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8(D1)-주일예배(2554, 눅21,1-4), '과부의 두 렙돈 헌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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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7-28(D1)-주일예배(2554, 눅21,1-4), '과부의 두 렙돈 헌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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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0iBCab2Z-U

 

과부의 두 렙돈 헌금

 

1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눅21:1-4)

 

인애는 자체로 사람의 지위나 기부액에 따라 평가되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애정으로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돈을 기부하는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 동전 한 잎을 기부하는 비천한 사람의 인애가 더 큰 것일 수 있다. (참된기독교 459:9)

 

※ 오늘부터 누가복음 21장입니다. 총 다섯 편의 설교가 준비되어 있으니 기존 설교 원고들도 계속 가까이하시며, 함께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 오늘 본문은 특별히 성서 시대 이스라엘 화폐 단위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하)’(2010)에 나오는 ‘화폐 단위’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화폐 단위가 복잡한 것은, 1세기 당시 이스라엘에서 세 가지 화폐 단위가 모두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에 편입되면서 제국의 공식 화폐인 로마 화폐가 사용되었다. 둘째, 로마 제국 이전부터 사용되던 헬라 화폐도 통용되었다. 셋째, 이방인들의 화폐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자체의 화폐도 통용되었다.

 

금과 은으로 만든 동전보다 작은 단위의 동전은 구리 동전이었다. 로마의 구리 동전은 앗사리온(assarion)과 콰드란스(quadrans)가 있었다. 4과드란스는 1앗사리온으로, 당시 하루치 품삯인 1데나리온(denarius)은 16앗사리온이었다. 이를 기초로 대략적인 가치를 환산해 보면,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2010년 기준, 대략 5만 원이라고 할 때, 1앗사리온은 3,125원, 1콰드란스는 781원에 해당한다. 헬라의 구리 동전은 렙돈(lepton)으로 2렙돈은 1콰드란스였다. 이것을 기초로 과부가 성전의 연보궤에 넣은 두 렙돈, 즉 1고드란트(콰드란스)는 1,000원도 안 되는 적은 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로마의 은 동전인 데나리온과 헬라의 은 동전인 드라크마는 거의 같은 화폐 가치를 가졌다. 시장에서 값을 지불할 때는 두 개의 은 동전이 같았지만,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납부할 때는 1드라크마가 4분의 3데나리온에 해당했다. 납세를 위해서는 제국 내의 공식 화폐인 데나리온에 비해 헬라 화폐인 드라크마가 25퍼센트 할인된 가격에 거래된 것이다. 데나리온과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로마와 헬라의 동전과는 별도로 이스라엘은 ‘셰켈’(Shekel, 성경에는 ‘세겔’로 나옴)로 불리는 자체적인 동전이 있었다. 세겔은 일반 세겔과 성전세 납부에 사용하는 특수 세겔이 있었다. 특수 세겔은 두로(Tyre, 지금의 레바논에 있는 도시)에서 주조했기 때문에, ‘두로 세겔’로도 불렸다. 일반 세겔은 2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고, 두로 세겔은 4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다.

 

※ 다음은 ‘연보궤’ 관련, 배경지식입니다. ‘열린다 성경, 성전’ 인용입니다.

 

성전 안 여인의 뜰 주변을 따라 3면의 벽에는 13개의 연보궤(헌금함)가 있었다. 각각의 연보궤는 유대인의 신년인 나팔절 때 부는 양각(숫양의 뿔) 나팔처럼 돈을 넣는 입구는 좁고, 밑바닥은 넓었다. 이는 연보궤에 손을 넣어 헌금을 훔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예수님은 헌금과 구제를 하고 나서 ‘나팔을 불지 말라’는 독특한 표현을 하셨는데, 이는 여인의 뜰에 있는 연보궤의 모양에서 나온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2)

 

13개의 연보궤는 각각 용도가 달랐고, 그 용도는 연보궤에 새겨져 있었다. 이 중 1, 2번 연보궤에는 성전에 바치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넣었다. 3, 4번의 연보궤에는 번제와 속죄제로 비둘기를 바치는 여인들이 그에 상당하는 돈을 넣었다. 첫 아들인 예수를 낳은 마리아도 성전을 찾아 초태생을 위한 속죄제로 비둘기값을 이곳에 넣었을 것이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눅2:22-24)

 

연보궤 5번에는 제단에서 사용되는 목재, 6번에는 분향단의 향, 7번에는 성전에서 사용되는 금잔, 8번에는 남자의 속죄제, 9번에는 속건제, 10번에는 비둘기, 11번에는 나실인 서원, 12번에는 나병환자의 치유, 13번에는 기타 자원 헌금과 관련된 헌금을 넣었다.

