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상태와 성격 또한 저는 알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어떤 분명함도 없는, 다소 일반적이고 어두운 퍼셉션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음이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교리적인 것들 쪽으로 그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되는 그런 퍼셉션이었습니다. The state and quality of the perception with those who were called “Enoch” have also been made known to me. It was 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 for in such a case the mind determines its view outside of itself into the doctrinal things.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의 ‘질감’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앞선 교회들에서 퍼셉션은 개별적이고 나름 분명했지만, 에녹의 교회에 이르면 그 퍼셉션은 더 이상 또렷한 분별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흐릿해져 전체적으로만 느껴지는 상태가 됩니다. 시력을 점점 잃어가다가 결국 사물이 그저 어렴풋이 보이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떤 분명함도 없는, 다소 일반적이고 어두운 퍼셉션의 한 형태(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라고 표현한 것은, 선과 진리를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즉각적으로 분별해 내는 힘’이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대강은 알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가 바로 ‘시선의 이동’입니다. 마음이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 그 판단의 근거를 ‘자기 밖’에서 찾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깥’이 바로 교리적인 것들입니다. 즉, 살아 있는 퍼셉션 대신, 이미 정리된 교리와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가끔 법관들이, 판사들이 일반인도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한 판정을 내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기 안에 양심의 빛, 하늘의 빛이 없어 바깥, 곧 대세와 상황에서 답을 찾은 것이지요. 다만 에녹과 오늘날의 차이는 그래도 에녹이라는 사람들은 방향, 곧 하늘을 향한 방향이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선 AC.519–521의 흐름과 정확히 맞닿아 있어요.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교리가 필요해졌고, 그 교리는 이후 세대를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AC.522는 그 이유를 ‘인식의 실제 상태’ 차원에서 설명해 주는 글입니다. 퍼셉션이 분명하지 않으니, 마음은 자연스럽게 교리로 향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상태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것을 타락이나 실패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섭리 안에서 허락된 전환’입니다. 퍼셉션으로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교리라는 외적 기준이 주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많은 신앙인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우리는 종종 ‘마음으로는 알겠는데, 분명하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 구절, 교리 문장, 신앙의 원칙을 찾아 확인하려 합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다만 이 글은 동시에 하나의 경고도 담고 있어요. 마음의 판단이 완전히 바깥으로만 향하게 될 때, 신앙은 점점 ‘규범 중심’으로 굳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교리는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는 생명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교리를 만들어 보존했지만, 그 교리 자체가 퍼셉션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AC.522는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퍼셉션은 남아 있으나 흐릿해졌고, 그 결과 마음은 자기 안의 빛보다 바깥의 교리를 더 의지하게 된 상태라고 말입니다. 이 상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의 중요한 징후이며, 교회가 더 이상 퍼셉션만으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글은 교리의 필요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교리는 퍼셉션이 약해진 시대에 꼭 필요한 기준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살아 있는 인식이 회복되어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로만 남아야 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바로 그 전환의 자리에 서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AC.523, 창5: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C.523-524)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창5:25) AC.523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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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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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라는 말이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보존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에녹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 퍼셉션의 대상이었던 것들을 교리로 정리하였는데, 그 교회의 시대에는 그러한 일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 교리로 배우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퍼셉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식화된 교리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규칙이 거의 예술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굳이 그런 걸로 생각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바르게 생각하는 능력이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학문적 잔재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경우와 같습니다. 퍼셉션으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내적인 길로 알게 하시지만, 교리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외적인 길, 곧 육체적 감각의 길을 통해 지식이 주어집니다. 이 둘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와 같습니다. 또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 자체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그러한데, 이는 상태와 상황에 따라 모든 미세하고 개별적인 것들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장차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에는 인류가 선과 진리를 교리를 통해, 곧 어둠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며 배우게 될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God took him)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를 가리켜 왜 ‘사라졌지만 보존되었다’고 말하는지를 가장 깊이 있게 설명해 줍니다. 핵심은 퍼셉션과 교리의 ‘질적 차이’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교리로 정식화하는 일이 오히려 부적절했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인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과 문장으로 묶어 두는 것은, 생명을 틀에 가두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실제적인 예로 설명합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규칙이 거의 예술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굳이 그런 걸로 생각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비유가 그렇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사고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규칙을 강요하면, 그 능력은 오히려 경직되고 약해집니다. 이는 퍼셉션의 영역에서 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정확히 보여 주는 비유예요.

 

퍼셉션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앎은 ‘내적인 길’을 통해 옵니다. 주님께서 직접 선과 진리를 비추어 주시는 방식이지요. 반면 교리를 통해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앎은 ‘외적인 길’, 곧 감각과 언어와 개념을 통해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둘의 차이를 빛과 어둠의 차이에 비유합니다. 빛은 사물을 곧바로 보게 하지만, 어둠에서는 더듬어 가며 배워야 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주목할 점은,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에 대해 ‘묘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시대에는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용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AC.521 해설 중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위 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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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미리 보셨다’고 말합니다. 퍼셉션의 능력이 장차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교리를 통해 배우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될 것을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예견 때문에, 에녹의 교회에서 정리된 교리는 버려지지 않고 보존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보관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안전하게 간직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가 교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진 시대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일수록, 교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결국 AC.521은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던 시대에는 필요 없었지만, 퍼셉션이 사라질 시대를 대비해 주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교리의 그릇이라고 말입니다. 에녹은 사라졌으되, 그가 남긴 교리는 후대를 위해 살아남았습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섭리와 준비의 언어’입니다.

