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다음 달 초 둘째를 볼 큰애가 아이 이름 관련, 조언을 구하는 가운데 나눈 글입니다.

 

초태생’(初胎生, firstborn), ‘처음 난 자’ 등에 대해 찾아보니,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1, 2)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구나.

 

여기서 잠시 어떤 배경 이야기를 좀 해야 하는데... 내가 직접 하기 보다, 원본을 그대로 좀 가져와 보마.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the man and Eve his wife)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태고 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그 첫 자식, 처음 난 자녀는 신앙(信仰, faith)인데, 여기 ‘가인(Cain)이 바로 이 신앙을 말합니다. 그녀의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는 ‘가인’이라는 사람들로 인해 신앙이라는 게 독립된 어떤 걸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그들, 곧 인류 첫 교회인 태고 교회지요, 이 아담이라고 하는 교회는 신앙이 무엇인지에 관해 마치 무지한 듯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앙의 모든 것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 특별히 학습하지 않아도 마치 천국 천사들처럼 주님으로 말미암아 직관하는 영적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이런 완전한 모(母) 교회로부터 나오기 시작한 자식 교회들의 경우, 사랑과 신앙이 한 몸이었던 모 교회로부터, 즉 모 교회의 교리로부터 굳이 신앙의 교리를 따로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퍼셉션으로 그냥 알던 것들을 굳이 가져다가 따로 교리화하였고,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들이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해서 전에는 그냥 심비(心碑)에 새겨지던 것들이 이제는 배워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두 번째 자녀는 ‘아벨(Abel), ‘아우(brother)로 상징된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입니다. ‘양 치는 자(a 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라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농사하는 자(a 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 없는, 사랑과 분리된 신앙, 이런 건 전혀 신앙이 아닌데, 이런 절름발이 신앙, 거짓, 가짜 신앙에 있어서는 또 아주 제대로일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교회의 두 번째 자녀가 체어리티인 것은,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 말고는 잉태하고 해산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등... 인용은 이 정도만 하마.

 

이 정도로도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또는 교회, 교리)의 신앙이 어떤 건지, ‘아벨’이라 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어떤 건지와, 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를 살짝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이 두 신앙의 역사이지 싶구나. 주님은 이 둘의 하나 됨, 한 몸 됨을 정말 원하셨고, 그래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까지 하셨는데...

 

다음 말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출13:2)

 

에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Sanctify to Me all the firstborn)는 말씀은, 신앙,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을 뜻한다고 한다.

 

주님은 태고 교회의 후손들을 통해 잃으신 참 신앙을 되찾고 싶으셨던 것 같다.

 

열린다 성경’ 저자 류모세 선교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일부로 전체를 대신한다’는 게 있댄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초실절’이라고... 아마 십일조 정신을 이렇게 연결해도 되지 싶다. 원래는, 즉 십일조의 기원은 리메인스이지만...

 

두루두루 아이의 이름을 이런 말씀 가운데서 찾게 하심의 증거를 주심이 기쁘구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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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D1)-주일예배(2548, 눅19,45-48),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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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16(D1)-주일예배(2548, 눅19,45-48),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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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눅19:45-48)

 

 

