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1:18, 19)

 

AC.38

 

(day)은 선을, ‘(night)은 악을 뜻하며, 그래서 선(goods)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works of the day)이라 하고, 악(evils)을 가리켜서는 ‘밤의 일(works of the night)이라 합니다. 또한 ‘(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뜻합니다.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해설

 

이 글은 앞선 논의를 한 문장으로 응축한 핵심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낮과 밤, 빛과 어둠, 해와 달을 시간이나 자연 현상으로 읽지 말고, 인간 내면의 상태와 삶의 질서로 읽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해 왔습니다. AC.38은 그 모든 설명을 매우 간결한 대응 관계, 상응 관계로 정리합니다.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이며, 빛은 진리이고, 어둠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 추상적인 도덕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행위’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선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이라 하고, 악은 ‘밤의 일’이라 합니다. 이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그가 무엇을 행하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낮에 속한 사람은 선을 행하고, 밤에 속한 사람은 악을 행합니다. 상태는 행동 속에서 가시화됩니다.

 

빛과 어둠의 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단순한 지적 명료함이 아니라 진리이며, 어둠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짓입니다.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드러내고 밝히는 성질을 가지지만, 거짓은 자기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숨기고 흐리게 만드는 성질을 가집니다. 그래서 빛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고, 어둠은 늘 자신을 가리려 합니다.

 

이 점을 주님의 말씀은 아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피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둠을 선택합니다.

 

반대로 주님은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말이 결정적입니다. 진리는 생각 속에만 머물 때는 빛이 되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빛이 됩니다. 그래서 빛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숨지 않고 드러나며, 자신의 삶이 빛 가운데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선은 낮에 속하고, 진리는 빛에 속합니다. 그런데 낮과 빛은 언제나 함께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선 없는 진리는 빛 없는 낮이 될 수 없고, 진리 없는 선은 방향 없는 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낮–선–행위와 빛–진리–인식을 하나의 묶음으로 제시합니다.

 

AC.38은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은 낮의 일인가, 밤의 일인가. 그리고 내가 붙들고 있는 생각은 빛에 속한 진리인가, 아니면 어둠에 속한 거짓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판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방향 전환을 위한 질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빛으로 나오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AC.38은 창세기 1장의 언어를 통해,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영적 분별 기준을 제시합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은 멀리 있는 상징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행위 속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7

 

광명체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문자적 의미만 보면 그런 깊은 뜻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이것만 말씀드리는 걸로 충분한데요, 곧,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일반적으로도, 또 개별적으로도 교대(alternations)라는 게 있으며, 이것이 날과 해의 변화(changes)에 비유된다는 점입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에서 정오로, 다시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진행합니다. 해의 변화도 이와 같아서, 봄에서 여름으로, 다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진행합니다. 여기서 열과 빛의 변화가 생기고, 또한 땅의 산물들도 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 역시 이러한 변화에 비유됩니다.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교대(alternations)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 [statuta])라 하는데, 예레미야에 보면 나옵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5, 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22절에서 더 말씀드릴 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8:22)

 

※ 관련 글 번호는 AC.930-937입니다.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에서 광명체들이 맡는 역할을 시간 측정의 기능으로 축소시키는 해석을 분명히 넘어서게 합니다. ‘징조’, ‘계절’, ‘’, ‘’라는 표현은 단순한 천문학적 주기가 아니라, 영적 생명 안에서 반복되는 상태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한 문장 안에 매우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말하면서, 그 전부를 지금은 펼치지 않고 핵심 원리만 제시합니다.

 

그 핵심은 이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에는 반드시 교대(alternations)가 있으며, 이 교대는 날과 해의 변화와 정확히 대응된다는 점입니다. 아침에서 밤으로, 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자연의 변화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빛과 열이 증감하듯이, 신앙과 사랑도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합니다.

 

이 교대는 퇴보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필수 조건입니다. 만일 이런 변화가 없다면, 삶은 하나의 평면으로 굳어버리고, 생명이라 부를 수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조로움은 곧 무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우리는 흔히 항상 밝고 항상 뜨거운 상태를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상태는 실제로는 분별도 성장도 낳지 못합니다.

