,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여기서 맏아들과 작은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의 교회를 형성하는 두 마음,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 밭에 있다는 것은 속 사람이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밭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집에서 노랫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노래와 춤은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그 선과 진리에서 비롯한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릴 때, 악기를 연주하고 찬송을 하는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을 때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춤추는 것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맏아들이 화를 냅니다. 그것에 대해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이 말하기를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속 사람은 그동안 주님의 명령에 따라 겉 사람에게 진리와 선을 충실하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겉 사람은 말을 듣지 않고 세상을 좇다가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그에게 선과 진리를 아낌없이 주십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한 이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고 성을 내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모두 더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간음은 선과 진리를 악과 거짓과 뒤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렇게 표현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속 사람은 이렇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맏아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聖) 문서에서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 즉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오픈하신 모든 계시를 특별히 구분하여 ‘성(聖) 문서’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요,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면 외부의 교회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이는 목회자입니다. 선과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겉 사람은 성도들입니다. 외부의 교회 중에는 가정도 있습니다. 고대 교회 때는 각 가정에서 가장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가장입니다. 그리고 겉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입니다. 교회의 목회자나 가정에서 가장들이나 세상 즐거움을 느낄 겨를없이 성도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계속해서 맡은 일을 하지요. 그런데 때로는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잘한 것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분들도 계시지요. 서운한 일이 있다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 때 목회자나 가장은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하느라고 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아버지께 성을 내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이 설교 원본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지난 2021년 5월 16일 주일 설교인데요, 이런 설명, 이런 풀이 앞에 저는 참 마음 깊이 탄복합니다. 주님의 성품 안에서 주님의 지혜를 온전히 의뢰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적 의미로 목회자는 사랑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모든 문제를 사랑, 또는 선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데요, 그러나 본문에서 맏아들의 모습은 사랑이나 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본문 26절에 보면,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맏아들이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종에게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종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종에게 물어봤다는 것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선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상황을 선으로 이해하면 어떤 경우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로 이해할 때는 화도 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 이와 관련, 마태복음 산상수훈 말씀이 생각납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38-44)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본문은 참으로 능력의 말씀,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의 능력이 느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부족함을 느끼는 건 다름 아닌 선악 분별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선, 곧 주님의 뜻인지를 잘 모르겠는 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 요즘 가장 저를 괴롭히는 한 가지는 바로, 저를 이단으로 단정, 일체 어떤 권면도 거절하는 사람을 저는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시도 때도 없이 진리, 즉 옳고 그름의 잣대가 떠올라 저를 분노하게 하는데요, 바로 오늘 본문의 맏아들 모습이 딱 제 모습입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은 정말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해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라며 서운함을 내비쳤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마9:13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눅15:4절 이하에서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은 선한 사람보다 죄인들을 더 챙기신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특별히 누구를 더 챙기거나 덜 챙기시지 않습니다. 병든 자들에게 주님의 손길이 더 필요한 것 뿐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만큼은 영적인 병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돌아온 탕자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기실 때, 질투하거나 시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매일 같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그런데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하는 나는 왜 거듭나지를 못하나 하는 마음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웃이 거듭나고 성장할 때, 우리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탕자가 치유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참으로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참으로 주님이 제 안에 와 계시기를,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선한 능력으로 제가 즐겁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비록 제가 무례히 여김을 당하며, 모욕을 당해도 프란치스코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4:2)
※ (주4). 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 and for this reason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it have a spiritual meaning (n. 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1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And Abram went up out of Egypt, he and his wife, and all that he had, and Lot with him, toward the south. ... 18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And Abram pitched his tent, and came, and dwelt in the oak groves of Mamre, which are in Hebron, and built there an altar unto Jehovah.
1535
This chapter treats of the external man in the Lord which was to be conjoined with his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human essence, the internal is the Divine essence. The former is here represented by Lot, but the latter by Abram.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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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
The true historicals of the Word began, as before said, with the foregoing chapter—the twelfth. Up to that point, or rather to Eber, they were made-up historicals. In the internal sense, the historicals here continued respecting Abram are significative of the Lord, and in fact of his first life, such as it was before his external man had been conjoined with the internal so as to make one thing; that is, before his external man had been in like manner made celestial and Divine. The historicals are what represent the Lord; the words themselves are significative of the things that are represented. But being historical, the mind of the reader cannot but be held in them; especially at this day, when most persons, and indeed nearly all, do not believe that there is an internal sense, and still less that it exists in every word; and it may be that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 internal sense has been so plainly shown thus far, they will not even now acknowledge its existence, and this for the reason that the internal sense appears to recede so f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as to be scarcely recognized in it. And yet that these historicals cannot be the Word they might know from the mere fact that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sense there is no more of the Divine in them than in any other history; whereas the internal sense makes the Word to be Divine.
