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2, AC.475-480 심화

2, ‘아담은 한 사람인가, 태고교회인가?’

 

AC.47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합니다. 창세기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어 온 독자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남성 개인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인가?’

 

먼저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분명합니다. AC.478에서 그는 히브리어 ‘아담’(Adam)이 ‘사람’(man)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더욱이 창1:26에서는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 곧이어 ‘그들’이라는 복수로 받고, 창5:2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한 남성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함하는 말이며,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킵니다. AC.137에서도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사람’(homo)이라 하는 태고교회를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DP) 241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밝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세상에 창조된 최초의 인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담이라는 개인에게 태고교회라는 추가적인 상징적 의미도 있다’는 정도의 설명보다 훨씬 강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라는 형상으로 묘사된 대상 자체가 인류 최초의 두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DP.328에서도 같은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스라엘·유대교회 이전의 여러 교회가 역사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민족들과 사람들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 첫 번째인 태고교회가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AC.478 한 곳에서 우연히 등장하는 특이한 해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일관된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개인 아담의 존재를 부정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여기서는 질문 자체를 조금 정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최초로 창조하신 한 남성 개인이며, 하와는 그와 함께 최초로 창조된 한 여성 개인이라고 스베덴보리가 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DP.241에 비추어 답은 분명합니다. 그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는 최초로 창조된 두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개인도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명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의 문제를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계시하셨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명확합니다. ‘태고교회’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시대 자체를 신화적이고 비역사적인 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114 이하에서는 ‘사람 또는 아담이라 했던 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과 사후세계에서 대화했다고 기록하며, 그 교회의 후대에 속했던 사람들도 언급합니다. 따라서 ‘아담 = 태고교회’라는 해석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와 그 상태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창5의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을 단순히 한 가족의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AC.470은 이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여러 교회와 그 상태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AC.485는 창4의 셋과 창5의 셋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고까지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태고교회에서 이어져 나온 여러 교회와 그 상태의 계승을 기록한 내적 역사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그러므로 역사적 개인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현대적인 문장으로 결론짓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역사학적 논쟁을 벌이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의 개인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아담’이라는 이름 안에 어떤 신적 진리를 담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대신, 훨씬 더 자신의 해석 원리에 맞는 방식으로 ‘아담과 그의 아내는 세상에 창조된 최초의 인간들을 의미하지 않고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DP.241).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두 개인에 관한 전기적 기록의 주인공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태고시대의 실제 사람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아담을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최초의 한 남자가 누구였는가?’보다 ‘왜 주님께서는 최초의 교회를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가 됩니다. 그 질문을 따라가면 창1의 창조, 창2의 에덴, 창3의 타락, 그리고 창5의 계보가 모두 한 개인의 전기를 넘어 태고교회의 형성과 천적 상태, 쇠퇴와 후대 교회들의 계승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내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475-480 심화 2)

 

 

 

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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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480 심화 1, 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라 하는가?

AC.475-480 심화1, 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라 하는가? 창5:2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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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

