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every tree)은 퍼셉션(perception, 지각)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무(tree)는 퍼셉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인 퍼셉션을 받았으므로, 기억 속에 저장된 어떤 것을 숙고할 때마다 그것이 선하고 참된지 여부를 즉시 퍼셉션, 즉 지각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떤 거짓된 것이 나타나면 그들은 그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혐오스럽게 여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러한 퍼셉션을 대신하여, 그 이후에는 먼저 이전에 계시된 것들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말씀 안에 계시된 것들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인식이 뒤따라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To “eat of every tree” is to know from perception what is good and true; for, as before observed, a “tree” signifies perception. They had from the Lord continual perception, so that when they reflected on what was treasured up in the memory they instantly perceived whether it was true and good, insomuch that when anything false presented itself, they not only avoided it but even regarded it with horror: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angels. In place of this perce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owever, there afterwards succeeded the knowledge [cognitio] of what is true and good from what had been previously revealed, and afterwards from what was revealed in the Word.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16절의 명령, 곧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가 의미하는 바를, ‘퍼셉션(perception, 지각)이라는 하나의 핵심 개념으로 정확히 풀어 줍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취득이나 학습이 아니라,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즉각적 인식’을 뜻합니다. 태고교회에게 앎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아니라, 내면에서 곧바로 분별되는 생명의 작용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매우 강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기억 속에 있는 것을 떠올리는 순간, 그것이 선하고 참된지 여부를 즉각 알았습니다. 이는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는 판단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과 하나로 결합된 인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짓이 나타날 때, 그것은 단지 ‘틀린 정보’가 아니라, 생명과 어긋나는 것으로 느껴졌고, 심지어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천사들의 상태가 언급됩니다.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에 대해 추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퍼셉션, 곧 지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질서의 인식 방식입니다. 선과 진리는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생명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는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인식(cognitio)이 대신하게 됩니다. 인식은 퍼셉션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으며, 외부 계시, 그러니까 먼저는 직접 계시, 나중에는 말씀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배우는 방식입니다. 이는 타락이 아니라, ‘인류 상태의 변화에 따른 전환’입니다.

 

이 전환은 창세기 3장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자리에, 선악을 ‘알고자’ 하는 충동이 등장하고, 그 충동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 의존하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AC.125는 그 전조를 매우 조용하게 보여줍니다. 아직은 허락의 장면이지만, 동시에 ‘잃어버리게 될 상태’를 미리 비추는 대목입니다.

 

이 단락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퍼셉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 말씀을 통한 인식이 주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인식을 어디까지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느냐입니다.

 

AC.125는 이렇게 말합니다. 태고의 인간에게 선과 진리는 느껴지는 것이었고, 천사에게도 그러하며, 오늘의 인간에게는 말씀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 되었지만, 그 목적은 동일하며, 모두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심화

 

1.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즉각적 인식’

 

위 해설에 ‘여기서 ‘먹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취득이나 학습이 아니라,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즉각적 인식’을 뜻합니다.’에서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즉각적 인식’, 이게 뭔가요? 선인지 아닌지, 진리인지 아닌지를 즉시 알고, 그걸 의심 없이 받아들여 삶에 적용한다는 뜻인가요?

 

 

핵심을 바로 짚으셨지만, ‘즉시 알고 의심 없이 적용한다’는 식으로만 이해하면 약간 빗나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즉각적 인식’은 머리에서 판단을 끝내는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 아니라,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작동하는 인식’을 말합니다.

 

성경의 ‘먹는다’는 표현은 정보를 얻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것을 ‘자기 생명으로 동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즉각적’이라는 말은 시간의 빠름을 말하기보다, ‘중간에 따로 검토하고 계산하는 단계가 거의 없이, 사랑과 일치된 상태에서 곧바로 삶으로 이어지는 인식’을 가리킵니다.