[2]That the internal sense is the Word itself is evident from many things that have been revealed, as “out of Egypt have I called my son” (Matt.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2:15)
besides many others. The Lord himself also, after his resurrection, taught the disciples what had been written concerning him in Moses and the prophets (Luke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7)
and thus that there is nothing written in the Word that does not regard him, his kingdom, and the church. These are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of the Word; but the things contained in the literal sense are for the most part worldly, corporeal, and earthly; which cannot possibly make the Word of the Lord. At this day men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perceive nothing but such things; and what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re, they scarcely know. It was otherwis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and of the ancient church, who, had they lived at this day, and had read the Word, would not have attended at all to the sense of the letter, which they would look upon as nothing, but to the internal sense. They wonder greatly that anyone perceives the Word in any other way. All the books of the ancients were therefore so written as to have in their interior sense a different meaning from that in the letter.
※ (주4). 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 and for this reason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it have a spiritual meaning (n. 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1) And Jehovah said unto Abram, Get thee out of thy land, and from thy birth, and from thy father’s house, to the land that I will cause thee to see.
1407
These and the things which follow occurred historically, as they are written; but the historicals are representative, and each word is significative. By “Abram” in the internal sense is meant the Lord, as has been said before. By “Jehovah said unto Abram” is signified the first mental observation of all; “get thee out of thy land” signifies the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from which he was to recede; “and from thy birth” signifies the more exterior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nd from thy father’s house” signifies the more interior of such things; “to the land that I will cause thee to see” signifies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that were to be presented to view.
1408
These and the things which follow occurred historically as they are written; but the historicals are representatives and all the words are significative. The case is the same with all the historicals of the Word, not only with those in the books of Moses, but also with those in the books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all these, nothing is apparent but mere history; but although it is history in the sense of the letter, still in the internal sense there are arcana of heaven, which lie stored up and hidden there, and which can never be seen so long as the mind, together with the eye, is kept in the historicals; nor are they revealed until the mind is removed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 Word of the Lord is like a body that contains within it a living soul; the things belonging to the soul do not appear while the mind is so fixed in corporeal things that it scarcely believes that there is a soul, still less that it will live after death; but as soon as the mind withdraws from corporeal things, those which are of the soul and life become manifest. And this also is the reason, not only why corporeal things must die before man can be born anew, or be regenerated, but also why the body itself must die so that he may come into heaven and see heavenly things.
[2]Such also is the case with the Word of the Lord: its corporeal things are those which are of the sense of the letter; and when the mind is kept in these, the internal things are not seen at all; but when the former are as it were dead, then for the first time are the latter presented to view. But still the things of the sense of the letter are similar to those which are with man while in the body, to wit, to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that come from the things of sense, and which are general vessels that contain interior or internal things within them. It may be known from this that the vessels are one thing, and the essentials contained in the vessels another. The vessels are natural; the essentials contained in the vessels are spiritual and celestial. So likewise the historicals of the Word, and all the expressions in the Word, are general, natural, and indeed material vessels, in which are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and these in no wise come into view except by the internal sense.
[3] This will be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mere fact that many things in the Word are said according to appearances, and indeed according to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that the Lord is angry, that he punishes, curses, kills, and many other such things; when yet in the internal sense they mean quite the contrary, namely, that the Lord is in no wise angry and punishes, still less does he curse and kill. And yet to those who from simplicity of heart believe the Word as they apprehend it in the letter, no harm is done while they live in charity. The reason is that the Word teaches nothing else than that everyone should live in charity with his neighbor, and love the Lord above all things. They who do this have in themselves the internal things; and therefore with them the fallacies taken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are easily dispelled.
1409
That the historicals are representative, but all the words significative, is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and shown concerning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n. 665, 920, 1361); nevertheless, since representatives begin here, it is well to give briefly a further explanation of the subject.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celestial, looked upon all earthly and worldly, and also bodily things, which were in any wise objects of the senses, as being dead things; but as each and all things in the world present some idea of the Lord’s kingdom, consequently of things celestial and spiritual, when they saw them or apprehended them by any sense, they thought not of them, but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indeed they thought not from the worldly things, but by means of them; and thus with them things that were dead became living.
