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시72:1, 3, 5, 7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분리를 설명하기에 앞서,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그는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시72를 통하여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이 시편에서 그는 주님을‘왕’으로,천적 인간을‘왕의아들’로 보고, ‘해’, ‘달’, ‘산들’, ‘작은산들’, ‘대대로’라는 표현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고 그 중심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그들에게 신앙은 사랑에서 떨어져 독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달’은 신앙을 의미합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와 달이 각각 별개의 두 종교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된 질서 안에 있었다는 점입니다.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은 그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자연계에서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사실을 하나의 보조적인 비유로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AC.337의 직접적인 논점은 물리적인 천문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해=사랑’, ‘달=신앙’이라는 상응을 통하여 사랑과 신앙의 천적 질서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산들’과‘작은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이것 역시 그 교회의 중심이 높은 사랑,곧 주님을 향한 사랑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시72의 장면 전체는 태고교회를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많이 가진 교회로 묘사하지 않고,사랑을 중심으로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교회로 보여 줍니다.
특히‘그의날에의인이흥왕하여평강의풍성함이달이다할때까지이르리로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는‘달이다할때까지’라고 한 이유를‘신앙이사랑이될것이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앙과 진리가 없어져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신앙이 더 이상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생명이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진리를 단지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평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단어의 상응을 따로 해설하지는 않으므로 세부 의미를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다만 시편 전체의 흐름에서 사랑과 신앙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상태와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대대로’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것을‘홍수이후의교회들’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따라서 시72의 표상은 태고교회만 보여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태고교회 이후에도 교회가 계속 이어질 것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 교회들의 질서는 태고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AC.337 [3]에서 스베덴보리는‘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르다’고 하며,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는 방식이 나타납니다.길은 다르지만 주님의 목적은 여전히 선과 진리,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신앙이 사랑에서 영원히 분리되어 독립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제 왜 이 시편이 가인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지가 분명해집니다.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의 천적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그런데 가인으로 의미된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따로 고백했습니다.따라서 가인은 단순히 새로운 교리 하나를 만들어 낸 이름이 아니라,태고교회를 교회답게 하던 근본 질서를 깨뜨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72는 바로 그‘깨뜨리기전의상태’를 보여 주는 기준점입니다.해는 사랑을,달은 신앙을 나타내고,그 둘은 태고교회 안에서 분리된 경쟁 관계가 아니었습니다.따라서 가인의 분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해와 달이 하나의 질서 안에 있었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달이다할때까지’라는 말도 이 점을 가장 깊게 보여 줍니다.신앙의 완성은 사랑과 떨어져 더욱 독립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사랑 안에 완전히 살아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신앙이 사랑이 된다는 것은 진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AC.337의 시72인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습니다.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무엇을 깨뜨렸는지를 설명하기 전에,해와 달과 산들을 통하여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떠한 천적 질서 안에 있었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그 기준이 있어야 가인의 분리가 왜 당시에는 그렇게 엄청난 악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부부관계에 비유하면AC.337의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며,상대방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여깁니다.그렇다고 매일‘부부간준수사항20가지’를 펼쳐 놓고 하나씩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이미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규칙이나 원칙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오히려 그 원칙들이 사랑 안에 살아 있습니다.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사랑하기 때문에 신실하며,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해가 되는 일을 피합니다.규칙의 내용이 사랑 밖에서 억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어느 정도 비슷했습니다.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사랑과 별개로 신앙을 따로 떼어 내어‘우리가반드시믿어야할것은이것이다’라고 독립된 체계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신앙을 따로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은 바로 이 하나 된 질서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부부간준수사항20가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이제 서로의 마음과 유익보다 조항을 먼저 살피고, ‘나는20개가운데19개를지켰으니좋은남편이다’, ‘당신은14번을어겼으니나쁜아내다’라고 서로를 평가합니다.
