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라든지, 혹은 마치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 품으시다(bro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주님이 사람 안에 숨겨 보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해 오신 것들을 가리키는데요, 말씀 전반에 걸쳐 이것을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a remnant)라고 합니다. 이는 참과 선에 관한 지식으로 되어 있습니다.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빛, 즉 낮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을 여기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 하고 있습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19는 창1:2의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거듭남의 시작에서 주님의 자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한다고 설명하며,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품으시다(brood)라는 표현을 암탉이 알을 품어 생명이 깨어나도록 하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즉,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아직 영적 생명을 갖고 있지 않지만, 주님의 자비는 마치 어미 새가 알을 보호하는 것처럼, 사람 안에 숨겨진 잠재적 생명을 깨우기 위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럼 이 자비가 무엇을 “운행”하는가?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라고 말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유아기부터 성장 과정 중에 경험한 선한 감정들, 신앙적 인지들, 선과 진리에 대한 작고 순수한 인상들, 하나님에 대한 어린 마음의 감각 같은 것들로, 주님이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시는 신적 씨앗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평소에는 의식되지 않지만, 외적 삶이 황폐해지고(vastation), 자기 고유의 욕망과 거짓이 잠잠해질 때 비로소 빛을 발하며, 거듭남의 기반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리메인스를 창1:2의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waters)은 진리의 지식들을, 그 위의 “얼굴들(faces)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인상들, 즉 주님이 보존해 두신 신적 흔적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리메인스가 없다면 어떤 사람도 거듭날 수 없으며,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AC.19는 따라서 거듭남의 시작이 인간의 결심이나 도덕적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 안에 미리 심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을 깨우는 자비의 역사’에서 비롯됨을 강조합니다.

 

 

 

AC.18, 창1:2, '깊음 위'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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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의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무슨 깊음(deep)과도 같은,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곳에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 상태이지요. 이사야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거듭남의 선행 상태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이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 위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표현에 사용된 영어 vastation은 사어(死語)에 가까운 말인지 사전에도 잘 안 나옵니다. NCE(New Century Edition)역에서는 이를 overall spiritual devasta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해설

 

AC.18은 거듭남 이전의 인간 상태를 더욱 세밀하게 설명하며, 창1:2의 표현 “깊음(the deep)이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인간 전체를 구성하는 욕망과 거짓의 혼합물’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깊음 위(faces of the deep)라는 표현은 거듭나지 않은 인간 속에 자리 잡은 각종 욕망(cupidities)과 그 욕망에서 비롯된 거짓들(falsities)을 말합니다. 인간은 거듭나기 전에는 선하고 참된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생각과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상태가 바로 “깊음”입니다. 이 상태는 주님의 빛이 없는 완전한 어둠이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할 수 없고, 영적 방향감각 없이 혼란 속에 잠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종 인간을 “깊음”, “바다 깊은 곳”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인데,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이러한 깊음이 “말리신(dried up) 혹은 “황폐해진(wasted)으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519-11절에서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여호와라고 한 것은, 주님이 인간 안의 욕망과 거짓을 물리치시고, 그 속에서 구속된 자들이 지나갈 길을 여신다는 뜻이며, 곧 주님이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먼저 인간 내부의 혼돈을 제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인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외적 생명은 활발해 보일지라도 영적 생명이 전혀 없을 때 천사들에게는 빛과 생기가 전무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예언서에서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교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황폐는 주님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과 선한 것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이전의 거짓과 욕망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 안의 ‘옛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그래야만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도덕적 자멸이 아니라, 주님이 거듭남을 시작하기 위해 허용하시는 내적 정리 작업이며, 진리와 선이 들어올 공간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AC.18은 “깊음”이라는 성경적 상징을 통해, 거듭남의 초기에서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내적 분해와 정화의 과정을 설명하며, 인간의 변화는 언제나 주님의 빛이 깊음 위로 움직이기 전에, 먼저 그 깊음이 드러나고 비워지는 과정을 거침을 가르쳐 줍니다.

 

 

 

AC.19, 창1:2, '수면 위, 리메인스'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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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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