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이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historical form)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적 의미(sense of the letter)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인이 성읍을 세우고 그것을 에녹이라 불렀던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문자적 의미로부터 그들은 또한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했음에도 이미 그 땅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에는 이러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고인들(most ancient people)은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 아래 ‘역사 형식’(form of a history)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AC.403은 창세기 4장을 읽는 데서만 중요한 번호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앞의 AC.402에서는 ‘성읍’이 실제 성읍 자체보다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본문은 마치 실제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읍을 세우고,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역사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403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세기의 이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만을 따라 읽으면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역사 형식을 문자 그대로만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한데도 이미 성읍을 세울 만큼 많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단순히 ‘가인의 아내는 어디에서 왔는가?’ 같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실제 사건들의 연대기적 기록만을 목적으로 쓰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창세기 초반의 이 부분은 영적인 실재를 역사적인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인이 태어나고, 아벨을 죽이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일련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속뜻에서는 교회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리적 상태가 다음 상태를 산출하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는지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문자적 역사 형식은 그 영적 연속을 담는 외적 그릇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습니다. 태고인들은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이란 자연적인 인물, 장소, 사건, 사물 등을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형식을 말합니다. 곧 추상적인 교리나 영적 상태를 직접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과 장소와 사건의 형태로 살아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추상 개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느끼고 보았으며, 자연적인 형상들을 통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지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이야기와 인물과 장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03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진리를 단지 추상적인 명제와 정의로만 전달하면 개념으로 머물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과 사건과 장소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에덴과 놋, 에녹과 성읍은 단순한 추상어가 아니라 영적 상태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초반의 서술은 일종의 ‘살아 있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적 오류가 파생된다’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이야기로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하나의 교리적 명제가 인간의 선택과 관계와 결과를 가진 살아 있는 서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403을 근거로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의미가 전혀 없고 순전히 만들어 낸 이야기다’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역사 형식’과 ‘표상적 유형들’입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적 형식 뒤에 있는 속뜻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이 부분을 단순한 문자적 연대기로만 읽지 않고, 영적인 실재를 역사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으로 읽는다’는 정도입니다.

 

또한 ‘역사 형식’이라고 해서 내용이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게 꾸며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연속’이라고 부른 것처럼,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 자체가 영적 상태들의 질서와 진행을 담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나오고, 아벨을 죽인 뒤 놋 땅에 거하며, 그 뒤 에녹과 성읍이 나오는 순서는 임의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각각이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연속을 표현합니다.

 

이 점은 AC.399-402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되고,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다시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것을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만 기록했다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출생과 이름과 성읍 건설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 변화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AC.403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무시하고 곧바로 속뜻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사 형식 자체가 속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나오고,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영적 연속을 담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동시에 문자적 이야기에서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깊이는 그 역사 형식 안에 교회의 상태, 인간의 거듭남, 사랑과 신앙의 관계,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경쟁하는 두 층위라기보다,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03의 마지막 표현,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왜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공부하는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어마다 뜻을 붙여 놓는 일종의 암호 해독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속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영적 실재와 연결되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보는 데 있습니다. ‘가인 = 신앙’, ‘아벨 = 체어리티’, ‘성읍 = 교리’라고 대응표만 외운다면 아직 태고인들이 느꼈던 그 생명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들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AC.403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태고인들은 영적 실재를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했고, 그 방식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름과 지명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보여 주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결국 AC.403이 말하는 것은 ‘역사를 버리고 상징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역사적 형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형식 안에서 영적 실재가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통하여 살아 움직입니다. 가인의 성읍도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고대의 한 사람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가르침을 낳고 교리적 세계를 형성해 갔는지를 살아 있는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상적 서술 방식이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기본 관점입니다. (AC.403 해설)

 

 

 

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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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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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

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a different church is here meant by “Seth” from that which was described above (Gen. 4:25), may be seen at n. 43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교회들이 같은 이름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은 앞 장에서(창4:17-18) ‘에녹’(Enoch)과 ‘라멕’(Lamech)이라 한 교회들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에녹’과 ‘라멕’이라 하는 다른 교회들(창5:21, 30)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churches of different doctrine were called by the same name, is evident from those which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4:17–18) were called “Enoch” and “Lamech,” while here other churches are in like manner called “Enoch” and “Lamech” (Gen. 5:21, 30).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18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4:17, 18)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1, 30)

 

해설

AC.485는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문자적 족보만 따라 읽으면 창4:25의 셋과 창5:3의 셋은 당연히 동일 인물이며, 창5는 창4 끝부분에서 등장한 셋의 족보를 다시 이어 가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명시합니다.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합니다.

