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아벨 대신 얻은 셋의 계열과 가인의 계열은 거의 나란히 진행된 걸로 볼 수 있나요? 즉 한쪽에서 가인 계열의 역사가 진행될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셋의 계열 역사가 진행된 걸로 말이지요. 창세기 서술 상으로는 가인 계열이 사라진 후, 셋 계열이 시작되는 걸로 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네, 스베덴보리(특히 Arcana Coelestia) 관점에서는 두 계열이 거의 동시에, 나란히 진행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성경 서술이 “순차적으로”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역사적 시간 순서 서술이 아니라, 영적 분류와 교회의 내적 상태를 따라 배열된 것으로 봅니다.


1. 스베덴보리적 해석의 기본 전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반의 족보들을 **지상 혈통의 직선적 역사 기록이 아니라 “교회(Church)의 상태들(state)”**의 표상들로 봅니다.

  • 가인의 계열 → 진리에 의한 삶이 아닌, 자기 지성(own intelligence)에 기반한 신앙, 즉 외적·분리된 신앙(AC.337–340).
  • 셋의 계열 → 아벨이 상징하던 “자비(agape, charity)”의 회복, 즉 참된 신앙의 시초.

따라서 창세기 4장과 5장의 계열이 시간적으로 순차가 아니라 두 흐름(교회)이 동시에 존재했으나, 질적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분리해서 서술한 것입니다.


2. 성경에서의 '분리 서술'의 이유

창세기 4장에서는 가인의 후손을 먼저 다루고, 창세기 5장에서야 셋의 계열을 언급합니다. 마치

  • 가인의 계열 → 끝남
  • 그다음에 셋의 계열 → 시작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 성경은 “영적 상태의 구분”을 위해 분리해 놓았을 뿐,

▶ 실제 역사에서는 가인적 교회와 셋적 교회가 상당 기간 함께 존재했다.

AC.337–350에서 반복적으로 설명되듯, 초기 인류의 영적 상태가 다양하게 분리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교회 흐름이 존재했다고 봅니다.


3. 왜 두 계열이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가?

1) 아벨이 죽자마자 셋이 주어졌다는 점

  • "하나님이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창4:25)
  • 이것은 아벨의 성질(진정한 신앙)이 가인 계열에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흐름이 필요했다는 뜻.
  • 이 “새로운 흐름”은 곧바로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됨.

2) 가인의 후손이 도시를 세우고 여러 세대가 흘러갈 동안

그와 동시에

  • 셋의 계열도 “별도 흐름”으로 발전.

3) 후에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4:26)는 말

이것도

  • 가인 계열이 다 끝난 후에 생긴 일이 아니라,
  • 그 시대의 ‘한 흐름’에서 나타난 영적 부흥을 가리키는 것.

즉, 가인적 교회(타락한 신앙)와 셋적 교회(회복된 신앙)는 일정 기간 병존합니다.


4. 왜 성경에서 ‘가인 계열 → 셋 계열’의 순차 구도가 나오는가?

스베덴보리적 해석에 따르면:

A. 영적 질서상, ‘거짓된 것’ → ‘참된 것’의 순서로 기술

성경은 ‘영적 흐름의 순서’를 따라 배열하지 ‘역사 연대기’를 따라 배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B. 가인의 계열은 후기 교회의 타락을 상징하기 때문에 먼저 제시

그리고 셋의 계열은 새 교회의 시작을 상징하므로 뒤에 놓음.

C. 창4와 창5의 족보는 서로 이질적인 “영적 족보”이며 역사적 족보가 아님

따라서 두 족보를 시간적으로 이어 붙이면 오독이 됩니다.


5. 결론

그렇습니다. 두 계열은 거의 나란히 진행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 가인의 계열은 “타락한 초대교회(자아와 거짓된 신앙)”
  • 셋의 계열은 “회복된 초대교회(주님으로부터 온 참된 신앙)”

이 두 흐름은 동시대에 존재했으며 서로 전혀 다른 내적 상태의 인간군을 상징합니다. 성경은 이 두 계열을 명료하게 구분하기 위해 순차적으로 나열했을 뿐, 역사적 시간 순서의 연속성을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원하시면

  • 두 계열의 “각 인물”이 상징하는 영적 의미
  • ‘두 흐름이 실제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공존했는가’
  • ‘가인의 계열이 왜 멸망했고 셋의 계열이 어떻게 노아로 넘어갔는가’ 까지도 Arcana Coelestia 원문 근거로 자세히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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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Arcana Coelestia에서 창4 가인의 자손도 태고교회인가, 아니면 창5부터 태고교회인가?