 

선과 진리가 인식되고 구별되며, 더 나아가 퍼셉션되기 위해서는 대비가 필요합니다. 낮이 있어야 밤을 알고, 겨울이 있어야 봄의 생명을 압니다. 영적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빛의 상태와 그늘의 상태가 교차하면서 비로소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로 부른다고 말합니다. 규례란 인간이 임의로 정한 법칙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와 섭리 속에 세워 두신 변하지 않는 질서입니다. 낮과 밤의 교대, 하늘과 땅의 규례는 단순한 자연법칙이 아니라, 영적 생명에까지 미치는 주님의 질서입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점을 강하게 확증합니다. 해와 달과 별의 규례가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지 않는다는 말은, 영적 상태의 교대 역시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불안해할 수는 있지만, 그 질서 자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낮과 밤의 언약을 깨지 않으시듯, 영적 생명의 교대도 중단시키지 않으십니다.

 

이 글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신앙이 약해지는 시기, 사랑이 식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 혹은 ‘겨울’일 수 있습니다. 그 상태는 규례 안에 있으며, 다시 아침과 봄으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교대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주님의 질서 안에서 통과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를 창세기 822절에서 다시 자세히 다룰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거기서 씨 뿌림과 거둠, 더위와 추위, 낮과 밤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여기서 말한 교대의 질서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선언입니다. AC.37은 그 선언을 준비하는 기초로서, 광명체의 역할을 생명의 리듬이라는 관점에서 확정해 줍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bygrace.kr

 

AC.36, 창1:14-17, 신앙이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순종하는 것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먼저 ‘love to the Lord’와 ‘love toward the neighbor’의 차이는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떠받치는 구조적 차이입니다. 이 두 표현에서 전치사가 다른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으로, 사랑의 방향과 작동 방식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to’는 직접적인 향함, 곧 근원으로의 수직적 방향을 나타내고, ‘toward’는 어떤 방향을 따라 나아가는 움직임, 곧 삶 속에서 전개되는 수평적 흐름을 나타냅니다.

 

love to the Lord’는 사람의 사랑이 직접 주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경외, 신뢰, 의존, 순종, 예배를 포함하는 사랑으로, 인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 안에 심어 주셔야만 가능한 사랑이며, 그래서 이 사랑은 언제나 위로부터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랑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보며, 모든 참된 사랑의 방향을 정하는 원천으로 이해합니다.

 

반면 ‘love toward the neighbor’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삶의 관계 속으로 흘러나오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이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며, 이웃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돕는 실제 삶의 행위 속에서 드러납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단순한 인간적 친절이나 도덕적 선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웃 사랑은 언제나 주님 사랑에서 비롯된 결과이며, 그래서 직접적인 향함이 아니라 ‘toward’, 곧 방향성을 지닌 흐름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사랑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주님 사랑은 근원이고 이웃 사랑은 그 근원에서 흘러나온 결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의 이웃 사랑은 결국 자기 만족이나 인정 욕구, 혹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변질됩니다. 반대로, 이웃 사랑 없이 주님 사랑을 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말이나 생각에 머무를 뿐,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두 사랑을 결코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사랑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웃 사랑은 그 방향이 올바른지를 검증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이웃 사랑은 반드시 보입니다. 이웃 사랑은 주님 사랑의 시험대이며, 그 사랑이 실제로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삶의 차원에서 보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그 고백이 실제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어느 하나도 홀로 설 수 없습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love to the Lord’는 사랑의 근원이고, ‘love toward the neighbor’는 그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AC의 언어로 말하면, 주님 사랑은 하늘을 향한 방향이고, 이웃 사랑은 그 하늘이 땅 위에 세워지는 방식입니다.

 

이 구분을 붙들고 계시면, 신앙과 사랑, 그리고 행위의 관계가 구조적으로 정리되어 더 이상 혼동되지 않을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