기도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는 기도에는 그것이 유익한 것일지 어떨지 하는 것은 주님만이 아신다는 생각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들어주실지 말지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겟세마네의 가장 가혹한 시험 중에 말씀하신 대로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시길 기도해야 한다. (AC.8179, 이순철 역) ...prayer is not to be relied upon. For in prayer from the Divine it is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the Lord alone knows whether it is profitable or not; and therefore the suppliant submits the hearing to the Lord, and immediately after prays that the will of the Lord, and not his own, may be d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His own most grievous temptation at Gethsemane (Matt. 26:39, 42, 44).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4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26:39, 42, 44)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주님과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도중,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묶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보니 정말 나귀 새끼가 묶여 있어 그것을 풀어 끌고 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깐 다음, 주님을 거기 태워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옵니다. 여기까지가 앞 절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과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영적으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에 의해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감람산 맞은편 마을은 믿음, 그러니까 신앙(faith)만 중시하고,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가벼이 여기는, 이른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감람산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나타내고, 맞은편은 반대를 뜻하구요, 마을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거기 매여있는 나귀 새끼는 외적 교회의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매여있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에 매여 내적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셋째,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왔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새 교회를 통해 비로소 말씀의 내적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의 사람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넷째, 제자들이 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고 주님을 태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 교회의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그것을 통해 깨우친 내적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또한 이웃을 섬기는 걸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옷은 새 교회 사람들이 이해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 절에서 살핀 본문은 교회의 마지막 때, 참된 진리가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진 외적인 교회로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진 내적인 교회, 즉 새 교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설교 원본에 있는 ‘믿음’과 ‘인애’(仁愛)를 저는 가급적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로 수정하여 쓰고 있습니다. ‘믿음’은 개신교적 표현, ‘오직 믿음’이나 ‘믿습니다! 아멘!’ 같을 때만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인애’의 경우, 왠지 ‘체어리티’의 더욱 풍성한 뉘앙스를 많이 놓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새 교회 교인이라고 처음부터 내적인 신앙을 가지는 건 아닙니다. 그분들 역시 새 교회로 오기 전에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진리의 전부라고 믿었고, 또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의 교리만이 진정한 신앙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밝혀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새 교회로 오기 전 그들의 신앙이 감람산 맞은편 마을에 묶여 있어 아직 아무도 태운 적이 없는 나귀 새끼와도 같은 신앙이라면, 새 교회로 온 후의 신앙은 그 매인 상태에서 풀려난 나귀 새끼가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힘차게 가는 것과도 같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도착,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그곳에는 장사하는 자들이 가득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냥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마태복음 21장 12절에는 돈을 바꿔주는 자들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 성전에 가득히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21:12)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는 영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인 선과 진리를 가지고 사적인 욕심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이를테면 돈을 바꿔주는 자는 진리를 가지고 사욕을 채우는 자이고, 비둘기를 파는 자는 선을 가지고 욕심을 채우는 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목회자가 교인들의 구원에는 뜻이 없고, 높은 지위나 재물을 모으는 데만 관심이 있다면 그는 장사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중에 그 목적이 사적 이득이나 명예를 얻는 데 있다면 그런 사람도 영적으로는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새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본인 신앙의 순수함에 따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 다음은 어떻게 이렇게 성전 안에 장사하는 자들이 득실댈 수 있었을까 하는 그 배경 이야기입니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이 상점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양,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안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성전 이야기)

 

※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 표현, 그리고 위 이야기에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이런 좀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은,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본래 한 명이어야 하니까요, 당시 극도로 부패,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암시하는 표현들입니다.

 

※ 헤롯 성전은 원래의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확장한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성전 시대로 나누는데요, 먼저 솔로몬 성전 건축부터 멸망까지를 1차 성전 시대(BC.960-586)라 하고, 스룹바벨 성전 건축부터 AD 70년, 헤롯 성전 함락까지를 2차 성전 시대(BC.515-AD.70)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45절과 46절에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모욕하고 폭행할 때도 묵묵히 참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자들이 성전을 점령한 것을 보시고 참지 못하고 무섭게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지 혈기를 누르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리에 의해 교회가 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섭니다. 진리는 자체로 악과 거짓을 흩어버리는 힘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꼭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325번 글은 ‘예배의 첫째는 체어리티의 삶이고, 둘째는 기도다’라고 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일이며, 또 죄를 이길 힘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고, 체어리티의 삶이 없으면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예배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성전에는 기도와 체어리티의 예배는 없고, 오로지 장사하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신 것입니다.