 

1. 질문 자체가 요구하는 해석의 위치

 

창세기 4장의 가인 자손도 태고교회인가, 아니면 창세기 5장부터가 태고교회인가’라는 질문은 겉으로 보면 연대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rcana Coelestia에서 스베덴보리가 전제하는 바에 따르면, 이 질문은 시간의 앞뒤를 가리는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이는 성경을 역사 기록으로 읽고 있는지, 아니면 교회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읽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앞부분이 사건의 연속을 기록한 연대기가 아니라, 인류 초기 교회의 영적 상태가 어떻게 전개되고 분화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언제가 먼저인가’가 아니라, ‘같은 시대 안에서 어떤 서로 다른 영적 흐름이 있었는가’라는 차원에서 다시 제기되어야 합니다.

 

 

2. 태고교회는 한 시점이 아니라 하나의 장(field)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는 하나의 짧은 황금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역사 초기에 형성된 하나의 거대한 영적 장(, field), 곧 사랑과 퍼셉션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간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장 안에는 언제나 단일한 모습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심에 가까운 흐름과,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흐름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태고교회는 ‘시작-전성기-말기’로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하나의 선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일한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깊이와 방향을 가진 여러 흐름들이 함께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창세기 4장과 5장은 서로 충돌하는 기록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3. 창세기 4장은 태고교회의 붕괴 단면을 보여줌

 

창세기 4장은 태고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단면입니다. 여기서 가인은 태고교회 바깥에서 등장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보다 신앙적 지식이 앞서기 시작한 흐름을 대표합니다.

 

가인과 그의 자손들은 여전히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을 말하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더 이상 퍼셉션이 아니라, 분리된 신앙, 곧 ‘옳다고 여겨지는 것’에 놓여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은 이 흐름을 따라가며, 한 교회가 어떻게 내부에서 점점 생명을 잃어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점은, 이 붕괴가 태고교회 이후의 다른 시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동일한 장 안에서 일어난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4. 창세기 5장은 태고교회의 보존 단면을 보여줌

 

이에 비해 창세기 5장은 같은 시대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 장은 붕괴가 아니라 보존에 초점을 둡니다. 즉, 태고교회가 무너져 가는 와중에도 주님에 의해 끝까지 유지되고 있던 중심선을 따라 내려오는 기록입니다.

 

아담에서 셋으로 이어지는 족보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일한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 계열과는 다른 방향으로 유지되던 흐름, 곧 가인과는 달리 여전히 아담이라는 교회의 퍼셉션을 이어받은, 즉 보전된 흐름입니다. 같은 시대 안에서 끝까지 붙들린 흐름이지요.

 

 

5. 가인 계열의 창4와 셋 계열의 창5는 앞뒤가 아니라 병행

 

이제 질문의 핵심에 답할 수 있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까지 진행된 뒤에야 셋 계열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두 계열은 동일한 태고교회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며 병행했습니다.

 

창세기 4장은 의도적으로 가인 계열만을 따라 내려가며 붕괴의 끝을 보여 주고, 창세기 5장은 의도적으로 셋 계열만을 따라 내려가며 보존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이 두 흐름을 시간순으로 섞지 않고, 의미순으로 분리하여 제시합니다.

 

이 때문에 문자적으로 읽으면 얼핏 ‘아담이 창4 끝에 가서야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아담, 곧 태고교회는 두 흐름 모두의 근원으로 동시에, 그러니까 아담이라는 한 모(母) 교회에서 가인이라는 교회와 셋이라는 교회가 시차를 두고 나란히 진행된 것입니다.

 

 

6. 그러므로 태고교회는 언제까지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이 모든 관점을 종합하면, 답은 분명해집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그 자손들도 태고교회이며, 창세기 5장도 태고교회입니다. 창세기 5장부터 태고교회가 새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과 5장은 서로 다른 시대를 말하는 두 장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서로 다른 영적 관점에서 본 두 단면입니다. 하나는 태고교회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와중에도 주님이 무엇을 보존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비록 그렇게 보존하신 창5의 교회도 결국에 가서는 종말을 고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창1, 2, 3은 현 지질학적 지구 나이라고 하는 45, 6억 년 관점에서는 실제로 얼마나 오랜 기간인가

스베덴보리의 ‘Arcana Coelestia’ 창1-3을 보면 태고(太古) 교회가 나오는데, 거기 태고교회를 이루는 후손과 후손간 실제 역사는 그 기간이 얼마나 되나요? 현 지질학적 지구 나이라고 하는 45, 6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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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Arcana Coelestia1-3을 보면 태고(太古) 교회가 나오는데, 거기 태고교회를 이루는 후손과 후손간 실제 역사는 그 기간이 얼마나 되나요? 현 지질학적 지구 나이라고 하는 45, 6억 년 관점에서 설명해 주세요.