 

조금 더 풀어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기준이 외부의 규칙이나 논증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 살아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이게 맞나 틀리나’를 따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무엇이 선한지 드러나고, 그 드러남이 곧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이때 인식과 실천 사이에 간격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즉각적 인식’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영적 인간은 말씀을 통해 배운 기준을 가지고, 그것을 이해로 판단하고, 그다음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게 맞나’를 생각하고,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긴 다음에 행동합니다. 이 과정은 귀하고 필요하지만, 아직은 ‘먹는다’기보다는 ‘생각하고 선택한다’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것처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표현은 절반만 맞습니다. 의심이 없다는 것은 맹목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과 일치하기 때문에 따로 의심할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이 표현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즉각적 인식’이란, 어떤 진리나 선이 외부에서 들어와 머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되어 곧바로 삶이 되는 상태’, 그래서 ‘알았다’와 ‘살고 있다’가 하나로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의 인식 방식입니다.

 

 

2. ‘천적 인간처럼 살기’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든지 ‘사랑’이라는 안경으로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처럼 사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방향은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다만 ‘사랑이라는 안경으로 본다’는 표현은 이해를 돕는 비유로는 좋지만, 그대로 두면 약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쉽게 ‘내가 생각하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자기중심이 더 강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뜻은 ‘사랑으로 본다’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보인다’에 가깝습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는 ‘내가 사랑의 기준을 들고 판단한다’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사랑이 근원이 되어 그 안에서 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을 만날 때, ‘이건 사랑으로 봐야지’라고 의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이 중심이기 때문에 ‘무엇이 선한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그 드러남이 곧 이해가 되고 행동이 됩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사랑이라는 안경’을 내가 쓰고 판단한다고 생각하면, 결국 기준은 여전히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경우에는 기준이 자기 안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판단하려 하기보다, ‘받아 보고, 그에 따라 사는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천적 인간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든 ‘사랑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중심이 되어, 그 사랑 안에서 보고 이해하고 사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알고 사는 것’과 ‘살면서 아는 것’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3. ‘아직은 허락의 장면이지만’

 

위 해설 중 ‘퍼셉션이 사라진 자리에, 선악을 ‘알고자’ 하는 충동이 등장하고, 그 충동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 의존하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AC.125는 그 전조를 매우 조용하게 보여줍니다. 아직은 허락의 장면이지만, 동시에 ‘잃어버리게 될 상태’를 미리 비추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해 주세요.

 

 

이 대목의 핵심은 ‘알고자 하는 마음’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앎의 방식과 근원이 바뀌기 시작하는 순간’을 짚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곧 천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퍼셉션이 중심이었습니다. 퍼셉션은 외부 자료를 모아 결론을 내리는 인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앎’은 찾고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보고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퍼셉션이 약해지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다른 움직임이 생깁니다. 바로 ‘스스로 알고자 하는 충동’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충동이 처음에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문제는 그다음 단계입니다. 이 충동이 ‘어디에 의존하여 앎을 얻으려 하는가’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은 더 이상 ‘내면에서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눈을 돌립니다. 감각으로 보고, 기억 지식으로 모으고, 그것을 이성으로 엮어 결론을 만듭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고자 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지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바로 알던 것을, 이제는 ‘감각과 지식에 의존하여 판단하려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의 의미는, 지식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질서가 뒤집히는 것’입니다.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가 먼저이고, 그다음에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 지식이 따라오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반대로, 감각과 기억 지식에서 출발하여 선과 진리를 판단하려 합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내가 판단한다’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 이야기에서 말하는 긴장의 시작입니다.

 

AC.125가 ‘아직은 허락의 장면’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은 ‘먹어도 된다’는 허락으로 보입니다. 즉, 모든 나무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허락 안에는 ‘언젠가 금지될 것’이 함께 비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유 속에서 인간이 점점 ‘스스로 판단하려는 방향’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아직 타락이 일어난 상태는 아니지만, ‘타락이 어떻게 시작될 것인지의 방향이 이미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퍼셉션이 중심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알고자 하는 충동’이 들어오며, 그 충동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 기대는 순간, 인간은 서서히 ‘내가 기준이 되는 자리’로 이동하게 됩니다.

 

정리하면, 이 구절은 단순히 ‘앎을 경계하라’는 말이 아니라, ‘앎의 근원이 바뀌는 미세한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전환이 이후 선악과 사건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시작이라는 점을, 매우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AC.124, 창2:15, ‘소유하지 않음’, 주님의 여러 말씀에서 확인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 지혜와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난 것임은, 주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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