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가인 계열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오래 살았나요? 4 끝부분에 셋이 등장하기에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질문의 핵심부터 분명히 해야

아담이 가인 계열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오래 살았는가’라는 질문은 창세기 4장의 서술 순서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문입니다. 창4 후반부에서는 가인의 자손 계보가 끝까지 소개되고, 그 직후에 창4:25에 셋의 출생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마치 가인 계열이 완전히 끝난 뒤에야 셋이 태어난 것처럼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 자체는 그런 시간적 연속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서술 방식 자체를 고려해야

창세기는 현대적 의미의 연대기 기록이 아니라, ‘주제별, 계보별로 묶어 서술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즉, 한 계열을 먼저 끝까지 정리한 뒤, 다른 계열을 이어서 소개하는 문학적 구조를 취합니다. 이는 히브리 성경에서 매우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이 끝난 뒤 셋이 태어났다’는 인상은 ‘서술상의 배열’에서 비롯된 것이지, 실제 시간 흐름을 반영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만 보더라도 셋의 출생이 가인 계열 멸망 이후라고 말할 근거는 없음

4:25은 단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고 말할 뿐입니다. 이는 아벨이 죽은 이후, 비교적 이른 시점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어디에도 가인 계열의 소멸이나 종말 이후에 셋이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 자체의 문자적 읽기에서도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일정 기간 함께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결정적인 통찰을 제공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아담’, ‘가인’, ‘’은 단순한 개인 이름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states of the church), 더 정확히 말하면 인류의 ‘영적 상태와 그 변화 단계’를 의미합니다. ‘아담’은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를, ‘가인’은 그 교회 안에서 신앙을 분리, 독립시킨 왜곡된 상태를, ‘’은 아벨이 상징하던 천적 교회가 무너진 이후 다시 세워진 새로운 교회의 씨앗을 뜻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아담이 가인 계열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 살았는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문자적 시간 개념에 갇힌 질문

스베덴보리에게서 ‘아담의 930’는 한 개인의 물리적 수명이 아닙니다. 이는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영적 상태가 지속된 ‘상징적 기간’을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가인 계열의 ‘멸망’은 특정 가족 혈통의 물리적 단절이 아니라, ‘신앙이 생명과 완전히 분리되어 더 이상 교회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된 영적 종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이라는 인물이 가인 계열의 멸망을 눈으로 볼 때까지 살아 있었나라고 묻는 것은, 스베덴보리적 해석 구조와는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시간적으로 겹쳐 존재함

가인 계열은 태고교회 내부에서 신앙을 지식과 교리로만 붙잡고 사랑과 생명에서 분리시킨 흐름을 대표합니다. 이 흐름은 점점 더 외적 지식과 기술, 자기 사랑으로 기울어 갑니다. 반면 셋 계열은 아벨이 상징하던 사랑 중심의 교회가 무너진 이후, 그 리메인스(remains)를 보존하여 훗날을 위해 교리적 형태로 진리를 지키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두 흐름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지만, 같은 시대 안에서 병존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4장과 5장은 앞선 시대가 끝난 뒤 다음 시대가 시작된다는 직선적 역사 서술이 아님

오히려 같은 태고 시대를 ‘서로 다른 영적 관점에서 보여 주는 두 단면’에 가깝습니다. 창4는 태고교회가 어떻게 내부에서 붕괴되고 왜곡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장이며, 창5는 그 와중에도 주님께서 어떻게 교회의 씨앗을 보존하시고 다음 단계로 이어 가셨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이 두 장은 시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병행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합니다.

셋은 가인 계열이 사라진 뒤에 태어난 인물이 아닙니다. 성경의 서술 순서는 주제적 배열일 뿐, 실제 연대 순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일정 기간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대표합니다. 또한 아담은 이 모든 과정을 실제로 수백 년간 지켜본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영적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문자적 역사 문제라기보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 상태의 전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9. '가인에게 표를 주사...'(창4:15) 해설

창4:15에 나오는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가인은 아우를 죽인 형제 살인범인데 왜 여호와께서는 그런 가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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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창4 가인 계열도 태고교회인지? 아니면 창5부터인지?

스베덴보리의 ‘Arcana Coelestia’에서 창4 가인의 자손도 태고교회인가, 아니면 창5부터 태고교회인가? 1. 질문 자체가 요구하는 해석의 위치 ‘창세기 4장의 가인 자손도 태고교회인가, 아니면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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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Arcana Coelestia에서 창4 가인의 자손도 태고교회인가, 아니면 창5부터 태고교회인가?