더 나아가‘서로사랑하는마음이없어도이규칙만정확히지키면좋은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본래 관계가 완전히 뒤집힙니다.사랑에서 나온 원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고,마침내 사랑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가인의 시작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었습니다.그런데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면서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창4의 흐름은 이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분리된 신앙의 예배가 생기며,체어리티가 소멸되고,교리가 왜곡되며,마지막에는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됩니다.처음에는‘규칙을조금더중요하게여긴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관계의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서로를 향한 사랑이 이미 많이 식어 버린 부부에게는 오히려‘서로모욕하지말자’, ‘상대방의말을끝까지듣자’, ‘어려울때서로돕자’같은 원칙을 다시 배우고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습니다.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가운데 관계가 다시 회복될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물론 인간의 사랑 자체를 단순한 규칙 준수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이 비유의 요점은 상태가 달라지면 원칙과 사랑의 관계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AC.337의‘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그러나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는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독립된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부부간준수사항’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듯,교리와 신앙고백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사랑이 살아 있을 때 원칙은 그 사랑을 표현하고 지키는 형식이 될 수 있으며,사랑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올바른 원칙이 다시 관계의 질서를 배우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준수 사항이 사랑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마찬가지로 신앙과 교리가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이것만정확히믿으면된다’는 것으로 바뀌면 진리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부의 비유가 보여 주는 핵심은‘규칙이냐사랑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올바른 질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이끄십니다.어느 경우에도 최종 목적은 규칙이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바로 이 결합을 깨뜨린 것입니다.그래서 문제는 신앙을 가진 데 있지 않고,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낸 데 있습니다.이 비유를 이렇게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에서 그 분리를‘엄청난악’이라고 했는지를 조금 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AC.337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고백하고 올바른 교리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신앙생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이 교리의 왜곡이었고,심지어‘엄청난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앙고백 역시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AC.337자체가 그 답을 줍니다.태고교회와 오늘날 인간의 영적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고,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반면 스베덴보리는‘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르다’고 하며,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에게 사랑과 신앙은 아직 분리된 두 체계가 아니었습니다.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따라서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를 깊이 사랑할 때‘나는내아이를사랑한다’는 것과‘나는내아이가소중하다고믿는다’를 두 개의 별도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사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 있으며,그 앎이 사랑과 함께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아이를사랑하는지는중요하지않다.그아이가소중하다는사실을정확하게믿기만하면된다’고 한다면 질서가 달라집니다.원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앎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킨 것입니다.태고교회에서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영적 차원에서 그러한 전도를 의미했습니다.
가인의 시작도‘사랑을버리자’는 노골적인 선언이 아니었습니다.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우는 데서 시작했습니다.그러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도 온전한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다음에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마침내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창4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가인 계열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였지만,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에게 신앙을 따로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AC.337은 이 점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따라서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은 후대 인간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신앙이앞선다’는 것은‘신앙이더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신앙의 진리는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인간 안에 선을 형성하실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앙고백이 가인적으로 되는 지점은 신앙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때입니다.교리를 정확히 안다는 사실이 삶에서의 선을 대신하고,올바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악을 피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필요를 약화시킨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확한 교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고,주님을 의지하게 하며,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태고교회에서는신앙고백이악이었다’는 말을 오늘날 모든 신앙고백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그때’라고 한 것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던 천적 교회에서는 그것을 처음 분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의 거듭남의 질서가 어떻게 달리 적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후대의 영적 인간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둘 모두를 관통하는 목적은 같습니다.진리와 선이 결합되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AC.337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신앙을고백하고있는가?’가 아닙니다.그것보다 더 깊은 질문은‘내가고백하는신앙은어디로나를이끌고있는가?’입니다.그 신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자기 자신만을 높인다면 태고교회의 가인에게서 나타난 영적 위험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이장은태고교회의퇴보,곧그교리의왜곡과,그결과생겨난이단들과분파들을가인과그의후손들의이름아래다루고있으므로,여기서한가지주의해야할것이있습니다.참된교회가어떠했는지를올바르게이해하지않고서는그교리가어떻게왜곡되었는지,또한그교회의이단들과분파들이어떤성격의것이었는지를이해할수없다는것입니다.태고교회에관해서는위에서충분히설명했습니다.