 

13개의 연보궤 외에 ‘은밀한 방’(Silence Chamber)으로 불리는 특별한 공간이 있었다. 이곳은 가난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 헌금을 내는 곳이었다. 경건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비밀리에 헌금을 하곤 했다. 과부의 두 렙돈은 아마 이곳에서 은밀하게 드려졌을 것이고, 부자들은 바깥에 있는 나팔 모양의 연보궤에 위풍당당하게 헌금을 넣으며, 힘차게 나팔을 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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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설명으로, 오늘 본문의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이라는 돈은 2010년 기준, 1,000원도 안 되는 금액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2024년도 시급 9,860원으로 계산하니 1,230원 정도 나오는군요.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가리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부자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당장 끼니를 걸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를 말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지켜보신 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과부처럼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 의미로 과부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논리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선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의 관계는 열차의 목적지와 궤도와 같아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열차가 궤도를 벗어나면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는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과부의 정확한 의미는 진리에 대한 애정은 있는데 아직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있기 전의 선은 선이라기보다는 진리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과부가 진리에 대한 애정만 있고 진리가 없는 사람이라면, 부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말씀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부자도 여러 종류의 부자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이용해 재물과 명예를 얻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조작, 거짓 교리를 만들고, 그것으로 교인들을 세뇌, 조금 남아있는 진리마저 빼앗아 버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태복음 19장, 주님을 찾아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며 영생에 대해 여쭙는 청년과 같은 부자도 있습니다. 그는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나 다른 사람처럼 문자적인 의미에 머물지 않고, 내적 진리에 가까이 가길 원하는 사람이었는데요, 그것은 그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하시는 주님의 대답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주님께 되묻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여기서 ‘네 소유’는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말씀의 문자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청년은 자신이 노력해 얻은 말씀의 문자적인 지식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내적 진리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니 내적 진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는 소유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할 때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화란 어떤 것입니까?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깨달음을 뜻합니다. 주님은 청년에게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그동안 삶 가운데 허용했던 자아의 악을 멀리하고, 이제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자아로부터 오는 여러 종류의 악들이 있는데요, 그걸 계속 허용하면 언제까지나 자아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적으로 말씀에 접근하는 사람 중에는 말씀의 규범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아의 악들 가운데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 보면 죄가 아닌 것 같은데 내적으로는 죄악인 것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악들을 멀리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갔다고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주님의 말씀에 순진하게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이 부자 청년에게 하셨듯 주님이 과부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신다면 그녀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와 관련해 열왕기상 17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5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8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왕상17:5-16)

 

이 본문은 아합왕 때 여러 해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기근이 들었던, 그래서 참 절박하고 비참한 그런 상황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는 과부의 대답을 보면 말이지요. 이 말을 듣고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엘리야의 말을 들은 과부는 어떻게 하나요?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엘리야를 떠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은 과부의 순종과 그 순종의 결과입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은 교회 안에 진리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때 엘리야가 사르밧의 과부에게 가서 거기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이방인의 과부, 즉 진리를 갈구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는 진정한 진리를 원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부가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바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자아의 생각보다 말씀의 진리를 더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할 때 과부의 집에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때 주님으로부터 신앙의 진리와 인애, 체어리티의 선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해 ‘참된 기독교’ 459번 글 9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애는 자체로 사람의 지위나 기부액에 따라 평가되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애정으로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돈을 기부하는,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 동전 한 잎을 기부하는, 비천한 사람의 인애가 더 큰 것일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는 과부를 왜 더 칭찬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의 상태가 아합왕의 시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말씀을 마음대로 왜곡,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를 만든 이후부터 교회에 더 이상 진리의 비가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 새 교회 분들은 기존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리를 언급할 때 좀 극단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황폐해질 때, 주님으로부터 참된 말씀을 받는 사람은 누굴까요?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자부하는 교회의 높은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한편으로는 진리를 배운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부자들일까요? 진리이신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시지 않습니다.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가루와 기름으로 말씀을 따라 떡을 만들어 먼저 선지자에게 드리는 과부와 같은 사람,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오셔서 그들의 단단한 마음을 여시고, 그 속으로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을 넣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어둠에서 일어나 빛을 볼 수 있고, 빛이 이끄는 대로 이전의 악을 끊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생명처럼 사랑하는 세상의 것들이 있습니다. 떨쳐버리려 해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자아의 악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 지를 때, 사르밧 과부처럼 가지고 있는 모든 진리와 사랑을 동원해 그것을 제지하고, 오직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항상 나는 침묵, 오직 주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 안에 신앙의 빛과 열기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서울 새 교회와 대전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 자매에게 영원히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눅21:4)