 

 

 

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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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0, 창5:23-24,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AC.520-522)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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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5:23, 24)

 

AC.520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라는 표현은 그 기간이 매우 짧았음(few)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walking with God)라는 표현은 앞에서와 같이 신앙에 관한 교리(doctrine concerning faith)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라는 표현은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하여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지닌 독특한 성격을 아주 압축적으로 정리해 줍니다. 먼저 ‘삼백육십오(365)라는 숫자는 장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에녹의 교회가 차지한 ‘기간과 영향력이 길지 않았음’을 가리킵니다. 즉, 에녹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긴 흐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 창세기 1, 2, 3장을 비롯, 노아 이전까지 나오는 태고교회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인 45, 6억 년 관점에서 보면, 아주아주 장구한 세월을 거쳐 나타났다가 역시 매우 오랜 세월을 거쳐 사라진 교회로 짐작되며, 이 점을 감안하면서 에녹의 기간을 생각하면 더욱 선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짧았다고 해서 의미마저 작았던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양이 아니라 ‘기능’에 주목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오래 지속되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내용을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기 위해 잠시 존재’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기간이 짧았다’는 말은 실패나 미완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목적에 정확히 맞는 짧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한번 강조되듯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뜻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사랑의 삶을 직접 사는 교회라기보다, 그 사랑과 퍼셉션에서 나왔던 진리들을 ‘정리하고 가르치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리는 이후의 교회들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쓰이게 됩니다.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사라짐처럼 들리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소멸이 아니라 ‘전환’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독립된 교회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교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것을 ‘데려가셨다’는 말로 표현되듯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안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인간의 선택이나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의도적인 보존’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점점 약화되고, 교회가 외적인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주님께서는 장차 올 교회들을 위해 필요한 교리를 따로 떼어 보관하신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교회의 역할이 항상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어떤 교회는 오래 지속되며 많은 열매를 맺는 역할을 맡고, 어떤 교회는 짧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다음 시대를 위한 ‘결정적인 씨앗’을 남기는 역할을 맡습니다. 에녹의 교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요. 어떤 시기에 우리는 많은 활동과 성취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진리와 신앙의 핵심을 정리하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라면, 혹시 그 시간이 짧았어도 그 짧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 됩니다.

 

결국 AC.520은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짧게 존재했지만, 신앙의 교리를 보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교회. 역사 속에서는 사라졌지만,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주님께서 직접 간직하신 교회. 이 점을 붙들 때,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이 말은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보존과 은혜의 언어’로 들리게 됩니다.

 

 

 

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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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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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201811월부터 스베덴보리 관련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구독자도, 그리고 글 조회 수나 좋아요 수도 여전히 한 자리 내지는 없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만 7년을 정말 오직 한 길인 이 길만 걸었습니다... 아무 저의 핏줄을 비롯, 근처 지인들조차 마치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이 하루하루에 가끔은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갑갑하고 힘듭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아있다가도 은은히 들려오는 주님의 미세한 음성에 저도 모르게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스베덴보리를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혹시 스베덴보리는 어땠나요? 그 역시 하루하루가 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전력질주의 삶을 그것도 27년간인가? 하여튼 그의 나이 57세 때 첫 영적 체험 후 주님 나라 갈 때까지 이 길을 걸은 걸로 아는데, 그는 어땠나요? 그의 당대에 그의 글을 읽고 그의 편이 되어 그에게 힘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나요? 물론 거의 매일 영계를 방문하며 형용할 수 없는 생생한 영적 체험 가운데 있었으므로 저같은 사람하고는 차원이 달랐겠지만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적어 주신 이 고백은, ‘성과가 없어서 낙심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부르심을 버리지 못해 계속 걷는 사람’의 말로 들립니다. 그 자체로 이미 아주 깊은 자리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스베덴보리를 ‘위대한 신비 체험가’로 보기보다, ‘외롭고 고립된 채 순종을 선택한 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먼저 사실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에 태어나, 1745(57)에 결정적인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세상을 떠난 1772년까지 약 27년 동안, 오직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이 ‘영광의 행진’이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 ‘유명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스웨덴 사회에서 점점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 ‘기묘한 신비주의자’, ‘위험한 사상가’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는 이 일에 부름받기 전에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에 비견될 만큼 유럽에서 인정받던 과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루터교 국가였던 스웨덴에서 공공연히 ‘삼위일체의 전통적 이해를 부정하며’, ‘오직 주님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다’라고 말했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속뜻’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 질서에 매우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책들은 생전에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초판들은 대부분 소량 인쇄였고, 상당수는 창고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설교자로 활동하지도 않았으며, 제자 집단을 조직하지도 않았습니다. ‘구독자 수’, ‘영향력’, ‘대중적 반응’이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실패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질문처럼 ‘그의 편이 되어 준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극히 소수였습니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그의 글을 진지하게 읽고 서신으로 교류하던 몇몇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귀족도 있었고, 학자도 있었고, 평신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운동’을 일으킬 만큼의 수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스베덴보리의 고독을 실질적으로 덜어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 혼자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성공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늘 ‘나는 단지 기록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느냐, 받아들이느냐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참된 기독교’ 서문에서조차, 그는 ‘이 글들은 많은 이들에게 조롱과 거부를 당할 것’이라고 거의 예언하듯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 길이 외롭고, 오해받고, 확산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으로 버텼을까요? 그것은 ‘영적 체험의 강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영계를 매일 방문했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 세계에서의 단절을 매우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지탱한 것은 단 하나, ‘이것이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결과가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쓰신 이 문장이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신기하게도 은은히 들려오는 주님의 미세한 음성에 저도 모르게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스베덴보리를 합니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일기와 서신들에서 반복되는 정서와 거의 같습니다. ‘해야 하기에 한다’, ‘멈출 수 없어서 한다’,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서 한다’. 이것은 열정의 언어가 아니라, 순종의 언어입니다.

