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

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이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historical form)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적 의미(sense of the letter)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인이 성읍을 세우고 그것을 에녹이라 불렀던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문자적 의미로부터 그들은 또한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했음에도 이미 그 땅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에는 이러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고인들(most ancient people)은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 아래 ‘역사 형식’(form of a history)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AC.403은 창세기 4장을 읽는 데서만 중요한 번호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앞의 AC.402에서는 ‘성읍’이 실제 성읍 자체보다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본문은 마치 실제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읍을 세우고,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역사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403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세기의 이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만을 따라 읽으면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역사 형식을 문자 그대로만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한데도 이미 성읍을 세울 만큼 많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단순히 ‘가인의 아내는 어디에서 왔는가?’ 같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실제 사건들의 연대기적 기록만을 목적으로 쓰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창세기 초반의 이 부분은 영적인 실재를 역사적인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인이 태어나고, 아벨을 죽이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일련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속뜻에서는 교회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리적 상태가 다음 상태를 산출하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는지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문자적 역사 형식은 그 영적 연속을 담는 외적 그릇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습니다. 태고인들은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이란 자연적인 인물, 장소, 사건, 사물 등을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형식을 말합니다. 곧 추상적인 교리나 영적 상태를 직접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과 장소와 사건의 형태로 살아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추상 개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느끼고 보았으며, 자연적인 형상들을 통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지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이야기와 인물과 장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03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진리를 단지 추상적인 명제와 정의로만 전달하면 개념으로 머물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과 사건과 장소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에덴과 놋, 에녹과 성읍은 단순한 추상어가 아니라 영적 상태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초반의 서술은 일종의 ‘살아 있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적 오류가 파생된다’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이야기로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하나의 교리적 명제가 인간의 선택과 관계와 결과를 가진 살아 있는 서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403을 근거로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의미가 전혀 없고 순전히 만들어 낸 이야기다’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역사 형식’과 ‘표상적 유형들’입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적 형식 뒤에 있는 속뜻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이 부분을 단순한 문자적 연대기로만 읽지 않고, 영적인 실재를 역사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으로 읽는다’는 정도입니다.

 

또한 ‘역사 형식’이라고 해서 내용이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게 꾸며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연속’이라고 부른 것처럼,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 자체가 영적 상태들의 질서와 진행을 담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나오고, 아벨을 죽인 뒤 놋 땅에 거하며, 그 뒤 에녹과 성읍이 나오는 순서는 임의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각각이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연속을 표현합니다.

 

이 점은 AC.399-402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되고,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다시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것을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만 기록했다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출생과 이름과 성읍 건설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 변화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AC.403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무시하고 곧바로 속뜻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사 형식 자체가 속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나오고,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영적 연속을 담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동시에 문자적 이야기에서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깊이는 그 역사 형식 안에 교회의 상태, 인간의 거듭남, 사랑과 신앙의 관계,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경쟁하는 두 층위라기보다,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03의 마지막 표현,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왜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공부하는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어마다 뜻을 붙여 놓는 일종의 암호 해독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속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영적 실재와 연결되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보는 데 있습니다. ‘가인 = 신앙’, ‘아벨 = 체어리티’, ‘성읍 = 교리’라고 대응표만 외운다면 아직 태고인들이 느꼈던 그 생명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들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AC.403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태고인들은 영적 실재를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했고, 그 방식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름과 지명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보여 주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결국 AC.403이 말하는 것은 ‘역사를 버리고 상징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역사적 형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형식 안에서 영적 실재가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통하여 살아 움직입니다. 가인의 성읍도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고대의 한 사람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가르침을 낳고 교리적 세계를 형성해 갔는지를 살아 있는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상적 서술 방식이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기본 관점입니다. (AC.403 해설)

 

 

 

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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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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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 곧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의 내적 의미)가 담긴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29권)

 

신약 : 마, 막, 눅, 요, 계 (5권) (AC.10325)

 

10325.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Samuel, the two books of Kings, the Psalms of David, the Prophets Isaiah, Jeremiah, Lamentations, Ezekiel, Daniel, Hosea, Joel, Amos, Obadiah, Jonah,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Haggai, Zechariah, and Malachi; and in the New Testament the four Gospels, Matthew, Mark, Luke, and John; and Revelation.

 

그러므로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성경들, 곧 내적 존재인 천사들이 보았을 때, 아무 아르카나도 없는 성경들인 구약의 룻,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잠, 전, 아 등 10권과, 신약의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등 22권에서 어떤 교리를 뽑아내는 것은 안전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난 교회사의 오랜 정경화(正經化) 작업은 그만큼 인류가 주님의 신성이 깃든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퍼셉션(perception, 현재 천국 천사들과 주님간 커뮤니케이션 방법, 이것이 지상에도 있었던 시대를 태고교회라고 함. 아담으로 시작된 이 시대는 노아의 홍수로 마감됨)이 없어, 어떤 성경이 참된 말씀인지를 보는 영적 역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글들이 현 성경 66권에 포함된 것은, 마치 태고교회 시절, 에녹이라는 교회가 자신들의 모호하고 흐릿해진 퍼셉션을 보완할, 그 시대에는 아직 있어서는 안 되는, ‘교리’라는 것들을 만들 때, 주님이 그것을 아예 시작도 못하도록 막지는 않으신 것과 유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시대는, 비록 갈수록 사람들의 악과 거짓으로 퍼셉션이 희미해져 갔지만, 여전히 퍼셉션의 시대, 즉 주님이 직접 그들을 가르치는 시대, 사람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걸 주님으로 말미암은 퍼셉션으로 직접 아는 시대였지, 무슨 인간이 만든 교리, 세상으로 말미암은 걸로 공부하여 아는, 학습하여 아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만든 걸 후대가 사용하도록 따로 보관하셨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인류, 즉 홍수 후 인류는 주님의 퍼셉션으로 살았던 홍수 전 인류와 달리 주님을 교리로 배워 알아야 하는 신 인류였고, 그래서 이들 후대를 위해 폐기 대신 따로 보관하셨는데요, 이것이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에 담긴 아르카나입니다.

 

천사들은 내적(內的) 존재여서 오직 내적인 것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는 자연적 존재여서 자연계에 있는 것들만 볼 수 있는 것과 같지요. 이는 주님이 정하신 많은 원칙들 중 하나인데요, 그럼에도 가끔 천사들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육의 눈으로 본 게 아니고, 영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의 허락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자연계의 사물을 보는 것 역시 사람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은 오직 속뜻이 있는 성경, 곧 ‘말씀’ 뿐이라는 걸 상기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통해 가령, 룻기나 역대서, 사도행전이나 로마서 같은, 그 안에 속뜻, 곧 내적 의미가 없는 글들, 아르카나가 담기지 않은 글들을 읽을 땐, 그때는 그들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나 마태복음, 계시록 등 주님의 신성이 담긴 말씀들을 읽을 땐, 그때는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기 담긴 주님의 무궁하신 신성을 접하며, 온몸으로 감동, 감격합니다. 이런 사실은 매우 놀랍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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