 

아멘

 

 

2022-08-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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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민수기 6장, 그 유명한 제사장 기도입니다.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아래는 위 본문에 대한 속뜻 주석 원문입니다.

 

...Jehovah bless thee and keep thee;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gracious unto thee; and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4-26). Divine truth, from which is all intelligence and wisdom, with which the Lord flows in, is meant by "Jehovah makes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protection thereby from falsities is meant by "be gracious unto thee;" and the Divine good, from which is all love and charity, with which the Lord flows in, is meant by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protection thereby from evils, and thence heaven and eternal happiness, are meant by "give thee peace;" for when evils and falsities are removed and no longer infest, the Lord flows in with peace, in which and from which is heaven and the delight that fills with bliss the interiors of the mind, thus heavenly joy...(AC.10137:12)

 

본문만 번역하자면...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는 신적 진리(Divine truth)를 의미하는데, 모든 지성과 지혜가 이 신적 진리에서 나오며, 주님의 흘러들어오심 역시 이 신적 진리를 동반하시는, 그런 진리를,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거짓들로부터 보호하심을,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는 신적 선(Divine good)을 의미하는데, 모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가 이 신적 선에서 나오며, 주님의 흘러들어오심 역시 이 신적 선을 동반하시는, 그런 선을,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악들로부터 보호하심을, 그리고 천국과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는 주님의 신성이신 신적 선과 신적 진리에 대한 말씀이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다른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구하며, 이것으로 복을 빌라시는 말씀입니다.

 

즉, ‘’이란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주님의 신성이 갖추어지면, 자연히 천국하고도 통하게 되어 천국의 모든 복이 우리 삶 가운데 흘러들어온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모든 걸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환경부터 먼저 갖추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속 사람이 있고, 겉 사람이 있듯, ‘’ 역시 내적(內的, internal)인 복이 있고, 외적(외적, external)인 복이 있는데요, 모든 것이 그렇듯 영적인 것은 반드시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모든 것은 반드시 자연계의 것으로 도착,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즉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그 역순은 없으며, 속, 즉 내면의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도, 겉, 즉 자연적, 물질적 복을 받는다면... 그건 정상, 그러니까 주님의 질서가 아니며, 그렇다면 뭔가 위험한 것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즉 그런 건 구하거나 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시 로또를 하십니까? 로또 자체가 선인지 악인지 여부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는 바울의 권면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이런 질문, 곧 천사들이 로또를 할까?라는 질문 말이지요. 천사들은 모든 것, 곧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과 무엇보다도 천국 지성과 지혜, 지식을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습니다. 거저 받되 천사 저마다의 역량이 감당할 수 있는 최상, 최고 수준의 것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그것들의 쓰임새, 그러니까 주님이 나에게 이것을 왜 허락하셨을까? 이것의 쓰임새가 뭘까?에만 집중합니다. 그들이 먼저 주님의 일을 구했더니 나머지를 모두 주님이 공급하시는 것이지요. 다음 말씀처럼 말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혹시 로또를 했다고 해서, 또는 지금도 하고 있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또 너무 뻔뻔하셔도 안 되겠지요 ㅎㅎㅎ 정말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자기가 로또를 했다는, 혹은 하고 있다는 사실에 양심에 가책이 있으실 겁니다. 뭔가 찝찝하고 개운치 않은 게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며, 쉽지 않겠지만 로또에서 그만 손을 떼세요. 주님을 사랑하지만, 현실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주의 자녀들, 오죽했으면 로또에 손을 댔을까요? 이런 분들에게 로또의 쓰임새는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이런 한 발 물러남이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위 약속,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를 지키십니다. 즉, 지켜지는 것입니다.