[2] The things thus signified were collected from their lips by their posterity and were formed by them into doctrinals, which were the Word of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ese were significative; for through them they learned internal things, and from them they thought of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But when this knowledge began to perish, so that they did not know that such things were signified, and began to regard the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as holy, and to worship them, with no thought of their signification, the same things were then made representative. Thus arose the representative church, which had its beginning in Abram and was afterwards instituted with the posterity of Jacob. From this it may be known that representatives had their rise from the significatives of the ancient church, and these from the celestial ideas of the most ancient church.
[3] The nature of representatives may be manifest from the historicals of the Word, in which all the acts of the fathers, Abram, Isaac, and Jacob, and afterwards those of Moses, and of the judges and kings of Judah and Israel, were nothing but representatives. Abram in the Word, as has been said, represents the Lord; and because he represents the Lord, he represents also the celestial man; Isaac likewise represents the Lord, and thence the spiritual man; Jacob in like manner represents the Lord, and thence the natural man corresponding to the spiritual.
[4] But with representatives the character of the person is not considered at all, but the thing which he represents; for all the kings of Judah and of Israel, of whatever character, represented the Lord’s kingly function; and all the priests, of whatever character, represented his priestly function. Thus the evil as well as the good could represent the Lord and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his kingdom; for, as has been said and shown above, the representatives were altogether separated from the person. Hence then it is that all the historicals of the Word are representative; and because they are representative, it follows that all the words of the Word are significative, that is, that they have a different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 from that which they b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 (주4). 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 and for this reason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it have a spiritual meaning (n. 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1408
These and the things which follow occurred historically as they are written; but the historicals are representatives and all the words are significative. The case is the same with all the historicals of the Word, not only with those in the books of Moses, but also with those in the books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all these, nothing is apparent but mere history; but although it is history in the sense of the letter, still in the internal sense there are arcana of heaven, which lie stored up and hidden there, and which can never be seen so long as the mind, together with the eye, is kept in the historicals; nor are they revealed until the mind is removed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 Word of the Lord is like a body that contains within it a living soul; the things belonging to the soul do not appear while the mind is so fixed in corporeal things that it scarcely believes that there is a soul, still less that it will live after death; but as soon as the mind withdraws from corporeal things, those which are of the soul and life become manifest. And this also is the reason, not only why corporeal things must die before man can be born anew, or be regenerated, but also why the body itself must die so that he may come into heaven and see heavenly things.
[2]Such also is the case with the Word of the Lord: its corporeal things are those which are of the sense of the letter; and when the mind is kept in these, the internal things are not seen at all; but when the former are as it were dead, then for the first time are the latter presented to view. But still the things of the sense of the letter are similar to those which are with man while in the body, to wit, to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that come from the things of sense, and which are general vessels that contain interior or internal things within them. It may be known from this that the vessels are one thing, and the essentials contained in the vessels another. The vessels are natural; the essentials contained in the vessels are spiritual and celestial. So likewise the historicals of the Word, and all the expressions in the Word, are general, natural, and indeed material vessels, in which are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and these in no wise come into view except by the internal sense.
[3] This will be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mere fact that many things in the Word are said according to appearances, and indeed according to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that the Lord is angry, that he punishes, curses, kills, and many other such things; when yet in the internal sense they mean quite the contrary, namely, that the Lord is in no wise angry and punishes, still less does he curse and kill. And yet to those who from simplicity of heart believe the Word as they apprehend it in the letter, no harm is done while they live in charity. The reason is that the Word teaches nothing else than that everyone should live in charity with his neighbor, and love the Lord above all things. They who do this have in themselves the internal things; and therefore with them the fallacies taken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are easily dispelled.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3-12)
※ 오늘 설교에는 말씀 본문 인용이 참 많습니다만 평소 다 잘 아는 본문이라고 지루해하시거나 그냥 대충 후루룩 넘어가거나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와있으면서 우리의 눈을 통해 말씀을 읽는 천사들은 본인들이 내적 존재라 역시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라고도 하는, 말씀의 영을 보는데요, 그때 그 펼쳐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주님 신성의 이 수백, 수천 천상 오케스트라의 향연과도 같은 감동과 감격에 그들은 어쩔줄을 몰라하거든요. 우리는 외적 존재, 즉 탁하고 흐릿한 물질계에 있으면서 역시 의미 전달에 있어 매우 제한적인, 인간의 언어로된 겉뜻으로만 주님의 이 신성 가득한 말씀을 접하기 때문에 잘 못 느끼지만 말입니다. 우리 안의 천사들을 위해, 그리고 그 즉시 숨는 우리 안의 악령들을 위해(?), 그리고 그 결과, 우리 영의 소생을 위해 모든 성경을 읽을 때는 정성을 다해 예를 갖춰 읽으시기 바랍니다.