 

AC.485가 직접 참조하라고 한 AC.435를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의미하고, 거기서 태어난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반면 창5:1-4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을 낳음’은 ‘태고교회의 첫 후대’를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명시합니다. 그는 같은 사람과 사건이 다시 언급되는 것처럼 보여도 속뜻에서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반복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AC.435)

 

따라서 창4와 창5를 하나의 단순한 직선적 계보로 이어 붙이면 속뜻에서 중요한 차이를 놓치게 됩니다. 창4는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발생과 그로부터 나온 여러 이단과 교리적 계열,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새 교회가 일어나는 흐름을 다룹니다. 그 마지막에 등장하는 셋은 바로 그 문맥 안에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반면 창5는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의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다루며, 여기의 셋은 태고교회에 이어지는 두 번째 교회입니다. AC.460-463의 장 전체 개요와 AC.481-484의 설명도 이 흐름을 일관되게 보여 줍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셋’ 하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창4에도 ‘에녹’과 ‘라멕’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과 ‘라멕’이 나옵니다. 그러나 AC.485는 이들도 각각 서로 다른 교회들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속뜻에서 같은 교회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교회들이 같은 이름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 자체보다 그 이름이 놓인 문맥과 그 교회가 표상하는 내적 상태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창4부터 계속 살펴 온 한 가지 질문에도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곧 ‘가인 계열이 태고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다면,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는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AC.485와 AC.435는 적어도 창4의 셋과 창5의 셋을 하나의 동일한 교회 계열로 합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창4의 마지막은 그 장에서 전개된 교회적 흐름의 결론이고, 창5는 태고교회와 그 첫 후대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별도의 교회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4와 창5의 모든 교회들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같은 시기에 나란히 존재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5가 직접 확정하는 것은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며, AC.435가 확정하는 것은 창4:25의 새 교회와 창5:1-4의 태고교회 첫 후대가 서로 다른 문맥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직선적인 교회 계보로 읽는 것은 어렵습니다. 두 계열의 시간적 관계와 서로의 관계는 앞으로 나오는 설명들을 더 모아 보면서 판단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창5의 셋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앞의 AC.484에서 보았듯이 이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사랑이 태고교회에서처럼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으나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셋은 창4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와 회복이라는 문맥 가운데 나타난 셋과 달리, 태고교회 자체로부터 이어지면서 그 천적 질서가 조금씩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나타난 교회입니다.

 

결국 AC.485는 창4와 창5를 읽는 우리의 지도를 수정해 주는 글입니다. 같은 이름이 반복된다고 같은 교회가 아니며, 같은 ‘사람과 그의 아내가 셋을 낳았다’는 서술이 반복된다고 같은 교회적 사건을 단순히 되풀이한 것도 아닙니다. 말씀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이름과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교회와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5를 읽을 때에는 창4의 이름들을 그대로 연결하기보다,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새로운 교회적 계승의 흐름 안에서 각각의 이름과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85 해설)

 

 

 

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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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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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

이 장에 나오는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문자적 의미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세상의 실제 연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12장에 이르기까지는 문자적 의미에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의 역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전체적으로나 하나하나에 있어서나 모두 다른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름들뿐 아니라 숫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에는 숫자 ‘셋’이 자주 나오고 숫자 ‘일곱’도 자주 나오는데, 이 숫자들이 나오는 곳마다 시간이나 그 밖의 것들이 포함하거나 표상하는 상태와 관련하여 어떤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장 짧은 시간의 간격에서도 가장 긴 시간의 간격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부분들이 전체에 속하는 것처럼 가장 작은 것들도 가장 큰 것들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부분들로부터, 또는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들로부터 합당하게 이루어지려면 서로 간에 유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What the “years” and the “numbers of years,” which occur in this chapter, signify in the internal sense, has hitherto been unknown. Those who abide in the literal sense suppose them to be secular years, whereas from this to the twelfth chapter there is nothing historical according to its appearance in the literal sense, but all things in general and every single thing in particular contain other matter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the names, but also with the numbers. In the Word frequent mention is made of the number three, and also of the number seven, and wheresoever they occur they signify something holy or most sacred in regard to the states which the times or other things involve or represent; and they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n the least intervals of time as in the greatest, for as the parts belong to the whole, so the least things belong to the greatest, for there must be a likeness in order that the whole may properly come forth from the parts, or the greatest from its leasts. Thus in Isaiah: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사16:14) Now hath Jehovah spoken, saying, Within three years, as the years of a hireling, and the glory of Moab shall be rendered worthless. (Isa. 16:14)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사21:16) Thus hath the Lord said unto me, Within a year, according to the years of a hireling, and all the glory of Kedar shall be consumed, (Isa. 21:16)