 

본문 47절에는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후의 성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신앙인들의 내면에 있는 교회 안에는 진리를 방해하거나 파괴하려는 여러 종류의 도둑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지옥으로부터 자아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악한 욕망과 거짓된 망상들입니다.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일시적으로 쫓겨났다가도 경계가 느슨해지면 다시 들어와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주님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악과 거짓들입니다. 제사장은 본래 사랑과 선을 표상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욕망을 뜻하고, 서기관은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된 망상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통해 쉬지 않고 주님과 대화하면서 그런 악과 거짓들의 훼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표현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48절에는,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백성의 영어식 표현은 people인데, people의 속뜻은 진리, 또는 진리에서 비롯한 애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백성이 주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새 교회 사람들의 진리의 애정이 주님을 향하여 열려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께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복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악하고 거짓된 영들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죽이려 꾀하나 방도를 찾지 못한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많이 발전해서 그것만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계속해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앙인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스마트폰 속에 있는 세상의 일에 집착하다 보면 말씀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러한 것들이 진리에 대한 애정을 빼앗아 갑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의 크기에 따라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영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하고 죽은 듯 잠잠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이 크고 순수한 만큼 우리의 겉 사람은 합리성과 가까워지고 합리성을 통해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합리성’이라는 것은 영어로는 rational이라 하며, 우리의 겉 사람과 속 사람 간 가교 역할, 다리 역할을 하는 기능입니다. 쉬운 말로는 ‘이성’(理性, reason)으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어떤 사안, 어떤 진리에 대한 설명이 낯설지만, 그러나 매우 합리적일 때, 우리는 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 수용하게 되는 걸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음은 이에 대한 보다 깊은 설명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주님이 거처하시는 곳, 즉 속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고, 가장 바깥쪽에는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는 합리적 사람, 또는 합리성이라는 마음이 있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서로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합리성과 겉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주님은 합리성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 속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을 몰아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겉 사람은 합리성과 만나 서로 결합할 수 있을까요? ‘천국의 비밀’ 3030:2번 글에 의하면,

 

합리성의 근본은 선이지만 그것이 겉으로 나올 때는 진리이다. 선은 내적인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지만, 진리는 외적 경로를 통해 유입된다. 선과 진리는 그렇게 합리성 안에서 하나로 결합한다. (AC.3030:2, 이순철 역) The genuine rational is from good, but comes forth [existit] from truth. Good flows in by an internal way; but truth by an external way. Good thus conjoins itself with truth in the rational,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합리성이라는 의식은 선과 진리로 형성되는데, 합리성을 이루는 선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것과 결합할 진리는 겉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합리성을 형성하는 진리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외적인 경로를 통해 흘러들어옵니다. 즉 겉 사람 안에는 기억이라고 하는 지식의 창고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겁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는 세상의 지식이나 말씀으로부터 얻은 지식 등 수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외적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는 진리란 이를테면 그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단지 세상적인 흥미나 명예를 위해 그런 지식을 습득한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아닙니다. 지식을 추구하되 주님과 이웃을 섬길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입니다. 그 애정이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을 소환해 합리성의 선과 결합하도록 만듭니다. 그때 비로소 영적인 합리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영적 합리성은 세상의 합리성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합리성을 통해 진리를 파괴하려는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합리성의 선은 오염된 진리와는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진리가 주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와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도록 항상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21:16)

 

아멘

 

 

 

 

2022-05-1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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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D1)-주일예배(2547, 눅19,37-44),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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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19:37-44)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표상(representatives)과 표의(significatives)로서 존재하셨다. 그것은 주님 스스로 천국과 교회에 속한 최초의 것이면서 동시에 마지막의 것이 되기 위해서였으며, 그렇게 해서 최초의 것으로부터 마지막의 것들을 다스리고, 또한 그것들을 (쓸모에 따라) 배치시키기 위함이었다. (계시록해설 405:24, 이순철 역) The Lord when in the world was in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in order that He might be in the ultimates of heaven and the church, and at the same time in their firsts, and thus might rule and dispose ultimates from firsts, and thus all intermediates from firsts through ultimates;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are in ultimates. (AE.405d:24)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맞은편 마을에 있는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신 일과 제자들이 나귀의 등에 옷을 깔아 그 위에 주님을 모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에 이어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본문 37절과 3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찬송했다고 합니다. 여기, 주님이 하신 일이란, 첫째,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열어주신 일입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주님의 제자들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푸는 것’으로 묘사했지요. ‘나귀 새끼’의 속뜻은 내적 의미가 숨겨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신 두 번째 일은, 새 교회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섬기고, 나아가서는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의 속뜻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하고, ‘나귀 새끼’는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리고 ‘제자들의 옷’은 그보다 높은 영적 진리인 이웃 사랑의 진리를, 끝으로 ‘그 위에 앉으신 주님’은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진리, 즉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진리를 뜻합니다.