 

1. 질문 자체가 요구하는 해석의 위치

 

창세기 4장의 가인 자손도 태고교회인가, 아니면 창세기 5장부터가 태고교회인가’라는 질문은 겉으로 보면 연대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rcana Coelestia에서 스베덴보리가 전제하는 바에 따르면, 이 질문은 시간의 앞뒤를 가리는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이는 성경을 역사 기록으로 읽고 있는지, 아니면 교회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읽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앞부분이 사건의 연속을 기록한 연대기가 아니라, 인류 초기 교회의 영적 상태가 어떻게 전개되고 분화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언제가 먼저인가’가 아니라, ‘같은 시대 안에서 어떤 서로 다른 영적 흐름이 있었는가’라는 차원에서 다시 제기되어야 합니다.

 

 

2. 태고교회는 한 시점이 아니라 하나의 장(field)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는 하나의 짧은 황금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역사 초기에 형성된 하나의 거대한 영적 장(, field), 곧 사랑과 퍼셉션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간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장 안에는 언제나 단일한 모습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심에 가까운 흐름과,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흐름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태고교회는 ‘시작-전성기-말기’로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하나의 선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일한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깊이와 방향을 가진 여러 흐름들이 함께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창세기 4장과 5장은 서로 충돌하는 기록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3. 창세기 4장은 태고교회의 붕괴 단면을 보여줌

 

창세기 4장은 태고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단면입니다. 여기서 가인은 태고교회 바깥에서 등장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보다 신앙적 지식이 앞서기 시작한 흐름을 대표합니다.

 

가인과 그의 자손들은 여전히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을 말하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더 이상 퍼셉션이 아니라, 분리된 신앙, 곧 ‘옳다고 여겨지는 것’에 놓여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은 이 흐름을 따라가며, 한 교회가 어떻게 내부에서 점점 생명을 잃어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점은, 이 붕괴가 태고교회 이후의 다른 시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동일한 장 안에서 일어난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4. 창세기 5장은 태고교회의 보존 단면을 보여줌

 

이에 비해 창세기 5장은 같은 시대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 장은 붕괴가 아니라 보존에 초점을 둡니다. 즉, 태고교회가 무너져 가는 와중에도 주님에 의해 끝까지 유지되고 있던 중심선을 따라 내려오는 기록입니다.

 

아담에서 셋으로 이어지는 족보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일한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 계열과는 다른 방향으로 유지되던 흐름, 곧 가인과는 달리 여전히 아담이라는 교회의 퍼셉션을 이어받은, 즉 보전된 흐름입니다. 같은 시대 안에서 끝까지 붙들린 흐름이지요.

 

 

5. 가인 계열의 창4와 셋 계열의 창5는 앞뒤가 아니라 병행

 

이제 질문의 핵심에 답할 수 있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까지 진행된 뒤에야 셋 계열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두 계열은 동일한 태고교회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며 병행했습니다.

 

창세기 4장은 의도적으로 가인 계열만을 따라 내려가며 붕괴의 끝을 보여 주고, 창세기 5장은 의도적으로 셋 계열만을 따라 내려가며 보존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이 두 흐름을 시간순으로 섞지 않고, 의미순으로 분리하여 제시합니다.

 

이 때문에 문자적으로 읽으면 얼핏 ‘아담이 창4 끝에 가서야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아담, 곧 태고교회는 두 흐름 모두의 근원으로 동시에, 그러니까 아담이라는 한 모(母) 교회에서 가인이라는 교회와 셋이라는 교회가 시차를 두고 나란히 진행된 것입니다.

 

 

6. 그러므로 태고교회는 언제까지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이 모든 관점을 종합하면, 답은 분명해집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그 자손들도 태고교회이며, 창세기 5장도 태고교회입니다. 창세기 5장부터 태고교회가 새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과 5장은 서로 다른 시대를 말하는 두 장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서로 다른 영적 관점에서 본 두 단면입니다. 하나는 태고교회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와중에도 주님이 무엇을 보존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비록 그렇게 보존하신 창5의 교회도 결국에 가서는 종말을 고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창1, 2, 3은 현 지질학적 지구 나이라고 하는 45, 6억 년 관점에서는 실제로 얼마나 오랜 기간인가

스베덴보리의 ‘Arcana Coelestia’ 창1-3을 보면 태고(太古) 교회가 나오는데, 거기 태고교회를 이루는 후손과 후손간 실제 역사는 그 기간이 얼마나 되나요? 현 지질학적 지구 나이라고 하는 45, 6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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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Arcana Coelestia1-5 보면 태고(太古) 교회가 나오는데, 거기 태고교회를 이루는 후손들의 실제 살다 간 기간을 현 지질학적 지구 나이라고 하는 45, 6억 년 관점으로 좀 알고 싶습니다.