지난번 성탄절 예배에 이어 오늘 신년 첫 주일예배 역시 공주농아교회 여러분과 함께 드리게 되어 참 좋습니다. 저는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합니다. 아마 우리 서미례 전도사님과 여러분의 따뜻한 환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 덕분이 아닌가 하는데요, 우리가 어떤 집을 방문할 때, 마음이 편한 집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불편한 집이 있지요. 집주인이 우리를 좋아하면 마음이 편하지만, 우리를 싫어하면 마음이 불편해서 오래 못 있고, 용건만 간단히 마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게 되지요. 주님이 이곳 공주농아교회를 편안해하시는 건,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싫어하면 주님도 이곳에 오래 계시기가 눈치가 좀 보이실 거에요. 우리, 주님이 우리 곁에 늘 편안히 계시도록 힘써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올 한 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이 벌써 2024년 1월 7일입니다. 이렇게 해가 바뀔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인사가 바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인데요, 물론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다 잘 알지요. ‘올 한 해 건강하시고, 가정과 회사에 어떤 불행한 일 없이, 손대시는 일마다 크게 성공하여 평안한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뭐 대충 이런 뜻으로 하는 무난한 인사입니다. 이런 인사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겠지요.
저는 오늘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들 역시 똑같이 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하고는 좀 다른 뜻으로 사용했으면 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새해 권면도 좀 함께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고 해서 ‘복’에 대해 뭐 유별나게 다르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 내용처럼 우리도 무병장수하고, 부귀영화 및 자손의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면 좋죠. 구약에도 보면 하나님을 섬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비롯, 애굽의 국무총리를 지낸 요셉, 큰 부와 명예, 영광을 누린 다윗과 솔로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나 오히려 큰 재상의 삶을 살았던 다니엘 등 ‘복’에 대한 세상 관점에서도 이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을 누리다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며, 누가 천국에 가 보니 의외로 세상 살 때, 부유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많이 와 있더라는 것, 그리고 이왕이면 부자로 사는 것이 좀 더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가 주님이 허락하신 재물을 그저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도구요, 쓰임새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이런 부자는 주님이 허락하신 부유함으로 적당히 좋은 집과 좋은 음식, 좋은 옷과 기타 여러 가지를 누려도 되는데요, 이런 부자는 절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며,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할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러면 성경에서는 ‘복’을 무엇이라 하는가 하여 좀 찾아봤는데요, 참 많은 본문, 아니 성경 전체가 사실은 ‘복’에 관한 책이라 할 정도로 많은 본문이 있어 좀 놀랐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마태복음 산상수훈 첫 시작을 주님은 ‘복’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하시는 걸 보고, 신년 첫 말씀이기도 하니 우리도 이 팔복 본문으로 해야겠다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팔복 강해를 하려는 건 아니고요, 단지 오늘 본문 통해 주님은 어떤 걸 ‘복’으로 여기시며, 이 산상수훈은 천국 생활을 요약하신 건데, 그러면 혹시 천국 입국 자격을 주님은 이 팔복으로 말씀하신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성령께서 오늘 이 시간, 이 본당을 환히 비추셔서 오늘 말씀이 충분히 잘 전달되며, 다들 깊이 깨닫는 시간들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선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재산을 소유하고 부유한 삶을 사는 게 악한 것도, 죄짓는 것도, 잘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우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법을 지키며, 정직하게 사업을 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25:20, 21)
하신 본문처럼 말입니다. 또 이런 본문들도 있는데요,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19:21, 22)