곧태고교회는천적인간이었으며,주님을향한사랑과이웃을향한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떠한신앙도인정하지않았다는것,그들은이사랑을통하여주님으로부터신앙,곧신앙에속한모든것에대한퍼셉션을가지고있었다는것,그리고이러한이유로신앙이사랑에서분리될까하여신앙을언급하는것조차원하지않았다는것을위에서설명했습니다.(AC.200,203)As this chapter treats of the degener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falsification of its doctrine, and consequently of its heresies and sects, under the names of Cain and his descendants, it is to be observed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how doctrine was falsified, or what was the nature of the heresies and sects of that church, unless the nature of the true church be rightly understood.Enough has been said above concerning the most ancient church, showing that it was a celestial man, and that it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was of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Through this love they had faith from the Lord, or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that belonged to faith, and for this reason they were unwilling to mention faith, lest it should be separated from love, as was shown above. (n. 200, 203)
[2] 천적인간은이와같으며,시편에서도표상을통하여이와같이묘사됩니다.거기서는주님을‘왕’으로,천적인간을‘왕의아들’로말합니다. Such is the celestial man, and such he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in David, where the Lord is spoken of as the king, and the celestial man as the king’s son:
[3] 태고교회와그교리는이와같았습니다.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지금은신앙이체어리티에앞서지만,그럼에도주님께서는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를주시며,그때체어리티가가장중요한것이됩니다.이로부터태고시대에사람들이신앙을따로고백하여그것을사랑에서분리했을때교리가왜곡되었다는사실을알수있습니다.이와같이교리를왜곡한사람들,곧신앙을사랑에서분리하거나신앙만을따로고백한사람들을당시에‘가인’(Cain)이라불렀으며,이러한일은그때엄청난악으로여겨졌습니다. Su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and such was its doctrine.But the case is far different at this day, for now faith takes precedence over charity, but still through faith charity is given by the Lord, and then charity becomes the principal.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doctrine was falsified when they made confession of faith, and thus separated it from love.Those who falsified doctrine in this way, or separated faith from love, or made confession of faith alone, were then called “Cain”; and such a thing was then regarded as an enormity.
해설
AC.337은 창4의 가인과 그 후손들을 더 자세히 해설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무엇이왜곡되었는지를알려면먼저왜곡되기전의참된모습이무엇이었는지를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로 의미되는 이단들과 분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떤 관계 안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의 중심은 신앙을 별도로 고백하고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독립된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살아 있는 진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AC.337의 ‘그들은신앙을언급하는것조차원하지않았다’는 표현도 문자적인 금기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낱말 자체를 싫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하나로 있던 것을 따로 떼어 ‘신앙’이라고 세우는 순간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독립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기준에서 볼 때 가인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태에서는 ‘신앙을따로말하고고백하는것이왜그렇게심각한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로 있었던 천적 인간에게서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구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질서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기준이 ‘사랑과신앙의하나됨’이라면 가인의 죄는 단순히 하나의 교리적 오류를 주장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별개의 것으로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 첫 분리가 뒤의 모든 변질의 출발점이 됩니다.
시72의 인용은 이 천적 질서를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달이 자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점을 기계적인 상응으로 확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37이 직접 밝히는 핵심은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이 그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산들’과 ‘작은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산과 높은 곳이 사랑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서도 태고교회의 천적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 가장 높은 것은 신앙고백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 사랑과 신앙에 속한 퍼셉션이 나왔습니다.
특히 ‘달이다할때까지’라는 표현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신앙이사랑이될것이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진리나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남지 않고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이 됩니다.
사30:26의 ‘달빛은햇빛같겠고’라는 말씀도 같은 설명을 보강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의 모든 세부 상응을 해설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연결점은 달과 해, 곧 신앙과 사랑입니다. 신앙의 빛이 사랑의 빛과 하나 되는 천적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함께 인용합니다.
그런데 AC.337 [3]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 이 문장을 놓치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의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포함한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 체어리티가 형성되면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거나 본질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체어리티가 ‘가장중요한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먼저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있지만, 그 신앙의 목적은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형성하시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35의 셋과 AC.336의 에노스를 조심해서 구별해야 합니다. 셋은 ‘새로운신앙’, 에노스는 ‘그신앙을통하여심어진체어리티’라고 했지만, 셋과 에노스 자체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AC.337 [3]의 ‘오늘날에는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는 후대 영적 인간의 질서를 셋과 에노스에게 그대로 소급해서는 안 됩니다. AC.335-336은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성된 것을 말하고, AC.337 [3]은 그것과 별도로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스베덴보리 시대의 후대 질서를 대비합니다.