 

여기서는 가장 짧은 시간의 간격과 가장 긴 시간의 간격이 모두 의미됩니다. 하박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where both the least and the greatest intervals are signified. In Habakkuk: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합3:2) Jehovah, I have heard thy renown, and was afraid; O Jehovah, revive thy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in the midst of the years make known, (Hab. 3:2)

 

여기서 ‘수년 내’(midst of the years)는 주님의 오심을 의미합니다. 더 짧은 시간의 간격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와 같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고, 더 긴 시간의 간격에서는 주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날 때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내가 구속할 해’(year of the redeemed)라고도 합니다. where the “midst of the years” signifies the Lord’s advent. In lesser intervals it signifies every coming of the Lord, as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in greater, when the church of the Lord is arising anew. It is likewise called the “year of the redeemed,”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마찬가지로 사탄이 결박되어 있을 ‘천 년’(계20:2, 7)과 첫째 부활의 ‘천 년’(계20:4-6)도 결코 천 년이라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보여 준 것처럼 ‘날들’(days)이 상태들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듯이 ‘해들’(years)도 그러하며, 그 상태들은 그 연수에 의해 묘사됩니다. So also the thousand years in which Satan was to be bound (Rev. 20:2, 7), and the thousand years of the first resurrection (Rev. 20:4–6), by no means signify a thousand years, but their states; for as “days” are used to express states, as shown above, so also are “years,” and the states are described by the number of the years.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계20:2, 7)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계20:4-6)

 

그러므로 이 장의 시간들 역시 상태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각 교회는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향의 차이에 따라 다른 교회들과 서로 다른 퍼셉션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times in this chapter also involve states; for every church was in a different state of perception from the rest,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genius, hereditary and acquired.

 

해설

AC.482는 창5의 긴 수명과 숫자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정면으로 다루는 중요한 글입니다. 아담 130세, 이후에 이어지는 800년, 807년, 815년 등의 숫자를 오늘날의 연대기처럼 읽기 전에,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에서 ‘시간’과 ‘숫자’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창5의 ‘해’는 속뜻에서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그 연수의 숫자는 그 상태의 어떠함을 묘사합니다.

 