그리고 이 말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물론 이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실제로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다 처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자기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의 삶을 살거나 그 밖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제법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아시시의 성자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열두 제자가 그랬고요, 수도원 공부를 하면 처음 배우게 되는 모든 수도사의 아버지 성 안토니우스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영적 실상을 말씀드리면, 아무리 남들이 쉽게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런 과감한 선행을 하였어도 그걸 자기 공로로 여기는 사람, 곧 속으로 ‘나는 실제로 이렇게 했으니 당연히 천국 갈 자격이 있어’ 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괜히 재산만 날린 채, 천국도 못 갈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그 동기, 숨은 의도가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무엇을 소유하는 것에 관해 천국의 천사들은 이런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의식주를 온전히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는데, 그것도 그 천사의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그리고 최대로 받는다고 합니다. 천사들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수준은 아닌데요. 그렇다고 뭐 세상에서처럼 내가 크니 네가 크니 하는 그런 건 아니고, 오직 얼마나 더 주님을 사랑하는가, 얼마나 더 주님의 신성을 깊이 받아들이는가 하는 걸 말합니다. 방금 최대로 받는다 했는데요,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한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수준에서 최대로 받는 곳, 바로 그곳이 천국이니까요. 천사들은 그러나 그렇게 거저 받는 걸 절대 ‘소유’, 즉 ‘내 꺼’라는 생각으로 받지 않고, 대신 ‘이것의 쓰임새가 뭘까?’ 하는 생각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즉, 주님이 뭘 주시면, 그걸 받으면서 ‘주님이 이걸 왜 주실까? 나는 이걸로 무엇을 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걸까? 나한테 저 천사보다 더 주신 걸 보니 주님 보시기에 내가 이걸 가지고 해야 할 일이 더 많은가 보다’ 한다는 것이죠. 천사들은 주님께 모든 좋은 것을 거저 받으면서 늘 이런 태도로 받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같으면, 이런 사람에게 더욱더 주고 싶지 않으시겠어요?
우리도 이 세상 살면서 천사들의 이런 마인드로 살면 우리 역시 반드시 우리 수준에 맞는 그런 복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 각 사람의 수준을 말입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 각 사람의 분수에 지나는 복, 즉 감당할 수 없는 복을 허락하시지 않는데요, 그렇게 되면 그건 복이 아니라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더욱 큰 복을 받고 싶으시면, 자신의 영적 역량, 곧 속 사람의 크기를 더욱 키우시기 바라며, 반대로 만일 지금 내 처지가 실망스럽다면 그 이유를 잘 생각해 보시고, ‘아, 지금의 내 영적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어서 주님이 나를 복 주실 수 없는 거구나...’ 하시고, 회개하고 돌이켜 부지런히 영적 성장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하시면, 분명 얼마 안 가,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15:22-24)
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복은 모두 여덟 가지입니다. 그래서 얼핏 이 여덟 가지가 제각각 다 다른 복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천국 입국 조건, 즉 어떻게 하면 천국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수 있을까라는 한 가지를 말씀하시는 건데요, 우리가 아까 성찬 때도 말씀드렸듯, 천국은 주님의 신성(神性)으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하신다면, ‘아, 그렇다면 내가 그런 나라에 입국하려면 내 안에 주님의 신성이 갖추어져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가려면 그 나라에서 요구하는 최소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팔복은 바로 그 조건을 말씀하신 것이며, 그 조건이란 바로 세상 살면서 주님의 신성을 부지런히 갖추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살면서 무엇을 겉으로 ‘해야’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속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말이지요.
주님의 신성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살면서 주님의 신성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일상생활 가운데 주님의 선과 주님의 진리에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오늘 주님은 여덟 가지, 곧 ‘심령의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말라함’,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함’, ‘화평케 함’,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음’ 등으로 말씀하신 건데요, 이는 곧 우리 속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것이지요. 내 안에, 곧 내 속 사람 가운데 주님의 선과 진리가 없어 안타까워하는 상태를 ‘심령의 가난함’이라 하신 것이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픈데 의지가 약해 그렇게 못 사는 걸 슬퍼하는 상태를 ‘애통함’이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나한테 돈이 없고, 이것저것이 없을 때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그러지, 이런 거룩한 걸 가지고 그러지는 않잖아요? 다른 것들도 그 의미가 비슷비슷한데요, 우리가 ‘아... 내 안에는 이런 천국 입국 조건, 그 자격과 됨됨이가 너무나 많이 부족하구나...’ 하며, 심히 애통해할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바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말이지요. 이 약속들은 모두 그 속뜻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여러 영원한 행복을 뜻합니다.
