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7)

 

AC.400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스키즘(schism)이나 이단(heresy)에서 또 다른 이단이 나왔다는 말씀인데요, 이는 앞서 언급되어 온 것들로부터, 그리고 첫 번째 절에 서술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로부터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제 뒤에 나오는 내용들은 그게 교회에 속한 것이든 이단에 속한 것이든 임신 및 해산과 유사, 그러니까 교회나 이단의 탄생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렇게 해서 하나의 계보(genealogy)가 형성된 것입니다. 서로 유사하게 연관되기 때문이지요. 하나의 이단이 태동하는 곳에는 한 무리의 이단이 생겨납니다. That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ies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aid, as well as from what is stated in the first verse, that the man and Eve his wife produced Cain; so that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re similar conceptions and births, whether of the church, or of heresies, whereof they formed a genealogy, for these are similarly related to each other. From one heresy that is conceived there are born a host of them.

 

 

해설

 

스베덴보리는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라는 표현을, 이미 앞에서 설명한 원리에 따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는 분열된 상태가 자기 내부에서 또 다른 분열을 낳는 과정’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창세기 41절에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라고 말한 구조와 동일한데, 성경에서 이러한 ‘잉태’와 ‘출산’은 언제나 육체적 사건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나 이단적 상태가 사상과 교리를 산출하는 영적 과정’을 뜻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두 계열, 곧 가인 계열과 셋 계열 둘 다 나란히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계보를 이루는데, 지금 이 본문의 가인 계열의 경우, 가인 이후 동일한 구조가 왜곡된 형태로 작동하여, 하나의 이단적 신앙에서 또 다른 이단적 교리가 연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계보’라는 말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람의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혈통’, 곧 교리와 신앙 형태들이 서로를 낳고 확장해 가는 내적 연관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의 분열된 신앙이 일단 형성되면, 그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 논리를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수많은 파생 형태들을 만들어 내게 되며, 이로부터 다양한 이단과 분파가 끝없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결국 AC.400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는 순간부터 그 분리는 단일한 오류로 머무르지 않고, ‘자가 증식적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며, 이것이 가인의 계보가 계속 이어지는 근본 이유임을 보여줍니다.

 

 

 

AC.399,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AC.399-403)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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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4:17)

 

AC.399

 

다음 말씀들, 곧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스키즘(schism)이나 이단(heresy)에서 ‘에녹’(Enoch)이라는 또 다른 이단이 나왔음을, ‘성을 쌓고’(the city which he built)는 거기서 나오는 모든 교리적이고 이단적인 가르침과, 그리고 그 스키즘이나 이단을 ‘에녹’(Enoch)이라 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라고 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 words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 By “the city which he 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해설

 

스베덴보리는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말을,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의 분파 혹은 이단적 상태가 자기 안에서 또 다른 교리적 형태를 산출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알다’와 ‘낳다’는 육체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 체계가 자기 논리 안에서 새로운 사상과 체계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뜻합니다. 이때 낳은 ‘에녹(Enoch)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가인의 신앙에서 파생된 ‘특정한 교리적 형식’을 상징합니다. 이어서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부른 것은, 이 분파에서 나온 모든 교리적, 신학적 구조가 바로 이 에녹이라는 중심 사상에 의해 조직되고 규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성읍은 외적 건물이 아니라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세운 교리 체계 전체’를 가리키며, 그 교리의 이름과 성격이 그 분파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AC.400,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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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8,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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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설명(AC.387)을 보시기 바랍니다. ‘놋 땅에 거주하더니’(dwell in the land of Nod)가 진리와 선의 바깥을 의미한다는 건, ‘놋’(Nod)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면 분명한데, 이 ‘놋’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a wanderer and a fugitive)가 되는 것이며,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건 진리와 선을 다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다룬 내용입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지적 마인드 근처(near the intellectual mind),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이며, 또 래셔널 마인드 근처(near the rational mind), 전에 체어리티가 다스렸던 곳이라는 것은 ‘에덴 동쪽’(the east of Eden)의 의미, 곧 ‘동쪽’(the east)은 주님을, ‘에덴’(Eden)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내적 세계인 영계에서는 마인드, 사랑, 체어리티 같은 추상 개념들이 마치 우리가 이 지상에서 자연계 어떤 걸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듯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무슨 근처, 뭐 했던 곳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에덴, 동쪽, , 성읍, 추방, 거주, 방황 등 이 모든 것은 창세기를 비롯, ‘말씀에서는 영적 지리(spiritual geography)입니다.

 

의지(the will)와 이해(the understanding)로 구성되는 마인드가, 태고교회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나였습니다. 의지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이해는 의지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에 속한 신앙 사이에 아무런 구분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사랑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신앙은 사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 의지는 더 이상 다스릴 수 없게 되었고, 그런 마인드에서는 반대로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다스렸기 때문에, 그는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하는 것입니다. 방금 보신 것처럼, 인류의 유익을 위해 보전될 수 있도록 신앙을 구별하신 것이지요. ‘가인에게 표를 주신’(had a mark set upon it) 것입니다.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5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해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라는 말은 이미 앞 절에서 설명되었듯이, 신앙이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의 선과 분리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놋 땅에 거주하더니(dwell in the land of Nod)라는 표현은, 진리와 선의 영역 안이 아니라 그 ‘바깥에 머무는 상태’, 곧 방황과 불안정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 이유는 이 ‘(Nod)이라는 말 자체가 ‘방랑자’와 ‘도망자’를 뜻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 표현은 참과 선을 상실한 상태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가인이 ‘에덴의 동쪽’에 거하였다는 말은, 이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멀리 버려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성적 영역’, 곧 이전에 사랑이 다스리던 자리와 가까운 곳에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하나였고, 의지가 모든 것이었으며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때는 사랑이 전부였고,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랑과 신앙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가인으로 상징되는 상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이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다스리지 못하고, 대신 이해가, 다시 말해 ‘사랑 대신 신앙이 마음의 중심에 자리’하게 됩니다. 가인이 에덴에서 멀어지지 않고 ‘에덴의 동쪽’에 머문 것으로 묘사하는 이유가 이것이며, 이를 통해 신앙이 여전히 사랑과 가까운 지성적 영역에 보존되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표가 주어진 이유를 다시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이렇게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인류의 거듭남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구별되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398은, 사랑이 떠난 뒤에도 신앙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인간 지성의 영역 안에서 주님의 섭리에 따라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의 길이 아직 닫히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AC.399,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AC.399-403)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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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7,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AC.397-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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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의 선(the good of the faith of love)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놋 땅에 거주하더니’(he dwelt in the land of Nod)는 진리와 선의 바깥(outside of truth and good)을,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지적 마인드 근처(near the intellectual mind),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을 각각 의미합니다. By the words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he dwelt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toward the east of 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라는 표현을,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곧 체어리티의 선과 분리된 상태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떠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을 버림으로써 주님의 자비와 선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어서 ‘놋 땅에 거주하더니(he dwelt in the land of Nod)라는 말은, 신앙이 더 이상 진리와 선의 영역 안에 있지 않고 그 밖에 머무르게 되었음을 뜻하는데, 놋 땅은 방황과 불안정, 곧 ‘참과 선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에덴 동쪽, 곧 ‘에덴의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에 거했다는 표현은, 신앙이 완전히 멀리 떠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성적 영역’, 곧 과거에 사랑이 다스리던 자리와 가까운 위치에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장차 다시 사랑과 결합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다는 섭리의 표현입니다.

 

 

 

AC.398,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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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6, 창4: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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