이 구별을 해 두면 가인의 의미도 더욱 정확해집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이먼저오는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는 것은 정상적인 거듭남의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났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고 높인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신앙고백을 하거나 교리를 배우는 것 자체를 가인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대 인간에게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끝날 때입니다. 신앙고백의 정확성이 삶에서의 선과 체어리티를 대신하게 되면 가인의 영적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7의 마지막 ‘이러한일은그때엄청난악으로여겨졌다’는 말에서 ‘그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신앙을 별도로 떼어 고백하는 것은 그 질서 자체의 붕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인간이 신앙을 명확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같은 악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어떤 질서를 무조건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와 영적 인간의 질서를 구별해야 하고,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교회의 상태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이 먼저였다는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 사람에게 ‘먼저사랑이생긴다음에야진리를배워야한다’는 시간적 공식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오늘날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말도 ‘그러므로신앙이체어리티보다중요하다’는 교리적 우선권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듯,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과정상의 선행과 본질상의 주도권은 서로 다릅니다.
AC.337은 이처럼 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을 세워 줍니다. 참된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가인의 후손들과 여러 이단적 상태를 읽을 때에도 ‘무엇을믿었는가?’만이 아니라 ‘그신앙이사랑과어떤관계에놓였는가?’를 계속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진리를 아는 상태에 있지 않으며, 먼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체어리티를 이루시고, 마침내 진리가 삶과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7은 ‘신앙보다사랑이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보다 훨씬 정교한 질서를 가르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과 사랑의 최종적인 분리가 주님의 질서는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목적을 이룹니다.
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말씀을배우고,그것을믿고,그믿음에따라사랑하며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질서가 달랐습니다.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직접 연결됩니다.퍼셉션은 밖에서 배운 교리를 하나씩 논증하고 판단하여‘이것이참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천적인 능력입니다.그러므로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사랑 안에 그 사랑에 속한 진리가 있었고,진리는 자신을 낳은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는 말은 단순히‘사랑도하고신앙도가지고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사랑에 있었다는 뜻입니다.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지각했고,그 진리는 다시 선을 표현했습니다.오늘날 우리가‘무엇을믿는가’와‘어떻게사는가’를 서로 다른 질문처럼 나누기 쉬운 것과 달리,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지각과 삶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이 천적 질서를 오늘날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태고교회 사람들에게‘사랑이먼저이고신앙이거기서나왔다’고 해서,오늘날 사람도 먼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분히 가진 다음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오히려 먼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진리를 신앙하며,그것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거듭남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를 가졌지만,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됩니다.그러나 최종적인 질서가 서로 반대인 것은 아닙니다.영적 인간에게도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하고,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처음에는 진리가 길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아는 진리는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체어리티가신앙보다중요하다’는 말을‘교리와진리는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영적 인간에게 진리는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합니다.무엇이 선인지 알지 못하면 올바르게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문제는 진리가 선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스스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가인의 원리가 시작됩니다.AC.325는‘사랑에서신앙을분리한사람들이생겨났다’고 말합니다.처음부터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신앙을 붙들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거짓을 거짓이라고 알면 경계하기 쉽지만,참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체적인 질서에서 떼어 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면 자신이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퍼셉션이 약해진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문제는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교리를 많이 알고 성경의 속뜻을 깊이 이해하며 신앙 고백이 정확하더라도,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은 큰 은혜이지만,그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가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아르카나를 아는 목적은 남보다 높은 영적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AC.325의‘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찾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고,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다시 형제로 함께 있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나는얼마나많이알고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내가아는진리가나를어떤사람으로만들고있는가?’입니다.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그러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삶에서 떨어져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한다면,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안의 가인이 태어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AC.141