2주 전 성탄절 예배 때 드린 말씀 또한 이와 비슷합니다. 다음은 그때 말씀인데요,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34-40)
여기서도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그리고 ‘옥에 갇혔을 때’는 모두 우리 속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 곳곳에서 계속해서 우리의 속 사람 상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속 사람이 사후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엔 주님의 모든것이 충만하기 때문인데요, 탈북자들이 그 목숨을 건 북한 탈출을 감행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기만 하면 정말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곳에서 천국과도 같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인데요, 그런 것처럼,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복’ 또한 그 초점이 우리의 속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으며, 속 사람의 성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겉 사람의 복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의 질서이며, 이 순서, 곧 ‘복’이라는 것은 주님한테서 나와서 천국을 통해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에게 도달하는 것이라는 이 순서를 망각하고, 엉뚱한 순서, 그러니까 정반대의 순서이지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태도를 가지고 감히 천국의 ‘복’을 추구하셨다가는 오히려 큰일 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태도를 보고 주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오히려 ‘복’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를 위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을 다들 기억하시지요?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즉 세상 살면서 그 안에 이미 천국이 있는 사람이라야 사후에 그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반대로는 세상 살면서 그 안에 지옥이 있는 사람은 사후 그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말씀도 되지요.
여러분, ‘인생은 끝이 좋아야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아무리 뭘 야단스럽게 누리고 살았어도 그 끝이 지옥이면 꽝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네, 고민할 것도 없이, 죽어서 천국 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럴려면, 평소 속 사람의 상태를 천국 상태로 유지하는 일에 모든 걸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42)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중에 가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와 같은 권면을 오해하여 누구나 일단 예수 믿고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고 천국 간다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이 권면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중간중간 생략된 권면입니다. 즉, ‘주 예수를 믿어 변화된 삶을 살아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이 되는 그런 사람과 그런 집은 사후에 구원을 받아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 말이지요. 해당 사도행전 본문도 보면 나중에 이 간수와 그 온 집이 정말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의 변화 없이 교회 다녔다고, 예수 믿었다고 저절로 무조건 천국 가는, 그런 건 없습니다.
오늘 ‘복’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는데요, 다시 한번 확실하게 드리고픈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복’은 사실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햇볕을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햇볕이 무슨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던가요? 똑같은 햇볕이 숲을 비추면 생명이 태동하지만, 거름더미를 비추면 부패가 시작되듯, ‘복’도 ‘복’ 그 자체이신 주님을 사람이 어떤 태도, 곧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된 삶을 살게 되고요, 반대로 주님을 미워하여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리는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 나는 특별히 주님을 미워한 적이 없는데, 왜 내 삶은 이렇게 힘들고 불행한 거야?’ 하시는 분들이 혹시 계실 텐데요, 주님을 미워하는 것은 마치 우리끼리 하듯 ‘나는 주님이 미워요.’라고 주님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 말씀보다 내 생각, 내가 하고픈 대로, 내 맘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무슨 말을 하거나 뭘 하려 할 때 먼저 주님께 여쭤보지 않아요. ‘주님, 제가 지금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주님, 제가 지금 이런 걸 해도 될까요?’ 하고 말이지요. 무슨 말을 하거나 뭘 하기 전, 먼저 주님의 뜻을 살피는 사람은 정말 범사에 주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라야 주님이 오셔서 함께하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음 말씀처럼 말이지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올해가 2024년이지만 그러나 여러분, 천국엔 시간도, 공간도 없습니다. 거기는 이 세상 자연계처럼 태양이 있어 무슨 공전과 자전 같은 걸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거기엔 주님을 향한 우리 속 사람의 상태와 그 변화가 있는데요, 그래서 이 2024년이라는 숫자 역시 천국에서는 어떤 상태를 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새해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그 속뜻으로는 ‘올 한해 당신의 속 사람이 더욱더 주님으로 채워져 영적으로 더욱더 놀라운 상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의미로 사용했으면 좋겠고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한테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좀 어려우실 수 있으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셔서 이 내용이 다들 자기 심령에 잘 들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2024년 신년 첫 주일을 맞아 마침 두 교회 연합으로 주님 공생애 내내, 아니 성경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는 너무나 귀한 말씀인 ‘속 사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라는 걸 오늘 말씀 통해 깊이 명심하고, 당장 오늘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우리의 하루하루, 우리의 모든 언행 통해 주님이 우리 각자 속 사람 안에 오셔서 편히 지내실 수 있는 그런 2024년 올 한 해 될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 (주4). 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 and for this reason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it have a spiritual meaning (n. 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1404
In these things now before us, which are true historicals, all the statements and word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ve in the internal sense an entirely different signification from that which they b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but the historicals themselves are representative. Abram, who is first treated of, represents in general the Lord, and specifically the celestial man; Isaac, who is afterwards treated of, in like manner represents in general the Lord, and specifically the spiritual man; Jacob also in general represents the Lord, and specifically the natural man. Thus they represent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of his kingdom, and of the church.
