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풀, 채소, 나무’의 속뜻 (창1:9-13)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1:9-13) 9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0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2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3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Gen. 1:9-13)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그 세 번째 시간, 곧 셋째 날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입니다.
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천지창조, 곧 사람의 거듭남을, 첫째 날엔 ‘리메인스’(remains), 곧 사람의 유아기 때부터 사람 안에 쟁여놓으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로, 둘째 날엔 ‘궁창’(穹蒼, the expanse), 곧 거듭남이 시작되기 직전 상태인,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뒤섞여 있어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구분이 안 되는 상태를 궁창이라는 것을 만들어 구분하시는 등, 주님은 사람의 거듭남을 오직 선과 진리의 문제로만 보신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그 이유는, 거듭남이란 자신의 속 사람의 상태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누구나 그 속 사람이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여야만 구원,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이유는, 천국은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나라이며, 주님의 신성은 ‘선’(Divine Good)과 ‘진리’(Divine Truth)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 선과 진리의 문제가 중요하며, 그 관련 지식이 굉장히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거듭남의 문제를 이렇게 선과 진리의 관점으로만 보시는 것이며, 그래서 주님은 오늘 셋째 날, 곧 거듭남 세 번째 상태 역시도 이번에는 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의 문제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는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에 도달하는데, 주님으로 말미암아 먼저 속 사람에게 흘러드는 이 ‘지식’(knowledges [scientifica])은 주님의 질서를 따라 가지런히 그 안에 정돈되며, 그다음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에게 흘러들 때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의 형태가 됩니다. 자연적이든 영적, 천적이든 말입니다. 주님은 필요하실 때, 이 지식을 꺼내 쓰십니다. 사람의 거듭나는 과정 중에서 말입니다. 이 선과 진리들, 즉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한곳으로 모인 물’, 곧 ‘바다’라 하며, 이때 겉 사람을 ‘뭍’(the dry [land]), 곧 ‘땅’(earth)이라 합니다.
참고로, 세상에서 학습으로 쌓는 이 기억-지식은 홍수 후 시작된 것입니다. 홍수 전 태고교회는 배우지 않아도 아는,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형태로 주님의 신성을 알았습니다만, 홍수라는 형태의 종말을 겪으면서 선조들의 퍼셉션의 세대는 끝나고, 이후 일어난 노아 이후 세대는 주님의 신성을 ‘학습’을 통해 배워야 하는 새로운 세대가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창세기는 모세 때 기록된, 홍수 이후 장구한 세월이 흐른 후 기록된 것이어서 처음부터 이 ‘기억-지식’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퍼셉션, 기억-지식 얘기는 다르게는, 주님의 신성이 처음엔 사람의 의지(will), 곧 애정(affection)으로 직접 들어갔다면, 나중엔 일단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는 걸로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참고로, 그래서 원래는 천적(celestial) 나라 하나뿐이었던 천국이 홍수 후 일어난 새로운 세대 때문에 영적(spiritual) 나라가 새로 추가적으로 생겼다고 합니다.
10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에서 ‘물’로는 이런 지식을, ‘바다’로는 이런 지식을 한 데 모아놓은 걸 의미할 때가 많은데요, 그중 하나 예를 들면, 이사야 11장 9절 같은 말씀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11-13절,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땅’(the earth), 즉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천적(天的, celestial)인 씨앗을 받아 뭔가 선하고 참된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면, 이제 주님은 먼저 무슨 부드러운 것, 곧 ‘풀’(the tender herb)을, 그리고 뭔가 좀 더 유용한, 그 안에 씨를 맺을 수 있는 것, 곧 ‘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를, 그리고 끝으로 열매까지 맺을 수 있는 어떤 선한 것, 곧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를 각기 종류대로 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처음 상태인데요, 다음은 이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처음 상태, 퀄러티(quality)는 다음과 같은데요,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로 압니다.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건데도 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렇게 선과 진리가 자기로 말미암는 줄로 아는 한, 그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the life of true faith) 가운데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그는 나중에는 이런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이런 게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아직은 믿을 수 없는, 그는 이제 겨우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단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를 여기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걸로,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상태에서는 움직이는(animate) 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다섯째 날 상태에 대한 도입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넷째 날에 창조되는)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배치된 후, 그 빛을 겉 사람이 받으면서 일단 사람은 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말하는 줄로 여겼는데요, 사람이 이렇게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한, 사람은 소위 살아왔다고 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인데요, 그런 사람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든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선 그 자체인 그런 선을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선한 것을 의도하는 것조차 절대 불가능하며,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선한 것을 절대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를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또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처럼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로 하여금 생명을 향해 거듭나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시는데요, 그 이유는 그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그때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도록, 그리고 