인간의proprium에관해서는육체적이고세상적인인간에게서그것이어떤성질을가지는지,영적인간에게서어떤성질을가지는지,그리고천적인간에게서어떤성질을가지는지를설명하면서무수히많은것을말할수있습니다.육체적이고세상적인인간에게는그의proprium이그의전부입니다.그는자신의proprium외에는아무것도알지못하며,앞에서말한것처럼이proprium을잃으면자기가멸망할것이라고생각합니다.영적인간에게도그의proprium은비슷하게보입니다.그는주님이모든생명의근원이시며,지혜와이해를주시고,따라서생각하고행동할능력도주신다는것을알고있지만,이러한앎은마음으로믿는것이라기보다입술로고백하는것에가깝습니다.그러나천적인간은주님이모든생명의근원이시며생각하고행동할능력을주신다는것을분별합니다.실제로그러하다는것을퍼셉션하기때문입니다.그는결코자신의proprium을원하지않습니다.그럼에도주님께서는그에게proprium을주시는데,그것은선하고참된것에관한모든퍼셉션및모든행복과결합되어있습니다.천사들도이러한proprium안에있으며,동시에가장높은평화와평온가운데있습니다.그들의proprium안에는주님의것들이있기때문입니다.주님께서는그들의proprium을다스리시며,곧그들의proprium을통하여그들을다스리십니다.이proprium이야말로가장참된천적인것자체이며,반면육체적인간의proprium은지옥적인것입니다.그러나이proprium에관해서는뒤에서더말하겠습니다.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with the spiritual man,and with the celestial man.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his own is his all,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and imagines,as before said,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He never desires his own,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and with all happiness.The angels are in such an own,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who governs their own,or them by means of their own.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해설
AC.141은 지금까지 이어진 proprium의 설명 가운데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앞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인다고 했지만, 이제 스베덴보리는 proprium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성질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에게서 proprium이 각각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별하며, 마지막에는 천사들의 상태까지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proprium’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먼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proprium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AC.123에서 이미 설명된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처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 자기의 삶을 자기의 것으로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proprium을 자기 존재와 생명의 전부로 여기고 그 너머에 있는 생명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까지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의 한계도 매우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마음으로믿는것’보다 ‘입술로고백하는것’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이 위선적으로 말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아직 천적 인간의 퍼셉션처럼 그의 생명 전체에서 직접 지각되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123에서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정하고 영적 인간은 말씀에서 배워 인정한다고 구별했던 내용이 여기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단지 배워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AC.139와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상태로 ‘혼자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지만, 참된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는데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proprium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퍼셉션 및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proprium을원하지않는것’과 ‘proprium을전혀갖지않는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온 독립적인 proprium을 추구하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proprium을 주십니다. AC.132부터 반복되어 온 ‘허락된proprium’이라는 표현이 이제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갖기 시작합니다.
천사들에 대한 설명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안에 있으면서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을 누립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proprium안에 ‘주님의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표현입니다. 천사에게 proprium이 없다고 하지 않고, 천사의 proprium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없애고 천사를 대신하여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다스리시며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인도와 인간 또는 천사의 고유한 삶은 서로를 제거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것이 proprium안에 있으면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삶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묘사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proprium을 ‘가장참된천적인것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합니다. 이 대조를 보면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그것을 언제나 악이나 자기 사랑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누구의 지배 아래 있으며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육체적 인간에게서는 proprium이 자기 존재의 전부가 되어 지옥적인 성질을 띠지만, 천적 인간과 천사의 proprium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같은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그 성질은 정반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AC.141은 그래서 지금까지 열어 두었던 질문에 상당한 답을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인간과 천사에게 자기 자신의 삶처럼 경험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 마지막에 이 proprium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겠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자유와 생명의 유입에 관한 교리 전체를 미리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proprium이있느냐없느냐’보다 ‘그proprium안에무엇이있으며누가그것을다스리는가’라는 구별입니다. (AC.141)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AC.139
고대에는천적인간으로서주님의인도아래있던사람들을‘혼자거하는’(dwellalone)사람들이라했습니다.그러한사람들은더이상악이나악한영들에게시달리지않았기때문입니다.이것은유대교회에서도그들이이방민족들을몰아낸뒤혼자거하는것으로표상되었습니다.이런까닭에말씀에서는때때로주님의교회가‘혼자’(alone)있다고합니다.예레미야에서는,In ancient times those were said to “dwellalone” who were 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because such were no longer infested by evils, or evil spirits.This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also by their dwelling alone when they had driven out the nations.On this account it is sometimes said of the Lord’s church, in the Word, that she is “alone,” as in Jeremiah:
라고합니다.여기서‘민족들’(nations)은악들을의미합니다.태고교회의이후손들은혼자거하기를원하지않았습니다.곧천적인간이되거나천적인간으로서주님의인도를받기를원하지않고,유대교회처럼여러민족가운데있기를원했습니다.그리고그들이이것을원했기때문에‘사람이혼자사는것이좋지아니하니’(itisnotgoodthatthemanshouldbealone)라고한것입니다.원하는사람은이미악가운데있기때문이며,그가원하는것이그에게허락됩니다.where “nations” signify evils.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disposed to dwell alone, that is, to be a celestial man, or to be led by the Lord as a celestial man, but, like the Jewish church, desired to be among the nations.And because they desired this, it is said, “itisnotgoodthatthemanshouldbealone,” for he who desires is already in evil, and it is granted him.