특히 이 글에는 매우 강한 문장이 나옵니다. ‘여기서부터 12장에 이르기까지는 문자적 의미에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의 역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78에서 ‘아담’이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가리킨다고 한 설명과 같은 방향입니다. 창5의 이름들이 여러 교회를 의미한다면, 그 이름들 옆에 붙어 있는 연수 역시 그 교회에 속한 개인들의 생물학적 수명을 기록한 숫자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름뿐 아니라 ‘숫자들도’ 다른 것들을 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고 말씀의 숫자를 임의로 상징화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482가 예로 드는 ‘셋’과 ‘일곱’처럼 말씀의 숫자에는 일정한 영적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숫자가 나타나는 문맥 속에서 그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에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동일한 영적 질서가 짧은 시간에서도, 긴 시간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숫자가 서로 다른 시간 규모에서 사용되더라도 그 안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는 유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수년 내’가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오심’으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오심은 한 가지 규모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삶이라는 작은 규모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오시는 것을 의미할 수 있고, 교회 전체라는 큰 규모에서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때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규모는 다르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 질서는 서로 상응합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계20의 ‘천 년’도 문자 그대로 1,000년이라는 기간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82는 사탄이 결박되는 천 년과 첫째 부활의 천 년이 ‘결코 천 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예언적·상응적 시간 표현을 읽을 때 중요한 질문은 ‘정확히 몇 년인가?’만이 아니라 ‘이 기간이 어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창5 전체를 읽는 중요한 열쇠를 줍니다. 각각의 교회는 ‘서로 다른 퍼셉션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각 교회의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향에 따라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창5에 나타나는 서로 다른 연수는 단순히 ‘누가 몇 살까지 살았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아담에서 셋, 에노스, 게난 등으로 이어지는 여러 교회가 어떤 퍼셉션의 상태에 있었는지를 표현하는 숫자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81의 ‘백삼십 년’도 이해의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태고교회의 한 개인이 정확히 130년을 산 뒤 아들을 낳았다는 시간 정보가 속뜻의 중심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셋’이라 하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상태와 과정을 나타냅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숫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설명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개별 숫자의 의미를 앞질러 확정하기보다, 먼저 ‘창5의 연수는 교회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AC.482의 해석 원리를 분명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창5의 족보는 이름과 숫자가 결합된 하나의 내적 역사입니다. 이름들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내고, 그 옆의 연수들은 그 교회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냅니다. 문자에서는 수백 년에 이르는 인간의 수명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태고교회가 여러 후대 교회로 이어지면서 그 퍼셉션과 내적 상태가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AC.482 해설)

 

 

 

창5:3, AC.483, ‘퍼셉션(perception)의 차이로 구별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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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1, 창5:3,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 (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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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

‘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여기서부터 11장, 곧 에벨(Eber)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들은 결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actual things)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태고 시대에 인류는 집(houses)과 가족(families)과 민족(nations)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의 집은 남편과 아내와 그 자녀들, 그리고 그 가족에 속하여 섬기는 몇몇 사람들로 이루어졌고, 하나의 가족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함께 살지는 않는 많거나 적은 수의 집들로 이루어졌으며, 하나의 민족은 많거나 적은 수의 가족들로 이루어졌습니다. That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very evident from what follows, for from this to the eleventh chapter, that is, to the time of Eber, names never signify persons, but actual things. In the most ancient time mankind wer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 house consisting of the husband and wife with their children, together with some of their family who served; a family, of a greater or lesser number of houses, that lived not far apart and yet not together; and a nation, of a larger or smaller number of families.

 

해설

AC.470은 창5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5에서 시작하여 창11의 에벨 시대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이름들이 ‘결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실제적인 것들’은 이름을 가진 개인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표상되는 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 교리와 같은 실재적인 영적 내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읽을 때 ‘이 사람 다음에 저 사람이 태어났다’는 문자적 흐름만 따라가서는 속뜻으로 기록된 교회사의 구조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설명을 ‘그런 이름을 가진 개인은 역사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AC.470의 초점은 이름들의 역사적 실재 여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 안에서 그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창5에서 창11의 에벨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들이 속뜻으로는 개인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대표되는 교회적 실재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집, 가족, 민족’에 관한 설명은 그러한 이름들이 어떻게 교회적 집단을 나타낼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태고 시대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서로 분리된 개인들의 집합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한 부부와 자녀 및 그 집에 속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을 이루었고, 여러 집이 모여 ‘가족’을 이루었으며, 다시 여러 가족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즉 개인에서 집으로, 집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민족으로 확대되는 공동체적 구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5의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한 이름이 단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통된 신앙과 삶, 교리와 내적 상태를 공유하는 집단을 대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셋 다음에 에노스가 태어났다’는 말씀도 속뜻으로는 단순한 생물학적 출생의 연속이 아니라, 한 교회적 상태로부터 또 다른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고 이어지는 과정으로 읽게 됩니다.

