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6

그들 가운데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천국의 기쁨이 오직 주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다른 어떤 활동도 없이 오직 주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 자체가 곧 활동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활동적인 삶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찬양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기를 원하시며, 그들은 그것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행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조차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노릇하는 것과 같은 삶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그러한 삶이 모든 삶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삶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되어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The best instructed of them all said that heavenly joy consists solely in praising and glorifying the Lord, being a life destitute of any doing of the goods of charity, and that this is an active life. But they were told that praising and celebrating the Lord is not such an active life as is meant, but is an effect of that life; for the Lord has no need of praises, but wills that they should do the goods of charity, and that it is according to these that they will receive happiness from the Lord. But still these best instructed persons could form no idea of joy, but of servitude, in doing these goods of charity. But the angels testified that such a life is the freest of all, and that it is conjoined with happiness unutterable.

 

해설

AC.456은 지금까지 나온 잘못된 천국관 가운데 가장 종교적이고 경건하게 보이는 생각을 다룹니다. 앞에서는 천국을 편안히 쉬는 곳이나 찬란한 빛 가운데 머무는 곳으로 생각했다면, 여기서는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얼핏 보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천국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찬양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찬양하는 것과 이웃에게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것을 서로 분리하여 전자만을 천국의 활동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본문이 이들을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들은 천국이 단순한 휴식이나 감각적인 즐거움의 장소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삶을 주님을 향한 찬양과 영화롭게 함에만 한정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선을 행하는 실제 삶은 그 중심에서 제외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배와 삶,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활동적인 삶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라는 말이 AC.456의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이것은 찬양의 가치를 낮추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찬양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사람 안에 들어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날 때, 그 삶에서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천국적 삶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적 삶에서 피어나는 고백이며 기쁨입니다.

 

특히 ‘주님은 찬양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말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상당히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찬양이나 예배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이나 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인간과 천사의 찬양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찬양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찬양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찬양이 참된 찬양이 되려면 예배의 시간에만 머물지 않고 체어리티의 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단지 주님을 높이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456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합니다. 찬양을 오래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은 귀하고 거룩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신앙생활의 완성으로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뜨겁게 주님을 찬양하였더라도 그 예배가 이후의 삶에서 용서와 정직과 섬김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활동적인 삶’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삶을 들으면서도 거기에서 기쁨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노릇’을 떠올렸습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인간의 오래된 오해를 보여 줍니다.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자유이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고 섬기는 것은 의무와 속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에게는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이웃의 선을 자신의 기쁨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쓰임이 되는 것을 억지로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로 느낍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삶이 ‘모든 삶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삶’이며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되어 있다고 증언합니다.

 

결국 AC.456은 ‘찬양이냐 체어리티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둘의 참된 질서를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을 받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며, 그 삶에서 다시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예배와 천국의 삶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고, 이웃 사랑의 삶은 다시 주님을 향한 찬양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으로 자신의 영광을 채우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천국의 삶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AC.456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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