해설
AC.139는 AC.138에서 설명한 ‘혼자’(alone)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분명해지는 것은 ‘혼자’가 본래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들을 ‘혼자거하는’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혼자 거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고립되어 산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된 천적 인간의 상태와도 잘 연결됩니다. AC.84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싸움이 그친다고 했고, AC.87에서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39에서 말하는 ‘혼자거함’은 외적인 고독이 아니라 악의 침입과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께 인도받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는 오히려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던 가장 번성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가 유대교회에서도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을 몰아내고 혼자 거하는 모습은 주님의 교회가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는 ‘홀로사는국민’을 말하고,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는 모습을 말하며, 민수기의 발람의 예언에서는 ‘이백성은홀로살것이라그를여러민족중의하나로여기지않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나 지리적 고립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거함’이 주님의 교회가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인용합니다.
특히 민23:9의 ‘민족들’(nations)이 여기서는 악들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민족중의하나로여기지않는다’는 것은 다른 민족 자체를 악하게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속뜻에서 ‘민족들’이 악들을 나타내므로, ‘홀로산다’는 것은 악들과 뒤섞여 그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현실의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과의 분리를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 상태입니다.
이제 이 설명을 창2:18에 적용하면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문자만 읽으면 ‘사람이혼자사는것이좋지아니하다’는 말씀에서 ‘혼자’가 좋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139에 따르면 본래 ‘혼자거하는것’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를 받는 좋은 상태였습니다. 문제는 그 상태 자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더 이상 그 상태를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보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혼자사는것이좋지아니하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천적 상태 자체를 좋지 않다고 판정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139은 그들이 이미 다른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132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말해 ‘혼자’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혼자거하는’ 천적 상태를 원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의 ‘원하는사람은이미악가운데있기때문이며,그가원하는것이그에게허락됩니다’라는 문장은 이 변화의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넣어 주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인간 쪽에서 주님의 인도만을 원하지 않는 욕구가 생겼고, 그 욕구 자체가 이미 악의 방향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강제로 없애어 천적 상태에 붙들어 두시는 대신 그것이 허락되는 가운데 인간을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앞서 말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AC.139는 창2:18의 ‘혼자’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번호입니다. ‘혼자’는 고독이나 결핍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본래 주님의 인도 아래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그 상태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창2:18의 전환점은 ‘혼자있는인간에게무엇이부족했는가?’가 아니라 ‘왜인간은주님께만인도받는천적상태를더이상원하지않게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찾아야 합니다. (AC.139)
창세기의처음세장은전체적으로태고교회를다루는데,이교회는그처음시기부터멸망한마지막시기에이르기까지‘사람’(man)[homo]이라합니다.이장의앞부분은태고교회가천적인간이었던가장번성한상태를다루며,여기서는이제proprium으로기울어진사람들과그후손들을다룹니다.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which is called“man”[homo]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when it perished;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when it was a celestial man;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and of their posterity.