나중에는 지각하도록 그를 인도할 무슨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에게 있는 진리와 선은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곧 못 움직이는 것에 비유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생해져서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이어서 ‘땅 위를 나는 새들’(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끝으로 ‘짐승들’(beasts), 곧 이 모든 움직이는 것들, 그래서 ‘생물’(living souls)이라 하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거듭남 연속 단계 중 세 번째 상태인데요, 이 상태는 뉘우침(repentance, 회개)의 상태, 곧 그늘에서 빛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하는 상태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은 여기까지이며, 오늘은 특별히 맨 끝에 언급한 ‘회개’(repentance)에 대해서만 살피고, 이어서 성찬을 진행하겠습니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must confess), 회개해야(must do repentance) 합니다. (AC.8387)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악에 대한 철저한 숙지(to become acquainted with), 그걸 자기 안에서 보고(to see) 시인(to acknowledge),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긴(to regard) 후,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정죄하는(to condemn)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이런 게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AC.8388)
회개한다는 건, 사람이 그렇게 죄를 고백 및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겸손하게 간구한 후(has made supplication for), 그런 죄짓는 걸 그치고(to desist from),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to lead a new life)입니다. (AC.8389)
그가 자신은 남들과 같이 죄인임을 그저 시인만 할 뿐인, 그리고 자신을 모든 악에 대해 유죄로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을 살피지는(examine) 않는, 즉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고백이라는 걸 하긴 하지만, 그러나 회개의 고백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전에 하던 대로 후에도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AC.8390)
신앙생활을 하는(leads a life of faith) 사람은 날마다 회개하는데요,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반성(reflects upon), 시인 및 대적(guards against),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기(supplicates for)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계속해서 넘어지지만, 주님에 의해서는 계속해서 일으키심을 얻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욕망을 품고 악한 걸 생각할 때는 넘어지지만, 그러나 악을 대적할 때는, 그리고 그 결과 악을 행하지 않을 때는 주님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게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악 안에 있어 끊임없이 넘어지는 자들 또한 주님은 끊임없이 일으키시지만, 그러나 이 경우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지옥 중 가장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막으심일 뿐인데요, 그들 스스로 그렇게 기울어져 가는 자신들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만큼만이며, 그래서 사실은 그들을 좀 더 부드러운 지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AC.8391)
자유롭게 행한 회개는 도움이 되지만, 무슨 강압적 상태 속에서 행한 회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압적 상태라는 건, 무슨 큰 병에 걸린 상태라든지, 불행이 닥쳐 몹시 낙담한 상태, 혹은 죽음이 임박한 상태 등, 한 마디로, 건전한 이성의 사용을 방해하는 모든 두려움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강압적 상태에 놓이게 된 악인은 회개를 약속, 선행을 하여 자유로운 상태가 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이전의 그 악한 생활로 돌아갑니다. 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에게는 그가 정복하는 유혹의 상태가 될 뿐입니다. (AC.8392)
입으로 하는 회개, 그리고 삶이 받쳐주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는 그런 걸로가 아닌, 삶의 회개, 생활의 회개로 용서받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죄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자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죄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붙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가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살지 않는 이상은 죄는 그에게서 제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들 계명에 따라 사는 만큼 그의 죄는 제거되며, 그의 죄가 제거되는 만큼 그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악에서 물러나 선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몸 안에 살면서 악에 저항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악에서 물러날 수 있으며, 그가 이 세상 삶을 통해 애정으로 선을 행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선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죄 사함이라는 게 뭔지,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를 보여 줍니다. 그밖에 무슨 다른 방식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AC.8393)
사람은 스스로를 살피고, 자기 죄를 시인하며 회개한 후에는 생의 마지막까지 선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must remain constant in) 합니다. 만일 나중에 이전 악한 삶으로 돌아가 거기 빠지게 되면, 그게 바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건데요, 그때 그는 악을 선으로 결합, 그 결과 그의 나중 상태는 이전 상태보다 더 나빠집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12:43-45) (AC.8394)
오늘 셋째 날, 곧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 한 이유를, 회개에 대한 위와 같은 설명을 통해 생각해 보면, 이 세 번째 상태, 곧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는 상태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로 아는’ 상태, 주님이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로 하여금 생명을 향해 거듭나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시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손주들을 보면 다들 제 잘난 맛에 살지만, 그러나 우리는 ‘아, 이쁘다, 이쁘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상태를 지나면서 사람은 저런 ‘회개’를 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즉 철이 드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의 상태들을 잘 살피면 현재 나는 어느 단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디 다들 바른 판단들을 하셔서 인생을 너무 돌아가지 않으시기를, 가급적 지름길로들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08-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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