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처음 들으면 상당히 불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상티어’, ‘중티어’, ‘하티어’로 나누고, 남자의 키와 외모, 학력, 직업, 연봉, 자산, 부모의 경제력과 노후 준비를 하나하나 따진 뒤 어느 등급에 속하는지를 정합니다. 여자 역시 나이와 외모, 학력, 직업, 연봉, 자산, 부모의 재산과 노후 준비 등을 놓고 같은 방식으로 분류합니다. 심지어 어떤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상에서 중으로 내려간다’, ‘하에서 중으로 올라가기 어렵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격으로 보는 데 익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부감부터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을 곧바로 ‘사람을 돈과 외모로 평가하는 세속적인 이야기’라고 밀어내기 전에 한 가지는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상은 ‘사람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신학 강의가 아니라, 결혼정보회사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실제 사람들이 어떤 조건으로 서로를 선택하고 거절하는지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이 그 현실을 설명하는 영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이 보여 주는 ‘결혼 시장의 민낯’에는 상당한 현실성이 있습니다. 실제 결혼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고, 집을 마련하고, 돈을 벌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양가 부모와 관계를 맺으며 수십 년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직업이나 경제력, 건강, 성격, 가정환경, 부모의 노후 문제 등을 살펴보는 것 자체를 탐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 ‘이 사람과 실제 생활을 함께 감당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책임 있는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상생활의 외적인 조건 자체는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외적인 것을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보다 위에 올라가 사람 전체의 가치를 결정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가 ‘육각형’입니다. 남자 상티어의 사례로 제시된 사람은 35세, 178cm, 연세대 공대 졸업, 유명 IT 대기업 과장, 연봉 1억 5천만 원, 순자산 10억 원, 서울 아파트 보유, 부모 역시 안정적인 직업에서 은퇴했고 노후 준비도 끝난 사람입니다. 진행자는 이런 사람을 어느 한 곳도 특별히 걸리는 것이 없는 ‘큰 육각형’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외모와 키는 좋지만 연봉과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은 ‘작은 육각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이 육각형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항목이 거의 없습니다. 정직한가, 따뜻한가, 책임감이 있는가, 배우자를 존중하는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가,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가, 배우자가 병들거나 실패했을 때도 곁을 지킬 사람인가 하는 것은 육각형의 축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져와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가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결국 사람은 자신이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내적 모습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대단히 성공하고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르게 드러날 수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는 별 볼 일 없어 보였던 사람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학벌도, 직함도, 통장 잔고도, 부동산도, 부모의 사회적 지위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형성된 ‘사랑의 성품’은 그대로 가지고 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정말 중요한 ‘결혼 티어’는 무엇일까요?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상티어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상대를 자기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상대의 행복을 자기 행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인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재산이 10억인지 1억인지보다 돈을 어떻게 벌었고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며, 좋은 직장에 다니는가보다 맡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가보다 그 아름다움을 자기 우월감과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추상적인 종교 개념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상에 등장하는 조건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30세 남자가 모은 돈이 500만 원이고 부모의 노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면 결혼을 생각하는 상대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39세 여성이 월세로 살고 있고 부모의 노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 역시 실제 결혼생활에서 고려할 현실적인 요소입니다. 여기서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조건을 ‘현실적인 고려 사항’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인간의 등급’으로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와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하티어 인간이다’ 사이에는 매우 큰 간격이 있습니다.
영상에서 남녀를 평가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도 흥미롭습니다. 남성은 직업, 연봉, 자산, 학력, 키, 외모, 부모의 경제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여성에게는 특히 나이와 외모가 강력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33세에 대기업에 다니고 연봉 8천만 원, 순자산 3억 원에 본인 명의 오피스텔까지 있는 여성도 ‘중티어’로 분류되고, 39세 여성에게는 학력이나 연봉이 조금 더 좋아지는 정도로는 ‘하티어’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요소로 ‘예쁨’을 반복해서 제시합니다. 이것은 이 영상이 만들어 낸 규칙이라기보다, 진행자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결혼 시장에서 사람들이 보여 주는 선택을 압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는 영상 자체보다 그 영상을 가능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욕망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이러니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은 조건으로 평가받기를 싫어하면서 상대는 조건으로 평가합니다. 남자는 자신의 연봉과 자산만 보는 여성을 싫어하면서 젊고 예쁜 여성을 원할 수 있고, 여자는 자신의 나이와 외모만 보는 남성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상대 남성에게 높은 연봉과 안정된 직업과 자산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나라는 사람 전체를 봐 달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상대를 몇 개의 조건으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proprium이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좋은 것을 받아야 한다’는 욕구가 먼저 서고,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 관한 가르침은 여기에서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참된 결혼은 ‘내게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확보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두 사람이 서로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어 가는 데서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단순한 육체적 결합이나 생활 공동체로만 보지 않고, 더 깊은 차원에서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결합과 연결해서 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서는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점점 분리되지 않게 됩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에서 더 나아가 ‘당신이 행복한 것이 나의 행복이다’라는 상태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 연애 감정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사랑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상티어’라는 개념도 뒤집힙니다. 세상에서 상티어인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 의미에서도 상티어인 것은 아닙니다. 