 

이 설명은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제기했던 문제에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름들을 개인이 아니라 교회적 실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고 있으며, 그 배경에 ‘집-가족-민족’이라는 복수의 공동체 구조가 있었다는 점은 앞으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이 어떻게 형성되고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검토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다만 AC.470만으로 창4와 창5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병행했다고 결론 내리기보다는, 이후 설명을 더 살펴보면서 그 관계를 계속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계보의 책’은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를 기록한 명단을 넘어섭니다. 그 이름들 안에는 태고교회 이후 여러 공동체 가운데 나타난 교회의 상태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개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집과 가족과 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교회를 보존하시고 이어 가셨으며, 창5의 이름들은 바로 그 교회적 역사를 드러내는 표지들이 됩니다. (AC.470 해설)

 

 

 

AC.471, 창5:1,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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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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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는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하며,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다’(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는 그가 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태고교회에 대한 묘사입니다.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denotes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signifies that he was made celestial: thus it is a descri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AC.469는 창5:1을 단순한 족보의 머리말로 읽지 않고, 태고교회의 성립과 그 성격을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먼저 ‘계보의 책’은 문자적으로는 아담 이후의 후손들을 기록하는 족보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곧 이후 이 장에서 여러 이름으로 표상되는 교회들을 열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질 ‘셋’, ‘에노스’, ‘게난’ 등의 이름도 단순히 개인들의 이름으로만 읽어서는 이 장이 말하려는 교회적 역사를 충분히 볼 수 없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가 ‘사람이 영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창조’는 단순히 육체를 가진 인간이 처음 생겨났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자연적이고 외적인 삶에 머물던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창1의 창조 기사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루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의 창조’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세우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AC.469는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그 사람이 ‘천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1에서 살펴본 거듭남의 질서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은 먼저 영적이 되고, 그다음 주님께서 그를 천적인 사람으로 이끄십니다. 영적인 상태에서는 아직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두드러지지만, 천적인 상태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합니다. 태고교회가 바로 이러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창5:1은 단순히 ‘아담의 후손들이 누구였는가’를 알려 주기 위한 족보의 시작이 아닙니다. 이 한 절 안에서 먼저 태고교회 자체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다시 세워 놓고, 그다음 그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들의 상태를 살펴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창조’에서 영적 상태가, ‘하나님의 모양’에서 천적 상태가 언급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창5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창5의 여러 이름을 단순히 사람들의 출생과 죽음의 연속으로만 보면 이 장은 긴 족보에 지나지 않지만, AC가 밝히는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세우신 태고교회가 여러 후대의 교회들을 거치면서 어떻게 계승되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사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모양’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마침내 천적인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모든 생명과 지혜의 시작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AC.469 해설)

 

 

 

AC.470, 창5:1, ‘이름들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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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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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465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켜 ‘라멕’(Lamech)이라 하였습니다. (25절) A ninth church was called “Lamech.” (verse 25)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5절)

 

해설

AC.465는 앞에서 이어져 온 교회의 순서 가운데 ‘라멕’을 아홉 번째 교회로 제시합니다. AC.463에서 ‘에노스’부터 ‘므두셀라’까지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가 차례로 제시되었고, 이제 그다음 교회가 ‘라멕’입니다. 따라서 창5:25의 ‘라멕’ 역시 장 개요에서는 한 교회의 이름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AC.460에서 시작된 흐름을 그대로 이어 갑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졌고, ‘라멕’은 그 연속 가운데 아홉 번째에 해당합니다. 문자상으로는 족보 속에서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속뜻으로는 ‘라멕’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AC.465가 말하는 범위를 넘어 ‘라멕’이라는 교회의 구체적인 상태를 미리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 개요에서 우선 밝혀 주는 것은 그 위치와 순서입니다. ‘라멕’은 ‘므두셀라’ 다음에 이어지는 아홉 번째 교회이며, 그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이후 해당 본문에 대한 해설에서 밝혀집니다.