 

위 민수기 6장 ‘제사장 기도’는 주님의 신성을 구하는 기도, 주님의 신적 성품을 구하는 자에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천국은 상태의 나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하신 주님 말씀으로 분명하며, 그러니까 나의 내면 상태가 천국이어야 실제로 천국이 내 안에 흘러들어올 수 있다는, 즉 하늘의 복이 내게, 내 삶 가운데 임할 수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상태 유지가 중요합니다. 내 영의 상태, 내 속 사람의 상태, 나의 내면 상태를 늘 천국에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만이 천국 금고를 여는 오직 유일한 열쇠이며, 내 삶이 주님의 쓰임새가 되어 주님 뜻 온전히 수행하는, 참 형통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여기 금고 얘기를 했다고 해서, 그리고 천국의 모든 부요를 얘기했다고 해서 그걸 누리는 게 주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함이 궁극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건 다 이 목적을 뒤따르는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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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의 속뜻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눅20:41-47)

 

주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은 일반적으로는 천국과 교회를 만들고, 개별적으로는 각각의 천사와 사람을 만드는 신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천사 하나하나 안에는 천국이 있고, 사람 하나하나 안에는 교회가 있다. (계시록의 속뜻 256: 2, 이순철 역) Since the Lord is the Word, and the Word is the Divine truth, which in general makes heaven and the church, and in particular each angel, that heaven may be in him, and man that the church may be in him; (AR.256:2)

 

2024-07-21(D1)-주일예배(2553, 눅20,41-47),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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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7-21(D1)-주일예배(2553, 눅20,41-47),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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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다고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사실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에세네파라는 세 개의 파가 있었고,

 

※ 이 외에도 ‘열심당’이라 하는 무장 독립단체도 포함, 보통은 네 개로 나눕니다.

 

그 가운데 백성들로부터 가장 신뢰를 받는 것은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페루쉼’(פָּרָש, 분리하다)에서 비롯한 말로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안티오코스 4세(BC.215-164)의 헬레니즘 동화 운동에 가장 먼저 저항한 유대교 순수주의 세력인 ‘하시딤’(חסידים, 경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이 기간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있었고, 그때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삶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하고자 노력, 그들이 분리된 자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대중들은 그들을 경건주의자라 부르며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그토록 철저히 지켰던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과 사사건건 부딪쳤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겉으로만 율법을 잘 지킬 뿐, 속으로는 사실은 율법에 반대하는 자들, 율법을 우습게 여기고, 단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만 여기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첫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리새인들은 말씀 자체이신 주님과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어느 날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유는 구약의 많은 예언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만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대할 때도 문자적 의미에만 집중, 속에 담긴 내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사실 말씀에 ‘속뜻’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은 이들뿐 아니라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서 거의 그 누구도, 심지어 소위 ‘성인’(聖人)이라 하는 사람들 역시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겉과 속이 노골적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나마 겉과 속이 같아지고자 애쓴 사람들은 그 삶과 인격 가운데 ‘실천’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아에 대해 물으셨을까요?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려 하셨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나 일반 백성처럼 조금 밖에 모르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진리를 가르쳐주려고 애쓰십니다. 그리고 그때 겸손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우침을 얻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42절에서 44절까지 말씀입니다.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시편 110편 1절의 말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여호와’는 신성 자체이신 주님을 뜻하고, ‘내 주’는 신성으로부터 잉태하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당한 시험과 승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발판’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연적인 것들을 뜻하고, ‘원수’는 그 자연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을 공격하는 지옥의 영들을 뜻하며, ‘원수들로 발판이 되게 하는 것’은 시험에서의 승리와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불완전 몸이 신성한 몸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서 이기기 전의 발판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은 불완전한 몸이라면, 시험에서 승리하신 후의 발판은 거룩한 몸, 즉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시편 말씀을 인용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님을 입증하신 것은, 교회의 모든 교리는 말씀의 문자적인 뜻으로부터 이끌어 내 입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바리새인들도 할 말이 있는데요, 왜냐하면 예레미야서에서

 

