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스토포로스, 곧 영어권에서 ‘Saint Christopher’라고 부르는 인물입니다. 그의 전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강을 건너려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었다가 그 아이가 점점 세상보다 무거워지고, 마침내 그 아이가 그리스도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방식보다는 오랜 기독교 전승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중심으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크리스토포로스는 처음부터 ‘가장 강한 존재’를 섬기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왕이라고 생각하여 왕을 찾아가 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이 사탄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다면 사탄이 왕보다 강하구나’ 하고 사탄을 찾아갑니다. 다시 사탄을 섬기다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강한 분이구나’ 하며 그리스도를 찾아 나섭니다. 이 전승의 첫 부분만으로도 한 인간의 영적 여정을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선한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씩 넘어가면서 마침내 참된 주권자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과정은 인간이 외적인 힘에서 내적인 힘으로 옮겨가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먼저 눈에 보이는 힘을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권력, 재산, 지위, 명예, 육체적 능력 같은 것들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처음 왕을 찾아간 것도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습니다. 왕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왕조차 두려워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의 생각은 흔들립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이 절대적인 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사탄을 찾아갔다는 대목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선의 능력보다 악의 능력이 더 강해 보이는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 같고, 탐욕과 폭력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으며, 자기 욕망을 거리낌 없이 좇는 사람이 오히려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악이 선보다 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악에는 자체적인 생명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악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을 뒤틀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것은 궁극적인 힘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마침내 사탄마저 두려워하는 그리스도를 찾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그는 지금까지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가?’를 찾아다녔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은 더 강한 권력자를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한 수도사가 그에게 뜻밖의 길을 알려 줍니다. 강가에서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어 건네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섬기다 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것이다.’ 가장 높은 분을 만나려는 사람에게 주어진 길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오래된 전승은 놀랍도록 복음적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세상 끝까지 여행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찾아오는 사람을 등에 업으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use)과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종교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는 구체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길을 잃은 사람을 인도하며, 내가 가진 힘과 지식과 능력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토포로스에게는 큰 체격과 강한 육체가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그 힘을 ‘가장 강한 ’를 섬기는 데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힘의 참된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의 힘은 강한 자 곁에 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지 못하는 약한 사람을 등에 업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능력은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의 선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때 본래의 질서를 찾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아이 하나가 나타나 자신을 강 건너편으로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평소처럼 아이를 등에 업고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아이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강 가운데에 이르자 마치 온 세상을 등에 짊어진 것처럼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집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넌 크리스토포로스가 어떻게 어린아이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느냐고 묻자 아이는 자신이 세상의 죄를 짊어진 그리스도임을 밝힙니다.

 

이 장면은 전승 전체의 중심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을 찾아다녔지만, 정작 그분은 힘센 왕이나 위엄 있는 정복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등에 업을 수 있는 작은 어린아이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아이 안에 세상을 짊어진 무게가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가장 작은 모습 안에 내적으로 가장 큰 능력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보여 주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외형의 크기와 화려함을 보고 힘을 판단하지만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께 가까운 천사일수록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지혜가 깊을수록 자신의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압니다. 선이 많을수록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가장 높은 것은 지배하려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는 복음의 질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포로스라는 이름 자체도 이 이야기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Christophoros’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나르는 ’, 곧 ‘그리스도를 짊어진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조금 더 깊이 읽으면 단지 어느 날 어린 예수를 등에 업었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삶 안에 모시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으로 운반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크리스토포로스’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넜지만, 실제로는 누가 누구를 지탱하고 있었겠습니까? 겉으로 보면 크리스토포로스가 어린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크리스토포로스의 생명과 힘 자체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내가 주님을 위해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더 깊이 깨달으면 ‘ 일을 있도록 나를 붙들고 계셨던 분도 주님이셨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을 도왔고, 내가 봉사했고, 내가 헌신했고, 내가 복음을 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자유롭게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친 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선한 것은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공로가 끼어들지 않는 선입니다.

 

이 대목은 수도와 헌신을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합니다. 수도생활이 깊어지고 희생이 커질수록 인간에게는 아주 미묘한 시험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버렸다’, ‘나는 이렇게 희생했다’, ‘나는 평생을 바쳤다’, ‘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는 자기 공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내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지점을 매우 엄격하게 봅니다. 참된 자기 부인은 단순히 재산과 지위와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이 행한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까지 내려놓는 데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의 힘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발견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강한 자의 곁에서 힘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등에 업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것은 ‘주님은 어디에서 만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답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씀과 예배와 기도 가운데 만나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쓰임 가운데서도 만나십니다.