 

 

Arcana Coelestia’에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3장을 해설할 때 전제하는 가장 근본적인 관점은, 이 본문이 ‘연대기적 역사’나 ‘문명사적 기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창1–3을 ‘인류 최초의 교회’, 곧 ‘태고(太古) 교회’의 상태를 묘사한 말씀으로 보며, 그 상태란 외적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 의식과 내적 생명의 질서가 어떠했는가에 대한 영적 서술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가’, ‘실제 후손들이 몇 세대였는가’와 같은 현대적 역사 감각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는 특정 부족이나 가문, 또는 한 지역에 국한된 집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처음으로 주님과 직접적인 교통(perception)을 가졌던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주님을 직관적으로 알던 인간 유형’을 의미하고, ‘하와’는 그 사랑에서 나온 생명의 감수성 전체를 뜻합니다. ‘에덴동산’ 역시 실제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질서와 조화가 완전히 자리 잡은 상태를 상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혈연적 자손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후손이란 ‘같은 영적 상태를 계승한 인간들의 연속’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 안에서의 세대교체는 ‘부모에서 자식으로의 유전자 전달’이 아니라, ‘사랑 중심의 지각 상태가 점차 약화되며 다른 상태로 이행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1–3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역사적 연표나 사건 기록이 의도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제 질문의 핵심인 ‘태고교회의 기간은 얼마나 되었는가’라는 문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에 대해 단 한 번도 구체적인 연대나 숫자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는 정보 부족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 의도에 따른 침묵입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가 아니라 ‘어떤 상태였는가’에 있으며, 태고교회는 인간이 사랑과 지각(perception)을 통해 주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느끼고 살았던 시기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현대 지질학에서 말하는 지구의 나이, 곧 약 45, 6억 년이라는 시간 개념은 물질세계의 형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반면 태고교회는 ‘인간 의식과 영적 수용성의 역사’에 속합니다. 이 둘은 같은 우주 안에 존재하지만, 동일한 잣대로 측정될 수는 없습니다. 지질학적 시간은 암석과 층위로 측정되지만, 영적 역사는 상태와 질서의 변화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관점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지질학적 시간 위에 영적 역사가 ‘겹쳐진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물질적으로 충분히 안정된 환경 속에서 인간이 인간다운 의식과 내면을 갖추게 되었고, 그 시점 이후에 태고교회라 불리는 영적 상태가 시작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때 태고교회의 지속 기간은 수백 년이나 수천 년 단위로 제한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합리적으로 말하자면, 태고교회는 매우 장구한 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되고, 또 극히 느린 속도로 쇠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 감각으로 환산한다면, 그것은 수만 년이 아니라 수십만 년, 혹은 수백만 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수치를 제시하는 순간 독자가 본질에서 벗어날 것을 알았기에, 그 길을 의도적으로 차단합니다.

 

중요한 것은 태고교회의 종말 역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상태의 붕괴’라는 점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도덕적 사고가 아니라, 사랑보다 지식을 앞세우려는 인간 의식의 방향 전환을 상징합니다. 이 전환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지각이 흐려지고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태고교회가 끝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실제 역사’란 전쟁이나 왕조 교체, 기술 발전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사랑 중심의 직접 지각’이 ‘외적 인식과 신앙 중심의 삶’으로 이동해 가는 영적 역사입니다. 이 역사 안에서 말하는 ‘후손과 후손 간의 관계’는, 서로 다른 인간 유형과 의식 단계가 이어지는 연속성을 뜻합니다.

 

정리하자면, 태고교회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 45, 6억 년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긴 물질적 역사 위에 피어난 가장 초기의 영적 의식의 꽃과 같습니다. 그것은 특정 연대에 묶일 수 없는, 인류 전체의 ‘가장 깊었던 시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 숫자를 남기지 않고, 오직 상태와 질서, 그리고 그 상실의 의미만을 남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태고교회는 언제 존재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처음으로 주님과 하나의 마음으로 살았던 상태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입니다.

 

 

 

창1–3장, 태고교회 관련 주요 단락들 발췌, 요약

Arcana Coelestia 창1–3장에서 태고교회 관련 주요 단락들 발췌, 요약 좀 부탁합니다. 좋습니다 😊 그럼 스베덴보리 『Arcana Coelestia』 제1권(창세기 1–3장)에 나오는 “태고(太古)교회(The Most Ancient 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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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Arcana Coelestia' 소개

본 글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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