 

특히 ‘아홉 번째’라는 표현은 창5의 이름들이 서로 무관하게 나열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 안에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셋’에서 시작하여 여러 이름을 거쳐 ‘라멕’에 이르는 동안 각각의 이름은 이어지는 교회를 가리키며, 창5는 그 순서를 통하여 태고교회의 여러 상태가 어떻게 계속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465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라멕’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들의 흐름 가운데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장 개요는 각 이름의 의미를 자세히 풀기 전에 먼저 전체 계승의 뼈대를 세워 줍니다. 독자는 이 뼈대를 붙들고 이후 본문 해설로 들어가면서 ‘라멕’이라 하는 교회가 앞선 교회와 어떻게 이어지며 또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AC.465 해설)

 

 

 

AC.466, 창5, ‘노아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된 열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6열 번째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합니다. (28-29절)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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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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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 곧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의 내적 의미)가 담긴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29권)

 

신약 : 마, 막, 눅, 요, 계 (5권) (AC.10325)

 

10325.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Samuel, the two books of Kings, the Psalms of David, the Prophets Isaiah, Jeremiah, Lamentations, Ezekiel, Daniel, Hosea, Joel, Amos, Obadiah, Jonah,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Haggai, Zechariah, and Malachi; and in the New Testament the four Gospels, Matthew, Mark, Luke, and John; and Revelation.

 

그러므로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성경들, 곧 내적 존재인 천사들이 보았을 때, 아무 아르카나도 없는 성경들인 구약의 룻,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잠, 전, 아 등 10권과, 신약의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등 22권에서 어떤 교리를 뽑아내는 것은 안전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난 교회사의 오랜 정경화(正經化) 작업은 그만큼 인류가 주님의 신성이 깃든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퍼셉션(perception, 현재 천국 천사들과 주님간 커뮤니케이션 방법, 이것이 지상에도 있었던 시대를 태고교회라고 함. 아담으로 시작된 이 시대는 노아의 홍수로 마감됨)이 없어, 어떤 성경이 참된 말씀인지를 보는 영적 역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글들이 현 성경 66권에 포함된 것은, 마치 태고교회 시절, 에녹이라는 교회가 자신들의 모호하고 흐릿해진 퍼셉션을 보완할, 그 시대에는 아직 있어서는 안 되는, ‘교리’라는 것들을 만들 때, 주님이 그것을 아예 시작도 못하도록 막지는 않으신 것과 유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시대는, 비록 갈수록 사람들의 악과 거짓으로 퍼셉션이 희미해져 갔지만, 여전히 퍼셉션의 시대, 즉 주님이 직접 그들을 가르치는 시대, 사람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걸 주님으로 말미암은 퍼셉션으로 직접 아는 시대였지, 무슨 인간이 만든 교리, 세상으로 말미암은 걸로 공부하여 아는, 학습하여 아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만든 걸 후대가 사용하도록 따로 보관하셨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인류, 즉 홍수 후 인류는 주님의 퍼셉션으로 살았던 홍수 전 인류와 달리 주님을 교리로 배워 알아야 하는 신 인류였고, 그래서 이들 후대를 위해 폐기 대신 따로 보관하셨는데요, 이것이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에 담긴 아르카나입니다.

 

천사들은 내적(內的) 존재여서 오직 내적인 것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는 자연적 존재여서 자연계에 있는 것들만 볼 수 있는 것과 같지요. 이는 주님이 정하신 많은 원칙들 중 하나인데요, 그럼에도 가끔 천사들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육의 눈으로 본 게 아니고, 영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의 허락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자연계의 사물을 보는 것 역시 사람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은 오직 속뜻이 있는 성경, 곧 ‘말씀’ 뿐이라는 걸 상기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통해 가령, 룻기나 역대서, 사도행전이나 로마서 같은, 그 안에 속뜻, 곧 내적 의미가 없는 글들, 아르카나가 담기지 않은 글들을 읽을 땐, 그때는 그들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나 마태복음, 계시록 등 주님의 신성이 담긴 말씀들을 읽을 땐, 그때는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기 담긴 주님의 무궁하신 신성을 접하며, 온몸으로 감동, 감격합니다. 이런 사실은 매우 놀랍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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