 

영상 후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크리스토포로스가 박해를 받아 신앙을 포기하라는 요구와 여러 유혹을 받았으나 끝까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순교 전승도 소개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칼과 화살 등의 기적적 세부는 성인전의 전승적 성격을 감안하여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영적 중심은 분명합니다. 한번 참된 주인을 발견한 사람은 다시 이전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 역시 거듭남의 과정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오히려 그 진리가 실제로 자기 삶의 사랑이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들이 찾아옵니다. 진리를 알고 있을 때와 그 진리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는 다릅니다. 선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와 자기 욕망을 포기해야 선을 선택할 수 있을 때도 다릅니다. 시험은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있는 지식에서 삶에 속한 것으로 옮겨 가게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서 ‘세상의 지배자는 왕도 사탄도 아니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이것은 이번 이야기의 중심을 잘 짚은 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이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 판단과 욕망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의 계명이 충돌할 때 계명을 선택하고, 내 이익과 이웃의 유익이 충돌할 때 체어리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실제로 그 사람의 삶을 다스리는 왕이 되십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장면은 저는 오히려 화살도, 기적도, 순교도 아니라 ‘강가에서 사람을 업어 건네주는 크리스토포로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특별한 계시도 없었고 천국이 열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 앞에 온 사람을 자기 힘으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한 쓰임 속으로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아주 특별한 체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정직하게 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맡겨진 직분과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곳이 바로 ‘강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뒤돌아보면 ‘그때 내가 업고 건넌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앞선 영상들과 연결해서 보면 흐름도 흥미롭습니다. ‘연못 이야기’에서는 주님 안에 있어야 산다는 것을 보았고, ‘사과나무 이야기’에서는 자기 지혜보다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을 보았으며, ‘수도사 싸움’에서는 ‘ ’을 내려놓을 때 싸움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에서는 주님께 받은 힘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릴 때 그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모습을 봅니다. 서로 다른 수도사 이야기들이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아 이웃을 향하여 흘려보내는 ’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모입니다.

 