 

마지막 때 새 교회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 같은 일들은 주님께서 당신의 신적 선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의 이름’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을 뜻하는데, 매일 같이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이웃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로 눈이 열려 말씀의 문자 안에 감춰진 내적 진리를 볼 수 있게 되고, 그 진리의 힘으로 나보다 이웃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제자들이 예수를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찬양하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회의 지식인들이었지만 속뜻으로는 외적인 교회 안에 있는 위선자를 뜻합니다. 그들을 위선자라 하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신앙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수없이 보면서도 끝내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며 예수를 찬송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신성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주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선생’은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을 선생으로 부른 것은 주님이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걸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주님을 인정하면 그만큼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이런 설명도 있는데요, 당시 유대가 처한 정치적 상황으로 본 설명입니다.

 

당시 유대 전체는 로마 식민지요, 또 그 가운데 예루살렘은 대왕 헤롯의 세 아들 중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으로 있던 곳으로, 로마는 그 당시 지중해 연안 거의 모든 문명 세계를 정복하였으나 정복지의 거의 모든 문화, 종교를 존중,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자치를 허락했다. 그러나 로마가 파송, 혹은 세운 속주의 장들이 그 재임 중 한 번이라도 자기가 맡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대로 직위해제 되는 원칙이 있어, 특히 반란이 잦은 유대 땅은 분봉왕들이나 로마 총독이나 늘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이때가 마침 유월절 시즌으로 당시 전 세계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이 몰려드는 기간이어서 더더욱 정치적으로 민감한 분위기였다. 특히 안티파스의 경우, 즉위하던 해 바로 반란이 터져 큰 문제가 되었으나, 로마에서는 즉위하던 원년에 일어난 일임을 감안, 한번은 봐주기로 하였던 터라 이 기간 그는 더더욱 전전긍긍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온 무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며 무리 지어 다니고 있으니... 그래서 특히 이런 정치적 상황에 훤했던 바리새인들이 아연실색하며 주님께 그런 조언을 한 것이라는...

 

