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창3:22)
301. 다른 아케이나는,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밝히 알게 되면, 그들은 영원히 소멸된다는 것으로, 이것이 본문,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가 상징하는 것입니다. The other arcanum is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which is signified by the words,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이것은 이런 경우입니다. 그동안 생명의 질서들하고는 반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그래서 이제는 살아가는 것도, 지혜로워지는 것도 자기 자신들로만, 그리고 자신들의 고유 본성으로만 하려고 하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신앙에 대해 듣는 모든 것을 그게 과연 그런지 아닌지 따져보기 시작합니다. The case is this: When men have become inverted orders of life, and are unwilling to live, or to become wise, except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ey reason about everything they hear respecting faith, as to whether it is so, or not;
그리고 그들이 이런 짓을 자신들로부터, 그리고 감각과 기억-지식들로 구성된 자신들의 고유 본성의 일들로부터 하기 때문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부인하게 되고, 그 결과, 신성모독(神性冒瀆)과 불경(不敬)에 이르게 되며, 그래서 결국, 그들은 세속(世俗)에다가 거룩을 섞는 일을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and as they do this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it must needs lead to denial, and consequently to blasphemy and profanation, so that at length they do not scruple to mix up profane things with holy.
사람이 이 지경이 되면, 그는 저 세상에서 유죄 선고를 받아 구원을 받을 아무 희망도 남지 않게 됩니다. When a man becomes like this, he is so condemned in the other life that there remains for him no hope of salvation.
그 이유는, 신성모독으로 섞인 것들은 그렇게 섞인 상태로 있게 되고, 그래서 어떤 거룩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 되어 있는 불경한 생각 또한 따라 나오게 되어, 그 결과, 그 사람은 지옥 말고는 그 어떤 데에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For things mixed up by profanation remain so mixed up, so that whenever any idea of something holy presents itself, an idea of something profane that is conjoined with it is also ther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that the person cannot be in any society except one of the damned.
이렇게 세속적인 것에 거룩한 것을 섞는 식으로 살아온 사람은 어떤 한 조각 생각을 하더라도, 저 세상에서는 정말 기가 막힌 방법으로 지각되는데요, 바로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에 의해서, 그리고 천사 같은 영들에 의해서는 더욱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캐릭터 전체가 정말 기가 막힌 방법으로 지각된다는 사실입니다. Whatever is present in any idea of thought in consequence of being conjoined with it, is most exquisitely perceived in the other life, even by spirits in the world of spirits, and much more so by angelic spirits, so exquisitely indeed that from a single idea they know a person’s character.
이렇게 서로 묶여 있는 세속과 거룩 간 분리는,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데요, 사람이 이런 것을 깨닫고, 정말 지옥 자체를 피하듯 조심조심 신성모독을 피하려고 할 때만 이 둘의 분리는 일어납니다. The separation of profane and holy ideas when thus conjoined cannot be effected except by means of such infernal torment that if a man were aware of it he would as carefully avoid profanation as he would avoid hell itself.
302. 이것이 왜 신앙의 신비들이 유대인들에게는 절대로 계시되지 않았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This is the reason why the mysteries of faith were never revealed to the Jews.
그들은 사람의 사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과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말씀들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They were not even plainly told that they were to live after death, nor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그들은 아주 대단할 정도로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그렇게 고집스러웠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속 사람과, 혹은 내적인 일들의 존재에 관해 몰랐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만일 그들이 전부터 그걸 알았었거나 지금 알게 되어 그걸 인정하게 되면, 그들은 기어코 그걸 신성모독하고, 그래서 기어코 저 세상에서 자기들 몫의 어떤 구원도 남겨 놓지 않을 그런 캐릭터들이기 때문입니다. So great were the ignorance and stupidity in which they were kept, and still are kept, that they did not and do not know of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or of anything internal, for if they had known of it, or if they now knew of it, so as to acknowledge it, such is their character that they would profane it, and there would be no hope of any salvation for them in the other life.
이것이 주께서 요한복음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Lord in John: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He hath blinded their eyes, and stopped up their heart, that they should not see with their eyes, nor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convert themselves, and I should heal them. (요12:40)
그리고 주께서 그들에게 풀이 없이 비유로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안 그러면 그들이 보며, 들으며,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And by the Lord speaking to them in parables without explaining to them their meaning, lest (as he himself says),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마13:13)
같은 이유로, 신앙의 모든 신비가 그들에게는 숨겨졌고, 그들의 교회를 대표하는 것들 속으로 봉인되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또한 말씀도 예언적 스타일로 주신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ll the mysteries of faith were hidden from them, and were concealed under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nd for the same reason the prophetic style is of the same character.
그렇지만,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It is however one thing to know, and another to acknowledge.
알고는 있는데 인정하지는 않는 사람은 마치 그걸 몰랐던 사람인 것처럼 있습니다. 그런데 인정을 하고, 나중에 신성모독을 하고, 불경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것이 위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들의 의미입니다. He who knows and does not acknowledge is as if he knew not; but it is he who acknowledges and afterwards blasphemes and profanes, t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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