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23:5, 6)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보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말씀이라고 해서 그 문자적인 의미가 모두 진리는 아니고, 오직 내적 의미와 일치할 때만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다윗은 인간 다윗이 아니라 신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한 것은,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를 통해 주님께서 가르치려 하셨던 진실은, 첫째는 그리스도는 신적 선이신 여호와로부터 태어난 신적 진리시라는 사실, 둘째는 말씀의 진리는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안 되고, 내적 의미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듭니다. 왜 주님은 그러면 처음부터 말씀을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 기록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 말이죠. 말씀을 그 기록된 신성, 곧 속뜻으로 읽는 천사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내적 존재이기에 말씀도 내적 의미로 바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영과 육으로 되어있어 말씀을 내적 의미로만 기록하면, 아무도 읽을 수도, 그리고 따라서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을 입고 사는 우리가 영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육의 상태로 있는 사람한테는 육의 상태인 겉 글자로 기록된 말씀이 필요한 것이며, 그러므로 참으로 말씀 앞에 겸손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말씀, 곧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이런 소위 난해한 말씀을 만나면, 무슨 잔머리를 굴리며 억지로 푸는 대신, 정직하고 겸손하게 ‘아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슨 주님의 깊으신 뜻이 있으신가 보다’며, 주께서 때가 되면 내게 빛을 비춰 주실 줄 믿고, 한발 물러나 기다리는 태도가 가장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주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45절에는 모든 백성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백성’(people)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고, ‘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진리에 복종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오셔서 진리를 가르쳐주실 때, 겸손한 사람들은 즉시 받아들여 그대로 실천합니다. 반면에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면서 사실은 자신의 지성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위선자들은 주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절 말씀입니다.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긴 옷’은 본래 하나님의 신성한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인간의 진리, 즉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시장’은 말씀의 진리와 선이 유통되는 곳인 교회를 뜻하고, ‘잔치’는 예배를 뜻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을 왜곡해 거짓 진리를 만들거나, 교회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위선자들이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긴 옷’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이 특별하고 소중한 이유는 겉옷의 네 귀에 달린 ‘’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겉옷을 지을 때 술을 달라고 지시하셨는데, 이는 그 술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계명의 아들’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3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민15:37-40)

 

히브리어로 ‘찌찌트’라 불리는 ‘’은 ‘기다란 실’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겉옷의 옷단 귀에 술을 달아 하나님의 계명을 좇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경건성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옷단 술을 이용했다. 술을 길게 늘어뜨림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계명에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순종하고 있음을 보이려 한 것이다. ‘경문’은 기도할 때 이마에 차는 성구함을 가리킨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마23:5)

 

때로는 술을 너무 길게 늘어뜨려 땅에 질질 끌려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밟히는 경우도 있었다. 서기관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바로 이 옷단 술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닌다는 말이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손을 댔다는 예수님의 겉옷은 바로 이 겉옷, 즉 예수님이 쓰신 숄 네 귀퉁이에 달린 ‘옷단 술’을 만진 것이다.

 

참고로, 계속 나오는 이 ‘겉옷’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할 때 자기 머리를 덮는 마름모 형태의 큰 ‘’(히, 탈릿)을 말한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상)’ 여기저기서 인용)

 

 

※ 다음은 위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에 관한 보충 설명입니다.

 

구약 왕정 때부터 존재했고 특별히 바벨론 포로를 거치면서 율법 필사와 율법 연구 및 전승을 담당했으며, 또 회당이나 성전에서 공문서 등을 작성한 전문가 집단이었다. 더욱이 율법을 전수하는 일에 남다른 역할을 했기에 율법사 또는 랍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나 헤롯 정부 내 각종 기관에 속해 일종의 행정 관료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특정한 종교 분파에 속해야 한다는 원칙은 없지만, 통상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약시대 유대교의 분파들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계속해서 주님이 이르시길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과부’는 선한 애정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진리 배우기를 원하지만, 참된 진리를 찾지 못해 애태우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 과부인 것입니다. 또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위선자들이 경건한 척 자신을 꾸미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 당시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 바리새인과 같은 거짓된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왜곡하고, 그것을 가지고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끕니다. 바로 그런 것이 교회 안의 위선자들이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은 주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즉 영원 전부터 계신 주님이 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불완전한 인간을 극복하고 여호와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인간이 되셨는지, 또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에게 다가가 거듭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며, 또한 진리를 갈망하는 이웃들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의 바리새인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만 매달려 내적인 것을 볼 수 없었고, 그리하여 주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 앞에 목이 곧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마땅히 주님과 이웃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의 내적 의미에 다가갈 수 있으며,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인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마음속에서 바리새인을 몰아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와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와, 그리고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52:7)

 

아멘

 

2022-07-3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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