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2)’ (AC.8705, 2023/6/15)
‘하나님에 관하여’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 그 두 번째, 아래는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AC.8705
신인(神人)에 대한 무슨 신관(神觀, the idea of a Divine Man)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 하나님(the Divine Itself)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의 신관은 확실하지가 않으며, 그런 불확실한 신관은 사실 신관이 아닙니다. 또 무한하거나 무한하지는 않은데 희미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우주로부터 신관을 형성하는 사람의 경우도, 그런 신관은 자연 숭배자들의 신관(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과 결합, 결국 자연으로 귀결되는데, 그래서 이 역시 전혀 신관 아닌 게 되는데요,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올바른 신관이 아닌 경우, 하나님과 신앙을 통한, 혹은 사랑을 통한 어떠한 결합도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모든 결합은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며, 그 결합의 효력은 그 대상의 퀄러티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하나님 자체(the Divine Itself)는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If anyone without the idea of a Divine Man thinks of the Divine Itself, he thinks indeterminately, and an indeterminate idea is no idea; or he conceives an idea of the Divine from the visible universe without an end, or with an end in obscurity, which idea conjoins itself with 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 and also falls into nature, and thus becomes no idea.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re would not be any conjunction with the Divine through faith, nor through love. All conjunction requires an object, and the conjunction effected is according to the quality of the object. For this reason 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is called “a Mediator” and “an Intercessor,” but He mediates and intercedes with Himself. That the Divine Itself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John: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No one hath ever seen God; the only begotten Son,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set Him forth (John 1:18).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37) Ye have never heard the voice of the Father, nor seen His shape (John 5: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혹은 육(肉, the flesh)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해 불확실한, 즉 무슨 확실한 관념이 없는 반면, 자신이나 육이 아닌,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the Divine)을 생각하고 있으며, 고대의 현자들(the wise ancients)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한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으로 나타나실 때, 이런 이유로 신인(神人, a Divine Man), 즉 사람 모습을 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AC.8705) Nevertheless, what is remarkable, all who think from themselves or from the flesh about God, think of Him indeterminately, that is without any determinate idea; whereas they who think of God not from themselves, nor from the flesh, but from the spirit, think about Him determinately, that is, they present to themselves 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 So the angels in heaven think of the Divine, and so the wise ancients thought, to whom also, when the Divine Itself appeared, it appeared as a Divine Man; (AC.870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The heavenly arcana contained in the Holy Scripture or Word of the Lord unfolded, beginning with the book of Genesis, 1749-1756)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스라엘의 모든 송사를 모세 혼자 감당하느라 피차 고생하는 걸 보고 지혜로운 권면을 하는 장면인데요,
19절,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Now hear my voice, I will counsel thee, and God shall be with thee; be thou for the people with God, and bring thou the words unto God.)’ 중 ‘너는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에 대한 라틴 표현인 ‘Deus(God)’ 대신 ‘Divinum(The Divine)’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아마도 deus라는 단어에 내포된, 로마 신화의 다신 숭배적 뉘앙스를 피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라틴 버전을 우리말로 옮긴 김은경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2. 오늘 메인 본문의,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자연계의 인간은 영계와 자연계로 된 피조세계 밖에 계신 주님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습니다.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이 둘 사이를 잇는 그 무엇으로 오시는 방법뿐이며, 그것이 바로 생육신(生肉身) 하신 주님이시고, 나중에 성육신(聖肉身), 곧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 되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말하는 ‘중재자’이며, ‘중보자’이며, 한 분 주님 안에서 주님의 겉인 신적 인성과 주님의 속인 신성, 곧 여호와 하나님 간 커뮤니케이션이 곧 ‘중재’요, ‘중보’인 것입니다.
3. ‘하나님 자신 또는 신성 자체(the Divine Itself)는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아래는 주석 ‘Arcana Coelestia’ 8443번 글인데요, 이 글로 위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살짝 엿볼 수 있지 싶어 인용합니다.
신적 진리(Truth Divine)는 하나가 아닌, 여러 단계(degree, 등급)로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두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proceeds immediately from the Lord) 진리인데, 이는 천사들의 이해를 초월(above the angelic understanding)합니다. 셋째 단계에 있는 신적 진리는 가장 내적 천국, 즉 삼층천(the inmost or thir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는 인간은 전혀 깨달을 수 없는(cannot in the least be apprehended by) 진리입니다. 넷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중간, 즉 이층천(in the middle or secon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 역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neither is this intelligible to) 진리입니다. 다섯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가장 바깥, 즉 일층천(in the ultimate or first heaven)에 있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빛을 받은 사람은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는(can be perceived in some small measure by man provided he is enlightened) 진리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그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인간의 언어(human words)로는 표현할 수 없지요. 그러나 만일 인간의 머릿속 아이디어로 떠오르게 되면, ‘아, 그 경우가 이런 거구나!’ 지각, 믿는 역량이 생기게 되는 그런 진리입니다. 여섯 째, 마지막 단계의 신적 진리, 이 진리가 바로 인간에게 맞는, 인간이 수용, 지각할 수 있는(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 진리이며, 그래서 말씀의 겉 글자의 뜻이 이것으로 된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구름’(cloud)이 표상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구름 속 영광’(the glory in the cloud)의 표상 역시 바로 이 내적 진리들(the interior truths)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종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AC.8443)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24:15-16)
4.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네, 이것이 오늘의 결론이겠습니다.
이것으로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를 마치고, 다음은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다’(God is not in Space)를 다루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2023-06-15(D5)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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