해설
AC.137은 지금까지 읽어 온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3장을 하나의 큰 역사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이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태고교회를 그 처음 시기부터 마침내 멸망하는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람’은 단지 한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창1-3의 속뜻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의 상태가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우리가 창1과 창2를 읽어 온 흐름도 다시 정리해 줍니다. 창1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묘사되었고, 창2앞부분에서는 그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 상태가 다루어졌습니다. AC.137은 이 장의 앞부분을 태고교회의 ‘가장번성한상태’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번성했다는 것은 외적인 세력이나 물질적 풍요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께 인도받고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며, 모든 지혜와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질서 안에 있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창2안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AC.131에서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고, AC.132-136은 창2:18-25가 바로 그 문제를 다룬다는 전체 개요를 제시했습니다. AC.137은 이 전환을 태고교회 전체 역사 속에 놓아 줍니다. 앞부분이 태고교회의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였다면, 이제부터는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2후반부는 창3의 타락 이야기와 단절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상태가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그후손들’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한 사람의 어느 순간의 심리 변화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따라 변화해 가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AC.127에서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이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37은 창2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결국 창3까지 이어지는 큰 흐름 속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 멸망에 이르게 되는지는 앞으로의 본문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AC.137은 ‘태고교회’라는 말을 읽을 때 한 시점의 고정된 상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같은 태고교회 안에도 ‘가장번성한상태’가 있었고, 이후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1-3전체가 그 처음 시기부터 마지막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사람들은모두천적인간이었다’는 식으로 모든 시기를 동일하게 묶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자체에도 시작과 절정, 변화와 쇠퇴의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3을 읽을 때에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창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을 갑자기 등장한 한 개인의 단회적인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이미 창2후반부에서 시작된 태고교회 후손들의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어떻게 더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37은 아직 그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창1-3전체가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다루며, 바로 이 지점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가장번성한천적상태’에서 ‘proprium으로기울어진사람들과그후손들’로 이동한다는 큰 구조를 붙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7은 짧지만 창1-3전체의 독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창1의 거듭남, 창2앞부분의 천적 인간, 창2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 그리고 앞으로 창3에서 전개될 태고교회의 쇠퇴와 멸망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역사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큰 틀을 기억하면 이제부터 상세히 설명될 창2:18-25도 단순히 최초 남녀의 창조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가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 가기 시작하는 중대한 전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137)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18-25)
AC.131
여기서는proprium(주3)으로기울기시작한태고교회의후손들을다룹니다.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which inclined to their own,3is here treated of.
주3. 라틴어‘proprium’은원문에서사용된말로서,여기와다른곳들에서‘자기자신의것’(own)이라는표현으로번역되었습니다.형용사‘proprius’의사전적의미는‘자기자신의’(one’sown),‘고유한’(proper),‘오직자기자신에게속한’(belongingtoone’sselfalone),‘특별한’(special),‘개별적인’(particular),‘특유한’(peculiar)등입니다.이것의중성형인‘proprium’이명사로사용될때에는‘소유물’(possession),‘재산’(property)을뜻하며,또한‘특유한성질’(apeculiarity),‘특징적인표지’(characteristicmark),‘구별되는표지’(distinguishingsign),‘특성’(characteristic)을뜻하기도합니다. 영어형용사‘own’은웹스터사전에서‘...에속하는’(belongingto),‘전적으로또는특별히...에속하는’(belongingexclusivelyorespeciallyto),‘특유한’(peculiar)이라는뜻으로정의됩니다.그러므로영어의‘own’은‘proprius’에매우정확하게대응하며,라틴어명사‘proprium’에대응하도록‘own’을명사로만들어사용하면원문에매우가까운번역이됩니다.[개정자] 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own,” “proper,” “belongingtoone’sself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peculiarity,” “characteristicmark,” “distinguishing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to,” “belongingexclusivelyorespecially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AC.131은 매우 짧지만 창2의 속뜻에서 새로운 구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주는 표지입니다. 앞에서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리고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네 강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흘러오는 질서를 설명했습니다. 