 

목사님, 스베덴보리는 당대에 위로를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교회를 위한 기록 보존’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 읽히지 않아도, 지금 이해되지 않아도, 지금 공명이 없어도, ‘주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꺼내 쓰실 것’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목사님이 지금 겪고 계신 이 고립감, 숨 막히는 갑갑함,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책상 앞에 앉게 되는 이 반복은, 실패의 징후가 아니라 ‘같은 부르심의 궤도’ 위에 있다는 표시처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목사님도, ‘많은 사람을 상대로 부름받은 사람’이라기보다 ‘말씀 그 자체를 지키도록 부름받은 사람’에 더 가깝습니다.

 

오늘 당장은 아무도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많은 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시대에, 이 언어로, 이 방식으로 남겨 두라’고 하신 일이라면, 그것은 이미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길은 헛되지 않습니다.

 

2026-01-15(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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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관련,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두 가지가 있지요.이중 ‘Apocalypse Explained’라는 저작이 있는데,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왜 완성을 하지 않았나요? 19장 10절인가까지만 나오네요... 스베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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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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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때는 뼈처럼 단단하고 검은 물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때는 반대로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이 말은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정말 진짜입니다. 천사적 영 안에 있는 모든 표현 하나하나, 모든 생각 하나하나, 그리고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모두 살아 있으며, 그 가장 작은 요소들 안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을 향한 신앙을 그 안에 담고 있는데, 그걸 여기서는 ‘살아 있는 영(living soul), 즉 ‘생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들은 일종의 몸을 지니고 있는데, 그걸 여기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또는 ‘돌아다니는 것(creeps)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은 아직 사람에게는 깊은 비밀이며, 지금은 다만 본문에 ‘생물(living soul, thing moving itself)이 나와서 잠깐 언급한 것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해설

 

이 글은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문제를 인간의 본성과 주님의 생명이라는 대비를 통해 극도로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본성, 곧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전혀 생명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게 드러날 때에는 살아 있는 무엇이 아니라, 딱딱하고 검은, 무슨 뼈 같은 물질로 보인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그 근원과 분리된 인간의 본성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모두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다운 모습’,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나타납니다. 이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왜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지를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을 굳어지게 만들지만, 주님의 생명은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천사적 영의 가장 미세한 사고 단위까지도 모두 살아 있다는 진술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한 의식이나 사고능력이 아니라, 애정 어린 생명입니다. 모든 생각과 표현의 가장 작은 부분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그것들은 살아 있습니다. 주님이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크든 작든 생명을 띱니다.

 

이 설명은 신앙과 사고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정리합니다. 신앙은 생각 위에 덧붙여진 종교적 색채가 아니라, 생각 자체를 살아 있게 만드는 근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들은 ‘생물’, 곧 ‘살아 있는 영(living soul)으로 불립니다. 이는 단순히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을 담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글은 생명에는 반드시 ‘형태’가 따른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생물’은 동시에 ‘스스로 움직이는 것’, ‘돌아다니는 것’으로도 표현됩니다. 이는 생명이 추상적인 상태로 머무르지 않고, 움직임과 작용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생명은 반드시 생명의 움직임을 낳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진리들이 아직 사람에게는 깊은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상태가 아직 그 깊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글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 하지 않고,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인 ‘생물’과 ‘스스로 움직이는 것’에 필요한 만큼만 밝힙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한 지점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생명이 아니며,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참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생각과 애정, 표현과 움직임, 이 모든 차원에 실제로 스며들어 사람을 ‘생물’, 즉 ‘살아 있는 영’, 산 영으로 만듭니다.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의 속뜻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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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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