※ (주3). Both in the wholes and particulars of the Word there is an internal or spiritual sense (n. 1143, 1984, 2135, 2333, 2395, 2495, 4442, 9048, 9063, 9086).
9086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지면And an ox or an ass shall fall in there.
That this signifies which perverts good or truth in the natur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o fall,” as being to pervert (of which below); from the signification of “an ox,” as being the affection of evil in the natural, thus evil therein (of which above, n. 9065);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an ass,” as being truth in the natural (n. 2781, 5492, 5741, 7024, 8078). That “to fall into a pit,” when said of good and truth in the natural, which are signified by “ox and ass,” denotes to pervert, is plain from what is contained in the following verse, where amendment by means of truth is treated of, which can be effected with perverted goods and truths, but not with those that have been extinguished; for when good or truth is perverted, it still remains, although explained in a perverted manner.
[2] “To fall” also denotes to fall by mischance. Because this was signified by “falling into a pit,” therefore it was said by the Lord: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눅14:5) Which of you shall have an ass or an ox fall into a well, and will not straightway draw him out on the Sabbath day? (Luke 14:5).
This was said by the Lord when He healed on the Sabbath day the man who had the dropsy. In that church, the Sabbath day was most holy because it signified the heavenly marriage, which is the conjunction of good and truth from the Lord (n. 8495, 8510); consequently healings were performed by the Lord on the Sabbath day, because “healing” involved the healing of the spiritual life; and the disease of dropsy the perversion of truth and good; thus “healing” involved the amendment and restoration of perverted truth. For all the Lord’s miracles involved and signified states of the church (n. 8364), as in general do all Divine miracles (n. 7337). Hence then it is that the Lord said, “Which of you shall have an ass or an ox fall into a well, and will not straightway draw him out on the Sabbath day?” by which was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what has been said; for whatsoever the Lord spoke, He spoke from the Divine, and therefore there is an internal sense in each word (n. 9048, 9063). By “a well” in this passage the like is signified as by “a pit,” namely, falsity (see n. 1688). And as “a pit” denotes falsity, therefore also when the Lord spoke about the falsities of the church, He said: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마15:14) If the blind lead the blind, both shall fall into a pit (Matt. 15:14).
“A blind man” denotes one who is in erroneous ideas; and “falling into a pit” denotes to pervert truth. These things were spoken in comparisons; but in the Word all the comparisons are taken from significatives (n. 3579, 8989).
[3] They who believe that the Divine holiness which is in the Word lies hidden there no deeper than in the sense which appears in the letter, in these and other passages of the Word, see holiness from no other source than from faith that all things of the Word were Divinely inspired, and that there are inexplicable arcana therein known to God alone. But they who are not in this faith despise the Word, merely because the style is in appearance more humble than is the style which is adapted to the genius of the world, such as is to be found with many writers ancient and modern. But let them know that a Divine holiness lies hidden in each and all things of the Word, but it consists in the fact that each and all things treat of the Lord, of His kingdom, and His church. These are things most holy, because they are Divine from the Lord, wherein there is thus eternal life, according to the words of the Lord in John: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The words that I speak unto you are spirit, and are life (John 6:63).
But these most holy Divine things stand open before the angels in heaven, because these do not apprehend the Word naturally according to the literal sense; but spiritually according to the internal sense. Men also would apprehend the Word according to this sense if they lived an angelic life, that is, a life of faith and love. The things which are contained in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are no other than those which the genuine doctrine of the church teaches. The genuine doctrine of the church teaches the Lord, faith in Him, love to Him, and love of the good which is from Him. This love is charity toward the neighbor (n. 6709, 6710, 8123). They who live this life are enlightened by the Lord, and see the holy things of the Word; as by no means do others (see the preface to Genesis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