 

 

Arcana Coelestia’에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3장을 해설할 때 전제하는 가장 근본적인 관점은, 이 본문이 ‘연대기적 역사’나 ‘문명사적 기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창1–3을 ‘인류 최초의 교회’, 곧 ‘태고(太古) 교회’의 상태를 묘사한 말씀으로 보며, 그 상태란 외적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 의식과 내적 생명의 질서가 어떠했는가에 대한 영적 서술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가’, ‘실제 후손들이 몇 세대였는가’와 같은 현대적 역사 감각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는 특정 부족이나 가문, 또는 한 지역에 국한된 집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처음으로 주님과 직접적인 교통(perception)을 가졌던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주님을 직관적으로 알던 인간 유형’을 의미하고, ‘하와’는 그 사랑에서 나온 생명의 감수성 전체를 뜻합니다. ‘에덴동산’ 역시 실제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질서와 조화가 완전히 자리 잡은 상태를 상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혈연적 자손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후손이란 ‘같은 영적 상태를 계승한 인간들의 연속’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 안에서의 세대교체는 ‘부모에서 자식으로의 유전자 전달’이 아니라, ‘사랑 중심의 지각 상태가 점차 약화되며 다른 상태로 이행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1–3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역사적 연표나 사건 기록이 의도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제 질문의 핵심인 ‘태고교회의 기간은 얼마나 되었는가’라는 문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에 대해 단 한 번도 구체적인 연대나 숫자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는 정보 부족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 의도에 따른 침묵입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가 아니라 ‘어떤 상태였는가’에 있으며, 태고교회는 인간이 사랑과 지각(perception)을 통해 주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느끼고 살았던 시기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현대 지질학에서 말하는 지구의 나이, 곧 약 45, 6억 년이라는 시간 개념은 물질세계의 형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반면 태고교회는 ‘인간 의식과 영적 수용성의 역사’에 속합니다. 이 둘은 같은 우주 안에 존재하지만, 동일한 잣대로 측정될 수는 없습니다. 지질학적 시간은 암석과 층위로 측정되지만, 영적 역사는 상태와 질서의 변화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관점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지질학적 시간 위에 영적 역사가 ‘겹쳐진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물질적으로 충분히 안정된 환경 속에서 인간이 인간다운 의식과 내면을 갖추게 되었고, 그 시점 이후에 태고교회라 불리는 영적 상태가 시작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때 태고교회의 지속 기간은 수백 년이나 수천 년 단위로 제한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합리적으로 말하자면, 태고교회는 매우 장구한 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되고, 또 극히 느린 속도로 쇠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 감각으로 환산한다면, 그것은 수만 년이 아니라 수십만 년, 혹은 수백만 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수치를 제시하는 순간 독자가 본질에서 벗어날 것을 알았기에, 그 길을 의도적으로 차단합니다.

 

중요한 것은 태고교회의 종말 역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상태의 붕괴’라는 점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도덕적 사고가 아니라, 사랑보다 지식을 앞세우려는 인간 의식의 방향 전환을 상징합니다. 이 전환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지각이 흐려지고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태고교회가 끝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실제 역사’란 전쟁이나 왕조 교체, 기술 발전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사랑 중심의 직접 지각’이 ‘외적 인식과 신앙 중심의 삶’으로 이동해 가는 영적 역사입니다. 이 역사 안에서 말하는 ‘후손과 후손 간의 관계’는, 서로 다른 인간 유형과 의식 단계가 이어지는 연속성을 뜻합니다.

 

정리하자면, 태고교회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 45, 6억 년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긴 물질적 역사 위에 피어난 가장 초기의 영적 의식의 꽃과 같습니다. 그것은 특정 연대에 묶일 수 없는, 인류 전체의 ‘가장 깊었던 시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 숫자를 남기지 않고, 오직 상태와 질서, 그리고 그 상실의 의미만을 남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태고교회는 언제 존재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처음으로 주님과 하나의 마음으로 살았던 상태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입니다.

 

 

 

7. 창4 가인 계열도 태고교회인지? 아니면 창5부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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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베덴보리 저, 'Arcana Coelestia' 소개

본 글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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