그럴듯하지요? 우리가 말씀을 영적으로 풀 때, 사람들은 이렇게도 풀고, 오히려 이런 풀이가 더 그럴듯하게 와닿으며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사실에, 혹시 사람들의 호응과 반응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는 설교자, 목회자라면 설교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신, 구약성경을 저런 식으로 풀어 시리즈로 낸 저 저자는 저런 관점의 책들로 많이 유명해졌고,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 초청 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의 이 지상 배경 및 당시 정치, 경제 등 국제 정세, 그리고 등장인물과 장소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적 존재이며, 천국은 내적 상태의 나라라 말씀도 그 안에 담긴 속뜻, 즉 아르카나(arcana, 秘義, 주님이 말씀에 불어넣으신 천국의 비밀)만 보인다고 합니다. 하여... 주님을 가르치며, 천국에 대한 올바른 소개와 인도의 책임이 있는 설교자, 목회자로서 저는 무슨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의 길을 걸을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몸 안에 머물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에, 무조건 영적이고 내적이기만 하는 건 무리가 있지요. 말씀을 속뜻으로 풀되 필요하면, 저런 설명도 곁들이는 균형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다만 제 역량이 많이 부족하여 그런 설교 준비에 많이 미흡한 게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자, 그럼 계속해서, 주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돌들’은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새 교회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새 교회가 참된 진리에 대해 증거하지 못한다면 진리 스스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진리는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천국과 교회에 대해, 그리고 거듭남과 시험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당시 정황상 바리새인들의 저런 조언과 충고도 나름 일리 있어 보임에도 불구, 주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 말씀하십니다. 저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저런 상황에서 나는 과연 저럴 수 있을까 고민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붙들어 주심을 간구합니다.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말씀에서 ‘(, city)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지만 여기 ‘예루살렘 성’은 타락한 유대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성을 보고 우셨을까요? 교회 안에 신앙과 사랑이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황폐해지는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시는 것’은 무너져 가는 교회에 대한 연민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성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이 오시기 직전 천국에는 고요함이나 평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지옥의 세력이 팽창해 천국과 지옥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평화가 없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지상의 교회에도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평화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교회가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더 이상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억류된 것처럼 영적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인류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시고, 그 능력으로 천국과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이 팽창해 천국의 일부를 오염시킬 때도 그냥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도 지옥을 당신의 발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영계에서 지옥의 세력이 커진 것은 지상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대신해 인간의 몸을 입고 지옥과 싸워 이겨 그 능력으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를 다스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 많은 개신교인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 그런 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면서 마뜩잖아합니다. 이런 태도가 시작되면 바로 마음의 창, 내면이 닫혀 천국의 입류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게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뭔가 반감이 시작될 때, 객관적으로 그 내용이 주님께 해가 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그 평가는 주님께 맡기시고 쿨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반응하듯 말이지요.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런 태도가 안전한 태도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높이 앉아 인간에게만 지옥을 이기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 즉 인성을 입으시고, 직접 지옥과 싸워 이기심으로써 거듭나는 모든 이들의 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혹독한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 시험의 난이도는 사랑의 대상 수에 비례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할 때와 두 사람을 사랑할 때, 가족 전체, 직장 전체, 교회 전체 등등, 그러니 인류 전체를 품고 사랑하고자 하시는 주님을 대적하고자 지옥 전체가 달려드니 그 난이도, 그 지독, 그 혹독함이 어땠겠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것만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그런 시험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영계와 지상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때 하늘과 땅의 주님의 나라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지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선과 진리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가 완벽하게 다스려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바리새인처럼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으로 표상되는 유대교회와 모든 타락한 교회들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시며, 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 교회를 통해 참된 진리를 끊임없이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적어 희귀할 정도입니다. 몰라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진리인 줄 알면서도 세속의 입장과 지위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그들의 교회는 진리가 주는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그릇된 교회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토둔(土屯, 고대 전쟁 시 함락하고자 하는 성 높이만큼 흙을 쌓아 공격하는 공성법 중 하나)을 쌓는다고 했는데, 원문에는 성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벽’은 보통 교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타락한 교회들의 그릇된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와 네 자식’은 유대교회 같은 외적인 교회의 모든 것들, 즉 아름다운 예배당과 경건한 의식 등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땅에 메어쳐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들 교회에 진정한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심판의 날이 올 줄 몰랐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유대교회는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이교도들, 그러니까 로마에 의해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고, 예배의 표상이었던 희생 제사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또한 교회에 속한 사람들, 곧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에서 살지 못하고 온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려진 심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인 제자들과 끝까지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열어주신 내적 진리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심판 날에 영원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주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래 그랬습니다. 애굽에 살 때부터 여호와의 기적을 많이 봤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후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과 애굽의 기병들이 홍해의 깊은 바닷속에 잠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광야로 나와서는 매일 같이 주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고, 그들 앞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은 모세가 잠시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노래하고 춤을 췄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마음속에 다른 신을 품는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은 항상 우리를 유혹하여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우상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매일 버려야 하겠습니다. 뜻대로 잘 안될 때는 주님께 고하고,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버릴 때 시험이 점점 줄어들고, 시험이 오더라도 수월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로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

 

아멘

 

 

2022-05-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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