연봉 1억 5천만 원에 자산 10억 원, 서울 아파트와 좋은 학벌을 갖추었더라도 배우자를 자기 성공의 장식품처럼 여기고, 상대가 늙거나 병들거나 사회적 지위를 잃었을 때 사랑이 식어 버린다면 그 결혼의 내적 토대는 매우 약합니다. 반대로 연봉 3천만 원대의 평범한 직장인이고 아직 큰 재산이 없더라도 정직하게 일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배우자를 존중하고, 어려울 때 함께 견디며, 자신의 욕망보다 가정의 선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내면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난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선한 것도 아니고 부유하다고 해서 악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초점은 언제나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랑의 질서에 있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상에서는 ‘예쁘면 된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현실의 결혼 시장에서는 실제로 외모가 강력한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끌림이 있고 결혼에서 육체적 매력 역시 일정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은 훨씬 흥미롭습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선한 애정과 지혜가 얼굴과 몸짓에까지 나타납니다. 지상에서는 화장과 성형과 옷과 젊음으로 외적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마음의 상태를 영원히 감출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떤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가지고 살아왔는가’가 그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에서 말하는 ‘39세’라는 숫자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 시장에서는 나이가 올라갈수록 특히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출산 가능성이나 사람들이 선호하는 연령대와 연결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까지 나이에 따라 내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26세 여성은 존재론적으로 39세 여성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연봉 1억 5천만 원인 남성이 연봉 3천 2백만 원인 남성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등급의 인간인 것도 아닙니다. 시장에서의 ‘희소가치’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구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 시장의 언어로 사람의 영혼까지 가격표를 붙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장은 오히려 ‘결혼 시장의 민낯을 봐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맞는 말입니다. 현실을 모른 채 이상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민낯’을 보았다면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사람을 분류하고 있는가, 왜 남자는 여자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여자는 남자의 경제력과 사회적 안정성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리고 그 욕망 가운데 어디까지가 창조 질서 안의 자연스러운 필요이고 어디부터가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변질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 분별이 시작됩니다.
특히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이 이 영상을 본다면 ‘나는 어느 티어인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어떤 배우자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배우자가 되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입니다. 내가 상티어 상대를 원하는 것보다 내가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나는 돈을 얼마나 모았는가뿐 아니라 돈을 책임 있게 다룰 줄 아는가, 좋은 직장을 얻었는가뿐 아니라 맡은 일에 충실한가, 외모를 얼마나 관리했는가뿐 아니라 상대의 늙어가는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는가뿐 아니라 배우자의 부모를 존중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들은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 용지에는 들어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제 결혼생활에서는 오히려 훨씬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은 아주 현실적인 힘을 갖습니다. 결혼은 결혼식 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계속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5세에 ‘큰 육각형’이었던 사람도 50세에 직장을 잃을 수 있고, 건강을 잃을 수도 있으며,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26세의 아름다운 얼굴도 60세와 70세가 되면 변합니다. 부모의 재산도 사라질 수 있고 서울 아파트의 가격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결혼을 붙들고 있는 것이 이런 조건뿐이라면 조건이 무너질 때 관계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오랜 세월 형성된 선한 애정과 신뢰, 존중과 책임, 그리고 서로의 영적 선을 바라는 사랑이 있다면 외적인 조건이 변해도 결혼의 더 깊은 부분은 오히려 강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영상이 보여 주는 ‘상·중·하’는 틀렸다기보다 매우 제한된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가 실제 매칭을 위해 사용하는 지도에는 분명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 전체를 설명하는 지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그 지도에는 사람의 영혼이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봉 1억 5천’, ‘순자산 10억’, ‘강남 아파트’, ‘해외 명문대’, ‘167cm의 예쁜 외모’ 같은 항목은 적을 수 있지만, ‘이 사람은 배우자가 아플 때 밤새 곁을 지킬 사람인가’, ‘자신이 잘못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돈 앞에서 양심을 버리지 않는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상대의 행복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을 수 있는가’ 같은 것은 숫자로 적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긴 결혼생활에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이 결정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보고 난 뒤 남는 결론은 ‘결혼정보회사의 티어 분류는 나쁘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조건의 세계에서는 그런 분류가 생겨날 수밖에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되, 그것을 인간의 참된 가치와 혼동하지 말자’에 가깝습니다. 외적인 조건은 결혼을 시작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결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두 사람 안에 형성된 내적인 것입니다. 외모는 만남의 문을 열 수 있고, 경제력은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 좋은 가정환경은 결혼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두 영혼이 하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상의 표현을 빌려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상티어일까?’ 아마 이 질문에 연봉과 학벌과 자산을 적는 칸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가 아니라, 가진 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 얼굴 뒤에 어떤 애정이 자리 잡았는지, 얼마나 좋은 직장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얼마나 정직하고 유용한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좋은 배우자를 얻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배우자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어 주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결혼 시장에서 말하는 ‘큰 육각형’보다 더 귀한 육각형이 있다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선함, 진실함, 책임, 절제, 배려, 그리고 상대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랑.’ 이것들은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을 영원한 결합으로 자라게 하는 훨씬 본질적인 조건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누구와 결혼했는가’가 성공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이 남습니다. ‘나는 결혼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영상의 ‘상·중·하 티어’를 넘어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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