이번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강한 분을 섬긴다는 것은 가장 강한 자의 곁에 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힘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의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바로 체어리티의 길에서 인간은 자신이 찾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크리스토포로스가 평생 찾아다닌 ‘가장 강한 ’이 마침내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의 등에 올라왔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세상은 힘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래 있는가’로 측정하지만, 주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으로 받쳐 있는가’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그리스도를 등에 업었던 그날, 그의 큰 몸과 힘은 비로소 자기에게 주어진 참된 쓰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거듭남의 중요한 한 모습일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얼마나 커질 것인가?’에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누구를 건너게 것인가?’로 삶의 질문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SY.74, 강문호 수도사, ‘싸움을 할 수 없었던 두 수도사 - 하나님의 씨와 거듭남’ (20191224)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직접 방문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수도원 밖 세상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두 수도사가 어느 날 화면을 통해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싸움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두 사람은 호기심이 생겨 ‘우리도 한번 싸워 보자’고 합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지갑 하나를 가운데 놓고 한 사람이 ‘내 것이다’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맞서면서 다투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자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한 수도사가 지갑을 집어 들고 ‘내 거다’라고 하자 다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 가져가라’고 해버린 것입니다. 싸움이 시작될 수가 없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여기에서 요한일서 39절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를 인용하고, 이 두 수도사가 싸울 수 없었던 까닭을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소와 말이 저마다 타고난 방식으로 일어나고 병아리가 물을 마신 뒤 본능적으로 머리를 드는 모습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씨가 사람 안에 자리 잡으면 선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점차 그 사람의 ‘본질’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대목입니다. 싸움에는 반드시 두 개의 ‘내 것’이 필요합니다. 한쪽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다른 쪽에서도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해야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가 가져라’ 하는 순간 싸움의 재료 자체가 사라집니다. 이 작은 이야기는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갈등을 만들어 내는지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단순히 물건에 대한 소유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것’, ‘내 생각’, ‘내 판단’, ‘내 공로’, ‘내 지위’, ‘내 명예’, ‘내가 옳다’는 데 집착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모두 여기에 연결됩니다. 실제로 우리의 싸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 때문인 경우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다고 느끼고, 내 체면을 손상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결국 겉으로는 여러 이유가 있어 보여도 그 깊은 곳에는 ‘’와 ‘내 것’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논쟁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 자체를 필요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과 맞설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매우 잘 연결됩니다.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유익을 기뻐합니다. 자신이 가진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움켜쥐기보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서로 나누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삶의 중심에는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에게 쓰임이 될 것인가’가 놓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조금 더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요한일서의 ‘하나님의 씨’를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새로운 본질처럼 설명합니다. 이 방향에는 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깊어지면 사람은 단지 ‘죄를 지으면 안 되니까 참는 상태’를 넘어 ‘그 악 자체를 싫어하는 상태’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악을 피하지만, 나중에는 그 악이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서 싫어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애정의 변화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강문호 수도사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표현을 더욱 깊게 열어 줍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모르는 존재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을 받아 악과 싸우고 그것을 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애정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하면 안 되니까 하지 않는 것’이었던 일이 어느 순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이 점차 좋아지고 기뻐집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선이 의무에서 기쁨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죄를 피하는 게 아니라 죄를 모르는’ 삶이라는 표현은 그 의도를 잘 살려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거듭난 사람이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악을 너무 멀리하여 그것을 자기 삶의 선택지로 삼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악과 거짓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합니다. 다만 그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악을 모른다’기보다 ‘악을 원하지 않는다’가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영상의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의 ‘’를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보존하시며, 훗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점에서는 아름다운 접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정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했을 때의 기쁨, 주님과 이웃을 향했던 순수한 마음 등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것들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씨가 있으면 범죄하지 못한다’는 말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면 자칫 신앙생활의 실제 모습을 놓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시험은 있고 proprium은 계속 고개를 듭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악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물러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선한지를 자랑하기보다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점은 이번 이야기의 핵심과도 맞닿습니다. ‘내 거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수도사의 모습은 단지 물질에 욕심이 없는 모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더 어려운 내려놓음은 ‘내가 선하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을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복을 입고 청빈하게 살면서도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더 거룩하다’, ‘나는 이것을 이루었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사랑의 질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라는 환경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싸움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속의 싸움까지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악은 단순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한 내면의 애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된 수도는 장소의 격리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보다 자기 안의 ‘내 것’을 얼마나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두 수도사’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영적 비유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싸움을 멈추는 가장 깊은 방법은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일으키는 자기중심적 애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언제나 ‘그래, 네가 가져라’라고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의 앞에서는 진리를 말해야 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며,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지켜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양보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자기 자존심과 승리를 위해 하느냐, 아니면 선과 진리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하느냐입니다.

 

따라서 참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평화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 질서입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질서 아래 둘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사람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저 사람이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한 일을 사람들이 알아줘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몫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이전에는 싸움거리가 되었던 것들이 더 이상 싸움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앞선 ‘사과나무 이야기’가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수도사 싸움’은 ‘내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싸움 자체가 사라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영상 모두 깊은 곳에서는 proprium을 다룹니다. 하나는 ‘내가 안다’는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내 것이다’라는 proprium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이 ‘내가 안다’와 ‘내 것이다’가 조금씩 ‘주님께서 아십니다’와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로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인용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끝나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갈수록 선은 점차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됩니다. 처음에는 싸우고 싶은데 참습니다. 그다음에는 싸워서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의 유익을 자기 유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갑니다. ‘죄를 참는 사람’에서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번 ‘수도사 싸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이란 죄를 짓고 싶은 자신을 억지로 눌러 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가 삶의 사랑이 되어 마침내 이전에 좋아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 힘들어하던 선을 기뻐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두 수도사가 싸움에 실패한 이유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싸울 줄 몰라서 싸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만들어 낼 내 것이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할 것도 어쩌면 ‘평생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게 해주십시오’가 아니라 ‘부딪치는 순간에도 제 안의 proprium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선과 진리와 체어리티가 저를 이끌게 해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한복판에서도 가능한 수도이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가 마침내 삶의 열매가 되어 가는 길일 것입니다.

 

 

 

SY.76, 강문호 수도사, ‘크리스토포로스,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넌 수도사’ (20191229)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

bygrace.kr

 

SY.73, 강문호 수도사, ‘사과나무와 하나님의 섭리’ (2019122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