특히 AC.125-130에서는 그 질서를 지키는 것과 뒤집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설명을 바탕으로 ‘자기자신의것으로기울기시작한태고교회의후손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기울기시작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창3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타락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온전히 받아 사는 이전의 천적 상태에서 조금씩 자기 자신의 것으로 향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AC.131은 완성된 악의 상태를 선언하는 문장이 아니라, 내적인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과정을 여는 문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자신의것’이라는 표현도 지금 단계에서는 너무 많은 후대의 설명을 미리 끌어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바로 앞의 흐름만으로도 기본적인 방향은 분명합니다. AC.122에서는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123-124에서는 천적 인간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어 AC.128-130에서는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131의 ‘자기자신의것으로기울기시작했다’는 말은 이 흐름과 분리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특히 AC.130의 바로가 ‘나의이강은내것이라내가나를위하여만들었다’고 말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모든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의 근원이 주님이라고 했는데, 질서가 뒤집히면 사람은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AC.131은 이제 이러한 ‘자기에게로향함’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설명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중심에는 단순히 어떤 잘못된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보다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대조를 제공합니다. 지금까지 천적 인간의 질서는 인간의 능력들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하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안에서 누리고 사용하는 상태였습니다. 반대로 ‘자기자신의것으로기울어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생각과 의지와 활동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읽을 때에도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 자체와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상태를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AC.131은 한 문장으로 다음 단락들의 독법을 미리 정해 줍니다. 이제부터 나오는 창2:18이하의 말씀을 단순히 남자에게 여자가 필요하여 배우자를 창조하신 이야기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자기자신의것’으로 기울기 시작한 상태와 관련하여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그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는 이어지는 번호들이 설명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앞서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AC.131은 앞의 긴 논의를 다음 구간으로 넘기는 작은 경첩과 같습니다. AC.129의 ‘출발점은주님이어야하고자기자신이어서는안된다’는 결론과 AC.130의 뒤집힌 에덴의 모습이 이제 태고교회 후손들의 실제 상태 변화로 이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주님의 것으로 받아들이던 상태에서 ‘자기자신의것’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변화가 앞으로의 핵심 주제가 됩니다. (AC.131)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AC.123
천적인간은퍼셉션하기때문에,모든것이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주님의것임을인정합니다.영적인간도실제로같은것을인정하지만,입으로인정할뿐입니다.그는그것을말씀으로부터배웠기때문입니다.세상적이고육체적인인간은그것을인정하지도받아들이지도않습니다.오히려자기가가진것은무엇이든자기것이라고하며,그것을잃으면자기가완전히멸망할것이라고생각합니다. The celestial man acknowledges,because he perceives,that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the Lord’s.The spiritual man does indeed acknowledge the same,but with the mouth,because he has learned it from the Word.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neither acknowledges nor admits it;but whatever he has he calls his own,and imagines that were he to lose it,he would altogether perish.
해설
AC.123은 바로 앞의 AC.122에서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억지로 자기 것을 포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22의 ‘자기것으로소유하지않는다’는 말은 금욕이나 자기부정의 외적 규칙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내적 인식에서 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퍼셉션하기때문에’입니다. AC.104에서는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3은 그 퍼셉션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모든것이주님의것이다’라는 것은 외부에서 배워 동의한 하나의 교리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지혜와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내적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도 그에게는 외부에서 강요된 계명이 아니라 자신이 지각하는 생명의 질서에 따르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도 ‘모든것이주님의것이다’라는 같은 진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가 그것을 ‘입으로’ 인정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영적 인간의 고백이 거짓되거나 위선적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는 그것을 ‘말씀으로부터배웠기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아는 반면, 영적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는 한쪽은 참말을 하고 다른 쪽은 빈말을 한다는 차이가 아니라, 같은 진리에 이르는 내적 방식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앞서 AC.81이후 계속 설명되어 온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말씀과 신앙과 양심이 중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천적 인간처럼 직접적인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아니므로,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것을 받아들여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3의 ‘입으로’라는 표현을 영적 인간의 신앙을 폄하하는 말로 이해하기보다, 퍼셉션에 의한 천적 인식과 말씀에서 배운 영적 인식을 구별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이 질서를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것’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유는 단순히 재산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앞의 AC.121과 AC.122에서 다룬 것은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을 포함하여 천적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있는 생명과 능력과 선한 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그것들을 독립적인 자기 소유로 여기는 태도 전체가 여기 포함됩니다.
마지막의 ‘그것을잃으면자기가완전히멸망할것이라고생각한다’는 표현은 왜 사람이 자기 것을 그토록 붙드는지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자기 존재 자체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생명을 잃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AC.121에서 본 천적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기억에 속한 앎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은 참된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실제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2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세상적·육체적 인간의 차이를 ‘모든것이누구의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영적 인간은 말씀으로부터 배워 그것을 인정하며,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깁니다. AC.122에서 말한 에덴동산의 삶은 결국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삶입니다. (AC.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